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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자기내면의 경계에 서면, 코나투스가 보인다
1. 인간본질과 종교에 대한 탐구가 그의 소설적 주제였다
니코스 카잔자키스의 소설은 언제나 이 주제를 벗어나지 못했다. ‘인간의 본질은 무엇이며, 종교란 인간의 삶에 어떤 도움을 주는가?’란 물음이었다. 어찌 보면, 이번 『그리스인 조르바』 역시도 그 연장 선상의 소설이었다. 그래서 ‘삶의 기술’에 대하여 말하고자 함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세파에 휘둘리며 生의 진리〔自由〕를 찾아가는 과정을 그리려 했던 것. 극과 극의 기질 차이를 보이는 두 사람의 작중인물을 내세워 인간 내면에 자리한 속물근성과 지성의 가면 뒤에 숨은 비겁함과 쪼잔함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려는 것. 그들에게 주어진 시대적 난항(難航)을 헤쳐 나가는 방식과 삶의 지향점이 달랐던 친구와 헤어지는 장면도 다 타고난 기질을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주려는 것. 젊은 날, 자유의지 하나만으로 삶을 펄펄 날았던 한 인간을 두고 생의 마지막 시간에 그의 소회를 들어보는 것도 카잔자키스다운 소설쓰기 방식이었다(결국, 알렉시스 조르바는 生의 마지막 순간에도 창밖을 보며 큰소리를 치다가 창틀을 붙들고 죽었다). 올해는 니코스가 세상을 떠난 지 61년 되는 해다. 육십갑자를 넘기고 돌아온 지금 그의 영혼은 어디쯤에서 떠돌고 있을까? 오매불망 짊어지고 다니던 그리스는 이제 좀 내려놓으셨는가? 그놈의 자유를 찾긴 했을까? 부디, 하늘나라에선 깊게 영면하시고, 무량한 안식을 누리시길….
이 소설의 큰 틀을 살펴보면, 격동기의 시대를 헤쳐 온 두 인물이 서사의 양대 축을 이끌고 있다. 즉물적 감수성을 지닌 사람으로 인생을 방탕하게 살아온 늙은 광부 조르바와 극 중의 화자이며 도시적 먹물〔知識人〕로 나오는 작가의 직업을 가진 버질이다. 소설을 읽다 보면 저절로 방점이 찍히는 부분이 있다. 나는 이 소설의 클라이맥스에 해당하는, 크레타섬에서 케이블장치가 무너지는 장면이 곧 방점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이 장면에 도달해서야, 작가의 의도를 조금이나마 읽어낼 수 있었다. 소설에서 무엇을 보여주려 함이었던지! 인간의 잔머리로 최적의 기울기를 계산하여 세운 목재운반 케이블장치가 첫 가동시험에서 무참하게 무너지고 만다. 인생에서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계산적으로 잘살아보려고 해도 무방비 사태로 당해낼 수 없는 허탕이 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었다. 천둥벌거숭이로 세상 물정에 따라 인생을 몸뚱이로 익혀온 조르바의 계산이나 버질의 책상머리에서 얻은 알량한 지식과 상식이 깡그리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그것은 재기 불가능한 것은 물론이고 사람까지 다치게 할 벼락같은 힘이었다. 기울기의 변곡점(變曲點)을 잘못짚어, 기계장치에서 가차 없이 떠밀리는 힘의 불균형을 본 것이다. 엉성한 설계도에 의해 물질의 내재 된 힘이 폭발하는 장면을 보며, 나는 뒤통수를 얻어맞는 기분이었다. 작가가 소설에서 그리려고 했던 그림 구도를 그 장면에서 언뜻 보게 된 것이다. 갈탄광산 사업장 축성과 성수예식(聖水禮式. 가톨릭교회에서 정화하거나
축복하기 위하여 사물이나 여러 사람에게 성수를 뿌리는 예식)을 거행하러 왔던 수도원 신부와 수사들이 이 광경을 보고, 서로 먼저 도망치려고 허둥거리는 모습도 가관 중의 하나였다. 그들이 무거운 나무 십자가를 짊어지고 산을 넘어왔던 종교적 믿음은 어디로 갔나? 면목도 대책도 없이 ‘나 살려라’하고 도망치는 그들 행위에서, 종교의례에 대한 허울을 꼬집으려 했던 것 아니었을까. 아하, 작가가 노린 것이 바로 이것이구나! 힘의 균형을 빗대어 ‘삶의 기술’을 말하려 함이었구나. 세상에 존재하는 힘의 균형을 터득하지 못하면 언제든 한방에 무너질 수 있다는 것. 카잔자키스는 예순이 다된 나이에 이 작품을 썼다. 그런 만큼 인생에 달관하였고 ‘삶의 기술’을 꿰뚫었을 나이였다. 작가의 노회한 시선으로 ‘삶의 기술’, 즉 인간의 코나투스(conatus)를 조절하는 방식을 슬쩍 문학적으로 던져 놓았던 것이다. 또 작가 자신의 내밀한 고백을 소설적 형식을 빌려 쏟아놓은 것은 아니었을까?
