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山頂을 오르다 이월 열 엿새의 이른 아침 발길에 푸석거리는 산 길 드세게 밟아본다 내 여기에 오르며 마음을 놓고 있을 때에 오래 전부터 매복을 하였는지 무수히 나를 노려보는 산등성이의 소나무들이 가슴 깃 들쑤시는 실바람에 활시위를 일제히 당기고 있다 과녁은 내 몸속 묵은 겨울. ----------------------------------------------- 2. 산 밭
장수군 번암면 오일 장터를 지나 죽산리라는 길가에 차를 세우고 낮으막한 산비탈을 올라서면 잡초만 무성한 산 밭떼기가 한 여름날 넉넉흐니 웃고 있다 오래 전 억세게 사람들을 키워낸 손길 스친 온기 밭 고랑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저 가파른 비탈밭을 오르내리다 수 없이 미끄러졌을 세상살이를 곧게 일으켜 세워놓고 흙먼지 툴툴 털고 떠나가신 길 되 돌아와 바로 그 자리에다 봉분 하나 안고 햇살 받고 계신다 -----------------------------------------
3. 하동포구
오백리 물길을 흘러 온 강물이 하동 강변의 풀더미를 뒤 흔든다 강 깊숙한 곳의 물고기들이 뒤척이는 소리를 들은 것이다
강으로 뻗친 산자락의 집들을 어둠에 부려놓고 쪽방 나온 불빛들이 강 너머 마을로 마실 가는 소리를 들은 것이다
낮이면 사라져버리는 강 위의 길을 흐르는 강물로 다리를 놓고 세상을 밝히는 불빛들은 섬진강을 밤마다 오가고 있다. ----------------------------------
4. 산골 풍경 한 겨울의 게으른 하루 쪽 볕 몇 줌으로 다랭이 진 산 밭을 후비다 얼어버린 해거름에야 산 오름이 가프다 산에서 빠져 나온 발자국들 바람에 하나 둘 덮여지고 땔감을 몇 단씩 묶어 내던 산골 사람들의 등짝 우로 저문 햇살이 풀어지고 있다 정제간의 아궁이 속 불쏘시개 소삭거리는 소리 들리고 뒤 안의 굴뚝을 빠져 나온 고단한 하루는 더 이상 원할 것 없는 산 동네를 아랫목으로 끌어 당기고 있다. -------------------------------- 5. 백운산 엘레지 일천 고지 백운산 억불봉까지 봄은 너무 멀다 산 중턱 쯤에 올라선 봄을 마냥 기다리기에는 시간이 없다 부풀어져 가눌 수 없는 순간에 더 이상 순정을 말하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