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이야기 하나 할까요? 불교설화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석가모니의 전생 이야기로, 석가모니가 싯다르타로 태어나기 이전 전생에서 수도승으로 지내던 때의 일화입니다. 하루는 명상에 잠긴 수도승에게 호랑이한테 쫓긴 토끼 한 마리가 숨을 할딱이며 숨어들었습니다. 수도승은 토끼가 가엾은 생각이 들어 품에 숨겨 주었습니다. 그러자 굶주린 호랑이는 배고프다고 아우성치면서 토끼를 내줄 것은 요구했습니다. 수도승은 토끼도 살리고 호랑이도 살리기 위하여 토끼와 같은 무게의 자기의 살점을 떼어주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저울을 갖다놓고 한쪽에는 토끼를, 또 한쪽에는 자기 살덩이를 올려놓았습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아무리 커다란 살덩이를 올려놓아도 토끼의 무게가 더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자기 몸 전체를 저울 위에 올려놓자 비로소 저울은 수평을 이루었습니다. 여기서 수도승은 모든 생명의 무게가 동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자기 몸 전체를 던져 호랑이에게 보시함으로써 호랑이와 토끼를 살리고 자신은 죽습니다. 이 이야기는 고대의 설화이기 때문에 과장된 점이 있기는 하지만 생명에 대한 귀중한 인식을 우리에게 심어줍니다. 모든 생명의 무게가 같다는 생각은 인간의 생명마저 가볍게 여기는 요즘의 세태에 비추어볼 때 지나치게 이상적이라는 지적을 받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자신의 생명과 타자의 생명을 똑같이 존귀한 것으로 보는 이 기본적인 인식에서부터 오늘날 직면한 생태계의 문제를 해결할 열쇠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생명의 무게니 혹은 값어치를 따진다면 얼마나 나갈까요? 먼저 고은의 다음 시 한 편을 감상하면서 따져봅시다.
<슬픔> - 고은
내 고향 새끼 사슴 두 마리가 한꺼번에 화살에 맞아 죽었습니다 거기 달려온 에미나이 얼빠진 채 맴돌다가 맴돌다가 그냥 죽어버렸습니다 화살도 맞지 않고 그냥 죽어버렸습니다
그 에미나이 배 갈라본 즉 기나긴 창자 열두 발 토막토막 끊어져 그것이 새끼 잃은 슬픔이었습니다
이 세상 만물 가운데 무릇 슬픔이 있어야 하거니와 어찌 그것이 슬픔만하겠습니까 예로부터 창자 끊어지는 아픔이 슬픔일진대 오늘밤 내 주전부리 슬픔 따위는 쉬쉬 흙구덩이에 파묻어버려야 합니다
내년이나 내후년 이맘때까지 누구 알세라 파묻어둔 채 거기 새 다복쑥 돋아나온들 어찌 그것이 어미 사슴의 죽음만하겠습니까
그건 썩지 않을 슬픔으로 새끼 낳고 세상 열고자 해 떠오르는 시뻘건 아침 먼 데 달려갑니다
여기 보면 어미 사슴이 새끼 사슴 두 마리가 화살에 맞아죽자 거기 달려와 얼빠진 채 마냥 맴돌다가 그냥 죽어버렸다고 했습니다. 화살도 맞지 않았는데 죽은 걸 이상히 여긴 나머지 배를 갈라 보니 기나긴 창자 열두 발이 토막토막 끊어져 있더라고 했습니다. 새끼를 잃은 아픔 때문이었다는 걸 더 말할 필요가 없지요. 이걸 말해 사람들은 단장의 아픔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생명이라는 건 하나의 생명의 훼손 앞에서 창자 열두 발이 끊어져 죽어버려도 모자랄 정도로 고귀한 가치와 무게를 지닌 것입니다. 아까 전생의 싯다르타처럼 자기 온몸을 던지는 것과 맞먹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생명의 무게나 값어치는 저울로 잴 수 없으며 값으로 매길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오죽하면 그 생명을 구하려고 우주가 온통 긴장하겠습니까? 다음 이시영의 시가 그것을 선연하게 말해줍니다.
<화살> - 이시영
새끼 새 한 마리가 우듬지 끝에서 재주를 넘다가 그만 벼랑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먼 길을 가던 엄마새가 온 하늘을 가르며 쏜살같이 급강하한다
세계가 적요하다.
참으로 가슴 뭉클한 시입니다. 그리고 숨도 쉴 수 없이 팽팽히 긴장하게 하는 시입니다. 저 아기새를 과연 엄마새는 구출할 수 있을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시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런 고귀한 생명이 처해 있는 처지는 어떠할까요? 먼저 감옥의 창틀에 쌓인 먼지 속에서 싹이 터서 풀이 자라는 것을 보고 생명에 대한 경외감을 크게 깨달아, 그때까지 저항적 삶과 시로 일관했던 자기 삶과 시에 일대 전환을 이루었던 김지하의 시 한편을 보고 얘기합시다.
