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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익산향토문화연구회 원문보기 글쓴이: 이귀희
2010년 7월 10일 토요일 맑음 오후 늦게 비옴 제130차 익산의 명당지 답사
익산의 명당지 : 성모암 → 점심(순두부집) → 세종대왕 후궁의 무덤 → 남궁찬묘석상 → 간제전선생 무덤 → 심연의 무덤 → 여산송씨의 무덤 → 이병기선생의 무덤 → 소세양의 무덤.
오늘 참석하신 회원님 : 강창경, 김광태고문님, 김소현, 김영자, 김이화, 김장환, 배홍선, 안장숙, 유칠선, 이귀희, 이계숙, 이윤옥, 이은영, 이종범, 이택회회장님, 임홍락, 채곤석, 최옥님, 최옥환, 최윤숙, 한동욱, 회장님 친구 분 강영록, 22명과 점심 식사에 모현성당 신부님과 소병기의원님, 저녁식사에는 박영애회원이 참석하였습니다. 무더운 날씨에 참여하신 회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오늘 답사는 오후5시20분에 뜻 있고 보람되게 잘 마무리 지었다. 우리 회원님들의 열정과 단합에 하늘도 감동하셔 모든 답사를 정리하고 내려 올 즘 촉촉한 빗방울이 회원들의 더위를 식혀준다. 무더위 속에서도 정말 멋진 하루였다. 우리 회원님들의 땀 흘린 만큼 보양식으로 저녁을 나누고 헤어졌다. 모두모두 행복하세요. 파이팅!
천혜의 명당터 김제 성모암
성모암(聖母庵)의 유래
전북 김제시 만경면 유앙산(維仰山)에 자리한 한국불교 조계종 사찰. 유명한 성모암을 직접 만나볼 수 있다. 불교계의 거목으로서 전북지역의 고승이던 진묵대사(1562~1633 명종 17년) 어머니의 묘소가 자리한 이곳은 불심과 효심이 다르지 않다고 여긴 진묵대사께서 어머님이 돌아가시자 무자손천년향화지지(無子孫 千年香火之地)-자손이 없어도 제사 지내줄 사람이 1000년동안 이어지는 명당에 어머님의 ‘성모’를 모셨던 곳이다. 대웅전 왼쪽의 구릉에는 진묵대사 어머니의 무덤이 정성스럽게 자리하고 있다. 성모암을 일으키고 초라했던 사찰에서 유명사찰로 만들어온 회주 영월 큰스님은 지난 8년간 성불하며 불자들에게 부처님의 뜻을 전하는데 힘써왔다. “넘치지도 모자르지도 않는 중도(中道)가 가장 어렵다. 모자라면 갈증이 나고 넘치면 욕심이 나기 마련이다. 불자들도 그러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한다. 게으름과 일탈이 수행처럼 오도해서는 아니되고 그 목적과 수단으로 변질되어서는 안된다. 세상을 살며 욕심없이 그 흐름에 따라 살아가는 것. 즉 마음을 비우고 자기의 그릇에 맞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조선 명종 임술년(任戌年, 서기 1562년)에 태어나신 진묵대사께서 '아(我)동방(東邦) 소(小)석가모니라 이르시다 ' 장하신 도덕 진세에 높으신 성인이시다. 탄생하신 곳은 불거촌(전북 김제시 만경면 화포리)으로 대사의 어머니 묘소가 이곳 유앙산에 있으며 '무자손천년향화지지(無子孫千年香火之地)'인 이곳은 진묵대사의 소점지라 일컬어 우리나라 민속제전처(民俗祭典處)라 칭송하여 내려오는 곳이라 한다. 진묵대사는 그가 출가하면 대를 이을 손이 끊기어, 그의 어머니 묘에 성묘할 사람이 없을 것을 예견하여 풍수설에서 말하는 無子孫千年香火之地(무자손천년향화지지 = 자손이 없어도 제사를 지내줄 사람이 천년 동안 이어지는 명당 유앙산)에 안장 하였다.이 무덤에 고사를 드리면 병이 낫고 부자가 된다고 하여 400여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잘 보존 되어 내려오고 있으며 , 오늘날에도 많은 참배객이 줄을 잇는다. 성모암에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극락보전, 산신각, 고시례전, 나한전, 종각 등의 건물이 조성되어 있다.