나는, ‘사람마다 타고난 기품과 성질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래서 그 기질에 따라 말하는 태도며 숨결도 다르고 그에게서 나오는 문장력과 글맛도 제각각임을 인정한다. 아마 번역문장에서도 예외일 수 없을 것이다. 이번에 새로 나올 『그리스인 조르바』 유재원 번역(문학과지성사)가 우리말 번역본으로 13번째 버전이 될 것이다. 1975년 박석기가 번역한 책이 삼성출판사에서 나온 이래 열한 명의 번역가가 번역했고 각기 다른 출판사에서, 또는 개정판과 함께 출판사를 갈아타기도 하면서 여러 종으로 출간되었다. 또 최근에 김욱동 교수의 번역본(민음사)이 추가되었다. 그만큼 인기를 누렸고 팔리는 책에 속했다는 증거였다. 그동안 번역본들은 대부분 불어나 영어본에서 번역되었던 중역본이었던 것이다. 또 불어에서 영어로 다시 한국어로 3중 경로를 거친 버전도 있었다. 가장 최근에 번역된 책은, <한국그리스학연구소> 전 소장이며 언어학자인 유재원 교수가 작년 9월부터 번역에 들어갔고, 올해 8월 말에 번역을 끝냈다. 유재원 교수는 각 장의 번역을 마치는 대로 나에게 메일로 원고를 보내주셨으니, 나는 무려 1년에 걸쳐 번역원고를 읽은 셈이다. 니코스가 초고를 쓴 다음 3년에 걸쳐 퇴고를 거듭했고 첫 출간은 예순셋에 이뤄졌다고 한다. 유재원 교수는 이미 그 연세를 넘어섰다. 그런 노익장께서 그리스어 原典에서 完譯을 하셨으니, 얼마나 풍부한 안목과 여유 있는 시각으로 글을 탐독했고 새김질해서 우리말 문장으로 탄생시켰겠는가? 더구나 크레타의 그 척박한 풍광은 물론 섬사람들의 기질까지도 꿰뚫고 있는, 그리스 사람들보다 더 그리스적인 애정과 취향을 가진 분께서…. 나는 그전에 나왔던 이윤기 번역 『희랍인 조르바 Zorba The Greek』(열린책들)를 읽은 적이 있다. 그리고 1964년에 제작된 영화 안소니 퀸이 출연했던 영화도 보았었다. 그래서 그런지 이 새로운 원고를 읽는 동안 자주 훼방꾼들이 나타났다. 나의 기억 속에 저장된 장면과 대사가 불쑥불쑥 튀어나와 원고를 넘기는 데 방해를 하였다. 특히 안소니 퀸의 걸출했던 연기가, 영상을 펼치듯 선명하게 떠오르기도 했다. 그의 산적 같은 풍모(風貌)와 걸걸한 목소리는 두말할 것도 없고 늙은 암고양이 같던 마담 오르탕스 역의 릴라 케드로바 그리고 덜떨어진 청년이었던 미미토스 역의 소티리스 또 테오도라키스의 그리스풍의 음악 등이 자꾸만 훼방꾼 노릇을 했다. 그 영상들이 무시로 소설 속 문장 속으로 쳐들어와 나의 시야를 흐려놓았다. 내 기억 속에는 알렉시스 조르바의 거친 말투와 산적두목 같은 이미지가 강하게 남아 있었고, 소설 속의 화자인 작가 버질의 기억은 희미했다. 그에 대해서는 생각나는 대사가 거의 없을 정도였다. 한데, 이번 유재원 교수의 완역본을 읽으면서는 새로운 발견을 하게 되었다. 조르바의 거친 입담 뒤에서 지적이고 감각적인 그리고 논리적인 멘트로 뒷받침해주는 화자의 문장들이 또렷하게 보였다. 어떤 면에서는 조르바의 거칠고 오지랖 넓은 발언을 뒤엎어버리는 반전의 묘미도 있었다. 특히 내가 견딜 수 없었던 것은 조르바의 여성비하 발언들이었다. 그 낯선 욕설들 때문에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라 독서 진도가 더뎌지기도 했다. 또 이윤기의 맛깔스러운 문장들로 크레타의 바닷가 풍경이나 밤하늘을 묘사했던 시적 언어들이 떠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한 것은 깔끔하게 편집된 책을 사그락사그락 종이의 질감을 느끼며 책장을 넘기며 읽고 싶다는 간절함이었다. 한컴오피스 버전도 아니고 ‘Microsoft office word’버전에서 프린트한 원고를 읽는 독서의 질은 천양지차를 보였다. 예견컨대, 원고가 깔끔하게 책으로 출간되면 작가가 가진 대승적(大乘的) 세계관이 세밀하게 드러날 것이며 그의 빛나는 명문장들이 새로운 주목을 받게 될 것이다.
