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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 법주사
2025년 03월 23일(일요일)
법주사(法住寺)는 신라에 불교가 전파된 24년 뒤 진흥왕(553년) 때 의신조사가 인도(천축)에 갔다가 흰 노새에 불경을 싣고 절을 지을 터를 찾고 있는 중에 노새가 지금의 법주사터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울었다고 합니다
노새의 기이한 행적을 보고 주변을 살펴보니 아름다운 경치와 비범한 기운이 느껴져 이곳에 절을 지은 후 인도에서 가져온 경전이 머물렀기에 "부처님이 머물렀다"라는 뜻에서 법주사라고 절집 이름을 지었다고 합니다
보은 법주사 철솥(法住寺 鐵鑊) (보물 제1413호)
큰 사발(大鉢)의 형상을 한 법주사(法住寺) 철확(鐵鑊)은 높이 1.2m, 지름 2.7m, 둘레 10.8m, 두께 10∼3㎝의 거대한 크기로, 상부의 외반된 전이 달린 구연부는 둥글게 처리하였고 기벽(器壁)의 두께는 3∼5㎝ 정도이며 무게는 약 20여 톤으로 추정됩니다.
원래는 조사각 뒤쪽 석옹(돌도가니)이 있는 곳에서 시냇가 쪽으로 약 30m 떨어진 곳에 있던 것을 지금의 위치로 옮긴 것입니다.
비교적 단순한 구조에 몸체에는 아무런 문양이나 기록이 주조되지 않아 제조연대·제작자 및 제조방법 등을 알 수 없지만, 용해온도가 청동보다 훨씬 높은 주철로 주조된 대형의 주물솥이라는 점에서 기술사적 측면에서 매우 귀중한 자료입니다.
법주사(法住寺)의 사세(寺勢)가 가장 융성했던 시기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이 철확(鐵鑊)은 국내에 전하는 사례가 매우 희귀할 뿐만 아니라 거의 완벽한 조형상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720년(성덕왕 18)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쌀 40가마를 담을 수 있는 부피를 지니고 있습니다.
법주사(法住寺)가 번창하여 3천여 명의 승려가 모여살 때 밥솥 또는 장국을 끓이는 데 사용하였다고 전해집니다.
법주사 철확 (보물 제1413호)
이 쇠솥은 큰 철확(鐵鑊)이라고도 부릅니다.
큰 사발 형상을 하고 있는 이 철솥은 쌀 40가마를 담을 수 있는 규모로 법조사에 전하여 오는 말로는 법주사가 한창 번성하여 3,000명의 승도가 운집하여 있을 때 장국 솥으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 사찰의 삼문(三門) 체계가 자리 잡으면서 일주문(一柱門) , 금강문(金剛門), 천왕문(天王門) 등이 나타났습니다.
금강문은 야차신을 거느리고 불법을 수호하는 역할을 하는 금강역사(金剛力士)를 모신 문이며, 천왕문은 사천왕상(四天王像)을 두고 외부의 사악한 모든 것을 막는 역할을 합니다.
천왕문(天王門) (보물 2024년 04월 지정)
천왕문은 봉황문(鳳凰門) 이라고도 하며 본래 맑고 깨끗해야 할 부처님의 세계를 지키는 사천왕(四天王)을 모신문입니다. 동쪽의 지국천왕(持國天王), 서쪽의 광목천왕(廣目天王), 남쪽의 증장천왕(增長天王), 북쪽의 다문천왕(多聞天王)깨서 삼보(三寶)를 지키시는 문입니다.
'보은 법주사 소조사천왕상' 역시 전란 이후 조성됐으며, 17세기 중엽에 완성했으리라 추정됩니다.
법주사 소조사천왕상은 나무로 골격을 만들고 그 위에 흙을 덧붙여 만들었는데 국내에 현전하는 사천왕상 중 매우 드문 입상 형식이라는 점, 5.7m에 이르는 최대 크기의 사천왕상이라는 점에서 조형적으로 가치가 있습니다.
천왕문(天王門) 편액
법주사 소조사천왕상(法住寺 塑造四天王像) (보물 2023년 09월 지정)
북방 다문천왕(多聞天王)은 비사문천이라고도 하며 항상 부처님의 도량을 지키면서 설법을 듣고, 왼손에는 비파를 들고 있으며 야차와 나찰을 거느리고 있습니다
동방 지국천왕(持國天王)은 안민의 신으로서 선한 자에게 상을 내리고 악한자에게 벌을 주어 항상 인간과 국토를 보호하기 위한 천왕입니다. 왼손에는 칼을 쥐고 오른손바닥에는 보석을 올려놓고 있으면 건달바를 거느리고 있습니다.
남방 증장천왕(增長天王)은 자신의 위덕으로써 만물이 태어날 수 있는 덕을 베풀겠다는 서원을 세운 천왕입니다. 오른손은 용을 잡고 왼손은 용의 여의주를 들고 있습니다. 구반다등 무수한 귀신을 거느리고 있습니다.
서방 광목천왕(廣目天王)은 잡어, 악안으로 불리는데, 이는 웅변으로 나쁜 이야기를 물리치거나 눈을 크게 부릅뜬 위엄으로 나쁜 것을 물리치기 때문입니다. 왼손에는 보탑과 오른손에는 삼지창을 들고 있고 용과 비사사를 거느리고 있습니다.
다른 사천왕상이 머리에 보살상이 착용하는 보관을 쓰고 있는 것과 달리 법주사의 경우 남방증장천왕과 북방다문천왕만 보살형 화관을 쓰고 있고, 동방지국천왕과 서방광목천왕은 깃털 달린 투구형태의 관을 쓰고 있다는 점에서 미술사적으로 가치가 높습니다.
특히 법주사 소조사천왕상 발밑에는 생령으로 청나라 관리와 조선 관리를 둬 1636년 발생한 병자호란의 치욕을 극복하고, 조선의 탐관오리들에게 종교적 감계(鑑戒)와 교훈을 주고자 의도한 최초의 조각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큽니다.
법주사 팔상전(法住寺 捌相殿) (국보 제55호)
팔상전(5층 목탑)은 국보 제 55호인 법주사 팔상전(捌相殿)입니다. 높이가 21.6m나 되는 팔상전은 법주사 창건 당시에 의신대사가 처음 세웠다고 전해지는데, 신라 혜공왕 12년에 진표율사가 중창했으나 정유재란 당시 불에 탔으며, 인조 2년인 1602년 사명대사(泗溟大師)와 벽암대사(碧巖大師)의 지휘로 스님 88명, 일반인 26명이 참여해 복원된 것 입니다.
건물은 2단으로 된 석조 기단 위에 세워졌으며 기단의 각각의 면 중앙에 돌계단을 만들어 놓아 쉽게 접할 수 있게 했습니다
1층부터 4층까지는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공포가 기둥 위에만 설치된 주심포 양식이고 5층은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공포를 더 설치한 다포 양식으로 꾸몄습니다
내 상식으로는 하중을 많이 받는 1층은 다포 양식으로 하고 5층은 주심포 양식이 맞을 것 같은데 여하튼 두 가지 기법을 쓴 것이 특이합니다
2층부터 4층까지 창문을 달아 빛을 받아들이게 했습니다.
법주사 팔상전은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유일한 목탑으로 법주사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이기도 합니다. 팔상전 내부 벽면에 석가모니의 일생을 8장면으로 나누어 그린 팔상도(八相圖)가 그려져 있어 팔상전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팔상도는 다음 여덟 개의 그림입니다.
