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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우리를 다녀간 슬픔들
-김현 시집, 『잠시 천년이』(동학사)
-현대 사설시조포럼, 『들깨방정 참깨방정』(고요아침)
박성민 (시인)
1. 살아남는 바다거북이 되기 위하여
중앙아메리카 코스타리카의 해변에는 매년 8~11월에 수만 마리의 바다거북이 해변으로 올라온다. 태평양 전역에서 모여든 바다거북들은 뭍으로 올라와 길이 800m 남짓한 해변에 구덩이를 파서 알을 낳는데, 한 구덩이 알의 수는 100여개. 수 만 마리의 바다거북들이 낳은 알들은 수천만 개인데 알들을 낳고 어미 거북들은 그냥 바다로 다시 가버린다. 품어서 지켜주는 법이 없다. 그래서 알 속의 바다거북이 무사히 부화해 살아남을 확률은 겨우 3퍼센트. 수천만 개의 알이 부화되는 50일 동안 오소리, 독수리, 이구아나 등은 알과 새끼를 가리지 않고 집어삼킨다. 간신히 운 좋게 알에서 나와 바닷물 속으로 기어들어가는 몇 백 미터의 해변에서 새끼거북들은 또 포식자의 먹이가 되니 그야말로 운 좋게 살아남는 확률이 3퍼센트라고 한다.
우리나라에는 무수히 많은 시인 등용문이 있다. 그러나 등단시켜 시인의 자격은 부여해주지만, 알만 낳고 바다 속으로 가버리는 어미거북처럼 등단이후의 현실은 냉정하기만 하다. 신인들은 알에서 깨어나자마자 코스타리카 해변의 새끼거북처럼 처절한 생존본능으로 혼자서 바닷물이 있는 곳까지 기어가야한다. 부화되기도 전에 죽어 버린 동료들, 옆에서 죽어가는 동료들을 보며 독수리의 발톱, 오소리의 이빨에 버티면서 몸이 뒤집혀지지 않고 끈질기게 바다 속으로 기어가야 한다. 필자는 TV에서 방영된 영상을 보며 우리 시단에 불행하게도 사라진 시인들을 생각했다. 단 3퍼센트의 새끼거북이만이 거대한 바다거북이 된다.
자연법칙으로 인간의 삶을 유추하는 것이 부적절하다는 반론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생각해보면 시단이나 시조시단에서 현재 명성을 떨치고 있는 원로, 중견시인들은 이 3퍼센트이며, 신인으로서 명성을 떨칠 가능성이 있는 시인들 역시 3퍼센트를 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밤에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말을 떠올려 본다.
“너는 먼저, 쓴다는 것이 네 심령의 가장 깊은 곳에 뿌리를 박고 있는 일인지를 살펴보라. 그리고 밤과 밤의 가장 고요한 시간에 네 스스로 물어보라. 그것을 쓰지 않으면 너는 죽을 수밖에 없는가? 쓰지 않고는 못 배길, 죽어도 못 배길 그런 마음속 요구가 있다면, 그때 너는 네 생애를 이 필연성에 의해서 건설하라.”
그러나 어쩌랴. 모든 시가 명시가 될 수는 없다. 한 번의 포효로 상대를 제압하는 사자도 사냥에 성공할 확률은 10퍼센트에 불과하다. 좌절해 보지 않은 승자는 없고 땀 흘리지 않는 성공은 없다. 사자의 사냥처럼 치밀하게 준비한, 그리고 패기에 넘치는 작품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성공적인 작품이 된다는 보장이 없다. 끊임없이 준비하고 쓰고 실패를 경험해야 할 것이다. 좋은 시는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린다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그래서 다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열 줄의 좋은 시를 기다리고 일생을 보낸다면 한 줄의 좋은 시도 못 쓰리라. 다만 하나의 큰 꽃송이를 바라고 일생을 바친다면 아무런 꽃도 얻지 못하리라. 최후의 한 송이, 그 크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그보다 작을지라도, 덜 고울지라도 무수하게 많은 꽃을 피우며 일생을 지나야 한다.”
남작(濫作)이 문제가 있음과 마찬가지로 과작(寡作)도 문제가 있다. 과작은 수작임이 판명되었을 때라야 가치 있는 것이다. 수 천 개의 도자기를 빚어본 도공의 손길만이 단 몇 개의 걸작을 손에 쥘 수 있으리라.
2. 존재론적인 시간의 흉터 - 김현,『잠시 천년이』
김현이란 이름에 대다수의 문학인들은 누구를 먼저 떠올릴까? 바로 필명이 김현, 본명이 김광남인 평론가, 황지우 시인이 “1세기에 하나 있을까 말까 한 비평가”라고 극찬했던 김현이다. 그는 목포가 낳은 3대 천재 (목포의 많은 사람들이 그렇지만, 고향은 목포가 아니다)로 바슐라르, 샤르트르, 푸코, 프로이드를 기반으로 한 신비평을 펼치며 작품에 생기를 부여하고 의미를 증폭시키며 작품의 속살을 드러낸 비평가였다.