2. 번역의 영역 (코나투스의 뿔을 보다)
번역에 대한 논란은 끝이 없을 것이다. 아마도 먼먼 훗날, 세계가 국경선이란 걸 모두 걷어내고 진정한 통합지구촌을 이뤘을(그럴 리도 없겠지만) 때, 그리고 한 언어만을 쓸 수 있는 날이 올 때까지는 계속 논란거리가 남아 있을 영역이다. 오죽하면, ‘번역은 반역이다’, ‘번역은 불가능이다’란 말까지 나오게 되었을까? 그만큼 어렵고 복잡다단한 영역이란 뜻일 게다. 또 어떤 이는 이런 말로 대신하기도 했다. “다른 사람이 씹어 뱉어낸 음식 같은 것이라고.” 원전과 번역 사이에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차이가 있음을 인정하는 말이며 궁극적으로는 완벽한 번역은 불가능하다는 얘기일 것이다. 또 누구는 “번역은 이중주의 영역이다”라고도 했다. 가장 적합한 어휘 하나를 위해, 격렬하게 맞붙고 물러설 수 없는 싸움판 같은 곳이기도 하다는 얘기렷다. 문장이란 것이 생명체와 같아서 들숨과 날숨이 제각각 다르고 숨결이 거칠고 곱고의 차이가 있
는가, 하면 번역자의 어투에 따라 문장의 길이도 만연체와 간결체(단문)로 차이를 보인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음’의 차이를 인정하면서 읽을 수밖에 없다. 한 예를 본문에서 들어보자. 『그리스인 조르바』 마지막 26장에서의 예다. 인간의 ‘정신’ ‘혼’ 또는 ‘이성(理性)’ 또는 ‘지성’ ‘앎’을 유재원은 ‘끈’이라고 번역하였고 이윤기는 그것을 ‘줄’이라고 했다. ‘줄이나 끈’ 이것을 놓아버리거나 잘라내는 방식에 대해서도 한 사람은 ‘무식해야 한다고’ 하였고 또 한 사람은 ‘미쳐야 한다.’라고 번역했다. 그래야 인간이 진정한 ‘자유’를 얻는다고 하였다. 사전에 쓰인 대로라면 ‘줄은 무엇을 묶거나 동이는 데 쓸 목적으로 만든 긴 물건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며’, ‘끈은 물건을 묶거나 꿰는 데에 쓰이는 가늘고 긴 물건’이라고 하였다. 줄과 끈 사이 어휘의 의미를 논하는 것은 제쳐두고라도 어감이 풍기는 맛은 매우 다르다. 이윤기의 ‘줄’은 ‘정신줄’에서 나온 것이거나 불교적 차원에서 질긴 인연(因緣) 즉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의 緣을 말함일 테고, 유재원의 끈은 어쩌면 저 스스로 매었거나, 그동안의 지식이나 앎 정보 등으로 판단력을 동원하여 스스로 걸머지다시피 한 완고해진 ‘이성’에 더 가까운 말일지도 모르겠다. 후천적으로 쌓은 공부가 약삭빠르게 정신을 조정하긴 하지만 막상 맘만 먹으면 당장이라도 툭 끊어낼 수도 있을 것 같은 가느다랗지만 질긴 노끈으로 연상되기도 한다. 그럼, 여기서 두 사람의 대화체 본문을 읽어보자.
“아뇨, 대장! 대장은 자유롭지 않수다. 대장이 매여 있는 끈은 다른 사람들 것보다 조금 더 길기는 하지만 그뿐이요. 대장, 대장은 조금 긴 끈을 갖고 있어 왔다 갔다 하면서 자유롭다고 생각하지만 그 끈을 잘라내지는 못했수다. 만약 그 끈을 잘라내지 못하면….”