1. 도솔래의상(兜率來儀相) : 석가모니가 탄생을 위해 도솔천을 떠나 지상으로 날아오는 모습
2. 비람강생상(毘藍降生相) : 마야 부인이 룸비니 동산에서 석가모니를 출산하는 모습
3. 사문유관상(四門遊觀相) : 싯달타 왕자가 동서남북 성문 밖에서 생로병사를 지켜보는 모습
4. 유성출가상(踰城出家相) : 29세 싯달타가 왕자의 자리를 버리고 성을 떠나 출가하는 모습
5. 설산수도상(雪山修道相) : 설산에 들어가 6년 동안 고행하는 모습
6. 수하항마상(樹下降魔相) : 나무 아래에서 용맹정진하여 온갖 마귀들을 물리치는 모습
7. 녹야전법상(鹿野轉法相) : 진리를 깨달은 석가모니가 녹야원에 가서 설법하는 모습
8. 쌍림열반상(雙林涅槃相) : 석가모니가 80세에 사라나무 숲에서 열반에 드는 모습
팔상전 상륜부
팔상전이 탑이냐? 전각이냐? 라는 문제로 의견이 분분했었는데, 1968년 보수를 위해 해체 과정에서 심초석이라는 거대한 기둥의 뿌리부분에서 사리장엄구가 나와 탑임이 증명되었고, 팔상전 상륜부의 장식이 탑의 양식이기에 지금은 목조탑으로 인정되고 있습니다.
팔상전(法住寺 捌相殿) 편액
여기서 팔(捌)은 '깨트릴 팔'이 아니라 八(여덟 팔)의 '갖은자'입니다. 한자로 숫자를 표기할 때는 함부로 고치지 못하게 하기 위해 같은 발음의 복잡한 글자로 기록하기도 합니다. 즉, 같은 뜻을 지닌 원 글자보다 획을 많이 하여 구성을 달리한 글자를 '갖은자'라 합니다.
팔상도(八相圖)
팔상전에 걸려 있는 팔상도는 19세기 말에 새롭게 제작된 것입니다. 당시 주지로 있던 탄응(坦應) 비구의 주도하에 1897년 당시에 유명한 화승이었던 금호당 약효(若效, 1846~1928), 영운당 봉수(奉秀, 1868~1900 활동) 등이 참여하여 제작한 조선 말기를 대표하는 불화입니다.
비람강생상(좌), 도솔래의상(우)
첫번째 도솔래의(兜率來儀) 상(像)은 도솔천(兜率天)에서 내려와 모친의 태(胎)로 들어오는 모습입니다.
흰 코끼리 위에 앉은 호명보살(護明菩薩)이 구름을 타고 지상으로 내려와 2층 누각으로 이루어진 마야(摩耶)부인의 침실로 들어옵니다.
두 번째는 룸비니동산에서 붓다가 될 태자가 세상에 태어나는 비람강생(毘藍降生)입니다.
마야부인은 산달이되어 친정으로 향하다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난 룸비니 동산에서 산기(産氣)를 느껴 곧바로 오른손으로 무우수(無憂樹) 가지를 붙잡고 오른쪽 옆구리로 태자를 낳았습니다.
이 수하탄생(樹下誕生) 장면에 태자가 누구의 부축도 없이 혼자서 사방으로 일곱 걸음을 걸으며 "천상천하에는 오직 나만이 고귀하다"고 사자후(獅子吼)를 하는 사방칠보행(四方七步行) 장면이 더해졌습니다.
아홉 마리 용이 물을 토해 태자를 씻어주는 구룡관욕(九龍灌浴) 장면도 세분되었습니다.
사문유관상(좌), 유성출가상(우)
세 번째는 사방의 문에서 생로병사(生老病死)와 출가 사문을 만나는 사문유관(四門遊觀) 상입니다.
또래들과의 무예 시합에서 기량을 한껏 발휘하는 등 한동안 왕자 역할에 충실하던 태자는 얼마 가지 않아 다시 큰 의문이 살아났습니다.
동문으로 나가서 늙어 힘들어하는 노인을 만나고, 남문에서는 길가에서 병든 사람을 만나고, 서문으로 나가서는 하얀 거적으로 덮여 죽어나가는 광경을 보게 되고, 북문으로 길을 잡아 형형한 눈빛과 편안하기 그지없는 출가 사문을 만나 출가 의지를 북돋우게 됩니다.
네 번째는 성을 넘어 출가한 유성출가(踰城出家) 상입니다.
사문을 본 후 태자의 마음은 태산같이 굳어졌습니다.
태자는 부왕인 슈도다나왕(淨飯王, 정반왕)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모두 잠든 깊은 밤 마부 찬다카(車匿)가 끄는 애마 칸타카를 타고 성을 뛰어 넘어 출가를 결행하였습니다.
수하항마상(좌), 설산수도상(우)
다섯 번째는 흰눈으로 뒤덮인 설산에서 뼈를 깎는 수행을 하는 설산수도(雪山修道) 상입니다.
출가 이후 태자는 정열적인 수행에 몰두하였습니다.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표상이 있는 것도 아니고없는 것도 아닌 삼매의 세계)의 경지에 올랐어도 6년 간의 고행(苦行)에 들어갔습니다.
여섯 번째, 나무 아래 명상에 잠겨 일체의 장해를 물리친 수하항마(樹下降魔) 상은 성도(成道) 상입니다.
태자는 평범한 보리수나무를 찾아 그 아래 자리를 잡고 명상에 들었으나, 명상에 잠긴 태자에게 온갖 방해가 일어났습니다.
깨달음을 막아보려는 마군(魔軍)들의 준동은 때로는 엄청난 군대의 힘으로 공포에 싸이게도 하고 때로는 마왕의 아름다운 세 딸을 보내 온갖 교태로 유혹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도를 이루겠다는 태자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고 마왕은 태자에게 항복하였습니다.
그리고 어느새벽 태자는 이 세상의 모든 이치를 훤히 알아 깨쳤습니다.
녹원전법상(좌), 쌍림열반상(우)
일곱 번째는 녹야원에서 처음으로 진리를 설파한 녹원전법(鹿苑轉法) 상입니다.
도(道)를 이루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분이 된 붓다 세존(世尊)은 한동안 세상의 더없는 이치를 깨친 즐거움에 잠겨 있었습니다.
삼칠일 동안 법락(法樂)에만 잠겨 있자 범천이 그 훌륭한 가르침을 사람들에게 알려줄 것을 권하여서 전법륜을 허락하였습니다.
그 첫째 대상은 6년 동안 가까이서 수행했던 5비구 였습니다.
바라나시로 5비구를 찾아가서 사슴들이 노니는 녹야원(鹿野苑)에서 처음으로 법을 설하니 초전법륜(初轉法輪)입니다.
여덟 번째는 사라수가 늘어선 곳에서 고요히 열반에 든 쌍림열반(雙林涅槃) 상입니다.
45년 동안 중생들을 깨우치고 제자들을 이끌며 큰 빛을 드리운 채 붓다는 80세에 열반에 들었습니다.
최후의 여행을 마치고 쿠쉬나가라의 나이란자나 강에서 목욕을 하고 사라(紗羅) 나무가 줄지어 선 곳에서 고요하게 열반에 들었습니다.
부처가 오른쪽 팔을 굽혀 머리에 대고 편안하게 누워 있습니다.
열반한 붓다가 남긴 사리를 모셔간 왕들은 9개의 보탑(寶塔)을 이루었습니다.
불멸 후 붓다에 대한 신앙은 이 탑(塔)을 중심으로 하여 이루어졌습니다.
탑에 세워진 탑원(塔院)은 신앙의 중심지였고, 출가 수행자들의 수행 공간인 승원(僧院)과 함께 교단의 두 기둥이었습니다.
탑은 또한 후대에 새로운 대승 정신이 일어나는 출발점이기도 하였습니다.
팔상전 평면 중심에는 심주(心柱)가 있고, 그 주변에 사천주(四天柱)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사천주로 연결되는 네 변은 간벽(間壁)으로 막았으며 그 바깥에 불단(佛壇)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1개의 기둥이 정중앙 심주(心柱)에 설치되어 5층까지 연결되고 4개의 기둥 사천주(四天柱)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사천주로 연결되는 네 변은 간벽(間壁)으로 막아 5층까지 연결하고 그 바깥 1층에는 팔상도와 불단(佛壇)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사천주(四天柱)에 의해 형성 된 사방 네 면의 벽에 각각 2폭씩의 탱화, 불상과 나한상을 배치하여 우요삼잡(右繞三匝) 할 수 있는 예불공간으로 꾸몄습니다. 우요삼잡(右繞三匝)은 시계방향으로 세 바퀴 돌면서 예불하는 의례로 실내공간이 확보되지 않은 탑에서는 탑 외곽을 탑돌이 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다음 테두리에 12개의 기둥을 설치하고 또 다음 테두리에는 20개의 기둥을 설치하여 1층과 2층 구조가 되고 3층과 4층은 20개의 기둥이 없어지고 5층은 4개의 기둥만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오백나한상
심주의 4면에는 각 2폭씩 8폭의 팔상도가 있고 그 앞으로 4면에 열반상과 삼존불상을 각각 배치하였고 앞 3열을 오백나한상으로 봉안했습니다
팔상전의 내부 구조는 정중앙에 최상층까지 이어지는 심주(心柱)라고 하는 기둥을 세웁니다.
