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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전체가 13장부터 예수님의 다락방 강화가 시작되잖아요. 13장에서 그 방에 앉아 계시면서 어디 어디 오시는가 하면, 13장 2절에 “저녁 먹는 중”, 그다음에 4절에 “저녁 잡수시던 자리” 이렇게 되어 있잖아요. 이게 다락방이죠. 마가의 다락방이라고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예루살렘 성지 탐사를 가면 여기저기에 “마가의 다락방”이라고 하는 말이 있지만, 요한복음 13장 본문에 그 말이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다만 저녁을 잡수시려면 건물 내 어떤 장소가 있고, “저녁 잡수시던 자리”라고 하는 것은 특정된 장소로 볼 수 있겠죠.
그래서 세족식이 시작되고, 그다음에 13장 21절부터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그 성찬식 이후에, 정확히는 세족식과 식사 중에 자리를 나가는 장면이 나온 다음에 14장에서 그 같은 장소에서 주님이 계속 말씀하시는 내용이거든요.
그리고 14장 마지막에 장소를 이동하는 건 사실이죠. 그런데 14장만 따로 떼어 보면 사실 이 내용은 13장 21절부터 시작되는 내용입니다.
13장 21절입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이 괴로워 증언하여 이르시되.”
무슨 말인가 하면 13장 1절부터 20절까지는 세족 예식이잖아요. 주님이 발 씻기시는 장면이잖아요. 13장 21절부터 이제 그 품에 의지해서 “누가 나를 팔까?” 뭐 그런 얘기 하시는 장면 아닙니까?
그다음 13장 31절부터 유다가 나가지요.
31절에 “유다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라고 말씀하셨죠. 이게 무슨 말이냐고요?
확실하게 내가 유다가 나를 팔러 나갔으니 십자가가 확정되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일이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유다의 배신의 순간을 “영광을 얻었고”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래서 영광의 이야기를 13장부터 이제 십자가의 영광으로 이야기한다, 이런 내용을 살펴봤습니다.
그다음에 이제 새 계명 이야기를 하시죠.
13장 34절입니다. 여기 이제 14장을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하기 때문에 언급을 드립니다.
34절에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예수께서 분명히 “새 계명”이라는 표현을 쓰셨어요.
요한은 나중에 예수께서 하신 이 계명을 요한일서, 요한이서, 요한삼서에서 “처음부터 있던 옛 계명”이라고 하면서 서로 사랑하라는 그 옛 계명이 사랑 계명의 내용이다, 하는 설명을 하셨습니다.
하지만 13장에서 예수께서는 “십계명을 잘 지켜라” 이렇게 하지 않으시고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십계명의 문자적인 조문에 매이지 말고 십계명의 정신인 사랑을 강조하셨고, 36절에서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그러니까 유명한 구절이잖아요.
“이 사람을 보라.”라는 빌라도의 말이 라틴어로 에케 호모(Ecce Homo)인 것이 유명하듯이,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를 라틴어로 하면 “Quo vadis, Domine?”라고 합니다.
이렇게 한 다음에 14장이 이어지거든요.
그러니까 14장은 기본적으로 13장의 연속이죠. 다락방 강화, 예수님의 세족식과 식사 이후에 이어지는 다락방 강화입니다.
요한복음 14장을 따로 떼어 보면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세 명의 제자들의 질문이 있습니다.
첫 번째 제자의 질문이 5절입니다.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여기서 나오는 대답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
순서도 의미가 있다는 것은 이미 설명드렸죠.
이게 첫 번째 질문이고요.
두 번째는 8절입니다.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그랬어요. 질문이라기보다 요구죠.
빌립이 “보여 주세요.” 이 무슨 경험이죠? “비지오 데이”(visio Dei), 하나님을 보는 경험입니다. 라틴어 visio에서 영어의 vision 같은 말도 나옵니다. 하나님을 보는 경험이에요.
도마는 “어디로 가시는지 모르는데 우리가 그 길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라고 했고, 빌립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는 말씀을 듣고 “아버지를 보여 주세요.” 하는 심정으로 말한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마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죠.
이런 두 번의 두 제자의 질문 혹은 요구 다음에 22절에 세 번째 제자의 반응이 나옵니다.
22절입니다.
“가룟인 아닌 유다가 이르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아니 하시나이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가룟 유다가 아니라 유다”라는 것입니다.
