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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03. 25
최근 한국의 전기차 배터리 3사에 위기가 닥치고 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들의 미래에 대한 장미빛 전망이 난무했죠. 주가도 폭등했습니다. 전기차가 미래이고, 전기차에서 가장 중요하고 비싼 부품이 배터리이니, 현재 글로벌 순위 톱을 다투는 LG에너지솔루션과 그외 삼성SDI·SK이노베이션 등에 기회가 왔다는 얘기일 겁니다.
그런데 전기차로 테슬라를 잡겠다며 피치를 올리고 있는 독일 폴크스바겐이 최근 배터리 자체생산 계획을 밝히면서, 국내 업계가 긴장하고 있습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국내 기반의 유일한 글로벌 자동차회사인 현대자동차마저 배터리 자체생산 움직임을 보이면서 충격이 더 커졌지요. 사실, 작년 9월 테슬라 ‘배터리데이’ 때 일론 머스크가 배터리의 자체생산 계획을 밝히며 1차 충격이 오긴 했습니다. 하지만 그 때는 ‘테슬라니까’라고 치부했었는데요. 기존 주요 자동차회사들마저 배터리를 스스로 만들겠다고 하면서, 국내 배터리업계 상황이 급변하는 것 같습니다.
▲ 15일(현지 시각) 폴크스바겐그룹 '파워데이'에서 프랭크 블롬 배터리 사업 책임자가 전고체 배터리를 설명하고 있다. 이날 폴크스바겐은 2023년부터 배터리를 자체 생산하겠다고 밝혔다. 또 2030년까지 전기차 80%에 각형 배터리를 탑재하고, 궁극적으로는 전고체 배터리로 갈 것이라고 밝혔다. 전고체 배터리는 기존 리튬이온배터리의 액상 전해질을 고체로 바꿔 화재 위험을 낮추고, 에너지 밀도를 크게 높인 배터리다. / 폴크스바겐
이와 관련해, ‘위기의 한국 배터리 3사, 군수업자로 살아남는 3가지 모델’이라는 주제로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3가지 모델이란 다음과 같습니다.
1. 네덜란드 ASML 같은 독점공급 모델
2. 폭스콘·일본전산 같은 부품업체간 연합 모델
3. 키엔스 같은 고객 니즈의 선제 서비스 모델
그럼 3가지 모델을 설명드리기에 앞서, 폴크스바겐 등 자동차업계가 배터리회사들을 향해 ‘선전포고’를 한 것이 자동차회사 입장에서는 너무 당연한 것이라는 것을 말씀 드립니다. 배터리 업체로서도 예상된 리스크일 뿐인거죠. 자동차회사와 거래하는 부품업체 실무자들은 너무 잘 알겠지만, 세계에서 가장 큰 제조업인 자동차산업에서 최종제품을 만드는 자동차회사들의 ‘갑질’은 상상 초월입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다 똑같습니다. 어디는 거칠게, 어디는 좀 더 세련되게 갑질을 할 뿐이죠. 부품 단가 10원 아끼려고 피터지게 싸우고, 부품업체들이 정신 못차릴 정도로 압박하는 곳이 자동차회사입니다. 게다가 자기네끼리의 경쟁도 엄청나게 터프해서, 시장에 새로 들어오려는 플레이어도 살려두지 않습니다.
세계적으로 연간 수백만대씩 파는 글로벌 자동차메이커 가운데 가장 최근에 생긴 회사가 어딜까요? 네, 현대자동차입니다. 1967년 설립됐습니다. 이 급변하는 세상에서, 기존의 글로벌 자동차메이커 중에는 54년 전에 세워진 회사가 가장 젊다는 얘기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자동차회사들이 배터리업체의 부상을 어떻게 바라볼지는 자명하죠. 기존 부품업체에는 10원을 더 줄이라고 협박을 일삼는 사람들이, 적어도 수백만원 많으면 1000만원이 넘는 값비싼 부품을 전부 배터리업체에서 사와야 하는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까요? 우선은 GM처럼 LG와 합작회사를 만들어 기술공유도 하고 비용부담도 줄이는 방식을 쓸 수 있을테고요. 유럽 자동차산업의 맹주 폴크스바겐처럼 기존에 쌓아놓은 자금력을 총동원해 자체 배터리 공장을 짓겠다고 나서는 것이 당연한 대응일 수 있다는 겁니다.