여기에 본명이 김현인 시인이 있다. 그가 시제로 자주 써온 ‘돌’처럼 37년의 오랜 침묵 뒤에 단단한 시집 한 권을 선보였다. 시력(詩歷)은 시력(視力)이다. 번뜩이는 표현을 천부적인 문학성이라고 한다면, 37년의 시력(詩歷)에서 발산되는 시적 무게는 천부적인 것만으로는 이루어지기 힘든 내적 고뇌의 산물이다. 앞에서 과작의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했듯이 필자는 과작을 결코 두둔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하지만, 그의 이번 시집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에게서는 수천 개의 도자기를 빚어서 스스로 깨뜨려 버린 장인과 같은 경륜이 보인다. 태작(怠作)을 스스로 용납하지 않는 엄격함이 있다.
사과 한 개 속에
그 시간이 남아 있다
칼날에 묻어나는
감미로운
과즙의 한때
우리가
얼마나 베어졌는지
그 순간이 머물러 있다
-「사과」전문
존재론적인 시간이 여기에 있다. 김현 시인의 시에는 지층구조가 있으며 지층누증(地層累增)의 법칙에 따라 그 시간의 지층은 아래에서 위로 쌓이고 있다. 그의 단수 속에는 많은 말들의 지층이 쌓여 있으며 숱한 말들이 스스로의 절제에 의해서 풍화된 모습을 볼 수 있다. 영감과 직감에 의해 이 한 수를 쓸 수도 있겠지만, 많은 시행들을 썼다가 스스로 지운 흔적이 보인다. 좋은 시에 대한 욕망과 버리기 아까운 시행들이 그를 괴롭혔으리라.
일반적으로 사과는 욕망에 탐닉하는 심리적 세계를 상징한다. 여기 놓여 있는 사과 한 알은 관념적 대상으로서의 사과다. 그 사과 속에는 칼날의 자국이 있다. 그리고 그 칼날에 베어진 후에야 비로소 묻어나는 “감미로운 과즙의 한때”가 있다. 사랑이 만남의 기쁨과 함께 이별의 아픔을 동반하듯이 “향기로운 과즙의 한 때”는 베어져야만 하는 상처를 필연적으로 동반한다. 칼날에 베어지지 않고는 향기로운 과즙이 묻어날 수 없다. 그래서 “우리가 얼마나 베어졌는지”에서처럼 사과 한 알 속에는 현대인의 욕망에 대한 추구와 함께 좌절로 인한 상처가 사과 씨로 박혀 있다. 이렇게 볼 때 이 시는 인간 존재의 본질에 대한 인식론적 깨달음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읽혀진다.
우리가
어느 생에서
만나고
헤어졌기에
너는
오지도 않고
이미 다녀갔나
등나무
의자에 앉아
잠시, 천년이
지난다
-「잠시 천년이」전문
단수 한 편이 많은 생각을 불러온다. “우리가/ 어느 생에서/ 만나고/ 헤어졌기에”와 같이 시인에게 사랑은 수취인 불명의 우편물이다. 그래서 그 우편물은 반송되어 오기도 하는데, 이때의 단절감은 화자의 마음을 쓸쓸한 공터로 만든다. 만나고 헤어짐은 유한성을 지닌 인간에게 필연적인 것이다. 역설적인 말 같지만, 만나기도 전에 헤어진 사람들도 있다. 바로 한 번도 만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우리의 인연이란 바로 곁을 지나가면서도 영영 만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더 많고, 우리가 만나서 인식하고 기억하는 사람은 숱한 사람들 중에 일부가 아니던가.
“등나무/ 의자에 앉아/ 잠시, 천년이/ 지난다”에서 볼 수 있듯이 김현 시인에게 있어서는 “잠시”와 “천년”이 동일한 시간 속으로 귀속된다. 예이츠가 “만약 시간이 없어진다면/ 모두 알 수 있거나 볼 수 있으련만”이라고 노래했듯이 시간은 우리의 인식을 방해한다. “천년”이라는 시간이 현상을 의미한다면 “잠시”와 같은 무시간은 본질에 해당하는 말일 터이다. 거대한 우주의 시간에서 보자면 천년은 순간과 같은 것이며, 인연론적 관점에서 보자면 현생에서 만나지 못하는 너는 전생에 나를 이미 다녀갔을 수도 있다. 이런 인식에 가 닿기까지 그는 마음속에 많은 만남과 헤어짐을 만들어왔으리라. 하여 시인은 등나무 의자에 앉아 사랑의 집착과 회한을 내려놓는다. 만나고 헤어짐을 결코 아프게 말하지 않는 데서 독자는 더 공감하게 된다.