12제자 중에 유다가 있었는데, 우리는 너무 익숙하게 가룟 유다만 알고 있잖아요. 본문은 아예 “가룟인 아닌 유다”라고 표현합니다.
이게 세 번째 제자의 질문입니다.
요약하면 첫 번째 도마가 “어디로 가시는지 모릅니다. 어찌 그 길을 알 수 있습니까?”라고 하고, 두 번째 빌립은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라고 하고, 세 번째 가룟인이 아닌 유다는 “왜 세상에는 나타내지 않으십니까?”라고 질문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22절에서 가룟인이 아닌 유다가 이 질문을 하게 된 배경은 사실 빌립의 질문에 대한 주님의 대답에 이어서 하시는 말씀에 관한 것입니다.
그래서 9절부터 21절까지 내용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10절입니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에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를 10절부터 설명하시지요.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여기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신 것을 믿지 못하느냐?”라는 말이 나옵니다.
15장에서 포도나무의 비유가 나오는데, 그 비유의 중심 사상이 여기 14장 10절에서 이미 언급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지요.
포도나무 비유의 모든 내용을 한마디로 압축하면 “내가 그 안에, 그가 내 안에 거하면”이라는 사실을 말씀드렸었죠.
여기 14장 10절에서 이미 주님께서 그 기본 개념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다.”
이것이 “아버지를 본 자가 나를 본 것이고, 나를 본 자가 아버지를 보았다”는 개념이라는 거죠.
그런데 이게 추상적이잖아요. 추상적이니까 15장에 가서 포도나무 비유로 구체화시키면서 설명하는 것이 포도나무 비유입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이게 핵심이라는 거지요.
아버지를 본다는 말의 의미, 그것이 정말 안 믿어지면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이제 초점을 “일”로 바꾸지요. 일이라고 하는 단어가 헬라어로 에르곤(ergon)이라고 하는데 복수형으로 “일들”입니다.
“이를 믿으라.”
그다음에 12절에 보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이렇게 됐죠.
“일을 믿으라.” 내가 하는 일을 믿으라.
예수께서 요한복음 5장에서 당신을 나타내는 증거 네 가지를 제시했었잖아요.
침례 요한이 나를 증거하고, 아버지가 나를 증거하고, 내가 하는 일이 나를 증거하고, 성경이 나를 증거한다.
이렇게 예수님의 자기 증거와 변호를 요한복음 5장에서 아주 자세히 말씀해 주셨었잖아요.
여기서 14장 11절에서 “내가 하는 일”이라고 하는데,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내 안에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되는데 그걸 못 믿겠으면 “내가 하는 일을 믿으라.”
그런데 어떻게 내가 하는 일을 믿을 수 있을까?
12절에서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가 한 고리를 가지고 다음 단계로 넘어갑니다.
그다음 단계가 뭐죠?
12절 하단입니다.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겁니다.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그러니까 “나와 아버지가 하나인 것을 믿으라. 안 믿어지면 내가 하는 일을 가지고 믿어라. 그러면 내가 하는 일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 네가 직접 그것을 믿으면 네가 직접 그 일을 하게 될 거고, 내가 한 것보다 더 큰 일을 하게 될 것이다.”
이게 무슨 말씀을 하려고 그러는 걸까요?
12절부터 13절을 보시죠.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그러니까 12절 하단에서 “내가 한 것보다 더 큰 일을 하게 될 것이다.” 어떻게?
13절에서 설명하지요.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그렇죠?
결국 우리가 예수께서 하신 일보다 더 큰 일을 하게 되는 것도 예수의 이름으로 구하여 이루어진다고 하는 거지요.
14절도 보십시오.
13절과 14절을 비교해 보세요.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여기까지 읽고 14절을 보시면,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똑같은 말이죠.
그러니까 13절과 14절을 그냥 읽으시면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내가 행하리니”가 A, 그다음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가 B, 그다음 14절에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가 다시 A입니다.
그러니까 A-B-A 공식으로 똑같은 말을 13절 상반과 14절에서 반복하심으로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를 극도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게 “더 큰 일을 행한다”는 말의 의미를 분명하게 해 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되는 것이 예수와 상관없이 무슨 능력을 행한다는 의미가 아니고, 예수의 이름으로 구하면 그 일을 주님이 응답하셔서 예수께서 지상에 계실 때보다 더 큰 일을 할 수도 있다는 말씀을 하시는 거지요.
