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까지의 제정러시아 농노제 국가의 결함을 드러낸 크림 전쟁의 패전 후, 개혁을 추구하는 분위기가 정부의 안팎에서 고조되고, 또 농민운등의 격화로 상황이 위태로웠으므로, 패전의 와중에 즉위한 알렉산드르 2세(재위 1855∼81)는 일련의 개혁을 실시하였다. 그의 주된 개혁은 1861년의 농노해
15세기까지의 제정러시아 러시아 평원 남쪽의 흑해와 아조프해 연안에는 BC 7∼BC 6세기 이후 그리스인의 식민도시가 건설되었는데, 그 도시들은 BC 1세기에 로마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그리스인이 진출하기 전부터 남러시아의 평원지대를 지배하고 있던 이란계 유목민 스키타이는 그리스인과의
17세기까지의 제정러시아 모스크바대공국에서는 지난날의 독립 공국의 제공(諸公)과 대공 일족 및 여러 대를 이어온 모스크바 중신들이 대공의 권력을 견제하는 유력한 존재가 되고 있었지만, 마지막 비잔틴 황제의 조카딸을 왕비로 맞이한 이반 3세는 전제군주로서 처신하여 법령집과 관직을 정비하고 하급전사에게 토지를 나누어 줌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였다. 러시아 교회는 이 시대에 일어난 이단과 싸우는 한편 급격히 불어난 교회의 토지 ·재산을 확보해 나가기 위해 대공에게 협력하여 그
19세기 중엽까지의 제정러시아 18세기 초 표트르 1세 치하에서 러시아는 대제국으로 발전하였다. 1667년의 전승으로 몇 세기를 끌어오던 폴란드와의 항쟁에 일단 매듭을 지었고, 그 후 폴란드와 제휴하여 아조프 공략(1696) 등 투르크와 대결하게 되었다. 표트르대제는 폴란드왕 등과 결탁하고 발트해로의
제정러시아의 대한관계 한국이 러시아와 알게 된 것은 조선 중기인 1654년(효종 5)과 1658년에 청국의 요청에 따라 헤이룽강[黑館江] 유역에 침입한 러시아 코사크 기병대를 격퇴하기 위해 조총병(鳥銃兵) 등을 파병한 때부터이다. 이를 실록(實錄) 등 문헌은 ‘나선(羅禪:러시아) 북벌(北伐)하고
두마 [Duma] 1906~1917년에 존속한 제정(帝政) 러시아의 의회(議會). 정식 명칭은 Gosudarstvennaya duma이다. 1905년 니콜라이 2세(재위 1894~1917)의 ‘10월선언’에 의해 개설(開設)이 약속되어, 1906년 5월 6일 개정기본법에 의하여 정식으로 설치되었다. 긴급입법권(緊急立法權), 법률의 최종결정권, 대신(大臣)의 임면, 국회의 소집 ·해
레닌상 [Leninskie premii] 러시아에서 1925년에 제정된 상. 과학 ·기술 부문과 문학 ·예술 ·건축 부문에 우수한 업적이 있는 자에 대하여 수여되는 상으로, 1935년 이후(스탈린 시대) 중단되었다가 1956년에 부활되었다. 2년에 1번, 레닌의 생일인 4월 22일에 수여되었으며, 수상 대상자는 개인 또는 집단이다. 이 상은 구(舊)소련
차리즘 [tsarism] 차르(황제)를 중심으로 한 제정 러시아의 전제적(專制的)인 정치체제. 16세기 중반 이반 4세(雷帝) 시대에 시작되었다. 지주 ·귀족과 상층 시민을 사회적 지주(支柱)로 삼고 엄격한 신분질서와 관료주의를 특징으로 하였다. 17세기 중반까지는 신분제 의회 때문에 차르의 권력에 어느 정도 제한을 받았으나, 표트르 1세 때에 서유럽의 관료제를
호엔로에 [Chlodwig Fürst zu Hohenlohe-Schillingsfürst] 제정 독일의 재상. 독일제국의 성립과 독일 통일에 기여하여 알자스-로렌의 총독을 거쳐 재상이 되었다. ‘3B정책’을 비롯한 제국주의 정책을 추진하였으며 청일전쟁 뒤에 러시아·프랑스와 함께 삼국간섭 정책을 실행하였다. 바이에른 왕가 출생. 프로이센-프랑스전쟁이 끝난 뒤 독일제국의 성립과 독일 통일에 기여하여 알자스-로렌의 총독이 되었다. 뒤에 황제 빌헬름 2세 밑에서 재상이 되어 ‘3B정책’을 비롯한 제국주의 정책을 추진하였으며, 특히 해군장관 틸피츠와 함께 대해군(大海軍) 건설
알렉세이 [Aleksei] 러시아 로마노프왕조의 제2대 황제(재위 1645∼1676)로 신법전을 제정함으로써 러시아의 신분제를 확립시켰다. 행정조직을 강화하고 군대의 근대화를 추진하여 우크라이나 동쪽 반 영토를 차지하였다. 정식 명칭 Aleksei Mikhailovich. 모스크바 출생. F.R.미하일의 아들. 알렉세이 l세라고도 한다. 초기에는 자기를 양육한 대귀족 모로조프에게 정치를 맡겼으나, 조세 정책의 불만으로 반란이 일어나자 모로조프를 수도원으로 추방하였다. 1649년에 지주와 상인들의 요구에
구제동맹 [Soyuz Spaseniya, 救濟同盟] 제정(帝政) 러시아의 데카브리스트 운동의 출발점이 되었던 비밀결사조직. 1816년 세르게이 무라비요프(Sergey Muravyov)를 중심으로 한 6명의 근위연대 장교가 조직하였다. 이들은 나폴레옹 전쟁 후 러시아가 프랑스를 점령할 때 참가했던 귀족출신 청년장교들로서 농노제 폐지와 입헌정치의 실시를 주장하며 러시아의 재건을 다짐하였다. 1818년
파베르제 [Karl Gustavovich Faberge] 유럽 장식미술의 최고 거장으로 제정 러시아 때의 보석 디자이너이자 세공인. 전통적인 디자인을 거부하고 파격적이고 환상적인 작품들을 만들었으며 50점의 부활절 달걀이 유명하다. 본명은 카를 구스타포비치 파베르제(Karl Gustavovich Faberge)이다. 1846년 5월 18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프랑스 위그노 교도의 후손인 보석세공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독일에서 교육 및 금세공을 익힌 뒤, 1866년 독립할 때까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아버지 작업장에서 보
발틱함대 제정 러시아의 유럽 방면을 지킨 주력함대. 당시 흑해함대 ·동양함대와 함께 러시아의 3대 함대의 하나였다. 러 ·일전쟁 때 일본원정의 임무를 띠고 1904년 10월 15일 리예파야항(港)을 출항하였다가 1905년 5월 27일~28일, 일본함대와의 전투에서 전멸하였다. Z.P.로제스트벤스키 중장을 사령관으로 전함 8척을 비롯