“언젠가는 그 끈을 잘라낼 거예요.”
내가 고집스럽게 말했다. 왜냐하면 조르바의 말들이 아직 아물지 않은 내 상처를 건드려 아팠기 때문이다.
“대장, 그건 어렵수다. 아주 어려워요. 그러려면 미쳐야 하는데, 듣고 있수? 미쳐야 한단 말요. 모든 걸 걸어야 해요! 하지만 대장, 당신은 머리가 있어 그게 대장을 갉아 먹고 있죠. 정신이란 식품점 주인 같은 거요. 장부를 팔에 끼고서는 얼마 들어왔고, 얼마 나갔고, 이건 이득이고 저건 손해고, 일일이 기입하죠. 정신은 알뜰한 주부 같아서 모든 걸 포기하지 못해요. 뭔가 하나는 꼭 숨겨놓죠. 정신이라는 놈은 결코 끈을 놓지 않아요. 절대로! 그 악당은 손아귀에 그 끈을 꽉 쥐고 있답니다. 그 끈을 놓치면 그놈은 망하는 거니까요. 불쌍하게도 사라지는 거죠! 하지만 그 끈을 자르지 않으면, 대장, 인생에 뭐가 있겠수? 캐모마일 차, 맛있는 캐모마일 차 정도? 세상을 뒤집어엎을 럼주는 절대 아니죠.” 그가 말을 멈추고는 다시 술을 따랐다. 하지만 곧 마음을 바꿨다.’ -유재원 번역본에서
「아니요, 당신은 자유롭지 않아요. 당신이 묶인 줄은 다른 사람들이 묶인 줄보다 좀 길 거예요. 그것뿐이오. 두목, 당신은 긴 줄 끝에 매달려 있으니까, 이리저리 다니고, 그리고 그걸 자유라고 생각하겠지요. 그러나 당신은 그 줄을 잘라 버리지 못해요. 그런 줄은 자르지 않으면….」 「언젠가는 자를 거요!」 내가 오기를 부렸다. 조르바의 말이 정통으로 내 상처를 건드려 놓았기 때문이었다. 「두목, 어려워요. 아주 어렵습니다. 그러려면 당신한테는 무식이 좀 필요해요. 무식, 아시겠어요? 모든 걸 걸고 도박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당신은 머리가 힘이 세니까 항상 그 머리가 당신을 이겨 먹을 거라고요. 인간의 머리란 구멍가게 주인과 같은 거예요. 계속 장부에 적으며 계산을 해요. 얼마를 지불하고 얼마를 벌었으니까 이익은 얼마고 손해는 얼마다. 머리란 아주 좀상스러운 소매상이지요. 가진 걸 몽땅 거는 일은 절대 없고 꼭 예비로 뭘 남겨둬요. 머리는 줄을 자르지 않아요. 아니, 아니지! 오히려 더 단단히 매달려요. 이 잡것은! 붙잡고 있던 줄을 놓치기라도 하면 머리라는 이 병신은 그만 허둥지둥하다가 완전 끝장나 버려요. 그런데 사람이 이 줄을 끊어버리지 않으면 산다는 게 무슨 맛이겠어요? 노란 카밀레 맛이지. 멀건 카밀레 차 말이오. 럼주하고는 완전히 다르다고요. 럼주는 인생을 확 까뒤집어 보게 만드는데!」 그는 묵묵히 술을 더 따라서는 마시려다 말고 말을 계속했다. -이윤기 번역본(열린책들)
나는 이 대목이 ‘인간의 본질과 속성’에 관하여 다룬 것이라고, 읽혔다. 즉 코나투스에 관한 문제를 문학적 표현으로 드러낸 대목이라고. 철학자들 같았으면 몇 페이지의 언설로 풀어냈을 이 진지한 문제에 대하여 소설가는 입담 거친 늙은 광부와 샌님 같은 지식인 화자를 통해 쏟아놓았던 것이다. 나는, 두 사람의 대화 몇 마디로 인간의 본질을 꿰뚫는 대단한 문장이라는 생각이 든다. 여기서 화자 말고 진짜 글쓴이인 카잔자키스의 생각을 유추해 보자. 두 사람 간에 입담을 치열하게 시켜놓고 넌지시 바라보는 그의 속내는 어떤 속셈이었을까? 그리고 이럴 때 지하에 계신 스피노자는 무엇이라고 말했을까? ‘지성 혹은 이성의 힘이 인간의 삶을 얼마나 유익하게 이끌 것인가’의 물음이었을 것이다. 인간의 본능이자 속성인 감정에 충실한 자와, 정념의 법칙성을 존중하는 자, 그들 각자가 타고난 기질도 만만치 않을뿐더러 머릿속에 든 지식의 양도 한몫을 하는, 균형 잡힌 저울대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코나투스에 대한 물음으로 들어가 보자. 토마스 홉스는 ‘물체에 내재하는 힘, 자연 정신 사회 모든 사상을 그 출현으로 한다.’라고 하였고, 스피노자는 ‘자기 보존력’ 즉 ‘인간을 비롯한 모든 사물이 각자 자기 존재를 지속시키려고 하는 힘이다.’라고 하였다. 인간에게 ‘자유의지’란, 코나투스를 유지하려는 힘 또는 그것을 찾는 노력 아닐까? 줄과 끈에서 주는 낱말의 의미나 그것들의 상징만큼 코나투스에 대한 해석도 무궁무진할 것이다.
