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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절과 연결
강 용 호 명예교수(생명응용과학대학 생명공학과)
그날이 왔다.
아주 저 멀리서,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던 그날이 드디어 오늘이 되었다. 약간 우울한 기분은 들었지만 평상시와 같이 아침 식사를 마치고 차를 몰아서 영남대학교 서문을 통하여 캠퍼스 안으로 들어갔다. 8월의 마지막 여름 햇살이 길가에 무성한 가로수 잎을 비추고 있었다.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거리는 나뭇잎들은 나를 보자마자, 마치 "굿모닝! 어서 와~" 하며 반갑게 인사를 하는 것 같았다. 매일 아침 이 길을 지나면 항상 마음 속으로 들려오던 반가운 인사였다. "그래, 저 나뭇잎들은 오늘로서 내가 학교를 떠나야 한다는 것을 알 수가 없지. 내일 아침에 다시 오더라도 오늘 같이 반갑게 맞이하여 줄 꺼야." 라는 생각이 들었다.
연구실로 가서 컴퓨터에 있는 마지막 자료를 USB에 옮겨 담고 연구실과 실험실을 정리 정돈하고 나니 오후 5시가 되었다. 퇴근하려고 할 때 책상 위에 있는 전화기가 눈에 띄었다. 내일이면 전화 연결이 단절되니 친구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싶었다. "이것이 내가 교내 전화로 통화할 수 있는 마지막 전화이네." 약간 비장한 감이 들었다. 왠지 이 세상을 떠나면서 마지막으로 친구에게 전화하는 기분이었다.
다음날 아침, 수업이 있어서 다시 학교를 찾았다. “어제 반갑게 맞이하던 나뭇잎들이 오늘도 나를 반갑게 맞이해 줄 꺼야.”라는 기대를 하면서 서문 입구를 통과하였다. 그러나 놀랍게도 어제의 그 나뭇잎들은 나를 모르는 척 외면하고 있었다. 햇빛은 어제와 똑같은 고도에서, 똑같은 밝기로 비추고 있었건만, 햇빛에 반짝이는 나뭇잎들은 보이지 않고 무뚝뚝한 표정으로 서있는 나무 기둥만 눈에 들어왔다. 가슴이 서늘해졌다.
"아, 은퇴한 후의 기분은 바로 이런 것이구나~"
은퇴 예정 일이 서서히 다가옴에 따라 “은퇴한 후에 학교를 다시 방문하면 어떤 기분이 들까?” 미리 상상을 하면서 적응을 하려고 애써 보았지만 모두 허사였다. 재직 중에는 아무리 상상력을 동원해도 은퇴한 분들의 허망한 마음을 그대로 느낄 수가 없었다. 배 부른 사람이 배 고픈 사람의 심정을 이해하려고 아무리 상상을 해본들 얼마나 제대로 느낄 수 있을까? 기껏해야 "많이 굶었으니 배가 홀쭉하겠지~" 정도일 것이다.
은퇴하고 처음으로 연구실 문을 열었다. 문을 열 때 마다 항상 포근하고 다정하게 느껴지던 연구실이 왠지 낯설어 보였다. 마치 정든 고향 집을 다른 사람에게 이전한 후, 옛 생각이 나서 다시 가보았을 때 느꼈던 그런 씁쓸한 느낌이었다. 이른 아침이니 혹시 연구실 전화가 아직 될지도 모른다 싶어서 얼른 전화기를 들어보았다. "삐~~~" 소리가 나면서 연결이 단절되었다. 지난 30년 동안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비정한 소리였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그것이 막상 현실이 되니 인정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다시 한번 전화기를 들어보았으나 결과는 같았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언젠가 육체를 이탈한 나의 영혼이 잠자듯 누워있는 내 몸을 바라볼 때도 이런 느낌이 들것 같다. 이 땅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함께 있었는데~, 날마다 알뜰살뜰 정성을 다하여 보살핀 몸이었는데~, 어떻게 한 순간에 이토록 비정하게 모른 척하다니~,
이제는 정말 나 혼자 가야 하나?