노한사전 [露韓辭典] 1874년(고종 11) 제정(帝政) 러시아의 지방관리인 M.푸딜로에 의해 편찬, 간행된 러시아어와 한국어의 대역사전(對譯辭典). 1권. 총 745면. 서구어(西歐語)와 한국어를 대역한 최초의 사전으로, 참고서도 별로 없이 오로지 한국의 서민을 상대로 어휘를 수집하였다. 석판인쇄한 한글 원문은 푸딜로가 직접 썼기 때문에 표기에 잘못이 있으나 서양 사람이 만든 최초의 사전이라는 점과 어휘가 함경도
파슈카니스 [Evgenii Bronislavovich Pashukanis] 마르크스주의 법학 수립에 공헌한 러시아의 법학자. 사회주의법을 소멸해가고 있는 부르주아지법의 잔존물(殘存物)로 규정지어 스탈린 헌법 제정 전후로 비판을 받아 후에 숙청되었으나, 스탈린비판 후 복권되었다. 리투아니아 출생. 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하였다. 11월혁명(구력 10월) 이후, 법무인민위원회에서 일하다가 후에 공산주의 아카데미 부회장이 되었다. 주요 저서 《법의 일반이론과 마르크스주의》(1924)를 비롯, 마르크스주의 법학을 수립하는 데 공헌하였으백과사전(39) 에스토니아 [Estonia] 동부 유럽의 발트해(海) 연안 끝에 있는 나라로 핀란드와 접한다. 1721년부터 제정러시아의 지배를 받아 오던 중 10월혁명 후인 1918년에 독립하였다. 그러나 1940년 구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연방에 강제 소속되었다가, 구소련의 해체와 함께1991년 8월 연방을 탈퇴하여 독립하였다. 정식명칭은 에스토니아공화국(Republic of Estonia)이다. 동쪽으로 러시아, 남쪽으로 라트비아와 국경을 접하며, 북쪽으로 핀란드만(灣)에 의해 핀란드와 분리되고, 서쪽으로는 발트해(海)를 끼고 스웨덴과 마주한다. 1991년 독립을 하였지만 1945년 전후에 러시아에 귀속된 영토 반환문제, 에스토니아 내 약 50만 명에 이르는 러시아인(人)의 보호문제 등으로 러시아와 갈등을 빚고 있다. 독립 이후 눈에 띄는 경제발전과 고속성장으로 ‘발트의 호랑 타지키스탄 [Tajikistan] 중앙 아시아에 있는 내륙국으로 1895년에 제정러시아의 지배 아래 놓였다. 1924년 부하라(Bukhara) 사회주의공화국의 일부로서 소비에트연방에 편입되었고 다시 우즈베키스탄공화국 내 타지크(Tajik) 자치공화국을 거쳐 1929년 구소련을 구성하는 공화국이 되었으며 구소련의 해체와 함께 1991년 독립하였다. 정식명칭은 타지키스탄공화국(Republic of Tadzhikistan)이다. 북쪽으로 키르기스스탄, 동쪽으로 중국, 남쪽으로 아프가니스탄, 북·서쪽으로 우즈베키스탄과 국경을 접한다. 2002년 파미르 고원의 일부 지역과 타지키스탄의 일부 영토에 대한 중국의 반환 요구를 둘러싸고 중국과 분쟁을 일으켰고, 아직까지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과 국경 분쟁 중이다. 국내적으로는 근대적 독립국가 건설의 경험이 짧은 탓에 독립 후 5년간 심각한 내전을 겪었다. 사회혁명당 [社會革命黨] 제정 러시아의 농민정당(農民政黨). 농민운동이 고조된 1901년 말에 나로드니키[人民主義]의 전통을 이어받아 결성되었다. 지도자로서는 V.M.체르노프, A.F.케렌스키, B.V.사빈코프 등이며, 처음에는 요인암살의 테러 전술을 채택하였다. 1905년 혁명에서 당세를 확장하였으며, 1917년 3월혁명 뒤 멘셰비키와 결 아브하지아 [Abkhazia, Abkhaz, Abkhasia] 흑해 연안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조지아(그루지야)의 자치공화국이다. 1864년 제정러시아에 합병된 후 1992년 7월23일 공식적으로 조지아 내의 자치 공화국으로 인정되었다. 위치 상 북쪽으로는 러시아연방 남부 카라차이-체르케시야자치 공화국과 접하며 서쪽 해안이 흑해이다. 아브하지아인과 그루지아인이 대부분이다. 귤, 차, 담배, 와인의 주생산지이다. 수도는 수후미, 공식언어는 아브하지아어 및 러시아어이다. 블로제니예 [Vlozhenie] 러시아의 로마노프왕조 초기의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 때 제정된 법전(法典). 전 25장 967조. 1648년 6월 불공평한 세제(稅制)와 징병제에 불만을 품은 민중이 봉기하였을 때 사족(士族)의 일부도 이에 동조하자, 이 사태에 대처하기 위하여 소집된 전국회의에서 제정하였다. 농민을 토지에 예속시키고, 돈을 벌려고 다른 지방으로 나간 농민을 자기 소 케네사리 칸 [Kenesary Khan] 카자흐한국의 마지막 칸(재위 1841~1847). 제정러시아의 식민지화에 맞서 격렬하게 대항했다. 카자흐족(族) 국민의용군의 지도자로, 1841년 카자흐족의 마지막 칸으로 공포되었다. 칸으로 즉위할 당시 카자흐한국은 이미 국가로서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카자흐스탄 대부분이 제정러시아에 의해 지배되기 시작한 상태였다. 또한 1822년 이후 러시아 법에 의해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Kyrgyzstan] 중앙 아시아 북부에 있는 내륙국으로, 1864년 제정러시아에 정복되었다. 러시아혁명 후 소비에트 투르키스탄공화국의 일부가 되었고 1926년 키르기스자치공화국, 1936년 키르기스스탄공화국을 거쳐 1991년에 독립하였다. 정식명칭은 키르기스스탄공화국(Republic of Kyrgyzstan)이며, 키르기스스탄은 '키르기스인(人)의 나라'라는 뜻이다. 북쪽으로 카자흐스탄, 서남쪽으로 타지키스탄, 서쪽으로 우즈베키스탄, 동남쪽으로는 중국과 국경을 접한다. 산과 하천에 의한 지형의 변화가 많은 산악국으로 '중앙아시아의 스위스'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 주민의 역사적·문화적 동질성에 따른 것이 아니라 구 소련의 통치 편의에 따라 국경선이 구획되어 카자흐스탄·타지키스탄·우즈베키 페트로프봇킨 [Kuz'ma Sergeevich Petrov-Vodkin] 러시아 제정 말기와 소비에트기에 활약한 화가. 