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은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롬 6:22)를 강해하면서
‘인간이 하나님과 같이 거룩하지 않으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다’며 성화를 강조하지만,
그것은 순서가 틀린 말이다.
하나님과 같이 거룩한 사람이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음으로 죄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종이 되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는다.
성경은 성화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개신교 신학자들이 번역한 성경은 물론
개신교 학자들과 천주교 학자들이 공동으로 번역한
공동번역 성경에도 성화라는 말은 없다.
성화는 성경적 사상이 아니다.
성경은 sanctification을 성결이라고 했다.
그러나 언어는 시대에 따라
다른 경험과 통찰을 저장하는 저장고(貯藏庫)이므로
성화를 꼭 성결로 바꾸라는 말은 아니지만,
성화와 성결이 어떻게 다르며 우리의 신앙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아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화학적 변화는 물질이 분자나 원자
또는 이온의 구조를 바꾸어서 다른 물질로 변하는 것이다.
소위 변질되는 것이다.
물이 산소와 수소로 변하는 것은 화학적 변화이다.
화학적 변화에서 변화된 물질은
변화되기 전의 물질과 전혀 다른 물질이다.
물리적 변화는 물이 얼음이나 수증기로 변하듯이,
또는 더러운 옷을 빨아 깨끗하게 되듯이
성질은 변하지 않고
모양이나 형태만 변하는 것이다.
물리적 변화는 모양만 변한 것임으로
조건이나 환경이 변하면 제 자리로 돌아간다.
인간의 품성 변화를
화학적이냐 물리적이냐로 설명하는 것은
낯선 설명이지만,
성품이 변화한 뒤에
다시 죄를 지을 수 없는 사람이 된다고 믿는다면
그는 성품 변화를 화학적 변화로 이해하는 것이다.
완전론자들의 이해가 바로 그것이다.
완전하게 살겠다는 태도가 잘못될 것은 없지만,
그러한 주장의 문제는
거듭거듭 죄짓는 사람을 정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한번 완전하게 되면
다시 죄를 짓지 않게 된다고 말하면서
하나님께서 거듭거듭 죄짓는 사람을
언제까지 용서해주시겠느냐고 묻는다.
그리스도인의 거듭남을
물리적 변화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라도
거듭거듭 넘어질 수 있음을 이해한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자의 생활을
성화로 보는 자들은 한번 성성(聖性)을 획득하면
마치 물이 산소와 수소로 변한 뒤에
에너지가 가해지지 않는 한 다시 물이 되지 않듯이
다시는 그 성성을 잃어버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거룩한 백성도 더럽혀지는 것을 성경 역사에서 무수히 본다.
완전하게 창조된 첫 사람 아담이 죄를 범했듯이
새 창조된 인간도 끊임없이
하나님 안에 있기로 선택하지 않으면 넘어질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매 순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엡 2:22) 가는 집이다.
갈멜산 위에서 불을 내려오게 한
엘리야가 40일을 걸어 호렙산까지 도망했듯이(왕상 19:8)
거듭난 자도 쓰러질 수 있고
깨끗한 자도 진흙 같은 세상을 걷는 동안
끊임없이 튀어 오르는 흙탕물에 더럽혀질 수 있다.
성결은 그러한 중에도
매 순간 발을 씻으며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성경이 요구하는 것은 성화가 아니라 성결이다.
성화는 목적에 대한 말이요
성결은 과정에 대한 말이다.
성결은 옷을 빨듯이
매일의 생활에서 깨끗함을 유지하며 사는 삶이다.
성결된 삶을 살다가도
그리스도 안에 살기를 포기하는 순간
거룩을 잃어버린다.
그러므로 성경은 거룩에 이르는 방법을
종에 비유했다(롬 6:19).
종은 주인을 향해 귀가 뚫린 자요,
주인에게 입과 귀를 맡긴 자이다(출 21:6).
이 주인도 섬기고 저 주인도 섬기는 자를
삯꾼이라 하고,
한 주인만 섬기는 자를 종이라 한다.
삯꾼은 위험에 함께 하지 않지만(요 10:12, 13)
종은 주인의 말만 들으며
모든 위험에 주인과 함께 한다.
그러한 종을 하나님은
‘정절이 있는 자라’(계 14:4)고 하신다.
144,000은 종된 자들이요 깨끗한 자들이요
정절이 있는 자들이요 거룩한 자들이다.
천사들은 삯군의 이마가 아니라
종들의 이마에 인을 치신다(계 7:3).
결혼 생활이란 입맛, 성격, 취미,
사상이 각각 다른 두 개체가 만나 어울려 사는 삶이다.
여기에 적응하려면
입과 귀를 상대방에게 맡기고 살아야 한다.
옛날 우리네 어머니들은 시집가서 적응하기 위해
벙어리 삼 년, 귀머거리 삼 년의 세월을 지나야 했다.
그것이 바로 성(聖)이다.
거룩(聖)은 귀(耳)와 입(口)을
하나님께 맡기고(任) 사는 삶이다.
부부생활은 귀와 입을 상대방에 맡긴 후에야
재미가 붙기 시작하고,
신앙생활은 귀와 입을 하나님께 맡긴 후부터
즐거운 나날을 맞게 된다.
거룩을 위한 심지(心炷)는 일편단심(心)이다.
하나님을 향한 일편단심에
하나님의 거룩의 불이 점화된다. 이
불을 가지고 세상을 밝히며 살아가는
삶이 성결한 삶이요 그 마지막은 영생이다(롬 6: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