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Touching, Encounter and Group Psychotherapy : Personal Memories of an Old Therapist
「터치, 만남과 집단심리치료: 한 노련한 치료사의 개인적 회고」
View of Touching, Encounter & Group Psychotherapy: (psychodramajournal.com)
: 클릭하셔서 논문 보실 수 있습니다.
이 논문을 썼던 레이 나르는
단순히 “사이코드라마 기법” 자체에 관심이 큰 연구자라기보다는,
치료적 관계 속에서
실제 만남과 접촉을 어떻게 치료적으로 활용할 것인가에 관심이 컸던 임상가이셨던 것 같다.
즉, 그는 사이코드라마를 하나의 “도구”로만 보지 않고 다른 치료와 통합했던 것이다.
그가 1977년에 썼던 논문
A Psychodramatic Intervention Within a T.A. Framework in Individual and Group Psychotherapy
논문 제목 (개인 및 집단 심리치료에서 TA 교류분석 : Transactional Analysis
이론의 틀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이코드라마적 개입)
논문에서 나르는 새로운 치료법들이 많이 등장하지만
임상가들이 기법 자체에만 지나치게 집중하고 이론적 기반을 소홀히 하는 경향을 지적한다.
또한 그는 성적 학대 피해자를 대상으로 사이코드라마를 적용하면서
치료 과정에서의 위험을 줄이면서 긍정적인 치료 결과를 얻는 방법을 제시하기도 한다.
------------------------------------------------------------------------------------------------------------------------
: 레이 나르가 보는 터치의 관점
제가 치료자로 일하기 시작했던 초기에는 치료 중 환자와 신체적으로 접촉하는 것을 매우 엄격하게 생각했습니다.
환자와 악수하는 것조차 치료자에게는 적절하지 않은 행동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심리치료를 바라보는 분위기와 생각들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나 역시 만남 집단에 직접 집단원으로 참여하면서 새로운 경험을 했고,
치료자로서 배우기 위해서도 이러한 집단에 참여했습니다.
* (만남 집단 : 1960~70년대에 크게 유행했던 인간적인 만남의 집단 경험)
그러면서 저는 사람의 감정과 인간적인 만남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인본주의 심리학 (인간 중심) 의 생각들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환자와의 신체적 접촉에 대해서도 예전과는 다르게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치료 상황에서 적절한 신체적 접촉이 언제나 피해야 할 것만은 아닐 수 있다고 느끼게 된 것입니다.
사실 저는 지중해 문화권에서 자랐습니다. (그리스의 테살로니카)
그곳에서는 사람들 사이의 신체적 접촉이 특별하거나 낯선 일이 아니라 일상적인 의사소통의 일부였습니다.
그래서 터치와 같은 보다 자연스럽고 인간적인 방식으로 사람과 소통하는 태도로 다시 돌아가는 것은
저에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
< 터치에 관한 설문조사 >
: 그래서 나르는 점차 터치를 무조건 금지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게 됨
환자의 상태와 관계, 상황에 따라 진심 어린 터치가 위로나 지지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게 됨
또한 이 논문을 쓰면서 나르는 설문 조사를 하기도 했는데,
(최소 6개월 전에 치료를 종결했지만 1년을 넘기지는 않은 사람들,
그리고 적어도 1년 이상 치료를 받았던 개인 환자 23명에게 설문지를 우편으로 보냄)
조사에서는 대부분의 내담자가 위기와 절망의 순간 치료자의 터치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답했습니다.
그러나 실제 치료에서는 치료자의 태도와 편안함에 따라 같은 터치가 도움이 되거나
오히려 관계를 불편하게 만들 수 있었다고 답하기도 했습니다.
< 터치에 관한 지침 >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오랜 시간 동안 내가 경험하고 배운 것들을 바탕으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원칙을 정리하게 되었다.
1. 지지와 애정을 표현하는 가벼운 신체적 접촉은 도움이 될 수 있다.
누군가를 지지하거나 따뜻한 마음을 표현하는 신체적 몸짓은 바람직하며, 필요하다면 자연스럽게 사용될 수 있다.
이런 표현 역시 사람 사이에서 중요한 의사소통의 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2. 그러나 신체적 접촉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어야 한다.
