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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동아일보/고은산/ 동물성 바다/ 심사:이근배 이우걸
조선일보/조우리/ 스마일 점퍼/심사: 정수자
농민신문/ 민진혜/ 이동평균선/강현덕 이송희
매일신문/장인회/ 무겁고 가벼운/심사: 박기섭
부산일보/이혜숙/ 다마스커스 칼/심사 이우걸
서울신문/강성재/ 어시장을 펼치다/심사:이근배 서연정
국제신문/조은정/ 휠체어의 반경/심사: 정용국, 이광
경남일보/장경미/ 사북/심사 : 임성구, 신상조
경상일보/문윤정/ 채렴을 읽다/ 심사평 : 유재영
한라일보 가작 당선작/천윤우/ 민달팽이 길/심사: 고정국, 한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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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당선작]
동물성 바다
고은산
창 열고 바라보는 봄 바다는 고양이, 저 혼자 부딪치며 살아온 목숨여서
오늘도 조선 매화를 파도 위에 그린다
활짝 핀 공작 날개 흉내 낸 여름 바다, 어느 문중 휘감은 대나무 뿌리처럼
푸르고 깊은 가문을 댓잎으로 상감한다
발굽도 닳아버려 혼자 우는 가을 바다, 멀리멀리 떠나가는 비단 같은 노을길을
갈매기 수평선 멀리 지평선을 물고 간다
폭설을 삼켜버린 캄캄한 겨울 바다, 천 길 어둠 밀어내고 동살로 여는 아침
부스스 잠 깬 고라니 동백숲에 숨어든다
[당선 소감] : 고은산
한 사람이라도 울릴 수 있는 시조 작품 남기도록 노력
졸작을 앞에 두고 고민이 많으셨을 심사위원님께 먼저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이번에 잡아주신 응원의 손길이 앞으로 시조의 길을 걷는 제게 큰 힘이 되리라 확신합니다. 길이 팍팍할 때마다 오늘의 이 순간을 꺼내 보겠습니다.
당나라 시성 두보는 “성질이 원래 아름다운 것을 탐하여 사람들이 놀라는 어구를 찾지 못하면 죽어서도 그만두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시의 깊이가 접시의 물보다 얕은 저로서는 감히 흉내도 낼 수 없는 경지입니다. 다만 당선자의 각오로 이 구절을 가슴에 새겨 한 사람이라도 울릴 수 있는 시조를 한 편이라도 남기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것만이 수상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선 소식을 듣고 부모 형제와 가까운 지인들, 그리고 시조를 가르쳐주신 스승들이 떠올랐습니다. 그러나 한 명 한 명 호명하여 고마움을 전하는 것이 너무 의례적이고 진부하다고 느껴졌습니다. 하여, 제 마음에 감사의 방 하나를 따로 마련하여 그 이름들을 모셔두고 오래오래 감사의 마음을 전하겠습니다.
소감의 마지막이 그렇듯이 저도 가족에 대한 인사로 마무리할까 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시조를 쓰도록 옆에서 밀어준 아내와, 언제나 초고를 읽고 따뜻한 평을 해준 딸과, 시조가 뭔지 몰라도 아빠의 시조라면 일단 읽어주는 아들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이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고은산 약력>
△1967년 충남 보령시 출생 △한남대 국어국문학과 학사, 석사
[심사평] : 이근배, 이우걸 시조시인
깊은 사유의 미학… 한국화 보듯 고전적 미감 여운 남겨
소재도 다양하고 응모 지명도 국내외 여러 곳이었다. 이러한 결과는 동아 신춘의 권위 때문이기도 하고 또 다르게는 삶의 고난이 심대할수록 사람들은 심미적 실존에 더 관심을 갖는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첫 번째 관문을 통과하여 윤독의 대상이 된 작품으로는 ‘조등이 핀 자리’ ‘슬픔의 이력’ ‘별자리를 읽다’ ‘그늘의 생존법’ ‘섬’ 그리고 ‘동물성 바다’가 있었다. 이 중에서 표현의 묘를 얻었으나 제목이 신춘문예로는 어색한 것, 육화되지 못한 서정, 쉽게 수락하는 일상의 애환 스케치, 혹은 너무 평범한 어둠에 관한 노래, 모국어에 대한 애정과 구사 능력을 인정하지만, 사색의 깊이가 얕다는 것 때문에 당선권 밖으로 밀려나고 한 작품만 남게 되었다. 비교해서 약점을 찾는 자리가 이 제도여서 탈락은 되었지만, 위의 작품 중에서도 우수한 작품이 적지 않았다.
마지막 남은 작품이 ‘동물성 바다’였다. 바다의 봄, 여름, 가을, 겨울 풍경을 그렸다. 묘사 능력이 탁월할 뿐 아니라 깊은 사유의 세계로 독자를 안내하는 마력이 있었다. 그 마력은 전통 한국화를 감상할 때 흔히 느끼게 되는 고전적 미감 같은 여운이었다. 우리 심사위원들은 기쁜 마음으로 이견 없이 이 작품을 당선작으로 정했다.
상투성을 타파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작품이거나 전망 부재의 내일을 그리는 작품이거나 잘못된 사회에 대한 방법적 대응을 모색하는 작품이거나 이 시대의 쟁점을 파고드는 뜨거운 작품은 아니지만, 고요한 사색의 세계로 우리를 초대하는 이 작품이 또 하나의 개성이 돼 한국 시조의 내일을 열어주길 기대하며 축하의 꽃다발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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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당선작]
스마일 점퍼
조우리
눈꺼풀 위로 쌓인 생애의 나지막이
그림자 당기면서 저 혼자 저무는 때
대머리 독수리처럼 감독만이 너머였다
녹말가루 풀어지듯 온몸을 치울 때까지
일 년에 쓰는 시가 몇 편이 되겠는가
평생을 바치는 것은 무엇쯤이 되던가
제 높이 확인하고 저려오는 가슴처럼
꽃봉오리 깊은 곳에 진심이 울었겠지
끝없이 닿는 중인데 그 끝 간 데 넘는 사람
죽었던 문장마저 혀끝으로 몰고 가서
흥건히 마른 허공 핥아 보던 나무의 피
돌이켜 떨어지는 순간 칸타빌레 붉디붉다
[당선 소감] : 조우리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9년 소중한 선물 받은 듯 울컥
조금 멀리 왔을 뿐인데 덜컥 소중한 선물을 받은 것 같아 가슴이 저립니다. 9년이라는 응모 기간 동안의 주마등이 스칩니다. 떨어질 때마다 또다시 글을 쓰게 만드는 무언의 지표가 마음속에 있었고, 마침내 그것이 물보라를 만들어 제게는 무엇보다 좋은 스승이 되어주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처음 시조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지역 백일장에 참가하기 위해 먼 길에 올랐던 학생을 미쁘게 보시고, 그날 선생님은 제게 시조집 보따리와 돌아갈 차비를 건네주시며 시조를 오래 간직하란 듯 큰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그 사랑의 마음에 내내 속으로 울었습니다. 이후에도 메일을 주고받으며 좋은 시조 작품과 함께 당신이 쓰신 작품들을 보내주시며, 우리 얼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셨던 분이십니다. 생활이 어려울 때에도 도움을 아끼지 않으셨던 어머니 같은 분이셨습니다. 어쩌면 시조보다 시조를 쓰시는 시인의 마음을 더욱 아끼고 동경하였던 그때, 그분의 마음이 지금도 제 곁에 많은 귀감으로 남아 있습니다. 많이 늦었지만 마산에 계신 선생님께 이 영광을 돌리고 싶습니다.