손가락 사이에서
생각이 타고 있다
허공에
피어오르는 연기와
땅에
떨어지는 재
어디로
나는 가고 있을까
잠시 적멸을
지난다
-「한 개비 생각」전문
담배는 시각(담배연기), 청각(담배 타는 소리, 라이터 소리, 기침소리), 후각(담배냄새), 촉각(담뱃불의 뜨거움), 미각(담배의 씁쓸한 맛)이라는 다양한 감각을 동시에 수반한다. 감각은 지각되며 지각은 인식의 기본 전제가 된다. 담배연기의 모임과 흩어짐을 보면 “손가락 사이에서/ 생각이 타고 있다”는 상념을 읽을 수 있고, 빠른 시간에 뜨겁게 타다 사라지는 것에서 현대의 허무의식을 읽을 수도 있다. “허공에/ 피어오르는 연기”처럼 담배연기는 상승하지만 사라지며, “땅에/ 떨어지는 재”처럼 남은 재는 땅으로 하강한다. 결국 시인은 이 시로 존재의 본질과 정신을 이야기하고 있다. 필터만 남기고 타버리는 담배, 그리고 담배의 몸에서 툭 떨어지는 재를 연상하면 자아의 분리나 상실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인간은, 그의 몸 안에서 담배 연기를 불러들이는 어떤 ‘빈 구석’이 있기에 담배를 피운다. 마음이 허한 자가 담배를 피운다. 그러나 담배를 피움으로써 자기 위안이나 구원에 이를 수 있을까? 담배는 마침표가 아니다. 잠시 자신의 삶에 쉼표를 찍는 것뿐이다. 그래서 종장에 이르러 시인은 “잠시 적멸을/ 지난다”라고 쓴다. ‘적멸에 가 닿는다’라고 쓰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결론적으로 시인에게 흡연은 과거의 절망들을 돌이키는 행위이며 담배연기만큼이나 인생이 쓰다는 것을 습관적으로 확인하는 행위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가늘고 긴 담배는 슬프다.
칠기의
맑고 투명한
빛이 나기까지
옻나무는
얼마나 많은
진액을 흘렸을까
세상의
아름다움이란
상처가
빛을 내는 것이다
-「상처가 아름다움을 만든다」전문
단 한 수의 시조로 삶의 상처와 연륜에 대해 이렇게 표현해 냈다는 점에서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이 느껴진다. 초, 중장에서의 자연사는 종장에 이르러 “세상의/ 아름다움이란/ 상처가/ 빛을 내는 것이다”라는 아포리즘으로 귀결된다.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사물의 현상에 예민한 촉수를 들이대는 감각이 부럽다. 다만 지극히 사적인 견해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기법상의 문제인데, 독자가 이 시를 읽을 때 먼저 제목을 읽은 다음에 내용을 읽게 되므로 시의 제목에서 독자에 대한 배려가 있었으면 하는 점이다. 독서현상학적 측면에서 보자면 이 시의 제목은 너무나 친절하다.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 종장 “세상의/ 아름다움이란/ 상처가/ 빛을 내는 것이다”인데 삶의 고통 뒤에 오는 아름다움을 성찰한, 매우 빛나는 표현이지만, 결말을 이미 알고 읽는 추리소설처럼 재미가 반감되는 제목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시인이 쓰고 그 의미를 독자가 자유롭게 완성할 수도 있다. 독자에 따라 다르게 분석된다면 그 시는 몇 번씩 더 읽혀지고, 그럼으로써 오히려 재미와 깊이가 있는 시라고 볼 수도 있다.
돌을 줍는다는 것이
달을 주워 버렸다
아차,
실수였다
버리지 못한 돌
삼십 년
달빛을 따라서
돌밭을 걷고 있다
-「달 -돌 1」전문
초장은 하이쿠의 한 편만큼이나 그 구절 하나만으로도 생명력이 있다고 생각된다. “돌을 줍는다는 것이/ 달을 주워 버렸다”라는 표현은 하늘에서 떨어진 돌임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인데, 강가의 돌밭을 걷고 있는 화자가 강물에 비친 달을 보고 착안했을 수도 있다. 아니면 수석 애호가로서 돌밭을 걷다가 문득 돌을 집어보고 이것은 신이 만들어서 지상에 놓아둔 달이라고 직감적으로 떠올랐을 수도 있다. 어쨌거나 시인이 부여한 달과 돌의 환기성, 그 날렵한 감각이 절묘하다. 돌은 존재나 응집을, 하늘에서 떨어진 돌은 생명의 기원을 상징한다. 이런 면에서 달과 돌의 생명력은 자연스럽게 오버랩이 된다. 화자는 달빛을 따라서 돌밭을 걷는다. 걸을 때마다 달은 화자를 따라온다. 그러므로 그가 “버리지 못한” 것은 돌만이 아니다.
김현 시인의『잠시 천년이』에는 깊은 삶의 연륜을 통해서 빚어낼 수 있는 자아성찰이 섬광처럼 빛난다. 또 자아성찰을 감싸고 있는 감각적이고 예리한 이미지들을 읽으면 그가 오랜 시간 적공(積功)의 시간들을 보내왔음이 느껴진다.
3. 현대 사설시조 포럼,『들깨방정 참깨방정』
1) 방언과 고유어의 말 부림 - 윤금초
얕은 바람에도 연잎은 코끼리 귀 펄럭이제.
연화차 자셔 보셨소? 요걸 보믄 참 기가 맥혀. 너른 접시에 연꽃이 쫙 펴있제. 마실 땐 씨방에 뜨거운 물 자꾸 끼얹는 거여. 초파일 절에 가서 불상에 물 끼얹대끼. 하나 시켜놓고 열 명도 마시고 그래, 그 향이 엄청나니께. 본디 홍련허구는 거시기가 달라도 워느니 달러. 백련 잎은 묵어도 홍련 잎은 못 묵거든. 연근은 둘 다 묵지마는 맛이 영판 틀려. 떫고 단면이 눌눌한 것이 홍련이제. 백련 뿌리는 사각사각하고 단면도 하얘.