◇ 폴크스바겐 등의 배터리 자체생산 발표는 배터리 업계에 예상된 리스크에 불과
지금까지 자동차회사들이 신규 참여를 저지하고, ‘그들만의 리그’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엔진’을 자체 생산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자동차회사들을 잘 보시면, 다른 여러 부품은 외부에서 조달하더라도, 엔진만큼은 내부적으로 기술을 보유하고 자체 생산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만큼 제품과 원가 경쟁력의 핵심이기 때문이죠. 그래봤자 엔진 원가는 대당 100만~200만원입니다. 그런데 전기차 시대가 되면 자동차회사의 엔진 경쟁력이 희석되겠죠. 그리고 엔진보다 5~10배 비싼 배터리를 외부에서 사오게 되는 거죠. 그래서는 자동차회사 경쟁력이 유지되기 어렵습니다. 배터리·모터를 고성능으로 저렴하게 만들 수 있는 회사가 전기차까지 만들어버리면, 기존 자동차회사의 존립 기반이 사라질 수도 있겠지요.
따라서 기존 자동차회사들이 살기 위해선 배터리업체에 완전히 의존하는 구조를 깨야 합니다. 그리고 아직까지 힘이 있는 지금 해야겠죠. 그래서 폴크스바겐이 배터리 자체 생산계획을 들고 나온겁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자동차회사로서는 당연한 대응입니다. 이들의 계획의 실현 가능성은 차치하고라도, 앞으로 폴크스바겐·현대차 뿐 아니라 다른 자동차회사들도 배터리 내재화 계획을 밝힐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럼 한국 배터리 3사의 살길은 무엇일까요? 최근 업계 내부의 움직임을 보면, 폴크스바겐의 계획을 한참 전에 감지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서 완성차업계의 이런 터프한 대응에 맞서 어떻게 성장하고 또 수익률(이것도 정말 중요하죠)을 유지할 수 있을지에 대한 다각적인 검토작업이 이뤄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논의되고 있는 것 중 하나가 배터리 제조업을 기반으로 한 데이터비즈니스, 서비스산업 진출입니다. 예를 들면 배터리의 수명 혹은 고장·오류 여부나 가능성을 미리 예측해 고객에게 정확한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돈을 버는 등의 모델도 생각해볼 수 있을테지요.
이런 것은 이미 미국 GE 같은 기업이 40년 전부터 제조업 기반에서 정보·서비스산업으로 이행하기 위해 고안했던 모델이기도 하지요. 예를 들면, 항공기 엔진을 만들면서, 엔진의 각 부품이 고장 날 시기 등을 예측해 선제적으로 수리한다든지, 고객사에 관련 정보를 팔아 돈 버는 모델이지요. GE는 이를 확대해 공장자동화 노하우에 대한 글로벌 데이터를 플랫폼화해 돈 버는 모델을 오랫동안 연구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보면, 천하의 GE조차 성공했다고 말하기 힘듭니다. 특히 공장 자동화 플랫폼 모델은 GE가 몇 년전까지 자신들의 미래라고 말하며 주력했지만 폭망 수준입니다.
다른 예로는 소니가 가전산업에서 콘텐츠산업 위주로 바뀐 것이 있겠네요. 우여곡절 끝에 제조에서 서비스로의 전환에 성공하고는 있지만, 20년이나 고생해서 얻은 결과입니다. 그리고 아시아기업 중 이런 전환에 성공한 기업은 소니 이외에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거기엔 다 이유가 있는데요. 산업기반의 특성, 기업문화, 글로벌 플랫폼 장악의 어려움 등 복합적 요인이 있을 겁니다.
