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2. 25.
전통시장을 어슬렁거리다보면 간혹 술빵과 마주치게 된다. 예전에 어머니가 만들어 주시던 빵의 투박함은 사라지고 대신 강낭콩이니 푸른 완두콩이니 하는 고명이 먹음직스럽게 올라와 있다. 고무 함지박에 밀가루를 넣고 어머니는 막걸리와 사카린 혹은 그것을 가루 낸 당원 녹인 물을 약간 섞어 반죽을 빚었던 것 같다. 아랫목에 한동안 놔둬 빵빵해진 밀가루 반죽을 서둘러 쪄낸 술빵은 어릴 적 자주 새참거리로 등장해서 막걸리 주전자를 들고 어머니를 따라나선 내게도 얼마간의 몫이 돌아왔다.
술이 들어갔기 때문에 술빵이란 이름이 붙여졌다는 점은 익히 짐작이 간다. 이름값 하듯 술빵에선 약하긴 하지만 막걸리 향이 난다. 그렇다곤 해도 부풀린 밀가루 반죽으로 술빵을 만드는 주역은 막걸리가 아니라 그 안에 들어 있는 효모(yeast)다. 맨눈으로는 볼 수 없는 단세포 생물인 효모가 밀가루의 주성분인 탄수화물을 알코올과 이산화탄소로 바꾸는 탁월한 재주를 부린 것이다. 바로 우리가 발효라고 부르는 생물학적 과정이다. 인류 역사 초기부터 효모는 인간 사회에 깊숙이 편입되었다. 빵과 와인 혹은 맥주를 만드는 데 반드시 효모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효모의 발효 산물인 이산화탄소 덕에 부푼 밀가루 반죽에 열을 가하면 알코올이 날아가고 고소한 빵이 된다. 그와 반대로 기체인 이산화탄소를 날려버리고 액체인 알코올만 남기면 그것이 곧 와인이고 맥주다.
고고학 자료에 따르면 인간은 약 9000년 전부터 곡물이나 꿀 혹은 과일을 이용하여 술을 담갔다고 한다. 본격적으로 술을 빚지는 않았다 해도 아마 인간에게는 소량의 알코올을 섭취할 기회가 간혹 있었을 것이다. 늦가을 길에 떨어진 과일에 알코올이 함유되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곰팡이가 덤벼들기 직전 땅에 떨어진 물컹한 단감에서 약간의 술 냄새를 맡았던 기억이 내게도 남아 있다. 하지만 알코올이 인간만의 전유물인 것은 아니다. 2017년 ‘BBC-지구’에 실린 기사를 보면 술에 취한 채 창공을 날다 죽은 새들 이야기가 등장한다. 2000년대 초반 미국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 근교에서 음주 비행을 하다 벽이나 유리창에 부딪쳐 죽은 여새(waxwing) 수십 마리가 발견됐다. 새들 배안에는 아직 소화되지 않은 베리류 열매가 가득했고 간의 알코올 농도는 최고 0.1%에 이르렀다고 한다. 늦은 겨울에서 이른 봄 사이 너무 익어버린 과일을 먹은 것이 새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원인으로 밝혀졌다. 새들이 주식으로 먹는 작은 과일에 효모가 침입하여 알코올을 가득 채웠기 때문이다. 새들뿐만 아니라 과일을 주로 먹는 포유동물도 간혹 알코올에 과다 노출된다는 사실이 세계 곳곳에서 관찰되었다.
2000년 버클리 캘리포니아 대학 로버트 더들리 박사는 과일을 먹는 동물과 알코올 섭취 사이에 상관관계가 있다는 가설을 발표했다. ‘술 취한 원숭이’라 불리는 이 가설에 따르면 나무에 살던 우리 인류의 조상은 오래전부터 이미 알코올에 노출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열매가 이제 막 발효되기 시작해 소량의 알코올 향을 공기 중에 퍼뜨리는 것은 밝고 붉은 색상과 함께 과일이 제대로 익었다는 확실한 신호가 된다. 따라서 알코올 향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동물이 충분한 양의 탄수화물을 보상으로 받을 가능성이 더 커졌다는 것이다.
흥미롭기는 했지만 이 가설은 곧 반격에 휩싸였다. 인류의 영장류 사촌인 원숭이는 과하게 익은 과일을 선호하지 않는 데다 술에 취해서는 나무 위에서 균형을 잡기 어렵다는 점 때문이었다. 즉 술을 마시는 일이 영장류 집단에 뿌리 내리기 어려웠으리라는 반론이 제기된 것이다. 이 말도 이치에 맞는 듯하다. 하지만 인간이 알코올을 분해하는 그럴싸한 효소를 가지고 있다면 상황은 팔팔결 달라질 수 있다.
2014년 산타페 대학 캐리건 박사는 침팬지와 고릴라 그리고 인간의 조상이 다른 영장류에 비해 알코올을 40배나 빠르게 분해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를 미 과학원 회보에 발표했다. 지금으로부터 약 1000만년 전에 알코올을 빠르게 분해할 수 있는 형질이 고등 영장류 집단 내에 퍼져나갔다는 게 이 논문의 결론이었다. 이 결론이 옳다면 일부 영장류 집단에서 알코올 분해 효소는 침팬지와 인간의 조상이 나뉘기 한참 전에 자리 잡은 것이다.
흔히 우리는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지구 모습이 아주 오래전에도 그랬으리라 짐작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지구 역사에 비춰보면 나무와 잎 그리고 초식동물이 등장한 지도 그리 오래지 않다. 과일은 그중에서도 신참이다. 과육에 가득 찬 탄수화물을 한껏 즐긴 동물들은 결과적으로 식물의 씨앗을 널리 퍼뜨리는 일을 도맡게 되었다.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공진화가 진행된 것이다. 백악기를 지나 공룡이 사라진 숲에서 곤충이나 나뭇잎을 먹던 영장류 동물들에게도 마침내 다디단 열매를 먹을 기회가 찾아왔다. 하지만 효모도 이 천금 같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일찌감치 과일에 포진한 효모는 빠르게 탄수화물을 알코올로 바꾼 다음 세균이나 곰팡이가 도저히 자리 잡지 못할 위험한 공간을 조성했다. 알코올 농도가 높은 상황에서 버틸 수 있게 스스로를 무장한 효모는 이제 느긋하게 식사를 즐기면 되었다.
효모와 제휴했다고 보기는 어렵겠지만 인류의 조상은 효모의 발효 산물을 최대한 이용했다. 인류의 조상이 숲에서 드넓은 초원으로 내려오면서 벌어진 일이다. 땅에 떨어져 발효되기 시작한 열매에는 알코올이 들어 있다. 하지만 이미 강력한 알코올 분해 효소를 장착한 인류는 과일의 탄수화물과 알코올, 효모까지 한입에 털어 넣고 짧게나마 수확의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인류는 알코올을 끓여 순도 높은 술을 만드는 증류(蒸溜) 기술을 발명했다고 스스로 자부하지만 발효는 오롯이 효모의 창작품이다. 술자리가 잦은 연말이다. 잔을 부딪칠 때 한 번쯤은 효모에 대해서도 생각하자. 지구에는 인간 말고도 다재다능한 완전체들이 즐비하다. 그러니 효모를 위해 건배!!
김홍표 / 아주대 약학대학 교수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