그리고 15절에서, 16절을 먼저 보시죠.
16절에 보니까,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여러분 대부분 성경 읽으시는 분들이 16절을 따로 떼어 읽어요. 이때부터 보혜사 성령에 관한 이야기라고 생각해서 따로 떼어 읽습니다.
그런데 이 16절은 13절과 떼어서 보면 안 됩니다.
13절에서 아까 뭐라고 그랬죠?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든지.”
그랬잖아요.
그런데 16절에서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라고 하죠.
그러니까 결국 16절은 13절에서 “내 이름으로 구하면 주겠다” 하는 것의 실제를 16절에서 이미 설명해 준 것입니다.
뭘 구하면 내가 한 일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고 하는 거지요.
그걸 여기 설명해 주는 게 16절입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러니까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께서 하신 일을 또 하게 되고, 예수께서 하신 것보다 더 큰 일을 하기 위해 구해야 되는 것의 실체가 16절에서 설명되는 것이죠.
여기 “보혜사” 앞에 “알로스”(allos), “다른”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다른”이라는 말이 붙어 있다는 사실은 뭘 의미하나요?
보혜사가 이미 있는 거지요.
보혜사가 있는데 “다른 보혜사”, 즉 또 한 분의 보혜사라고 할 때 “또 다른 보혜사”라는 표현이 가능한 거지요.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상식적으로 보혜사 하면 누구인가요?
이미 있는 보혜사는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 보혜사이십니다.
요한일서 2장 1절을 봅니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여기 대언자라는 말 위에 난외주가 있죠.
그 아래를 보면 같은 단어가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일서 2장 1절에서 “대언자”라고 번역된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 번역된 그 대언자라는 단어가 요한복음 14장 16절에서 “보혜사”라고 번역된 단어와 헬라어가 똑같습니다.
파라클레토스(paraklētos)입니다.
단지 그리스도인들이 성령 하나님에 대한 명칭으로 “보혜사”라는 말을 너무 익숙하게 사용하다 보니까, 여기 요한일서 2장 1절은 보혜사라고 번역하지 않고 대언자라고 번역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요한일서 2장 1절을 “보혜사”로 표현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번역해야 요한복음 14장 16절을 읽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또 다른 보혜사”라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지요.
파라클레토스라는 말은 “파라”(para)가 “곁에, 옆에”라는 뜻이고, “클레토스”(klētos)는 부름받은 자, 말하는 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보혜사, 우리말로 보혜사라는 말은 은혜를 베풀어 주는 선생님이라는 뜻으로 이해하기도 하고, 대언자는 대신 말해 주는 자라는 뜻이에요.
그런데 두 말의 공통되는 그 단어가 바로 파라클레토스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이 반드시 예수의 일을 하기 위해서 예수의 일을 한다고 할 때 반드시 구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내 옆에 계신 것처럼 파라클레토스, 곁에서 함께하시는 분으로 계시다가 예수께서 승천하시면서 또 다른 파라클레토스가 오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혜사 성령” 이렇게 표현하면 사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독점적으로 사용하면 문제가 있습니다.
“성령만이 보혜사다.” 이렇게 표현하면 안 됩니다.
보혜사는 예수님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말입니다.
예수도 보혜사, 옆에서 말씀하시는 분이시고 성령도 보혜사, 옆에서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때문에 “내가 옆에 있었던 것처럼 이제 성령께서 나의 역할을 대신하여 똑같이 하는 거야.”라는 의미입니다.
예수께서 하셨던 일을 성령께서 해 주시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주의 백성들이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예수의 일을 하게 된다.
이것이 예수가 아버지 안에 계시고, 아버지를 본 것이 예수를 본 것이고, 예수를 본 것이 아버지를 본 것이다, 하는 말과 지금 계속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맥락 속에서 말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성령을 구하여, 예수께서 대언자와 보혜사로서 하셨던 그분처럼 또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을 구하여 그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예수께서 아버지와 하나이심을 확신하게 되는 것을 우리의 삶 속에서 하게 된다는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16절에,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7절에서 설명합니다.
“그는 진리의 영이라.”
“진리의 영”이라고 할 때 우리가 문법적으로 “의”라고 하는 소유격이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거 다 아시죠?
