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영신학의 실체와 적폐
목차
(1) 다른 복음과 번영신학. (2) 예수만 죽고 나는 살아. (3) 나를 찌르는 백마 탄자. (4)죽이기로 작정된 자같이. (5)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아. (6) 머리 위에 하늘은 놋이 되고. (7) 닭 울기 전에 세 번. (8) 입으로 물을 강같이 토하여. (9)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10)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라.
(4)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그러면 왜 또 세상으로부터 믿는 자들이 두 번째 외적 고난을 받아야 합니까? 이것을 바울은 애매한 고난이라고 말했습니다. 주님은 애매한 고난의 이유를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15:18-19) 하였습니다. 이것은 복음의 거룩함을 위하여 하나님이 성도와 세상을 원수가 되게 하신 경륜을 따라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은 우리를 정금같이 연단하는 도가니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천국에서 나서 천국에서 살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만약 천국에서 삶을 시작했다면 우리의 눈에 하나님의 사랑은 보이지 않고 오직 그분의 영광만 보였을 것이기에 루시퍼처럼 반역을 하여 땅으로 떨어지게 되니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그러므로 땅으로 보내져 십자가와 하나님의 사랑을 뼈저리게 깨닫고 다시는 반역이란 단어조차도 모르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이 땅으로 보내신 뜻입니다. 이때에 흠 없고 거룩하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악역의 도구로 사단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되려다가 타락한 인간은 사단의 손아귀에 들어갔고 인간은 그 속성대로 자신들의 힘으로 끊임없이 하늘에 오르려 시도를 하며 살게 된 것입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이기적이고 자기중심과 자기만족적인 삶의 목표를 위해서는 모든 힘과 모든 짓을 다 합니다. 그래서 남을 밟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자기가 하나님이 된 그들은 이제 스스로를 보호하는 길 밖에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세상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 가운데서도 악따구리 짓을 하며 형제라 불러야 하는 동역 자들을 죽이려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런 무리 중에서 부름을 받아 하나님을 의지하며 종으로 세상을 섬기며 사랑하며 용서해야 하는 왕 같은 제사장들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존재론적으로 이러한 세상나라와 하나님 나라의 이중구조의 역학 속에서 가인을 때려죽인 세상과는 삶의 목적과 가치가 다른 삶을 살아야 하기에 힘을 가치로 지향하는 세상과의 충돌은 필연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으로부터 핍박을 당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도라는 구별된 신분과 삶의 방식만으로도 세상은 이미 심판과 정죄를 받았기 때문에 우리를 미워하며 분노합니다. 사단이 성도들을 인질로 잡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형태로 나타나는 증상들이 핍박입니다.
고난의 승부사라 할 수 있는 애매히 고난을 받은 욥은 “우리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태어났다~~.”(욥5:7) 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고난 끝에 말로만 듣던 하나님을 "이제는 눈으로 보나이다." 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사도 베드로는 고난에 대하여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벧전2:19-20)라 했습니다. 자기 잘못 때문에 고난을 받으면 상이 없지만 하나님의 일로 애매히 고난을 받으면 상이 있습니다. 자기 옛 사람 때문에 당하는 고난을 거쳐 지금은 하나님 때문에 받는 애매한 고난이 어디쯤에 와 있을까를 한번 짚어 볼 수 있는 사람은 자기를 온전히 하나님에게 드리지 못함 때문에 마음 아파하기도 합니다.