나홀로 도대체 어디로 가란 말인가???"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졌다. 나도 모르게 연구실 문을 열고 건물 밖으로 뛰쳐나갔다. 아침 등교시간이라 길에는 학생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혹시 나를 아는 교수님을 만날까 싶어 구석진 곳을 찾아서 하늘을 쳐다보며 무심코 걸었다. 목적도 없이 발이 닿는 대로 가다 보니 상가가 밀집한 대학교 정문이 보였다. "지금 정문으로 가서 뭘 하지?" 고민하다가 문득 ‘아이스크림을 먹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라는 말을 들은 기억이 났다. 그래서 ‘정문 옆에 있는 복지회관에 있는 매점으로 가서 아이스크림을 사 먹어야겠다’는 ‘조그만 희망’이 생겼다.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먹고 나니 정말로 울적한 기분이 조금 풀린 것 같았다. 매점에서 나와서 이번에는 미술대학 뒤편으로 이어지는 숲길로 들어갔다. 학생들이 간혹 이 길로 등교하는 것을 보기는 했으나 나는 처음 가보는 길이었다. “이 길로 계속 가면 무엇이 나올까?” 약간의 호기심이 생겼다. 미술대학을 지나서 캠퍼스 동문 입구로 향하는 길로 방향을 틀어 걷다 보니 음악대학 부근의 숲이 보였다. 음악대학 주변은 예전에 교수합창단 연습을 하면서 자주 방문한 곳이라 내심 반가웠다. 음악대학 앞쪽에 있는 숲길로 들어가 학군단 축구장을 지나치니 대학 본관 쪽으로 이어지는 오솔길이 나왔다. "어, 이 길은 바로 대학 본관 뒤로 이어지네" 은퇴하고 나서야 비로서 알게 된 새로운 길이었다.
대학 본관에서 까치구멍집 뒤로 연결되는 산속의 숲길은 평소에 내가 잘 아는 곳이었다. 어제까지는 이 길을 걸으면 “우리 집 정원”을 걷는 평안한 기분이었는데, 오늘은 “남의 집 정원”에 몰래 들어와 조심스럽게 걷는 기분이었다. 빛이 사라지면 그림자도 사라지듯이, 신분의 연결이 단절되니 마음의 연결도 단절되었다.
"어제 오후에 은퇴했는데 오늘 아침에 이런 기분이 들면 앞으로 남은 긴긴 세월은 어떻게 보내야 하나?
오, 하나님! 이제 나 어떡해요???"
불안한 마음으로 소리 없이 외쳐 보았지만 고요한 아침 숲 속은 내 발자국 소리만 크게 진동하고 있었다. 그날 이후, 강물 위에 떨어진 한 잎 낙엽처럼, 나는 어쩔 수 없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리저리 맴돌며 떠내려 갈 수밖에 없었다.
추운 겨울이 지나고 새해가 되었다. 2월의 어느 날에 명예교수님들과 함께 모임이 있어서 교내 은하정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일어서려고 하는데 조무환 교수님이 다가와서,
"강 교수님, 할 말이 있는데 잠시 시간이 있나요?"
"네, 있습니다."
"그럼 방금 식사를 했으니 옆에 계신 김한곤 교수님과 함께 운동도 할 겸 숲속 길을 산책하면서 이야기 좀 합시다."
우리는 대학 본관 뒤편에 있는 숲 속으로 이동해서 산책을 하였다. 조무환 교수님은 그동안 명예교수회에서 운영간사 일을 하시다가 새해 3월부터 김봉식 회장님 밑에서 운영위원장 일을 맡게 되었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나보고 자신이 하던 운영간사 일을 맡아줄 수 있냐고 물어보았다.
조무환 교수님은 재직시에 나와 단과대학 소속은 달랐지만, 음악대학의 이현교수님이 2014년 4월 29일에 창단한 교수합창단에서 7년동안 함께 합창 연습을 하면서 가깝게 지냈다. 우리는 매년 1월에 대구 시내에 있는 "청춘"이나 "덕호아트홀" 무대에서 호흡과 박자를 맞추며 정기공연을 하였고, 또 교내 행사를 위해 천마아트센터의 "그랜드홀"과 "챔버홀"의 무대에서 공연을 한 적도 있었다.
위 사진은 2020년 서길수 총장님 시절에 천마아트센터 그랜드홀에서 교수합창단이 영남대 재경총동창회 소속의 서울천마합창단과 함께 공연을 한 후 마지막으로 ‘영남대학교 교가’를 힘차게 부르고 있는 장면이다. 조무환 교수님은 베이스 파트여서 오른쪽 뒤에, 나는 테너 파트여서 왼쪽 뒤에 서 있었다.