<생명> - 김지하
생명 한 줄기 희망이다
캄캄한 벼랑에 걸린 이 목숨 한줄기 희망이다
돌아설 수도 밀어붙일 수도 없는 이 자리
노랗게 쓰러져 버릴 수도 뿌리쳐 솟구칠 수도 없는 이 마지막 자리
어미가 새끼를 껴안고 울고 있다 생명의 슬픔
한 줄기 희망이다
이 시를 보면 한 줄기 희망인 생명이 캄캄한 벼랑에 걸려 있다고 합니다. 돌아설 수도 없고 밀어붙일 수도 없으며 노랗게 쓰러져 버릴 수도, 뿌리쳐 솟구칠 수도 없는 마지막 자리에 처해 있다고 합니다. 그 끝에서 어미가 새끼를 껴안고 울고 있는 처지, 그러니까 현재 생명이 이런 급박한 처지에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뭐가 어찌 됐기에 생명이 이런 처지에 놓이게 됐을까요? 말할 것도 없이 폭발적인 인구의 증가와 급격한 산업화 도시화 추세와 함께 파생된 지구환경의 문제 때문입니다. 금세기 최대 현안으로 떠올라 있는 이 문제점은 오존층 파괴에 따른 인체 피해와 생태계 파괴, 자동차 및 난방으로 인한 이산화탄소 배출량 증가 및 사람의 육식용 소의 대규모 사육으로 인한 메탄가스 발생이 가져온 지구온난화현상, 삼림파괴와 야생동물의 남획으로 인한 생태계의 균형상실, 유해폐기물의 폭발적 증가에 의한 환경 오염 등 다양합니다. 비근한 예로 하천의 오염이 극에 달해 물고기를 찾아볼 수 어렵게 되었으며, 연근해 곳곳에 출몰하는 적조현상과 기형 물고기의 출현이 다반사가 되어버렸습니다. 기형아의 출산이 늘어나고 있으며 유전자 식품이나 환경호르몬 때문에 전에 없던 각종 질병이 유발합니다. 그리고 공단 인근의 수목들이 죽어가고 있으며 도심 주택가마저도 황사나 스모그에 갇히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농촌에선 농약과 골프장과 러브호텔 때문에 민물고기들이 씨가 마르고 있으며 삼림과 농토가 무수히 침탈 당하고 있습니다. 하늘과 강물과 산과 대기 어느 것 하나 온전한 것이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은 개발과 성장의 단맛에 취한 사람들의 무자비한 산업화 정책 탓이었습니다. 원래 자본주의적 산업화의 회로는 생산물의 탐욕스런 증식만을 꾀할 뿐 자기 자신에 대한 반성의 기능은 결여되어 있는 법입니다. 그래서 이 땅의 환경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그토록 생태계 파괴의 위험성을 경고해왔습니다. 물론 이 일에는 시인들도 앞장 서왔습니다.
2 생태 파괴의 문명을 비판하는 시들
<전천후 산성비> - 이형기
우리 시대의 비는 계절과 무관하다. 시도 때도 없이 푸른 것은 모조리 갉아먹어 버리는 전천후 산성비.
그렇다 전천후로 비는 죽은 구근을 흔들어 깨워서 자꾸만 생산을 재촉하고 있다. 그래서 생산이 넘치고 넘치는 그래서 미처 다 소비하기도 전에 쓰레기통만 가득 채우는 시대.
쓰레기통에서 장미가 피기를 기다린다고는 누군가 참 잘도 말했다.
한때는 선지자의 예언처럼 고독했던 그러한 절망이 도처에서 천방지축으로 장미처럼 요란하게 꽃피고 있는 시대.
죽은 자의 욕망까지 흔들어 깨우면서 그 위에 내리는 시도 때도 없는 산성비.
사람들은 모두 우산을 쓰고 있다. 일회용 비닐우산이 되어버린 절망을 쓰고 있다.
비극이 되기에는 너무나 흔해빠진 우리 시대의 비. 대량생산의 장미를 쓰레기통에 가득 채우는 전천후 산성비 오늘도 내린다.
이 시는 이미 1972년에 씌어진 생태파괴를 고발한 시입니다. 여기서 산성비란 보통 산도 5-6 이하의 비를 말합니다. 산성비는 화력발전소, 공장, 자동차, 가정 등에서 석탄이나 석유를 원료로 사용할 때 발생하는 아황산가스나 이산화질소 등의 오염물질이 대기에 떠 있다가 공기 속의 수증기와 작용하여 황산과 질산으로 바뀌고 이것이 빗속에 섞여 내리는 것을 말합니다. 황산이나 질산으로 바뀐 비가 생물의 생명에 치명적 피해를 주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나무를 고갈시키고 숲을 파괴합니다. 산성물질이 지닌 독성 때문에 나뭇잎이 황갈색으로 변하면서 말라죽게 됩니다. 또 이 산성물질은 흙 속의 인, 칼슘, 마그네슘 등 영양물질을 없앱니다. 강과 호수를 죽이고 강철과 시멘트를 부식시킵니다. 그래서 평론가 도정일은 그 옛날 로버트 프로스트처럼 이제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고 했던 것이지요. 하늘에서 내리는 비가 흙을 적시고 산천초목의 뿌리를 적셔 생명의 원천을 구현해준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 일입니다. 비가 땅 속에 스며든 뒤 청량한 샘물이 되어 우리의 목마름을 달래준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비는 산성화되고 이 비를 맞는 사람이 건강을 해치고 초목이 말라죽습니다. 이 산성비가 도처에 전천후로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는 바로 그런 산성비 폐해의 심각성을 고발한 것이지요. 다음 시를 볼까요?
<들판이 적막하다> - 정현종
가을 햇볕에 공기에 익은 벼에 눈부신 것 천지인데, 그런데, 아, 들판이 적막하다― 메뚜기가 없다!
