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 휴양림, 그 매력속으로
기억과 추억 사이/발길 닿는 데로 여행
2010-09-02 21:34:29
남이휴양림, 그 매력속으로
금산의 남이 휴양림은 금남정맥의 한줄기인 선야봉 자락에 안겨있으며 활엽수림과 고로쇠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져있다. 선야봉을 오르는 산길 옆으로는 계곡과 캠핑시설이 들어서있어 피로에 지친 도시인들이 하루 동안 묶고 올 수 있는 아주 좋은 곳이다. 무더위가 숨통을 짓누르고 땡볕이 가마솥처럼 들끓는 한여름이라 산을 타며 트레킹을 하는 것보다 오히려 한적한 숲 속에 숨어들어가 심신을 씻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았다. 멀지도 않을 뿐더러 넓게 닦인 도로를 타고 달려가면 한 시간 만에 닿을 수 있는 거리, 그러나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출발부터 김이 빠졌다. 하늘을 뒤덮은 먹장구름이 시샘을 하듯 일행이 떠나는 길 위로 드문드문 빗방울을 뿌려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었다. 매월 일행들이 야생화 기행을 떠나는 날은 하늘이 먹구름을 뒤집어 쓴 채 굼틀거렸고 급기야는 빗방울을 뿌려주는 일이 반복되었다. 초등학교의 소풍날도 그랬다. 비가 오지 않기를 얼마나 바랬던가. 문을 열고 닫고 하늘을 보다가 오롯이 밤을 지새웠던 추억, 밤에는 하늘이 구름 한점 없이 쨍쨍하다가도 아침에 소풍을 떠나면 이상하게 빗줄기가 몰아쳐 허탕을 쳤던 일이 얼마나 많았던가. 금산에 도착했을 때는 까맣게 구름장을 뒤집어 쓴 하늘이 금방이라도 소나기를 퍼 부울 듯 음산했지만 가끔 빗방울 한두 방울 뿌려줄 뿐 다행히도 큰비는 몰아치지 않았다.
남이 휴양림 계곡에서 수영을 하는 아이들
꽃댕강나무
꽃범의꼬리
무더위가 계속되는 날이라 그런지 습기가 가득 들어찬 휴양림도 무덥기는 매 한가지였다. 울창한 숲이 그늘을 내려 주는 산길을 따라 오르면 함께 어깨동무를 한 산골물이 신이 나서 해맑은 소리를 내며 흘러내렸다. 발가벗고 물속에 들어가 미역을 감는 아이들, 팬션 주변으로 자리를 잡은 텐트들의 행렬이 휴양림의 분위기를 더 한층 고조시켰다. 비록 돈을 받고 텐트를 칠 장소를 빌려주기는 했지만 휴양림의 분위기를 해치지 않아 좋았다.
산길 드문드문 세워놓은 뱀 주의 표시에 기분이 음산하고
위로 오르는 산길은 숲 속에 묻혀있다. 울창한 숲이 내려주는 그늘이 무더위에 지친 몸을 감싸 아늑해 좋았지만 군데군데 꽂아놓은 안내판의 내용이 기분을 음산하게 만들었다. 뱀이 출몰하니 조심하라는, 뱀에 물렸을 때는 신속히 응급조치 하라는 문구까지, 산길가로 흐드러진 야생화에 디카의 렌즈를 갖다 대면서도 혹시나 뱀이 출몰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가슴을 졸여야 했다. 아마 산자락이 돌이 많이 깔려 뱀이 많은 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아주 오래전 고향에서의 추억 한 토막이 떠올랐다.
그 시절 고향에는 뱀이 억수로 많았다. 집집마다 두른 돌담에는 심심하면 팔뚝만한 뱀이 똬리를 틀고 척 걸쳐 있었다. 그 당시 고향에선 가장 나이가 많고 무섭기로 소문난 호랭이 영감은 그 뱀을 잡아 통째로 껍질을 벗겨 아작아작 씹어 먹었는데 그런 생각을 하면 자다가도 오금이 저릴 때가 있었다. 그렇게 오래 세상을 산 걸 보면 뱀이 인간의 삶에 영향을 끼친다는 말은 말 많은 호사가들이 지여낸 이야기로 치부할 수밖에 없다. 산길에는 야생화들이 지천으로 흐드러졌다. 거의가 눈에 익은 꽃들이다. 등골나물, 자주꿩의다리, 물봉선, 꼬리조팝나무, 나무수국, 애기똥풀, 마타하리 등 부지기수다.
숲체험관 입구
물봉선
이름만 불러도 꽃향기가 산길을 가득 채우는 그런 꽃들이다. 조금 올라가다 보니 산길 아래로 눈요기 거리로 조성한 숲체험 학습장이 눈에 띈다. 그 곳을 비껴 곧장 산길을 타고 올라갔다.
