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걸리는 우리나라 술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술이다.
막 걸러서 마셨다고 해서 막걸리라고도 불리지만,
어원은 명확히 확인되지 않고 있다.
2009년의 힛트 상품 열 개 중 1위가 막걸리였다.
올 한 해도 그 위용은 변하지 않을 것 같다.
막걸리에 얽인 역사와 사연을 살펴보고자 한다
탁주(濁酒)에 물을 타서 걸러내 싱겁게 마신 술이 막걸리이다.
이화주(梨花酒), 소곡주(小麴酒/少麴酒/素麴酒) 등도
탁주에서 용도에 따라 걸러진 것으로 이들 술의 모체가 탁주이다.
막걸리와 탁주라는 등식은 잘못되었다.
막걸리의 하나로 보는 이화주는 쌀로 빚은 누룩으로 만들고,
제조법도 달라 밀 누룩을 쓰는 일반 막걸리와 차이가 난다.
조선시대 귀한 쌀로 누룩까지 빚어 만들 만한 여력을 가진 건
사대부 가문들 뿐 이었다.
농민들은 밀 누룩으로 빚어 부담이 적은 막걸리를 나누어 마시며,
연대감을 느끼고 힘겨운 노동에 흥과 힘을 돋우기 위한
활력소로 쓰여 농주(農酒)라 불려왔다.
장유(張維 1587~1638)는 그의 시문집인 계곡집(谿谷集)에서,
‘술지게미/ 밥알찌꺼기-밥알 둥둥 뜬 탁주 한 사발(濁酒帶寒糟)’
이라 해서 그 차이를 말하고 있다.
당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 772년 ~ 846년) 의
항주춘망(杭州春望) 시의 자주(自註)에 의하면
“항주 지방의 풍속은, 술을 빚어서 배꽃이 필 때에
익는 술을 이화춘이라 호칭한다.(其俗釀酒 趁梨花時熟 號爲梨花春)”
라 하여 이화주라는 말이 이에서 비롯되었을 것으로
추측(조선시대 문헌에서는 한결같이 배꽃 필 때 누룩을 빚는데
이를 이화곡이라고 하였다)하기도 한다.
한말(漢末) 때는 기근이 심해서 조조(曹操)가 금주령을 내리자
주객들이 술이라는 말을 피하기 위하여 청주(淸酒)를 성인(聖人)이라 하고
탁주(濁酒)를 현인(賢人)이라고 불렀다.
이때 위나라 상서랑(尙書郞) 서막(徐邈)이 몹시 술을 좋아한 나머지,
금주령을 어기고 술을 마시다 적발되자 “성인에게 걸려들었다.〔中聖人〕”
라고 익살을 부렸는데,
뒤에 문제(文帝)가 서막을 보고는
“요즘도 성인에게 걸려드는가?〔頗復中聖人不〕”라고 묻자,
“아직도 자신을 혼내지 못하고 때때로 다시 걸려들곤 합니다.〔不能自懲 時復中之〕”
라고 답변한 고사(三國志 卷27 魏書 徐邈傳)가 전해진다.
고려 말 문인들의 스승이었던 가정(稼亭) 이곡(李穀)은 그가 쓴 가정집(19권)에,
‘막걸리에 누런 국화 숭문동의 오늘이여 / 白醪黃菊崇文洞
나도 모르게 소맷자락 휘저으며 덩실덩실 / 不覺僛僛舞袖斜'
라 하였고,
그의 아들인 이색은 목은시고(牧隱詩藁 35권)에서,
‘막걸리 맛은 시원하고 부꾸미는 향긋하고 / 芳醪味冽餠生香’
라 써서 향기 좋은 막걸리(芳醪)가
만인의 사랑을 받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고려 충렬왕 22년 민지(閔漬 1248-1326)는 그 직을 물러난 뒤,
왕명을 받고 찾아 온 신하에게 막걸리를 대접했다.
신하는 왕에게 복명하기를 “민지는 비록 재상이나 가난하기가 짝이 없었습니다."
라고 보고하자, 충렬왕은 쌀 1백 석을 하사하였다고
고려사절요 (21권)는 전하고 있다.
밀직사는 당시 중서문하성과 함께 최고 관부로 취급되었으며,
밀직은 조선조의 승지급으로 정 3품 당상관이다.
이로보아 민지는 왕명 출납과 숙위(宿衛)·군사기무를 담당하던
밀직(密直)이라는 고위 관리직에 있었으나
청렴하여 가난에 몹시 시달렸던 것 같다.
막걸리 밖에 대접할 수 없었던 민지는
정가신(鄭可臣 ?∼1298)이 지은 천추금경록(千秋今鏡錄) 7권을
권보(權溥)와 교열, 증수하여 세대편년절요(世代編年節要)라 이름하였고,
또 본국편년강목(本國編年綱目) 42권을 편찬하였으나
모두 전하지 않고 있다는 데 있다.
금경록(金鏡錄)은 고려 태조의 5대조인 호경대왕(虎景大王)으로부터
원종(1259-1274) 까지 5백여 년의 일을 기록한 역사서이다.
고려사를 편찬한 조선 성리학자들은 민지를 평하기를,
“그는 문예는 있으나 습속이 많고 심술이 바르지 않아
나인(內人)을 아첨하여 섬기고,
또한 성리(性理)의 학을 알지 못하여
주자(朱子)가 말한 종묘 신위의 차례인
소목론(昭穆論)을 그르다고 하였으니 편벽함이 있다.”
고 극열하게 비난했다.
조선의 국교인 성리학을 비하했으니,
이를 신봉한 사대부들 입장에서는 눈에 가시였을 터이다.
대륙을 거점으로 건국한 고려의 황제국 위상이 나타난
역사서에 질겁하여 7대 실록과 함께 분서했을 가능성을 본다.
7백여 년 전, 천손의 역사를 기록한 뒤,
고려의 향긋한 막걸리 한 잔 걸치며 감상에 젖었을
성현들의 자취가 못내 그립다.
조선의 역사는 쇳소리가 나고,
그 이전 역사는 왜 가슴 저 깊은 곳에서만 울리게 하는가.
오늘 흥겨워 마시는 막걸리 한 잔,
그 속에 담긴 역사로
화들짝 놀라 가슴 저미는 이 몇이나 있을까?.
한문수 2010. 1. 12. 16: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