정수자 심사위원님께 뜻깊은 인사를 남기게 되어 영광입니다. 마지막으로 할머님과 조카 나아에게 깊은 고마움 전합니다.
<조우리 약력>
-1983년 여수 출생, -2008년 전남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
[심사평] : 정수자 시조시인
청춘들이 뚫고 가는 현실, 생의 대목… 밀도 있고 절묘하게 포착
각자도생이 절실한 시절이다. 응모작에도 각고의 시간을 건너 살아남은 말들로 빚어낸 발화가 많이 보였다. 자기 앞의 현실을 헤쳐 가는 시적 도생들을 곰곰 읽으며 시조의 신춘을 열어젖힐 작품을 가려봤다.
끝까지 겨룬 응모작은 ‘로댕의 손’ ‘버거’ ‘데칼코마니’ ‘조우’ ‘마법상점’ ‘스마일 점퍼’ 등이었다. ‘로댕의 손’ ‘버거’ ‘데칼코마니’ 등은 발랄하고 활달한 상상력을 정형에 조화롭게 녹여 담는 신선한 시적 언술을 보여줬다. ‘조우’ ‘마법상점’ 등은 당면한 현실의 문제들을 안정감 있게 갈무리하는 형식 운용이 듬직했다. ‘스마일 점퍼’는 이들을 아우르는 시적 언술과 정형의 넓은 보폭 등의 면에서 두드러졌다. 동봉 작품들에서 펼쳐 보이는 다양한 상상력의 개진도 이후를 기다리게 한다는 점에서 당선작으로 올린다.
‘스마일 점퍼’는 이 시대 청춘들이 뚫고 가는 현실의 난도 같은 것들을 포착하는 밀도와 내성이 단단한 작품이다. 높이뛰기의 두려움인 ‘높이’와 글쓰기의 어려움인 ‘깊이’를 교차하고 중첩하며 ‘끝없이 닿 중’인 생의 대목들을 절묘하게 잡아냈다. ‘끝 간 데’까지 넘는 최고라도 그것을 다시 넘어야 사는 높이뛰기나 ‘죽었던 문장을 혀끝으로 몰고 가’야 하는 글쓰기나, 각자 삶에서의 도생임을 충실히 새기고 있다. 진술 과잉으로 비친 이전의 쓰기에서 압축과 비유 등으로 깊이를 파고든 숙련의 시간이 짚인다. 이후도 ‘평생을 바치는 것’ 그 너머의 ‘너머’를 향해 시조의 이름으로 계속 나아가기를 바란다.
조우리씨에게 축하와 기대를 모아 보낸다. 다시금 응모작 준비에 들어서는 도전자들의 높이뛰기에도 바람을 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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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신문 당선작]
이동평균선
민진혜
경쾌한 발자국이 갈지자로 따라온다
덮쳐 올 파랑波浪을 눈치 챌 겨를 없이
두둠칫 신이 난 리듬, 섣부른 탭댄스로
선택의 순간마다 일어서는 불안의 싹
똬리 튼 고집들이 거친 숨 다독일 때
습관은 유혹과 공모, 붉은 꼬리 부추긴다
오기로 버텨오다 덫에 걸려 뜯겨진 몸
모래성에 질주하던 발걸음을 되짚으면
저 심해 해초 사이로 섬 하나 눈을 뜬다
* 이동평균선 : 일정기간 동안의 주가 평균값을 연결해 만든 선들.
[시조 당선 소감] : 민진혜
“쓰고자 하면 할수록 더욱 어려워…불씨 잘 지켜갈 것”
겨울비가 드문 대구에 3일째 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중요한 약속을 앞두고 시간이 비어 잠시 들어간 카페에서 당선 소식을 들었습니다. 차가운 손을 녹이자마자 접한 소식에 바쁜 일상을 핑계로 얼어붙었던 마음이 녹아내렸습니다. 예상치 못한 소식에 너무나도 덤덤했던 기분이 크리스마스 캐럴을 타고 들썩였습니다.
글을 쓰는 목적은 독자에게 공감과 감동을 전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저 자신부터 제 글에 공감이 되는지, 감동을 얻을 만한 꼬투리라도 있을지 매번 고민합니다. 스스로를 다독여줄 수 있는 글이 된다면 그것을 접하는 어느 누군가의 마음 한편이나마 따뜻해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래서인지 쓰고자 하면 할수록 더욱 어렵습니다. 글을 쓰는 건 제가 접한 모든 것 중에 가장 힘든 일이지만 그 험난한 과정을 버텨내고 넘어가고자 매번 자신에게 도전합니다.