오, 이 불길한 고요― 생명의 황금고리가 끊어졌느니―
인류생태학은 생명의 원천으로서의 대지와 자연에 대한 인간사회의 긴밀한 연결을 시도하는 학문입니다. 현대 생태이론에 따르면 모든 존재의 체계는 이들 ‘사슬’ 사이의 에너지 흐름에 연결되고 하나의 유기체로 통합된다고 합니다. 존재의 사슬은 무생물의 수준을 겨우 벗어난 미약한 종류의 존재로부터 가장 우수한 피조물에 이르기까지 여러 중간단계를 포용한 위계질서에 의해 배열되어 있습니다. 이는 엄청난 규모의 사슬로서 가히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슬은 모두 조화로운 화해를 그 기본정신으로 꾸려지고 있습니다. 주인 없는 빛과 공기와 물을 이용하여 풀과 나무의 푸른 잎은 제 몸을 만들고 키웁니다. 풀과 나무의 푸른 잎을 소와 양과 기린이 먹습니다. 소와 양과 기린을 사자와 호랑이와 표범이 먹습니다. 이는 지구에 사는 생물이 빠짐없이 연루된 먹이사슬의 간단한 그림입니다. 풀과 나무의 푸른 잎과 그것을 먹고사는 동물을 아울러 먹는 곰과 원숭이와 사람은 그 사이에 끼어 들겠지요. 그리고 모든 동물은 종족을 복제한 후 짧은 한살이가 끝나면 미생물에 의해 무기물로 환원되는데, 그 과정에서 애초 그들의 생존의 근거가 되었던 빛과 공기와 물을 해치지 않습니다. 먹이사슬에서 먹히는 쪽의 수를 적정히 늘리고 먹는 쪽의 수를 적정히 줄여 포식의 연쇄가 망가지지 않도록 하고 그 삶의 무기적 환경과 에너지의 순환을 원활하게 하는 것을 생태계의 균형이라고 합니다. 오랜 세월을 통해 자리 잡은 이 균형은 대단히 미묘해서 어느 한쪽이 변화하면 그 요인은 연쇄적으로 파급되고 생태계는 새로운 균형을 모색합니다. 그 와중에서 어떤 종족은 도태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존재의 연쇄사슬을 무너뜨리는 게 있습니다. 인간입니다. 이런 인간에 의한 현재의 지구생태계의 파괴 혹은 변동은 거의 모든 생물에게 위협이 됩니다. 먹이사슬에 가담한 생물들의 암묵적인 준칙은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포식입니다. 호랑이는 배가 고프지 않으면 코앞에 얼씬거리는 동물을 결코 손대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은 생리적인 위장 외에 마음의 위장을 하나 더 가지고 있어서 배가 터지도록 갖고도 더 가지려고 안달을 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원천적으로 자연 혹은 지구 위의 현 생태계에 가장 적대적입니다. 지구 위에서 생멸한 생명의 장구한 역사에서 이렇게 스스로에게 파괴적이고 위협적인 생물은 없었을 것입니다. 바로 위 <들판이 적막하다>라는 시도 인간의 증산 욕망에 의해 마구잡이로 뿌려진 농약 때문에 메뚜기가 사라짐으로 말미암아 지렁이, 개구리, 미꾸라지, 거미, 참새 등이 한꺼번에 사라지고, 그 바람에 사람도 너나없이 떠나감으로 적막해버린 들판에 대한 고발 시입니다. 한마디로 생명의 사슬, 곧 황금고리가 끊어졌으니 이 어찌 불길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공장지대> - 최승호
무뇌아를 낳고 보니 산모는 몸 안에 공장지대가 들어선 느낌이다. 젖을 짜면 흘러내리는 허연 폐수와 아이 배꼽에 매달린 비닐끈들. 저 굴뚝들과 나는 간통한 게 분명해! 자궁 속에 고무인형 키워온 듯 무뇌아를 낳고 산모는 머릿속에 뇌가 있는지 의심스러워 정수리의 털들을 하루종일 뽑아댄다.
최승호의 이 시를 보면 그야말로 엽기적이고 소름이 끼칩니다. 9행으로 되어 있는 이 간결한 시는 어떤 장편논문보다 환경오염의 심각성과 그 끔찍한 결과를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우선 무뇌아라는 존재 자체가 불길하고 공포스럽습니다. 사람은 생각하는 동물이라는데 뇌가 없는 아이라니요? 이 상상하기조차 싫은 무뇌아를 출산한 산모의 심정은 어떠할까요? 이 시는 바로 여기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말하자면 생명을 생산한 어머니의 입장에서 이런 결과를 낳게 한 원인을 생각해본 것입니다. 그 생각은 죄의식과 결합되어 있습니다. 자신이 남편과 정상적인 부부관계를 가진 것이 아니라 공장굴뚝과 간통을 했기 때문에 이런 아이가 생겼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이것은 물론 기형아를 낳은 산모들의 일반적인 죄의식과 통합니다. 내가 무언가 잘못했기 때문에 이런 기형아를 낳았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러면 이 산모의 죄는 무엇인가요? 그것은 공장이 있는 지역에 거주한 것, 혹은 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할 것일 뿐입니다. 그것이 죄라면 죄인데 시인은 이것을 굴뚝과의 간통 때문이라는 이미지로 표현했습니다. 공장지대의 오염이 무뇌아를 만들어낸 원인이라면 이것은 인간과 무관한 것처럼 여겼던 사물의 세계가 인간과 유관한 것으로 전환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산모의 몸에 공장지대가 들어선 느낌을 가지며 젖에서 폐수가 흘러내린다고 생각하고 아이 배꼽에 비닐끈이 매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그로테스크한 상상은 자신이 자궁 속에서 고무인형을 키워온 것이 아니냐는 자문으로 이어집니다. 아마도 이 사람은 공장에서 고무인형 만드는 일을 했던 모양입니다. 이러한 상상력은 인간이 만들어낸 사물의 세계가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고 그 결과 인간도 사물의 차원으로 전락해버리고 만다는 인식을 전달합니다. 그만큼 이 짤막한 시는 공해의 피해를 드러냄과 동시에 산업사회에서의 인간에 대한 인식에까지도 함께 드러내는 의미의 함축성을 갖습니다.