바울 사도는 복음을 대적하는 세상으로부터 자신과 사도들이 고난당하는 비참함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내가 생각하건데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우리는 곧 세계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고전4:9)하였습니다. 미말 (끄트머리)이란 전쟁에서 승리한 군대가 입성 할 때에 악대가 앞에서 승전가를 연주하며 백마에 높이 오른 개선장군이 앞장서고 병사들이 뒤 따르고 그 뒤 전리품들이 따른 다음 맨 마지막에 묶여 질질 끌려가는 죽게 된 포로를 말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그렇게 됐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런 구경거리에서도 넘치는 기쁨으로 감사를 합니다. 그럼 그런 평안이 어디서 왔을까? 입니다. 자기가 누구인지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할 때에 하늘에서 오는 평안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한 번도 평안할 때에 기뻐하라 한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또 다른 이름은 “충성되고 참된 증인(mavrtu" 말튀스) ~”(계1:5, 3:14)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증인이십니다. 아들은 제자들에게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셨고 사도들과 제자들은 그렇게 순종 했습니다. 증인은 순교와 같은 단어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란 표현을 쓴 것입니다. 선지자들과 사도들과 믿음의 선진들은 모함을 받으며 멸시를 받으며 핍박을 받아 다 돌에 맞아 죽거나 칼로 베임을 당하거나 톱으로 잘려 죽거나 유리 궁핍하였습니다.(히11:35 이하) 더 좋은 부활을 얻기 위하여 악형을 참았습니다. 이것이 어느 나라 이야기입니까? 하늘나라 성도들의 삶의 방식입니다. 그렇다면 번영신학은 이것들 중에 하나라도 오지 않게 해 달라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지금 세상 도처에서는 예수를 믿는 다는 것 때문에 도끼로 목을 베이고 총으로 죽이고 나무에 매달아 화형을 시키는 핍박의 현장들이 YouTube 나 각종 매체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처참함을 목격한 사람들은 몇 날을 식욕을 잃고 잠을 설치기도 합니다. 그리고 만일 내가 저 일을 당한다면 저들처럼 배교를 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를 물어보게 됩니다. 그럼 왜 그들은 배교를 거절하고 하늘을 향한 흔들림 없는 믿음을 가질 수 있을까요? 그들은 십자가를 거절하는 번영신학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시편의 고백은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주여 깨소서 어찌하여 주무 시나이까 일어나시고 우리를 영영히 버리지 마소서.”(시44:22-23)라 하여 이방신들처럼 잠자고 계시느냐 하며 침묵하시는 하나님에게 하는 호소는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71)로 귀결되는 하나님의 큰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고난으로 하나님의 율례를 배운 믿음의 선진들과 신앙의 사람들이 감당한 고난 끝에 복음이 나에게까지 온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외면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하늘에 힘을 끌어내려 자신의 문제나 해결하고 소원성취 하고 병이나 고쳐 열매만 따먹으려는 무속의 탈을 쓴 우상숭배를 하는 번영신앙이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늘의 의는 안중에도 없고 주시면 그것들을 가지고 내가 주님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먼저 받아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그것은 기독교가 아니고 사도들이 경계하여 말하는 다른복음 중에 하나일 뿐입니다. 성경은 은혜를 입으면 자기를 드리고 싶어 헌신하는 뜨거운 사랑이 넘치는 것이 먼저인 것을 여러 군데서 증언합니다. 그래서 은혜를 경험한 자는 자기의 눈물과 함께 머리털로 흙먼지로 범벅이 된 예수님의 발을 닦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런 은혜를 깨닫고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게 하기 위하여 고난을 받으라.! 합니다.
무지하게 악한 인간들은 고난 없이는 낮아지지 못하고 낮은 자리가 아니면 하나님의 은혜를 알 수 없고 그 은혜를 알지 못하는 자는 의도 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번영신학과는 정 반대의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게 되면 첫 번째로 너는 먼저 고난을 받으라 입니다. 성경은 받으라! 의 명령들을 이렇게 말합니다. 구원을 받으라! 성령 충만을 받으라! 깨끗함을 받으라! 교훈을 받으라.! 생명수를 받으라.! 그리고 고난을 받으라.! 입니다.
그 고난은 배에서 쓴 것입니다.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책을 갖다 먹어버리니 내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계10:10) 했습니다. 복음은 입에 꿀같이 달은 것입니다. 복음을 먹은 자가 살아내야 하는 삶의 과정들은 쓰기가 말할 수 없다는 예언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가운데 고난은 어디로 갔습니까?”~~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1:8) 하였는데 애매히 받는 고난이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고난이라는 금을 연단하는 과정을 거처 천국을 소망하는 신의 성품에 참여할 수 있기 때문에 고난을 받으라.! 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번영신학은 이 복음을 먹고 배도 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잘못이 나타날 것을 사도가 미리 예언하여 말하기를 “저가 내게 말하기를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하더라.”(계10:11) 하였습니다.
그러면 교회에서 무엇을 다시 예언하고 가르치란 말입니까? 마귀도 아는 기본만 말하자면, ”바울과 우리를 좇아와서 소리 질러 가로되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하며“(행16:17) 한 것같이 교회는 구원의 길을 전하는 곳입니다. 또 사도 요한은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1:5-7) 라 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하나님과 사귀는 곳이며 형제와 사귀는 곳입니다. 그것이 교회를 세우신 뜻이기에 이 바탕위에 있으면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사귐이 제일 먼저입니다. 이 기본도 안 되었는데 일부터 하고, 헌금부터, 충성부터, 복부터 받으라 하다가 아간을 만들어 내고 아나니아를 양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사귐 안에는 이 세상에서 자기의 갈 길과 할 일이 무엇인지 밝히 알게 됩니다. 이 할 일들을 위하여 형제들이 동거하며 연합하는 사귐을 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시133:1) 라 한 것입니다.
계속 (5)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