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 비우기
잡탕찌개라 해도 좋고 부대찌개라고 해도 좋다. 일단 꽉 찬 냉장고를 비워낸다는 게 후련하다. 벌써 보름 전에 먹다 남긴 삼겹살 조각들, 그때 같이 구웠던 소시지 도막, 그리고 혹시나 해서 모아두었던 배추김치 국물. 그냥 놔두자니 냉장고 속이 어지럽고, 내버리자니 환경의 오염원이다. 거기다 열흘째 시드는 저 양송이를 어쩔건가?
“에라, 모르겄다. 다 집어넣자!”
국 요리에 대담해진 것은 순전히 “육수 알약” 때문이었다. 멸치, 다시마를 비롯하여 열 가지가 넘는 식재료의 엑기스를 분말화하여 환으로 빚었다는데, 손톱만 해도 이게 만능이다. 어떤 국이든 맹물에 한두 알 넣으면 끝이고, 정 자신 없으면 슬쩍 하나 더 넣으면 그만이다. 콩나물국 된장국 김치찌개 미역국이 다 웬만큼은 엇비슷했으니, 급기야 “부대찌개”까지를 도전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부대찌개 하나를 끓이면서 소위 “살림”하는 재미까지 맛보게 될 줄이야. 첫째는 냉장고가 비워져서 숨통이 트일 것이니 이른바 “살리는 살림”의 맛이고, 둘째는 환경을 살린다는 명분도 쏠쏠하다. 셋째는 뭐니 뭐니해도 찌개의 맛일 텐데, 어설퍼서 이 맛도 저 맛도 아닌 바에야 잡탕이라도 짜지만 않으면 되겠거니, 하며 인덕션 불을 은근히 살린다.
이야말로 꿩 먹고 알 먹고, 도랑 치고 가재 잡는 기분인데, 기실 5년 전 중국 심양에서는 이보다 훨씬 고조되었다. 故 김광명 신부님의 유품이 도착했을 때이다. 평생 소장해 오시던 제의들이었는데, 한국에 놔두면 불태워졌을 걸 중국 신부들의 남루한 제의가 떠올랐을 때는 뭔가 후끈 달아오르는 게 있었었다. 며칠 후 세탁소에 맡겼던 것을 방안에 바자회처럼 진열해놓고, 먼저 요녕교구의 주교님과 총대리, 신학교 학장부터 초대했다. 마음대로 두세 벌 챙겨가라고 하자 “와아!”하는 탄성이 나왔다. 바로 이어서 한국 소주에다가 삼겹살을 구었을 때는 잔치가 따로 없었다. 아무튼 “제의 파티”는 삽시간에 소문이 났다. 어떤 신부는 한 벌 더 없냐고 노골적으로 다가왔다.
장담컨대, 대륙에 아직 남아있는 한류 중, 그 으뜸은 성물, 제구, 제의 등 교회 용품에 대한 열망이리라. 한류 음식도 시큰둥해졌고. 드라마도 예전 같지 않고, 음악도 한물갔다고 혹자가 말할지라도, 교회 용품만은 여전히 인기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제병기”이다. 중국은 대놓고 제병기를 제작할 수 없으니, 토요일이면 으레 각 본당에서 찹쌀인지 멥쌀인지를 찐다. 흰밥을 다식판 같은 데다가 으깨어 문대는데, 약간 구워졌다 싶으면 하나하나 빼내 주일미사의 성체로 사용한다. 참말로! 이 제병기 분야만큼은 100년이나 뒤처진 것 같다. 그러니 당연히 10여 년 전, 제대로 된 제병기를 선물 받을 때는 기절초풍할 듯 좋아했다. 당시, 충주 가르멜 수녀원에서 전자동 시스템 제병기를 구축했다고, 그때까지 쓰던 제병기 2대를 공짜로 주었다. 나로서도 뛸 듯이 기뻤다. 즉시 선박 운송으로 중국에 배송했었다. 그리고 10여 년이 흐른 지금, 제병기는 여태껏 왕성하게 돌아가고 있다. 내몽고 자치구 내 여러 교구에서 사용하는 제병을 공급한다니, 그네들의 말처럼 건물 한 채를 지어 준 것보다 더한 아이디어 원조였다. 도랑 치다 가재 잡은 정도가 아니라 금광석을 주운 폭이다.
계절이 깊어간다. 이러다간 바로 을씨년스럽거나 스산해지겠다. 이런 계절에는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라는 어느 시詩의 제목처럼 “그리움이 그리움을 향해 손짓하도록” 그냥 나를 놔두고만 싶다. 이리저리 두리번거려 더 찾을 것도, 더 채울 것도 없게. 내 안에 이미 있는 것들, 내 냉장고 안에 있는 것을 마저 쓰고, 마저 비워내고만 싶다. 비워내면 그 속에 “그리움”이라는 님도 빠끔히 모습을 드러내시려나? 마침, 이 계절의 상像이 또한 그러하다. 나무들만 봐도, 새로 가져다가 쌓기보다는 있는 것을 하나둘씩 떨구어 내고 있질 않은가.
첫댓글 일필휘지, 유감없는 필력이 선사하는 신부님 글의 힘에 차쿠홈에서 글을 옮기다말고 옴짝을 못하겠습니다.
가톨릭 신자들은 유품을 재활용할 수 있도록 방안을 찾아야겠죠.
흔히 불교, 미신자들이 유품을 귀신 붙은 물건이라 사용을 꺼리는 경향이 짙은에-.
실은 산도 강도, 땅도 조상이 사용하던 것이요.
멋진 K유품이네요.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