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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학문이 일치하신 분
이 상 욱 / 법학전문대학원
39년 6개월의 교수 생활, 법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석사논문을 시작으로 법학에 관한 연구를 시작한 지 42년이 지난 2021년 8월 정년퇴임을 하였다. 돌이켜 보니, 1974년 법대에 입학한 이래 퇴임할 때까지 대학의 울타리를 넘어서지 않고 계속 대학에 머물면서 법학자라든가 법학 교수라는 커다란 호칭을 받고 살았다. 이는 전적으로 오롯이 대학원의 은사이시고 대부님이셨던 덕헌(德軒) 이태재(李太載) 선생님 덕분이었음을 고백한다. 물론 초등학교 3학년 때 글짓기를 지도하셨던 선생님, 6학년 때 졸업을 앞두고 삼국지를 읽어주시던 선생님도 기억나고,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에서 뵙게 된 훌륭하신 선생님도 많이 계셨다. 그분들 중 오늘의 내가 있기까지 가장 큰 영향을 주신 분은 이태재 교수님이시다.
선생님을 처음 뵙게 된 것은 1977년 대학원 석사과정 입학을 위한 면접시험 때였다. 당시 경북대학교 대학원의 등록금이 영남대학교의 3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는 이유 하나로 경북대학교 대학원에 원서를 냈었다. 그때는 면접위원 3분 중에서 가장 차분하고 비교적 친절하게 질문을 하시는 모습만 기억되고, 긴장했던 탓인지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다만, 선생님은 “제2외국어로 불어를 했구나” 하시면서 관심을 표명하셨다. 아마 당시 제2외국어는 모두 독일어를 선택할 때라 프랑스 민법을 연구하셨던 선생님의 눈에 띄었던 듯하다. 고등학교 때 내 의사와는 전혀 관계없이 「불어반」으로 배정되어 3년 동안 불어 기초를 다졌고, 대학에 가서도 불어책을 놓지 않고 계속 공부했던 것이 내 인생의 중요한 기점에서 이토록 중요한 인연을 맺게 되는 계기가 될 줄이야.
그 후 강의가 시작되면서 접하게 된 선생님의 첫인상은, 책상에 단정하게 앉으셔서 왼손의 검지와 중지 사이에 담배를 끼우시고 한 번씩 동그란 연기를 내뿜으시며, 열심히 원고를 쓰고 계시는 모습이었다. 연구실 문을 열면 정면 바로 마주 보는 곳에 큰 책상이 있었는데, 쓰시던 원고를 마무리할 때까지 잠시 앉아 있으라고 하실 때가 많았다. 소파에 앉아 기다리는 동안 선생님 모습을 살짝 엿보노라면, 담배 연기로 도넛을 몇 번 만드신 연후에야 책상에서 일어나셨다. 당시 사법시험을 준비하던 사람들이 열심히 구독했던 월간지 「고시계」나 「고시연구」를 비롯하여, 「사법행정」이나 신문사 등에서 원고 청탁을 많이 받으셨던 탓이다. 또한 사법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들에게 상당히 인기가 많았던 기존의 교과서 「채권총론」과 「채권각론」에 이어서, 「민법총칙」과 「물권법」을 출판함으로써 재산법의 체계를 세우셨고, 기초법 분야에까지 통달하셔서, 일찍이 출판된 「자연법개론」,「서양법제사」외에도「법철학사와 자연법」,「로마법」까지 저술하셨다. 당시 민법학계로 본다면, 서울대학교 법학과의 김증한 교수님과 곽윤직 교수님 이외에, 지방에서는 영호남을 막론하고 단연 이태재 교수님의 명망이 가장 높았다. 동국대학교 총장을 역임하시고 국민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시던 서돈각 교수님(상법 전공)이 1979년 경북대학교 총장으로 부임하시면서 선생님을 찾아뵙고, ‘선생님이 계시는데 총장으로 부임하게 되어 송구스럽다’고 하시면서, ‘대학에서 학문의 상징은 도서관이니 중앙도서관장을 맡아 주십사’하고 정중하게 부탁하셨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따라서 교수님의 제자라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큰 힘을 얻을 수 있었다. 1980년대 초, 교수 초년병시절에 민사법학회나 가족법학회, 법사학회 등 각종 학회에 참가하면(선생님께서는 학회에 자주 참석하라고 권하셨다) 지방에서 온 이름도 없는 무명의 교수로서 별다른 존재감이 없었지만, 이태재 교수님의 제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부터는 당시 원로 교수들은 물론, 처음 접하는 젊은 교수들도 나를 대하는 태도가 남달랐음을 체감하였다. 특히 지방대학 교수로서,「민사법의 이론과 실무학회」회장, 「한국가족법학회」회장, 「한국토지법학회」회장 등을 역임할 수 있었던 것 역시 선생님의 명성 덕분에 힘입은 바가 실로 컸다.