심주는 최상층 지붕 밖으로 빠져 올라와 상륜장식의 지주역할도 하는데 이를 찰주(擦柱)라고 부릅니다.
심주는 목탑에서 구조의 중심을 이루고, 심주를 중심으로 네 모서리에도 상층까지 이어지는 기둥을 세우는데 이를 사천주(四天柱)라고 부릅니다.
사천주는 일반 건물의 내부 고주(高柱)에 해당합니다.
사천은 불교의 우주관에서 비롯된 수미산 중턱 네 방향에 있는 사천왕상이 주재하는 문을 의미합니다.
팔상전의 각 층마다 창호를 만들어 햇볕이 들어와 밝게 하였고, 건축 자재들이 안정감있게 짜맞추어져 있습니다.
팔상전 옆 석등
높이 289cm, 조성시기는 통일신라시대로 비지정 문화재입니다.
팔상전 옆 석등
높이 2.9m의 이 석등은 통일신라시대 조성된 것으로 복련(覆蓮)이 새겨진 원형의 하대석 위에 8각의 간주석을 세우고 앙련(仰蓮)이 새겨진 상대석을 얹고 그 위의 실제 사용된 흔적이 있는 화사석(火舍石)과 옥개석(屋蓋石)은 금이 간 상태이고 보주(寶珠)를 포함한 상륜부는 근대에 새로 만들어 올린 것으로 보입니다.
범종각(梵鍾閣)
범종각은 팔상전의 동쪽 정면에 있는 앞면 3칸, 옆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입니다. 안에는 범종(梵鍾)·운판(雲板)·법고(法鼓)·목어(木魚) 등이 있는데 이를 ‘불전사물(佛前四物)’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이 네 가지 법구들은 각각의 용도와 의미를 지닙니다. 먼저 범종은 지옥에서 한없는 고통을 겪고 있는 중생들을 위해, 운판은 하늘을 나는 날개 달린 짐승들을 위해 칩니다. 또한 법고는 땅 위에 사는 네 발 달린 짐승들을 위해, 목어는 물속에 사는 생명들을 위해 울립니다.
범종각(梵鍾閣) 편액
범종각에 걸린 편액은 전남 출신 서예가 운포 정병철(雲浦 丁炳哲)선생의 글씨입니다.
약사전(藥師殿)
약사전 앞 석등
전체높이 261cm, 조성시기는 통일신라시대로 비지정문화재입니다.
약사전(藥師殿) 앞 석등은 통일신라시대 조성된 것으로 원형의 하대석 위에 8각의 간주석을 세우고 앙련(仰蓮)이 새겨진 상대석을 얹고 그 위의 실제 사용된 흔적이 있는 금이 간 화사석(火舍石)과 옥개석(屋蓋石)을 올렸고 보주(寶珠)를 포함한 상륜부는 근대에 새로 만들어 올린 것으로 보입니다.
약사전(藥師殿) 편액
법주사 약사전
보은 법주사 약사전은 약사여래불을 모신 전각으로 협시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모셔져 있습니다.
불상 뒤로 1997년에 조성한 약사후불탱을 걸었는데 원형의 두광과 신광을 갖춘 약사불 주위로 보살을 비롯한 권속들이 에워싸고 있는 모습입니다.
보은 법주사 쌍사자 석등(法住寺 雙獅子 石燈) (국보 제5호)
쌍사자석등은 신라 성덕왕 19년(720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데, 높이가 약 3m에 이르는 8각의 석등으로 두 마리의 사자가 뒷발로 하대석(下臺石)을 디디고 서서, 앞발과 입으로 상대석(上臺石)을 받치고 있는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두 마리의 사자가 디디고 선 하대석은 8각의 지대석 위에 놓여 있으며, 상대석 둘레에는 연꽃잎이 이중으로 새겨져 있습니다. 이 쌍사자석등은 신라 시대 석등의 전형적인 형태를 보여주는 것으로 신라 시대의 석조예술품 가운데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국보 제5호로 지정되었습니다.
경남 합천의 영암사지 쌍사자 석등, 국립광주박물관 소장 광양 중흥산성 쌍사자 석등과 함께 신라시대의 3대 석등으로 일컬어집니다.
두툼하고 널따란 8각의 바닥돌이 안정감을 주게 만들고 연화하대석과 쌍사자 기둥, 연화상대석을 한돌에 조각하여 안정감을 더하게 하였습니다.
두 마리 사자는 서로 가슴을 맞대고 뒷발로 아랫돌을 디디고 서서 앞발과 주둥이로는 윗돌을 받치고 있는 모습에다가 머리의 갈기 다리와 몸의 근육까지 사실적으로 표현해 놓았습니다.
우리나라에 생존하지 않았던 사자의 표현을 어찌 이렇게 조각했을까 하는 생각에 작품을 만든 장인에게 찬사를 보내고 싶습니다.
보은 법주사 쌍사자석등은 3.3m 높이로 팔각의 연꽃 댓돌 위에 팔각의 중대석 기둥 대신 두마리의 사자가 가슴을 서로 맞대고 앞발과 주둥이로 연꽃을 받들고 있습니다. 한 마리는 입을 벌리고, 한마리는 다물어, 우주의 생성과 소멸, '아'와 '훔', 교(敎)와 선(禪), 동(動)과 정(靜) 등을 표현한다고 합니다. 이 석등은 한 개의 돌을 조각하여 만든 것입니다.
하대석 옆면에는 연꽃잎 여덟 장을 엎어새겼고 연꽃잎 안에는 다시 꽃 모양이 장식되었습니다.
불을 밝히는 화사석은 8각으로 네 곳에 창을 내어 불빛이 새어 나오도록 하였습니다
창 둘레에는 문을 달았던 흔적의 구멍들이 뚫어져 있습니다
지붕돌은 처마 밑이 수평을 이루다가 여덟 귀퉁이에서 위로 살짝 올려 빗물의 흐름을 더 멀리하게 하고 아랫면으로 번지지 말라고 작은 홈을 파 놓았습니다
일반 석등보다 화사석이 높고 또한 지붕돌도 전체 규모에 비해 크지만 이제까지 튼튼하게 잘 견뎌주어 고마울 따름입니다.
사자가 디딤한 하대석은 8각 지대석(地臺石) 위에 놓여 있으며, 쌍사자로 조각한 중대석(中臺石)은 현재 남아있는 사자(獅子)조각들 가운데서 가장 뛰어나 머리의 갈기, 다리와 몸의 근육까지도 사실적으로 표현하였습니다. 팔각의 지대석은 아래 위에 가는 테를 돌렸고, 사자의 조각은 매우 정교하여 크고 둥그런 눈, 머리의 갈기, 몸체의 근육 등이 마치 살아있는듯한 느낌이 듭니다.
대웅보전과 사천왕 석등
보은 법주사 사천왕 석등(報恩 法住寺 四天王石燈) (보물 제15호)
사천왕석등(四天王石燈)은 단면이 8각형인 받침돌과 화사석(火舍石), 지붕돌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통일신라 시대의 전형적인 석등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국보인 쌍사자석등에 비해 단순하나, 남성적인 느낌을 주는 높이 3.9m의 석등으로 보물 제15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받침돌은 밑받침돌과 위 받침돌이 대칭을 이루도록 연꽃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화사석은 여덟 면으로 되어 있는데, 한쪽 네 면에는 창을 내고 다른 쪽 네 면에는 사천왕상을 두었습니다. 지붕돌은 열덟 귀퉁이가 살짝 치켜 올라간 형태이며 꼭대기에는 보주를 두던 받침이 남아 있습니다.