“개의 꼬리”라고 할 때 “개의”는 개가 가진 꼬리라는 뜻이잖아요. 그것을 주격적 소유격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시저의 살인자”라고 할 때는 시저가 살인자를 만났다는 뜻이 아니라 시저를 죽인 살인자라는 뜻이잖아요. 그때 “시저의”는 목적격적 소유격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진리의 영”이라는 말은 진리를 목적으로 보면 진리를 가르치는 성령이라는 뜻도 되고, “진리가 가진 영”이라는 의미로 보면 성령 자체가 진리이신 분이라는 뜻도 됩니다.
그래서 “진리의 영”이라는 말 속에 성령께서 진리를 가르치신다는 뜻으로 이해해도 되고, 성령이 진리이시다는 말로 이해해도 틀린 것이 아닙니다.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때 세상은 무엇입니까?
죄를 나타내 주는 일종의 환유법입니다. 세상 전체를 하나의 표현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세상과 제자가 대치됐지요.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시며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어떻게 옵니까?
성령께서 임하시는 것으로, 또 궁극적으로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시는 것으로 나타내는 의미이죠.
19절입니다.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왜요?
십자가잖아요. 돌아가시잖아요.
“너희는 나를 보리니.”
어떻게 해요?
부활하신 것을 보게 되죠.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부활을 약속하시는 거죠.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20절은 지금까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의 압축 요약입니다.
부활하시게 되면 성령께서 임하시게 되고,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예수께서 지금까지 쭉 해오신 모든 말씀을 압축하는 겁니다.
그러고 21절,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이 말씀을 언제 하셨나요?
15절에서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라.” 그랬죠.
그리고 21절에서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그런데 이 말씀을 13장 34절과 연결해 보십시오.
13장 34절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그러면 21절로 돌아옵니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이 말을 예수께서 직접 하신 표현을 그대로 가지고 말씀을 해 보자고요.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의 계명이 뭐죠?
13장 34절,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그랬어요.
그러니까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이 말을 13장 34절로 표현하면 뭡니까?
바로 “사랑하는 자가 나를 사랑하는 자니.” 그 말이지요.
예수께서는 이런 동어반복을 사용하시면서 당신이 하시고자 하는 개념을 선명하게 전달하십니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다.”
한마디로 “사랑하는 자가 사랑하는 거야.” 이 말입니다.
이 말을 예수께서 하신 표현을 그대로 적용하면 “서로 사랑하는 자가 예수를 사랑하는 거야.”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죠.
계명의 문자적 조문에 매여 있으면서 전혀 사랑하지 않는 유대인들과 제자들의 상황을 완전히 바꾸어 표현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조문만 붙잡고 있는 유대인들과 달리 제자들에게 “너희가 서로 사랑해”라고 하셨던 것을 우리가 또다시 십계명의 조문으로 바꾸어서 표현해서는 안 되는 거지요.
예수께서 그렇게 강조하시려고 했던 것은 계명의 완성인 사랑입니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 서로 사랑하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말씀했어요.
그러니까 뭐죠?
20절이 지금까지 말씀의 압축 요약이라면 21절은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교훈하시고 싶은 모든 내용을 실천적으로 압축한 거죠.
한마디로 뭐예요?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게 나 예수를 사랑하는 거야.
나 예수를 사랑하는 자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런 자를 아버지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내가 그에게 나를 나타내겠다.
이렇게 표현하신 거죠.
그러니까 예수를 누가 알아요?
예수를 사랑하는 자를 예수께서 사랑하시고, 사람을 사랑하는 자가 예수를 사랑하는 것이고, 예수를 사랑하는 것이 아버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그를 아버지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그렇게 아버지가 그를 사랑하는 것처럼 내가 그에게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나타내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듣자마자 가룟인이 아닌 유다가 그 말을 딱 잡은 거지요.
“나를 사랑하는 자에게 내가 나를 나타내리라.” 하니까 가룟인이 아닌 유다가,
“주여 어찌하여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아니 하시나이까?”
이렇게 딱 묻는 거죠.
우선 가룟인이 아닌 유다가 누군지를 확인해 보시자고요.
누가복음 6장 16절 보시죠.
누가복음 6장 16절을 보면,
“야고보의 아들 유다”라고 했지요.
14절부터 보면,
“곧 베드로라고도 이름을 주신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과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셀롯이라는 시몬과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예수를 파는 자 된 가룟 유다라.”