▲ 22일(현지 시각) 미국 캘리포니아주 프리몬트 공장에서 열린 테슬라 배터리 데이
◇ 자동차회사의 위협에 대한 배터리업체의 최악의 대응은 ‘회피 전략’
자동차회사들의 배터리 내재화 움직임에 대해 한국 배터리업체가 할 수 있는 ‘최악의 대응’은 이런 움직임을 확대 해석해 ‘배터리만으로는 안되니 배터리 기술을 활용한 정보서비스·플랫폼 사업을 찾아보자’는 식으로 자동차회사의 공격을 회피하는 것입니다.
이런 전략이 위험한 첫번째 이유는 배터리회사가 태생적으로 부품업체이기 때문입니다. 완성차업체는 소비자에 전달하는 최종제품을 장악하고 있다는 자신들의 최대무기를 앞으로도 독점하려 들 것입니다. 배터리업체 입장에선 자신들 기술을 바탕으로 한 정보서비스 등으로 사업을 확대해 나가고 싶겠지만, 완성차업체들이 그것을 가만 놔둘리 없고, 힘의 논리에서 배터리업체가 이길 확률은 별로 없다는 거죠. 왜냐하면 배터리업체는 자동차회사에 배터리를 납품할 뿐이지, 최종제품인 전기차를 장악하고 있는게 아니니까요. 모든 서비스의 플랫폼 역할을 하는 것은 전기차라는 최종 디바이스입니다. 테슬라가 앞으로 차량 주행데이터를 통해 다양한 플랫폼 비즈니스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하는 것도, 테슬라가 자사 차량을 세상에 계속 깔고 있기 때문이지요. 테슬라에 장착된 배터리를 차량이 폐차된 이후에 태양광패널 쓰는 가정의 ESS(전기에너지저장장치)로 활용한다든지 하는 것은 테슬라가 독자적으로 하는거죠. 테슬라에 배터리를 납품했다고 하더라도, 그 배터리 업체가 이런 사업에 관여할 수 있는게 아닙니다.
이 전략이 위험한 두번째 이유는 자동차산업의 핵심이 앞으로도 배터리를 주력으로 한 전동화에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연기관 파워트레인(엔진·변속기)에 대비해 e-파워트레인(배터리·모터·파워콘트롤유닛 등)이라 불러도 좋겠지요. 즉 배터리, 모터·PCU(파워콘트롤유닛) 등을 포함한 e-파워트레인 분야에서 아직도 무궁무진한 기술개발과 경쟁력 향상 여지가 있고, 결국 이런 본질적인 경쟁력을 높인 배터리회사 혹은 e파워트레인 회사만이 살아남게 될겁니다.
▲ LG전자는 세계 3위 자동차 부품업체인 캐나다의 마그나와 합작법인 ‘LG 마그나 이파워트레인’을 설립한다. LG는 전기차 파워트레인의 핵심 부품을 공급하고, 마그나는 설계·생산을 맡아 규모의 경제를 추구한다는 전략이다. / LG전자 제공
◇ 한국 배터리업체, 자동차회사 위협에 동요 말고 군수업자 모델로 정면 대응해야
따라서 한국 배터리 3사는 자동차회사의 내재화 전략에 우왕좌왕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수세적으로 생각할 필요도 없고요. 자동차회사가 아직 독점하고 있는 강점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런 강점으로 자동차회사가 앞으로 어떤 전략을 펼칠지 여러 수 앞을 내다보면서, 내 갈 길 제대로 가면 됩니다. 때로는 자동차회사와 대치하는 정도의 적극적 공세도 필요할 것이고요. 특히 테슬라가 잘하는 것처럼, 기존의 연장선에서 과제를 해결하려고만 하지 말고, 과제를 배터리업체가 새로 설정해 자신들의 무대로 자동차업체를 끌어들인 뒤, 자신들의 속도로 시장을 이끌어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드리는 것이 세계전쟁이 벌어졌을 때 가장 돈을 많이 버는 군수업자 모델입니다. 자동차회사들 사이에 전기차 전쟁이 한창이지요. 자동차회사들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아남으려 할 것입니다. 지난 100년간 서플라이어들을 요리해 온 자동차회사들이 배터리업체에 주도권을 호락호락 내줄리 만무하지요.