신라시대의 전형적인 팔각 석등 양식으로 조각된 것으로 보아 신라 혜공왕 때 진표 율사가 법주사를 고쳐 지었을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넓적한 돌 4장을 맞추어 지대석을 만들고 위에 팔각 지대석을 올리고 각 면마다 안상을 새겨 놓았습니다
위로 올려진 연화하대석에는 8장의 연꽃잎이 엎어 새기고 꽃잎 안에 보상화 무늬를 장식해 놓았습니다
화사석에 조각되어 있는 사천왕상
팔각기둥돌 위에 상대석에도 연화하대석과 같이 연꽃잎을 새겨 놓았습니다.
화사석 8면 가운데 앞뒤 양옆의 네 면에 창을 뚫었고 나머지 네 면에 사천왕상을 새겨 놓았습니다.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든 채 악귀를 밟고 선 사천왕은 매우 사실적이어서 생동감이 넘쳐흐릅니다.
화창 문틀에는 문을 다는데 쓰였던 구멍이 뚫어져 있습니다.
법주사 대웅보전 (大雄寶殿) (보물 제915호)
법주사 대웅보전은 신라 진흥왕 14년(553년)에 의신조사가 처음 건립하여 혜공왕 12년(776년) 진표율사가 고쳐지었으나 임진왜란 시 불타 버린 후 인조 2년(1624년)에 벽암대사가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법주사 대웅보전은 마곡사 대웅보전, 무량사 극락전, 화엄사 각황전과 함께 우리나라 4대 불전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보은 법주사 대웅보전(大雄寶殿) (보물 제915호)
대웅보전(大雄寶殿)은 커다란 두 그루의 느티나무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대웅보전은 면적이 402.8㎡에, 높이가 19m나 되는 큰 규모입니다.
대웅보전 주련
佛身普邊十方中(불신보변 시방중) 부처님은 이 우주에 두루 다 계시니
三世如來一切同(삼세여래 일체동) 삼세의 모든 부처님 다르지 않네
廣大願雲恒不盡(광대원운 항부진) 광대 무변한 원력 다함이 없고
汪洋覺海妙難窮(왕양각해 묘난궁) 넓고 넒은 깨달음의 세계 너무 오묘해서 다 말할 길 없네
威光邊照十方中(위광변조 시방중) 부처님의 위광이 시방세계에 가득차고
月印千江一體同(월인천강 일체동) 천 갈래 강에 비친 달은 천 개로 보여도 근본은 하나
四智圓明諸聖士(사지원명 제성사) 사지에 모두 통달한 많은 성인들
(사지 : 성소작지, 묘관찰지, 평등성지, 대원경지)
賁臨法會利群生(분임법회 이군생) 법회에 임해서 많은 중생을 이롭게 하네
대웅보전(大雄寶殿)의 편액은 조선 숙종의 글씨라고 합니다.
법주사 대웅보전 용마루에는 색이 다른 2장의 기와가 있습니다. 이는 임금이 하사한 표시라고 합니다.
대웅보전 앞 계단에는 근정전에만 있는 답도가 있고, 거기에 두 마리의 원숭이가 지키고 있습니다. 부처님을 왕처럼 모셨고, 역대 왕들이 법주사를 수 없이 왔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원숭이 조각상은 신하를 상징합니다.
답도 : 가마가 지나가는 길
대웅보전 계단석
계단 양쪽에 둥글한 소맷돌을 세워 연의 넝쿨에 연잎과 연꽃을 새겨 두었고 그 위쪽에 원숭이 한 마리씩 앉혀 놓았습니다.
중간에 넓적한 돌 세장을 깔아 연에 태운 부처님을 모시기 위한 길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보은 법주사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報恩 法住寺 塑造毘盧遮那三佛坐像) (보물 제1360호)
법주사 대웅보전에 모신 삼신불로, 비로자나불상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아미타불, 오른쪽에 석가모니불을 배치한 삼불상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큰 흙으로 빚어낸 불상이라고 합니다.
대웅보전에는 중앙에 법신 비로자나불이 지권인을 하고 있고, 협시로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는 화신 석가모니불과 설법인을 하고 있는 보신 아미타불이 모셔져 있습니다.
인조 4년(1626년)에 현진, 청헌, 연묵, 양묵 등이 만들었으며, 영조 23년인(1747)년에 새로 금칠을 했습니다.
17세기 전반에 제작된 불상은 목조 불상과 소조 불상이 주류를 이룹니다. 대부분 네모반듯한 모양의 장중한 형태이며 신체의 굴곡이 거의 없습니다. 법주사 소조 비로자나 삼불 좌상은 이러한 시대적 특징을 잘보여 주고 있고 제작 연대가 확실하여 조선 후기 불교 조각의 기준이 되는 불상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비로자나불 높이 5.09m, 무릎 폭 4.04m, 석가모니불 높이 4.71m, 무릎 폭 3.85m, 노사나불 높이 4.92m, 무릎 폭 3.74m 의 크기로 우리나라 소조불 가운데서 가장 큰 불상입니다.
법주사 대웅보전 후불도(충청북도 유형문화유산 제 296호)
대웅보전 내에는 모두 7점의 탱화가 있습니다.
법주사 대웅보전의 높은 불단 위에 봉안된 소조삼존불상의 후면 벽에 걸려 있는 5폭의 후불탱화입니다.
본존인 비로자나불도, 좌우협시인 아미타불도 2폭, 그리고 삼존불상 좌우 양쪽에 사천왕도 2폭 등 모두 5폭으로 상태가 양호합니다.
이중 비로자나후불탱화는 가로 348cm, 세로 616cm의 색채화로서 내용은 비로자나불이 중앙에 크게 자리잡아 결가부좌하고 있으며 신라시대 전통적인 비로자나인과는 달리 왼손은 오른손이 감싼 모양을 짓고 있는데 고려 후기에 나타나는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불상을 중심으로 상하단에 문수, 보현보살, 2성중, 4동자가 있습니다.
노사나후불탱화도 비로자나탱화와 모든 것이 같으나 크기만 가로 210cm, 세로 616cm인 것이 다릅니다. 중앙에 결가부좌의 모습으로 앉아 있으며 두손을 들어 설법인을 짓고 있으며 상하 좌우에 두 보살과 가엽(迦葉), 아란존자(阿難켖者)와 두 성중이 있습니다.
석가여래후불탱화는 노사나후불탱화의 보살 성중 배치 내용의 인물들이 모두 같습니다.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비로자나불상은 네모진 얼굴에 건장하면서 굴곡이 없는 평판적인 몸체와 무릎을 하여 괴체적인 느낌을 줍니다. 왼손은 오른속으로 감싸고 있는 지권인의 손모양을 하고 있으며, 양어깨를 모두 덮은 옷은 대의 자락이 팔목에서 대칭되게 흘러내려 장식적입니다.
법주사 대웅보전 후불도(충북 유형문화재 296호)
화면의 중앙에는 지권인을 한 비로자나불이 결가부좌하고 있으며 양옆에 합장을 한 문수와 보현이 시립하고 있습니다. 비로자나불의 광배 양옆에는 지권인을 한 부처를 표현하고 있는데 3존의 비로자나불을 도상화한 것이 매우 특이합니다. 화면 최상단의 비좁은 공간에는 동자와 동녀가 공양물을 들고 있습니다. 보응 문선(普應 文性)은 불 · 보살의 안면에 양감을 드러내기 위해 음영법을 사용하고 있는데, 그림자 표현 등에서 어색함이 느껴집니다. 이 불화는 서구의 음영법을 활용하여 입체적인 화풍을 구사하고자 했던 문성 및 그 문도들의 화법이 잘 반영되어 있습니다.
석가모니불
비로자나불상, 노사나불상과 거의 같은 체형, 얼굴 모습 등 동일한 양식적 특징을 보여줍니다.
손모양은 석가모니불이 흔히 취하는 항마촉지인으로, 무릎 위에 올린 오른손의 손끝이 땅을 향하고 있습니다.
한편 아미타불과 석가모니불은 손모양과 불상의 성격이 서로 다른데도 불구하고 옷 차림법이 마치 판에 박은 듯한 양식 특징을 보이고 있어 흥미롭습니다.