이렇게 돼 있죠.
그래서 누가복음 6장 16절을 보면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가룟 유다”가 뚜렷이 구분되죠.
누가복음 6장 16절은 그 두 명의 예수님의 제자 중에서 두 명의 유다를 구분하기 위해 아주 의도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요한복음 14장 22절의 “가룟인 아닌 유다” 이 사람은 누가복음 6장 16절에 의하면 야고보의 아들 유다입니다.
아마도 이 사람의 다른 이름이 마가복음 3장 18절에 나오는 다대오입니다.
마가복음 3장 18절을 보시죠.
마가복음 3장 18절부터 19절을 읽어 보면,
“또 안드레와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다대오와 가나나인 시몬이며 또 가룟 유다니.”
이렇게 됐죠.
여기 제자들의 이름 목록을 비교해 보면 누가복음 6장 16절에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마가복음 3장 18절에서는 다대오에 해당됩니다.
그래서 여기 요한복음 14장 22절에서 “가룟인 아닌 유다”는 누가복음에서는 야고보의 아들 유다로, 마가복음에서는 다대오로 그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 사람이 “내가 나를 사랑하는 이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서로 사랑하는 이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하니까 “왜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게는 안 나타내십니까?”라고 묻는 겁니다.
이 다대오 혹은 야고보의 아들 유다의 질문은 제자들이 가지고 있던 오랜 의문을 마지막 순간에 집약해서 나타내는 거죠.
“세상에 일을 하려면 세상에 자기를 드러내야 할 것 아닙니까? 우리 제자들만 붙들고 뭐 이런저런 이야기하셔서 일이 되겠습니까? 좀 나타내 보시죠.”
이 말인 거죠.
이 질문에 예수께서 하신 대답이 23절, 24절입니다.
23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예수의 대답이 유다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됩니까?
“왜 세상에 안 나타내십니까? 일은 그렇게 하는 게 아니거든요.” 뭐 이렇게 대답하셔야 될 것 같은데, 23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이게 무슨 대답입니까?
“세상에 나를 나타내지 않습니까?”에 대한 대답이 왜 이렇게 되는 겁니까?
24절을 보십시오.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여러분, 23절과 24절은 크게 대조가 되지요.
23절은 사랑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으로 시작하고,
24절은 어떻게 시작되나요?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똑같은 말을 23절은 긍정으로, 24절은 부정으로 말하지요.
24절을 읽어 볼까요?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리니.”
23절,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그러니까 “내가 왜 안 나타내느냐?”가 아니라,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무슨 뜻인가요?
세상에 나타내지 않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가 이미 세상에 오셨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 다 설명했잖아요.
세상에 왔으되 빛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말씀합니다.
나타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예수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함으로 나타나도 어둠은 빛을 알지 못한다는 말씀을 23절과 24절에서 관계를 중심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번 확인해 볼까요?
요한복음 1장으로 가 봅니다.
요한복음 1장 10절입니다.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절,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그다음에 12절,
“영접하는 자…”
이렇게 이야기했잖아요.
요한복음 1장 10절, 11절, 12절 내용을 그대로 요한복음 14장 23절, 24절에서 바꾸어 제시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25절부터 27절까지 예수께서는 앞에서 이야기했던 성령에 대한 이야기를 한 번 더 강조합니다.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바로 보혜사 성령을 이야기하시죠.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그리고,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마지막 끝이 뭐 뭔가요?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14장 1절에 맨 처음 첫마디가 뭐였나요?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였지요.
27절도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그러니까 14장 1절에서 시작된, 예수께서 아버지께로 가기 때문에 자리가 빈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걱정하는 제자들에게 위로하고 격려하는 말씀은 27절로 끝납니다.
28절부터 마지막 31절까지는 이제 그 맥락을 끝내고 예수께서 하시려고 하는 말씀을 하시죠.
28절.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라면 내가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라.”
왜요?
공간적 제약을 받으시는 주님에 비해 성령의 보편적이고 무소부재한 임재를 경험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인 거지요.
29절.
29절은 김명호 목사님이 예언 해석할 때마다 인용하는 구절입니다.
“이제 일이 이루기 전에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일이 일어날 때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이게 예수께서 하신 말씀에 미리 말씀하신 것의 목적이기도 하지만, 성경 예언 전체의 의미를 설명하는 것이기도 하지요.
