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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38
ㅡ 역사서술방식과 삼국성립 2 ㅡ
'고대사는 흐른다 20회'에서 삼국성립은 신라가 기원전 57년,
고구려가 기원전 37년, 백제가 기원전 18년 건국된 것으로 나타난다고 했다.
이는 전적으로 김부식 "삼국사기' 에 의한 기록이다. 이 기록에 대한 논란은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내 놓고 지금까지 약 800 여년 간 이어지고 있다. 현재도 진행형 이다. 나 또한 신라가 가장 먼저 건국했다는 사실을 믿지 못 한다고 했다.
그런데 800여년 간 논란은 신라가 먼저 건국했니 안했니 이런 지엽적 문제가 아니라 삼국건국이 삼국사기에 나온 시기에는 아예 없었고, 그 보다 수 백년이 지난 후 라는 것이다.
만약 이게 사실로 인정된다면 지금까지 우리가 배워왔던 삼국시대 초기 역사는 완전 뒤집어 업어져야 한다. 또한 '삼국사기' 기록 정확성과 신뢰성도 현저하게 떨어질 것이다.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부정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에는 몇 가지가 있다.
첫 번째 이유는 한반도 3세기 중엽을 묘사하는 중국 '진수'의 정사 '삼국지'에 나오는 '삼국지 위지 동이전' 에서 한반도 중부 이남에 78개국이 존재 했다고 기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래 사진 참고)
일제강점기 시절 일제학자와 조선식민사학자들은 <삼국지위지동이전 이 기록은 당시 시대에 기록되어 삼국사기 보다 더 신뢰성이 있는만큼 삼국사기에서 말하는 삼국 건국연대는 허위 이라면서 이 기록을 믿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당시는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이 고대국가 체제를 갖추지 못 한 부족연맹체 수준 78개국 소국 중 하나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삼국 각 국이 주변 일대 패권을 확립한 것은 고구려는 태조왕 시기인2세기~ 3세기, 백제는 근초고왕 시기인 4세기, 신라는
내물왕 시기 5세기 중엽 이후나 되어서 일이므로
4세기 ~ 5세기 정도 이후에나 '삼국시대' 라는 용어를 한정지어 사용해야 역사적으로는 맞다>고 주장했다.
지금도 이 주장을 삼국사기 기록보다 더 신뢰하는 우리나라 역사학자들도 꽤 있다.
하지만 진수 삼국지위지동이전이 3, 4세기경 거의 동시대에 기록된 것은 사실이지만 '삼국지' 부록처럼 한반도 중남부 상황은 잠깐 언급된 것이고, 또한 한반도 중남부는 '진수' 관심거리도 아니였기 때문에 끼어넣기 식으로 소홀하게 기록했을 수도 있다. 그 기록 내용에서도 오류가 꽤 보인다.
이런 점에서 '삼국지위지동이전' 내용은 정확성과 신뢰성이 많이 떨어진다는 주장도 있다.
두 번째 이유로는 신뢰성에 큰 의심을 받고는 있지만 8세기 경 저술된 것으로 보이는 '일본서기' 에서도 <'신공황후'는 '주아이' 천황이 사망한 후 신탁을 받아 한반도에 있는 삼한(마한, 진한, 변한)을 정벌하기로 결심한다. 이 신탁은 신이 그녀에게 삼한을 정복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전해진다. 시기는 명확히 나오지 않지만 3세기 중반에서 4세기 초반으로 추정된다. 그녀는 삼한을 정벌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출정하였고, 삼한이 항복하여 조공을 바쳤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즉 4세기 초반까지 한반도 중남부에는 마한 진한 변한만 있었고 백제 신라는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서기'는 8세기 경 기록된 역사서로 그 역사적 기록 신뢰성을 크게 의심 받고 있다. 또한 신공황후 기록은 너무 황당무계해 사실로도 보지 않고 전설로 치부 되지만, 한반도 남부 상황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논란이 계속 되고 있다.
이에 일본은 일제강점기 시절 한반도 지배를 정당화시키기위해 '신공황후 전설'을 기정사실화 하면서 한반도 남쪽에는 '임나일본부' 설치해 한반도를 다스렸다는 주장을 설파했다.
'임나일본부설'은 일본 학계에서 제기한 이론으로, 4세기에서 6세기 사이에 일본 야마토 정권이 한반도 남부 지역에 임나(또는 임나가야)라는 식민지배기구를 설치하고 백제 신라 가야를 포함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고 주장하는 내용이다. 이 이론은 일본 역사교과서에서도 한때 다뤄졌다. 지금도 일본이 한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주장하는 역사적 근거로 사용되고 있다.
이 주장의 허구성에 대해서는 아래 광개토대왕비에서 같이 다루겠다.
세 번째 이유는 '광개토대왕비' 이다.
광개토대왕비는 1880년대 일본학자에 의해 이 비석이 광개토대왕비인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그 비문 내용 중 일부를 1920년 일제강점기시절 일제가 한반도 침략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대대적으로 이용한다.
그 비문 내용을 다음과 같다.
