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년 7월 19일 금요일 아침편지 ♡
"한 위대한 한국인을 눈물로 추모하며"
지금부터 거의 60년 전인 1965년 7월 19일 오전 0시 35분. 하와이의 마우라 나니 노인요양원에서 연세가 90인 한 한국인 노인이 유명을 달리하였습니다. 하와이 망명 5년 만의 일이었습니다. 서거하시기 한 달 전부터 피를 토했습니다. 숨을 거두기 하루 전인 7월 18일엔 너무 많은 피를 토하셔서 의료진조차 크게 걱정했습니다. 그의 마지막 임종을 지켜본 분은 평생 동안 곁에서 돕고 수발하던 아내와 대(代)라도 잇겠다며 들인 양자, 그리고 하와이 교민 한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마지막 호흡을 크게 한 번 들이쉬더니 이내 영면의 눈을 감았습니다. 파란만장한 생애를 함께 걸어오며 어떤 어려움에도 우는 법이 없었던 그의 아내가 오열했습니다.
작가 이동욱씨는 하와이에서 국부 이승만의 영결식 한 장면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한 미국인 친구가 울부짖었다. "내가 너를 알아! 내가 너를 알아! 네가 얼마나 조국을 사랑하였는지! 그것 때문에 네가 얼마나 수많은 고통을 겪어 왔는지 내가 알아! 잃어버린 조국, 빼앗긴 국토를 되찾으려는 그 애국심 때문에 그토록 온갖 조소와 비난받으며 고난의 가시밭길을 걸어온 것을 내가 알아!' 그 미국인은 장의사였습니다. 그 장의사는 1920년 대에 하와이에서 일하다 죽은 중국인 노동자들의 시신을 중국으로 보내주는 일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승만이라는 중년의 조선인이 찾아와 중국인 시신을 안치할 관(棺)에 숨어서 상하이로 가겠다고 했습니다. 한국 독립운동을 하는데 일본이 자신을 현상수배 중이라는 말도 했습니다. 미국인 장의사는 이승만의 충심을 높이 사서 그를 실제로 관에 들어가도록 해서 상하이로 보냈고 결국 이승만은 중국 밀항에 성공하였습니다.
"너의 그 애국심 때문에 네가 얼마나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고,
또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비난을 받아 왔는지 나는 안다"는 피를 토하듯 한 절규!. 미국 장의사의 이 절규는 그냥 넉두리 푸념이 아니라 가슴 깊은 곳에서 나온 애달픈 절규였습니다.
이승만 박사의 유해는 서거 4일 후인 7월 23일 미공군수송기 편으로 김포공항에 도착했습니다. 유족들은 당초 정부에 '건국 대통령으로서 국장으로 예우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야당인 민주당과 좌파 학생들 및 시민단체들이 반발하는 바람에 국민장으로 결정되었습니다. 유족들은 국가적이 위신도 있는데 그럴 수는 없다면서 국민장을 거부해 결국 가족장으로 치러지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7월 27일 정동교회에서 영결식은 가진 후 수십만 명의 애국시민이 애도하는 가운데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필자 역시 세대가 세대인지라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부정적 얘기만 듣고 자랐습니다.
그러다가 그의 생애 전체를 보고 머리를 숙이게 된 것은 쉰이 넘어서 였습니다.
필자는 국립묘지 한쪽에 있는 이 위대한 대통령의 묘소를 찾아가 보았고 그 앞에서 "만약 우리 건국 대통령이 미국과 국제정치의 변동을 미리 내다보는 혜안이 없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 자체가 존재할 수 있었을까'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만이 할 수 있는 건국이었기에 이 역사의 물음 앞에 나는 머리를 가로저으며 흐느끼고 말았습니다. 그 없이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그 없이 우리가 자유 민주진영에 서고, 그 없이 전쟁에서 나라를 지키고 그 없이 한·미 동맹의 대전략이 가능했겠느냐 는 질문에 누가 "그렇다"라고 답할 수 있을까?'
