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팝나무/ 안희자
코로나 19로 오랫동안 가택 연금 당하고 나오니 세상이 온통 하얗다. 올해도 약속이나 한 것처럼 공원 산책로에 이팝나무가 이밥같은 꽃을 매달았다. 순백의 꽃이 숭어리숭어리 부풀어 오른 것이 마치 사발에 소복이 담긴 하얀 쌀밥처럼 보인다.
이팝꽃은 지천인데 아버지가 안 계신 봄이 허전하다. 아버지가 좋아하던 꽃이라 그런지 이팝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봄이면 돌아가신 친정아버지가 생각난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떠나시고 나서 삼십여 년을 홀로 지냈다. 팔순이 넘은 나이에도 자식들에게 짐이 되기 싫다며 생의 마지막까지 고향집을 지키셨다. 홀로 남아 일하시며 세 끼니 챙겨 드시는 것이 안타까워 자식들이 극구 만류했지만 아버지는 매번 도리질하시곤 했다.
고향집 뒤란에 이팝나무가 있었다. 이팝나무는 이웃을 경계로 우리 집 담장을 파수꾼처럼 지키고 서 있었다. 묵묵히 한파를 이겨낸 나무는 봄이면 무성하게 꽃을 피워 올렸다. 무리무리 하얗게 꽃무더기 올라오면 온 동리가 환해졌고, 우뚝 솟아 깃발처럼 나풀대던 우람한 나무는 우리 집을 알리는 표상이 되기도 했다. 어릴 때 심어진 이팝나무는 해마다 몸피를 키우더니 어느덧 이웃까지 손을 뻗어 짙은 그늘을 만들어 놓았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였다. 이팝나무 그늘 아래서 소꿉놀이에 빠졌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하고많은 꽃 중에 벌들이 이팝꽃을 탐하느라 하나씩 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 순간, 사방에서 구름같이 몰려든 수만 마리의 벌떼들이 허공을 가르며 날아다니다 급기야 이팝꽃에 새까맣게 달라붙었다. 그 무게로 인해 나뭇가지가 꺾이고 꽃나무는 이내 벌떼 밭이 되었다. 꽃에 오골오골 달라붙어 정신없이 먹이사냥 하는 벌떼들과 앵앵대는 소리가 회오리바람 일듯 온 마당을 뒤흔들어 놓았다. 어린 나는, 처음 보는 신기한 광경에 놀라 온 몸이 얼음이 되어버렸다. 나는 황급히 공장에서 일하시는 아버지한테 맨발로 달려갔다.
아버지는 해바라기보다 더 환하게 웃으며 말씀하셨다. “얘야, 좋은 징조로구나. 저 나무가 쌀밥나무란다. 저렇게 많은 벌떼들이 몰려들었으니 이제 밥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구나.” 집집마다 끼니를 걱정하던 보릿고개 시절, 어쩌면 이팝나무는 아버지에게 부자 같은 마음을 갖게 한 것은 아닐까. 아버지가 원하던 삶은 가난을 벗어나는 일이었다. 아니, 쌀밥을 배부르게 먹는 일이었다. 설움 중, 배고픈 설움이 가장 크다고 하지 않던가. 일곱 살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아버지는 어린 시절 배를 자주 곯았다고 한다.
밥을 배불리 먹어보는 것이 소원이었다는 아버지는 가족들 굶기지 않으려고 험한 일 궂은 일 가리지 않고 일찍 돈벌이에 나섰다. 아버지에게 쌀밥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래서인지 아버지는 밥에 대한 애착이 강하셨다. 그런 연유로 아버지는 우리 집에 사람이 찾아오면 허투로 대하지 않았다. 누구라도 밥 때에 들르면 식사대접 만큼은 후하게 베푸시곤 했다. 어느 날, 온 가족이 둘러앉아 저녁을 먹으려는데 행색이 초라한 걸인이 우리 집에 들어왔다. 아버지는 낯선 노인을 따뜻하게 맞이했다. 밥이 풍족하지 않았는데 아버지는 드시지 않고 밥그릇을 노인한테 내밀었다. 그날 당신 몫의 밥 한 그릇이 가난한 이웃의 든든한 식사가 되었다.
