1871년 영해동학농민항쟁 '이필제의 난'
갑오동학농민혁명보다 20여년이나 앞선 1871년 음력 3월 10일
600여 명의 동학교인과 농민들이 영해부관아를 점령하고 부사의 목을 친 사건이다.
하지만 반봉건, 반외세의 근대적 가치를 추구했던 이 혁명적인 사건은 조선 후기 수많은 민란 중의 하나로 불리며 현대 교과서에는 '이필제의 난' 단 한 줄로 기록되고 있을 뿐이다.
1871년(고종 8) 이필제(李弼濟, 또는 다른 이름은 이필)가 교조 신원 운동을 전개하여, 영해(寧海 오늘날의 영덕군)에서 이필제의 난을 일으켜 동학에 대한 정부의 탄압이 가중되는 사건이다.
오늘날의 영덕군인 영해성은 강릉, 동해와 함께 조선시대 동해안의 3대 읍성 중 하나였다. 1871년(고종 8) 이 지역 동학교도 수백명이 동학 창시자 수운 최제우의 기일인 3월10일 영해부 관아를 공격해 영해부사 이정을 죽였다.
이 봉기는 동학교도들이 하루 만에 해산하고 이후 주모자들이 모두 처형되면서 끝났지만,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지방관 처형이 있었다는 점과 16개 지역 민중들이 참여했다는 점에서 1894년(갑오년) 동학농민혁명의 전조를 보여준 사건으로 평가된다. 규모로만 보면 민란이나 봉기에 가깝지만 학계에서는 갑오년 혁명에 미친 영향을 감안해 ‘혁명’으로 부른다.
동학교주 최시형이 이때의 실패를 거울 삼아 동학을 보다 체계적인 조직으로 만들고 교세를 확장했고 20년 동안 경전을 만들어 배포하고 동학의 조직을 정비했다는 점에서 이 사건이 없었다면 갑오년 동학혁명은 일어나기 힘들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