3. 환경 위기는 인간의 탐욕의 문제
사람의 만물의 영장이라 하지만 이는 어림턱도 없는 소리입니다. 사람은 대부분의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생장에 필수적인 물질을 스스로 생산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스스로의 생존을 다른 생물에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구 위에 존재하는 생물들의 먹이사슬을 거슬러올라가면 그 실마리 끝에는 언제나 필요한 것을 스스로 생산하는 녹색식물이 있습니다. 그래서 녹색식물은 생태계에서 유일한 생산자로 분류됩니다. 식물의 이파리는 다른 별과는 달리 지구 위에서는 흔하디 흔한 이산화탄소와 물을 모아, 외부에서 지구로 유입되는 유일한 에너지인 햇빛의 힘으로 탄수화물을 만들어냅니다, 무에서 생명을 창조하는 최초의 위대한 작업인 탄소동화작용에 소요되는 것은 이 지구라는 별 위에서는 적어도 극히 최근까지는 아까울 것이 없었습니다. 식물은 이 작고 형편없는 별을 온통 생명으로 뒤덮게 한 말없는 공로자이며 자애로운 수혜자인 셈입니다. 우주공간에서 우리 지구를 바라볼 수 있었던 사람들은 그 아름다움을 잊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보석처럼 빛나는 녹색의 별, 그 푸른빛은 바다와 수풀들의 빛깔이었지 사람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사람은 무서운 속도로 숲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빛과 공기와 물을 더럽힙니다. 그들은 방자하게도 이 별의 주인임을 자처하고 다른 모든 생물이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믿습니다. 땅 속에 묻힌 것들을 파내어 칼을 만들고 총을 만들어 동족을 죽입니다. 사람은 습관적이고 주기적으로 전쟁을 벌여 동족을 대량으로 사냥하는 아주 드문 동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분수에 넘치는 보금자리를 위해 숲을 불태우고, 적대적인 동물을 철저히 학살합니다. 그들은 야금야금 자신의 서식지를 넓혀 나가 이제 이 별 위에서 그들의 발길에 더럽혀지지 않는 곳은 사실상 남아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 땅에 호랑이가 사라졌음을 애통해하지만 만약 살아있다면 어쨌을까요? 이 좁은 땅에서 그들이 서식할 공간을 양보했을까요? 을숙도를 생각하면 결과는 자명합니다. 필경 그물로 잡아서 조금 넓은 그물 속에 가둘 뿐이었을 것입니다. 사람은 다른 동물을 죽인 만큼 스스로의 수를 늘렸고, 이제 온 지구는 그들로 인해 시끄럽습니다. 이 시끄러운 종족의 무책임한 파괴의 결과는 결국 스스로인 사람에게 재앙의 새까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명목상으로는 그런 자연을 보호하자고 외치는 인간의 행위가 인간 스스로의 욕심 때문에 그러 한다는 사실, 그 아이러니를 다음 시에서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늙은 소나무> - 김광규
새마을 회관 앞마당에서 자연보호를 받고 있는 늙은 소나무 시원한 그림자 드리우고 바람의 몸짓 보여주며 백여 년을 변함없이 너는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송진마저 말라버린 몸통을 보면 뿌리가 아플 때도 되었는데 너의 고달픔 짐작도 못하고 회원들은 시멘트로 밑둥을 싸바르고 주사까지 놓으면서 그냥 서 있으라고 한다 아무리 바람직하지 못하다 해도 늙음은 가장 자연스러운 일 오래간만에 털썩 주저앉아 너도 한번 쉬고 싶을 것이다 쉬었다가 다시 일어나기에 몇 백년이 걸릴지 모르겠지만 너의 졸음을 누가 막을 수 있으랴 백여 년 동안 뜨고 있던 푸른 눈을 감으며 끝내 서서 잠드는구나 가지마다 붉게 시드는 늙은 소나무
이 시를 보면 요즈음 인간이 벌이는 자연보호라는 것이 얼마나 허울좋은 일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새마을 회관 앞마당에 서 있는 늙은 소나무는 이제 너무 늙어서 송진도 말라버린 채 잠이 들고 싶어하는 나무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나무에다 주사를 놓고 시멘트로 밑둥을 싸바르면까지 살아있게 하려고 안달입니다. 왜냐하면 그 나무는 백여 년을 변함없이 그 자리에 서서 바람을 몰아오고 시원한 그림자를 드리웠는데 앞으로도 계속 그래야만 한다는 사람의 생각 때문입니다. 이는 한마디로 인간의 욕심입니다. 나무도 수명이 다하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새마을 회관에 드리우는 바람이나 그늘 때문에, 그리고 그것을 계속 누리고 싶은 인간의 욕심 때문에 죽어야 할 나무가 죽지 못하는 것입니다. 흔히 생명시, 혹은 생명운동을 이야기하면 모두들 생명 있는 것들만 추구하는 우를 범하고 마는데 이는 매우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래서 저는 생명시 혹은 생명운동보다는 생태시 혹은 생태운동이라고 명명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이는 모든 목숨이 나서 자라고 생명을 힘차게 구가하고 다시 종족을 복제한 후 한살이가 끝나면 자연의 무기물로 돌아가는 그 생태 사이클을 자연스럽게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이 우리가 추구하는 생태시, 생태운동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자연스런 죽음은 인정하지 않고 순전히 생명만을 구가하려고 애를 쓴다면 세계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여러 의사들로부터 들은 이야기인데, 어떤 팔순 노인이 치명적인 암에 걸려 수술을 하면 3개월 정도 더 생명을 연장할 수 있을 뿐인데도, 그 많은 돈을 들이고 고통을 받아가며 굳이 수술을 하자는 걸 보면 참 인간이 불쌍하고 가엾은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수술을 조장하는 것은 의사들이 고액의 수술비를 벌어들이고자 하는 상술 때문인데도 그것에 속아 수술을 하면 마치 몇 십년이라도 생명을 연장할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하고 환자나 가족이나 이것에 매달리는 모습을 보면 인간의 욕심이 얼마나 큰가를 알 수 있다는 것이지요. 자연보호라는 것이 결국 환경운동에 머물면 아니 됩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이 중심이 되고 다른 모든 생물은 부차적인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환경공해 탓에 인간이 피해를 보기 때문에 자연보호를 하고 환경운동을 한다면 이는 근본적인 치유가 되지 못합니다. 자연 속의 모든 생물을 주체로 인정하여 그 자연과 사람이 나와 타자라는 1대1의 대등한 관계를 회복할 수 있을 때만이 진정으로 생태는 보호되고 자연스런 생태 사이클이 유지될 수 있습니다. 또 하나 시를 더 볼까요?
<몸매 이데올로기> - 서림
<쌀>과의 전쟁, 양강도 두만강변 풀섶 짐승같이 부스스한 여성들, 밀무역한 빵조각을 생쥐같이 깜박거리며 물어뜯고 있다.
이 광경을 보고도 느낌 없는 코미디 채널로 돌려버리는 너는 한 조각 토스트를 앞에 두고 한숨쉬고 있다. 나눠가질 줄 모르는, 그런 꿈도 없는 남쪽사람 너는 빈혈과 싸워가며 <살>과의 전쟁을 힘겹게 벌이고 있다.