명예교수회는 재직 중에도 회지인 ‘늘푸른나무’를 받아서 잘 알고 있었다. 우편함에 배달된 회지를 보면서, ‘은퇴하신 선배 교수님들이 저술활동을 하시면서 보람 있게 지내시는구나’라고 생각했었다. 내가 막상 은퇴를 한 이후에는 잘 모르는 교수님들이 대부분인 명예교수회에 참여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교회에서 장로님 이신 조무환 교수님이 갑자기 운영간사 일을 맡아 달라고 요청하시니,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그 일을 하겠다고 승낙하였다. 왜냐하면 "우연의 일치"가 너무나 극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은퇴한 첫날 아침에 숲길을 걸으면서 "오 하나님, 이제 나 어떡해요?"라고 외치던 바로 그 장소에서, 조무환 교수님이 운영간사를 맡아달라는 요청을 듣는 순간, "아, 이것은 장로님을 통해서 성령님이 나에게 보낸 메시지다!"라는 생각이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이런 극적인 "우연의 일치"는 많은 시간이 흐르고 나면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가 종종 있었다.
세계적인 Covid-19 팬데믹이 2020년 2월 18일을 기점으로 대구에서부터 전국적으로 퍼지면서 영남대학교 캠퍼스에서는 2년동안 학생들을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매년 경산시민들을 위한 벚꽃 축제가 열리던 4월 초에도 일반인들이 학교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교내 출입을 전면 차단하는 바람에 화사하게 피어난 벚꽃 길이 무척이나 외롭고 쓸쓸하게 보였다. 마치 방학이 일 년인 것처럼 ‘봄-여름-가을-겨울’ 내내 학교 캠퍼스가 텅 비어 있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학교의 모든 교수님들은 온라인으로 수업을 진행해야 했다. 처음에는 '온라인 강의'를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 무척 힘들었지만,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면서 나름대로 경험이 쌓이니 나중에는 '온라인 강의'가 더 편하고 좋은 것처럼 느껴졌다. 인류 역사상 최초로 발생한 비극적인 상황은 역설적으로 '모든 교수님들을 동시에 온라인 강의에 친숙해지게' 만드는 소중한 기회를 제공한 셈이었다.
2022년 3월은 코로나 바이러스의 감염 위험이 많이 감소되기는 했지만 공공장소에서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여전히 조심스러웠다. 3월 17일에야 나는 김봉식 회장님, 김갑수 부회장님, 조무환 운영위원장님을 만나서 신임 운영간사로 인사를 드릴 수 있었다. 그날 저녁에 집으로 돌아와서 명예교수회가 그동안 어떻게 운영되고 있었는지를 알기 위해 갖고 있던 회지 "늘푸른나무 11호"를 펼쳐보았다. 회지에는 명예교수회가 지나온 연혁이 잘 정리되어 있었다.
"은퇴 후 전국으로 흩어진 교수님들을 다시 모아 이렇게 회지를 만드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어렵게 만든 회지를 책자로만 볼 수 있도록 하면 과연 얼마나 많은 분들이 이것을 읽어 보실까? 요즘은 대부분 스마트 폰을 이용하여 온라인으로 정보를 검색하니 명예교수회와 관련된 소식도 온라인으로 볼 수 있도록 하면 좋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3월 31일 첫 임원회(참석자: 김봉식 회장님, 김갑수 부회장님, 조무환 운영위원장님, 박종갑 편집위원장님, 이헌호 편집간사님) 모임에서 ‘명예교수회 카페’를 만들면 좋겠다고 제안을 하니 모든 분들이 흔쾌히 동의를 해 주셨다.
예전보다는 인기가 많이 떨어졌지만 개인용인 Blog와 단체용인 Cafe는 Social Network Service (SNS) 도구로서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애용하고 있다. 가입자 수가 많은 ‘Naver Cafe’는 대외 홍보용으로 사용하기에 적합하나, 명예교수회처럼 특정 단체의 친목만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외부 광고 수가 적고, ‘카카오’와 연계되어 있고, 보안성도 좋은 ‘Daum Cafe’가 더 좋은 것 같았다. 임원 회의에 참석하신 분들의 동의를 얻어서 한글로는 ‘영남대학교명예교수회’로 글자를 붙여서 '고유명사'로 사용하고, 영어로는 발음하기 쉽도록 ‘YUPROFEM’ (Yeungnam University PROFessor EMeritus)을 사용하여 ‘명예교수회 카페’ 사이트를 개설하였다(https://cafe.daum.net/yuprofem ).
