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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가 귀화 중국인의 후예이고 김알지가 흉노족의 후예라면 도대체 지금 우리는 상당수가 중국인의 후예(특히 경주김씨, 개성왕씨, 전주이씨)이고 결국 그들이 세우고 통치했다고 봐야 되는지 고려 태조 왕건의 조부인 작제건에 대해서도 고려 태조 왕건의 조부 작제건에 관한 아래 글에 대해서도 설명바랍니다. 삼태극 카페 관계잔느 왜 유독 조선왕조 5백년의 정통성을 훼손하고 있는지 만약에 고려 왕조가 귀화 중국인의 손자가 세웠다면 맹자의 정치관에 입각한 이성계의 역성 혁명은 반드시 정당화 되어야 합니다. 폐가입진일테니까! 고려말 왕통의 순혈성은 원(몽고)나라로 인해 이미 오염되었다고 보여지니까. 그렇다고 하더라도 인종학적이나 확실하게 현, 한국인 토종인의 서조인지 중국인의 후손인지 입증되지 않은 가설로 나라와 선조들을 욕되게 하지 마세요! 미국은 아프리카 이주민의 후손이 대통령을 하고 있어도 이런 문제를 당신들처럼 뒷담화 치는 식으로 소란을 피우지는 않아요. 무엇이 문제인지 왜 자꾸 무궁화 삼만리 유구한 1만년의 대한민국 역사에 대한 정통성을 훼손하는지 어떤 목적으로 때국놈 앞잡이 같은 발언을 하는지 혹시 그대들이 귀화 중국인의 후손이 아닌지 그래서 우리 역사 말살정책인 동북공정을 비호하는 지 우려된다 내가 알기로는 요임금 순임금도 노자도 다 동이족의 후예로 알고 있다. 또한 중원(중국) 영토의 상당부분이 우리 땅으로 알고 있다. 그야말로 때국놈 앞잡이 같은 그대들이여! 우리나라 역사 특히 상고사부터 근세사까지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역사 인식과 접근이 필요하다고 보는데 이에 대하여 답변 바랍니다.
고려 의조
의조(懿祖,?~?)는 고려의 추존왕이며 고려 태조(太祖)의 할아버지로써 이름은 작제건(作帝建)이며 국조(國祖)와 정화왕후(貞和王后)의 아들이다. 918년, 고려 왕조의 성립 이후 의조 경강대왕(懿祖景康大王)으로 추존되었다.
조선 세종(世宗)때인 1449년, 정인지(鄭麟趾)가 편찬한 고려사(高麗史)는 김관의가 고려 의종때 지은 편년통록을 인용하여 의조 작제건의 탄생설화를 수록하고 있는데 아래가 그 내용이다.
당(唐)나라 선종(宣宗)의 나이 13세 때는 목종(穆宗)의 재위 때인데 장난 삼아 황제의 용상에 올라가 신하들에게 절[揖]하는 자세를 짓거늘 목종(穆宗)의 아들 무종(武宗)은 마음으로 그를 꺼려하더니 무종(武宗)이 즉위하매 선종(宣宗)이 궁중에서 해(害)를 만나 기절하였다가 다시 소생하여 몰래 빠져 나와 멀리 도망하여 천하를 두루 돌아다니며 고루 세상의 험난함을 맛보았다. 염관(鹽官)의 안선사(安禪師)가 그의 얼굴을 알아보고 대우가 특히 각별하였으므로 염관(鹽官)에 가장 오래 머물렀다. 또 선종은 일찍이 광왕(光王)이 되었는데 광군(光郡)은 곧 양주(楊州)의 속군(屬郡)이요 염관(鹽官)은 항주(抗州)의 속현(屬縣)이니 다 동해에 접하여 있어 상선이 왕래하는 지방이었으므로 화를 무서워하여 항상 깊이 숨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그러므로 산수를 유람하는 것으로 명목 삼아 상선을 따라 바다를 건넜다. 선종이 마가갑(摩訶岬) 양자동(養子洞)에 이르러 보육(寶育)의 집에 머무를 때 두 딸을 보고 기뻐하며 옷이 따진 곳을 꿰매 주기를 청하였다. 보육(寶育)은 중국에서 온 귀한 사람임을 알아차리고 마음 속에 "과연 술사(術士)의 말과 부합된다."고 생각하고 곧 큰딸로 하여금 명에 응하게 하였더니 문턱을 넘다가 코에 피가 흘러나오므로 진의(辰義)를 대신으로 드디어 천침(薦枕)하게 되었다. 기월(期月) 동안 머무르다가 임신하였음을 깨닫고 작별할 때 말하기를, <나는 당(唐) 나라의 귀성(貴姓)이라.> 하고 활과 화살을 주며 <아들을 낳거든 이것을 주라.>고 하였다. 곧 아들이 태어나니 작제건(作帝建)이다.