일이 이루어지기 전에,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이 일어날 때 믿게 하려 함이라.
30절.
이제 예수께서 자리를 옮기시려 합니다.
“이후에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아니하리니 이 세상 임금이 오겠음이라.”
십자가요.
세상 임금이 12장 31절에서 이미 말씀하셨죠.
12장 31절 한번 보세요.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
그랬잖아요.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기 위해, 십자가로 쫓겨나기 위해 세상 임금이 오겠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고통이 온다는 거지요.
그리고 십자가의 고통은 12장 31절에 의하면 결국 승리를 보장한다는 거죠.
31절,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 함이라.”
예수께서는 이렇게 다락방 강화를 통해 자신이 온전히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성취했고, 그것이 곧 그런 나를 본 것이 곧 아버지를 본 것이고, 이제 내가 십자가 사역을 이루고 떠나갈 것을 전제로 “내가 있었던 것처럼, 또는 옆에 계신 분 보혜사가 오신다”라는 약속으로 14장을 마무리하십니다.
그리고 일어나셔서 그 방을 떠나시면서 15장 포도나무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아까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내 안에 있다”는 말을 한 번 더 설명하는 것이 15장이 되겠습니다.
이렇게 14장 내용을 보충하고요.
우리 또 한 분이 질문을 주셨는데요. 직접 하셔도 괜찮지 않으실까요? 제가 그냥 질문을 대신 읽고 하도록 할까요?
여러분, 이런 질문을 던져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잉태, 탄생 장면, 공생애, 십자가, 장례 절차까지 다 목격자들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 부활 장면만은 목격에 대한 기록이 없을까요? 아니 왜 없게 하셨을까요? 그거야말로 절실한 필요가 아닐까요?”
지금 주셨습니다.
제가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서, 부활 이후에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을 목격한 사람들은 많이 있잖아요. 우리가 다 알듯이요.
그런데 부활하는 바로 그 순간의 목격자가 없기 때문에, “예수께서 탁 부활하시는 그 순간, 그 장면에 대한 목격자는 왜 없을까?”라고 하는 질문으로 생각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혹시 이런 질문을 받으면 우리는 지금 아주 편안하게 한번 여러분의 생각을 나눠보시죠.
질문을 주셨으니까 한번 같이 해봅시다.
누군가가 이런 질문을 했어요.
“질 목사님, 어떻게 생각하세요?”
뭐 떠오르는 대로 다시 생각을 나눠 보시죠.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 문제는 제가 깊게 생각해 보지는 못했는데요.
예,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것은,
우리가 목격할 수 없는 순간이 아닌가? 아니면 어떤 신적인 능력이 나타나는 특별한 시간이 아니었나?
잠깐 떠오르는 것은 그런 생각이 듭니다.
네.
부활과 부활의 그 순간은…
그런데 사실 예수께서 성령으로 잉태되는 순간을 목격한 이들이 있나요?
누가복음 1장에 기록된 대로 저도 지금 그 질문을 받고 그냥 깊이 생각하지 않았어요.
같이 나누고 싶은 주제였는데, 혹시 선교수님이 질문받으시면 뭐라고 대답하실까 해서 선교수님을 통해 우리 다 깊이 생각하지 않은 내용들을 한번 같이 나눠보시죠.
그러니까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자가 왜 없는가, 이 질문 말씀이신가요?
네.
부활의 그 순간.
저도 지금 말씀하신 집사님처럼 예수님이 그전에는 육체를 쓰고 계셨는데 부활하신 다음에는 영의 몸으로 나오셨잖아요.
예.
그래서 그 영으로 오셨고, 또 하나는 결국 하나님으로서 다시 부활하신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인간의 눈으로 그 장면을 목격하면 아마도 죽지 않을까?
예.
그래서 그것은 신성으로 나타나시기 때문에 볼 수도 없고, 보면 죽기 때문에 목격자가 없게 하신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
예.
김영진 집사님은 이런 질문 받으면 뭐라고 하시겠어요?
김영진 집사님, 누군가 이렇게 질문을 했어요.
그냥 생각들을 교환해 보는 거예요.
생각 안 해 봤는데 이렇게 놀라겠어?
예.
우리 집사님 어떠세요?
아, 저도 그렇게 그냥 말씀을 말씀 그대로 믿었던 것 같아요.