그뿐만이 아니다. 1978년 석사과정 1학기를 마치고, 성모승천 대축일인 8월 15일 선생님을 대부님으로 모시고 계산성당에서 영세하게 되면서, 선생님과의 인연은 더욱 각별하게 되었다. 모태신앙인 고등학교의 절친이 적극적으로 권유한 탓도 있지만, 법의 근원을 자연법으로 보시는 선생님의 학문과 독실한 신앙생활에서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세례를 받던 날 선생님께서는 「제임스 C. 기본스」 추기경님의 저서, ‘교부들의 신앙(장면 박사 편역)’을 선물로 주셨다. 1876년에 초판이 출간된 다소 오래된 책이지만, 가톨릭 교리의 정수를 자세히 알려주는 진정한 고전으로서, 당시 교리를 잘 알지도 못하고 풋내기 신자였던 내 영적인 삶에 큰 도움을 주었던 책으로 기억된다.
두 학기를 마치고 석사논문을 준비하겠다고 말씀드리자 선생님께서는 반갑게 맞으시면서 논제를 직접 선정해주셨다. ‘한국상속법사’를 정리해보라고 하셔서, 석사학위 논문은 ‘한국상속법사에 관한 연구’로 발표하였다. 석사논문을 발표할 때, 법학과 교수님들은 전공을 불문하고 전원이 참석하였을 뿐만 아니라, 행정학과, 정치외교학과, 사회학과, 국민윤리학과 등 인접한 학과의 교수님들도 대거 참석하셔서 이런저런 질문을 하셨다. 그 당시 민법 전공 법학석사 논문 발표가 근 10년 만에 있다 보니, 교수님들의 관심도 많았던 듯하다. 발표 당일, 발표장에 가득 앉아계시는 교수님들을 보고 무척 긴장되었지만, 참고문헌을 첨부한 10페이지 정도의 발표문을 공판으로 인쇄하여 배부하는 등, 부족하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준비해서 발표하였다. 처음 뵙는 교수님들의 질문에 대한 답을 무난하게 했던지, 발표를 마치고 난 후 교수님들로부터 수고했다는 인사말을 많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는 무엇보다도 선생님의 제자로서 크게 누는 끼치지 않았다는 안도의 마음이 제일 컸던 듯하다. 그 후 논문을 인쇄하여 선생님을 찾아뵈었을 때, 선생님께서도 좋게 보셨던지 박사과정의 진학을 권유하셨다. 그런데 가정 형편상 확답을 못 드리고, 1년을 헤매다가 1981년 3월 박사과정에 입학하면서 선생님을 평생의 지도교수로 모시게 되었다.
박사과정에 입학하고 한 학기가 끝나갈 무렵, 대학원 행정실에서 급하게 연락이 와서 가보니, 난데없이 45만 원의 연구비를 받게 되었으니 관련 서류를 제출해달라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당시 자연 계열의 박사과정에 재학 중인 자들에게 지급하던 ‘산학협동재단’의 연구장려금을 대학원장으로 계시던 선생님께서 내가 받을 수 있도록 선처를 하셨다는 것이다. 사실 당시 박사과정에 재학 중인 자들은 모두 현직에 직을 두고 있는 분들이라 학비에 대한 부담이 그다지 크지 않았지만, 당시 무직인 나로서는 당장 다음 학기 등록금 준비가 예삿일이 아니었다. 선생님께서는 이미 그 사실을 간파하신 듯, 가장 큰 과제인 금전적인 어려움을 해결해 주셨다.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큰 배려를 해 주셨는데, 그때는 그저 좋아서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한 듯하여 더욱 송구스럽기만 하다. 사실 나 자신을 돌이켜봐도 교수로 서 학생들의 어려움을 간파하여 금전적인 문제에 도움을 준 기억은 별로 나지 않는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그해 겨울에 이력서를 효성여자대학교(현 대구가톨릭대학교)에 제출해보라고 하셔서 제출하였는데, 총장님 면접을 보니 ‘얼라가 왔다’고 하시면서 결혼부터 먼저 하라고 하여, 이듬해 3월에는 전임대우 같은 신분으로 강단에 서게 되었다. 그때가 1982년이니 내 나이 만 25세였고, 대학원 박사과정 1년을 마친 상태였다. 그 후 결혼하고 1983년 3월에 전임강사 발령을 받아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니, 이 모든 것은 순전히 선생님 덕분이다.