또한 충선왕이 원나라에 있을 때 원나라 한림학사가 왕에게 '듣건대 대왕의 조상은 당나라 숙종 황제에게서 태어났다고 한다는데, 그것은 어디서 근거한 말입니까? 사실 숙종은 어려서부터 한 번도 대궐 밖을 나간 일이 없고 안록산의 난이 있었던 때에는 영무에서 즉위하였으니 어느 틈에 조선에 가서 자식을 둘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었는데 충선왕이 대답을 못하자 편년강목의 저자 민지가 대신 대답하기를 '그것은 우리 국사에 잘못 쓰인 것입니다.사실은 숙종이 아니고 선종이었습니다.'라고 대답한 일화가 있다.[1][2]
기록에서는 작제건이 당(唐) 선종(宣宗)의 아들이라고 기록되고 있으나 고려 당시에 왕실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해 만들어낸 이야기로 보여지며 그 신빙성은 희박하다.
코리안 신대륙발견 -
왕건의 조부 '작제건'은 고래사냥 '작살잡이'
신라금관에 작살(出자형) 상형이 있다면, 고려시조신화의 작제건은 작살잡이로 상징되어 나타난다.
선사시대 고래토템 숭배에서 작살잡이는 무속적으로도 기능적으로도 중요한 자리에 있었다. 그것은 샤먼의 위치에서 통치자들의 위치를 상징하는 자리였다. 그래서 왕 자신이 작살잡이의 상징으로 신라 금관의 출(出) 자형 상형은 작살을 상형한 것이라고 나는 이미 앞선 글에서 논했다. 이 글에서 고려 태조 왕건의 할아버지 작제건이 '작살잡이' 상징으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토템 신화학적으로 분석해보일 것이다.
<삼국유사>에서 말하는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와 석탈해는 고래잡이 자손이었다는 것은 이미 앞선 글에서 논했다. 고려시조 왕건은 작살잡이 후손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는 작제건 신화는 얼마나 우리 민족이 고래잡이 토템숭배 전통이 고대 시조신화에 깊이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알게 한다.
'작제건'이라는 이름 자체가 '작살잡이'라는 음운에 이어진 표현이라고 하면 음운학적인 추적의 모호함이 있을 것이다. '작살'은 한자말도 아니고 어원이 밝혀진 것이 없다. 시기적으로 신라시대 인물인 작제건(作帝建)이 고래 '작살잡이'에서 그 이름이 연유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신라시대의 '거칠부'(거친 사나이), '지철로왕'(저절로 왕=지증왕), 노힐부득(노들부들한 인품), 달달박박(딱딱하고 빡빡하다는 성품)의 우리말 표현이 한자로 표현된 구결 이두 표현의 이름들은 아주 많이 등장한다.
한자 그 자체로 '황제를 만들어내는 사람'이라는 의미의 作帝建이라고 한 것은 어딘가 인위적인 것이다. "작살잡이이니까 황제가 될 수 있다"는 뜻으로 보이기에 알맞는 기존 언어에 조합된 신라의 이두식 표기 한자 이름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 이름의 유래가 어떠한 배경을 가졌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작제건은 작살잡이의 위치에 있었다고 나는 그 신화적인 구조에서 찾아내 보일 것이다. 여기 작제건(작살잡이) 신화의 그 간추린 내용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왕건의 할아버지 작제건이 장사꾼들과 배를 타고 그의 아버지를 찾아 바다로 나가고 있을 때 안개 구름으로 인하여 사흘간 배가 풍랑으로 표류하여 죽음에 직면하자 뱃사람들은 점으 치게 된다. 바다가 사나운 것은 이 배에 삼한 사람이 있어서 용왕이 노한 것이라고 하며 삼한 사람을 찾아 바다에 버려야한다고 했다. 이에 작제건이 스스로 물 속으로 뛰어들어 머지 않은 곳에 바위가 있어 올라간다.
여기에서 배가 풍랑이 이는 바다에 천둥도 없이 안개와 구름만 있는 채 표류했다는 것은 범고래 떼를 만나 소용돌이 풍랑을 만난 것을 의미한다고 나는 풀이한다.