따뜻한 불씨를 품어주신 ‘농민신문’ 신춘문예 관계자분들과 심사위원님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항상 든든히 등을 밀어주는 가족들과 동인들에게도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봄날이 되기 전 잠시 틈을 내 저 자신에게도 그래도 이만하면 잘해나가고 있다고 한번쯤은 토닥여주고 가려고 합니다. 지치지 않고 나아가야 할 걸음을 위해 바닥부터 찬찬히 다져나가야 한다는 걸 다시 한번 다짐합니다. 큰 행운과 함께 오는 무게감은 언제나 겸손이라는 단어를 먼저 되뇌게 해줍니다. 지금부터가 진짜 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불씨를 꺼트리지 않도록 열심히 지켜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민진혜 약력 ▲1980년 대구 출생 ▲영남대학교 일어일문학과 졸업 ▲2023년 제13회 천강문학상 시조부문 대상 수상 ▲시조동인 한결 회원 ▲계간 ‘시조21’ 편집장
[심사평] : 강현덕, 이송희 시조시인
현실감 있는 이미지의 구체적 전개가 눈길 사로잡아
시조에 현대성을 갖추려면 전통을 답습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현대인의 의식과 세태를 참신한 언어와 감각으로 표현하고 의미화하는 시대정신이 요구된다. 시조의 완결성과 문학성은 작가가 품은 문제의식을 섬세한 언어와 구체적인 이미지로 담아내면서 주제를 형상화하는 독창성에 있다. 시조의 참신성은 친숙한 소재인가 아닌가의 문제보다 주제를 어떻게 형상화할 것인가에 대한 ‘방법론’에서 온다.
투고된 시조를 일별하면서 당선작으로 꼽은 작품은 이러한 현대적 요소를 시조 양식에 잘 녹여낸 ‘이동평균선’이다. 주식시장에서 미래 예측을 위한 도구로 주로 쓰이는 이동평균선을 소재로 한, 현실감 있는 이미지의 구체적인 전개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한탕주의와 사행성으로 주식이나 복권 등에 한번 빠지면 헤어 나오기 어려운 인간의 욕망을 구체적인 이미지와 발랄한 언어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함께 응모한 ‘소금사막’과 ‘팔레트’에서도 언어 감각이 돋보였다.
최종심에 언급된 ‘미나리’는 언어를 운용하는 힘과 ‘구(句)’의 능수능란한 전개, 구성의 힘이 탄탄했으나 다소 익숙한 주제와 표현이 아쉬웠다. ‘임진강’ ‘청사포’ ‘풍경을 사다’ 역시 현대시조의 미래에 가능성을 모은 작품이다.
시조의 ‘서정’에 대한 고정관념을 벗을 때 ‘무엇을’ 쓸지 보다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일어날 것이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보내며 시조의 현대성을 구현하는 길에 적극 동행해줄 것을 믿는다. 당선되지 못한 분들께는 아쉬움을 전하며 시조 창작의 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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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문 당선작]
무겁고 가벼운
장인회
수레의 눈은 온통 폐지에만 끌려서
누가 먼저 다녀갈까
조바심 난 발걸음
새벽녘 소음도 잠든 골목을 가로 지른다
몇 십 년 구른 바퀴 한쪽으로 기울어도
신전을 오르듯 포기 없는 생의 터널
실직은 깊은 그늘로
젖어서 더 무겁다
일용할 양식 앞에 가난은 또 등이 굽어
끌어도 떠밀어도 꿈쩍 않는 앞날을
오늘도 뒤적여본다
환한 양지 그 가벼움을
[시조 당선 소감] : 장인회
강풍 경보 문자와 함께 도착한 신기루 같은 당선 소식
해마다 연말이 다가오면 괜스레 설렜습니다. 신기루 같았던 신춘문예, 가제트 목으로 새해 신문을 기다리곤 했습니다. 기후 이상으로 겨울이 더디게 왔습니다. 긴 가뭄 끝에 내리는 비가 꼭 장맛비처럼 사나웠습니다. 강풍 경보를 알리는 문자와 당선소식을 동시에 받았습니다.
오랫동안 설레던 주파수가 여기까지 오게 했습니다. 먼 꿈이었던, 남의 일로 여겼던 벅찬 소식에 준비도 없이 그만 날개가 나왔습니다. 전화를 끊고 한동안 너울너울 춤추는 나비가 되었습니다. 날개를 꿈꾸는 건 가장 오래된 습관이었지만 애벌레의 촉수는 캄캄한 고문이었습니다.
몇 년 전 고향으로 내려왔습니다. 고향집을 지키고 부모님 산소를 돌보며 유학자셨던 아버지 말씀을 생각했습니다. 당신 닮은 자식 하나쯤 있었으면 하시던 바람,이 영광을 부모님과 가족에게 돌리고 싶습니다. 함께 공부해온 시조동인 더율의 도반님들, 그리고 지도 선생님과 기쁨 함께 나누겠습니다.
한국 문단을 대표하는 작가 등용문인 매일신문사 신춘문예 관계자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리며 부족한 시를 눈여겨 봐주시고 날개를 달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께 큰 절 올립니다.
좋은 시조, 스스로 책임질 수 있는 시조를 쓰겠습니다.
〈장인회 약력〉
1959년, 경북 포항 구룡포 출생, 더율 시조 동인
[심사평] : 박기섭 시조시인
삶의 언어, 생활의 정서가 두드러진 시조
삶과 자연·인간과 사물, 그것이 무엇이든 한 편의 시가 되기 위해서는 새로운 발견과 해석이 필요하다. 이를 전제로 시의 몸이 될 언어의 개입이 이루어진다. 표현과 수사라는 이름으로. 그런 정련된 언어의 일대 각축장이 곧 신춘문예가 아닐까 싶다.
매일신춘의 오랜 전통에 값할 만큼 질과 양의 양면에서 고른 수준을 보인 점은 고무할 일이나, 중장년층이나 여성 투고자의 쏠림 현상이 갈수록 심해지는 데 대해서는 일말의 우려가 없지 않다.