그런데 선생님께 또 하나 무례했던 사건이 생각난다. 어느 날 연구실로 찾아오신 선생님의 제자분이 점심을 사겠다고 하여 나까지 따라나서게 되었다. 경북대학교 정문까지 걸어 나와서 택시를 타고 시내 일식집으로 가는 중, 앞 좌석에는 제자 분이 타고 선생님과 나는 뒷좌석에 타게 되었다. 그때 나는 무례하게도 택시 문을 잡고 선생님을 먼저 안으로 타시게 강권하였다. 사실 예법으로 따지면 불편한 안쪽 좌석은 상석이 아니므로 내가 먼저 안으로 들어가고 선생님을 뒤에 편하게 타시도록 하여야 하는데, 결례를 한 것이다.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아무런 말씀도 없이 그냥 안쪽 좌석으로 쑥 들어가셨다. 훗날 내가 비슷한 상황이 되어, 제자가 나보고 택시 안으로 들어가라고 했을 때, 나는 서슴없이 제자에게 네가 먼저 들어가라고 무안을 준 기억이 있다. 학문적으로나 신앙적으로는 매우 엄격하셨지만, 제자들의 허물을 덮어두시는 선생님의 그 인품과 인격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선생님께서 중앙도서관장으로 근무하실 때의 일화이다. 아침에 선생님께서 도서관장실로 출근하시는데 지나가는 복도에 직원들이 여러 명 모여서 웅성웅성하고 있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조금도 괘의치 않으시고 곧장 관장실로 들어가시더라는 것이다. 여느 사람 같으면 호기심이 발동하거나 궁금해서라도 무슨 일인지 가까이 가서 왜 그러느냐고 물어보는 등 어떻게든 관여할 터인데, 직원들이 곤혹스러워하거나 어려워할까 봐 그냥 지나치시더라는 이야기를, 그날 복도에 있었던 직원에게서 직접 들었다. 선생님의 인품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물권법」의 출간을 앞두고 교정을 볼 때, 선생님 댁으로 와서 작업을 하자는 말씀을 듣고, 5월 초순으로 기억되는 어느 토요일 오전에 선생님 댁을 방문한 적이 있다. 선생님 댁은 이천동에 있었는데, 여러 가지 꽃과 나무가 울창한, 중앙에 샘이 솟는 아담한 연못이 있는, 정원이 장대한 주택이었다. 대문에서 현관까지 나무 사이로 오솔길을 걷듯이 꽤 걸어 들어가야 했다. 선생님 서재에서 교정을 열심히 보고 있는데, 사모님께서 점심을 준비해 주셨다. 기름이 말끔히 제거된 맑은 곰탕에 두릅을 한 접시 내 주셨다. 당시는 두릅이 무척 귀한 때라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한데, 선생님께서는 양주 한 잔을 반주로 드시면서 제게도 권하셨는데 당연히 고사했다. 그러고 보니 선생님께서는 늘 반주를 즐겨 드셨다.
1983년 박사과정을 수료하면서 논문을 준비해보겠다고 말씀을 드리니, 흔쾌히 논문 주제를 선정해주셨다. 한국 상속법이 성문화되는 과정을 연구해보라고 하시면서, 귀한 자료 두 권을 빌려주셨다. 「藤田東三」의 ‘朝鮮親族法 相續法(1933)’과 「南雲幸吉」의 ‘朝鮮親族相續法類集(1935)’, 이 두 권을 기초로 해서 논문 준비를 시작하였다. 사실 지금이야 참고문헌 찾는 일은 아주 쉬운 작업이 되었지만, 1980년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또한 선생님의 탁월한 식견으로 정해주신 논제 덕분에 일제강점기에 ‘내선일체’라는 동화정책에 따라 우리의 전통 상속법 제도가 어떻게 왜곡되었는지 소상하게 검토하고 밝히는 박사학위 논문(‘한국상속법의 성문화 과정’)을 작성할 수 있었다(1986년). 그 후에도 일제강점기에 왜곡된 가족법 제도를 천착함으로써 학계에서 그 분야에 일가견을 가진 학자로서의 입지도 굳힐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나도 박사논문을 지도할 때 중요한 참고문헌 2권 정도는 늘 소개하고자 하였지만 그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또한 학계의 흐름을 통찰하여 박사학위 논문으로서 적절한 논제를 선정해주는 일도 실로 어려운 일임을 실감한 적이 많았다.
