死의 讚美
사의찬미 노래는 정말 유명 여부를 떠나서 안 부른 가수가 거의 없을 정도로 모두 불렀습니다.
녹음된 것으로는 이 노래가 우리나라 최초이자 최장수 대중가요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유투브에 올린 노래중 거의 모든 가수의 노래를 들어 봤습니다.
그런데 그 90%는 거의 퇴폐에 가까운 감정으로 부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퇴폐]일까요?
원곡 윤심덕의 노래를 잘 들어 보시면 몸부림치는 [절규]에 가깝습니다. 우는 듯한 목소리도 들릴 것입니다.
퇴폐라니요?!!
[사의찬미]라고 하니까 선입관이 죽음을 찬양하는 것처럼 들려서 아마도 [퇴폐]적인 노래로 불려졌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찬미]라는 말은 당시에 노래라는 뜻으로 쓰였으며 이 말은 해방후 [창가]라고 했다가 [노래]로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주검의 노래]라는 뜻으로 단지 [자기(윤심덕)의 죽음을 노래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아래의 글을 읽어 보시면 많은 부분에서 수긍을 하시게 될 것입니다.
아래는 2011년 8월 29일에 쓴 글입니다.
이 글은 당시 인터넷에서 거의 모든 자료를 받아 실로 엄청난 양의 정보를 분석하여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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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8월4일 윤심덕과 김우진의 실종사건은 처음엔 정사사건으로 보도되었다가 살아 있다는 둥 피살되었다는 둥 여러가지 의문을 자아냈으며 그 후 8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역사의 진실이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 제가 그 진실을 벗겨 보겠습니다.
지금부터 제가 하는 얘기는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은 저의 가설에 불과한 것입니다
따라서 학술적 또는 문화적 논설로는 좀더 고증절차를 거쳐야 하는 것임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혹시 고증이 되지 않더라도 어차피 인생이란 재미있자고 사는 것이니 재미 있게 읽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들은 왜 죽었는가?
이 의문의 열쇠는 왜 계약에도 없던 [사의찬미]를 음반에 추가하였을까? 하는 의문에 있습니다
26곡이나 부르니 써비스로 한 곡조 더 불러주는 호의를 베푼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럼 당시의 상황을 더듬어 보기로 하겠습니다.
(1) 윤심덕의 상황
그녀는 가난했습니다. 당시 무대에서 노래를 불러도 돈을 받고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동생 미국유학비 마련에 고심하던 중 친지의 소개로 일동레코드사(일본)에서 노래를 취입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노래를 취입한 댓가로 거액(30,000원, 당시 영화1편 찍는데 1,000원이었다고 함)을 받아 모두 동생에게 주어 유학길에 오르게 하였고 그 전에 먼저 일본에 와 있던 김우진을 불러 함께 귀국선에 올랐습니다. 배에 남겨진 돈은 윤심덕의 140원, 김우진은 20원과 금시계가 전부였습니다
윤심덕은 일본에 오기전에 수소문해서 김우진이 일본에 와 있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습니다.
(2) 김우진의 상황
김우진은 부친이 장성군수로서 목포에서 대지주의 장남으로 태어나 결혼하여 처자가 있었으며 시문학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업(농토관리)에 전념해 주기를 바라는 부친의 뜻을 저버리고 시문학에 전념하여 마침내는 부자간의 인연을 버리고 어머니가 손에 쥐어 준 돈 3,000원을 받아들고 집을 뛰쳐 나온 상황이었습니다.
(3) 윤심덕과 김우진의 관계
김우진은 병으로 죽은 일본의 간호사를 특별히 사랑했었다는 기록은 있으나 윤심덕을 특별히 사랑했다는 기록은 없고 윤심덕 또한 성격이 남자처럼 괄괄해서 여러 남자들과 친했고 김우진을 특별히 사랑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나이는 모두 30세였습니다. 당시의 수명으로 거의 중년에 해당합니다.