공부보다 기술보다 확실한 투자, 몸매만이 살길이다. 믿을 만한 무기이다.
날씬날씬한 너의 몸매에서 풍기는 동물적 체취, 너의 몸매에서 피어나는 화려한 造花
참으로 이 시를 보면 기가 막힙니다. 우리의 형제인 이북사람들은 지금도 쌀 때문에 곤경을 치르고 있는데 남쪽인 우리는 살과의 전쟁을 치르느라 온 나라가 난리입니다. 그러면서도 이북에다 남아서 골치덩어리인 쌀 좀 주자고 하면 저 극우주의자들은 마치 그런 자들은 역적이라도 된다는 냥하며 각종 훼방을 놓습니다. 인간의 무지무지한 욕심은 그 상상을 초월합니다. 오늘날 팩스아메리카를 추구하는 미국의 욕심은 얼마나 큰지 아십니까? 마이클 클래어라는 사람이 쓴『자원의 지배』라는 책을 보면 세계는 지금까지 모든 자원 전쟁을 종교적, 민족적 싸움으로 왜곡보도했다는 사실을 명명백백히 보여줍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중동에서의 석유개발과 석유수송로의 방위를 강화하려는 미국과 그 정책을 혐오하는 중동국가간의 갈등에 대해서 적나라하게 밝혀놓고 있습니다. 미국은 현재 자국 내에 세계 3분지 1이 넘는 석유매장량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걸 결코 꺼내 쓰지 않고 온통 중동 등지에서만 싼값에 가져다 씁니다. 미국이 사막에 불과한 저 중동지역에 왜 그렇게 집착하며 그들에 반대하는 나라는 왜 전쟁이라는 초강수로 초토화를 시켜버리는 지 아십니까? 바로 석유라는 자원의 안정적 확보 때문이며 그것 다 빼 쓰고 막판에 자기네 것 빼 쓰며 자기네만 오래오래 살자는 심보에서 나온 것입니다. 앞으로 인류에게 일어날 전쟁은 석유와 물, 목재와 광물을 차지하려는 싸움이 될 것이라고 많은 학자들은 경고합니다. 자연이 우리에게 베풀어준 이러한 선물들은 사람들의 과도한 문명과 개발로 끊임없이 고갈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자원은 한정적인데 인간의 욕심은 끊임없으니 전쟁이 안 일어날 수가 없고, 궁극에는 지구의 종말이라는 비극을 맞게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럼에도 또 각 개인들은 개인들대로 또 아래의 시와 같이 흥청망청하고 있습니다.
<바람부는 날엔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9 -게으름의 찬양> - 유하
생사가 고작 呼吸之間의 일이라는데, 호흡 사이의 거리가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그만큼 죽음도 빨리 다가온다는데 우리는 너무 빠르게 호흡하고 있는 건 아닐까 헉헉거리며 일초 전의 전생에서 일초 후의 내생으로 뻔질나게 윤회의 들숨 날숨 쳇바퀴를 돌리고 있는 건 아닐까
도로의 목구멍 위로 들숨 날숨처럼 헉헉대다 숨막히는 빽빽한 차량들 숨가쁘게 먹고 싸고 사정하는 인간의 九竅를 닮은 아파트가, 하수도의 목구멍이 막히도록 내뱉는 구정물
만약, 10억이 넘는 중국 인민들이 한꺼번에 천안문 광장을 자가용을 타고 질주한다면, 동시에 먹고 싼다면 무쓰를 처바른다면 지구는 어떻게 될까 자금성 노자의 후예들이 素素하게 虛의 자전거 바퀴나 굴리는 덕택에 압구정성 가득 자동차 바퀴가 넘쳐난다?
아아 모든 게 패스트모션이구나 죽음도 엄숙하게 완성되지 못한다 다만 무성영화 그림처럼 우스꽝스러울 뿐 압구정동 그 짧은 호흡지간에서 뺑이치며 왔다리 갔다리, 다방구를 하고 있는 존재의 참을 수 없는 숨가쁨이여
백 미터를 9초대에 주파하는 칼 루이스와, 지금 살아 있다면 한 삼박 사일 싸묵싸묵 걷다가 나머지 오십 미터를 비워둔 채, 바위에 앉아 쉬고 계실 노자 선생
그러나 보라 맛의 덫에 빠진 노자의 후예들이 햄버거에 맛들려 황황히 몰려가는 모습을 압구정성, 그 온갖 구매욕의 슈퍼마켓이 헉헉 내뿜는 현란한 바람의 향기가 온 천지로 휘몰아치며 온갖 잔잔했던 것들을 숨가쁘게 풍차 돌리는구나
죽음이라는 육신의 일시적 브레이크도 지칠 줄 모르고 미끄러져가는 저 가속도의 색혼들을 끝내, 멈추게 할 수 없으리라
생사가 호흡지간의 일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촌각을 다툴 정도로 헉헉거리는 속도에 취합니다. 호흡 사이의 거리가 짧으면 짧을수록 죽음이 가까워온다는데도 더더욱 속도에 취합니다. 그리고는 헉헉대다 숨막힌 차량들처럼 숨이 막힙니다. 숨가쁘게 먹고 싸고 사정하는 인간들처럼 아파트가 하수도의 목구멍이 막히도록 구정물을 내뱉습니다. 맛의 덫에 빠져, 햄버거에 맛들려 온갖 구매욕이 넘쳐나는 백화점으로 슈퍼마켓으로 달려갑니다. 죽음이라는 육신의 일시적 브레이크도 지칠 줄 모르고 미끄러져가는 저 가속도의 색혼들을 끝내 멈추게 할 수 없을 정도로 달려갑니다. 그러니 그들을 위해 수탈과 착취를 당한 자연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나 다행하게도 아직도 이 땅에는 그런 자연을 사람과 똑같이 여기는 시인들이 있습니다.