도랑위로 걸쳐 놓은 다리를 건너면 정상인 산야봉 오르는 길이다. 다리 앞에서 잠시 멈춰 섰다. 높이 솟은 가로등에 거대한 왕벌 한 놈이 날개를 쫙 펴고 붙어있다. 가로등 뒤에 숨어 누군가를 공격할 것 같은 저 자세에 온몸이 저리다. 만약 운 없어 한방 쏘인다면 뼈도 추리지 못할 것 같다. 자세히 보니 그 왕벌은 인공으로 만든 벌이다. 이렇게 만든 짝퉁 곤충들이 산길 가 드문드문 가로등에 매달려 즐거운 눈요기 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가짜에 속는 것이 어디 곤충뿐이랴. 인생을 살다보면 진짜에도 솎고 가짜에도 속으니 어느 것이 진짜인지 구별할 수가 없는 세상이다.
숲체험학습장
숲학습체험관 입구
조금 올라가 다리품을 쉬었다. 그곳에서 예정에도 없던 시낭송을 했다. 떡갈나무님이 소유한 스마트 휴대폰으로 인터넷을 접속하고 야생화 카페로 들어가 내가 예전에 올려놓았던 ‘치열한 사랑’이란 시 한 편을 꺼내 굵직한 목소리를 뽑았다. 참 똑똑한 세상이다. 스마트 폰이 생겨나 손끝만 눌러도 천리만리의 정보를 단숨에 빼오니 다름 아닌 광속의 세상에 살고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호박꽃 속에서/벌 한 놈 야무지게 꽃가루를 모은다/ 깊은 벼랑 하르륵 타고 내려/ 꽃향기 출렁이는 바닥에서 분주하게 꽃가루를 모은다/ 혈혈단신 꽃가루 박박 긁어대는/ 저 황홀한 발놀림, /신기한 요술처럼 발끝에 꽃가루 뭉쳐달고 /하르륵 날개 떨며 부리나케 꽃 속을 빠져 나온다 날개 떠는 소리 감질나게 매끄러워서 /발끝에 매단 꽃가루 떨어질듯 위험하다/ 저 꽃가루 어디에 발라줘야 실한 열매 맺힐 것인가 /땡볕 타오르는 한낮 /호박넝쿨 축 늘어져 애타게 꽃잎 오므린다 /벌이 맺어준 치열한 사랑 남김없이 받아먹고 /암꽃들 앙팡지게 배를 불린다 그 배 눈물나게 탐스러워 /매끈한 껍질 다시 한번 살살 쓰다듬어 본다 아득한 신혼시절 /묵직하게 불러오던 아내의 배를 쓰다듬는 기분이다/ 수꽃과 암꽃 사이 어지럽게 넘나들며 /치열한 사랑 맺어주던 길을 따라 벌 한 놈 끓임 없이 꽃가루를 나른다/ 남 몰래 불러가는 배를 움켜쥐고 /받침목 끈질기게 타오르는 호박의 생애가 /아내의 일생처럼 눈물겹기만 하다
우리의 삶에도 치열한 사랑이 필요하다. 갈수록 삭막해지는 세상에서 치열한 사랑은 아내와 남편의 관계를 더욱 끈끈하게 만들어 가정에 윤활유로 작용한다. 나와 아내는 언제 서로의 가슴에 제대로 사랑의 꽃가루를 묻혀 준 적 있던가. 서로가 진지하게 꽃가루를 묻혀주면 실한 호박 같은 열매 맺힐 텐데 하는 아쉬움이 스쳐갔다.
호박넝쿨과 문짝의 조화
나무수국
시낭송이 끝나자마자 소나기가 게릴라처럼 들이닥쳤다. 조용하던 산자락이 금방 소나기의 위력에 놀라 풀줄기를 흔들어대고 수선을 떨었다. 더 이상 산길을 타고 오르는 것을 포기하고 산길 옆 다리 아래로 내려가 몸을 숨겼다. 마침 점심시간이라 집에서 싸온 먹거리들을 풀어 놓았다. 푸짐한 자연의 밥상이다. 숨 막히게 내리꽂히는 소나기를 바라보면서 먹는 점심은 낭만적인 분위기에 젖어 더 맛깔났다. 더구나 보랏빛 꽃봉오리를 터뜨리고 세찬 빗방울을 맞고 있는 누리장나무꽃을 보니 더없이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냄새가 구리고 고약해 구릿대라고도 불리지만 바람개비를 닮은 꽃이 예쁘기 그지없다. 길게 빠져 나온 수술은 다리를 꼬고 앉아 눈 화장을 하는 발칙한 여인의 인조 눈썹을 연상케 했다. 배가 부르자 더 이상의 산행을 접고 하산을 했다. 다행이 게릴라들은 도망을 갔지만 하늘을 뒤덮은 먹구름이 또 다시 많은 양의 소나기를 쏟아 부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숲 체험학습장에서 야생화들과 대화를
숲체험 학습장은 꽃이 피는 숲, 침엽수원, 만져보는 숲, 향기 나는 숲, 덩굴 숲, 알뿌리원, 무궁화원 등 10개의 주제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곳에는 다양한 식물들이 나름대로의 톡톡한 모양과 고운 빛깔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 모으느라 여념이 없었다. 제 힘으로는 부족했던지 벌과 나비들까지 데려와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꽃에 붙어 꿀을 빠는 벌들과 너울너울 춤사위를 펼치는 나비의 환상 궁합은 보는 일행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오늘만은 힘들게 산행을 하며 꽃놀이를 할 필요가 없었다. 일행들을 놀리듯이 찔끔찔끔 흩뿌리는 빗방울 때문에 우산을 접었다가 펴는 일이 귀찮기는 했지만 야생화들과 오순도순 이야기꽃을 피우는 이 시간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날이 아닐까 싶었다. 야생화들은 일행들을 보자 요염한 자태로 자신의 소개를 하느라 분주했다.