(4) 시대적 상황
1926년은 시대적으로 일제의 강점기였습니다
3.1운동의 실패 등으로 희망을 잃어 염세주의가 팽창하였습니다.
(5) [사의찬미]의 작사자
사의찬미는 윤심덕이 작사를 했다는 설과 김우진이 써 준 것이라는 설이 있으나 분명치 않습니다
시인 김우진이 쓴 것으로는 졸필이라고 얘기하며 윤심덕이 썼을 것이라는 의견이나 통상은 김우진 작시로 나옵니다
(6) 유서
집주소와 함께 짐을 집으로 보내달라는 글이 남겨져 있었고 별다른 유서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이에 따라 생존설과 피살설 등의 의문이 발생하였습니다.
이상은 역사적인 사실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럼 이러한 단서를 근거로 먼저 의문의 열쇠를 풀어보기로 하겠습니다
왜 계약에도 없던 [사의찬미]를 음반에 추가하였을까요?
다음의 객관적 사실로 미루어 윤심덕은 일본에 가기 전부터 김우진과의 동반죽음의 수순을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1) 김우진을 수소문하여 찾았고, 일본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출발하였습니다.
(2) 일본에 가서 [사의찬미]를 무료로 한곡 더 부르겠다고 제의하여 취입하였습니다.
(3) 취입으로 받은 모든 돈은 동생에게 주어 미국 유학길로 보냈고 자기 주머니에는 140원뿐이었습니다
(4) 김우진을 만났고 함께 배를 탔습니다.
(5) 별다른 유서를 남기지 않고 행방불명 되었습니다
이러한 수순에서 판단할 때 윤심덕은 유서를 남기기 위해 한곡 더 부르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작사자인 김우진과 함께 투신하였습니다. 따라서 김우진도 윤심덕과 함께 투신할 만한 공감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 [사의찬미]가사의 내용이 유서라는 가정을 하고 살펴봅시다
사의 찬미 / 가사
광막한 황야에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데냐 쓸쓸한 세상 적막한 苦海에 너는 무엇을 찾으러 가느냐
-> 희망이 없이 황량하기만 한 쓸쓸한 이 세상에서 이 사람들아 너희는 무엇을 하려 하느냐
눈물로 된 이 세상에 나 죽으면 그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허무
-> 눈물이 마를 날이 없는 희망없는 이 세상에서 난 죽어버리면 그만이지만, [행복 찾는] 일본놈과 친일파 너희들 그렇게 해봤쟈 너희도 죽으면 별거 없는 것이다
웃는 저 꽃과 우는 저 새들이 그 운명이 모두 다 같구나 삶에 열중한 가련한 인생아 너는 칼 위에 춤추는 자로다
-> [웃는 저 꽃]같은 일본놈 너희들이나 [우는 저 새들]같은 우리 조선인 모두 언젠가 죽는 건 마찬가지다. [삶에 열중한] 불쌍한 친일파들아 너희도 [칼 위에 춤추는 자]로서 언제 일본놈 칼에 베어 죽을 지 모를 운명이다
허영에 빠져 날뛰는 인생아 너 속였음을 네가 아느냐 세상의 것은 너에게 허무니 너 죽은 후에 모두 다 없도다
-> [허영에 빠져 날뛰는] 친일파 너희들, 너희들이 일본놈들한테 속고 있다는 것을 알아라. 또한 네가 친일행위로 얻은 세상의 모든 것들도 너 죽은 후에는 모두 없어지는 것이니 날뛰지 말라
잘 살고 못 되고 찰나의 것이니 흉흉한 암초는 가까워 오도다 이래도 일생 저래도 한 세상 돈도 명예도 내 님도 다 싫다
-> (그런 짓을 해서)잘 살건 (우리처럼)못 살건 단지 순간일뿐이며, 죽음의 시간은 시시각각 다가온다. 어차피 이래도 한세상 저래도 한세상 아니더냐 돈,명예,사랑 모두 싫구나
살수록 괴롭고 갈수록 험하니 한갓 바람은 평화의 죽음 내가 세상에 이 몸을 감출 때 괴로움도 쓰림도 사라져 버린다
-> 날이 갈 수록 일본놈과 친일파 너희들 행패가 심해져 괴롭구나. 난 오직 평화롭게 죽고싶은 마음 뿐이다. 죽으면 괴로움도 쓰림도 모두 사라진다.