백련은 진창에 발 묻고설랑 학의 날갤 펼치제.
-「백련꽃 사설」전문
경상도 사투리로 현장성과 생생함을 살려낸 시편들처럼 이 시에서는 전라도 사투리가 감칠맛 나게 살아나고 있다. “맥혀”, “끼얹대끼”, “거시기”, “워느니”, “묻고설랑” 등 판소리 사설처럼 감칠맛과 구수한 맛, 익살스러움이 연화차 향으로 입가에 번진다. “초파일 절에 가서 불상에 물 끼얹대끼”라는 비유가 재미있다. 아홉 마리의 용이 물을 토해서 갓 태어난 아기부처를 목욕시켰다는 이야기를 본 따서 초파일이면 관정식(灌頂式)이라 하여 아기불상의 정수리에 물을 끼얹는다.
“백련은 진창에 발 묻고설랑”에서처럼 백련은 진흙탕에서 자라지만 진흙에 물들지 않고 고고하게 자라서 꽃 피며, 백련꽃잎 위에는 한 방울의 오물도 머무르지 않는다. “얕은 바람에도 연잎은 코끼리 귀 펄럭”이고, 물이 백련꽃잎에 닿으면 그대로 굴러 떨어질 뿐이다. 그래서 백련꽃이 피면 둥글고 원만한 향기가 연못에 가득하다. 화자가 소망하는 삶의 모습은 이것이 아닐까 한다. 고고하면서도 원만하며 그 향기가 멀리 퍼지는 삶. “하나 시켜 놓고 열 명도 마시”는 부드럽고 따스한 인정, 나눔의 삶이 이 시에 배어있다.
고주망태 한 주정뱅이 들깨방정 참깨방정 떨다말고
흰 죽사발 눈 지릅뜨고 물퉁보리처럼 업혀가다, 시르죽은 물렁팥죽 친구 부축 받고 비트적거리는 또 다른 술꾼 보고 찍자를 부렸겠다. 가여운 주정뱅이 같으니, 자네도 두 잔만 더 마시면 나처럼 한껏 자유를 누릴텐데...
한 물 간 시러베짓을 냉큼 버리지 못하다니!
-「두 주정뱅이」전문
이 시에는 두 명의 주정뱅이가 등장한다. 두 잔을 덜 마신 반 주정뱅이와 두 잔을 더 마신 완벽한 주정뱅이다. ‘만취(滿醉)’라는 밋밋한 한자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재밌는 고유어가 ‘고주망태’다. 술을 거르거나 짜내는 고주에 놓인 망태기는 항상 술에 절어 있을 수밖에 없으니 이는 음주가 지속적이고 반복적임을 넌지시 드러내는 말이기도 하다. “들깨방정 참깨방정” 역시 울림소리가 주는 경쾌한 리듬감으로 읽는 재미와 함께 술자리를 상상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경망스럽게 온갖 수다를 다 떨던 주정뱅이가 “흰 죽사발 눈 지릅뜨고 물퉁보리처럼 업혀가다”라는 표현 역시 생생하다. ‘지릅뜨다’란, 고개를 숙이고 눈을 치올려서 뜨는 것이니 ‘치뜨다’나 ‘치켜뜨다’라는 말과는 의미가 좀 다른 말로 주정뱅이의 상황을 상상하는 재미가 있다. “물퉁보리”는 마르지 않아 물기가 많은 보리를 말하는 것이니 익살스러운 비유다.
뭔가 트집 잡을 다른 술꾼을 찾았으나 이 주정뱅이가 오늘 임자를 잘못 만났다. 술꾼 중에서 고수를 만난 것이다. 일찍이 조지훈 시인은 술 마시는 것에도 엄연히 급이 있다 하여 바둑처럼 9급 ~ 9단까지 나누어 놓았는데 술을 아끼고 인정을 아끼는 사람이 되어야 6단인 석주(惜酒)가 된다고 했다. 술은 인정인데 기껏 초단 축에도 끼지 못하는 고주망태로 어디서 찍자를 부리는 건가. “자네도 두 잔만 더 마시면 나처럼 한껏 자유를 누릴텐데”를 읽으면, 술통 철학자 디오게네스와 알렉산더 대왕의 만남이 문득 떠오른다. 자유분방한 정신이다. 술을 마시지만 결코 술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함이 이 시에 있다.
2) 슬픔의 진화 - 박기섭
1.
긴팔로 땅을 짚고 기다가 가끔 허리를 들고 엉거주춤 선 채 먼 산을 보고 주저 없이 벼랑을 뛰어내리는 폭포 앞에서 직립의 뼈를 씻었다
돌을 깨고 돌을 갈며 나무를 깎고 나무를 다듬으며 빙하와 만년설을 넘고 화염의 골짜기를 지나 거친 평화의 풀밭으로 나아갔다
마침내 천천히 일어나 걷기 시작했다, 인간
2.
인간은 기린의 목을 갖지 않았다
긴 목을 빼고 보기보다는 때로 엎드려 숨을 쉴 줄도 알아야 했기 때문이다
긴 목을 숨길 데라곤 허공밖에 더 있느냐
인간은 사자의 이빨을 갖지 않았다
굶주린 이빨로 생육을 찢는 대신 잡식의 식욕에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이빨은 언젠가 빠진다 무엇을 더 찢으랴
인간은 순록의 뿔을 갖지 않았다
뿔과 뿔을 겯고트는 각축 대신 간교한 사통의 체위를 익혔기 때문이다
체위가 풀리는 곳에 뿔의 위엄은 없다
3.