격변기 인간의 불안한 전율과 태동하는 새 질서 속의 긴장된 기대감을 적(赤)·주적(朱赤)·담청(淡靑) 등 선명한 발색과 사각적(斜角的) 비전으로 엮어냈다. 제정 말기와 소비에트기에 걸쳐 활약하였다. 모스크바미술학교의 V.A.세로프 교실에서 공부하고(1897∼1905) 뮌헨으로 가서 아슈베 교수의 지도를 받고 귀국 후 ‘미르 이스쿠스토바(예술세계)’ 등의 모더니즘 그룹을 편력하였다. 초기의 야심작으로 상징과 색채가 대담한 우즈베키스탄 [Uzbekistan] 중앙아시아 중부에 있는 국가로서 19세기 후반 제정러시아의 속국이 되었으며 1924년 10월 구소련의 일원으로 우즈베크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을 수립하였다. 구소련의 붕괴와 함께 1991년 9월 완전 독립하였다. 정식명칭은 우즈베키스탄공화국(Republic of Uzbekistan)이다. 동쪽으로 키르기스스탄과 타지키스탄, 남쪽으로 아프가니스탄, 남서쪽으로 투르크메니스탄, 북쪽으로는 카자흐스탄과 국경을 접한다. 북서 일부는 아랄해(海)에 면한다. 125개 민족이 공존하는 다민족국가이며, 국명은 '우즈베크인(人)의 나라'라는 뜻의 페르시아어(語)에서 유래했다. 행정구역은 1개 자치공화국(respublika), 12개주(viloya), 1개시(shahar)로 되어 막심 고리키 [Maksim Gor'kii] 러시아의 사회주의 혁명가이자 문학 작가로,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제창하고 제정 러시아 하층민의 생활을 묘사하는 등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선구적인 문학가였다. 1901년에는 짜르 타도를 외치며 지하인쇄소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으며, 1905년에 러시아혁명의 기폭제가 된 '피의 일요일' 사건을 주도했던 '가퐁신부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 대표작은 희곡 《밤 주막》(1902), 자전적 3부작 《유년시대》(1914), 《사람들 속에서》(1916), 《나의 대학》(1923) 등이 있다. 1868년 3월 16일 러시아 볼가강 연안의 도시인 니즈니 노브고로드(Nizhni Novgorod)에서 출생하였다. 본명은 알렉세이 막시모비치 페쉬코프(Aleksei Maksimovich Peshkov)이다. 아버지(막심 사바치예비치 페쉬코프)는 목수였고 어머니(바르바라 바실리예브)는 작은 염색공장을 운영하는 집안의 딸이었다. 고리키가 3세때 아버지가 사망하자 어머니와 함께 외가에서 자랐지만 어머니가 재혼하여 모스크바로 떠나자 외할머니에게 의탁하여 성장 아프가니스탄 [Afghanistan] 인도, 서남아시아, 중앙아시아 세 지역의 지리적 요충지에 위치한 나라로, 19세기부터 영국과 제정러시아의 침략 대상이 되었다. 1905년 영국의 보호국된 이후 1919년 라왈핀디 화평조약으로 독립이 정식으로 승인되었지만 지리적 중요성 때문에 1979년에는 구소련군, 2002년에는 미국과 영국 등 연합군의 공격을 받았다. 정식 명칭은 아프가니스탄이슬람공화국(Islamic Republic of Afghanistan)이다. 파미르 고원의 남서쪽에 있으며, 국토 대부분이 해발고도 1000m를 넘는 고원에 위치한다. 동쪽과 남쪽으로 파키스탄, 서쪽으로 이란, 북쪽으로 우즈베키스탄·투르크메니스탄·타지키스탄, 북동쪽으로는 중국 신장웨이우얼자치구[新疆維吾爾自治區]에 접한다. 2001년 미국대폭발테러사건 후 오사마 빈 라덴의 양도 요구를 거부하자 미국, 영국 및 반군(反軍)인 북부동맹 힐우드 박물관 [Hillwood Museum] 미국 워싱턴 D.C.에 있는 제정 러시아시대 예술품을 전시하는 박물관. 마조리 메리웨더 포스트(Marjorie Merriweather Post)의 소유지였다. 포스트는 1930년대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USSR)의 외교관이었던 남편과 이혼한 후, 스탈린(1879-1953) 등의 러시아 인사들을 설득하여 제정 러시아시대의 꽃 장식, 가구, 그림, 희귀한 파르베제 니콜라이 2세 [Aleksandrovich Nikolai II]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재위 1894~1917). 적극적인 극동진출로 러일전쟁을 초래하여 국내에서는 혁명이 일어났으며 2월혁명(1917)으로 제정(帝政)이 붕괴되었다.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3세의 아들이다. 1891년 황태자로서 극동방문 중 일본에서 이른바 오쓰사건[大津事件]으로 부상을 입었다. 성격은 선량하고 교양도 있었으나 황제로서는 부적격하였다. 독일의 공주이며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손녀인 알렉산드라와 결혼하여 살면서 그 영향하에 있었고, 또 왕세자의 혈우병으로 인하여 G.E.라스푸틴의 전횡을 초래하였다. 정치적으로는 서유럽식 입헌정치의 도입을 반대하고 보수적인 전제정치를 고집하였다. 3국간섭, 동청철도( 투르크메니스탄 [Turkmenistan] 중앙아시아 남단에 나라로, 1865년 제정러시아의 침략을 받은 후 1884년 합병되었다. 1918년 4월 러시아군에 의해 투르크멘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공화국이 선포되었고 1924년 10월 투르크멘 소비에트 사회주의공화국이 수립되었다. 1991년 10월 구소련의 해체와 함께 독립하였다. 정식명칭은 투르크메니스탄공화국(Republic of Turkmenistan)이며, 투르크메니아(Turkmenia)라고도 부른다. 북쪽으로 카자흐스탄, 북동쪽으로 우즈베키스탄, 동남쪽으로 아프가니스탄, 남쪽으로 이란과 국경을 접하고, 서쪽으로는 카스피해(海)에 면한다. 국명은 페르시아어(語)로 '투르크멘족(族)의 나라'라는 뜻으로, 9세기 말 이후 투르크계의 오우즈족이 이주했을 때부터 투르크멘이라는 명칭이 등장했다. 