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생김새가 대체로 한쪽이 곧고 다른 한쪽이 둥근 반달처럼 생겼다 해서 반달돌칼이라고 한다. 랴오허강[遼河] 유역에서부터 한반도 남단에 이르기까지 전역에 걸쳐 분포한다. 반달칼을 만드는 데는 두께 0.5cm 안팎의 납작한 편암 ·점판암 계통의 돌을 많이 썼는데, 겉을 매끈하게 갈고 한쪽 가에 날을 세웠다. 반달칼의 한복판에나 혹은 등쪽으로 약간 치우친 곳에는 보통 한 개 내지 두 개의 구멍이 뚫려 있는데 이 구멍 사이에 끈을 꿰어 끈 사이로 손가락을 집어 넣어 사용하였다.
전체적인 형태와 날부분과 등부분의 형상에 따라 여러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대체로 물고기 모양[魚形] ·배 모양[舟形] ·장방형 ·삼각형으로 분류되는데, 직사각형과 반달형이 기본형이며 후기에는 삼각형이 출현한다. 장주형(長舟形) 돌칼은 한국 서북지방의 고인돌 및 팽이형토기문화와 결합하여 쓰였다는 것이 통설이다. 장방형돌칼은 대부분 양날[兩刃]로 동북지방과 압록강 중상류 유역에서 상당수 발견되며, 남하하여 여주 흔암리에서도 쓰이게 되었다. 단주형(短舟形)은 장주형에서 발전한 형식으로 남한의 전지역에서 쓰여지며, 삼각형 돌칼은 영암 월송리, 부여 송국리, 대평리와 같이 남한만의 지역성이 심화된 것이다. 그리고 동북지방은 반달돌칼문화가 전파되었지만 농경이 어려워서인지 반달칼이 널리 쓰이지 않았으며, 장방형의 돌칼이 많이 쓰였다.
한편 압록강 유역과 그 이북의 중국 동북지방에서는 휘인짝날과 곧은조개날[蛤刃]의 두 가지 반달칼이 모두 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그 기원은 중국 양사오[仰韶]문화계와 룽산[龍山]문화계의 돌칼에서 찾을 수 있다. 양사오식은 장방형, 룽산식은 반달형이 주류인데, 한국에서는 함경도에 장방형돌칼이 있지만 그 이외 지역에서는 대개 룽산형식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중국 반달칼은 대부분이 등이 둥글고 날이 곧은 데 비해 우리 것은 등이 곧고 날이 둥근 것이 특색이고, 날도 중국 것은 조개날인 데 비해 우리 것은 한쪽 면만을 갈아서 세운 외날이 특징이다. 특히 충청도 ·전라도 해안지방에서는 지역적 형식으로 세모꼴 칼이 유행하였다. 이 칼은 한국에서는 평북 용천군 청등말래유적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이미 신석기시대 말부터 쓰여지기 시작하여 본격적으로 농경이 시작되는 청동기시대에 들어서서 한반도 전역에 널리 파급되었다고 믿어진다. 특히 청동기시대에 많이 쓰여졌는데, 지금까지 드러난 한국 청동기시대의 집자리유적에서는 거의 예외없이 반달돌칼이 나왔으며 그것도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대표적인 유물에 든다. 한국에서 이처럼 반달칼이 많이 드러나는 사실은 그때 사람들의 생산활동에서 농업의 비중이 컸다는 것을 말하여 준다. 이 칼은 일본으로도 전파되었다. 일본에서는 야요이시대 초기에 삼각형과 단주형의 돌칼이 발견되는데, 이들 모두는 한반도에서는 가장 늦은 시기의 것이고 남부지방에서 성행한 것으로 일본에의 농경 전파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반달돌칼은 농경의 도구임이 분명하나 농경의 시작과의 관계는 명확하지가 않다. 반달칼 사용 이전인 황해도 지탑리 지층에서 탄화된 조와 함께 곰베괭이가 발견되어 반달칼 이전으로 농경이 소급될 증거가 있다. 게다가 반달칼은 수확의 도구이지 재배하는 도구는 아니라는 점에서 반달칼과 농경의 관계는 아직 불분명하다. 다만 삼각형돌칼이 남한지역과 일본의 도작의 증거라는 것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이러한 돌칼은 돌낫과 함께 청동기시대 후기까지 주요 수확구로서 계속 사용되었으나 초기철기시대에 이르러 철제반달칼 ·철제낫 등으로 대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