4. 자연과 생명의 새로운 인식을 위한 시들
<들녘> - 정호승
날이 밝자 아버지가 모내기를 하고 있다 아침부터 먹왕거미가 거미줄을 치고 있다 비 온 뒤 들녘 끝에 두 분 다 참으로 부지런하시다
이 시를 보면 우리가 2-30년 전에 겪었던 어린 시절 들녘 풍경이 나옵니다. 왜 어린 시절인가요? 볏잎에 먹왕거미가 거미줄을 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미는 볏잎에 스미는 각종 날벌레나 병충을 잡기 위해 그렇게 거미줄을 치는데, 요새는 농약 때문에 메뚜기도 미꾸라지도 없는 실정이어서 거미가 줄을 칠 리 없습니다. 그런데 왜 오늘 이 시가 마치 현재일인 양 튀어나왔습니까? 바로 위에서 말한 오늘날의 서구중심의 과학기술과 근대문명이나 자본주의의 폐해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 대안은 바로 “만물은 생명의 그물 속에서 동등한 목숨을 가진다”라고 생각하는 생태학적 세계관입니다. 이 시에서 오월 푸르른 날 아버지는 모를 내고 먹왕거미는 거미줄을 치는 농촌풍경을 선연하고 깨끗하게 보여주고 나서는 끝부분에 가서 “두 분 다/ 참으로 부지런하시다”라고 말합니다. 모를 내는 아버지나 거미줄을 치는 먹왕거미나 두 분 다 부지런하시다라고 말함으로 “천지만물은 모두 하나일 따름이고 차별이 없다”라는 장자의 말처럼 모두를 공경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는 한마디로 인간중심, 이성중심, 욕망중심의 현대인의 심성에 맑고 깨끗한 구원의 힘을 제시한 것입니다. 다음 시를 볼까요?
<물소리를 꿈꾸다> - 이정록
번데기로 살 수 있다면 버드나무 껍질에 세들고 싶다 한겨울에도, 뿌리 끝에서 우듬지 끝까지 줄기차게 오르내리는 물소리 고치의 올 올을 아쟁처럼 켜고 나는 그 숨소리를 숨차게 쟁이며 분꽃 씨처럼 늙어갈 것이다 고치 속이, 눈부신 하늘인 양 맘껏 날아다니다 멍이 드는 날갯죽지, 세찬 바람에 가지를 휘몰아 제 몸을 후려치는 그의 종아리에서 겨울을 나고 싶다, 얼음장 밑 송사리들 버드나무의 실뿌리를 젖인 듯 머금고, 그때마다 결이 환해지는 버드나무 촬촬, 물소리로 울 수 있다면 날개를 달아도 되나요? 슬몃 투정도 부리며 버드나무와 한 살림을 차리고 싶다 물오른 수컷이 되고 싶다
요새 젊은 시인으로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이정록의 시입니다. 번데기로 살수만 있다면 버드나무 껍질에 세들어선 한겨울에도 뿌리에서부터 우듬지 끝까지 줄기차게 오르내리는 물소리를 듣고 싶다는 내용의 시입니다. 겨울나무는 죽은 것 같지만 사실 그 냉엄한 추위 속에서도 물관을 통해 끊임없이 물과 영양분을 올려보내며 봄을 기다리는 강인한 생명력을 발휘합니다. 바로 그런 생명의 나무와 한 살림 차리고 싶다는 건 생명이라는 한 화엄 속에 내 주체를 던지겠다는 것입니다. 아니면 버드나무라는 타자와 나라는 주체가 하나의 합일을 이루겠다는 것입니다. 나무에 대한 사랑 없이 어찌 이런 바램이 가능하겠습니까? 저는 그래서 오늘날 자연을 아끼고 보호하기 위해서 맨 먼저 할 일은 시를 읽고 쓰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시는 대상을 사랑하지 않고는 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대상을 사랑한다는 것은 만물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도 생명을 사랑하는 시를 하나 써보았습니다.
<綿綿함에 대하여> - 고재종
너 들어보았니 저 동구밖 느티나무의 푸르른 울음소리
날이면 날마다 삭풍 되게는 치고 우듬지 끝에 별 하나 매달지 못하던 지난 겨울 온몸 상처투성이인 저 나무 제 상처마다에서 뽑아내던 푸르른 울음소리
너 들어보았니 다 청산하고 떠나버리는 마을에 잔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그래도 지킬 것은 지켜야 한다고 소리 죽여 흐느끼던 소리 가지 팽팽히 후리던 소리
오늘은 그 푸르른 울음 모두 이파리 이파리에 내주어 저렇게 생생한 초록의 광휘를 저렇게 생생히 내뿜는데
앞들에서 모를 내다 허리 펴는 사람들 왜 저 나무 한참씩이나 쳐다보겠니 어디선가 북소리는 왜 둥둥둥둥 울려나겠니
우리가 어렸을 때 경험한 일이고, 지금도 여행을 하다 보면 마을 동구마다 흔히 몇 백년 묵은 느티나무가 서 있는 걸 볼 수 있습니다. 그 나무는 대개 수백 년씩을 살며 그 마을의 흥망성쇠와 마을 사람들의 각종 사연을 마치 자기 둥치에 새겨진 수많은 상처자국 만큼이나 세세히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상처에서 겨울이면 우우우 푸른 울음소리가 들려나올 법도 합니다. 그러나 그 나무는 봄만 되면 연두 초록의 잎새를 둥글게 피워 올려 다시 마을을 감쌉니다. 그리고 여름이면 그 너른 그늘로 일에 지친 사람이건 까치건 매미건 개미건 모든 생물을 끌어 모읍니다. 이 얼마나 장관입니까?. 그렇게 봄만 되면 생생한 초록의 광휘를 생생하게 내뿜어 마을을 감싸는 나무를 보고 누군들 희망을 갖지 않겠습니까? 다 떠나버리고 늙은이와 아낙네만 몇몇 남았어도 그 나무의 생생 초록을 바라보며 다시 사람들은 논에 모내기를 합니다. 참으로 북이라도 둥둥둥둥 울려주고 싶은 일입니다.