자원이 풍부하여 가스 매장량이 세계 1 폴 비노그라도프 [Paul Gavrilovitch Vinogradoff] 영국의 법학자·역사학자. 러시아 출생으로 제정 러시아의 압정 하에 영국으로 귀화하여 옥스퍼드대학의 법률학 교수가 되었다. 영국 중세사 연구에 큰 업적을 남겼으며, '고전학설'의 대표이다. 저서에 《장원의 발달》이 있다. 러시아 출생. 모스크바대학을 졸업하고 모교의 교수를 지낸 뒤, 1902년 제정 러시아의 압정(壓政)하에 사직하고, 1918년 영국에 귀화하여 옥스퍼드대학의 법률학 교수가 되었다. 그의 연구는 널리 유럽 여러 나라에 미쳤는데, 특히 영국 중세사 연구에 큰 업적을 남겼다. 고포툠킨호의 반란 [Vosstanie na Bponenostse Potiomkin, ─號─反亂] 1905년 6월 14∼24일 제정 러시아의 흑해함대 전함 포툠킨호의 수병들이 일으킨 혁명적 반란. 약 800명의 수병들이 썩은 고기의 배식에 불만을 품고 있던 중 사관이 수병 1명을 사살하자 마투셴코를 지도자로 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수병들은 일부 사관을 살해하고 나머지 사관을 하선시킨 후 마스트에 적기(赤旗)를 내걸고 당시 총파업을 하고 있던 오데사항(港)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다른 군함으로부터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식량·연료도 모자라서 부득이 루마니아의 콘스탄츠에 입항하여 당국에 인도되었다. 이 사건은 1905년의 혁명 중 최대 사건의 하나로서 조로수호통상조약 [朝露修好通商條約] 1884년(고종 21) 7월 조선과 제정 러시아가 체결한 통상조약. 1882년 조미조약에 이어 조독 ·조영조약이 맺어지자 러시아도 조선과의 국교체결에 적극 나섰다. 당시 러시아는 조선에 종주권(宗主權)을 주장하던 중국의 이홍장(李鴻章)에게 수교 알선을 요청했지만, 중국은 러시아와 조선의 접근을 우려하여 거절하였다. 이에 러시아는 그리고리 라스푸틴 [Grigorii Efimovich Rasputin] 제정러시아 말기의 수도사이자 심령술사로서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신임을 얻어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서부시베리아의 관문인 튜멘 주(Tyumen Oblast) 토볼스크(Tobolsk) 근교의 포크로브스코예(Pokrovskoye) 출신이다. 에핌 라스푸틴(Efim Yakovlevich Rasputin)과 안나 파르슈코바(Anna Parshukova) 부부 사이에서 9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으나 앞서 태어난 형제들이 모두 일찍 죽었으므로 실제로는 장남이나 마찬가지였다. 프라스코비아 두브로비나(Praskovia Fyodorovna Dubrovina, 1866 미하일 스페란스키 [Mikhail Mikhailovich Speranskii] 러시아 정치가 겸 백작. 내무장관이 되고, 법률제정위원회 위원장으로서 러시아 최초의 헌법 초안이라 할 수 있는 자유주의적인 국가 개혁안을 제출했다. 니콜라이1세의 황제관방 제2과에서 '1649년의 법전' 이래의《러시아제국의 법률집》과 현행법을 계통적으로 정리한《러시아제국 대법전》편집을 지휘했다. 체르쿠티노에서 출생했다. 성직자의 아들로 태어나,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신학교를 졸업하였다. 1799년 관계(官界)에 투신, 알렉산드르 1세의 신임을 얻어 1801년 내무장관이 되고, 법률제정위원회 위원장으로서 1809년 러시아 최초의 헌법 초안이라 할 수 있는 자유주의적인 드미트리 돈스코이함 [Дмитрий Донской(러), Dmitri Donskoi] 1905년 5월 러일전쟁 당시 일본 해군의 공격을 받아 침몰된 제정러시아 발틱함대 소속의 수송선. 무게는 5,800t이다. 명칭은 14세기 리투아니아와 몽고군을 격퇴한 모스크바 대공(大公) 드미트리 돈스코이의 이름을 딴 것이다. 제정러시아의 발틱함대 소속 수송선이자 철갑 순양함으로, 기록에 따르면 드미트리 돈스코이함은 38척으로 이루어진 발틱함대의 일원으로 러일전쟁이 끝나 가던 1905년 5월 26일 대한해협에 도착하였다. 발틱함대는 당시 세계 최강을 자랑하던 함대로, 당시 이 함대에는 전쟁 중 군자금으로 사용할 금괴와 골동품을 실은 경리함(經 바클라이 드 톨리 [Mikhail Bogdanovich Barclay de Tolly] 스코틀랜드계(系)의 제정 러시아 장군. 핀란드 전쟁에 출정하여 우메오를 탈취, 이름을 날렸다. 사령관, 원수를 지냈으며 1815년에는 공작이 되었다. 터키 전쟁, 스웨덴 전쟁, 폴란드 전쟁에 종군하였다. 1808∼1809년의 핀란드 전쟁에 사령관으로서 출정하여 보스니아만(灣) 건너의 우메오를 탈취하여 용명을 떨쳤다. 1810∼1812년 육군장관을 지냈으나 1812년 나폴레옹 1세 군과의 전쟁에서 그의 후퇴전술은 비난을 받았고, 알렉산드르 3세 동상 [Statue of Aleksandr III] 러시아 이르쿠츠크주(州)에 있는 제정 러시아의 황제인 알렉산드르 3세의 동상. 이르쿠츠크 향토박물관 옆에 자리 잡고 있다. 1908년 시베리아철도 건설을 기념하기 위해 철도의 건설 후원자로 여겨지는 알렉산드르 3세의 동상을 세웠다. 러시아혁명이 일어난 뒤에 법령에 의해 동상이 철거되었다가 1960년 이르쿠츠크의 오랜 명물이 된 오벨리스크가 세워 알렉산드로비치 미하일 [Aleksandrovich Mikhail]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3세의 셋째 아들. 대공(大公)이다. 1917년 3월혁명 때 니콜라이 2세는 왕위를 동생 미하일에게 물려주었다. 민중은 제정의 존속에 반대, 미하일은 다음날 3일에 즉위 사퇴선언을 하였다. 대공(大公)이다. 1917년의 3월혁명 때 왕위에서 물러나지 않을 수 없게 된 니콜라이 2세는 병약한 왕세자 알렉세이에게 왕위를 물려줄 것을 피하고, 3월 2일의 퇴위칙서(退位勅書)에서 동생 미하일에게 물려주었다(알렉산드르 3세의 둘째아들 게오르기는 1899년에 죽음). 그 알렉산드르 야코블레프 [Aleksandr Nikolayevich Yakovlev] 러시아의 정치가. 1944년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당중앙위선전부 선전부장, 주 캐나다 대사 등을 거쳐 1985년 당선전부장이 되었다. 1988년에는 당국제정책위 의장에 취임했다. 외교문제 전문가로서 고르바초프 정권의 실질적인 제 2인자였다. 야로슬라프교육대학을 졸업하고, 1944년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1965∼1973년 당중앙위 선전부 선전부장, 1973∼1983년 주(駐)캐나다 대사, 1983∼1985년 소련과학아카데미 세계경제 국제관계연구소 소장을 거쳐 1985년 당선전부장을 역임하였다. 1986년 당서기, 1987년 당정