조선 중기의 고승 진묵대사의 이야기
조선 중기의 高僧(고승) 震默大師(진묵대사 : 1562~1633, 명종 17~인조 11년). 전라도 만경현 불거촌 출신으로, 태어난 뒤 3년 동안 초목이 말라 시들었고, 비린내가 나는 음식과 마늘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성품이 지혜롭고 자비로워서 사람들이 "불거촌에 부처님 났다." 고 하였다고 전한다. 7세에 출가하여 전주 鳳棲寺(봉서사)에서 불경을 읽었는데,한 번 읽으면 곧 암송하고 내용을 통달 하였으므로 따로 스승을 두지 않았다. 봉서사 주지는 어린 진묵에게 조석으로 신중단에 燒香禮拜(소향예배)하는 소임을 맡겼다.어느 날 신중들이 그 주지승에게 현몽하여 이르기를 우리 소신들이 어찌 감히 佛(불)의 예를 받겠는가,원컨대, 다시는 아침저녁으로 소향하게 하지 말라고 하였다 한다.그는 일생을 통하여 수많은 신이(神異)를 남겼지만, 그 생애는 연대순으로 정리되어 있지 않다. 다만, 조선 후기의 고승 초의(草衣)가 지은 <진묵조사유적고 震黙祖師遺蹟攷> 에는18가지 이적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 대표적인 것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사미 시절 창원의 마상포(馬上浦)를 지나갈 때 한 동녀(童女)가 사랑을 느꼈으나 따를 수 없었으므로, 그녀는 죽어서 남자가 된 뒤 다시 전주 대원사(大元寺)에서 만나 기춘(奇春)이라는 시동이 되었다. 대사가 그를 각별히 사랑하였는데 이것을 대중들이 비난하였다. 대사는 그것이 이락삼매행(離樂三昧行 : 일체의 즐거움에 대한 애착을 떠난 삼매행)임을 보여주기 위하여 기춘을 시켜 국수로 대중공양을 하겠다는 것을 알리게 하였다. 대사는 대중에게 바루를 펴게 한 뒤 기춘으로 하여금 바늘 한 개 씩을 각자의 바루 속에 넣어 주게 하니, 대사의 바루 속 바늘은 국수로 변하여 바루를 가득 채웠으나, 다른 승려들의 바루에는 여전히 한 개의 바늘만이 있었다. 늙은 어머니를 왜막촌(倭幕村)에서 봉양하고 있을 때, 여름 날 모기 때문에 고생하는 것을 보고 산신령을 불러 모기를 쫓게 한 뒤로는 이 촌락에 영영 모기가 없어졌으며 어머니가 죽자 제문을 지어 위령하였다.
곡차라고 하면 마시고 술이라고 하면 마시지 않는 것이 계행(戒行)이었는데, 어느 날 한 중이 술을 거르고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이 무엇이냐?"고 세 차례나 물었으나, 중이 대사를 시험하기 위하여 모두 술이라고 대답하였으므로 금강역사(金剛力士)가 그 중을 타살하였다. 대사가 변산 월명암(月明庵)에 있을 때, 다른 승려들이 모두 출타한 뒤 홀로 <능엄경 能嚴經>을 읽다가 수능엄삼매(首能嚴三昧)에 들어, 문지방에 놓고 있던 손가락이 바람 때문에 열리고 닫히는 문에 부닥쳐피가 난 것을 잊은 채 며칠 밤을 보냈다. 월명암에 있을 때 불등(佛燈)이 매일 밤 일점 성광(星光)이 되어 멀리서 비치어 왔으므로 대사는 이것을 발견하고 목부암으로 옮겨가서 원등암(遠燈庵)이라 개칭하였다. 이곳은 원래 십육나한(十六羅漢)의 도량으로, 그들이 항상 대사를 시봉하는 마음에서 월명암으로 등광(燈光)을 비추었는데 그것은 대사의 뜻을 계발하기 위해서였다.