지느러미와 물갈퀴와 부레를 버리면서 야만의 털을 뽑고 날갯죽지와 꼬리뼈를 감추면서 곧추세운 등뼈가 떠받친 뇌 속에 연신 차고 넘치는 늪을 키웠다
동쪽의 검은 폭풍 속에서 대삼림의 아득한 비명을 듣고 깎아지른 협곡의 북쪽에 검푸른 당나귀 떼의 뼈를 묻고 남쪽의 황폐한 사냥터에서 피 묻은 돌칼의 온기를 닦았다
끝내는 불멸의 서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인간
-「인간」전문
이 시조는 역사 전체를 하나의 통일성 있고 일관된 논리로 설명하는 ‘커다란 이야기’라는 측면에서 거대서사(巨大敍事, grand narrative)다. 1970년대 이후 세계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단계에 들어서서 거대서사가 붕괴되고 미시서사인 개인과 사소한 것들의 세상이 되었다고 단언한 리오타르(J.F. Lyotard)도 있지만, 지금도 거대서사는 다른 얼굴을 한 채 엄연히 남아 있다. 호방한 스케일의 이 시에서 인간은 직립보행, 도구사용, 진화의 기나긴 과정을 거친다.
“대삼림의 아득한 비명”에서처럼 인간의 역사는 자연을 정복하여 이룬 역사이며 “검푸른 당나귀 떼의 뼈”처럼 인간 아닌 동물들을 살육하여 이룬 역사이고, “피 묻은 돌칼의 온기”에서처럼 동족을 살해해서 정복한 역사다. “긴 목”은 정신적 삶을 상징하는 것으로 읽혀진다. 원시인들이 죽인 짐승의 이빨과 발톱으로 자신을 치장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이빨”은 원초적 무기로서의 활동성, “뿔”은 신성성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엎드려 숨을” 쉬고 “잡식의 식욕”에 길들여졌으며 “간교한 사통의 체위”까지 익힌 인간에게 더 이상 신성성은 남아 있지 않다. “야만의 털을 뽑고” 난 후의 인간은 “뇌 속에 연신 차고 넘치는 늪”을 키운다. 그것은 바로 인간이 빠져나올 수 없는 물질문명이다.
“끝내는 불멸의 서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인간”은 무엇일까. 동쪽을 지향하는 것은 우리의 정신이 지니고 있는 빛의 초점을 지향하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서쪽으로 걸어 들어갔다.”고 말한다. 서쪽을 향한다는 것은 죽음을 예감한다는 의미로 읽혀진다. 왜냐하면 서쪽은 태양이 하루의 여행을 마감하고 저무는 곳이기 때문이다. 인간 스스로가 “불멸”이라고 생각하는 죽음의 서쪽으로 “끝내는” 걸어들어 갔다는 것이다. 인간의 물질문명이 지속적으로 발전되고 환경파괴가 진행된다면 맞이할 미래는 인류의 파국이다. 시인이 “끝내는”이라는 부사어를 사용했음에 주목해야 한다. 이렇게 볼 때 이 시는 인간이 야기한 비극들, 그 정복의 역사에 대한 고발과 인류의 미래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라고 볼 수 있다.
치어들이 꿈틀거리는 물봉지를 든 한 무리 방생꾼들이 강변 쪽으로 가고 있었다 →A1
길 옆 매운탕집 수족관을 박차고 나온 잉어 한 마리 길바닥에 나동그라진다 느닷없다 →B1
대낮의 흙먼지 속에 벌름거리는, 검붉은... 그것 →C1 (B2)
때마침 점심 공양을 마친 관세음보살이 방생꾼 차림으로 그곳을 지나가고 있었다 →A2
놀란 사내의 뜰채가 와 도로 수족관에 집어넣으려는 순간 잉어는 또 한번 홱 몸을 날려 길바닥에 드러눕는다 →B3
대낮의 물봉지 속에 꿈틀거리는... 검붉은, 그것 →C2 (A3)
-「대낮-잉어 이야기」전문
(화살표 이하는 필자의 덧붙임)
이 시의 교차형 구조는 상당히 치밀하다. 두 가지의 상반된 풍경이 반복, 변형되면서 시적 의미와 긴장감을 증폭시키고 있다. 바로 방생(A1→A2→A3)과 구속(B1→B2→B3)이라는 상호 모순되는 이야기가 하나의 풍경화에 그려져 있다. 마치 노예해방과 노예구속의 상반된 시각이 미국이라는 하나의 국가에서 남북전쟁을 야기했던 것처럼. A부분에서 독자는 평화로움과 안정감을, B부분에서는 불안과 긴장감을 느끼게 되며, C부분에 이르러 불안과 긴장감이 절정에 달하게 된다. 이 상호 모순되는 두 개의 화면은 시인의 의도적인 배치이다. 하여 시인은 상반된 풍경을 C1과 C2에서 “대낮의 (흙먼지/ 물봉지) 속에 (벌름거리는/ 꿈틀거리는)... 검붉은, 그것”이라고 표현함으로써 방생이나 구속이나 별반 다를 바 없다는 현대인의 이중성을 고발하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방생될 잉어는 ‘잠시’ 물봉지 속에 갇혀 꿈틀거리고 있으며 잠시 수족관을 탈출한 잉어는 자유의 공간인, 그러나 물고기에겐 본래의 공간이 아닌 흙먼지 속에서 ‘잠시' 벌름거리고 있다. 지구 한 쪽에서는 모피 반대운동이 벌어지는가 하면, 야생동물을 사서 그 동물을 뛰어다니게 한 다음 총으로 쏴서 죽이는 게임도 존재한다. 방생한 잉어를 다시 잡아들여 매운탕집 수족관에 넣는 것이 바로 인간 아닌가. 이 처절한 삶이 꿈틀거리고 벌름거리는 생생함은 바로 대낮에 벌어지는 풍경이다. 대낮에 벌어지는 기만과 폭력은 잉어 이야기만으로 그치지 않는다. 폭력과 광기의 장면들은 바로 세계 곳곳에서 멀쩡한 대낮에 벌어지기 때문이다.