<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羅以以爲臣>라는 문구를 <신묘년 왜가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와 신라를 파해 신민으로 삼았다>
이 비문 해석은 지금까지도 엄청난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글자 하나 해석 차이에 삼국시대 역사가 완전히 뒤집어 지기 때문이다.
일본주장에 대응해 한학자이자 역사학자인 '정인보' 및 '박시형',
'이기백' 등은 '도해파(渡海破)'의 주어를 고구려로 보아 <왜가 신묘년에 오니 바다를 건너가 격파하였다. 백잔은 [왜와 연합하여] 신라를 신민으로 삼으려 했다.>로 해석하였다.
더 나아가 '임라가야'가 위치했던 곳을 현 '대마도'로 보고 광개토대왕이 '대마도'까지 가서 격파했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1970년대 초 재일한국인 사학자 '이진희'는 비의 문자가 일제군인에 의해 석회 도포로 조작되었다는 주장을 하여 큰 파문을 일으켰다.
유명소설가 김진명은 소설 '가즈오의 나라'('몽유도원'으로 제목을 바꾸어 재출판)에서 주장한 것은 탁본을 하기 전에 전체적인 내용을 파악하기 위해 抄錄이 있었고 그 초록에 첫글자가 '東'이라고 되어 있음('동'이 들어가면 일제해석과 완전 다르게 됌)을 보게된 소설속 인물이 번민하다가 역사를 왜곡하고자 하는 일본 제국주의자
들에게 살해된다는 것이 줄거리다. 일본의 역사학자들은 '東' 자리에 '가야'를 넣어서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석회를 발라 위작했다거나 김진명 주장은 여러 국내외 학자들이 받아 들이지 않아 지금은 거의 퇴색되고 말았다.
요즘와서는 비문조작설은 근거가 부실하고, 위 문단에서 처럼 문장 주체를 고구려로 보는 견해도 한문에서 주어가 지나치게 생략한 것이 되어 과하게 어색한 해석을 이끌어낸다고 하여 정설로까지는 신뢰받지 못하고 있다.
이런 논란들은 한일 역사학자들이 수 십편의 논문을 쓸만큼 여러가지 설로 난무하고 너무 복잡해 이곳에 다 정리할 수 없다.
현재까지도 정답은 없다.
그러나 현재 추세는 <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를 글자 그대로 해석하는 견해가 대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일본이 주장했던 '임나일본부설'을 인정하자는 것은 아니다. 이 학자들 주장은 '임나일본부설' 현 주소는 백제의 '요서경략설'과 비슷한 면이 있다고 주장한다.
백제 '요서경략설'은 사실 뒷받침하는 사서도 의외로 꽤 있고 학계에서도 꽤 진지하게 연구한다. 하지만 사료 비교검증으로 점점 힘을 잃었고, 한국학계 정설은 '잘해봐야 백제인 집단거주지 정도'로 굳어졌다. 하지만 아직도 적지 않은 한국인들이 백제가 요서를 차지했다고 믿고 싶어한다. 심지어 국정 국사교과서에서도 '백제가 요서에 진출했다.'는 애매한 표현으로 소개되었다.
고대 일본이 한반도 남부에 임나일본부를 설치하고 한반도 남부를 경영했다는 설도 이런 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사서는 있는데 교차검증상 근거가 희박하고 일본 학계에서도 인정 안 하는 분위기 인데, 일본 학계가 미련을 완전히 버리지 못했고 일본 대중들 중에서도 믿는 사람이 아직 많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는 광개토대왕비 연구로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중국인 학자 '왕건군'이 있다.
'왕건군'이 광개토대왕비가 1920년대 일본군에 의한 위작설을 부정해 일본 학설에 동조했다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왕건군'은 광개토대왕릉비가 위작되지 않았다는 일본학계 판독을 지지할 뿐 일본해석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왕건군'은 당시 한반도 남부에서 전횡을 일삼은 것처럼 묘사되는 왜구 존재를 북큐슈 일대에 본거지를 둔 해적 수준이라고 말했다. 즉 정규군도 아니고 지방호족이나 국가의 군대나 해적 수준으로 한반도 남부를 경영하거나 경영할 만한 능력이 전혀 없는 주체로 보았다
일본의 '임나일본부설'과 완전 배치되는 이론이다.
즉 왕건군 말은 통일신라시대 때 중국에 설치한 '신라방'을 보고 중국을 식민지화하고 관리했다고 주장하는 꼴이라는 것이다.
또 다른 설은 '광개토대왕비'는 역사적 사실을 객관적으로 기록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광개토대왕을 미화하기위해 정치적 프로파간다 로 활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유물이라는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비문에 적혀 있다고 해서 그 내용을 100% 곧이 곧대로 사실이라고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 이유를 살펴보면 상당히 수긍이 간다. 내 입장에서는 아래와 같은 추론이 가장 진실에 근접한다고 생각된다.