유서의 내용이 그럴 듯 하게 생각되십니까? 김우진이 써 준 것입니다. 윤심덕은 이렇게 쓸 수 있는 필력이 안됩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유서를 남기게 되었을까요? 그 사유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선 김우진은 목포에서 부친이 군수이고 농토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일본놈들한테 잘 보이는 친일 행위를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가문의 명예상 표현은 안했겠지만 김우진은 부모님들의 이러한 친일 행위가 싫었고 더구나 자신이 그 농토를 떠 맡아 자신이 친일 행위를 하는 것은 더더욱 싫었을 것입니다
시문학이야 마음만 먹으면 농토관리를 하면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윤심덕은 가난한 상황에 여자의 몸으로 먹고살기 위해 바둥거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돈을 가진 일본놈들과 친일파들이 어찌 쉽사리 돈을 내 주었을까? 몸을 비롯해서 온갖 것을 다 요구했을 것입니다.
윤심덕은 이렇게 돈을 들고 날뛰는 일본놈들과 친일파들을 저주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일본놈들과 친일파들을 향해 저주스러운 욕을 한바탕 노래로 날리고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욕이 히트해서 일본놈들을 살찌게 하였지만, 일본은 결국 망해서 가사처럼 허무로 돌아 갔고 그 노래는 남아 가난한 자, 병든 자,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로하였고 아픈 가슴을 어루만져 주었습니다.
사람들은 [아! 그래, 인생이란 원래 그런거야. 나만 고통받는게 아니구나!]라고 위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 시절은 막연히 개똥철학으로 인생의 허무를 논하는 그러한 행복한 시절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그들의 나이는 모두 30세로 감수성이 예민한 사춘기도 아니고 인생의 허무를 느끼는 정도의 노년기도 아니며 현실적이고 활동성이 강한 중년의 나이였습니다.
에필로그:
유서라는 관점에서 볼 때 제 논리는 막연한 [인생사]를 노래한 듯 하지만 내용을 잘 보면 [인생]은 특정한 대상의(예: 허영에 빠져 날 뛰는) [인간들]을 지칭한다고 보여지며 [나]는 얼핏 노래를 듣는 일반 사람들 자신을 지칭하는 것 같지만 노래를 부르는 가수 윤심덕 자신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특히 후렴과 마지막 구절이 유서라는 심증을 굳히게 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눈물로 된 이 세상에 나 죽으면 그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허무]
[살수록 괴롭고 갈수록 험하니 한갓 바람은 평화의 죽음 내가 세상에 이 몸을 감출 때 괴로움도 쓰림도 사라져 버린다]
금방 죽을 것을 계획하고 있는 사람이 뜬금없이(?) 막연한 세상살이를 한탄하려고 한곡 더 취입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저는 굳게 믿습니다. 우리가 선입관으로 무언가 착각을 계속 해 온 것 같습니다.
우리의 착각은 [사의찬미]라는 노래제목 때문에 더 착각을 하게 된 것 같은데 [찬미]란 그 당시에 [노래]라는 뜻으로 쓰였으며 그 후 이 말은 [창가]로 바뀌었다가 현대에는 [노래]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노래 제목의 의미는 [주검의 노래]가 됩니다. 다시 말해 죽음을 찬양하고 권장하는 노래가 아니라 그저 [죽음을 노래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생각해 보면 자신의 죽음을 노래로 표현하여 부른다는 뜻으로 [노래로 된 유서]를 뜻하는 말이 아닐까요? (2011년 8월 29일에 而化가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