그 뿐만이 아니다. 아버지가 평생 자부심을 가지고 하는 일이 있었다. 젊을 때부터 봉사활동을 하면서 형편이 어려운 이웃을 돕고 살았다. 당신은 아끼느라 술, 담배도 입에 대지 않으셨다. 외출할 때도 고작 천 원짜리 국수를 드시면서도 빈곤한 이웃들에 소금과 빛이 된 것이다. 지금도 아버지 산소에는 봉사단체에서 세워준 비석이 고이 곁을 지키고 있다.
아버지는 사람 간의 나눔을 밥으로 가르쳐 주셨다. 내가 타인을 위해 밥 한 끼 나눠 먹을 수 있는 여분의 마음자락을 지닌 것은 아버지의 삶을 지켜보며 배운 것이 아닐까 싶다.
몇 해 전, 이팝꽃이 흐드러지게 피던 오월이었다.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배추겉절이며 장조림, 등 밑반찬을 만들어 시골집으로 향했다. 마당으로 들어서자 음식 냄새가 진동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아버지는 무쇠 솥에 밥을 짓고 계셨다. 그리고 바닥에 앉자마자 아버지는 밥상을 들였다. 금방 지어 김이 모락모락 나는 고봉밥 한 그릇과 보글보글 끓는 뚝배기 된장찌개를 내 앞에 놓으셨다.
“식기 전에 어서 먹거라. 나는 방금 먹어서 배부르다.”하시며 자리를 뜨셨다. 나는 아버지가 차려준 밥상 앞에서 코끝이 시큰거렸다. 순간, 눈물을 삼키며 몇 숟가락 억지로 밥을 떠 넣었지만 목이 메어 더 이상 밥을 넘길 수가 없었다. 더 가슴이 미어지는 건 아버지가 베어드시고 남긴 보름달 빵 한 조각이 덩그러니 쟁반에 뒹굴고 있었던 것이다.
따끈따끈한 밥은 사랑이다. 자식을 기다리며 온 마음으로 짓는 한 끼의 보약이다. 등 굽은 팔순의 아버지가 딸을 위해 지어준 그 따뜻한 밥 한 그릇이 아직도 내 가슴속에 훈훈하게 식지 않고 남아있다. 언제였던가. 입안이 깔깔하다는 아버지를 모시고 식당에 갔다. 아버지는 허겁지겁 백숙을 드시면서“참말 담백하고 맛있구나.”란 말을 몇 번이나 되풀이 하셨는지 모른다. 그날 집으로 가시는 아버지 발걸음이 한결 경쾌했다. 자주 아버지 모시고 맛있는 음식 먹으러 나올 것을. 그 말이 이렇게 가슴에 꽂힐 줄이야.
아버지는 한 그루 이팝나무였다. 생각해보니 아버지는 자식들 먹이고 가르치느라 한평생 일만 하셨던 것 같다. 텅 빈 나무에 맨몸으로 싹을 틔우고 집안을 든든하게 지켜오셨다. 비바람도 견뎌내시고 생의 마지막까지 자식들에게 짙은 그늘을 만들어주었다. 당신 몸이 무너져 내려 등걸이 되더라도 더 주고 싶은 것이 아버지 마음이 아니었을까.
다시 이팝나무 그늘 아래에 섰다. 이팝꽃이 피고 진다. 나는 지금 아버지가 해주신 따끈한 밥을 떠올리며 이팝꽃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이제 저 꽃도 가뭇없이 사라질 것이다.
바람이 불 때마다 꽃잎이 날리며 밥알처럼 흩어진다. 하얀 꽃잎 위에 돌아가신 아버지 야왼 얼굴이 아른거린다.
“가난한 사람 얕보지 말고 베풀고 살거라.” 유언 같은 아버지의 말씀이 바람을 타고 이팝나무 꽃잎을 아프게 흔든다. 오월이 하얗게 저물어 간다.
첫댓글 이팝나무꽃과 쌀밥!
읽는 내내 가슴이 저려옵니다.
심산선생님, 부족한 글 읽어주시고 공감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격려에 힘입어 글에 더욱 매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