이걸 이렇게 깊게 생각하고 질문을 하실 수 있다는 것도 대단하신 것 같아요.
거기까지 질문을… 어, 그러네. 생각 못했네.
네.
그렇게 생각 안 하고 그냥 환경적으로 볼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이 볼 수 있었지만, 그 순간을 볼 수 없는 상황이었고, 우리가 하나님에 관해서 다 알 수 없는 것처럼 그것은 그냥 신비, 하나님의 모든 영역에 관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예수께서 오신 것도 성령으로 오셨고, 성령으로 다시 하나님이 부활하시는 것이잖아요.
저희가 그 영역까지 인간이 그렇게 깊이 파고들고 그래도 알 수 없는 부분이 있잖아요.
그냥 그런 영역 아닌가, 그런 생각입니다.
왜요?
아, 교수님.
세 분 말씀하셨는데요.
오늘 교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그 말씀 가운데, 14장 21절하고 23절 말씀에 그 답이 써져 있지 않은가, 이렇게도 생각합니다.
요한복음 14장 21절, 23절.
21절, 23절.
예.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예.
그 말씀이 있고요.
그 23절에는,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이렇게 말씀하신 그 말씀 안에 그 뜻이 포함되어 있는 게 아닌가?
저는 아까 들으면서 그 생각을 했습니다.
어,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현현, 현재 그 나타내심, 우리에게 나타나시고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할 수 있게 되는 그 전제 조건을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함께한다”는 것은 나타나신다는 말씀도 포함되어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예.
그 부활하시는 바로 그 순간은요.
부활한 이후에 목격한 사람들은 40일 동안 계시면서 예수의 부활을 본 사람들이 많이 있어요.
예.
하지만 죽음에서 일어나시는 그 순간, 그 순간을 목격한 사람은 없거든요.
심지어 무덤을 지키던 로마의 장병들도 무덤이 열려 나오는 장면을 본 것이지, 예수께서 죽음에서 일어나는 장면을 본 것은 아니죠.
이게 중요한 부분입니다.
예수께서 죽음에서 일어나는 장면을 본 것이 아니라 무덤이 열리는 장면을 본 거거든요.
무덤이 열리니까요.
그러니까 그 순간입니다.
자, 그런데 우선 예수께서 성령으로 잉태되는 순간을 누군가 봤나요?
기록에서는 못 본 것 같습니다.
예.
예수께서 잉태되는 순간은 마태복음 1장에 보면 잉태 소식, 수태고지라고 하잖아요.
수태고지 교회도 있고 이렇게 하는데, 요셉과 마리아가 함께 있을 때 천사가 나타나서 함께 들었나요?
마리아가 혼자 있을 때였나요?
누가복음 1장으로 가보겠습니다.
누가복음 1장 26절부터 28절입니다.
26절입니다.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라.”
여러분, 여기 27절에 천사가 와서 말한 대상이 요셉과 마리아 두 사람이에요?
마리아뿐이에요.
그래서 27절을 잘 읽어야 돼요.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그와 약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라.”
이때 “과”는 가브리엘 천사가 말한 대상으로서의 “과”가 아니고요. “요셉과 약혼한 마리아”라는 뜻이죠.
그러니까 천사가 말할 때 요셉과 마리아가 함께 들은 게 아니고요. 27절에 보면 요셉과 약혼한 마리아에게 말한 것입니다.
그러면 28절을 보세요.
“그에게 들어가 이르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하시도다.”
그 마리아입니다. 단수입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이르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하시도다.”
하니 29절,
“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요셉과 마리아가 들은 게 아니고 마리아가 들었어요.
또 놀라서 생각합니다.
31절,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래서 34절에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그리고 38절에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마리아의 몸에 잉태될 때, 엄격한 의미에서 아이를 잉태하는 모친 이외에는 잉태되는 그 순간에 목격자는 없습니다.
마태복음 1장을 보시면요.
마태복음 1장 18절부터 읽어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요셉이 나중에 알게 된 거지요.
그다음에 19절,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그러니까 나중에 알게 되었다는 거지요.
그래서 예수의 잉태되는 부분은 엄격한 의미에서는 잉태 당사자인 마리아 이외에는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그 순간을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물론 탄생 장면은 우리 다 알듯이 많은 사람들이 봤잖아요.