그뿐만이 아니다. 선생님께서 소장하고 계시던 프랑스 민법 관련 책들, 당시는 구하기 어려운 소중한 문헌들을 편하게 읽을 수 있도록 기회를 주셔서 프랑스 민법에도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1990년대 프랑스에서 논의되고 있던 ‘계약상의 정보제공의무(L'obligation de renseignement dans les contrats)’와 ‘계약체결 전의 정보제공의무(L'obligation précontractuelle de renseignement)’를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소개하는 논문을 발표하게 되었다. 이를 시발점으로 하여 우리나라에서도 정보제공의무에 관한 논의가 활발하게 전개되었는데, 결국 2008년 ‘보증인 보호를 위한 특별법’이 제정되었고, 2015년 민법전에 ‘채권자의 정보제공의무와 통지의무(제436조의 2)’라는 명문 규정을 두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국내에서 손꼽히는 프랑스 민법 연구자의 반열에 오르게 된 것도 일찍이 프랑스 민법 연구에 눈을 뜨게 해주신 선생님의 배려 덕분이었다.
선생님의 크신 은혜가 또 있다. 1980년대 후반에 효성여자대학교의 내홍에 휘말려 정신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영남대학교 법학과에 민법 교수를 채용한다는 공고가 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선생님을 찾아뵙고 영남대학교로의 이직 여부를 조심스럽게 말씀드렸다. 당시 선생님께서는 경북대학교에서 정년퇴임 하시고 경일대학교 총장으로 계셨는데, 며칠 뒤에 대구 시내 대학교 총장들 회의가 있는데 영남대학교 총장(당시 김기동 총장님은 법학과 은사님이다)에게 특별히 내정된 자가 있는지 한번 알아볼 터이니 신중히 행동하라고 말씀해 주셨다. 특히 대구 내에서의 이동은 아주 조심스러운 일이라, 확신이 설 때 비로소 추진하여야 한다고 재차 강조하셨다. 며칠을 기다리니 선생님께서 전화를 주셨는데, 영남대학교 김 총장께서도 자네를 좋게 생각하고 있으며, 특별히 내정된 사람도 없으니 원서를 내보라고 말씀하셨다면서, 추천서를 써 줄 터이니 서류를 준비해서 지원해보라고 하셨다. 그렇게 해서 1990년 3월부터 모교인 영남대학교 법과대학 교수로 근무하게 되었다. 이 역시 선생님 덕분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여담을 덧붙이자면 영남대학교 법과대학 교수로 발령이 나면서 김기동 총장님의 연구실을 그대로 사용하게 되어 그 방에 있던 모든 책과 자료들도 그냥 물려받는 영광을 누렸다).
지금 이 글을 준비하면서 돌이켜보니 선생님께 받은 은혜가 이처럼 많았는데, 그동안 무엇이 그렇게 바빴는지 생전에 자주 찾아뵙지 못한 것이 못내 후회스럽기만 하다. 선생님께서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시고 난 후, 거동이 다소 불편하게 되었을 때 이천동 저택을 처분하시고 아파트로 이사를 하셨다. 인사차 찾아뵈었을 때, 잠시 불편한 다리를 주물러 드리니 너무 좋아하시는 듯하여 한동안 매주 강의가 없는 시간에 잠시 선생님 댁에 들러서 다리를 주물러 드리곤 했었다.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다리를 주물러 드리는 내내 선생님께서는 한마디 말씀도 하지는 않으셨지만, 사모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제가 언제 오는지 은근히 기다리고 계시는 것 같다고 하셔서 참 기분이 좋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감기에 걸려 혹시나 선생님께 감염될까 조심스러워 찾아뵙지를 못하고 또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그런데 갑자기 돌아가셨다는 부음을 받게 될 줄이야. 경북대학교 영안실에 마련된 빈소의 영정 앞에 무릎을 꿇고 앉으니, 그저 눈물이 줄줄 흘렀고, ‘죄송합니다. 선생님! 죄송합니다’라는 말밖에는 나오지 않았다.
계산성당에서 영결미사를 마치고 군위에 있는 천주교 묘지로 모실 때까지 묵묵히 추모 행렬의 뒤를 따라가자니 만감이 교차하였다. 평소에 보았던 선생님의 곧은 기개와 깊은 신앙심, 그리고 법학에 대한 열정을 다시금 되새기면서 조금이라도 선생님께 누가 되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는 다짐을 하곤 또 하였다. 아니 그보다, 감기가 조금이라도 차도를 보였을 때 곧바로 찾아뵙지 못한 나의 불찰과 게으름이 너무나도 애통하여 통한의 눈물이 앞을 가렸다.