카페 개설은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었으나 그곳에 어떤 정보들을 담을 것인가? 하는 것은 많은 노력과 인내를 요구하였다. 먼저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것은 지금까지 발간된 '늘푸른나무 1호~11호' 회지에 있는 정보를 모두 카페로 옮기는 작업이었다. 영남대학교 중앙도서관 401호에 있는 ‘명예교수회 사무실’을 방문하여 예전의 회지를 한 권씩 집으로 가지고 오려고 했다. 다른 회지는 남아있는 재고가 많았는데 2호, 3호, 9호 회지는 한 권도 남아있지 않았다. 임원회 단톡 방에서 급히 도움을 요청하니 마침 김갑수 부회장님과 박종갑 편지위원장님이 필요한 회지를 가지고 계셔서 1~11호 회지를 모두 확보할 수 있었다.
‘늘푸른나무 1호'인 창간호를 보니 명예교수회의 설립과정이 좀더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었다. 현재의 명예교수회 조직은 2009년 5월부터 상경대의 배연수 명예교수님이 추진하시고, 그 당시 이효수 총장님이 적극적으로 후원하셔서 3개월의 준비 기간을 거쳐 2009년 7월 22일 법학전문대학원 204호에서 발기총회를 하면서 시작되었다.
위 사진은 2009년 10월 23일에 중앙도서관 401호에서 이효수 총장님을 모시고 명예교수회 사무실 현판식을 한 장면이다.
명예교수회 초대 회장(2009~11)은 배연수 교수님이 되셨고 총무간사는 김광수 교수님이 맡으셨다. ’늘푸른나무’ 회지 편집위원장은 이기철 교수님이, 편집간사는 서학수 교수님이 수고하시어 2011년 8월에 ‘창간호“를 발간하였다. 무슨 일이든 최초로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한다는 것은 엄청난 열정과 인내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명예교수회 설립과 늘푸른나무 창간호를 위하여 힘써 주신 많은 선배 명예교수님들께 고개 숙여 감사를 드립니다.
창간호 편집간사를 맡으신 서학수 교수님은 내가 영남대학교 신임교원으로 발령 받았을 때 자연자원대학 학장님 이셨다. 창간호 회지를 보면서 서학수 교수님께서도 명예교수회 일을 하고 계셨다는 것을 알게 되니, 2018년에 이미 세상을 떠나신 서학수 교수님을 다시 만난 듯 무척 반가웠다.
어느 해인가 4월 초에 자연자원대학 앞 벚꽃을 구경하러 나갔다가 교정에서 우연히 은퇴하신 서학수 교수님을 만났다. 교수님은 나를 발견하고 미안한 듯 웃으시면서 벚꽃이 너무 예뻐서 사진 찍으러 나왔다고 말씀하시며 마치 나를 피하듯이 사라지셨다. 그 때는 ”왜 나를 피하실까?“ 하며 의아하게 생각했었는데, 내가 은퇴를 한 후 교정에서 재직 중인 교수님을 만나고 보니 그때 그분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2009년에 명예교수회 사무실에 앉아 편집간사 일을 하시던 서학수 교수님의 마음도, 13년이 지난 후 내가 그 자리에 다시 앉아 운영간사 일을 하다 보니 그때 그분의 마음을 오롯이 느낄 수 있었다.
현대 물리학에서 양자 얽힘(Quantum Entanglement)은 두 부분계가 우주 공간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파동(wave)의 특성으로 서로 연결이 될 수 있다고 한다. 이런 양자 얽힘 현상은 초과학적이라서 인간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서,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리처드 파인만(Richard Phillips Feynman, 1918~1988) 박사도 ”양자 역학은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말고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 좋다” 라고 했다. 인간의 뇌파도 파동(wave)의 특성이 있으니 우리의 마음(의식)도 원하기만 하면 시공을 초월하여 서로 연결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배연수 초대 회장님은 2011년에 ‘늘푸른나무 창간호’만 발행하셨고, 2호와 3호는 2대 이원달 회장님의 임기(2012~13) 동안에 발행되었다. 창간호에서 편집위원장으로 수고하신 이기철 교수님은 회지 9호가 나올 때까지 무려 10년 동안이나 계속해서 봉사를 해 주셨다. 2호와 3호 때의 편집간사는 현재 7대 회장이신 김봉식 교수님이 맡으셨고, 총무는 장무웅 교수님이 수고해 주셨다. 회지를 발간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500만원 이상 경비가 들어가는데 회지 1호에서 3호까지는 ‘영남대학교 출판부’ 에서 발행한 것으로 보아 아마도 학교에서 경비 전액을 지원해 준 것 같았다.