추모비에 적힌 지주(地主) 철폐, 교육 진흥 제도 신설 등 지금 우리가 디디고 서 있는 바탕이 그의 혜안에서 나온 것은 그렇다 치고 이 나라의 원자력사업조차 그에 의해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그는 무지몽매한 나라에 태어났으나 그렇게 살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리하여 열아홉에 배재학당에 들어가 외국인들의 눈을 통해 나라 밖 신세계를 처음으로 접했습니다. 썩을 대로 썩은 조정을 언론으로 개혁해 보려다 사형선고까지 받았습니다. 그러한 상황의 감옥에서 낮에는 심문을 당하고 밤에는 영어 사전을 만들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독립하는 길은 미국을 통하는 길밖에 없다고 믿었기에 1905년 나이 서른에 조지 워싱턴 대학에 입학하고
하버드대 대학원을 거쳐 프린스턴대에서 국제정치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1941년, 그는 미국에서 'JAPAN INSIDE OUT(일본의 가면을 벗긴다)'을 펴냈습니다. 그 책에서 그는 "일본이 반드시 미국을 공격할 것"이라고 역설했습니다.
책이 나온 지 넉 달 뒤 일본이 추측이 아닌 실제로 진주만을 공격했습니다. 미국 정치인들은 한국인 이승만을 놀란 눈으로 새롭게 보았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4년 이 책의 한국어판 서문을 이렇게 썼습니다.
"일본인은 옛 버릇대로 밖으로는 웃고, 내심으로는 악의를 품어서,
교활한 외교로 세계를 속이는,. 그러면서도 조금도 후회하거나
사죄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을뿐더러... 미국인들은 지금도 이를 알지 못하고 일인들의 아첨을 좋아하며 뇌물에 속아 일본이 재무장과 재확장에 전력을 다하고 있는 데도… 심지어는 우리에게 일본과 친선을 권고하고 있으니…." 계속해서 그는 '우리는 미국이 어찌하든지 간에 우리 백성이 다 죽어 없어질지언정 노예만은 되지 않겠다는 각오로 합심하여 국토를 지키면 하늘이 우리를 도울 것이다"라고 머리말을 맺었습니다.
뱁새가 봉황의 높은 뜻을 어찌 알리요 마는, 관에 들어가는 순간까지 반일(反日)로 살아온 그를 친일(親日)이라고 하고,
평생 용미(用美)한 그를 친미(親美)라고 하는 것은 좌파들이 사실을 모르거나 알면서도 매도하는 것입니다.
최정호 울산대 석좌교수는 "어지러운 구한말 모두 중. 일. 러 만 쳐다보고 있을 때, 청년 이승만은 수평선 너머의 미국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그를 19세기 한국의 콜럼버스라고 부른다. 우리 수천 년 역사에 오늘날 번영은 오로지 대한민국을 건국한 이 박사의 공로다. 그런데 지금 우리 국민은 이 위대한 지도자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라고 했습니다.
거인이 이룬 공(功)은 외면하고 왜곡하며, 과(過)만 파헤치는 일들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건국 대통령이며 국부인 그의 기일을 쓸쓸히 보내며 그에게 감사할 줄 모르는 우리의 자해(自害)와 업(業)을 생각합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 하와이로 물러난 후 한 겨울에 난방할 땔감도 없었습니다. 하와이에선 교포가 내 준 30평짜리 낡은 집에서 궁핍하게 살았습니다.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의 친정에서 옷가지를 보내줄 때 포장한 종이 박스를 옷장으로 썼습니다.
교포들이 조금씩 보내준 돈으로 연명하며 고국행 여비를 모은다고 5달러 이발비를 아꼈습니다.
노부부는 손바닥만 한 식탁에 마주 앉아 한국으로 돌아갈 날만 기다렸습니다. 그렇게 5년이 흘렀습니다. 이 대통령이 우리 음식을 그리워하자 프란체스카 여사가 서툰 우리말로 노래를 만들어 불러줬다고 합니다.
이 대통령도 따라 불렀던 그 노래를 이동욱 작가가 전합니다.
'날마다 날마다 김치찌개 김칫국/
날마다 날마다 콩나물국 콩나물/
날마다 날마다 두부찌개 두부국/
날마다 날마다 된장찌개 된장국.'
아무도 없이 적막한 그의 묘 앞에 서서 이 노래를 생각하니 목이 멥니다. 이 나라의 전직 대통령들. 온갖 부정부패로 얼마나 호의호식하며 살았고 또 살고 있습니까? 당신들은 이승만이라는 세기적인 걸출한 위인이 있어 오늘의 대한민국 있었다는 걸 아는가 모르는가? 벌레보다 못한 인간들아!~~
대한민국을 찾아주고 이 나라를 건국한 세계인이 존경했던 한 민족 어버이 이승만 박사는 개, 돼지로 전락한 한국인들의 배신으로 이역만리에서 이렇게 세상을 떠나셨고 이제 7월 19일 덧없이 추모일을 다시 만납니다. 그분의 후배들인 우리만이라도 그분의 기일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 옮긴 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