저마다 뿔을 맞대고 다툰 끝에 김영자의 '와이퍼의 반경', 권인애의 '늦가을 저녁', 정덕인의 '게를 사다', 이미혜의 '모리아에 오르다', 장인회의 '무겁고 가벼운' 등이 최종심에 남았다. 하나같이 생존 현장에 밀착한 작품들이다. 한 편 한 편이 저마다의 시각으로 대상에 다가가는 다양한 관점을 보여줬다. 숙고가 이어졌다. 그 결과 결구의 치밀함, 함께 보낸 작품의 균질성 등을 고려해 '무겁고 가벼운'을 올해의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당선작 '무겁고 가벼운'은 삶의 언어, 생활의 정서가 두드러진다. 상반되는 두 개념을 결속한 제목부터가 그렇다. 무거운 것은 '실직의 그늘'이요, 가벼운 것은 꿈의 영역에 가까운 '환한 양지'다. 두 개념 사이에 '새벽녘'부터 '골목을 가로지르'는 '폐지 수레'가 있다. '누가 먼저 다녀갈까/ 조바심 난 발걸음'이 있다. '바퀴'가 '한쪽으로 기울'지언정 '일용할 양식'을 포기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 집착과 견딤이 '등이 굽'은 '가난' 속에서도 폐지 수레를 밀게 한다. 어쩌면 그것이 '환한 양지 그 가벼움을' '오늘도 뒤적여 보'는 힘의 원천일는지도 모른다. 이렇듯 핍진한 현실을 직시하는 이 작품의 행간에서 우리는 시대정신의 또 다른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우리말, 우리 정서가 배태한 시조의 길에 또 한 사람의 동행을 만나는 기쁨이 크다. 모쪼록 자기다움과 남다름으로 스스로를 다잡아 완주의 각오를 다져주기 바란다. 당선자에게 아낌없는 축하의 박수를 보내며, 아쉽게 손을 놓은 낙선자들의 분발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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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일보 당선작]
다마스커스 칼
이혜숙
소녀에서 어머니로
변화하는 삶 속에서
때로는 연약하고
때로는 강해지는
수많은
아픔 속에서
태어나는 생이 있다
묵묵히 견뎌내는
너와 나의 시간들이
기쁨과 아픔까지
하나로 쟁여지면
어둑한
기다림에도
생이 있어 빛난다
서로 다른 둘이서
하나로 채워지는
수백 겹 겹쳐 이룬
드러나는 물결무늬
쉼 없는
두드림에도
살아나는 생이 있다
[당선 소감] : 이혜숙
힘든 삶 녹여낸 깊은 울림의 시조 쓰고파
창밖, 빈 나뭇가지에도 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12월의 봄비인 듯 포근한 한나절 당선 소식을 전해들었을 때 꿈을 꾸는 듯 믿기지 않아 허둥대는 마음 가운데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남편과 일찍 사별하고 건강이 여의치 못해 직업도 내려놓고 힘든 통증을 견뎌내며 할 수 있는 일은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접한 우리 시조는 심오한 매력의 문학이었고 시조 창작은 저에게 새로운 도전이었습니다. 그렇게 시조 공부를 하면서 제 일상의 먹구름도 걷히는 듯했습니다.
학창 시절 1월 1일 새해가 되면 펼쳐지는 신춘문예의 지면은 너무나 환하면서도 거대한 성벽처럼 느껴졌지만 제 가슴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던가 봅니다. 신춘문예 당선! 과분한 꿈이었기에 도저히 이뤄질 것 같지 않은 꿈을 이루게 해주신 심사위원님과 부산일보사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이제 저는 더 가다듬어서 또 다른 길을 나서렵니다. 힘든 삶의 긴 여정에서 조금이나마 사람들에게 위안을 줄 수 있는 시조, 힘든 삶을 녹여낸 진솔한 시조, 깊은 울림을 주는 시조를 쓰고 싶습니다.
나에게도 다독입니다. 이제 아프지 말자! 쉼 없는 두드림에도 살아나는 생이 있고 어둑한 기다림에도 생이 있어 빛나는 것처럼 남루한 내 뜰에도 봄이 되면 꽃씨를 뿌리자고. 시조의 길로 이끌어 주시고 격려를 아낌없이 해주신 민달 선생님, 김임순 선생님과 그리고 사랑하는 두 아들, 가족들과 이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약력 : 1973년 경남 남해 출생, 시언 동인
[심사평] : 이우걸 시조시인
더 깊어지고 단단해지는 인생 잘 노래해
꽂아놓은 꽃과 썩 잘 어울리는 화병처럼, 과일을 담은 편안한 광주리처럼 자연스러운 미학을 머금고 있는 시조를 기다린다. 시대를 관조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으면서도 말하지 않는 척 독자를 바라보는 그런 시조를 고대한다. 가락을 잘 살리면서도 가락에 휘둘리지 않고 시적 전언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는 시조, 자기만의 눈으로 새로운 소재를 찾아내어 세상을 이야기하는 시조….
이런 기대를 품고 보물찾기하듯 투고 작품을 읽어나갔다. ‘따옴표’가 보이고 ‘옷의 감정’이 보이고 ‘코리아 케라톱스’가 보이고 ‘현수막’이 보이고 ‘입을 지나는 문장’이 보였다. 그리고 ‘다마스커스 칼’이 눈에 들어왔다. 예사롭지 않은 작품들이었기에 개성과 언어의 세밀도, 진정성, 비유의 적절성과 긴장감 등을 놓치지 않으려고 여러 번 반복해 읽으면서 고심했다.
그런 끝에 ‘옷의 감정’과 ‘다마스커스 칼’, 두 편이 손에 남았다. 두 작품 모두 말 부림이 예사롭지 않고 진정성이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옷의 감정’은 세련미에서는 훨씬 뛰어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소재 면에서 살펴보면 너무 흔한 일상 풍경이어서 새롭지 않았다. 심사숙고한 끝에 올해의 영광을 ‘다마스커스 칼’에게 돌리기로 했다. 이 작품은 접쇠하여 강해지는 전투용 칼을 통해 더 넓어지고 더 깊어지고 더 단단해지는 인생을 노래하고 있다. 작가 스스로 다짐하는 자성록 같기도 하고 우리 누구에게나 필요한 금언 같기도 한 메시지가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 작품이다. 맑고, 날카롭고, 따뜻한 시인으로 대성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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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신문 당선작]
어시장을 펼치다
강성재
초승달 어둑새벽 선잠 깬 종소리에
경매사 손짓 따라 어시장이 춤을 추고
모닥불 지핀 계절은
동백꽃을 피운다
항구엔 수유하는 어선들의 배냇잠
활어판 퍼덕이는 무지갯빛 물보라
물메기 앉은자리 곁
삼식이도 웃는다
눈뜨는 붉은 해 동녘 하늘 헤엄치고
활강하는 갈매기 떼 생사의 먹이 다툼
금비늘 남해 바다엔
파도가 물결친다
자자자, 떨이를 외치는 어시장 안
손수레 바퀴가 풀고 가는 길을 따라
햇살도 날개 펼치며
오금 무릎 세운다
[당선 소감] : 강성재
삶 다하는 날까지… 물보라 치는 싱싱한 시조 쓸 것
당선 전화를 받은 날은 정년퇴직 후 어렵게 재취업한 국가산업단지의 어느 일터에서 온몸을 바쳐 일하다가 조금 여유가 생긴 날이었습니다. 제가 서 있었던 길 가장자리 공터엔 자라는 나무는 없었지만, 겨울 속 봄인 듯 민들레도 있었고 한 무더기 토끼풀 군락도 파릇하였습니다. 꽃송이를 몇 개씩 달고 피어나 있는 것이 경이롭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말이면 한파가 밀려온다는 예보가 있었기에 생명 있는 풀꽃의 운명이 안쓰럽기도 하였습니다. 저는 꽃을 더 보기 위해 허리를 숙였고 얼굴도 가까이 가져갔습니다. 그때 군락의 한가운데서 네 잎 클로버가 제 눈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습니다. 일부러 찾고자 했던 것이 아니었기에 좋은 일이 있으려나 싶어 사진으로 담아 두었습니다.