3) 실존적인 고독의 나무 -이정환
알로카시아는 눈물을 흘린다네, 깊이 잠든 밤 사이 몰래 눈물을 흘린다네
얼굴을 가리고도 남을 잎사귀, 그 잎사귀 가장자리마다 흘리는 눈물은 수정방울이네 꼭두새벽마다 그렁그렁 눈물방울 가득 달고 있다네 왜 밤 사이 울어야 했는지 울지 않으면 아니 되었는지를 말하지 않는다네 온몸을 비틀고 비튼 울음 끝에 알로카시아는 스무날쯤이면 우산으로도 바칠 만한 또 하나의 커다란 잎을 피워 올린다네
울음이 곧 잎사귀여서 먹먹할 뿐인 날에
-「울음 잎사귀」전문
그 뿌리가 깊겠지만, 이정환 시인의 근래 관심은 나무에 있는 것 같다. 알로카시아 나무는 물을 준 다음날 아침이면 잎에 이슬이 맺히는데, 이는 밤과 낮의 기온차가 클 경우 나타나는 현상이라 한다. 나무의 팔 벌린 모습, 발을 땅에 두고 하늘을 바라보는 모습은 인간을 닮았고 잎사귀 역시 인간 존재를 상징한다. “얼굴을 가리고도 남을 잎사귀”이니 온밤을 잠 못 들며 흘린 눈물은 “그 잎사귀 가장자리마다” 맺혔을 것이고 뿌리 깊은 고독의 밤에 나오는 눈물은 자신의 내면에서 나오는 가장 순수한 것, 즉 “수정방울”일 것이다. 밤은 남아 있는 알로카시아 나무에게 고독을 뼛속 깊이 느끼게 하는 시간이다. 타인과 함께 있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고독들이 “깊이 잠든 밤 사이”에 뼈저리게 느껴진다. 그러므로 이 시에서 눈물은 곧 시인 자신의 눈물이며 울음의 발원지는 자신의 내면이다. 결국 인간이란 존재는 필연적으로 그 슬픔의 무게를 아무도 대신해 줄 수 없는 것임을 깨닫게 되는 고독한 존재, ‘신 앞에 선 단독자’다.
“정열은 강이나 바다와 비슷하다. 아픈 것은 소리를 내지만 더 깊은 것들은 침묵을 지킨다.”는 까뮈의 말처럼 알로카시아 나무는 “왜 밤 사이 울어야 했는지 울지 않으면 아니 되었는지”에 대해서 결코 말하지 않는다. 오로지 “온몸을 비틀고 비튼 울음”, 처절한 고독이 시인을 키워왔던, 그리고 키우고 있는 자양분임을 “스무날쯤이면 우산으로도 바칠 만한 또 하나의 커다란 잎을 피워 올린다네”에서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울음이 곧 잎사귀여서”처럼 자신의 고독을 긍정함으로써 더 큰 고독에 이르는 길을 찾으려는 정화(淨化)의 시, 실존의 시라고 볼 수 있다.
1.
너의 그늘은 기름지고 치렁치렁하여 잎사귀에 볼 비비면 눈물 머금게 된다
이제는
죽어도 좋을
남도 여름날 하오
2.
후박나무여 후박나무여 완도 수목원 앞뜰을 지키고 선 후박나무여
찰진 잎사귀들을 온 사방으로 펼쳐놓고 눈길을 붙잡은 채로 놓아줄 줄 몰라 정녕 몰라 내 어두운 밤의 한 모롱이에 오래도록 붙들어 두고 싶은 후박나무여
더불어
죽음을 맞을
완도 후박나무여
-「후박나무에게」전문
어떤 사람과 대화를 할 때 큰 목소리로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주 조용한 목소리로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필자의 경우는 오히려 조용하게 말하는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경우가 많다. 조용하게 하는 말은 주의 깊게 듣지 않으면 놓치기 쉽기 때문이다. 이 시는 “완도 수목원 앞뜰을 지키고” 서 있을 뿐 말이 없는 후박나무처럼 독자에게 큰 소리로 말하지 않는다. 또 어떤 메시지를 강요하거나 자신의 정서를 인위적으로 주입시키려고 하지도 않는다. 다만 시를 읽으면 화자의 독백에 자연스럽게 공감하게 된다.