향우측의 아미타후불도는 1897년에 제작된 삼신후불도 중 한 폭으로 화기상의 명칭은 상단에 봉안되었다는 의미를 강조한 “상단탱(上壇幀)”으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증명은 용악 결택(湧岳 潔澤), 춘용 만화(春聳 萬華), 뇌응 경호(雷應 景昊)가 하였고 출초는 비구 봉화(奉華), 정련(定鍊), 사미 세일(沙彌 世一)이 참여하였습니다. 제작에 금호당 약효가 수화승으로 참여하였고 대웅보전의 후불도 외에도 팔상전 팔상도도 제작하였습니다. 아미태여래의 모습은 법주사 팔상도의 각 장면에 등장하는 여래존상과 기본형이 일치하며, 특히 음영법과 선염법(渲染法)을 병용한 서운의 채색 표현 방식이 동일합니다. 대웅보전은 중층 전각이기 때문에 그 규모에 걸맞게 불화는 세로 620㎝ 이상의 긴 화폭에 그려져 있으며, 높이에 비해 폭이 유난히 좁아 빈 공간이 거의 없습니다.
동방 · 남방의 사천왕도는 1897년에 처음 삼신후불도가 제작될 때 함께 조성되었으며 봉화(奉化)가 출초하였습니다.
노사나불
노사나불은 본존불과 거의 동일한 유형의 불상으로 왼손은 가슴에 올리고 오른손은 배에 두었으며 엄지와 중지를 맞댄 손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1925년에 제작된 향좌측의 아미타후불도는 1897년 아미타후불도와 구도와 배치가 동일하나 색채가 다르며, 제자들의 인물 표현에서도 약간씩의 차이를 보입니다. 향좌측의 아난의 얼굴은 표정이 없는 듯 좀 더 경직된 느낌을 주어 시대적인 변화를 볼 수 있습니다.
서방 · 북방의 사천왕도 두 폭은 강원도에서 화업을 시작하여 경기일대를 비롯, 전국을 돌며 불화를 그린 개성이 강한 근대기 유명한 화승이었던 고산당 축연(古山堂 竺演)이 응하 경협(應荷 璟冾), 춘담 성한(春潭 盛漢), 원응 천일(圓應 天日), 삼천(三千)과 함께 1925년에 제작한 것입니다. 사천왕도(四天王圖)와 아미타불도(阿彌陀佛圖) 상단 권속들의 안면에서 용주사 신중도와 전등사 신중도를 비롯한 고산당 축연의 불화에서 볼 수 있는 강렬한 음영법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대웅전 신중도
104위를 그린 것으로 대예적금강이 중앙의 상단에 있습니다.
대웅보전 측면
법주사 선희궁 원당(宣喜宮 願堂) (충북 유형문화재 제233호)
원당이란 특정 개인의 사당과 같은 성격의 건물로 조선 영조 41년(1765년)에 영조의 후궁이며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의 위패를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건립되었습니다.
이 원당은 한국 전통의 담장과 솟을삼문을 갖추고 있습니다.
솟을대문 아래의 홍살은 사찰에서는 볼 수 없는 원당 만의 특징입니다.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작은 건물로 한국 전통의 담장과 솟을삼문을 두어 경내의 다른 건물과 독립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형식은 사당이나 향교, 서원 등에 자주 사용된 유교적 건축형식입니다.
조선 21대 왕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의 어머니인 영빈이씨(暎嬪李氏)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은 곳으로, 조성 연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1765년으로 추정됩니다. 이 건물은 영빈이씨의 위패를 모신 곳입니다.
영조대왕신위, 영빈이씨(暎嬪李氏)신위 위패
법주사 삼성각 (三聖閣)
삼성각(三聖閣) 편액
법주사 삼성각
보은 법주사 삼성각에는 칠성탱화로 치성광여래, 산신탱화로 산왕대신, 독성탱화로 나반존자를 모시고 있습니다.
법주사 명부전(法住寺 冥府殿)
조선 중기까지 지장보살을 모신 지장전이 있었으나 18세기와 20세기 초에 사라졌으며, 현재의 명부전은 2003년에 건립된 것입니다.
명부전(冥府殿) 편액
보은 법주사 명부전은 지장전, 시왕전으로도 불리는데, 지장보살과 협시로 무독귀왕와 도명존자, 명부의 시왕과 판관들이 모셔져 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은 다음 생을 받기 전에 세상에 있을 때 행한 업에 따라 명부에서 시왕에게 심판 받는다고 합니다. 맨 우측에 금강경을 머리에 쓰고 있는 염라대왕이 보입니다.
명부 : 저승
지장보살과 도명존자, 무독귀왕
진영각(眞影閣)
지금의 진영각은 1991년에 새로 지었으며, 정면 7칸·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명부전·삼성각과 나란히 서 있습니다.
진영각 안에는 법주사를 창건한 의신 조사와 전법초조 태고선사를 중심으로 모두 30인의 영정이 모셔져 있습니다.
진영각(眞影閣) 편액
법주사 진영각 내부
보은 법주사 진영각에는 한 종파를 세운 스님, 후세에 존경을 받는 큰 스님, 사찰을 창건한 개산조 의신조사 등 30분의 진영이 모셔져 있습니다.
괘불지주(掛佛支柱)
일반적으로 괘불을 걸기 위한 괘불지주(掛佛支柱)는 대웅전 앞에 석조로 한쌍이 서있는데 이곳 법주사에는 진영각(眞影閣) 앞에 최근에 조성한 듯한 괘불지주가 서 있습니다. 법주사의 배치도에는 당간이라고만 표시되어 있습니다.
보은 법주사 석조희견보살입상(報恩 法住寺 石造喜見菩薩立像) (보물 제1417호)
희견보살은 법화경을 공양하기 위해 몸을 불태워 소신공양을 올렸다는 보살입니다.
보상상은 전체높이 213m 규모로 크게 신체, 공양물, 대좌의 3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자연 암반으로 이루어진 지대석 위에 가로 네모 반듯한 모양의 받침돌을 그 위로 중심부에 해당하는 몸통을 세워 고정시겼습니다.
얼굴 부분은 마멸이 심하여 자세히 볼 수 없지만, 잘록하고 유연하 허리와 대조적으로 그릇받침을 받쳐든 양팔은 힘겨운 듯한 모습을 꽤 사실적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옷은 속옷 위에 가사를 걸쳐고, 띠 매듭과 옷자락이 무릎 위에서 투박하게 처리 되었습니다.
향로를 받쳐 든 두 팔의 모습이나 가슴부위의 사실적 표현과 함께 배면 옷의 표현기법은 절묘하여 같은 경내 쌍사자석등을 제학한 동일한 시기인 720년 전후의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보은 법주사 석조희견보살입상(보물)
희견보살은 1200년 동안 향과 기름을 먹고 마시며 몸에 바른 후 또 1200년 동안 자기 몸을 태워서 부처님께 공양하여 약왕보살(중생에게 좋은 약을 주어 몸과 마음의 고통을 치유해 주는 보살)이 되었다 합니다
지대석 위에 비교적 큰 향로를 머리에 이고 서 있는 흔치 않은 조각상입니다
비록 세월의 흐름에 비껴갈 수 없듯 얼굴 형태는 알아볼 수 없으나 민초들의 몸과 마음의 병을 치유해 주니 고마울 따름입니다
보은 법주사 석조희견보살입상 뒷면
석조물로는 희견보살이라는 이름으로 유일하게 현존하는 불상입니다.
법주사 석조희견보살입상은 향로를 받쳐 들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정면은 오랜 시간 진행된 풍화로 얼굴의 형태는 육안으로 드러나지 않고, 발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도 선명하지 않지만 뒤면은 옷자락은 아주 잘 남아있습니다.