몇 시간 뒤 제게 기적처럼 당선 소식이 휴대전화로 날아왔습니다. 언제나 낮은 곳에 몸을 두고 푸른 하늘을 꿈꾸며 열심히 살아왔지만 저의 꿈은 항상 늦게 이루어졌습니다. 젊은 날엔 동인 활동을 하며 무작정 문학의 강가를 서성였고 서른 즈음 신춘문예 시 부문 최종심에도 올랐었습니다만 닿을 듯 닿지 않는 신기루 같았던 당선 소식은 아득히 멀어졌습니다. 그 기억의 강조차 흘러내려 바닷속으로 사라져 갈 때쯤 만학도의 길을 걸었습니다. 지난 5년간 절치부심 시조 쓰기에 매진했고 4전 5기 끝에 마침내 여기에 도달했습니다.
박사과정 지도 교수셨던 김중일 교수님 그리고 이기호·조형래··안점옥 교수님 감사합니다. 문학이라는 수행의 길에서 도반이자 항상 그 열정을 닮고 싶었던 김성신 시인, 함께 강의실에서 공부했던 원우들, 저를 아는 모든 분께 당선 소감으로 안부를 전합니다. 이근배·서연정 심사위원께도 생이 다하는 날까지 물보라 치는 싱싱한 시조를 열심히 쓰고 더 깊어지겠다는 약속을 하며 신년 세배 올립니다.
▶ 약력 ▲1961년 전남 여수 출생 ▲광주대 경찰법행정학과 졸업 ▲광주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 수료
[심사평] : 이근배, 서연정 시조시인
다양하고 압축된 삶의 층계, 감각적 표현으로 끌어내
응모작을 살피면서 작품 수준이 예년보다 고르게 향상된 느낌을 받았다. 기후위기, 요양원, 고독사 등 사회문제나 종교적 인식, 인생 성찰, 고향이나 혈연 등에서 끌어낸 원초적 그리움, 예술품에서 받은 감동 등 소재도 다양했다. 시조에 대한 이해, 참신한 시적 발상, 개성적인 형상화, 주제 의식을 끝까지 밀고 들어가는 힘 등을 심사 기준으로 세웠다. 부실한 한 수로 완성도가 무너진 작품, 개인적 감상에 빠진 작품, 상투적 표현에 머문 작품 등을 먼저 내려놓았다. 그런 작품들은 삶의 고난을 너무 쉽게 이겨내고 깨달음에 안주하고 있어서 무난히 읽히지만 관념적 서술로 삶의 실질적 모습이 덜 드러났다.
‘봄을 할인하다’는 벚나무, 꽃받침, 꽃 마트, 꽃구름, 벌 나비, 꽃잎들 등 꽃으로만 치우친 봄 풍경이 삶의 실상을 과연 어느 만큼 담아내고 있는지 의아심이 일었다. ‘동백꽃을 복사하다’는 ‘윤슬 오래 헤아려 밀려오는 꿈결처럼’, ‘오랫동안 욱신댄 앙가슴이 고요해’지기까지 진통의 실상이 관념으로 일관돼 이미지화가 미흡했다. ‘꿀벌 실종 사건’은 생태환경 위기에 울리는 경종을 시적 메시지로 전환하는 데 공을 좀더 들였더라면 좋았겠다. ‘담쟁이의 말’은 ‘높고 넓은 담벼락을 기어오르는 중년 사내’의 삶을 담쟁이로 형상화하는 숙련된 필치를 보였는데 뭔가 절실한 ‘담쟁이의 말’이 끝내 들리지 않은 채 마무리됐다.
당선작 ‘어시장을 펼치다’는 죽은 고기도 있고 산 고기도 있는 어시장이라는 다양한 삶의 층계 속에서 시를 끌어냈다. 경매사의 손짓에 따라 바쁘게 주고받는 삶의 장이 네 수 속에 잘 녹아 있다. ‘모닥불 지핀 계절’, 매서운 추위 속에서도 새벽 활기는 동백꽃을 피우고 ‘퍼덕이는 무지갯빛 물보라’를 일으키는가 하면, ‘물메기 앉은자리 곁/ 삼식이도 웃는다’에 이르러선 어시장으로 압축된 삶의 터전에 애틋함이 담긴다. ‘활강하는 갈매기 떼 생사의 먹이다툼’이 일어나는 삶의 현장을 관념적 서술에 빠지지 않고 감각적 표현으로 그리는 힘이 탁월하다. 당선을 축하하며 좋은 시인으로 우뚝 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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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 국제, 경남, 경상, 한라일보
[국제신문 당선작]
휠체어의 반경
조은정
아픔의 무게만큼 하루를 밀어낸다
불 꺼진 병실에 접어놓은 우두커니
온종일 바쁜 바퀴는 이제야 잠이 든다
꿈속을 굴려봐도 상처뿐인 막다른 길
굴리는 대로 굴러간 당신 손을 감싸면
가파른 시간 앞에서 잠시 숨을 고른다
주저앉은 불빛마저 걷기 연습 한창인데
환한 봄 언제 올까 길목이 피어난다
당신과 멀어질수록 일어서는 내일들
[당선 소감] : 조은정
병마에도 삶의 반경 넓히는 엄마를 응원
눈은 오지 않고 기다림만 쌓일 때 받은 당선 통보는 머릿속부터 하얘졌습니다. 그 기쁨을 맞이하기라도 하듯 내 앞에 유난히 좋아하는 눈이 내렸습니다.
몸에 닿자마자 녹아버리는 나의 문장을 찾기 위해 내 주변을 오래 서성였습니다. 이제 겨우 제자리를 찾은 느낌입니다. 흩날리는 눈처럼 감사와 환희가 춤을 춥니다. 시조의 결을 따라 앞만 보고 여기까지 오는 동안 함께 해준 모든 이들의 고마움이 깊이 새겨집니다.