회지 4호와 5호는 3대 조환 회장님의 임기(2014~15) 동안에 발행되었다. 4호의 편집간사는 최외선 교수님이 맡으셨다. 최외선 교수님은 회지 9호가 나올 때까지 6년 동안 계속해서 편집간사로 봉사해 주셨다. 이때 총무는 김갑수 교수님이 하셨는데, 김갑수 교수님도 회지 4호부터 11호까지 8년 동안 계속해서 총무로 봉사해 주셨다. 아마 명예교수회 설립 당시에는 명예교수회 전체회원 수가 적고, 참여하는 회원 수도 많지 않아서 이기철, 최외선, 김갑수 세분의 교수님들이 오랫동안 봉사를 하시게 된 것 같았다.
매년 회지를 발행하기에는 인력과 예산이 턱없이 부족한 힘든 시기였지만 참여하신 명예교수님들의 헌신적인 노력 덕분에 4대 도명기 회장님 임기(2016~17) 동안에 6호와 7호가, 또 5대 김복진 회장님 임기(2018~19) 동안에 8호와 9호가 계속해서 발행될 수 있었다.
2020년부터 시작한 6대 김광수 회장님 임기(2020~21) 동안에는 Covid-19 팬데믹으로 인하여 명예교수회의 정상적인 활동이 거의 불가능했지만 편집위원장을 맡으신 이덕수 교수님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회지 10호와 11호가 발행되었다. 2020년 10월 22일에 회칙 수정으로 “총무” 명칭이 “운영위원장”으로 바뀌면서 김갑수 교수님이 맡으셨고, 운영간사는 조무환 교수님이 하셨다. 김광수 회장님 시절의 명예교수회는 2021년 10월에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경북지역연합회(회장 서상곤 교수)와 공동으로 ‘울릉도 및 독도 방문 심포지엄’, ‘경주 한수원 본사 및 방사성폐기물 처리장'을 방문하는 단체여행을 진행하였고, 특별강연도 2회 개최하는 등 예전의 명예교수회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새로운 사업들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명예교수회 발전 과정을 전반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늘푸른나무 1호~11호’는 앞으로 명예교수회에 귀중한 역사적인 자료가 될 수 있어서 체계적으로 잘 보관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래서 모든 회지를 PDF 파일로 만들어서 ‘명예교수회 카페’의 <[종합] 늘푸른나무 PDF> 메뉴에 등록하였다(https://cafe.daum.net/yuprofem/a3p2 ).
카페에서 PDF 파일만 잘 보존하고 있으면, 오랜 시간이 지나서 회지가 모두 사라지더라도 언제든지 책자로 다시 복원할 수 있다. 누구든지 카페를 방문하여 PDF 파일을 다운 받으면 회지 전체를 볼 수 있다. PDF 파일을 다운 받아서 보는 것이 불편하신 분들은 메타버스 “ZEP-명예교수회” 사이트에 접속하면 파일을 다운 받지 않고도 모든 회지를 읽어볼 수 있다(https://zep.us/play/25wBKB ).
2022년부터 시작한 7대 김봉식 회장님의 임기(2022~23) 동안에 조무환 교수님이 운영위원장을 맡으면서 조직 운영에 필요한 Know-How가 단절되지 않고 자연스럽게 연계될 수 있었다. 회지 12호는 박종갑 편집위원장님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2023년 2월에 성공적으로 발행되었다.
회원들이 집에서 늘푸른나무 회지를 받아 보려면, 편집위원회가 노력하여 회지 출판을 완료하고 또 운영위원회가 모여서 회지를 하나씩 봉투에 담아 회원들 자택으로 우편 발송을 마쳐야 되어서 최소한 1년을 기다려야 했었다. 그러나 회지 12호부터는 회지에 실릴 글을 카페에서 <Online 늘푸른나무> 메뉴에 미리 소개 하여서 회지가 완성되지 않더라도 실시간으로 읽어 볼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제작비 절감을 위하여 대부분 흑백사진으로 실리는 회지의 글과는 다르게 온라인 상으로 보는 글은 칼라 사진 그대로를 볼 수 있는 장점이 있다(https://cafe.daum.net/yuprofem/Yudy ).