시인이 여행을 떠났는지 모르겠다. 정처 없이 떠도는 자신을 어찌 하지 못할 때 불현듯 완도 수목원 앞뜰을 지키고 선 후박나무와 마주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기름지고 치렁치렁”한 그늘을 보면서 자신이 견뎌온 쓸쓸한 삶에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찰진 잎사귀들을 온 사방으로 펼쳐놓”은, 거대한 후박나무의 죽음을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후박나무- 잎사귀- 그늘- 눈물- 죽음의 복합적 울림 속에서 독자는 자연이나 세계, 사회, 현실 등 시적 표현 대상을 언어로 전이하는 능력이 시적 상상력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인간은 누구나 존재의 유한성에 대해 자각하고 있다. 유한한 존재인 인간에게 있어서 산다는 것은 죽음, 그리고 소멸을 향해 한발 한발 다가가고 있는 것이다. 조금 길고 짧음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그것은 “더불어 죽음을 맞을” 후박나무도 마찬가지다.
4) 슬픔의 뫼비우스 띠 - 이지엽
아름다운 것에 더 애진 슬픔이 있다는 말,
이제는 알 수 있네
그 때도 유채꽃 환한 날이었을라나. 평지나 다음 없는 화강암 거친 돌밭에 숨어든 사람들이 나오지 않는다고 좁은 굴 입구와 출구 쪽에서 맞불을 놓았다는데, 무자년 4.3 소개령이 쩌렁쩌렁 다랑쉬 마을을 쓸어내리던 날, 해방이라고 이제는 배 곪지 않는 살 만한 세상 왔다고 웃음꽃 만발한 아낙들이, 가나다라 이제 한글 배운다고 강아지처럼 뛰놀던 아이들이 영문도 모르고 숨어든 비좁고 컴컴한 굴 속, 솥단지와 쌀알과 공책 그러안고 여보 누나 엄마 하나님을 부르고 그대로 생매장된 풀 한 포기 돋지 못한 돌무덤이여
샛노란 유채꽃 지는 남도
말문 닫고 귀 닫고 싶은 봄날
-「유채꽃밭, 돌무덤」전문
남도의 봄날에는 어떤 진실이 있었나. 사실은 진실에 부합되지 않을 수도 있다. 사실(事實)은 실제 존재하는 것, 확정된 평가로 유효한 것을 가리키지만, 진실(眞實)은 사실이라고 평가된 것에서 왜곡, 은폐, 착오를 모두 배제했을 때에 밝혀지는 것이다. 진실은 오직 하나뿐이지만, 정치가들과 군부독재가 ‘이것이 바로 사실’이라고 남도의 봄날을 왜곡, 은폐해왔다. 시인의 사명은 무엇인가. 사실에 부화뇌동하지 않고 진실을 말해야 하는 것이다.
1948년 봄의 제주도에서는 좌우의 무력충돌을 빌미로 하여 정부군이 제주도민들을 좌익으로 몰아 3만여 명을 학살했다. 희생자 가족들이 '빨갱이' 취급을 받다가 2003년 진상조사위원회에 의해 무고한 희생이었음이 밝혀졌는데, 다랑쉬 마을도 이렇게 아픈 과거가 있다.
유채꽃밭에서 돌무덤을 읽음으로써 “아름다운 것에 더 애진 슬픔이 있다는” 것을 화자는 느낀다. 다랑쉬 마을의 아낙과 아이들은 비좁고 컴컴한 굴에서 맞불을 놓은 정부군에 의해 “영문도 모르고” 죽어갔다. “솥단지와 쌀알과 공책”, “여보 누나 엄마 하나님을 부르”던 순박한 그들이 좌익이라는 혐의로 죽어간 것이다. 이 “애진 슬픔” 앞에서 화자는 “말문 닫고 귀 닫”을 수밖에 없다. 남도의 봄에는 1948년 제주의 4.3항쟁과 1980년 광주의 민주화 항쟁이 있었다. 시인이 종장에서 샛노란 유채꽃 지는 ‘제주’라고 쓰지 않고 ‘남도’라고 쓴 것은 4.3항쟁에서 광주의 5.18을 읽는, 즉 두 사건의 연결고리를 인식했기 때문이리라.