에스토니아 [Estonia] 동부 유럽의 발트해(海) 연안 끝에 있는 나라로 핀란드와 접한다. 1721년부터 제정러시아의 지배를 받아 오던 중 10월혁명 후인 1918년에 독립하였다. 그러나 1940년 구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연방에 강제 소속되었다가, 구소련의 해체와 함께1991년 8월 연방을 탈퇴하여 독립하였다. 정식명칭은 에스토니아공화국(Republic of Estonia)이다. 동쪽으로 러시아, 남쪽으로 라트비아와 국경을 접하며, 북쪽으로 핀란드만(灣)에 의해 핀란드와 분리되고, 서쪽으로는 발트해(海)를 끼고 스웨덴과 마주한다. 1991년 독립을 하였지만 1945년 전후에 러시아에 귀속된 영토 반환문제, 에스토니아 내 약 50만 명에 이르는 러시아인(人)의 보호문제 등으로 러시아와 갈등을 빚고 있다. 독립 이후 눈에 띄는 경제발전과 고속성장으로 ‘발트의 호랑
타지키스탄 [Tajikistan] 중앙 아시아에 있는 내륙국으로 1895년에 제정러시아의 지배 아래 놓였다. 1924년 부하라(Bukhara) 사회주의공화국의 일부로서 소비에트연방에 편입되었고 다시 우즈베키스탄공화국 내 타지크(Tajik) 자치공화국을 거쳐 1929년 구소련을 구성하는 공화국이 되었으며 구소련의 해체와 함께 1991년 독립하였다. 정식명칭은 타지키스탄공화국(Republic of Tadzhikistan)이다. 북쪽으로 키르기스스탄, 동쪽으로 중국, 남쪽으로 아프가니스탄, 북·서쪽으로 우즈베키스탄과 국경을 접한다. 2002년 파미르 고원의 일부 지역과 타지키스탄의 일부 영토에 대한 중국의 반환 요구를 둘러싸고 중국과 분쟁을 일으켰고, 아직까지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과 국경 분쟁 중이다. 국내적으로는 근대적 독립국가 건설의 경험이 짧은 탓에 독립 후 5년간 심각한 내전을 겪었다.
사회혁명당 [社會革命黨] 제정 러시아의 농민정당(農民政黨). 농민운동이 고조된 1901년 말에 나로드니키[人民主義]의 전통을 이어받아 결성되었다. 지도자로서는 V.M.체르노프, A.F.케렌스키, B.V.사빈코프 등이며, 처음에는 요인암살의 테러 전술을 채택하였다. 1905년 혁명에서 당세를 확장하였으며, 1917년 3월혁명 뒤 멘셰비키와 결
아브하지아 [Abkhazia, Abkhaz, Abkhasia] 흑해 연안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조지아(그루지야)의 자치공화국이다. 1864년 제정러시아에 합병된 후 1992년 7월23일 공식적으로 조지아 내의 자치 공화국으로 인정되었다. 위치 상 북쪽으로는 러시아연방 남부 카라차이-체르케시야자치 공화국과 접하며 서쪽 해안이 흑해이다. 아브하지아인과 그루지아인이 대부분이다. 귤, 차, 담배, 와인의 주생산지이다. 수도는 수후미, 공식언어는 아브하지아어 및 러시아어이다.
블로제니예 [Vlozhenie] 러시아의 로마노프왕조 초기의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 때 제정된 법전(法典). 전 25장 967조. 1648년 6월 불공평한 세제(稅制)와 징병제에 불만을 품은 민중이 봉기하였을 때 사족(士族)의 일부도 이에 동조하자, 이 사태에 대처하기 위하여 소집된 전국회의에서 제정하였다. 농민을 토지에 예속시키고, 돈을 벌려고 다른 지방으로 나간 농민을 자기 소
케네사리 칸 [Kenesary Khan] 카자흐한국의 마지막 칸(재위 1841~1847). 제정러시아의 식민지화에 맞서 격렬하게 대항했다. 카자흐족(族) 국민의용군의 지도자로, 1841년 카자흐족의 마지막 칸으로 공포되었다. 칸으로 즉위할 당시 카자흐한국은 이미 국가로서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카자흐스탄 대부분이 제정러시아에 의해 지배되기 시작한 상태였다. 또한 1822년 이후 러시아 법에 의해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Kyrgyzstan] 중앙 아시아 북부에 있는 내륙국으로, 1864년 제정러시아에 정복되었다. 러시아혁명 후 소비에트 투르키스탄공화국의 일부가 되었고 1926년 키르기스자치공화국, 1936년 키르기스스탄공화국을 거쳐 1991년에 독립하였다. 정식명칭은 키르기스스탄공화국(Republic of Kyrgyzstan)이며, 키르기스스탄은 '키르기스인(人)의 나라'라는 뜻이다. 북쪽으로 카자흐스탄, 서남쪽으로 타지키스탄, 서쪽으로 우즈베키스탄, 동남쪽으로는 중국과 국경을 접한다. 산과 하천에 의한 지형의 변화가 많은 산악국으로 '중앙아시아의 스위스'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 주민의 역사적·문화적 동질성에 따른 것이 아니라 구 소련의 통치 편의에 따라 국경선이 구획되어 카자흐스탄·타지키스탄·우즈베키
페트로프봇킨 [Kuz'ma Sergeevich Petrov-Vodkin] 러시아 제정 말기와 소비에트기에 활약한 화가. 격변기 인간의 불안한 전율과 태동하는 새 질서 속의 긴장된 기대감을 적(赤)·주적(朱赤)·담청(淡靑) 등 선명한 발색과 사각적(斜角的) 비전으로 엮어냈다. 제정 말기와 소비에트기에 걸쳐 활약하였다. 모스크바미술학교의 V.A.세로프 교실에서 공부하고(1897∼1905) 뮌헨으로 가서 아슈베 교수의 지도를 받고 귀국 후 ‘미르 이스쿠스토바(예술세계)’ 등의 모더니즘 그룹을 편력하였다. 초기의 야심작으로 상징과 색채가 대담한