과학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YouTube’와 같이 누구나 새로운 정보를 만들고, 실시간으로 그 정보를 공유하는 수단들이 증가하면서 신문이나 서적을 찾는 사람들 수가 점차 감소하고 있다. 명예교수회도 예전에는 일년에 한번 발간되는 회지가 회원들의 소식을 알리는 유일한 정보 교환의 수단이었지만, 카페를 통하여 회원들 사이에 정보 교환이 실시간으로 이루어지는 인터넷 환경에서는 온라인으로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는 새로운 창구가 필요하였다. 그래서 카페에 <자유 칼럼>이라는 메뉴를 추가하여 회원들이 언제든지 자신의 글, 그림, 사진, 영상, 취미활동 등을 시리즈로 소개할 수 있도록 하였다(https://cafe.daum.net/yuprofem/aMvF ).
회지에 실린 과거의 역사를 카페에 옮겨 담는 것은, 새로운 자료를 만들어 가면서 카페에 담는 것보다 쉬운 일이었다. 명예교수님들이 은퇴하시면 전국으로 흩어지시니 명예교수회 회원들의 거주지역이 전국에 어떻게 분포되어 있는지 알아보았다. 해외에 거주하시는 분들은 제외하고 국내 주소가 확실한 363명의 자료를 기준으로 하였다.
위 그림에서 보듯이 거주지 분포는 대구 68%(247명), 경북16%(59명), 서울 9%(31명), 경기 5%(18명), 기타 2%(8명) 순이었다. 기타에는 대전시, 세종시, 부산시를 포함하여 강원도, 충청남도, 경상남도, 제주도에 거주하시는 분들이 계셨다.
전체 회원 수의 84%(306명)를 차지하는 대구경북 지역에 주거하시는 분들은 명예교수회가 개최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에 참여하기가 비교적 수월하시겠지만, 13%(49명)에 해당하는 서울경기 지역에 거주하시는 분들은 참여가 어려울 것이다. 앞으로 명예교수회의 발전을 위해서는 ‘서울경기’ 지부를 별도로 구성하여 ‘대구경북’ 지역과 연계하는 방안이나, 세계 어느 지역에 거주하더라도 인터넷으로 참여할 수 있는 ‘온라인 특별강연’ 방안 등을 고려해 보아야 할 것 같았다.
명예교수회에 새로운 소식이 있을 때 마다 카페의 <공지사항>이나 <News & Activities> 메뉴에서 소개하고 있었는데, 영남대학교 포털사이트에 명예교수들과 관련된 “경조사” 내용도 간혹 올라오고 있었다. 학교의 “경조사” 내용을 회원들에게 그대로 전달하기 위하여 카페에 <경조사> 메뉴를 추가하였다. 또한 학교 포털사이트에는 명예교수들과 관련된 “추대발령”과 “면직발령”에 대한 공문들도 가끔씩 올라오고 있었다. 학교의 인사발령 내용도 회원들에게 그대로 전달하기 위하여 카페에 <회원인사발령> 메뉴도 추가하였다.
명예교수 본인은 이미 학교에 없는데도 불구하고 명예교수에 대한 인사발령이 계속 공문으로 나오는 것이 좀 이해가 안 되어서 교무처 인사과를 찾아가 인사 담당자(박경자)분에게 문의를 해보았다. 명예교수는 호칭만 ‘명예교수’라 불러주는 것이 아니라 학교에 ‘명예교수’에 대한 명확한 규정이 있었다.
학교규정에 의하면 영남대학교에서 20년 이상 근무하고, 은퇴 시에 정부 포상을 받는데 결격사유가 없고, 또 본인이 원하면, ‘명예교수’가 될 자격이 있다. 그런데 매년 3월 1일이나 9월 1일자로 “명예교수로 추대한다"는 총장 명의의 인사발령이 공문으로 나와야 그 공문을 법적인 근거로 사용하여 재직시 학과에 속해 있는 개인정보를 ‘명예교수회’ 부서로 이전할 수가 있었다.
이것은 마치 A학과의 교수가 B학과로 소속이 바뀌면, 그것에 따르는 총장 명의의 인사발령 공문이 나와야 그 교수의 소속 학과 변경이 가능한 것과 같은 인사행정 절차이었다. 학교의 입장에서 보면 ‘명예교수’는 학교를 떠난 것이 아니라 단지 소속이 은퇴 하기 전의 학과에서 ‘명예교수회’ 부서로 변경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사과에 ‘명예교수 신분증’을 신청하면 학교는 재직 때와 똑같이 그것을 발급해준다.