5. 생태 환경의 위기는 실천적 주제
사람이 지구 위 현 생태계의 운명에서 벗어나 새로운 자연생태계에 편입되거나 인공의 생태계를 구성할 가능성은 아직까지는 거의 없어 보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파괴의 걸음을 멈추는 것만이 인류가 조금이라도 더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럼에도 아직 우리는 종족 전체를 완전히 제어하지 못해 늘 전쟁 속에 살고 있습니다. 여전히 우리는 더 많은 물질의 발굴과 변환에 몰두하고 있으며 그것이 주는 만족에 현혹되어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더 많은 것을 땅에서 캐내고, 더 많은 숲을 뒤엎고, 더 많은 물을 더럽히고, 더 많은 공기를 탁하게 만드는 데 많은 사람의 관심이 쏠려 있습니다. 그래야만 행복해질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얼마나 많은 길과 집이 생겨나고 있으며, 얼마나 많은 나무들이 태워지고 잘리고 있는가요? 우리는 허겁지겁 돈을 모아 자동차를 사야하고, 허겁지겁 먹고 마시고 쓰레기를 버려야 하고, 또 쓰잘 데 없는 책들을 수없이 찍어야 합니다. 그것이 문명과 자본주의의 생리입니다. 그들은 파괴를 생산으로 미화하고 숭상합니다. 아마도 사람들이 이 별에서 사라지는 날이 온다면 그1 원인은 물질적 풍요 때문일 것입니다. 이런 술 취한 자가 모는, 더구나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의 가속도를 누가 잡습니까? 그러기에 생태환경의 위기는 사실 미학적인 주제가 아니라 실천적인 주제로 떠오릅니다. 생태계의 위기는 자연스럽게 사람의 존망과 관계되어 있기 때문에 이 위기극복을 위한 실천에 나서야 한다는 점입니다. 지난날 민족의 권리를 위해, 민중의 권리를 위해, 그 부당한 권리의 침탈을 막기 위해 싸워야 했던 윤리와 실천의 시대에 예술 또는 문학의 자리는 수난과 고통의 자리였습니다. 7-80년대의 윤리적 실천적 주제가 사회과학적 상상력을 요구했다면 오늘의 주제는 자연과학적 상상력을 요구합니다. 자연과학적 상상력은 시와 더 멀기 때문에 이런 생태문제에 대한 시적 대응은 더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한가지 희망을 갖는 것은 사람이 자연을 심리적으로 동경할 뿐만 아니라 그 아름다움을 깊이 느끼고 나아가 그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있는 지구 위의 유일한 생물이라는 점입니다. 우리는 그 옛날 혼돈과 정적의 세계에서 생명의 세계로 옮겨왔습니다. 우리는 결국 자연으로 돌아갈 존재라는 것을 잊지 않고 있으며 그 시간이 아름답고 평온하기를 간절히 빕니다. 이 소박하며 최종적인 꿈을 환기하고 그 꿈이 뿌리로부터 흔들리고 있는 위기의 실상을 더 많은 종족에게 알릴 수 있다면, 아름다운 자연의 풍광을 영원히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서글픈 사실을 온전히 알릴 수 있다면, 나아가 그 끔찍한 미래를 우리의 실천으로 조금이나마 바꿀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쁠 것입니다. 저는 이 실천에 앞서 마음다짐할 것을 세가지만 제안합니다. 먼저 오규원의 시를 한 편 봅시다.
<物物과 나> - 오규원
7월 31일이 가고 다음날인 7월 32일이 왔다 7월 32일이 와서는 가지 않고 족두리꽃이 피고 그 다음날인 33일이 오고 와서는 가지 않고 두릅나무에 꽃이 피고 34일, 35일이 이어서 왔지만 사람의 집에는 머물 곳이 없었다 나는 7월 32일을 자귀나무 속에 묻었다 그 다음과 다음날을 등나무 밑에 배롱나무 꽃 속에 남천에 쪽박새 울음 속에 묻었다
이 시는 지금까지의 시간관념으로는 결코 해석될 수 없는 시입니다. 7월31일 다음에는 당연히 8월 1일이 나와야 하는데 엉뚱하게 달력에 존재하지도 않는 7월 32일이나 33일 34일이 나옵니다. 지금까지의 서구중심의 직선적 시간관이 깨집니다. 우리는 1년을 12달, 365일로 계산합니다. 오늘날 서구의 수적인 시간, 강박적으로 분할하고 원자화하고 측정하고 계산하는 시간개념은, 저 뉴턴의 “절대적이고 수학적인 진리의 시간개념을”을 무기로 해서 시간의 고유성과 다양성을 말살하기 시작했던 산업사회와, 저 가련한 프랭클린에게서 “시간은 돈이다”를 배워 시간에 충만해 있는 은총과 자비를 비천하고 무자비한 시간 세기로 고갈시켜버린 후기산업사회와 이데올로기적으로 너무도 궁합이 잘 맞습니다. 이런 근대적인 시간개념이 낳은 근대문명과 그로 인한 자본의 확장은 우리의 극히 생태적일 수 있는 삶의 풍성함을 모두 앗아버렸습니다. 제이 그리피스가 쓴『시계 밖의 시간』이라는 책을 보면, 마다가스카르 섬의 말라가시족의 캘린더는 호리병박꽃이 피는 달, 황소가 사코아나무 그늘을 찾는 달, 뿔달이 조는 달, 빗물에 밧줄이 썩는 달 등이 나옵니다. 인도 안다만 숲의 나바호족의 ‘향기 캘리더’에는 1월은 눈이 얼어붙는 달, 2월은 새끼 독수리의 달, 4월은 여린 새순의 달, 9월은 채소가 익는 달, 11월은 미풍의 달이 있습니다. 모두다 1월, 2월, 3월, 하는 근대적 시간개념의 달력은 아무 의미가 없고 다만 그들의 삶과 자연현상이 그 행위 속에 하나로 합일되는 달력만이 그들에겐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에겐 가령 4월이라 해도 수많은 4월이 있는 것입니다. 4월을 여린 새순의 달이라고 한 것은 그때의 자연현상과 삶의 행위의 가장 중요하고 특징적인 국면을 뽑아 그렇게 붙였기 때문에 가령 복사꽃이 피는 달, 벌나비가 날아오는 달, 은어를 잡는 달 등 풍성하게 열려 있는 자연과 삶의 행위 속에 즉각적으로 다시 붙일 수 있는 탓이지요. 근대적 시간개념은 필히 속도를 낳게 합니다. 더 많은 것을 갖게 합니다. 심지어 15초로 쪼개진 시간달력을 만들어놓고 생산을 독려하고 과잉의 재부를 독려하는 현대사회에서 그래도 생태계의 파괴를 늦추는 것은 바로 이 시간관념의 파괴입니다. 우리는 일요일 하루라도 근대적 시간관념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씻지도 말고 청소도 말고 그냥 몸이 하자는 대로 푹 쉬어버리면 자동차 오일도 아끼고 물도 아끼고 허덕거리는 허기도 다스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오규원의 이 시는 매우 상징적입니다. 바로 우리의 실천에 앞설 첫 번째의 마음가짐입니다.