그 추론을 살펴보자면,
[삼국사기에는 백제 '근초고왕'이 광개토대왕할아버지인 '고국원왕'과 싸워 전사시켰다고 기록 했으나, 광개토대왕비문에는 고국원왕이 근초고왕한테 죽임을 당했다는 내용이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이는 광개토대왕비에서 백제가 오래 전부터 고구려 속민이라고 적었는데, 그런 속민인 백제한테 광개토대왕 할아버지인 고국원왕이 죽었다고 사실대로 적으면 고구려 왕가 신성함이 부정되며 백제가 고구려 속민이라는 주장에 큰 모순이 생기기 때문이다.
또한 광개토대왕비문에서 고구려 주적을 백제가 아니라 왜국에 촛점을 맞추는 이유도 실제로 왜국이 고구려와 동등한 입장의 강대국이어서가 아니라, 이미 오래 전부터 고구려 속민이었다고 인식한 백제가 광개토대왕을 상대로 치열하게 싸웠다는 점을 그대로 적는다면 백제가 고구려 속민이었다는 주장에 심각한 모순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광개토대왕이 백제를 공격했던 진짜 이유는 그의 할아버지인 고국원왕이 백제 근초고왕과 전투에서 패배해 죽임을 당한 일에 대한 복수이면서 동시에 고구려를 공격해 왕을 죽일 만큼 강력한 힘을 가진 적수인 백제를 약화시키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와같은 이유나 목적을 광개토대왕비문에 그대로 적었다가는 자칫 하늘 후손이라고 자처하는 고구려 왕실위신을 실추시킬 우려가 있었고, 아울러 백제가 옛날부터 고구려 속민이었다는 선전을 스스로 부정해 버리는 꼴이 되고 만다.
그렇기에 광개토대왕비문에서는 광개토대왕이 백제를 공격했던 목적이 복수나 예방전쟁이 아니라, 마치 속민인 백제를 바다 건너에 있는 왜국의 침략에서 지켜주려는 정의의 사도인 것처럼 미화하고 과장한 것이라는 것이다.]
현대의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는 이러한 내용의 주장이 점차 대세를 이루고 있다.
어쨌던 오늘 주제는 김부식 '삼국사기'에 나오는 고구려 백제 신라 건국연대가 '삼국지위지동이전'과 '일본서기', '광개토대왕비문' 내용등으로 지금까지 위작이거나 사실로 받아 들이지 않았던 역사학자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이는 조선시대 일부학자들도 그러했다. 그러고 일제강점기 식민사학자들은 일본학자들보다 더 앞장 서 일제 주장을 설파했다.
그러나 이를 완벽히 뒤집는 유물이 최근에 발견되었다.
'풍납토성'이다.
'풍납토성'은 기원전 199년에서 기원후 346년 사이에 지어진 서울특별시 송파구 풍납동에 위치한 토성(土城)이다. 정식 명칭은 서울 풍납동 토성이며, 사적 제11호이다.
'풍납토성'이 과거에는 한성백제 도성이었던 '위례성'이라는 의견과 단순한 방어성이라는 의견이 서로 엇갈리면서 중요성과 보호에 머뭇거리는 점이 있었다. 현재는 백제 수도인 '위례성' 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발굴조사 성과를 보면 단순 방어성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의 어머어마한 유구와 유물이 확인되었다. 위치는 '몽촌토성' 북쪽에있다. 고이왕 시기와 근초고왕 시기에 개축된 것으로 추정 된다.
문제는 이 정도 토성은 오래 기간동안 수 십만 인력이 동원 되어야만 가능한 공사였다는 것이다.
삼국지위지동이전이나 일본서기처럼 당시 한반도 중부가 부족연맹체 수준이었다면 절대 불가능한 규모 공사였다는 것이다.
결국 장정 수 천~수만 명을 수백 년간 여러 차례 꾸준히 동원할 수 있을 정도의 강력한 권력이 이 시기 한성지방을 중심으로 한 한반도 중부에 존재했던 것이고, 기록에 의하면 그것은 바로 백제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처럼 풍납토성 유물발견으로 삼국건국연대는 삼국사기가 더 정확하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앞으로 더 많은 유물들이 발견되어 삼국사기 내용을 더 신뢰성있게 만들었음 한다.
만에하나 김부식 삼국사기가 없었다면 우리 역사 속 고대국가 건국은 수 백년 뒤로 미루어졌고 삼국시대 역사 또한 크게 변해졌을 것이다.
내가 '삼국사기'를 김부식이 지나치게 사대주의적이고 신라중심으로 기술했다고 폄하했던 것은 내가 역사를 너무 표피적으로만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 점은 앞 편에서 정리한 바 있다. 참고바란다.
오늘 주제는 글이 더 길어졌다.
두 편으로 나누어 쓸까 생각도 했지만 주제의 일관성을 위해 하나로 묶었다.
마지막으로 광개토대왕비 예에서 보듯이 역사기록 단 '한' 자가 각 나라 수 백년 역사를 송두리째 뒤바꿀만큼 중요하다.
역사기록의 중요성을 오늘 글을 쓰면서 다시 한번 깨닫는다.
ㅡ 초롱박철홍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