내가 막연하게 생각했듯이 ‘명예교수’는 학교와의 관계가 '단절'된 것이 아니라 새로운 형태로 '연결' 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나니, 아름다운 영남대학교 캠퍼스는 이제 “남의 집 정원”이 아니라 다시 “우리 집 정원”이 되었다. 신분의 연결이 회복되니 마음(의식)의 연결도 회복되었다. 나는 의도적으로 인사과에서 신용카드 겸용인 ‘명예교수 신분증’을 새로 발급받았다. 그 카드를 사용할 때 마다 내 마음(의식)의 연결이 '현실' 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만약 명예교수가 사망한다면 학교에 개인의 신상정보를 저장해 둘 필요가 없기 때문에 삭제를 해야 한다. 그러나 아무런 근거도 없이 마음대로 삭제를 할 수 없기 때문에 학교는 다시 사망으로 인한 '면직발령'을 공문으로 내고, 그 공문을 근거로 개인의 신상정보를 삭제하고 있었다. 간혹 명예교수회 회원들의 전화번호를 알고 싶은 경우 학교 홈페이지에 가서 명예교수 회원의 이름으로 검색하면 그분의 소속 부서가 “명예교수회” 로 나오면서 본인의 사진과 전화번호가 나왔다. 의과대학에서 은퇴하신 명예교수님들의 정보도 이렇게 하면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사망으로 인해 면직발령이 난 분들은 모든 자료가 삭제되어서 개인정보를 얻을 수 없었다.
내가 모르는 명예교수님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할 때는 감정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지만, 내가 아는 명예교수님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감정의 물결이 크게 출렁거렸다. 더구나 그분의 이름과 사진이 학교 전산서버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리면 잠시나마 함께 영남대학교에서 공존하고 있었던 희미한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그분은 처음부터 이 세상에 태어난 적도 없는 사람 같아 보였다. 이런 점이 너무 안타까워서 나는 다시 ‘연도별 사망자 명단’을 정리하여 카페의 <회원인사발령> 메뉴에 등록하였다. 비록 그분이 영남대학교와의 관계는 영원히 “단절” 되었다 할지라도, 명예교수회와의 관계는 영원히 “연결” 되어 있도록 하고 싶었다.
그동안 명예교수회 회원 수가 연도별로 어떻게 변화하여 왔는지 알고 싶어서 학교의 인사발령 자료를 기준으로 연도별 회원의 분포를 조사하여 보았다.
위 그림을 보면 1992년부터 은퇴하시는 명예교수님들 수가 서서히 증가하다가 16년이 지난 2008년에 누적 회원수가 100명을 넘었다. 명예교수회가 설립된 2009년에는 누적회원수가 116명이었다. 그 당시 회원 수가 100명을 넘어서자 ‘명예교수회’ 설립의 필요성이 강하게 대두된 것 같았다. 그리고 6년이 지난 2015년에 200명선을 넘었고, 또 5년이 지난 2020년에 300명선을 넘었다. 2023년 현재는 385명이니 내년 2024년에는 400명선을 넘을 것이다. 전체 회원들 수가 이렇게 급격하게 증가하면 명예교수회에 대한 기대가 커지면서 다양한 요구들이 등장할 것이다. 앞으로의 명예교수회는 이런 시대적 변화를 능동적으로 잘 반영해서 운영해야 할 것 같다.
은퇴하기 전에는 동료 교수의 사망 소식이 10년에 한 번 정도의 빈도였는데, 은퇴한 후에는 명예교수 사망 소식이 2~3개월에 한 번 정도의 빈도로 들려오고 있었다. 명예교수회에서는 이전부터 회원의 사망 소식이 있을 때 마다 전체 회원들에게 ‘문자’로 알려주었다. 그런 ‘문자 통지문’을 내가 직접 작성해서 자주 발송하다 보니 나에게도 ‘천국행 기차’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는 기분이었다. 명예교수회 회원들의 나이와 사망의 상관관계가 어떻게 되고 있는지 알고 싶어서 학교의 인사자료를 활용하여 분석하여 보았다.