언젠가 배우 신성일씨가 모 언론사와 인터뷰한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인생에서 ‘후회’란 제 뜻과 다르게 끌려갔을 때 하는 것이요. ……나는 늘 내 주체적인 삶을 살았소이다. 애인은 내게 삶의 활력을 주고…. 나는 삶에서 솔직해지고 싶어.”라고 하였다. 이성적이고 주체적인 자아로 자기 존재를 지켜가는 것, 또 욕구나 욕망도 인간이 지닌 본질 자체인 것을 인정하며 그것들을 조절해가는 방식을 깨닫는 것이 ‘삶의 최고의 기술’ 아닐까? 용기를 내어, 자기 내면의 경계에 서 보면 내 안의 코나투스가 보인다.
3. 개명(開明)하지 못한 공동체의 죄악
이 소설의 시대 배경은 20세기 초반이었다. 발칸전쟁을 겪고 곧이어 ‘제1차 세계대전’이 있었고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 사이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날로그적 시스템으로 돌아가던 세상이었다. 문명의 배꼽이라고 불려오던 역사 깊은 나라에서 그렇게까지 여성을 차별 대우했던가(아니면 고립된 섬이라는 특수한 현상 때문이었던가). 20c 초까지만 해도 인간사회는 개명(開明)하지 못한 것이다. 나는 이 소설에서 크게 실망한 게 두 가지였다. 과부를 살해하는 장면에서, 화자의 안일한 태도였고, 공동체의 무지몽매한 집단의식이었다. 이 소설을 읽으며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장면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우선, 지독한 야만시대를 거치며 희생된 과부의 영혼에 깊은 애도를 표한다. 인간의 야만성이 펄펄하던 시대에 과부는 어떤 존재였던가. 남성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가는 사회였다고 하지만, 한 동네에서 담벼락을 맞대고 오래도록 살아왔던 사람들이 인민재판도 없이 여론몰이로 한 사람을 살해하는, 끔찍한 장면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전쟁도 아닌 평화시대에 그것도 밝은 대낮에 공공장소에서 살해하는 장면은 공동체의 무지몽매한 의식 부재라고 본다. 한마디 저항도 못하는 한 여인을 살해해놓고 저희끼리 화해한답시고 낄낄거리며 술을 마시는 사내들, 우정을 다진다고 설정한 광경부터가 말이 되는가. 그토록 야만적 시대를 거쳐오면서 얼마나 많은 죄 없는 과부(여자)들이 희생되었을까?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던 게 천만다행이다. 마을 남자들이 교회 앞에 모여 토끼몰이하듯 과부 하나를 떼로 몰아 살해하던 날 저녁, 격투 중에 귀를 물어 뜯겼던 조르바는 미칠 것 같다며 화를 참지 못하고 산으로 올라가 버렸다. 그때 혼자 집에 남아 있던 버질은 등잔불을 끄고 침대에 든다. 그날 밤, 작가란 작자가 읊은 얘기를 한번 들어보자.