지난 2023년은 선생님께서 탄생하신 지 100주년이 되는 해였다. 마침 「대구가톨릭학술원」 50주년 기념사업으로 『대구가톨릭학술원 50년사 : 기억과 희망』을 발간하였는데, 그 중 제3장 「디딤돌이 된 우리 얼굴」에 「아버지의 발자취를 따라서 : 德軒 李太載 마티아」라는 제목으로 선생님의 고명딸이신 이은영 교수님(경북대학교 불문학과 명예교수)께서 선생님을 회고하는 글을 쓰셨는데(272면-289면), 영광스럽게도 그 말미에 1986년 내가 『가톨릭교육연구』 제1집에 발표했던, 졸고 「천주교와 한국의 자연법론(195면–218면)」에서 일부를 발췌하여 소개해 주셨다. 이제 나는 또 그 글을 그대로 다시 옮기면서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우리나라의 천주교 사상은 근대적 전환기에 중국 중심으로부터 세계 속으로 나아가고 신분계급 사회에서 평등사회로 나아가는 역사의 발전 방향을 제시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중략)
특히 천주교의 전례를 중심으로 가톨릭적 자연법과도 접할 수 있었지만, 일제강점기에 접어들면서 일본 치하에서 도입된 법사상과 정치사상은 자연법사상과는 상반되는 법실증주의와 전체주의 사상이었다. (중략)
해방 후 대학에서 법철학 강의를 담당한 우리나라 교수들 모두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모두들 「켈젠학도(Kelsenian)」임을 자처하였다. (중략)
이처럼 Kelsenism 일색으로 되어 있던 당시 한국의 법학계에 일파만파를 던지게 된 것은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존재론적인 자연법사상을 소개한 이태재 박사로부터 비롯된다. Louvain 대학과 Paris 대학에서 다년간 연구한 후 귀국하여 1958년 8월 『사상계』에 「最近 佛蘭西法學의 動向」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글이 곧 이 땅에 자연법사상을 재흥케 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중략)
그 후 학계의 요청에 의하여 1962년에 계몽적인 자연법입문서 『자연법개론(법문사)』을 집필하여 출간하자 그 위력은 대단하여 불과 수년 내에 우리나라 대부분의 법철학자들이 이제 나름대로 자연법학자로 자처하게 된 것이다. (중략)
초기 천주교 신자들이 뿌린 씨는 결코 그대로 썩지 않고 다시 이 땅에 자연법은 부흥하였던 것이니, 이는 깊은 신앙에 뿌리를 둔 이태재 박사의 학문적인 노력에 힘입은 바가 크다고 할 것이다. 중국의 吳經熊 박사(1899-1986), 일본의 田中耕太郞 박사(1890-1974)와 더불어 李太載 박사는 동양의 대표적인 가톨릭 법사상가라고 하겠다.’(이은영, 앞의 글, 288면–289면).
선생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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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교수님, 고맙습니다. 귀한 글, 또다른 느낌을 가지고 읽었습니다. 스승님에 대한 섬세한 회고가 이태재 교수님을 그려보게 하고, 아울러 교수님께서 연구해오신 과정을 시간적으로 더듬을 수 있어 스승과 제자가 이룬 법학의 한 분야를 추적하게 됩니다. 특히 가톨릭학술원에서 단체 50년사를 기획, 발간하면서 거목임을 깨닫게 된 분의 제자를 여기서 마주하게 되니 느낌이 남다릅니다. 그분이 제자를 대하는 태도도 보게 되구요. .....(이태재 교수님은 가톨릭학술원에서도 크게 활동하신 분이시거든요.) <<대구가톨릭 학술원 50년사 : 기억과 희망>>은 학술원 50년사의 두번째 책으로 자료편인데 이렇게 읽히는구나를 깨달으면서, 이 <사제동행>도 시, 공간을 넘어서 읽히리라는 기대와 믿음을 갖게 됩니다. 기한 내에 글 주시느라 애쓰셨음을 죄송해하고 또 감사드립니다.
편집위원장님! 감사합니다. 부족한 글에 교정과 편집 작업을 해 주셔서 읽기도 훨씬 수월하고, 문장의 완성도도 많이 높아진 듯합니다. 대구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가톨릭 전체를 보더라도 이태재 선생님의 역활은 참 지대한 것이었다고 생각됩니다. 부족한 글로 혹시나 선생님께 누가 되지 않았나 내심 걱정도 됩니다만, 좋게 봐 주셔서 더욱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