지나치거나 광범위한 신체 접촉은 쉽게 성적인 의미를 띨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상대방을 지지하거나 돌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접촉하는 사람이 자신의 성적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사용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치료자가 성적인 의미를 가진 신체적 접촉을 하는 것은 명백히 비윤리적인 행동이다.
3. 터치는 진심에서 나와야 한다.
신체적 접촉뿐 아니라 말로 하는 지지와 애정 표현도, 정말로 그렇게 느낄 때 사용해야 한다.
습관처럼 형식적으로 하거나, 기계적으로 하거나,
상대방을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게 하려는 목적으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4. 치료자 자신이 터치에 편안함을 느껴야 한다.
치료자가 신체적 접촉을 불편하게 느끼면 그 불편함은 상대방에게도 전달된다.
그렇게 되면 원래 위로와 지지를 위해 한 터치가 의미를 잃을 수 있고, 오히려 상대방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줄 수도 있다.
5. 치료자가 하는 터치는 신중하고 절제되어야 한다.
환자에게 치료자는 매우 중요한 존재가 되기 때문에,
치료자가 직접 지지나 애정을 신체적으로 표현할 때는 지나치게 자주 사용하지 않아야 한다.
특히 집단에서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다른 집단원들이 지지와 애정을 표현할 수 있고
실제로 그렇게 하려 한다면, 치료자가 먼저 나서서 그 역할을 대신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나는, 아마도 내가 사람들과 함께 일하면서 배운 것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을 이야기하고 싶다.
아마 다른 치료자들도 비슷한 경험을 했을 것이다.
두 사람이 진심으로 만나는 순간, 잠시 같은 현실을 함께 경험하고 나누는 순간에 생겨나는 어떤 것이다.
그것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공감하고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이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서로에게 공감하는 경험에 가깝다. (Rogers, 1961).
어쩌면 이것이 모레노가 말한 텔레 (tele)
즉, 두 사람 사이에서 서로가 서로를 진실하게 느끼고 연결되는 경험을 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 이어지는 크리스틴의 이야기는 말로 명확하게 정의하기는 어려운 바로 이러한 경험을 가장 잘 보여준다.
CHRISTINE’S LAST GIFT
크리스틴의 마지막 선물
내가 크리스틴을 만났을 때 나는 40대 중반이었다.
이제 나는 87세를 바라보고 있지만,
41년 전의 일이었던 그녀에 대한 기억은 지금도 그때만큼이나 생생하다.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진정으로 만날 때,
그 만남에서 생겨나는 풍요로움은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만 흐르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흘러간다.
그래서 이제 크리스틴의 이야기를 하려 한다.
나는 피츠버그대학교에서 내가 가르치던 성격평가 대학원 과정 수업에서 크리스틴을 처음 만났다.
지금도 나는 금발에 파란 눈,
그리고 주근깨가 있는 그녀가 맨 앞줄에 앉아 내가 하는 말을 열심히 듣고 있던 모습을 떠올릴 수 있다.
그녀는 매우 영리했다.
그리고 종종 아주 유쾌하고 좋은 방식으로 나에게 질문을 던지거나 내 생각에 도전하곤 했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그녀의 질문과 도전을 기대했고, 그녀의 뛰어난 유머 감각도 좋아했다.
수업이 끝날 무렵 크리스틴은 나를 찾아와 자신을 환자로 받아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시간강사로서 한 과목만 가르치고 있었고,
학과장의 허락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기꺼이 “그래요” 라고 대답했다.
크리스틴에게는 심리적인 문제가 없었다.
그녀는 정신병적 상태도 아니었고, 우울증도 없었으며, 강박장애도 없었다.
성격장애나 인격장애도 없었다.
또한 그녀는 따뜻하고 사랑이 넘치는 가정에서 자랐다.
하지만 크리스틴은 죽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드물지만 치명적인 근골격계 질환을 앓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평범한 삶을 살 수 없다는 사실과 자신의 죽음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받아들이지 못했다.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일들을 끝내 이루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녀는 죽음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시작하지 못한 적은 없었다.
그녀는 어린이 책을 쓰고 싶어 했다.
장애인을 위한 옹호자가 되고 싶어 했다.
그러나 자신이 시작한 일들을 끝내 완성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마다
그녀는 몹시 분노했다.
크리스틴은 죽음이 자신에게 허락한 시간의 한계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거의 2년 동안 우리는 일주일에 한 번, 그리고 종종 두 번씩 만났다.