나는 등잔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나의 나쁜 습관을 따라, 또다시 현실로부터 피와 살과 뼈를 다 제거하여 현실을 추상개념으로 바꾼 뒤, ‘이미 일어난 일들은 일어날 수밖에 없는 필연성에 의해 일어난 것’이라는 끔찍한 결론에 도달할 때까지 그 개념들을 아주 보편적인 법칙과 연결시켜 현실 도피를 했다. 이미 일어난 일들은 그렇게 되기로 결정되어 있던 이 세상의 리듬 속에서 일어난 것이고, 그런 일이 일어남으로써 세상은 더 큰 조화를 이룬다. 이런 식으로 나는 이미 일어난 일은 그렇게 돼야만 했던 필연성에 의해 일어난 일일 뿐 아니라, 의당 그렇게 돼야 했기에 일어난 거라는 혐오스러운 위안에 도달한다.
………이렇게 하여 짧은 시간 안에 과부는 내 기억 안에서 신성한 상징이 되어,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부동의 세계에 조용히 들어앉았다. 내 가슴 속에서 과부는 이미 밀랍 속에 싸여, 더 이상 내 내면에서 내 정신을 마비시키는 공포를 일으킬 수 없게 되었고, 과부의 살해라는 그 끔찍하고 덧없는 사건은 넓게 퍼지면서, 시간과 공간 안으로 흩어지고, 끝내 이미 죽은 위대한 문명들과 동일시되었다. 그리고 문명들은 지구의 운명과 함께, 지구는 우주의 운명과 함께 동일시되었다. 이제 나는 과부에게로 되돌아와서, 그녀가 위대한 법칙에 복종하여 그녀의 살해자들과 화해하고, 이제는 고요하고 성스러운 부동의 세계에 안주했음을 발견한다. - 유재원 번역 22장
나는 침대에 누워 등불을 껐다. 그리고 내 졸렬하고도 비인간적인 습관에 따라 다시 한번 현실을 왜곡하기 시작했다. 현실에서 피와 살과 뼈를 제거하여 추상적 관념으로 환원시키고, 그것을 일반적 법칙들과 연결시켜 지금 일어난 일은 결국 필연적이었다는 끔찍한 결론에 도달했다. 더 나아가 오늘의 비극은 우주적인 조화(調和)에 기여했다는 것이었다. 결국, 나는 일어나야 할 일이 일어난 거라는 최종의 가증스러운 위안에 이르렀던 것이다.
………몇 시간 후, 과부는 하나의 상징으로 변하여 내 기억 속에서 조용하고도 평화롭게 안식하고 있었다. 과부는 내 마음속에서 밀랍으로 감싸여 더 이상 내 안에 공황감을 퍼뜨릴 수도, 내 두뇌를 마비시킬 수도 없게 되었다. 이날의 끔찍한 일들은 시공간 속으로 확장되어 나가, 과거의 대문명들에 합류하였고, 또 이 대문명들은 지구의 운명과 합류하고, 지구의 운명은 우주의 운명에 합류하였다. 이런 식으로 하여 과부는 삶의 대법칙들에 순종하여 그녀를 죽인 자들과 화해하여 평온하고도 고정된 모습으로 화했던 것이다. -이윤기 번역
이게 무슨 ‘개 풀 뜯어먹는 소리’인가? 알아들을 수도 없는 현학적인 언설로 비겁한 자신을 모면하려고 말 같지도 않은 말을 늘어놓는단 말인가. 벌건 대낮에 죄 없는 과부 하나가 살해되는 현장을 말짱한 눈으로 보고도, 더구나 자기랑 몸을 섞었던 여자가 목이 잘리는 광경을 목격하고도, 사내가 드러누워 할 소리던가! 지식인이라고 설정된 작가의 입술로 말이다….
니코스는 소설마다에서 교회비판을 빼놓지 않았다. 여기서도 수도원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통해서, 교회의 효용성 없는 시스템을 고발한다. 수도원은 누구를 위한 공간이며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의례적으로 내려오던 허울뿐인 교회의 전례의식들을 지적하는 것이다. 검은 수도복 속에 가려진 수도승들의 맹목적 믿음 행위나 이기주의 그리고 비루한 양심, 그것들을 까발리는 게 니코스의 무기였다(그래서 그의 저서는 금서로 낙인찍히고). 세상으로부터는 ‘신의 대리자’ 역할이란 명분 아래 안전을 보장받고, 특별대우를 받고 싶어 하고, 자기들 공동체 안에서는 서로 잡아먹지 못해서 으르렁거리며, 수도원 원장을 비롯한 위계 속에 전혀 이타적이지 못한 조직이었음을 폭로한다. 세속인보다 못한 타락한 종교인들의 행위를 고발하는 것이, 그가 소설의 단골 메뉴로 쓰는 이유이기도 했다.