거기에 제물로 던져진 작제건이 올라간 '바위'는 고래 등을 의미했다고 할 수 있다. 요나와 작제건이 만난 풍랑은 바람에 의한 것이 아닌 고래떼에 의한 것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요나가 들어간 고래 즉 네비아단은 바다의 괴수로 서양 역사의 중요한 대도시 문명의 상징으로 철학화되어온 배경에는 원시 고래토템 숭배가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작제건이 올라탄 '바위(고래)'에 백발 용왕이 나타났다는 것은 바위=용왕=고래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 용왕(고래)이 백년 묵은 늙은 여우를 활로 쏘라고 작제건에게 요청한다. 바다에서 '바위'가 있고 거기에 '용왕'이 나타나 '늙은 여우'와의 갈등 관계가 나오는 장면을 바다의 현실로 바꾸어보면 그대로 수염고래류인 대왕고래와 이빨고래류인 범고래 또는 상어가 싸우는 장면을 드러내는 고래잡이들의 무속적 신화적 내용으로 나타낸 것으로 상징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다의 이빨고래류 또는 상어를 '여우'라고 한 것은 아메리카 인디안들에게 여우와 늑대를 범고래의 지상 버젼 또는 그 대항마로 자주 묘사되는 것에서도 볼 수 있다. 그래서 작살잡이 작제건은 대왕고래 토템용왕의 요청으로 범고래를 활로 쏘아 죽인다. 범고래가 뜯어먹으면 결국은 작살잡이들의 고래사냥도 실패하기 때문에 범고래떼를 먼저 쫓아보내야 하는 것이 고래잡이들의 일이기도 했을 것이다.
작제건이 '활을 잘 쏘았다'는 것은 '작살잡이'의 지상버젼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 작제건이 바다에서 활을 쏘아 범고래를 잡았다는 것은 작살을 던져 잡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물론 고래잡이에는 작살로 꽂은 다음에 여러 고래잡이들이 화살을 쏘아 고래를 확실히 힘을 못쓰게 하기도 했다. 그러나 여기에서 혼자 나선 작제건의 활은 작살로 상징되는 것이다.
용왕이란 고래토템 신으로 볼 수 있으며, 풍랑을 일으킨 것은 대왕고래를 공격하는 범고래떼 또는 상어가 나타나 물결이 요란하게 일고 그 속에 배가 들어가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활 잘 쏘는 작제건이 '바다에 뛰어든다' 그래서 '바위에 올라간다'는 것은 작살잡이가 작살을 들고 고래 등에 올라타는 장면의 신화적 표현인 것이다.
여기에서 용왕 즉 고래해신에게 요청을 받은 작제건이 그때 부처로 보이는 여우를 쏘아 죽이는 장면은 고려시조 신화에서 불교적인 것보다 고래토템과 연관한 신선도가적인 전승이 얼마나 중요한 권위를 드러내주는 것인지를 보여준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작제건이 작살(활)로 여우(범고래)를 찔러 죽이니 그 댓가는 대왕고래(Blue Whale)을 잡아낸 댓가가 따라오는 것이다. 그것을 '백발 용왕(대왕고래)'가 그 댓가로 칠보를 작제건에게 주고 그 딸 용녀를 데리고 가게 했다는 것이다. 딸이란 대왕고래 새끼까지 데리고 왔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다.
전체적인 작제건 신화 구조에서 작제건은 고래잡이배의 작살잡이의 혈통가문이라는 사실을 강조함으로써 그 손자 왕건이 위대한 작살잡이 후손이라는 용맹있는 인물임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백발 용왕은 대왕고래이면서 그 대왕고래는 아메리카 인디안 고래잡이 전통으로 말하면 추장의 화신이기도 하다. 토템 신화학에서 사냥하는 대상인 대왕고래는 해신이면서도 사냥대상인 복합적인 야누스 의미를 가진다. 그런 동시에 고래 자체가 대왕을 의미하며 작살잡이 자신을 의미한다.
공포에 떨면서도 모시는 것, 사냥을 하면서도 숭상한 것, 사냥 대상이 사냥하는 자신이면서 지상의 최대 통치자의 의미를 가지는 것이 원시 토템숭배시대의 사슴사냥과 고래사냥에서 존재했다.
작살잡이 작제건은 그래서 황제를 대신한 '作帝建'이며 범고래를 물리치고 대왕고래를 잡아 그 댓가를 선장 또는 고래잡이 마을 족장에게 선물 댓가를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메리카 인디안 고래잡이에서 작살잡이가 성공적으로 고래에 작살을 던져 고래를 잡게 되면 고래고기 부위의 첫번째 배분의 자격을 가지며, 그 보상이 추가되어 마을 추장으로부터 포상이 있었다. 작제건은 '백발 용왕'으로 묘사된 '추장'으로부터 칠보를 보상으로 받는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추장의 딸'과 추장가문의 작살잡이 심볼인 '휴대용 토템폴'까지 부여받는다.