보은 법주사 원통보전(報恩 法住寺 圓通寶殿) (보물 제916호)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정방형에 가깝지만, 정면이 조금 더 크다고 합니다. 고대 불전의 형태를 잘 간직하고 있어 보물 제 916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원통보전(圓通寶殿) 편액
보은 법주사 목조관음보살 좌상(報恩 法住寺 木造觀音菩薩坐像) (보물 제1361호)
복장 안에서 나온 불상조성기에는 효종 6면(1655)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불상의 넓적하고 편평한 얼굴, 작은 눈과 짧고 납작한 콧날, 두꺼운 옷 주름 등은 이 시기 조각의 공통적인 특징으로 꼽힙니다. 머리에 호화롭게 꾸민 화관(花冠)을 쓰고 있는 등 전체적으로 장식성이 돋보이고, 제작 시기가 확실하여 조선 후기의 불상 연구에 기준이 되는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관음보살상은 목조로 높이는 280cm이고 머리에는 아름다운 화관을 썼습니다. 그 중앙에는 아미타불의 화불을 나타냈으며, 입가에 머금은 미소는 중생의 아픔을 달래 주는 듯합니다. 무릎 아래 좌우에는 남순동자(南巡童子)와 해상용왕(海上龍王)을 봉안하고 있습니다.
금동미륵대불(金銅彌勒大佛)
금동미륵대불(金銅彌勒大佛)은 용화정토(龍華淨土)에 이르러 깨달음의 법을 전하는 미래의 미륵부처님의 현신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화강석으로 만든 높이 약 8m의 기단 위에 세운 높이 25m의 이 청동대불은 국내 불상 가운데 최대규모이며 제작에 소요된 청동이 160톤에 이른니다.
청동불상을 만드는데 학계와 전문가들이 힘을 기울였으나 용접 부분에 부식이 오고 얼룩이 지게 되자 불상으로 품위유지가 어려워져 자구책으로 2000년부터 불상에 금박을 입히는 개금불사 공사를 하게 됩니다
표면의 이물질을 제거하고 미세한 구멍을 메꾸는 과정부터 옻칠, 금분 칠, 금박 입히기 등 8단계를 거쳐 17개월 만인 2002년 6월 5일 완성하게 됩니다.
순금이 80kg(21,000돈) 소요되었습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수할 때 징발되었다고 합니다. 1939년, 최초로 서양 조각을 한국화단에 도입한 조각가 김복진(金復鎭 1901~1940)이 1백 척의 시멘트 미륵불 조성 불사를 맡았습니다. 그러나 이 불사는 김복진의 갑작스런 요절로 완성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이 시멘트 미륵불은 1964년에 이르러서야 박정희 대통령의 발원으로 완성됩니다.
1990년에는 붕괴 직전의 시멘트 대불을 허물고 청동대불로 세웠습니다. 그때 들어간 청동이 약 160톤가량이라고 합니다. 2000년대에 들어 다시 금동미륵불 복원 공사를 시작합니다. 원래 제 모습을 찾아준다는 의도였습니다. 개금불사는 2002년 6월에 완공되었습니다. 3mm 두께로 황금을 입혔는데 모두 80kg이 들어갔다고 합니다.
왜 그토록 막대한 금을 소비하며 금색을 입히는가. 부처의 피부는 황금색이며 그 금색은 염부단의 금색이라고 경전은 말합니다. 대설산(大雪山)과 향취산(香醉山) 중간에 있는 염부단천이라는 시내에서 나는 사금의 색깔과 같은 금색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금색상(金色相)을 입히려는 것입니다.
금동미륵대불 뒷편
보은 법주사 당간지주
법주사 당간지주(幢竿支柱)은 22m 높이의 이 당간지주(철당간)는 고려 초인 목종 9년(1006년)에 16m의 높이로 조성된 것인데, 1866년 흥선대원군이 당백전(當百錢)을 주조한다는 명분으로 모든 사찰의 금속물을 징발하는 과정에서 사라졌다가, 1910년에 다시 조성된 것입니다.
넓다란 마당 한가운데에 큰 규모의 천왕문과 수문장 같은 두 그루의 전나무가 있습니다.
보은 법주사 석련지(국보 제64호)
석련지(石蓮池)는 통일신라 시대인 8세기 경에 제작된 작품으로 전체적으로 비례가 우수하며 대단히 세련되었습니다. 국보 제64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석련지 비각 안에 높이 1.95m, 둘레 6.65m의 석련지(石蓮池)가 들어 있습니다. 석련지는 돌로 만든 작은 연못으로 예전에는 물을 담고 연꽃을 띄워 두었다고 합니다.
법주사 석련지(石蓮池) (국보 제64호)
8각의 받침돌 각 모서리를 기둥으로 표현하고 각 면에 안상을 조각해 놓았습니다
층층이 깎아 중앙으로 모여지는 위에 천상의 연못을 형상하듯 뭉게구름을 뭉게뭉게 표현한 사잇돌을 끼워서 큼지막한 몸돌을 떠받치고 있습니다
몸돌은 커다란 돌의 내부를 깎았고 외부 아래쪽에는 작은 연꽃잎을 한 바퀴 두르고 위쪽에 커다란 연꽃잎을 풍성하게 둘렀고 큰 연꽃잎 안에 보상화 무늬(가상의 식물을 새긴 무늬)를 넣어 화려하게 장식하였습니다
위쪽에는 연못의 테두리를 만들듯 낮은 기둥을 세워 둥글게 난간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법주사 능인전(報恩 法住寺 能仁殿)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32호)
앞면 3칸·옆면 2칸(약 9평 규모)의 전형적인 부불전(副佛殿)으로, 받침돌과 주춧돌 등은 제법 오래되어 보입니다.
특히 앞면 모서리 기둥 아래의 주춧돌은 연꽃 조각과 함께 8각의 주좌(柱座) 조각을 새겨 매우 화려한 장식을 나타내었습니다.
지붕은 맞배지붕이고,받침은 장대석을 2층으로 쌓았는데, 가운데에 계단을 놓았습니다.
기둥은 둥근 기둥이고, 기둥 위의 공포는 앞면과 뒷면에 2익공(翼工)의 익공계 형식으로 구성하였습니다.
공포 사이에는 장식성이 강한 화반(花盤)을 두어 아름다움을 더했으며, 안팎에도 금단청을 하여 화려함을 더하였습니다.
조선 인조 2년(1624)에 임진왜란으로 불타버린 법주사를 중건할 때, 벽암 각성(碧巖覺性, 1575∼1669)이 다시 건립하였다고 합니다.
능인전(能仁殿) 편액
뒤쪽에 세존사리탑이 자리하고 있어 건물 뒷면의 가운데 부분은 건물 안에서 세존사리탑을 볼 수 있도록 유리창으로 만들었습니다.
전각안에는 석가모니불과 함께 조성 시기를 알 수 없는 16나한상이 봉안되어 있으며, 1992년에 조성된 신중탱(神衆幀)이 자리하고있습니다.
현재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미륵보살, 제화갈라보살이 협시하고 있으며, 또 좌우로는 각각 8구씩 16나한상을 모시고 있어 영산전이나. 나한전의 역할을 합니다. '능인'이란 모든 중생들을 교화하여 널리 이로움을 주는 분이란 뜻으로 부처님을 가리킵니다.
보은 법주사 세존사리탑(報恩 法住寺 世尊舍利塔)
고려 공민왕은 홍건적의 침입으로 피난을 갔다가 법주사에 들렀을 때 통도사에 있는 석가모니 사리 가운데 일부를 이곳에 옮겨오도록 하여 사리를 모신 사리탑입니다
법주사 세존사리탑(충청북도 유형문화유산 제16호)
보은 법주사 능인전 뒷쪽에 있는 세존사리탑은 공민왕 11년(1362), 홍건적의 침입으로 왕이 안동까지 피난갔다가 환궁하던 중, 법주사에 들렀을때 양산 통도사로 칙사를 보내 석가모니 사리 한 개를 가져오게 하여 모신 사리탑입니다.
8각을 기본형태로 하여 상, 중, 하 3단으로 이루어진 기단 위에 탑신을 올리고, 꼭대기에 머리장식을 얹어 마무리하였습니다. 기단에서 아래받침돌은 윗면에 비스듬히 경사를 주었고, 가운데 받침돌은 모서리마다 기둥을 새겼으며, 윗받침돌은 솟은 연꽃무늬로 장식하였습니다. 둥근 탑신의 몸돌은 아무런 장식이 없고, 지붕돌은 윗면에 흐르던 급한 경사가 끝부분에 이르러 완만해 졌습니다. 머리장식은 큼직한 원받침을 두어 그 위에 보주를 놓았습니다.