우즈베키스탄 [Uzbekistan] 중앙아시아 중부에 있는 국가로서 19세기 후반 제정러시아의 속국이 되었으며 1924년 10월 구소련의 일원으로 우즈베크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을 수립하였다. 구소련의 붕괴와 함께 1991년 9월 완전 독립하였다. 정식명칭은 우즈베키스탄공화국(Republic of Uzbekistan)이다. 동쪽으로 키르기스스탄과 타지키스탄, 남쪽으로 아프가니스탄, 남서쪽으로 투르크메니스탄, 북쪽으로는 카자흐스탄과 국경을 접한다. 북서 일부는 아랄해(海)에 면한다. 125개 민족이 공존하는 다민족국가이며, 국명은 '우즈베크인(人)의 나라'라는 뜻의 페르시아어(語)에서 유래했다. 행정구역은 1개 자치공화국(respublika), 12개주(viloya), 1개시(shahar)로 되어
막심 고리키 [Maksim Gor'kii] 러시아의 사회주의 혁명가이자 문학 작가로,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제창하고 제정 러시아 하층민의 생활을 묘사하는 등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선구적인 문학가였다. 1901년에는 짜르 타도를 외치며 지하인쇄소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으며, 1905년에 러시아혁명의 기폭제가 된 '피의 일요일' 사건을 주도했던 '가퐁신부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 대표작은 희곡 《밤 주막》(1902), 자전적 3부작 《유년시대》(1914), 《사람들 속에서》(1916), 《나의 대학》(1923) 등이 있다. 1868년 3월 16일 러시아 볼가강 연안의 도시인 니즈니 노브고로드(Nizhni Novgorod)에서 출생하였다. 본명은 알렉세이 막시모비치 페쉬코프(Aleksei Maksimovich Peshkov)이다. 아버지(막심 사바치예비치 페쉬코프)는 목수였고 어머니(바르바라 바실리예브)는 작은 염색공장을 운영하는 집안의 딸이었다. 고리키가 3세때 아버지가 사망하자 어머니와 함께 외가에서 자랐지만 어머니가 재혼하여 모스크바로 떠나자 외할머니에게 의탁하여 성장
아프가니스탄 [Afghanistan] 인도, 서남아시아, 중앙아시아 세 지역의 지리적 요충지에 위치한 나라로, 19세기부터 영국과 제정러시아의 침략 대상이 되었다. 1905년 영국의 보호국된 이후 1919년 라왈핀디 화평조약으로 독립이 정식으로 승인되었지만 지리적 중요성 때문에 1979년에는 구소련군, 2002년에는 미국과 영국 등 연합군의 공격을 받았다. 정식 명칭은 아프가니스탄이슬람공화국(Islamic Republic of Afghanistan)이다. 파미르 고원의 남서쪽에 있으며, 국토 대부분이 해발고도 1000m를 넘는 고원에 위치한다. 동쪽과 남쪽으로 파키스탄, 서쪽으로 이란, 북쪽으로 우즈베키스탄·투르크메니스탄·타지키스탄, 북동쪽으로는 중국 신장웨이우얼자치구[新疆維吾爾自治區]에 접한다. 2001년 미국대폭발테러사건 후 오사마 빈 라덴의 양도 요구를 거부하자 미국, 영국 및 반군(反軍)인 북부동맹
힐우드 박물관 [Hillwood Museum] 미국 워싱턴 D.C.에 있는 제정 러시아시대 예술품을 전시하는 박물관. 마조리 메리웨더 포스트(Marjorie Merriweather Post)의 소유지였다. 포스트는 1930년대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USSR)의 외교관이었던 남편과 이혼한 후, 스탈린(1879-1953) 등의 러시아 인사들을 설득하여 제정 러시아시대의 꽃 장식, 가구, 그림, 희귀한 파르베제
니콜라이 2세 [Aleksandrovich Nikolai II]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재위 1894~1917). 적극적인 극동진출로 러일전쟁을 초래하여 국내에서는 혁명이 일어났으며 2월혁명(1917)으로 제정(帝政)이 붕괴되었다.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3세의 아들이다. 1891년 황태자로서 극동방문 중 일본에서 이른바 오쓰사건[大津事件]으로 부상을 입었다. 성격은 선량하고 교양도 있었으나 황제로서는 부적격하였다. 독일의 공주이며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손녀인 알렉산드라와 결혼하여 살면서 그 영향하에 있었고, 또 왕세자의 혈우병으로 인하여 G.E.라스푸틴의 전횡을 초래하였다. 정치적으로는 서유럽식 입헌정치의 도입을 반대하고 보수적인 전제정치를 고집하였다. 3국간섭, 동청철도(
투르크메니스탄 [Turkmenistan] 중앙아시아 남단에 나라로, 1865년 제정러시아의 침략을 받은 후 1884년 합병되었다. 1918년 4월 러시아군에 의해 투르크멘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공화국이 선포되었고 1924년 10월 투르크멘 소비에트 사회주의공화국이 수립되었다. 1991년 10월 구소련의 해체와 함께 독립하였다. 정식명칭은 투르크메니스탄공화국(Republic of Turkmenistan)이며, 투르크메니아(Turkmenia)라고도 부른다. 북쪽으로 카자흐스탄, 북동쪽으로 우즈베키스탄, 동남쪽으로 아프가니스탄, 남쪽으로 이란과 국경을 접하고, 서쪽으로는 카스피해(海)에 면한다. 국명은 페르시아어(語)로 '투르크멘족(族)의 나라'라는 뜻으로, 9세기 말 이후 투르크계의 오우즈족이 이주했을 때부터 투르크멘이라는 명칭이 등장했다. 자원이 풍부하여 가스 매장량이 세계 1