우리는 이야기를 나누고, 삶에 대해 생각하고 토론했으며, 때로는 논쟁하고, 함께 웃고, 때로는 함께 울었다.
한 번은 내가 매우 화가 난 일이 있었다.
어느 날 크리스틴은 눈에 눈물이 고인 채 치료 시간에 왔다.
그리고 한참 뒤, 결국 그녀는 울먹이며 말했다.
자신이 한 고급 레스토랑에서 서비스를 거부당했는데, 그것은 분명 자신의 외모 때문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나는 그녀의 말이 맞다고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크리스틴의 얼굴은 부드럽고 예뻤지만, 그녀의 몸은 기형으로 변형되어 있었다.
그녀의 질환으로 나타난 증상 가운데 하나는 심한 척추측만증이었고,
그 때문에 그녀는 특이한 걸음걸이를 가지고 있었다.
나는 즉시 분노했다.
그리고 크리스틴이 만류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레스토랑으로 가서 점심을 먹었다.
나는 웨이터와 식당 지배인의 얼굴에서 약간 불쾌해하는 표정을 발견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종종 생각했다.
그때 내가 크리스틴의 고통과 분노, 그리고 거절당했다는 감정을 충분히 다루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도와주었어야 했을까 ?
당시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그런 생각이 우스꽝스럽게 느껴진다.
크리스틴은 죽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필요했던 것은,
때로는 적대적이고 때로는 자신을 거부하는 사회를 상대로 단 한 번이라도 자신이 이길 수 있다는 느낌이었다.
우리가 내 사무실로 돌아왔을 때, 크리스틴은 눈을 반짝이며 투덜거리듯 말했다.
크리스틴이 부모님을 만나 달라고 부탁했을 때,
나는 단 한 번 그녀에게 “안 된다”고 말했다.
크리스틴은 독일에서 태어났고, 열두 살 때 미국으로 왔다.
나는 강제수용소 생존자이다.
그리고 나는 ‘강제수용소 생존자’ 라는 말에 따라오는 모든 의미를 알고 있다.
나는 크리스틴이 독일계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나는 그 사실을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고, 그것은 나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부모님을 만나는 것만큼은 도저히 할 수 없었다.
크리스틴은 나에게 자신의 아버지가 독일군에 복무했었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내가 알기로는,
그녀의 아버지가 SS 대원이었을 수도 있었고, 강제수용소의 경비원이었을 수도 있었다.
이것은 내가 크리스틴에게 거짓말을 한 유일한 일이기도 했다.
나는 그녀의 부모님을 만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그럴듯하지 못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나는 확신한다.
크리스틴은 그녀의 놀라운 직감으로 그 이유를 알아차렸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그 이후로 다시는 그 문제를 꺼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역자 주
「크리스틴의 이야기(The Story of Christine)」는
2008년 《The Pennsylvania Psychologist》에 처음 발표되었으며,
펜실베이니아 심리학회의 허락을 받아 이 논문에 다시 수록되었다.
선물
치료를 시작한 지 거의 2년이 되었을 때
- 어쩌면 이제는 우정이라고도 할 수 있었던 우리의 관계 속에서 -
크리스틴은 세상을 떠났다.
나는 그녀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물론 크리스틴의 부모님은 나에 대해 들어 알고 계셨다.
그녀의 아버지가 나에게 다가왔다.
그는 나에게 무언가 말을 하고 싶어 했지만, 말을 할 수 없었다.
그의 얼굴에서는 눈물이 계속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는 두 팔을 벌렸다.
나도 두 팔을 벌렸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를 껴안았다.
…… 그 순간, 거기에는 독일군도 없었고, 홀로코스트 생존자도 없었다.
그곳에는 단지 두 사람이 있었다.
한 사람은 딸을 잃고 울고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친구를 잃은 슬픔 속에 있었다.
이것이 크리스틴이 나에게 남긴 마지막 선물이었다.
----------------------------------------------------------------------------------------
< 레이가 겪은 홀로코스트 >
레이 나르 가족은 테살로니카에서 피신해 아테네에 숨어 지냈고, 이후 체포되었다.
아테네에서 체포된 유대인들의 수송은 1944년 4월 2일 베르겐벨젠으로 출발했다.
가혹한 수용소 생활이 1년이 넘어가던 중
레이는 전쟁 막바지에 수용소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열차로 이송되었고,
그 열차가 1945년 4월 13일 미군에 의해 극적으로 해방되었다.