‘휠체어의 반경’은 요양병원에 8년째 누워 계신 엄마의 불편한 몸을 묵묵히 받들며 반경을 넓혀가는 휠체어를 보고 쓴 글입니다. 치유의 빛도 들어오지 않는 곳에서 하루를 밀고 나가는 모습이 눈물겨웠습니다. 제 발로 움직일 수 없어도 바퀴는 가능성의 문을 열어 두고 움직입니다. 그것이 고결한 생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도 힘겹게 병마와 싸우며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고군분투하는 이들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겠습니다.
글을 쓰는 일도 이와 같아서 쓸 수 있을 때까지 밀고 나가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며 때로 무용한 것이라고 여기던 것이 유용한 것이 되는 것처럼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고도’는 내면의 울림이며 희망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그것이 저에게는 글쓰기였습니다. 막연하지만 마음속에 저를 추동하는 불꽃이었고 그 불꽃의 일렁거림에 설레었습니다. 어렵고 힘든 길이지만 뚜벅뚜벅 저의 보폭으로 걷기를 멈추지 않겠습니다.
어린아이가 걸음마 연습하며 발을 떼듯, 시조로 바로 설 수 있게 이끌어주신 조경선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함께 공부하며 힘이 되어준 시란 동인 선생님들 고맙습니다. 문학이라는 공통분모로 만난 용인문학 선생님들 고맙습니다. 국제신문과 부족한 제 글을 선해주신 심사위원님께도 감사드리며, 공부하는 모습으로 롤 모델이 되어주신 아버지와 묵묵히 저를 지켜봐 주신 엄마가 계셨기에 글이라는 씨앗이 싹틀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다영이, 동호 그리고 남편과 이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약력 1969년 경기 출생. 시란 동인. 용인문학회 회원
[심사평] : 정용국, 이광 시조시인
긍정의 힘으로 밀어 올린 희망의 꽃대
시조는 한글과 찰떡궁합을 이루며 상승하는 반려자라고 생각한다. 한글이 창제되기 전부터 우리 민족이 수천 년을 사용해온 말의 음보를 가장 적확하게 지켜가고 있는 것이 바로 시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조는 누가 소리 내어 읽어도 자연스럽고 거침이 없어야 한다.
투고작들은 난세의 시절가조 답게 다양하고 새로운 소재를 담아낸 모습들로 가득하여 뿌듯했다. 코로나가 다녀간 모습부터 우크라이나 전쟁과 위급한 생태계에 대한 걱정, 출산율 감소에 대한 우려와 팍팍한 서민의 허전함에 보내는 따듯하고 애잔한 감정들이 포근했다. 더러 시조의 율격에 어긋나는 작품이 보였지만 대체로 음보와 정형성을 무난하게 구사했다는 것도 대견스러운 현상이었다.
2차 통독을 통해 건져낸 여덟 편의 작품을 다시 교차 심사하여 마지막 세 사람의 작품이 최종심에 남게 되었다. ‘휠체어의 반경’과 ‘스태추 마임’, 그리고 ‘라인댄스’가 다시 겨루었다. ‘스태추 마임’(동봉한 다른 응모작 포함)은 압축미가 부족했고 부자연스러운 시어가 음보를 거스르는 부분이 있었다. ‘라인댄스’(〃)는 단정했지만 뚜렷하게 드러나는 주제의 힘이 강하지 못했다. 다시 더 좋은 작품으로 만나길 기대한다.
조은정의 작품들은 시조가 갖추어야 하는 함축성과 평온한 음보가 돋보였고 절실하게 다가오는 주제와 소재의 어울림이 긴장감을 놓치지 않고 있다. 더구나 긍정의 힘으로 밀고 나간 구성과 끝까지 놓지 않은 희망의 꽃대는 새해 아침을 활짝 여는 작품으로 손색이 없다고 두 위원은 의견을 공유했다. 그의 시안이 더 넓어지고 탄탄해져서 시조의 멋진 꽃을 피울 수 있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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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신문 당선작]
사북
장경미
동생의 몸속에서 사북이 빠져나갔다
펴지도 접히지도 못하는 쥘부채로
흐느적 늘어지고 만
해삼 같은 몸뚱이
장손으로 태어나 어머니 면 세우고
갑갑한 시집살이 시원한 바람이던
댓개비 휘청이게 한
작디작은 저 구멍
헐거워진 정신은 돌아올 줄 모르고
다시금 아기가 된 아들 곁을 지키며
늙은 몸 갈고 갈아서
사북이 된 어머니
[당선소감] : 장경미
쉼이 되고 숨이 될 수 있는 글 쓰겠다
5그램 남짓 몸무게, 12줄의 키.
당선 연락을 받고, 첫 번째로 내밀지 못했던 원고를 다시 펼쳐 한참을 보았다.
가벼운 A4 용지에 쓰인 짤막한 3수.
그 속에는 일 년이 넘는 과거와 현재, 미래의 우리 가족 모습이 담겼다. 우체국에서 이별하고 온 글을 마음에서도 지우려 애썼다. 아직도 눈물샘은 마르지 않았고, 병실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동생과 어머니의 현실이 너무도 아파서.
글 쓰는 이들의 연말은 아기 예수님을 기다리는 성탄절 같다. ‘신춘’의 설렘과 기대가 어우러져 하루하루를 간절함으로 보낸다. 성탄이 지나고도 휴대전화가 잠잠하면 밀려오는 허탈감과 아쉬움은 오롯이 혼자만 겪어내야 하는 진통이다. 그럼에도 다시 글을 쓰는 이유는 저마다 다르겠지만, 쓰지 않고서는 제대로 숨을 쉬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
누군가에게는 쉼이고 숨이 되는 시조가 내게는 어려운 과제 같았다. 시조라는 정형의 틀에 덜 익은 나를 스스로 가두기도 하고 옛것을 이어가는 시조의 책임감에 주눅이 들기도 했다.
당선 소식은 시조로부터 조금은 자유로워지는 계기가 되었다. 가슴에 품은 것을 쏟아냈는데 그것을 받아 준 그릇이 시조였기 때문이다. 나뿐만 아니라 누군가에게도 잠깐의 쉼이 되고 한 가닥 숨이 될 수 있는 시조를 쓰고 싶다.