한국 배터리업체의 살 길은 단순합니다. 자동차업체끼리 전기차 전쟁이 더 격화됐을 때,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그들이 먼저 찾을 수 밖에 없는 최고의 군수업자가 되는 길 뿐인 것이죠.
그 모델에 대해 3가지 포인트로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 1. 네덜란드 ASML 같은 독점공급 모델
회로의 선폭이 나노 단위인 첨단 반도체를 ‘생산’할 수 있는 곳은 세계에 두 곳 밖에 없습니다. 대만 TSMC와 한국 삼성전자이지요. 코로나사태로 온라인경제가 폭발하면서 반도체 수요가 함께 급증했는데요. 반도체 생산이 수요를 못대면서, TSMC나 삼성전자(정확히는 삼성전자의 반도체수탁생산 부문)의 가치가 더 올라가게 됐습니다. TSMC·삼성전자는 고객사의 설계를 받아 반도체를 대신 생산해주는 ‘을’ 입장이지만, 현재는 고객사들이 너도나도 물건을 더 달라는 상황이니, ‘을’이긴 하되 ‘수퍼 을’인 셈이지요.
그런데 TSMC·삼성전자에 제조장비를 납품하는 ‘2차 공급업체’ 중 두 회사를 능가하는 ‘울트라 을’이 있습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극자외선(EUV) 노광장비’를 제조하는 네덜란드의 ASML입니다. 구체적으로 설명드리면, 애플·퀄컴·엔비디아·AMD 등 세계에서 가장 잘나간다는 반도체설계 회사들(고객사)도 자사의 최첨단 반도체를 TSMC나 삼성전자(1차 공급업체)가 안만들어주면 제품을 팔 수 없는데요. 그런 TSMC·삼성전자도 ASML에서 EUV 노광장비를 못받으면 생산을 할 수가 없는 겁니다. 대체 장비도 없습니다. 세상에서 ASML만 만들 수 있으니까요. 이 장비는 대당 2000억원(요즘 가격이 계속 올라간다고 하는군요)이나 하는데, 물량이 모자라 수십대를 사고 싶어도 몇대 밖에 못사는 실정입니다.
즉 서플라이어 입장에서 가장 좋은 것은 특정 핵심부품의 시장을 100% 장악하는 것이겠죠. ‘고객님, 우리꺼 안쓰면 물건 못만드세요’인 겁니다. 그런 상황을 만들 수만 있다면, 성장이나 영업이익률을 걱정할 필요가 없겠지요.
이게 배터리업계에서는 불가능할까요? 시장 전체를 놓고 보면 불가능해 보입니다. 하지만 상황을 한번 살펴보죠. 폴크스바겐은 2030년까지 연간 240GWh 규모의 배터리 공장을 짓겠다고 밝혔는데요. 작년 LG에너지솔루션이 증설한 배터리 생산능력이 100GWh 정도 되고, 2023년 총 배터리생산능력 목표가 260GWh입니다. 폴크스바겐 계획의 규모가 많다면 많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LG의 2023년 계획은 이변이 없는 한 실현 가능하고요. 폴크스바겐의 계획은 아직 시작 단계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작년 9월 테슬라가 2030년까지 연간 3000GWh의 공장을 짓겠다고 한 것은 무엇일까요? 테슬라의 계획이 실현된다면, 배터리 전문업체들의 영역은 사라지거나 대폭 축소되고 말텐데요. 그게 가능할 일일까요? 그럼 배터리 전문업체들은 전부 문닫아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업계에 따르면 10GWh 공장을 짓는데 3조원 가량 듭니다. 단순 계산으로 폴크스바겐은 2030년까지 70조원을 쏟아붓겠다는 것인데요. 폴크스바겐이 감당 못할 것은 아닙니다만, 문제는 폴크스바겐이 배터리에만 투자를 집중할 상황이 아니라는 거죠. 통합제어전자장치(ECU)와 운영시스템(OS)을 개발하는게 더 중요할 수도 있습니다. 테슬라의 진짜 경쟁력이 여기에 있기 때문에, 이 부분을 소홀히 하면 폴크스바겐도 위험해 질 수 있지요. 게다가 배터리는 사다 쓸 수라도 있죠. ECU·OS는 누가 완전히 대신해주기도 어려운 문제인데요. 여기에도 폴크스바겐은 프로젝트마다 조 단위의 개발자금을 쏟아붓고 있는 상황입니다.