폴 비노그라도프 [Paul Gavrilovitch Vinogradoff] 영국의 법학자·역사학자. 러시아 출생으로 제정 러시아의 압정 하에 영국으로 귀화하여 옥스퍼드대학의 법률학 교수가 되었다. 영국 중세사 연구에 큰 업적을 남겼으며, '고전학설'의 대표이다. 저서에 《장원의 발달》이 있다. 러시아 출생. 모스크바대학을 졸업하고 모교의 교수를 지낸 뒤, 1902년 제정 러시아의 압정(壓政)하에 사직하고, 1918년 영국에 귀화하여 옥스퍼드대학의 법률학 교수가 되었다. 그의 연구는 널리 유럽 여러 나라에 미쳤는데, 특히 영국 중세사 연구에 큰 업적을 남겼다. 고포툠킨호의 반란 [Vosstanie na Bponenostse Potiomkin, ─號─反亂] 1905년 6월 14∼24일 제정 러시아의 흑해함대 전함 포툠킨호의 수병들이 일으킨 혁명적 반란. 약 800명의 수병들이 썩은 고기의 배식에 불만을 품고 있던 중 사관이 수병 1명을 사살하자 마투셴코를 지도자로 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수병들은 일부 사관을 살해하고 나머지 사관을 하선시킨 후 마스트에 적기(赤旗)를 내걸고 당시 총파업을 하고 있던 오데사항(港)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다른 군함으로부터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식량·연료도 모자라서 부득이 루마니아의 콘스탄츠에 입항하여 당국에 인도되었다. 이 사건은 1905년의 혁명 중 최대 사건의 하나로서 조로수호통상조약 [朝露修好通商條約] 1884년(고종 21) 7월 조선과 제정 러시아가 체결한 통상조약. 1882년 조미조약에 이어 조독 ·조영조약이 맺어지자 러시아도 조선과의 국교체결에 적극 나섰다. 당시 러시아는 조선에 종주권(宗主權)을 주장하던 중국의 이홍장(李鴻章)에게 수교 알선을 요청했지만, 중국은 러시아와 조선의 접근을 우려하여 거절하였다. 이에 러시아는 그리고리 라스푸틴 [Grigorii Efimovich Rasputin] 제정러시아 말기의 수도사이자 심령술사로서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신임을 얻어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서부시베리아의 관문인 튜멘 주(Tyumen Oblast) 토볼스크(Tobolsk) 근교의 포크로브스코예(Pokrovskoye) 출신이다. 에핌 라스푸틴(Efim Yakovlevich Rasputin)과 안나 파르슈코바(Anna Parshukova) 부부 사이에서 9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으나 앞서 태어난 형제들이 모두 일찍 죽었으므로 실제로는 장남이나 마찬가지였다. 프라스코비아 두브로비나(Praskovia Fyodorovna Dubrovina, 1866 미하일 스페란스키 [Mikhail Mikhailovich Speranskii] 러시아 정치가 겸 백작. 내무장관이 되고, 법률제정위원회 위원장으로서 러시아 최초의 헌법 초안이라 할 수 있는 자유주의적인 국가 개혁안을 제출했다. 니콜라이1세의 황제관방 제2과에서 '1649년의 법전' 이래의《러시아제국의 법률집》과 현행법을 계통적으로 정리한《러시아제국 대법전》편집을 지휘했다. 체르쿠티노에서 출생했다. 성직자의 아들로 태어나,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신학교를 졸업하였다. 1799년 관계(官界)에 투신, 알렉산드르 1세의 신임을 얻어 1801년 내무장관이 되고, 법률제정위원회 위원장으로서 1809년 러시아 최초의 헌법 초안이라 할 수 있는 자유주의적인 드미트리 돈스코이함 [Дмитрий Донской(러), Dmitri Donskoi] 1905년 5월 러일전쟁 당시 일본 해군의 공격을 받아 침몰된 제정러시아 발틱함대 소속의 수송선. 무게는 5,800t이다. 명칭은 14세기 리투아니아와 몽고군을 격퇴한 모스크바 대공(大公) 드미트리 돈스코이의 이름을 딴 것이다. 제정러시아의 발틱함대 소속 수송선이자 철갑 순양함으로, 기록에 따르면 드미트리 돈스코이함은 38척으로 이루어진 발틱함대의 일원으로 러일전쟁이 끝나 가던 1905년 5월 26일 대한해협에 도착하였다. 발틱함대는 당시 세계 최강을 자랑하던 함대로, 당시 이 함대에는 전쟁 중 군자금으로 사용할 금괴와 골동품을 실은 경리함(經 바클라이 드 톨리 [Mikhail Bogdanovich Barclay de Tolly] 스코틀랜드계(系)의 제정 러시아 장군. 핀란드 전쟁에 출정하여 우메오를 탈취, 이름을 날렸다. 사령관, 원수를 지냈으며 1815년에는 공작이 되었다. 터키 전쟁, 스웨덴 전쟁, 폴란드 전쟁에 종군하였다. 1808∼1809년의 핀란드 전쟁에 사령관으로서 출정하여 보스니아만(灣) 건너의 우메오를 탈취하여 용명을 떨쳤다. 1810∼1812년 육군장관을 지냈으나 1812년 나폴레옹 1세 군과의 전쟁에서 그의 후퇴전술은 비난을 받았고, 알렉산드르 3세 동상 [Statue of Aleksandr III] 러시아 이르쿠츠크주(州)에 있는 제정 러시아의 황제인 알렉산드르 3세의 동상. 이르쿠츠크 향토박물관 옆에 자리 잡고 있다. 1908년 시베리아철도 건설을 기념하기 위해 철도의 건설 후원자로 여겨지는 알렉산드르 3세의 동상을 세웠다. 러시아혁명이 일어난 뒤에 법령에 의해 동상이 철거되었다가 1960년 이르쿠츠크의 오랜 명물이 된 오벨리스크가 세워 알렉산드로비치 미하일 [Aleksandrovich Mikhail]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3세의 셋째 아들. 대공(大公)이다. 1917년 3월혁명 때 니콜라이 2세는 왕위를 동생 미하일에게 물려주었다. 민중은 제정의 존속에 반대, 미하일은 다음날 3일에 즉위 사퇴선언을 하였다. 대공(大公)이다. 1917년의 3월혁명 때 왕위에서 물러나지 않을 수 없게 된 니콜라이 2세는 병약한 왕세자 알렉세이에게 왕위를 물려줄 것을 피하고, 3월 2일의 퇴위칙서(退位勅書)에서 동생 미하일에게 물려주었다(알렉산드르 3세의 둘째아들 게오르기는 1899년에 죽음). 그 알렉산드르 야코블레프 [Aleksandr Nikolayevich Yakovlev] 러시아의 정치가. 1944년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당중앙위선전부 선전부장, 주 캐나다 대사 등을 거쳐 1985년 당선전부장이 되었다. 1988년에는 당국제정책위 의장에 취임했다. 외교문제 전문가로서 고르바초프 정권의 실질적인 제 2인자였다. 야로슬라프교육대학을 졸업하고, 1944년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1965∼1973년 당중앙위 선전부 선전부장, 1973∼1983년 주(駐)캐나다 대사, 1983∼1985년 소련과학아카데미 세계경제 국제관계연구소 소장을 거쳐 1985년 당선전부장을 역임하였다. 1986년 당서기, 1987년 당정