“신을 통하여 구원을 받을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신을 구원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던 니코스는, 교회조직(공동체)이 안고 내려오는 병폐와 적폐를 청산해야 할 시기’라고 피력하기도 했다. 세상은 점점 밝은 쪽으로 개명되어가는데 교회의 적폐들은 아직도 꿈쩍하지 않고 있는 현상이었으니.
한 세기 전 지중해의 한 섬에서 과부를 업신여기고 토끼몰이하듯 마을 남자들이 한 여자를 떼로 몰아 살해했던 야만을 흉볼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다. 디지털문명이 광속으로 달리는 이 시대에 사는 우리도 개명하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다. 얼마 전 서울 서부지역에서 공립특수학교 신설을 반대하는 지역 주민들 앞에서 장애아동의 어머니들이 무릎을 꿇고 신설 지지를 요청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인간은 아직 멀었다, 개명하지 못한 청맹과니들이 개판을 치고 있는 세상이다. 그런 일이 내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 일어났다는 것에 심히 부끄러움을 느낀다.
4. 조르바, 전쟁의 상흔으로 얼룩진 영혼
우리가 소설을 읽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이런 뜻밖의 장면 하나에 감동하여서가 아닐까? 19세기에서 20세기를 넘어오면서 발칸은 화약고나 다름없었다. 그리스를 포함하여 발칸반도 전체가 전쟁과 혁명의 소용돌이에 휩싸였었다. 자고 나면 국경선을 밀어붙이며 땅따먹기에 돌입한 야만의 시대였던 것이다. 전쟁 중에 군인은 적군을 치지 않으면 자기편 또는 자기 민족이 먹히는 현상이지 않은가. 그러니 아무리 생명존중과 지성을 앞세운 군인일지라도 상대편을 향해 총을 겨눌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여기서 그런 전쟁에 시달려온 퇴역야전병 얘기를 들어보자. 전운이 감돌던 불안한 시대에 개인에게 국가라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조르바의 입을 통해 그 고백을 들어보자.
(20장 p391)“…… 나는 반란군 게릴라로 입대했어요. 어느 날 땅거미가 지는 시각에 불가리아 놈들 마을로 들어가 한 외양간에 숨었죠. 그 집에는 불가리아 신부 놈 하나가 살고 있었는데 흡혈귀처럼 피를 좋아하는 악질이었어요. 밤이면 신부복장을 벗어던지고 양치기 옷으로 갈아입은 다음, 무기를 집어 들고서는 그리스인들 마을을 습격하곤 했죠. 그리고 새벽이면 집으로 돌아와 진흙과 피를 씻어내고 예배를 드리기 위해 성당으로 들어갔고요. 그 며칠 전에는 침대에서 자고 있는 그리스인 교사를 살해하기도 했죠. 나는 그 신부 놈의 외양간으로 들어가 기다렸어요. 두 마리의 황소 뒤쪽에서 등에 소똥을 얹어 위장하고 엎드린 채 기다렸죠. 저녁이 되자 신부 놈이 가축들 먹이를 주려고 들어옵디다. 나는 그놈을 덮친 뒤에 양의 멱을 따듯 목을 그었죠. 그리고 그놈 귀를 잘랐어요. 당시에 나는 불가리아 놈들 귀를 모으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그 신부 놈 양쪽 귀를 다 잘라낸 다음 도망쳤죠.
그리고 얼마 안 있다가 대낮에 봇짐장수 차림을 하고 그 마을로 잠입했죠. 무기는 산에다 놓아두고 마을로 빵과 소금, 그리고 병사들을 위한 ‘차루히’ 구두코에 술이 달린 그리스 남자들의 전통 신발
를 사러 간 거죠. 그런데 어느 집 앞을 지나다 보니까 검정 옷을 입고 맨발인 아이들 다섯 명이 손에 손을 잡고 조르르 서서 구걸을 하고 있는 거예요. ……얘들아, 너희는 누구 자식들이냐? 내가 불가리아 말로 물었죠. 가장 큰 사내 녀석이 그 조그만 머리를 쳐들고는 ‘며칠 전에 외양간에서 살해당한 신부님 자식들이어요.’ 하고 대답하더라고요. 그 순간 눈물로 눈이 뿌예지더군요. 맷돌이 돌 듯 땅이 빙빙 돌고요. 난 벽에 기댔어요. 그제야 땅이 돌기를 멈추더라고요. ‘얘들아 이리 오너라’ 내가 말했죠. ‘이리 가까이 와.’ 난 탄띠에 넣어두었던 보따리를 꺼냈죠. 그 안에는 영국 리라 금화와 터키 황금 금화가 가득했죠. 나는 무릎을 꿇고 그것들을 땅바닥에 쏟아부었어요. ‘자 이걸 다 가져 가거라. 모두 다 가져가라!’ ……그리고 그길로 도망을 쳤죠. 마을을 벗어나 저고리를 벗고는 내가 직접 짠 성 소피아 성당 부적을 갈기갈기 찢어발겨 길거리에 던져버리고 도망쳤죠. 도망치고, 또 도망치고……아직도 도망치는 중이에요.” 조르바가 벽에 몸을 기대고 내 쪽으로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벗어났죠.” 그가 말했다. “조국에서부터 벗어났다고요?”“네, 조국으로부터 벗어났죠.” 조르바가 침착하고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리고 조금 있다가 말했다. 조국으로부터 벗어나고, 신부들로부터 벗어나고 돈으로부터도 벗어나고, 탈탈 먼지를 털었죠. 세월이 흐를수록 난 먼지를 털어냅니다. 그리고 가벼워집니다.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까요? 난 자유로워지고, 사람이 돼갑니다.”