게다가 배터리공장은, 짓는다고 다 되는게 아니죠. 폴크스바겐이 성공하려면, 기존 배터리 전문업체보다 더 성능이 뛰어나고 저렴한 배터리를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약 2030년까지 70조원을 쏟아부어 거대한 배터리 공장을 구축했는데, 배터리 전문업체에서 사다 쓰는 것보다 성능이 떨어지거나 혹은 비싸다면 어떻게 될까요? 제아무리 폴크스바겐이라 해도 경쟁력을 유지하기 어려울 겁니다.
그럼 다시 ASML의 독점공급 모델을 생각해보죠. ASML이 원래부터 이런 ‘울트라 을’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EUV가 없던 시절에는 일본 캐논·니콘이 세계 노광장비 시장을 석권했었죠. 당시 ASML은 유럽의 신생업체일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ASML은 초미세공정이 미래 시장을 장악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EUV노광장비가 반드시 필요할 것으로 내다봤습니다. 캐논·니콘은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개발을 중도에 접었지만, ASML은 끝까지 물고 늘어져, 지금 지위를 얻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ASML의 상상초월 수준의 오픈이노베이션입니다. ASML은 네덜란드 회사이지만, 관련 분야의 전세계인들이 일한다고 할만큼 국적 구성도 다양하고요. 특히 관련 연구개발능력이 뛰어나다면 어떤 곳이라도 먼저 접근해 협업해 왔습니다. 특히 대만 TSMC와 오랜기간 협업을 통해, 반도체 장비의 미래를 예측하고 경쟁사를 압도할 수 있는 장비를 만드는데 성공할 수 있었지요.
즉 한국 배터리업체가 전기차 업계에서 ASML 같은 존재가 되긴 쉽지 않겠지만, 특정 분야에서라도 자동차회사들에 독점적 지위를 가질 수 없는지 더 치열하게 고민하고 실행방안을 찾아야 한다는 겁니다. 배터리 기술을 활용한 데이터서비스 같은 것은 부차적이고요. 배터리 자체의 핵심 경쟁력으로 자동차업체와 정면승부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죠.
독점적 지위라는 것도 여러 각도로 생각해볼 수 있는데요. 경쟁 배터리업체 혹은 자동차회사의 자체 배터리와 같은 성능의 제품을 5~10% 낮은 가격에 제공할 수 있다면, 이것도 독점적 지위입니다. 또 같은 가격·성능인데 5~10% 작고 가볍다거나, 같은 가격인데 5~10% 성능이 좋다면, 독점적 지위가 이어질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리튬이온배터리에서 가격이나 성능 면에서 경쟁사가 따라오지 못할 수준의 경쟁력, 그리고 장기적으로는 차세대라는 전고체배터리 분야에서 자동차회사에 맞서 시장에 파괴력을 줄 수 있는 태세를 반드시 갖춰야 할 겁니다. 아직 충분히 공개는 안됐지만, 국내 배터리 업계나 현대차에서도 오랫동안 준비를 해 온 것으로 알고 있고, 전고체에서 가장 앞섰다는 도요타도 특히 삼성의 전고체 카드만큼은 경계를 늦추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결국 ‘우리꺼 안쓰면 당신들만 손해’라는 인식을 주는 정도에 이르지 못하면, 배터리라는 전기차의 핵심부품을 생산하면서도 자동차회사에 계속 끌려다니게 될지 모릅니다.