부족한 글에 마음을 내어주신 심사위원님들과 경남신문사에 감사드린다. 그리고 자꾸만 야위어가는 어머니께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약력 △1970년생 △창원 거주 △초등학교 교사
[심사평] : 임성구 시조시인, 신상조 문학평론가
시상의 전개 방식 삶의 진정성과 맞물려
시조는 고려말에 생성되어 오늘날까지 우리 민족의 혈관에 면면히 흘러오고 있는 정형 미학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가장 한국적인 문학 장르가 시조이고, 현대시조의 발전을 견인한 것 중 첫째가 제국주의의 억압에 굴하지 않으려는 저항정신이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우리가 시조를 가리켜 ‘민족문학’이라 서슴없이 일컬을 수 있는 이유다. 2024년 신춘문예 시조 부문 응모편수가 368편으로 경남신문 역사상 가장 많았다는 사실은, 이러한 시조가 세대를 이어 활발히 전달되고 있다는 방증이라서 기쁘다.
다만 응모작들을 일별한 결과, 정형 시학의 제한된 형식이 진부한 언어적 틀과 사고의 반복으로 이어짐은 아쉬움으로 남았다. 형식적 규범이 절제미를 조성하는 시조일수록 행간의 여백과 언어의 함축성은 필수적이다. 시란 자아에 갇혀 닫힌 세계가 아니라 자아를 내려놓고 자아를 여의는 장르이기 때문이다. 개중에서도 시조는 형식과 의미와 표현이라는 세 개의 과녁을 동시에 노려야만 하는 까다로운 장르다. 치열함이 결여된 시조 이해는, 역설적이거나 낯설게 하기가 이루어지지 않는 시의 진부함으로 드러나게 마련임을 잊지 말아야겠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피상적이고 상투적인 사고와 인식, 전근대적 삶의 편린들, 정형성에 기초한 율의 효과 및 표현이 지나치게 동요적인 작품, 삶이 체감되지 않음으로 정서적 감동으로 이어지지 않는 평면적 재현, 파격이 아니라 정형의 미숙함에 불과한 시들을 일차와 이차에 걸쳐 걸러냈다. 남은 작품은 ‘한겨울에 매미 울다’와 ‘탄소 보폭, 더듬어 읽다’ 및 ‘사북’이었다. 한겨울 구세군 종소리와 노숙자들에게 밥을 제공하는 밥차를 소재로 한 ‘한겨울에 매미 울다’, 그리고 온실가스를 주목함으로써 지구 생태계를 걱정하는 ‘탄소 보폭, 더듬어 읽다’는 둘 다 사회성과 당대성이라는 요건을 충족시키면서 인식의 건전성이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의미를 전달하는 방식 또한 두 작품 모두 탁월한 형상화를 보이고 있었다. 기성 문인들의 세례를 받은 흔적이 보이지 않은 점도 긍정적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식물인간인 아들을 지키는 노모의 뜨거운 모성(母性)에 결국 손을 들어주기로 했다. 시상의 전개 방식이 삶의 진정성과 맞물리는 ‘사북’은, ‘어머니’야말로 이 땅에서 신의 사랑을 대신하는 존재임을 깨닫게 만든다. 감동으로 말하자면 신춘문예 최고가 될 듯한 작품이라는 심사자의 말이 생각난다. 시인에게 기쁜 일이 일어났듯, 작품 속 동생에게 기적이 일어나길 기원해본다. 아울러 시인의 무한한 발전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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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일보 당선작]
채렴을 읽다
문윤정
옮겨 든 바다가 무자맥질 숨길 풀 때
불볕 터진 하, 목마름 온몸에 두른 염전
치열한 역류의 물결 부서지고 고이면서
견디는 망막에 아린 결정체 되새김할까?
바람살에 서럽도록 들썩이며 얽힌 속내
짓물러 뒤챈 상처가 순백의 꽃 피우고
허공 짚고 쏟아지는 잔별들 획을 긋고
도돌이표 궤도 따라 흰 뼈대로 추스른 허기
오랜 날 매인 가래질, 짜디짜게 길들여진 채
절인 몸피 버석대는 늙은 염부 그 한 생애
윤기 도는 짠맛 세상 혀끝 절로 사로잡고
지나도 또렷이 남는 길 소금처럼 반짝인다
*채렴: 염전에 잔뜩 깔린 소금을 모아 야적장에 옮기는 일.
[당선소감] : 문윤정
꿋꿋하게 살아가며 치열하게 쓰겠습니다
겨울나무처럼 꿋꿋하게 살아가며, 치열하게 쓰겠습니다.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오전, 혹시나 하는 기대감에 휴대폰을 움켜쥐고 인도를 걸었습니다. 당선 통보를 받자,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운 좋게도 든든한 디딤돌을 밟고 서는 행운을 선사 받게 됐습니다. 우산을 때리는 빗방울도 축하 연주하듯 경쾌했습니다. 빗방울 탄주를 받으며 이렇게 ‘신출내기’가 탄생하는 것일까요.
직장 일과 두 아이의 육아를 병행하면서도, 지역 시민예술대학 문창반과 유튜브 강의, 다른 매체들을 통해 시조 공부를 해왔습니다.
읽고 쓰고 필사하고 사유하면서 시조에 대한 매력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부질없는 암중모색일 뿐이었습니다. 거듭거듭 좌절을 겪는 아픔을 이겨내야 했습니다.
간절하면 이루어지는 것일까요? 막연한 믿음에 매달리며, 정형이라는 틀 안에서 자유롭게 사유를 형상화해 낼 수 있도록 매진했습니다. 내공이 쌓일수록 시조의 완성도를 추구하게 되고 그 미학에 빠져들었습니다.
일상의 짐이 버거워 위축된 저에게 정신적 탈출구가 되어준 것이 바로 시조였습니다, 수십 번 퇴고 끝에 한 작품을 마주하면서, 그 희열이 바로 계속 쓸 수 있는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포기할 수 없을 만큼 시조에 대한 깊은 애착으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며 저 스스로 채찍질을 거듭하겠습니다.
아직은 시조시인으로 당당히 내세울 자신은 없지만, 새로운 시작이라는 각오와 함께 나만의 문체와 역량을 다지며 작품으로 세상과 공감대를 이뤄가겠습니다. 거듭 밝히지만, 겨울나무처럼 꿋꿋하게 살면서, 치열하게 쓰겠습니다.
언제나 시조에 시간을 빼앗긴 나머지 마음 한 자락 돌려 앉혀 놓고 사는 저를 그래도 늘 응원해 주는 사랑하는 가족들과 이 기쁨을 나누겠습니다. 부족한 작품을 챙겨주신 심사위원들과 경상일보 관계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약력 경기 평택 출생, 단국대 간호학과 졸업, 현재 중학교 보건교사로 재직
[심사평] : 유재영 시조시인
부정확한 어휘의 바다 속 반짝이는 천일염 작품
예심을 거쳐 올라온 것은 단 8명의 작품 25편, 대다수가 관념어와 상투어 남발로 현대시조라고 볼 수 없을 만큼 그 수준이 떨어졌다.