전주 부에 있는 한 흠포자(欠逋者 : 官物을 축낸 죄인)가 도망을 가려고 대사에게 인사를 하러 왔을 때, "도망가는 것이 어찌 남자의 할 짓인가? 그러지 말고 나에게 공양을 올려라."고 하였다. 그를 돌려보낸 다음 대사는 주장자를 가지고 나한당에 들어가 차례로 나한의 머리를 세 번씩 때리며 "관리 아무의 일을 잘 도와주라."고 하였다. 그 이튿날 밤에 나한이 그 관리의 꿈속에 나타나서, "네가 구하는 바가 있으면 직접 우리들에게 말할 것이지 어째서 대사에게 말하여 우리를 괴롭히느냐? 너의 소행을 보아서는 불고(不顧)하여도 가하나 대사의 명령이시니 좇지 않을 수 없다." 하고 그를 구해 주었다.
대사가 길을 가는데 소년들이 냇가에서 생선을 끓이고 있으므로 탄식하면서, "이 무고한 고기들이 화탕의 고생을 하는구나?"하니, 한 소년이 희롱하여 말하기를 "스님도 먹고 싶지 않은가?" 하였다. "나도 잘 먹는다." 하면서 그 고기를 몽땅 먹은 뒤 냇가에 가서 뒤를 보니 무수한 고기가 살아서 헤엄쳐 갔다.
대사가 하루는 시자를 시켜 봉서사 남쪽 부곡(婦谷)으로 소금을 가져다주라 하니, 시자가 누구에게 주느냐고 반문하자 가보면 알 것이라고 하였다. 시자가 가서 보니 사냥꾼 여러 사람이 노루 고기를 회쳐놓고 소금이 없어서 먹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소금을 받으며 "활인지불(活人之佛)이 골마다 있다 함은 이를 말한 것이다." 하였다.
열반하실 때가 되자 진묵스님은 제자들을 모아 놓고 "내가 몇월몇일에 열반에 들어야겠으니 준비를 하라"고 했습니다. 그때 나이 어린 사미승이 "스님!, 그 날 돌아가시면 안됩니다. 정초여서 어려운 일이 많이 있습니다"라고 얘기했습니다. 진묵 스님께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도 그럴 듯해서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사미승이 그 다음날 돌아가시라고 했습니다. 마침 그 날짜가 닥쳐오니 스님이 또 내일은 가야겠다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이번에도 그 날은 큰 49재가 들어왔는데 스님께서 그 날 돌아가시면 49재와 겹치게 되어 곤란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스님은 일리가 있으시다면서 "그러면 49재 지나고 가야겠구나"하고 말씀하셨는데 정말 그 날이 되자 진묵스님은 삭발 목욕 끝에 옷을 갈아입고, 지팡이를 짚고 대문 밖 개천가에 서서 시자에게 물속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를 가리키면서 "이것이 석가불의 그림자다."고 하니, 시자가 말하되 "저 것은 스님의 그림자가 아닙니까?" "너는 어찌 나의 가상만 알고 석가의 진신을 보지 못하는가?"라고 말씀하신 다음, 방에 들어가 가부좌를 맺고 제자들을 불러 "내가 곧 입적 할 테니 너희들이 질문할 것이 있으면 이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했다. 제자들이 묻기를 "스님은 누구의 법맥을 이어 받았습니까?"하니, 조금 있다가 "무엇을 따로 이을 것이 있겠는가." 제자들이 절하고 다시 청함에 부득이 말하기를 "비록 명리승이긴 하지만, 서산 스님의 법을 원사하였다"하고 조용히 열반하였으니, 1633년 10월 18일이었다.