훌륭한 작살잡이 출신이 명문가에 혼인하는 것을 의미하는 의미이기도 하며, 그 가문의 상징 홀(笏)을 전수받기도 하는 것이 용왕의 딸 용녀가 그 가문의 보물인 '버드나무 지팡이'를 전수받기를 요청한 것이다. 여기에서 모계 데릴사위 계승을 보여주고 있는 것도 원시 토템숭배시대의 내용을 그대로 전해주고 있다.
작제건이 용왕에게 받은 '버드나무 지팡이(楊杖)'는 발해의 토템폴과 유사한 모양을 한 것이라고 나는 추정한다. 그것은 가문의 족보와도 같은 토템 폴이기 때문이다.
고래(물고기) 위에 개구리가 있고 그 위에 태양새와 인디안 시세열(Sisuitl)의 조합인 용이 있다.
*인디안들의 휴대용 토템 폴인 '토킹 스틱(Talking Stick)'
개구리 기단부를 보여주고 있는데 꼬리가 거북과 유사하게 묘사되어 있다.
http://www.islandnet.com/~hjrice/sticks.html
*하이다 인디안들의 무속적 지팡이.
Haida Spirit Cane. 19c
작제건이 받았다는 '버드나무 지팡이(楊杖)'는 인디안들의 토킹 스틱과 같은 휴대용 토템 폴일 수 있다.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덕만공주가 어렸을 때 아버지 진평왕으로부터 받았다는 "어출쌍생성골남진(御出雙生 聖骨男盡)의 내용을 미세하게 새긴 그러한 왕가의 상징 물건과 같은 것이 작제건이 받았다는 '양장(楊杖)'이며 위의 사진에서 보는 발해 토템폴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드라마상에서는 장식이 정교하게 새겨진 장도칼과 그 칼집으로 나와 있지만, 무속적으로 본래는 '버드나무 지팡이(楊杖)'와 같은 토템 폴이 가문의 보물로 전승되었을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왕건의 고려 창건은 천년 신라의 신화적인 전통과 그 권위를 극복하는 시조 강화가 중요한 과제였을 것이다. 그래서 왕건의 시조들은 '육조'는 고구려 계통의 산신인 호랑이 토템인 호경에서 시작하여 신라 계통인 해신인 작살잡이 작제건까지 동원하여야 했을 것이다. 작제건이 올라탄 바위는 그래서 연오랑과 세오녀가 올라탄 바위와 같은 고래잡이들의 고래등을 의미하는 것이다. 작제건이 올라탄 바위는 처용암이며 대왕암의 상징이기도 한 것이다.
신라 왕실의 탈춤으로 들어간 처용탈춤의 근원지는 작살잡이 무속 춤이었다. 그래서 고려시조신화 속에서 작살잡이 작제건으로 상징적인 묘사 속에서 울산 반구대 고래 암각화 인근인 처용암 섬에서 비롯한 신라 왕실의 고래잡이 무속의 전승을 포함시켜야 했을 것이다.
더불어 앞선 글에서 밝혔듯이 문무대왕의 해중능인 대왕암의 물갇힌 모습이 고래를 닮아 있듯이 신문왕이 만난 대왕암 바위에서 나타난 신룡 대신에 작제건은 바위에 올라 용왕을 만난 것으로 고려 시조신화 속에 묘사시킨 것이다.
만파식적 이야기에 나오는대로 진평왕이 움직이는 바위산 위에서 신룡에게서 받았다는 그 진평왕의 옥대(玉帶)란 발해 노하침 고분군에서 발굴된 '허리띠 장식'과 같은 토템폴 장식이 있었다고 보아야 하며, 작제건이 받았다는 '버드나무 지팡이(楊杖)'은 그래서 신라 천년의 고래토템 숭배의 신화적 전통을 무시할 수 없었던 계승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나는 고려시대 숟가락이 기존의 '제비닮은 모양'이 아니라 고래를 닮아 있다고 생각한다. 신라 천년 고래토템 숭배의 전승이며, 고려시대 신주(신주) 또한 신라의 장보고의 신주의 전승인 것이며 여말선초의 거북선으로 이어져 임진왜란 때에 바다에서 대활약한 '고래토템' 전승으로 이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12/11/09 오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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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안 신대륙발견> '작살낸다'는 성적인 속어는 고래 작살잡이 제의(祭儀)에서 유래
Spoon
Field Museum 14521
Mountain sheep horn spoon with totemic carved mountain goat horn handle (black).
*Haida Horn Spoon
*고려시대 청동수저
제비 아닌 고래 형상
*속초 교동 출토 숟가락
*무령왕릉 청동 수저
전통 자물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