세존사리비(世尊舍利碑)
세존사리비는 1650년(효종 1년)에 세워진 것으로 전체 높이 197cm, 비신만의 규모는 138cm, 너비 63cm, 두께 20cm입니다.
세존사리비는 세존사리탑에 관한 자세한 내력을 기록하였습니다 .
그 내용에 따르면 공민왕은 1361년 홍건적의 침입으로 안동까지 몽진했다가 1362년 환궁하면서 법주사에 들렀다고 합니다. 이때 부처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양산 통도사에 사신을 보내 그곳에 있던 사리 1립(粒)를 옮겨오게 했다는 것입니다.
미륵불상조성기념비(彌勒佛像造成紀念碑)
1939년 당시 주지였던 장석상 스님이 의뢰해서 당대 최고의 조각가였던 김복진이 조성했으나 한때 중단되었다가 1964년 완공됐습니다.
청동미륵대불이 조성되기 전 1964년 조성되고 현재는 철거되어 없어진 시멘트 미륵대불을 위한 미륵불상조성기념비(彌勒佛像造成紀念碑) 입니다.
1964년 6월14일 박추담 법주사주지스님이 글을 짓고, 일중 김충현(一中 金忠顯 1921~2006) 선생이 쓴 글씨라서 최근에 쓰는 궁체와는 조금 다릅니다.
자정국존 비(慈淨國尊碑) (충북 유형문화재 제79호)
이 비는 고려말(高麗 末)의 스님 자정국존의 비(碑)로 충혜왕 복위 3년(復位 3年1342년)에 건립하였으며. 비신의 높이 214cm, 너비 107cm, 미륵대불상이 있는 법주사 서쪽의 암벽에 끼워져 있습니다.
비의 가장자리에 테를 두르고 아랫부분은 '용문사중수기(1185)처럼 연화좌를 선각했으며 나머지는 운문을 선각했습니다. 상단부에 가로 1열로 '속리산법주사 자정국존비'라는 제액이 전서로 음각되어 있습니다
자정국존비(慈淨國尊碑)
1270년 당시 법주사에 머물렀던 자정국존(1240~1327)의 행장을 기록한 탑비로서 고려 충혜왕 3년(1342)에 만들어졌습니다. 스님은 많은 절들에 머물며 유식론을 강설하며 92권에 달하는 경론해설서를 찬술하기도 했으며, 말년에 법주사 주지스님으로 계시다가 향년 88세로 입적하셨습니다.
비는 길쭉한 직사각형의 모습으로 자연암반을 파내어 비몸을 세운 특이한 형태입니다. 비몸 앞면에는 자정국사에 관한 비문을 새겼으데, 아랫부분이 일부 파손되어 있습니다.
고려 충혜왕 복위 3년(1342)에 세운 것으로, 왕의 명을 받은 이숙기(李叔琪)가 비문을 짓고, 전원발(全元發)이 글씨를 썼습니다.
보은 법주사 석조(石措)
석조는 돌로 만든 물을 저장하는 용기로, 신라 성덕왕 19년(720년)에 조성되어 법주사가 번창할 때 3천명의 승려가 모여살 던 것으로 추정하는데, 높이 130cm, 길이 240cm, 너비 240cm, 두께 21cm 로 쌀 80가마를 채울 수 있는 부피입니다.
추래암(墜來巖)
평탄한 법주사 한켠에 커다란 바위가 한무리 모여 있습니다.
보은 법주사 추래암은 떨어질추(墜), 올래(來), 바위암(巖) 으로 바위가 금강산으로 가려했는데, 금강산에서 퇴짜 맞고 이 곳 속리산으로 떨어졌다 하여 추래암이라 고 합니다.
금강산 일만이천봉 모집 때 금강산으로 가던 바위군들이 법주사 뒤로 수정봉에서 잠깐 쉬는데 일만이천봉이 다 찼다는 소식이 전해져 이곳 정상에서 안착하려 했지만 산신이 노하여 산 밑으로 굴러떨어지게 하여 "떨어져내려온 바위"라 하여 추래암이라고 하였다 합니다.
법주사 마애여래의좌상(摩崖如來倚坐像) (보물 제216호)
능인전 옆 추래암 암벽에 새겨진 고려 초기의 마애불상입니다.
법주사 마애여래의좌상은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마애불로 높이가 약 6m나 됩니다.
큼직한 바위에 볼록 새겨진 이 여래 좌상은 보기 드물게 의자 대신에 연화대좌 위에 앉아 있는 의상으로 옆에 조각된 지장보살과 함께 법주사의 성격을 알려주는 미륵불상입니다.
법주사 경내 암벽에 부조된 고려시대 마애여래의좌상(摩崖如來倚坐像) (보물 제216호)
높이 500cm. 광배는 생략되었으며 두 손은 가슴 앞에서 설법인(說法印)을 결하고 있고 연화좌 위에 걸터앉아 두 다리를 내려딛고 있는 의상(倚像)입니다. 머리는 나발(螺髮)이며 육계 밑에 계주가 표현되어 있고, 얼굴은 둥근형으로 살이 쪘으며, 턱 밑의 주름과 짧은 목에 표현된 삼도(三道)가 목걸이처럼 늘어져 있습니다. 눈꼬리가 길게 위로 치켜 올라가 있고, 납작하게 눌린 듯한 코는 살찐 뺨에 파묻혀 있는 듯합니다. 상체는 두 어깨가 각이 진 편으로 허리가 지나치게 좁게 표현되었고,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우견편단(右肩偏袒)으로 옷을 입고 있습니다. 두 무릎 역시 어깨처럼 각이 지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신체비례로 보면 하체가 허리와 상체에 비해 매우 빈약하지만 밑에서 올려다보면 어느 정도 균형이 잡혀 있는 것 같습니다. 전체적인 조각수법은 얼굴을 제외한 신체 각 부분의 묘사가 평면적이며 옷주름은 거의 선각으로 형식화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불신의 윤곽선, 손가락의 묘사, 연화대좌의 꽃잎 형태는 매우 자연스럽고 부드러운 회화적인 곡선으로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고려불화 가운데 1350년에 제작된 〈미륵하생경변상도〉(일본 신노인[親王院] 소장)의 본존불과 세부표현에서 많은 유사점이 발견됩니다.
역사적으로 법주사는 미륵신앙의 중심도량이었으므로 이 불상조성의 신앙적 배경으로 미륵신앙이 주목됩니다. 이 불상의 수인인 설법인은 현존하는 한국 불상 가운데 드문 도상으로 통일신라시대의 안압지 출토 금동삼존판불에서 볼 수 있으며, 의상의 자세는 경주 남산 삼화령 출토 석조삼존불상 중 본존불의 예가 있습니다.
지장보살상
마애불이 새겨진 바위 옆 위쪽에 3.13m 크기의 지장보살상이 얕게 조각되어 있습니다
이름을 새긴 듯 각자가 빼곡합니다.
당겨본 추래암(墜來巖) 각자(刻字)
부도전(浮屠田)
수정암 입구에 있는 별도의 부도밭에는 부도 2기와 비석 4기가 있습니다.
부도전에는 금오대종사(金烏大宗師 1896~1968) 부도와 부도비(浮屠碑), 석상대종사(石霜大宗師)의 부도가 있습니다. 석상스님(1872~1947)은 12년간 법주사 주지를 역임하였으며, 금오스님은 불교정화운동에 적극 참여해 종단을 바로 세웠습니다.
금강문
금강문(金剛門)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겹치마 맞배지붕 건물로, 건물 좌우로 나지막한 돌담이 둘러쳐져 있습니다. 가운데 부분은 통로이고, 내부에는 밀적금강과 나라연금강 등 2기의 금강역사상 및 보현보살 상과 문수보살 상을 안치하고 있습니다.
금강문에는 불법(佛法)을 수호하는 금강역사(金剛力士)가 있습니다.
금강역사는 인왕역사(仁王力士)라고도 부릅니다.
금강문(金剛門) 편액을 올려다 보았더니 낙관엔 만당(晩堂) 이규환(李圭桓 1858~?)선생으로 자는 공집(公執), 호는 만당(晩堂)입니다.