산길가에 인공으로 만든 가짜 왕벌
산길을 걷고 있는 회원들
저는 꽃범의꼬리라고 해요. 오복이 꽃을 매단 줄기 끝이 짐승의 꼬리를 닮았다고 해서 그렇게 부르는데 왜 하필 호랑이꼬리인지 모르겠네요. 그렇다고 절 피하지 마세요. 저는 어디까지나 화사한 꽃이니까요,
꽃과 줄기가 댕강 잘 떨어진다고 꽃댕강이라고 해요. 이름이 약골 같지만 주인을 생각해 자부심을 느껴요. 결코 약하지는 않아요. 인조 꽃 같은 순백의 빛깔이 오히려 사람들의 마음을 더 눈부시게 자극하나 봐요.
물봉선 인사드려요. 봉숭아와 같은 자매랍니다. 꽃 모양과 빛깔이 서로 빼 닮았지요, 울밑에 선 봉숭아라는 노래 때문에 제 이름만 불러도 서럽다는 사람이 많답니다. 어린 시절 처녀애들이 봉숭아 꽃잎을 돌로 찢어 백반을 섞어 꽃물을 들이던 기억이 생생해요. 손길만 살짝 스쳐도 씨방이 툭 터지는 봉숭아처럼 저 물봉선도 손을 갖다대기만 해도 말없이 씨방이 터지고 씨앗을 자르르 쏟아내요. 그래서‘ 나를 건드리지 마세요.“라는 꽃말이 붙었나 봐요. 인도와 중국이 원산지인 봉숭아와는 달리 저는 순수한 토종이니 봉숭아보다 저게 더 정이 많이 들 겁니다.
숲체험 학습장에 있는 수도시설
며느리밥풀꽃
전 꼬리조팝나무예요. 자잘한 꽃망울들이 조팝처럼 눌러 붙어 곧추선 모양이 꼬리 같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지요. 빽빽하게 붙어있는 꽃들을 보면 서로 은밀하게 몸을 섞어 사랑을 나누는 모습이지요, 그래서 꽃말은 “은밀한 사랑” 입니다.
개쉬땅나무꽃도 인사드립니다. 수수이삭처럼 생긴 꽃이지요. 사람들이 화가 나면 개쉬땅, 개쉬땅하고 저에게 욕을 퍼붓지만 절대 기죽지 않아요. 저에게는 골다공증과 타박상을 치료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니까요. 혹시 산행을 하다 타박상을 입는 사람이 있다면 저에게 오세요. 기꺼이 도와드릴 테니까요.
층꽃나무도 소개를 할게요. 한 뼘씩 간격을 두고 줄기에 매달린 꽃들이 층을 이룬다고 층꽃이라고 해요. 해맑은 가을 하늘을 배경으로 흔들리는 저를 보면 가을 여인 같다고 해요, 그래서 저는 “가을의 여인”이란 꽃말이 붙었답니다.
저는 산짚신나물입니다. 짚신나물과 한 형제지요. 늘 짚신을 신고 굿은 일을 하는 마당쇠 같은 놈 같아 그런 이름이 붙은 줄알았지만 실은 나그네 짚신에 붙어 제 후손을 퍼뜨리기 때문이라네요, 이름은 시골스러워도 도회 분위기가 나는 놈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답니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제 자태가 앙증맞지 않는가요, 그런데 저를 잘 알려면 형제인 짚신나물과 구별을 할 줄 알아야 해요. 꽃을 빽빽하게 맺고 꽃이 줄기 아래에서 위로 피어 올라가면 짚신나물이고 그 반대면 산짚신나물이니까 잘 기억해 두세요.
산짚신나물
더덕꽃
그런데 많은 야생화들 중에서도 백당나무꽃이 단연 인기다. 백당나무꽃이 벌, 나비를 불러 모으는 방법이 꽤 이채롭다. 진짜 꽃이 눈곱만큼 작다보니 가장자리로 가짜꽃(무성화)을 매달아 그들을 유혹한다. 말하자면 가짜꽃으로 사기를 치는 셈이다. 그 가짜꽃에 유혹당해 날아온 벌들이 얼마나 백당나무를 원망할까.
야생화들의 소개가 끝날 무렵. 게릴라로 돌변한 소나기가 또 한바탕 산자락을 휘저었다. 매점 옆 지붕 아래서 비를 피하면서 마시는 커피의 맛은 일품이다. 소나기를 만나 커피가 구수한 향기를 풍길 때의 맛이 바로 환상 궁합이 만들어낸 낭만의 맛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