그리고 안네의 일기로 유명했던 안네 프랑크 자매 역시도 베르겐벨젠에 있었다. (전염병으로 사망)
대부분의 SS 병력은 이미 시골로 도망간 상태였고,
열차에 남아 있던 독일군 경비병 12명과 열차 책임자는 미군 전차를 보고 싸우지 않고 항복했다.
또한 수감자들은 굶주리고 병들어 매우 쇠약했었다.
당시 미군의 공식 기록에는
약 2,500명의 사람들이 굶주리고 구타당하고 병들어 있었으며 일부는 죽어가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열차는 과밀하고 비위생적이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티푸스를 앓고 있었다고 한다.
또한 기록에는 수감자들이 미군을 보고 웃고, 울고, 포옹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레이는 1927년생이므로, 수용소에 있을 당시에는 17 살 정도의 청소년이었다.
레이에게 크리스틴과의 만남은
41년 동안 잠재되어 있던 강제수용소와 홀로코스트의 기억이 다시 현재로 연결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크리스틴이 독일 출신이고 아버지가 독일군이었다는 사실은 레이에게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게 했습니다.
그는 크리스틴의 부모를 만나는 것을 감정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워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장례식에서 그녀의 아버지를 만나게 되었고, 서로 울며 포옹했습니다.
그 순간 레이에게는 ‘독일군’ 과 ‘홀로코스트 생존자’라는 과거의 정체성보다,
딸을 잃은 아버지와 친구를 잃은 한 인간이라는 현재의 만남이 앞에 놓였습니다.
즉, 크리스틴과의 관계는 레이에게 오래된 과거의 기억과 감정을 다시 불러냈고,
마지막에는 그 과거를 가진 두 사람이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나는 경험으로 이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레이는 홀로코스트 생존자로서 과거의 경험은 그의 몸과 정서에 남아 있었고,
평소에는 의식적으로 떠올리지 않던 그 상처가 크리스틴과의 관계를 통해 다시 활성화되었습니다.
이것은 모레노가 말하는 치료자의 모습과 연결됩니다.
치료자는 모든 상처를 초월한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상처를 가진 인간으로서 다른 사람과 만나는 사람입니다.
중요한 것은 상처가 없는 것이 아니라,
그 상처를 지닌 채 현재의 만남에서 새로운 관계와 가능성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크리스틴과 만났던 ‘마지막 선물’ 은
그것은 상처를 없애준 선물이 아니라,
상처를 지닌 자신이 다시 누군가와 만날 수 있도록 열어준 진정한 선물이었던 것입니다.
참고 자료 : 영화배우 오드리 헵번은 1929년 벨기에에서 태어났지만 어린 시절 대부분을 네덜란드에서 보냈습니다.
그녀 역시 1940년 독일군이 네덜란드를 침공하면서 전쟁을 직접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헵번은 11살이었고, 전쟁 중 식량 부족과 굶주림을 심하게 겪었습니다.
특히 1944~1945년 네덜란드의 기근 때 매우 어려운 생활을 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헵번은 훗날 자신의 어린 시절 전쟁 경험 때문에 굶주림과 기아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고,
유니세프 친선대사로 활동하며 굶주린 어린이들을 돕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1927년 10월 15일 ~ 2023년 2월 2일
레이 나르(Ray Naar)는 1927년 10월 15일,
그리스에서 태어났다.
레이와 그의 가족은 체포되어 독일 북부의 베르겐벨젠 강제수용소로 보내졌다.
전쟁이 끝난 뒤 나르의 가족은 미국으로 이주했고,
레이는 미군에 입대했다.
해외에 주둔하는 동안 그는 자신의 언어 능력을 활용하여 해외에 있던 미군 병사들의 석방을 협상하는 일을 하기도 했다.
프랑스에 주둔하던 중 그는 아내 클로딘을 만났으며, 두 사람 사이에는 두 명의 자녀가 있었다.
군 복무를 마친 뒤 레이는 심리학 학사 학위를 취득했고, 이후 임상심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나르 박사는 Carlow University, University of Pittsburgh, Chatham University에서
심리학 학부 과정을 가르쳤으며, 피츠버그 대학교 의과대학에서도 의대생들에게 강의했다.
2023년 2월 2일, 95세의 나이로 레이 나르 박사는 세상을 떠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