밀적금강
밀적금강은 부처님을 호위하는 야차신으로 부처님 의 비밀스런 사적을 듣습니다. 항상 입을 닫고, '훔' 소리를 낸다고 하여 '훔금강역사'라고도 합니다. 문수보살은 사자를 타고 있으며, 지혜의 상징입니다.
금강저의 무기를 가지고 부처님을 수호하는 신장입니다.
문수보살
문수보살은 석가모니불의 좌협시보살로 지혜를 맡고 있으며, 위엄과 용맹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자를 타고 있습니다.
나라연금강
나라연금강은 천상계의 역사로 코끼리 100만배의 힘을 갖고 있고, 항상 입을 열어 '아'소리를 내어 '아금강역사'라고도 합니다. (근데 금강역사들이 모두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보현보살
보현보살은 석가모니불의 우협시보살로 진리의 광대행을 맡고 있으며, 행원의 실천을 나타내기 위하여 코끼리를 타고 있으며, 실천과 자비의 상징입니다.
법주사 입구 석주(石柱)와 비석
수정교(水晶橋) 옆에 어떤 용도에 사용하는 것인지 모를 돌기둥 하나가 서 있고, 그 석주 옆에는 작은 비석 하나가 있는데 남석교(南石橋)라는 다리를 세우는데 시주한 사람의 뜻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입니다. 강희28년(숙종15년, 1689년) 시월에 비석을 세웠고, 건릉15년(영조26년, 1750년)에 비석을 다시 세운다는 각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벽암대사비와 봉교비
보은 법주사 벽암대사비(法住寺 碧岩大師碑) (충북 유형문화재 71호)
조선 중기 승려 벽암대사는 임진왜란 때 해전에 참전, 인조 때 남한산성을 쌓을 때 관여하고 병자호란 때에는 승병을 모집하여 왜놈들을 섬멸하였다는 행적을 적은 비로 조선 현종 5년(1664) 때 만들었습니다.
비신의 높이 214cm, 너비 108cm, 두께 35cm이며 1980년 충청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습니다.
법주사 금강문 앞에 위치하는데, 커다란 반석에 홈을 파고 비신을 세웠으며, 그 위에 우진각지붕 모양의 덮개돌을 얹었습니다.
비문은 대사의 제자 처능(處能)의 부탁으로 동부승지 정두경(鄭斗卿)이 지었고, 글씨는 선조의 손자인 낭선군 이우(朗善君 李俁 1637~1693)기 썼으며, 복창군 이정(福昌君 李楨 1642~1680)이 두전(頭篆)을 썼습니다.
두전(頭篆)은 비석(碑石)의 상단부나 석비의 전면에 주인공을 표기한 표제기록입니다.
꼭대기의 앞 부분에서 옆면 뒷면에 걸쳐 전자(한자 서체의 하나)로 새긴 글입니다.
비신에 가로기록양식으로 기록된 표제입니다.
법주사 봉교비(法住寺 奉敎碑)
봉교(奉敎)
금유객제잡역(禁遊客除雜役)
함풍원년삼월일입(咸豊 元年三月日立)
비변사(備邊司)
봉교비(奉敎碑) 우측에 씌어진 봉교(奉敎)란 왕이 내린 명령으로 '임금이나 웃어른의 가르침을 받든다'는 뜻입니다.
좌측에 씌어진 비변사(備邊司)는 조선 중·후기 의정부를 대신하여 국정 전반을 총괄한 실질적인 최고의 정무기관이었으며, 비석 중앙에 씌어진 금유객제잡역(禁遊客除雜役)은 철종 2년(哲宗 2년 1851)왕명에 의해 속리산에 들어와 놀지 말고 승려들에게는 함부로 잡역(부역)을 시키지 말라는 내용입니다.
함평(咸豊)은 청나라 제9대 황제 문종(文宗 咸豊帝 1831~1861, 재위기간 1850~1861) 연호입니다.
아마 사도세자 생모의 위패를 모시는 선희궁이 있어서 그럴 것입니다. 벽암대사비와 같이 있지만, 위의 하마비와 맥을 같이할 것입니다.
보은 속리산 사실기비(俗離山 事實記碑) (충북 유형 문화재 제167호)
이 비(碑)는 현종 7年 1666년에 세운 것으로 비문(碑文)은 우암 송시열(又庵 宋時烈)이 짓고, 동춘당 송준길(同春當 宋浚吉)썼습니다. 비문에는 속리산이 명산(名山)이란 것과 세조가 이곳에 행차한 사실등. 속리산의 내역(內歷)이 기록되어 있다. 특히 수정봉(水晶峯) 거북바위의 내력이 쓰여있습니다.
속리실기비각(俗離實記碑閣) 편액
후학 이석환(後學 李錫煥) 근서(謹書) 관지가 있습니다.
보은 속리산사실기비(俗離山 事實記碑) (충북 유형 문화재 제167호)
보은 속리산 사실기비는 조선 현종 7년(1666)에 세운 것으로 비문은 우암 송시열(尤庵 松時烈 1607~1689)이 짓고 동춘당 송준길(同春堂 松浚吉 1606~1672)이 쓴 것입니다.
비문에는 속리산이 명산이라는 것과 세조가 이 곳에 행차한 사실 등 속리산의 내력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히 수정봉(水晶峰) 위에 있는 거북바위의 내력이 쓰여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당나라 태종이 세수를 하려는데 세숫물에 큰 거북 그림이 비쳤다고 합니다.
이를 이상히 여긴 태종이 유명한 도사를 불러 물으니 대답하기를 동국(東國) 한국 명산에 큰 거북의 형상이 당나라를 향하고 있어 많은 당나라 재물을 동국으로 들어가게 하고 있으니, 거북 모습의 물형을 없애라 하였습니다.
이에 사람을 보내 속리산 수정봉에 있는 돌거북의 목을 자르고, 돌거북의 등 위에 10층의 석탑을 쌓아 거북의 정기를 눌렀다고 합니다.
하마비(下馬碑)
하마비는 대궐 능묘 성균관 서원 등의 입구에 세웠던 비석으로 누구라도 가마나 말을 타고 가다가 내려야 되는 지점을 표시하였습니다
하마비 부근에서 주인이 내린 말을 돌보는 아랫사람들은 자신들의 상전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오는 소문이 "하마평"이라고 합니다.
사찰에 하마비가 세워진 사례는 왕실과 관련이 있는 경우입니다. 가령 남양주 봉선사의 경우 광릉(光陵, 세조와 정희왕후 윤씨 능)의 원찰로, 영천 은행사와 보은 법주사의 경우 각각 인종과 순조의 태실이 있기 때문에 하마비가 세워졌습니다.
일주문(一柱門)
일주문은 '기둥이 일렬로 서있는 문'이란 뜻으로, 부처님의 불계로 들어가는 문은 오직 하나라는 상징적인 문입니다.
일주문 편액
호서제일가람(湖西第一伽藍)이라 쓴 편액이 걸려 있습니다. 이는 충청도를 통틀어 으뜸가는 사찰이라는 뜻입니다.
‘호서(湖西)’는 ‘금강(錦江)’의 서쪽에 위치한 ‘충청남북도’를 일컬을 것이고,
‘가람(伽藍)’은 승려가 사는 사찰이니 ‘호서제일가람(湖西第一伽藍)’이란 충청남북도를 통틀어 가장 큰 사찰이라는 말일니다.
낙관엔 '계묘 춘 벽하(癸卯 春 碧下)' 지금부터 120년 전인 1903년(계묘년)에 벽하 조주승(碧下 趙周昇 1854~1935)이 쓴 글씨입니다.
일주문 안쪽에 걸린 또 다른 편액은 '속리산대법주사(俗離山大法住寺)'. '크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大'자를 두 개 붙여 놓은 듯합니다.
맨 좌측 '광무6년 임인 4월(光武六年壬寅四月)'과 '중술(重述 다시 씀)'이라 쓰여져 있어 광무6년(1902년)에 다시 썼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앞에 쓴 조주승의 글씨보다 1년이 빠릅니다.
법주사 성보박물관
속리산 법주사 ‘성보박물관’ 2024년 9월24일 개관하였습니다.
지상 2층, 지하 1층 규모로 조성하였습니다.
‘법주사 괘불탱’ ‘신법천문도 병풍’ ‘동종’ 등 보물 3점 포함 66점 전시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