조로수호통상조약 [朝露修好通商條約] 1884년(고종 21) 7월 조선과 제정 러시아가 체결한 통상조약. 1882년 조미조약에 이어 조독 ·조영조약이 맺어지자 러시아도 조선과의 국교체결에 적극 나섰다. 당시 러시아는 조선에 종주권(宗主權)을 주장하던 중국의 이홍장(李鴻章)에게 수교 알선을 요청했지만, 중국은 러시아와 조선의 접근을 우려하여 거절하였다. 이에 러시아는
그리고리 라스푸틴 [Grigorii Efimovich Rasputin] 제정러시아 말기의 수도사이자 심령술사로서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신임을 얻어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서부시베리아의 관문인 튜멘 주(Tyumen Oblast) 토볼스크(Tobolsk) 근교의 포크로브스코예(Pokrovskoye) 출신이다. 에핌 라스푸틴(Efim Yakovlevich Rasputin)과 안나 파르슈코바(Anna Parshukova) 부부 사이에서 9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으나 앞서 태어난 형제들이 모두 일찍 죽었으므로 실제로는 장남이나 마찬가지였다. 프라스코비아 두브로비나(Praskovia Fyodorovna Dubrovina, 1866
미하일 스페란스키 [Mikhail Mikhailovich Speranskii] 러시아 정치가 겸 백작. 내무장관이 되고, 법률제정위원회 위원장으로서 러시아 최초의 헌법 초안이라 할 수 있는 자유주의적인 국가 개혁안을 제출했다. 니콜라이1세의 황제관방 제2과에서 '1649년의 법전' 이래의《러시아제국의 법률집》과 현행법을 계통적으로 정리한《러시아제국 대법전》편집을 지휘했다. 체르쿠티노에서 출생했다. 성직자의 아들로 태어나,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신학교를 졸업하였다. 1799년 관계(官界)에 투신, 알렉산드르 1세의 신임을 얻어 1801년 내무장관이 되고, 법률제정위원회 위원장으로서 1809년 러시아 최초의 헌법 초안이라 할 수 있는 자유주의적인
드미트리 돈스코이함 [Дмитрий Донской(러), Dmitri Donskoi] 1905년 5월 러일전쟁 당시 일본 해군의 공격을 받아 침몰된 제정러시아 발틱함대 소속의 수송선. 무게는 5,800t이다. 명칭은 14세기 리투아니아와 몽고군을 격퇴한 모스크바 대공(大公) 드미트리 돈스코이의 이름을 딴 것이다. 제정러시아의 발틱함대 소속 수송선이자 철갑 순양함으로, 기록에 따르면 드미트리 돈스코이함은 38척으로 이루어진 발틱함대의 일원으로 러일전쟁이 끝나 가던 1905년 5월 26일 대한해협에 도착하였다. 발틱함대는 당시 세계 최강을 자랑하던 함대로, 당시 이 함대에는 전쟁 중 군자금으로 사용할 금괴와 골동품을 실은 경리함(經
바클라이 드 톨리 [Mikhail Bogdanovich Barclay de Tolly] 스코틀랜드계(系)의 제정 러시아 장군. 핀란드 전쟁에 출정하여 우메오를 탈취, 이름을 날렸다. 사령관, 원수를 지냈으며 1815년에는 공작이 되었다. 터키 전쟁, 스웨덴 전쟁, 폴란드 전쟁에 종군하였다. 1808∼1809년의 핀란드 전쟁에 사령관으로서 출정하여 보스니아만(灣) 건너의 우메오를 탈취하여 용명을 떨쳤다. 1810∼1812년 육군장관을 지냈으나 1812년 나폴레옹 1세 군과의 전쟁에서 그의 후퇴전술은 비난을 받았고,
알렉산드르 3세 동상 [Statue of Aleksandr III] 러시아 이르쿠츠크주(州)에 있는 제정 러시아의 황제인 알렉산드르 3세의 동상. 이르쿠츠크 향토박물관 옆에 자리 잡고 있다. 1908년 시베리아철도 건설을 기념하기 위해 철도의 건설 후원자로 여겨지는 알렉산드르 3세의 동상을 세웠다. 러시아혁명이 일어난 뒤에 법령에 의해 동상이 철거되었다가 1960년 이르쿠츠크의 오랜 명물이 된 오벨리스크가 세워
알렉산드로비치 미하일 [Aleksandrovich Mikhail]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3세의 셋째 아들. 대공(大公)이다. 1917년 3월혁명 때 니콜라이 2세는 왕위를 동생 미하일에게 물려주었다. 민중은 제정의 존속에 반대, 미하일은 다음날 3일에 즉위 사퇴선언을 하였다. 대공(大公)이다. 1917년의 3월혁명 때 왕위에서 물러나지 않을 수 없게 된 니콜라이 2세는 병약한 왕세자 알렉세이에게 왕위를 물려줄 것을 피하고, 3월 2일의 퇴위칙서(退位勅書)에서 동생 미하일에게 물려주었다(알렉산드르 3세의 둘째아들 게오르기는 1899년에 죽음). 그
알렉산드르 야코블레프 [Aleksandr Nikolayevich Yakovlev] 러시아의 정치가. 1944년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당중앙위선전부 선전부장, 주 캐나다 대사 등을 거쳐 1985년 당선전부장이 되었다. 1988년에는 당국제정책위 의장에 취임했다. 외교문제 전문가로서 고르바초프 정권의 실질적인 제 2인자였다. 야로슬라프교육대학을 졸업하고, 1944년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1965∼1973년 당중앙위 선전부 선전부장, 1973∼1983년 주(駐)캐나다 대사, 1983∼1985년 소련과학아카데미 세계경제 국제관계연구소 소장을 거쳐 1985년 당선전부장을 역임하였다. 1986년 당서기, 1987년 당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