목자들이 봤고, 동방박사들이 봤고, 나중에 성전에 올라갔을 때 시므온이 봤고 안나가 봤고,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절기를 지키러 갔던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심지어 박사들 때문에 온 예루살렘에 소동이 일어났으니까요.
그러니까 잉태 순간은 마리아 외에는 목격자가 없습니다.
마지막 부활 순간입니다.
여러분, 한번 부활 순간을 묘사하고 있는 장면을 보시면요.
마태복음 28장을 보시죠.
28장 1절, 2절입니다.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돌을 굴려냈다는 말은 그전까지 돌이 막혀 있었다는 뜻이겠죠.
물론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셨기 때문에 신령한 몸이 죽음에서부터 일어나는 그 순간을 보는 것이, 예수께서 체포당할 때 “내로라” 하는 말씀을 듣는 순간 그 신성이 나타나면서 그를 잡으러 왔던 로마의 병사들이 다 뒤로 쓰러졌던 것처럼,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는 그 순간을 목격하면 아까 말씀하신 대로 그런 현상들이 나타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아까 어떤 집사님이 말씀하시면서 신학적으로, 환경적으로 이렇게 해서 제가 좀 더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예수의 부활은 환경적으로 목격자가 있을 수 없는 상황이었지요.
그 순간은 왜 무덤이 돌무덤이었습니까?
무덤 속에 들어가 있고 바깥에 돌이 막혀 있습니다.
아무도 그 안에 들어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무덤 속에서 일어나는 것은, 만약에 예수님뿐만 아니라 누구나가 그것이 돌무덤이 됐든 토장이 됐든 간에 죽음에서 일어나는 그 순간을, 장례가 진행되지 않은 상태로 병상의 침대에 누워 있다가 눈을 번쩍 뜨는 순간이 아니라면, 누군가가 목격할 수 없는 상황이지요.
그래서 여기 28장 2절을 보면 무덤 안에 들어가서 볼 수가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돌이 옮겨지는 순간부터 목격자가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2절입니다.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내고.”
여러분, 그러므로 부활하실 때 예수께서 돌을 굴려내라고 말씀하셨지만, 출입할 때는 돌이 천사에 의해 굴려졌습니다.
이 장면을 본 거예요.
누가 봤어요?
돌이 굴려지는, 천사에 의해 돌이 굴려지는 장면을 목격한 겁니다.
그다음에 3절을 보시면 그 천사의 모습을 묘사하지요.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같이 희거늘.”
4절,
“지키던 자들이 그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이 지키던 자들이 누굽니까?
로마 군인들입니다.
그래서 로마 군인들이 예수께서 무덤 속에서 일어나는 그 장면 자체를 보지는 못했지만, 돌무덤을 지키는 돌이 굴려지는 장면을 봤고, 그다음에 제일 먼저 찾아왔던 여자들에게 그 천사가 계속 남아 있다가 말씀합니다.
그 군인들이 무서워서 떨고 있는 상황에서 여자들이 도착했지요.
그런데 그 천사는 아직도 무덤 안에 돌을 옮긴 다음에 무덤 안에 들어가서 예수의 시신이 있던 그 머리맡과 발치에 각각 앉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28장 5절에 보면,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이렇게 쓰여 있잖아요.
바로 이 장면은 이 장면을 목격한 사람들의 증언에 관한 기록입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바울에 의해 그 순간부터 시작해서 이후 40일 동안 있으면서 부활하여 일어난 예수를 만난 사람들의 목격자 리스트가 쭉 통합해서 이렇게 되어 있죠.
그러므로 그렇게 정리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신학적 의미로 엄밀하게 설명하면 부활하는 순간을 보여줘도 못 봤을 수도 있겠다라고 하는 가능성을 열어둔 채, 환경적으로 물리적으로 돌무덤 속이라고 하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그 순간 일어나는 그 장면은 아무도 볼 수 없었고, 무덤의 돌이 옮겨지는 순간부터 천사에 의해 돌무덤의 돌이 옮겨지는 순간부터 목격자들이 있었다.
이렇게 성경 본문의 기록을 통해 정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됩니다.
예.
또 다른 질문은 지금은 없으시죠?
그러면 남은 시간 동안 말씀하실 분들 말씀하실 때까지요. 가능하면 마이크를 좀 켜 주시고요.
핵심 요약 정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