슬픔이라는 말에는 왜 앞과 뒤가 없는 것일까
공이 굴러간다 도르르 말리는 바람을 따라 구르는 공 구르다가 넘어지고 넘어지다 일어서서 앞서거니 통통 뛰다가 뒤돌아보다가 흘끔거리다가 한 대 줘맞는 시늉을 하다가 눈을 희번덕거리다가 굴러간다 한 개 두 개 백 개 천개 만 개의 공이 만개(滿開)하고 있다 가지마다 둥글게 매달리는 공 너를 사랑한다 사랑한다 공이 딱따구르 다구르르 굴러간다 잡을 수 없는 향기 같은 공 이제 잊어야 해 제발 발이 저린 듯 멈칫하다가 다시 구른다 구르는 것이 오직 처음의 약속인 듯 물을 마시는 공 목이 마르다 후회는 늘 막차를 타고 온다 공이 먼지 속으로 들어가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도 않는 공이 구르는 소리 와르르 만 개의 꽃이 지고 있다
가슴에 천 개의 구멍을 내고 네 눈물을 받는 저녁
-「공」전문
황홀하고도 아름다운 상상력의 변주다. 이 시는 초장부터 독자의 시선을 끌어들인다. 공의 외면적 속성을 통해 인간의 비극적인 삶을 인식하고 있다. 공에 인간존재의 생명력을 부여한 중장의 상상력("눈을 희번덕거리고 힐끔거리는")은 어떤가. “한 개 두 개 백 개 천개 만 개의 공이 만개(滿開)”하여 공은 “가지마다 둥글게 매달리는” 꽃이 되고 “잡을 수 없는 향기”가 되고 목이 말라 물을 마시고 “먼지 속에 들어가 보이지 않는” 공이 된다. “보이지도 않는 공이 구르는 소리”를 듣는 시인의 촉수라니. “만 개의 공이 만개(滿開)하고 있다”라든가 “이제 잊어야 해 제발 발이 저린 듯 멈칫하다가 다시 구른다”에서 보여주는 경쾌한 언어유희는 공이 자연스럽게 구름과 마찬가지로 어떤 억지나 작위적인 것이 느껴지지 않는다. 마술사가 한 손을 펴면 장미꽃이 피어나고 또 한 손을 펴면 비둘기가 날아가듯 시인의 상상력은 현란하기만 하다.
그런데 이 경쾌한 율동감이 전혀 가벼움으로 여겨지지 않는 이유는 초장과 종장의 견고한 인식에 있다고 생각된다. 누가 시조를 언급할 때 자유시에 비해 상상력의 폭이 좁다고 말하는가. 사설시조의 정형을 지키면서도 럭비공이 어디로 튀고 구를지 모르듯이 좌충우돌, 그러면서 폭과 깊이가 무궁무진한 상상력은 자유시의 상상력을 뛰어넘고도 남음이 있다.「그릇」에서도 예수와 원효대사를 넘나드는 상상력, 모였다가 흩어지는 상상력의 변주가 현란하게 나타난다.
5) 내일을 여는 시조문학
사실 지면 관계상 네 시인의 현대 사설시조만을 다루었다는 아쉬움이 많다. 하지만 평시조라는 기본형에서 변화된 형식인 사설시조가 현대에 이르러 이만큼의 가시적 성과를 보여주는 데에는 사설시조를 연구하여 현대적으로 계승한 윤금초 시인과 양식적으로 다양하게 확장한 80년대의 대표적 시인들의 노력을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윤금초 시인의 거침없고 자연스러운 운율과 생생한 현장성, 감칠맛 나는 말 부림, 박기섭 시인의 거대서사와 통렬한 현실비판, 이정환 시인의 실존적인 고독의 무게, 이지엽 시인의 현실 고발과 현란한 상상력의 변주는 형식의 제약이 전혀 없는 자유시, 우수한 자유시에 견주어도 결코 뒷자리에 서지 않을 미학적 성취로 문학사적으로도 높이 평가 받을 것이다. 이에 이를 더욱 계승, 발전시켜야 할 필자와 같은 후학들의 어깨가 무거워짐을 솔직하게 고백할 수밖에 없다.
4. 스탕달 신드롬 (Stendhal syndrome)을 기다리며
스탕달은 산타크로체 교회의 아름다운 프레스코화를 감상하고 나오던 중 무릎에 힘이 빠지면서 황홀경을 경험했다고 한다. 유명한 예술품을 감상한 사람들 중 순간적으로 가슴이 뛰거나 정신적 일체감, 격렬한 흥분이나 감흥 등 증세를 느끼는 경우가 있다.
모든 것을 다 드러내는 그림이 아니라 독자의 상상력이 필요한 문학작품, 특히 함축적인 시를 읽으면서도 가슴이 설레거나 분노가 치밀어 오르며 우울해지는 증상을 느낄 수 있다. 이러한 시가 주는 파장은 마법, 그 자체다. 한 편의 시가 독자를 사로잡기 위해서는 수만 개의 시어들 중에서 극히 선택된 말들을 써야 하며 선택된 장면, 선택된 묘사가 필요하다. 시가 견고하게 짜인 하나의 구조물이어야 한다.
아아, 무섭다. 종이에 인쇄된 활자가 독자를 울고 웃게 할 수 있다는 것은! 시인의 마법이라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정말 마법은 마술사의 눈속임이 아니라 이것인지도 모른다. 어떤 시를 읽으면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멍해지고, 어떤 시를 읽으면 너무나 쓸쓸해져서 눈물이 나고, 어떤 시는 외워버리지 않고서는 성이 차지 않는 흡인력이 있다. 시는 소설처럼 긴 이야기가 아니고 아주 짧은 글인데도 말이다. 이런 시를 쓰는 경지에 서기 위해서는 얼마나 노력해야 하는지. 그러나 시인이 노력하는 인고의 밤이 결코 시인 자신과 독자를 배신하지 않음은 분명하다. 우리 시조시단에서 시공(時空)을 뛰어넘는 명작, 독자의 눈을 사로잡는 수많은 스탕달 신드롬을 기다려본다.
박성민
목포 출생 2002년 전남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2009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 〈21세기시조동인〉
발췌: 시조시학 2010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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