<결핍> - 김지하
쥐었다 폈다 두 손을 매일 움직이는 건 벽 위에 허공에 마룻장에 자꾸만 동그라미 동그라미를 대구 그려쌓는 건 알겠니 애린 무엇이든 동그랗고 보드랍고 말랑말랑한 무엇이든 가볍고 밝고 작고 해맑은 공, 풍선, 비눗방울, 능금, 은행, 귤, 수국, 함박, 수박, 참외, 솜사탕, 뭉게구름, 고양이 허리, 애기 턱, 아가씨들 엉덩이, 하얀 옛 항아리, 그저 둥근 원 그리고 애린 네 작고 보드라운 젖가슴을 만지고 싶기 때문에. 찬 것 모난 것 딱딱한 것, 녹슨 것 낡고 썩고 삭아지는 것 뿐 이곳은 온통 그런 것들뿐 내 마음마저 녹슬고 모가 났어 애린
두 번째의 제안은 위 김지하의 시에서 힌트를 얻은 것입니다. 바로 우리의 삶과 마음 속에 늘 동그라미를 그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아파트는 네모집니다. 우리의 책상도 네모집니다. 우리의 방도 네모집니다. 네모는 곧 직선을 필요로 합니다. 직선이 필요조건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왠지 모가 납니다. 딱딱합니다. 엄격합니다. 인간미가 없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런 네모와 직선을 추구한 사람은 어느 한 구석 네모진 곳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사람이 어찌 모든 것을 네모지게 만들었을까요? 또 동그란 것은 신기하게도 보드랍고 말랑말랑하고 가볍고 밝고 작고 해맑게 여겨집니다. 공, 풍선, 비눗방울, 능금, 은행, 귤, 수국, 함박, 수박, 참외, 솜사탕, 뭉게구름, 고양이허리, 애기 턱, 아가씨들 엉덩이, 백자항아리, 이런 모든 것들 같이 말입니다. 7-80년대 감옥이 둥글게 작게 만들어졌다면 그 속에서 검찰관이 민주화 인사들을 고문할 마음이 생겼을까요? 지금 네모 딱 진 거대한 광화문의 정부청사가 둥글고 작게 생겼다면 그렇게 딱딱한 권위주의가 나왔겠습니까? 달마상은 둥글둥글 해맑게 웃는 옛 할아버지 얼굴입니다. 우리는 둥글고 작고 부드러운 것이 아름다운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생태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첩경은 바로 이 둥글고 작고 부드러운 것에 대한 공경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다음 세 번째 제안을 합니다. 오탁번의 시를 봅시다.
<솔잎> - 오탁번
추석 송편 솥에 넣을 솔잎을 따려고 땅거미가 질 때 발소리 죽이고 뒷산에 올라가는 할머니의 얼굴은 손자놈 콧물보다 더 진한 생애의 때 잿빛의 머리칼은 한줌도 안되지만 소나무의 아픔은 옛 짐작만으로도 다 안다 해 넘어가고 첫잠 든 소나무가 은하수 멀리까지 단꿈을 꿀 때 살며시 솔잎을 따야 아프지 않고 솥에 들어가도 뜨거운 줄 모른다 말없이 솔잎이 숨거둘 때마다 젊은 날의 사랑처럼 송편이 익는다
이 오탁번의 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연민의 마음은 이 쓸쓸한 지상에서 얼마나 필요한지 모릅니다. 옛날 우리 어머니들은 마당에 뜨거운 물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마당에 살고 있는 개미, 벌레 등이 죽는다는 이유였습니다. 또 어떤 어머니는 계란을 후라이 하려고 할 때 단박에 깨서 넣는다고 했습니다. 여러 차례 두드려 깨면 계란이 너무 아플 거라는 이유였습니다. 그런데 오탁번 시인은 추석 송편에 넣을 솔잎을 따려고 땅거미가 질 때 발소리도 죽이고 올라가 딴다고 했습니다. 소나무가 아플 테니 첫잠이 들 때 살며시 따야한다는 이유였습니다. 얼마나 대단합니까? 이것은 만물에 대한 연민 없이는 가능하지 않는 행위들입니다. 생태학적 위기와 환경의 문제가 실천적인 과제라는 사실에 동의하고 또 이 문제의 심각성에 동의한다면, 이 문제가 좋은 작품을 생산하느냐 아니냐의 문제와 별개의 길에 놓여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예술 또는 문학 이전의 삶의 문제라는 점을 말입니다. 그렇다면 생태계와 환경 위기의 주제를 훌륭히 소화한 몇 편의 작품을 쓰는 것에서 나아가 직접적 행동에도 나서야 할 것입니다. 그 행동에 나서는 데 자신의 마음부터 다스려야 한다는 생각에서 시간에 대한 새로운 인식, 둥글고 작고 보드라운 것에 대한 공경, 그리고 연민의 마음으로 세상을 살피는 것 세 가지를 제시했습니다. 이것이 너무 막연하여서 불만을 가질 분이 계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분은 이미 개수대에서 물과 쓰레기를 덜 버리고, 목욕탕에서 샴푸와 세제를 덜 쓰고 계실 것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