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창포에서 보낸 1박 2일 / 백봉기
무창포 겨울바다는 생각보다 조용했다. 여름에 보았던 그 많은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혼자 걸어도 좋고, 쑥스러워서 손 한 번 못 잡아 본 아내와 손을 잡고 걸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분위기였다. 그래서 나는 겨울바다가 좋다. 무창포는 대천근처에 있는 조그만 해수욕장인데 현대판 모세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신비의 바닷길이 열리는 곳이다. 무창포해변에서 석대도까지 1.5km의 바다가 갈라져 육지가 되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날 때는 전국에서 수많은 인파가 몰려와 바다의 신비를 체험하고 간다.
우리가 여장을 푼 곳은 ‘여행스케치’라는 펜션, 무창포도 몰라보게 변했다. 텐트를 들고 찾아왔던 젊은 시절의 무창포가 아니었다. 위락시설과 음식점, 현대식으로 지은 호텔과 콘도식 민박들, 예쁜 이름을 가진 펜션들이 많았다. ‘노을이있는풍경’ ‘솔밭해안가’ ‘바다와어부’ ‘솔잎새’ ‘노을빛바다’ ‘시간여행’ ‘바람막이’ ‘바닷길’ 등 소나무 숲과 바다에 어울리는 이름들은 모두 동원된 것 같았다.
함께 간 일행은 고등학교 때 같은 반 친구들이다. 항상 6쌍의 부부가 1년에 두 세 번씩 여행을 간다. 몇 년 전에는 싱가포르에도 다녀왔다. 벌써 20년이 넘었으니 집안에 숟가락 숫자까지 알 정도다. 만날 때가 되면 남자들보다 여자들이 더 좋아하고 여행갈 장소도 여자들이 결정할 정도로 파워가 세졌다. 한때는 음식을 가지고 가서 밤새도록 구워먹고 끓여먹고, 먹고 남은 것으로 새벽에 속 풀이까지 했는데, 요즘엔 귀찮다고 사서 먹으니 재미가 덜하다. 음식 만들 것 좀 가지고 가자고 하면 남자들이 알아서 해 먹으라고 배짱을 부리니 어쩔 수 없다. 여행은 뭐니뭐니해도 먹을 것이 푸짐하고 직접 해먹어야 재미가 있는데, 다들 기가 죽어서 여자들의 큰 소리만 들어도 경기가 나는 게 내 친구들이다.
그 중 한 친구는 초등학교 교감인데 부인이 4살 연상이다. 고창에서 근무할 때 하숙집 딸과 눈이 맞아 결혼을 했는데 틀림없는 누나와 동생, 어떤 때는 엄마와 아들 같이 보일 때도 있다. 음식을 먹을 때는 반찬까지 집어주고 잘 때는 우리들 방으로 와서 이불을 덮어주고 갈 때도 있다.
여장을 풀자마자 우리는 바다 쪽으로 갔다. 언제나 그렇듯 바다는 가슴까지 후련하게 만들 주어서 좋다. 잔잔한 바람과 함께 들려오는 파도소리, 바닷물이 머물다 간 물기 젖은 백사장, 눈앞에 펼쳐지는 섬 섬 섬들, 어느새 나는 한 눈에 들어오는 무창포바다를 온몸으로 껴안고 있었다. 이 맛에 겨울바다를 찾는다. 우리는 제각기 다른 생각으로 두세 명씩 짝을 지어 백사장을 걸었다. 그러는 중에 어느덧 해가 서쪽으로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서해낙조를 보지 않을 수 없어 방파제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낙조는 보는 곳에 따라 느낌이 다르다. 석대도 끝자락으로 지는 낙조를 보고 수산물시장에서 생선회를 먹고 돌아올 생각이었다. 그러나 해는 잠시 구름사이로 영화에서 보았던 신비한 장면을 보여줬을 뿐 실망만 안겨 준 채 구름 속으로 숨어버렸다. 낙조하면 선유도낙조를 빼놓을 수 없다. 무창포에서도 보이는 선유도, 선유낙조는 고군산 8경중 하나로 특히 선유도에서 구름다리를 건너 장자도 돌 바위에서 바라보는 낙조는 극치 중의 극치다. 장자도는 해질 무렵이 아니어도 내가 본 섬 중에서 바다풍경이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 해가 질 때는 바다가 온통 붉은 빛으로 변한다. 그 노을빛 속으로 고기잡이 나갔던 어선들이 돌아오면 그것은 한 폭의 그림이 되어 자신도 모르게 탄성이 튀어 나온다. “야~ 바다야! 해야!” 더 이상 다른 말은 필요 없다. 어떤 사람들은 감정을 누르지 못하여 펄떡펄떡 뛰기도 하고, 그 장면을 놓치지 않으려는 카메라맨들은 연거푸 셔터를 눌러댄다. 이 장면 하나로 여행비용을 뺐다는 사람들도 있다. 다음에는 이 친구들을 장자도로 데리고 가야겠다고 마음먹고 수산물시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누구나 몇 개의 모임이 있겠지만 우리들의 이 모임은 특별한 점이 있다. 미션스쿨에 다녔기 때문에 모두 교회에 다녔고, 교회에서 학생회장을 맡았던 친구들이다. 우리들은 일요일이나 방학 때면 고아원에 가서 봉사활동을 했고, 친구교회의 행사가 있을 때는 함께 참여하면서 신앙심을 북돋아 주던 친구들이었다. 결국 나는 목사가 되려고 신학대학에 입학했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방인으로 남았지만 다른 친구들은 지금도 모범적인 종교생활을 하고 있다. 그런 관계로 이 모임에서는 술 먹고 노는 것보다는 대화하는 시간이 많다. 날이 샐 때까지 여자는 여자끼리, 남자는 남자끼리 이야기를 한다. 여자들 방에서는 잇달아 깔깔대는 소리가 들리고 웃음을 참다못해 벽을 치는 사람도 있다. 대체 웃기는 이야기가 뭐냐고 물어봤더니 그냥 웃기는 얘기하면서 웃는다는 것이다. 이것만 봐도 여자들은 단순하고 스트레스를 빨리 풀 수 있어서 오래 사는 것 같다. 반면에 남자들은 크게 웃을 일은 없다. 교수에다 방송국PD, 교장, 사업가, 공무원 등 각기 다른 직업을 가진 친구들이라 주로 직장과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들을 많이 한다. 이번에는 대전에 사는 친구가 본인이 직접 펴낸 ‘한밭의 문화재’라는 870쪽짜리 책을 들고 와서 문화재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했다. 자정이 넘도록 대화는 계속됐고 그러는 사이 문밖에서는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아침에 누군가가 “눈 내린다!”는 소리를 질러 모두 다 잠에서 깼다. 눈 내리는 겨울바다는 또 다른 맛이 있었다. 우리는 무창포를 떠나기 전 눈 내리는 겨울바다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고 다음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금슬 좋고 아름답게 늙어가는 친구들이다. 한사코 변함없는 좋은 친구들이다. 무창포에서의 1박 2일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오래오래 기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