세종대왕 후궁의 무덤
세종대왕의 제1후궁인 영빈 강씨
세종대왕의 제1후궁인 영빈 강씨는 진주 강씨로 알려져 있다. 1994년에 전북 익산시 삼기면 기산리에 제전(祭典)이라도 마련하고자 유택을 건조하였다. 영빈은 세종대왕의 서장자 화의군 이영을 낳았다. 진주 강씨와 청송 심씨의 일부 관련 글에서 강석덕이 심온의 사위이고(사실) 영빈의 아버지(설) 운운하는 글이 있지만 정작 전주 이씨 화의군파에는 증거 될 만한 확실한 기록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세종대왕(世宗大王 1397-1450) 세종대왕은 1명의 정비와 9명의 후궁에게서 19남 4녀를 얻었다. 왕비 : 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 沈氏1395~1446) 세종대왕의 후궁은 영빈 강씨(令嬪 姜氏) - 강석덕의 딸, 강희안, 강희맹의 누이. 화의군 낳았으며 충경사에 봉안되어 있다(화의군 묘아래) 신빈 김씨(愼嬪 金氏) - 내자시(內資시)의 여종. 세종이 즉위하던 해에 궁녀로 입궁하게 되었다 혜빈 양씨(惠嬪 楊氏) - 단종이 왕위에 오르자 내명부의 어른으로서 국상중에 단종의 가례를 명령하여 성사, 수양대군(세조)과 대립하며 단종의 왕위를 지키기 위하여 안간힘. 이 때문에 세조의 미움을 받아 단종이 왕위에서 쫒겨 난 뒤인 1455년 6월. 가산을 빼앗기고 유배. 그해 11월에 교수형으로 사망. 장의궁주 귀인 박씨(莊懿宮主 朴氏) - 본관은 밀양이고 박강생의 딸. 명의궁주 귀인 최씨(明懿宮主 崔氏) - 최사의의 딸. 숙원 이씨(淑媛 李氏) - 정안옹주를 낳은 기록 외엔 남아 있지 않다. 상침 송씨(尙寢 宋氏) - 궁인 출신.(상침은 상궁의 직급 중 하나) 혜순궁주 이씨 - 이운로의 둘째딸. 자식을 명나라 공녀로 바치지 않으려고 일찍 시집을 갔었으나 얼마 안되어 남편이 죽고 과부가 됨. 이운로의 딸이 미인이란 소리를 들은 태종이 세종에게 후궁으로 삼으라고 해서 효자인 세종이 부왕 태종의 명에 따라 후궁으로 삼았다. 사기 차씨 - 궁관출신
남궁찬묘석상[南宮璨墓石像] 유형문화재 제176호
전북 익산시 성당면 갈산리 산 70번지 조선 전기의 문신인 남궁찬 선생의 묘로서 남쪽과 북쪽에 각각 자리하고 있는2기의 문신석상이다. 비교적 머리가 크고 눈은 튀어나왔으며 코는 두툼하고 턱을 내밀고 있으며 옷은 도포를 걸친 모습으로 선을 얇게 조각하였고 양손은 소맷자락 속에 넣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남궁찬은 성종 8년(1477)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였고, 성종 20년(1489) 문과에 급제하여, 『성종실록』편찬에도 참여하였으며 제주목사를 지내기도 했다. 그러나 중종 즉위 후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자 상소문을 올리고 비판하여 용안 호항(壺項)에 유배되었다. 후에 관직을 받았으나 거절하고 은거하다가 죽은 후 이곳에 묻혔다. 남궁찬묘석상의 특징은 일련의 다른 석상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이국적인 모습의 석상이라는 것이다. 속전에 의하면 중국에서 가져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장승이나 돌하르방 등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도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靑松心公 第二世租 심연의 墓
익산시 함열읍 남당리 미륵산 줄기에 자리하고 있다. 본래는 경북 청송에 있던 묘를 효성이 지극한 심연의 아들 심용이 낭산 이곳이 명당이라는 말을 듣고 청송과 거리가 먼 여기에 묘를 썼다. 그 후로 아들 심덕부와 손자 심온 증손 심회 3대가 정승을 지냈으며, 증손녀인 소헌황후를 배출하였다. 청송심씨는 조선조 500년 동안 정승13명, 왕비3명, 부마4명 등을 배출하여 정계를 주름잡았다.