▲ 네덜란드 반도체 장비 업체 ASML의 직원들이 자사 EUV(극자외선) 장비를 살펴보고 있다. / ASML
◇ 2. 폭스콘·일본전산 같은 부품업체간 연합 모델
두번째는 부품업체간의 연합 모델입니다. 최근에 이와 관련한 가장 충격적인 연합이 탄생했는데요. 지난 18일 애플제품 등 모바일기기 전문 수탁생산업체에서 전기차 수탁생산업체로 변신을 시도중인 대만 홍하이(폭스콘)와 일본 최고의 모터 제조기업 일본전산(영문명 니덱·Nidec)이 전기차 협업을 위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한 것입니다. 홍하이는 이미 전기차 플랫폼을 자체 개발했고 이 플랫폼을 기반으로 전기차 수탁생산공장까지 곧 지을 계획입니다. 브랜드만 없을뿐, 어떤 자동차회사가 요청해도 그에 맞는 전기차를 만들어준다는 것입니다. 마치 애플의 제품을 대신 만들어주듯 말입니다.
홍하이와 일본전산의 협업은 전기차의 핵심이 배터리 뿐 아니라 ‘모터’에도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큰 의미를 지닙니다. 보통 주행거리가 긴 전기차를 만들려면 더 많은 용량의 배터리를 실어야 한다고만 생각하기 쉬운데요. 같은 용량의 배터리를 싣더라도 모터의 효율을 높이면 더 먼 거리를 갈 수 있지요. 그렇기 때문에 모터의 효율을 높일 수 있는 기술력을 보유한 업체는 앞으로도 크게 각광받을 것입니다. 대표적인 곳이 일본전산인 것이죠. 또 테슬라의 경쟁력 중에 중요한 것도 바로 모터입니다. 테슬라 전기차의 모터는 더 작으면서 더 강력하지요. 이런 성능을 다른 업체가 따라하는 것이 쉽지 않다고 합니다.
일본전산은 전기차용 트랙션 모터, 기어 박스, 인버터 등을 합친 전기차 구동 관련 세트상품인 ‘E액슬’을 만들어 팔고 있는데요. 올해 1월 발표한 뒤 불과 석달만에 세계 누적 판매대수가 10만대에 달했다고 합니다. 일본전산은 2030년까지 전기차용 트랙션모터 부문에서 세계시장 점유율 40~45%를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엄청난 포부와 계획인데요. 문제는 일본전산이 그것을 뒷받침할만한 기술과 실행력을 갖고 있다는 겁니다. 일본전산은 원래 하드디스크용 모터를 주로 만들었지요. 하지만 하드디스크가 점차 사양산업화되는 과정에서 재도약할 분야로 전기차용 모터를 지목했고, 오랜기간 개발력을 투입해 결국 이 시장마저 주도해나가는 상황입니다.
한편 일본전산과 손을 잡은 홍하이는 2025~2027년 세계 전기차시장을 연간 3000만대로 보고, 이 가운데 10%(300만대) 이상을 자신들이 제조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홍하이나 일본전산이나 부품업체이면서도 원대한 포부를 갖고 있습니다. 이것이 무모한 도전일까요?
이들의 도전은 한국 배터리업체에도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LG가 자사의 차량 전동화 부문을 떼어내 글로벌 자동차부품사이며 전기차 수탁제조도 겸하고 있는 마그나와 합작사를 차린 것도 그 일환이라 할 수 있는데요. 이 정도로 만족하면 안됩니다. 홍하이와 일본전산의 연합에서도 알 수 있듯, 전기차에서는 모터도 매우 중요한데요. LG는 배터리 뿐 아니라 모터도 생산합니다. 따라서 일본전산에 맞서 모터의 기술력을 더 높이는 일에 총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배터리의 경쟁력과 합쳐서 LG의 e-파워트레인 경쟁력이 한층 더 높아질 수 있을 겁니다.