나는 이 대목을 읽으며 나도 모르게 눈가가 젖어들었다. 조르바가 왜 세상을 하염없이 떠돌고 떠도는 지 의문이 풀렸다. 그래서 외톨이 승냥이처럼 허랑한 영혼으로 떠도는 그도 깊은 상처 속에 살아가는 영혼이었음….
민족마다 나라마다 아픈 역사를 지니고 있지만, 그리스의 운명도 우리 못지않게 기구한 역사를 지닌 나라다. 동·서양을 잇는 지정학적인 교두보 역할을 하면서도 발칸의 변방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늘 위태로운 운명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냉전시대로 돌입되며 미·소 두 축의 강대국이 힘겨루기할 때 그 첫 번째로 희생양이 되었던 나라다. 그리스는 외압에 의해 1946-1949년 내전을 겪는다. 이데올로기에 휩싸여 서로 형제를 살해하는 전쟁(Οι Αδερφοφάδες) 1946-1949년 그리스에서 벌어진 내전, 피의 난장판이 벌어졌다. 우리 민족이 겪은 육이오와 똑같은 동족상잔의 비극을 그들이 먼저 발칸에서 치렀던 것이다. 가슴을 치며 절통할 일이지만, 이 땅에선 아직도 수시로 전운이 감돌고 우리의 영혼은 치유되지 않은 트라우마를 앓고 있다. 동병상련의 속 깊은 아픔이 전해지는 그리스 현대사를 다시 생각해 본다.
어떤 철학자께서는, “황소의 뿔은 들이받고자 하는 욕망 때문에 솟은 결과물”이라고 하였다. 코나투스 안에 존재하는 욕망(Cupiditas)은 이 황소의 뿔과 닮은꼴이란다. 철학자의 말대로라면, 고약한 의지로 솟아난 이 뿔을 단단히 죌 각오를 하지 않으면 되레 자신이 들이 받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삶의 기술’이란 다름 아닌 내 안의 코나투스를 조절하여 인간끼리 통하는 연정과 소통기술을 말함일 테다. 조르바는 그것을 즉물적 감정과 투박한 행동으로 보여준 캐릭터였다. 또한, 가장 여린 영혼의 실핏줄에 가닿는 진정성을 보여주기도 했다. 조르바는 마담 오르탕스를 떠나보내고 그 집에서 앵무새 한 마리를 들고나온다. 앵무새는 마담과 오랫동안 동고동락하며 유일하게 교감해온 생명체였다. 마담의 속 깊은 바닥까지 알고 있던 영물이었다. 조르바가 홀로 남은 앵무새를 데리고 유랑하는 것은 그의 마음속에서 오르탕스의 영혼을 쉬 보내고 싶지 않다는 은유(metaphor)적 행동이기도 한 것이다. 이런 마음의 소유자였으니 조르바가 사랑받지 않겠는가, 펄펄 뛰는 감성에다 진정성까지 겸비한 사내였으니•••.
오늘 같은 날은, 알렉시스 조르바와 니코스 카잔자키스 그리고 과부의 영혼에게 위로의 술 한잔 올려야 하지 않겠는가. ‘소설은 다름 아닌 인간 내면을 탐구하는 영역이다’란 생각으로, 나는 오늘도 소설을 읽고 또 쓴다.(2018년 카친행사 때 발표한 글임.)
유경숙/소설가
사진: 필립 웨이크햄 작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