선형 회귀분석에서 R-제곱 값이 “1”에 가까울수록 나이와 회원수의 변수 사이에는 직선의 상관관계가 있으며, “0”에 가까울수록 “두 변수 사이에는 상관관계는 없다” 라고 판단할 수 있다. 위 그림에서 “나이”와 “현재회원수”는 R-제곱 값이 0.75 이어서 “두 변수사이에 음의 상관관계가 존재한다” 라고 말할 수 있지만, “나이”와 “사망회원수”는 R-제곱 값이 0.02 이어서 “두 변수사이에 어떤 상관관계가 존재한다” 라고 말할 수 없다. 좀더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65세 이상의 명예교수회 회원들에게 “사망은 나이 순으로 오는 것이 아니다” 라는 것이다. 사망은 나이 보다는 개인의 건강 상태가 더 큰 영향을 준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버드 의대 정신과 Robert Waldinger 교수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가장 행복한 삶은 부나, 명예나, 권력이나, 성취감 같은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인간과 친밀한 연결 관계’에 있다고 한다. 친밀한 인간 관계의 연결이 단절되면, 외로움을 느끼고, 행복감이 사라지고, 건강도 나빠진다고 한다.
명예교수회가 회원들에게 해야 할 의무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회원들 관계를 친밀하게 연결하여 회원들의 행복감과 건강을 증진시켜야 한다”일 것이다. 현재의 명예교수회는 지난 2년 동안 ‘회원들 관계를 친밀하게 연결하기 위하여’ 제7대 김봉식 회장님의 훌륭한 리더십에 힘입어 4회의 문화탐방여행과 10회의 특별강연 행사를 모두 성공적으로 추진할 수 있었다.
<문화탐방여행 프로그램: https://cafe.daum.net/yuprofem/bJzr >
1) 부여 백제문화단지
2) 세종 한국콜마공장 견학 & 공주 무령왕릉 및 공산성
3) 영주 부석사/소수서원 및 제천 청풍호반
4) 순천만 국제정원박람회 및 습지
문화탐방여행은 관광버스를 타고, 노래하고, 마음껏 웃고, (김정숙 명예교수님과 홍우흠 명예교수님에게서) 역사도 배우고, 맛있는 식사도 하고, 차도 마시고, 단체사진도 찍고, 멋진 경치를 감상하며 산책도 하고, 온 종일 함께 지내다 보면 서로 잘 몰랐던 회원들도 쉽게 친해질 수 있었다. 앞으로도 좋은 곳을 찾아서 즐거운 여행을 계속 한다면 회원들의 친목도모와 정신건강 증진에 크게 기여할 것이다.
<특별강연 프로그램: https://cafe.daum.net/yuprofem/bJzs >
1) 대구경북 신공항과 지역발전 (윤대식 명예교수),
2) 한국 전통음악의 이해 (곽태천 명예교수),
3) 국내 수질문제 현황과 수질관리 방안 (이순화 명예교수),
4) 이순신장군 리더쉽 (윤동한 총동창회장),
5) 바로크 시대의 기악음악 (이승진 명예교수),
6) 주역과 점 (정병석 명예교수),
7) 제4차 산업혁명과 로봇 (이재원 명예교수),
8) 패션과 권력 (김정숙 교수),
9) 디자인과 3대질서 (류호용 명예교수),
10) 와인과 건강 (정시련 명예교수)
특별강연은 과학공학과 인문사회예술 분야가 골고루 혼합되도록 전공분야를 고려하여 연사를 초빙하였다. 모두 훌륭하시고 열정적이신 연사 교수님들 덕분에 폭넓은 학문분야에 걸쳐서 새로운 지식을 얻고, 색다른 감동을 느끼며, 사고의 지평선을 넓힐 수 있었다.
앞으로 미국의 ‘TED’나 한국의 ‘세바시’와 같이 20분 이내의 “온라인 특별강연”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더욱 많은 회원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면 회원들의 친밀한 연결 네트워크를 구축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동안 명예교수회의 행사를 추진하면서 '기록 보존'을 위해서 가능한 많은 사진을 찍고 동영상을 만들어서 카페에 등록하였다. 강연 내용이나 배경 음악에 저작권 문제가 없는 동영상은 ‘YouTube’에도 등록하여 전 세계에 ‘영남대학교 명예교수회’를 홍보하였다. 카페에 있는 사진과 영상을 볼 때마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간 것처럼, 그때 그분들과 함께한 아름다운 추억들이 재생되고 있었다.
첫댓글 재밌는 글 올려주시고 명예교수회 관련 내용들 정리하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회장님, 감사합니다. 박종갑 편집위원장님의 요청으로 '카페 운영보고서' 형식으로 작성했습니다.🥰
명예교수회의 발전과정과 미래의 비전을 재미나게 표현해주시어 단숨에 끝까지 읽었습니다. 그런데, 글의 제목이 '단절과 연결'인 데 적당한 부제목을 단다면 내용파악을 바로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부제목은 "명예교수회 카페를 오픈하며" 라고 하면 어떨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