가령 ‘몹쓸 봄 마지막 품사위 체리불러썸 퀵퀵’ ‘오래된 끽연의 기억이 비를 받아먹고 있다’ ‘마음 속 마지막까지 깐깐하게 달려가요’ ‘잡어로 잡혀온 삶이 측은지심 같더란다’ ‘속내 다 까발리는 세상이 흔했던가’ ‘당신의/ 휘어진 탄성으로/ 한 뼘 더 커집니다’ 같은 표현들이 과연 신춘문예 응모작품 수준인가 의아심이 들 정도였다. 예선 탈락자 작품을 모두 뒤져보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나에게는 그럴만한 권한이 없었다. 시는 관념어와 상투어와의 싸움이다. 이것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시인으로서 가능성은 접어야 한다.
당선작 선정 포기 직전 ‘채렴을 읽다’와 같은 원숙한 작품을 발견한 것은 다행이었다. 당선작 ‘채렴을 읽다’는 부정확한 어휘들이 허우적거리는 바다에서 건져 올린 ‘천일염처럼 반짝이는 존재’였다. 네 수 모두 안정감 있고 구성면에서도 기승전결이 분명했다. 시가 보편적 정서에 접근한다는 것은 많은 독서와 창작을 겸하지 않고는 결코 이를 수 없는 지점이다. 응모자의 다른 작품 ‘사유를 탁본하다’도 수준작, 그러나 ‘입가에 미소 그윽하다’와 같은 상투어들이 눈에 거슬렸다. 잘 다져진 기본기를 바탕으로 정밀성과 섬세함을 더한다면 당선자에 거는 기대가 결코 어긋나지 않으리라.
신춘문예 당선이라는 명분에 앞서 내가 아니면 표현할 수 없다는 현대시조로서의 독특한 개성을 지닐 때만이 당선자에 대한 시조단의 주목은 시작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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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일보 가작 당선작]
민달팽이 길
천윤우
몸으로 그려 놓은 쓸쓸한 생의 궤적
옷 한 벌 입지 않은
느릿한 육필 같은,
일평생
길을 만드는 수행 같은 저 의식
세상과 소통하는 축축한 하루하루
살아서 가는 길이
마침내 유물 같은
마침표
찍는 날까지 그려갔을 저 동선
바닥이 허공 같은 불안한 걸음이라
죽은 뒤 남은 흔적
묵묵히 바라보니
외로운
유고집 같은 얇디얇은 길이다
[당선 소감] : 천윤우
"멈추지 않아 닿을 수 있었다"
"가지 않은 길" 떠올려 본다. 가난을 핑계로 놓아버린 화가의 길 어른거린다. 이제 시조로 뜻 깊은 그림 그리고 싶다.
출근길에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했다. 그 때 입원한 60일이 시조와 현대시를 만나는 계기가 됐다. 그 뒤 문학에 대한 부족한 부분 채우려 2009년 만학에 도전하여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 학사과정을 수료했다. 한번 타오른 시의 불꽃 꺼지지 않아 '시인의 바다' 닿으려 달린지 17년! 바라던 시조시인의 길에 설 수 있었다.
배터리를 교체하러 가는 길에 반가운 전화를 받았다. 신춘문예 시조 부문에 선정됐다는 한라일보 담당자님의 전화였다. 비로소 선비로 입문한 것 같아 기뻤다. 돌아보면 우리 고유 시조가 그랬다. 3장 6구의 단단한 율격에 철학적 사유를 담은 글에는 고아한 향기가 난다. 숨을 불어넣은 오랜 문장에는 역사가 꿈틀거린다. 행간은 산을 품은 운무 같아서 읊조릴수록 깊어진다. 시가 산으로 오르는 것이라면, 시조는 마음까지 내려놓아야 닿는 해탈에 가깝다.
'민달팽이 길'에 따뜻하게 손 내밀어주신 심사위원 김정숙, 김연미, 고정국, 한희정 시조시인님께 감사의 마음 올린다. 새삼 돌아보니 지난 글이 부끄러워진다. '다시 시작하라, 정진하라'는 말씀으로 겸허히 받아 안는다. 한국방송통신대 국어국문학과 손종흠 교수님, 2009학번 학우 및 선·후배님. 모든 지인들께 감사의 마음 전한다.
긴 세월 묵묵히 동행해준 아내와 아들, 딸에게 못한 말, 이제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약력 1960년 울산 출생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심사평] : 고정국, 한희정 시조시인
생명력과 역동성 갖춰 한층 진화하길
예심을 거쳐 본심 탁자에 올라온 작품에는 저마다 아름다운 시어들로 반짝이고 있었다. 그러나 아름답게 보려면 한 번만 봐야 하고, 제대로 보려면 세 번을 봐야 한다는 마음가짐으로 본심에 임했다.
정형률을 기본으로 하는 시조장르 특성상, 제목과 초장 중장 종장의 유기적 관계 그리고 시력, 어휘력, 사고력이 균형을 이루면서 전개시키는 신인들의 필력을 가늠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제목을 설명하는 낱말풀이 식 작품들이 있었다. 더구나 '나열과 전개'의 인식 부재는 등단 작가 작품에서도 곧잘 지적되곤 하는 문제가 아니던가.
결국 민달팽이가 그려놓은 실크로드를 "마침표/찍는 날까지 그려갔을 저 동선" 또는 "외로운/유고집 같은 얇디얇은 길"이라는 천윤우의 '민달팽이 길'에 심사위원의 눈길이 머물렀다. 그런데, 이 작품 초중종장에 "그려 놓은 쓸쓸한" "입지 않은 느릿한" 등등 시어선택의 안일함과 형용사 남발로 인해 가작에 머물 수밖에 없었음을 밝힌다. 정형의 틀에다 글자 수를 맞췄다 해서 다 시조는 아니다. 시조라는 어휘에는, 이 시대 사람들 삶의 애환이나 에피소드 그리고, 장르 특유의 음악성이 스며있기 마련이다. 결국 서정과 서사의 알맞은 조화는 물론, 생명력과 역동성 그리고 새로운 시대인식이 갖춰져 있을 때 현대시조가 하향적 평준화 수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시조시인의 양적 증가에 연연하지 말고, 한층 진화된 작품들이 탄생했을 때 시조의 자리매김이 한 층 뚜렷해질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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