자동차회사들이 내재화 계획을 선보이며 배터리업체들을 압박할 때, 국내 배터리 3사는 홍하이·일본전산 모델처럼 전기차 전동화의 필수·핵심기술을 보유한 업체들과 연합해 경쟁력을 높여나가야 합니다. 그래야만 자동차회사들이 함부로 할 수 없겠지요. 오히려 나중에 더 좋은 조건으로 협력을 제안해 올 수도 있을 겁니다. 이것은 내 쪽의 실력이 더 강해질 때만 가능한 것이겠죠. 홍하이와 일본전산이 따로따로 자동차회사를 상대하는 것보다, 힘을 합쳐 상대하는 것이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 <YONHAP PHOTO-4292> "미국서 전기차 생산 검토" 밝히는 대만 폭스콘 회장 (타이베이 AP=연합뉴스) 대만 전자업체 폭스콘을 이끄는 류양웨이(劉揚偉) 회장이 16일 타이베이에서 가진 기자회견을 통해 전기차 생산 계획을 밝히고 있다.류 회장은 미국이나 멕시코에서 전기차를 생산할 방침이며 6월까지 후보지를 최종 결정할 것이라고 밝혔다. jsmoon@yna.co.kr/2021-03-17 11:32:01/ <저작권자 ⓒ 1980-2021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 3. 키엔스 같은 고객 니즈의 선제 서비스 모델
마지막으로는 일본의 공장자동화 제어·계측기기 전문업체 키엔스의 모델입니다. 키엔스가 파는 물건은 단가가 그리 비싼 것들이 아닙니다. 어떤 것은 몇백원 짜리도 있지요. 그런데도 물건을 제조해 파는 기업인 키엔스의 영업이익률은 40~50%에 달합니다. 키엔스는 또 일본 공대생들이 가장 가고 싶어가는 기업에서 항상 선두권인데요. 평균 연봉이 2억원이나 되기 때문이죠.
그럼 키엔스는 단가가 세지도 않은 공장자동화 관련 제품을 팔면서 어떻게 이런 말도 안되는 영업이익률을 낼 수 있는 것일까요? 그 비결은 ‘고객사가 원하는 제품을 경쟁업체보다 한발 먼저 제공’하는 것입니다. 특히 키엔스가 잘하는게 고객이 미처 떠올리지 못한 미래의 니즈를 미리 알아차려 자사 연구개발에 연결해 준다는 것입니다. 자동화 공장을 운영하는 고객들은 매일 실무에 치이느라, 자동화개선이나 신기술개발을 할 여력이 부족하지요. 하지만 경쟁력을 높여나가지 않으면 결국 도태된다는 불안감에 시달립니다. 그런 고객의 고민을 키엔스 기술영업 담당들이 귀신같이 잡아내 본사 개발부서에 보고한다는 겁니다. 이렇게 모아진 정보는 기술영업·개발 부문의 협업을 통해 종합 검토된 뒤 바로 제품 개발에 반영됩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이 키엔스 기술영업 담당들의 능력입니다. 키엔스는 기술영업의 실력이 회사 전체의 경쟁력을 하늘과 땅 차이로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키엔스는 기술개발에도 능하지만, 고객의 니즈를 더 섬세하고 정확하고 더 빠르게 파악해 그들이 요구하기도 전에 제품으로 제공하는 것이 진짜 경쟁력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객사들은 키엔스 제품이 경쟁사보다 조금 더 비싸도 사게 됩니다. 키엔스와 거래하면 결국에는 자신들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입니다.
키엔스 모델에서 한국 배터리업체들이 생각할 점은 기술영업의 중요성입니다. 전세계 자동차회사들을 상대하는 배터리회사 기술영업 담당의 실력은 그 회사의 경쟁력을 하늘과 땅 차이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술영업 인재와 연구개발팀 인재 간 협업이 얼마나 제대로 빠르게 이뤄지는지에 따라, 회사 간 경쟁력 차이가 계속 벌어질 것입니다. 배터리 업계에서 키엔스 같은 위치를 차지할 수만 있다면, 아무리 자동차회사들이 자기 이익을 지키기 위해 배터리회사를 협박한다 해도 굳건한 지위를 유지할 수 있을 겁니다.
최원석 국제경제전문기자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