齋室大門과 齋室
여산송씨 시묘
익산시 여산면 호산리에 자리한 여산송씨 문중의 영호제. 울창한 송림과 저수지가 있고, 시원한 계곡이 있다. 이곳은 8대 명당중의 하나라고 한다. 태조산인 대둔산에서 내려온 용이 주산인 천호산을 만들고 그 중심 맥으로 내려온 용이 자리한다고 한다.
여산송씨(礪山宋氏)는 고려 때 진사인 휘(諱) 송유익(宋惟翊)을 시조(始祖)로하며, 휘(諱) 천익(千翊)의 후손에서 은진군(恩津君) 휘(諱) 대원(大原)을 시조로하는 은진송씨(恩津宋氏)가 있고, 그외 서산(瑞山), 진천(鎭川), 야성(冶城), 신평(新平) 등 10여본이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모두 여산(礪山), 은진(恩津), 진천(鎭川)송씨에서 분리되었다고 한다, 우리 여산송씨(礪山宋氏)의 시조(始祖) 휘(諱) 유익(惟翊)은 고려조의 진사(進士)로 상계와 자세한 세적은 전하지 않으며, 벼슬하기를 꺼려해서 고향에 은거했다고 한다, 그러나 공의아들 휘(諱) 숙문(淑文)이 정당문학 (政堂文學)에 오름으로써 공에게 추영(追榮)의 은전(恩典)이 내려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에 추증(追增)되었다, 본관은 공의 증손인 정렬공(貞烈公) 휘(諱) 송례(松禮)가 여량부원군(礪良府院君 : 여량은 지금의 여산)에 봉해짐으로써 3대(代)를 은청광록대부(銀靑光綠大夫)로 추봉(追封)하였다, 그러므로 휘(諱) 유익(惟翊)을 시조로하여 지금에 이르기까지 명문거족(名門巨族)으로 중흥하였으며, 여산송씨는 단종의 비인 정순왕후와 임진왜란당시동래부사로 순절한 송상현, 조선 제갈량이라고 불릴 만큼 학문과 지혜에 뛰어나 이율곡에 버금가는 동시대 인물 구봉(龜峰) 송익필 등을 배출했다.
이병기선생의 무덤
전북 익산시 여산면 원수리에 자리하고 있다. 선생은 이곳에서 태어나고 이곳에서 숨을 거두었다. 국문학자이자 시조작가인 가람 이병기는 시조의 현대적 혁신과 부활을 위한 신운동을 전개하고 고전의 발굴·연구에 힘쓰는 한편 청소년 교육을 통해 민족의 말과 글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로 인해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기도 하였다. 1945년 이후 전북대학교에서 국문학을 교수하였으며, 저서에 《역대시조선》《가람문선》《국문학전사》 등이 있다. 무덤은 생가 뒤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허나 자손들이 무덤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보기에 흉하게 방치되어 있어 마음이 아프다.
소세양신도비[蘇世讓神道碑] 유형문화재 제159호
전북 익산시 왕궁면 용화리 산33번지 신도비란 임금이나 고관의 평생업적을 기록하여 그의 무덤 남동쪽에 세워두는 것으로, 이 비는 조선시대 전기의 문신 소세양(1486∼1562) 선생의 행적을 적고 있다. 소세양은 연산군 10년(1504)에 진사가 되고, 중종 4년(1509)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직제학·승정원·동부승지 등을 지냈으며, 인종 때 윤임 일파의 탄핵으로 사직하였다가 명종이 즉위한후 다시 임용되어 좌찬성에까지 올랐다. 명종 17년(1562)에 77세의 나이로 별세한 뒤 익산의 화암서원(華岩書院)에 배향(配享)되었고, 그의 문집으로는 양곡집(陽谷集)이 전해지고 있다.
비는 낮은 사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올린 모습으로, 받침돌은 윗면에 연꽃무늬를 두어 장식하였다. 건립년대(建立年代)는 비문의 말미에 "가정사십삼년갑자유월일 (嘉靖四十三年甲子六月日)"이라 되어 있으므로 조선 명종(明宗) 19년(1564)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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