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스터디> 모임
밤 서늘한 바람에 사슴을 여미네요.
가을이 연인처럼 왔습니다.함께 모여 作亂해보실까요?
김수영문학회월례독서모임
일시: 2018.10.17(수) 오후 7시
장소: bless커피숍(소피아호텔 맞은편)
밤 서늘한 바람에 사슴을 여미네요. 가을이 연인처럼 왔습니다.함께 모여 作亂해보실까요?
참석자: 박정근,권정관,이충환,조금래,박인수, 박종민,윤원일,조미선, 윤채원
1)김수영 시
<바뀌어진 지평선>
뮤우즈여
용서하라
생활을 하여나가기 위하여는
요만한 경박성이 필요하단다
시간의 표면에 물방울을 풍기어가며
오늘을 울지 않으려고
너를 잊고 살아야 하는 까닭에
로날드 골맨의 신작품을
눈여겨 살펴보며
피우기 싫은 담배를 피워본다
어느 매춘부의 생활같이
다소곳한 분위기 안에서
오늘이 봄인지도 모르고
그래도 날개돋친 마음을 위하여
너와 같이 걸어간다
흐린 봄철 어느 오후의 무거운 일기처럼
그만한 우울이 또한 필요하다
세상을 속지 않고 걸어가기 위하여
나는 담배를 끄고
누구에게든지 신경질을 피우고 싶다
물에 빠지지 않기 위한
생활이 비겁하다고 경멸하지 말아라
뮤즈여
나는 공리적인 인간이 아니다
내가 괴로워하기보다도
남이 괴로워하는 양을 보기 위하여서도
나에게는 약간의 경박성이 필요한 것이다
지혜의 왕자처럼
눈 하나 까딱하지 아니하고
도사리고 앉아서
나의 원죄와 회한을 생각하기 전에
너의 생리부터 해부하여보아야겠다
뮤우즈여
클락 게이블
그리고 너절한 대중잡지
타락한 오늘을 위하여서는
내가 오늘보다 더 깊이 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아 웃을까보아
나는 적당히 넥타이를 고쳐매고 앉아있다
뮤우즈여
너는 어제까지의 나의 세력
오늘은 나의 지평선이 바뀌어졌다
물은 물이고 불은 불일 것이지만
어제와 오늘은 다르고
오늘과 내일의 차이를 정시(正視)하기 위하여
하다못해 이와같이 타락한 신문기자의 탈을 쓰고 살고 있단다
솔직한 고백을 싫어하는
뮤우즈여
시기와 경쟁과 살인과 간음과 사기에 대하여서는
너에게 이야기하지 않으리라
적당한 음모는 세상의 것이다
이 어지러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하여서는
나에게는 약간의 경박성이 필요하다
물 위를 날아가는 돌팔매질-
아슬아슬하게
세상에 배를 대고 날아가는 정신이여
너무나 가벼워서 내 자신이
스스로 무서워지는 놀라운 육체여
배반이여 모험이여 간악이여
간지러운 육체여
표면에 살아라
뮤우즈여
너의 복부를랑 하늘은 바라보게 하고-
그러면
아름다움은 어제부터 출발하고
너의 육체는
오늘부터 출발하게 되는 것이다
골맨, 게이블, 레이트, 디보오스,
매리지,
하우스펠 에아리아
-(영국인들은 호스피탈 에아리아?)
뮤우즈여
시인이 시의 뒤를 따라가기에는 싫증이 났단다
고갱, 녹턴 그리고
물새
모두 다같이 나가는 지평선의 대열
뮤우즈는 조금쯤 걸음을 멈추고
서정시인은 조금만 더 속보로 가라
그러면 대열은 일자(一字)가 된다
사과와 수첩과 담배와 같이
인간들이 걸어간다
뮤우즈여
앞장을 서지 마라
그리고 너의 노래의 음계를 조금만
낮추어라
오늘의 우울을 위하여
오늘의 경박을 위하여
<1956>
<기자의 정열>
사면의 신문 위에 육호활자가 몇천개 박혀있는지 모르지만 너의 상상에서는 실제의 수십배는 담겨있으리라
이 무수한 활자 가운데도
신문기자인 너의 기사도
매일 조금씩은 끼이게 되는데
큰 아름드리나무에 박힌 옹이처럼 너는 네가 한 신문기사를 매일아침 게시판 위에서 찾아보는 버릇이 너도 모르게 어느덧 생기고 말았다
생각하면 그것은 둥근 옹이같이 어지러웁기만 한 일이지만
거기에는 초점이 없지도 않다
그러나 이 초점을 바라고 보는 것이 아니다
낭만적 위대성을 잊어버린 지 오랜 네가 인류를 위하여 산다는 것도 거짓말에 가까운 것이지만
그래도 누가 읽어줄지 모르는 신문 한구석에 너의 피가 어리어있는 것이
반가워서 보고 있는 것인가
기사라 하지만 네가 썼다고 알아주는 사람이 있어도 좋고 없어도 가히 무관한 것
그러기에 한결 가벼운 휴식의 마음으로 쓰고 있을 수 있었던 것
오랜 피곤도 고통도 인내도 잊어버리고
새사람 아닌 새사람이 되어
아무도 모르고 너 혼자만이 아는
네가 쓴 기사 위에
황홀히 너를 찾아보는 아침이여
번개같이 가슴을 울리고 가는 묵은 생명과 새 희망의 무수한 충돌 충돌 ..............
누구의 힘보다 강하다고 믿어오던
무색의 생활자가 네가 아니던가
자유여
아니 휴식이여
어려운 휴식이여
부르기 힘드는 사람의 이름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너무나 무거운
너의 짐
그리고 일락(一樂), 안이, 허위......
모두다 잊어버리고 나와서
태양의 다음가는 자유
자유의 다음가는 게시판
너무나 어려운 휴식이여
눈물이 흘러나올 여유조차 없는
게시판과 너 사이에
오늘의 생활이 있을진대
달관한 신문기자여
생각하지 말아라
‘결혼 윤리의 좌절
-행복은 어디에 있나?-’
이것이 어제 오후에 써놓은 기사 대목으로
내일 조간분(朝刊分) 사회면의 표독한 타이틀이 될 것이라고 해서
너가 이 두 시간의 중간 위에 서있는 것이라고 해서
어려운 휴식
참으로 어려운
얻기 어려운 휴식
너의 긴 시간 속에 언제고 내포(內包)되어있는 휴식
그러한 휴식이 찬란한 아침햇빛 비치는 게시판 위에서 떠돌아다니면서
희한한 상상과 무수한 활자를
너에게 눌러주는 지금 이 순간에도
너는 아예 놀라지 말아라
너는 아예 놀라지 말아라
<1956>
<구름의 파수병>
만약에 나라는 사람을 유심히 들여다본다고 하자
그러면 나는 내가 시와는 반역된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먼 산정(山頂)에 서있는 마음으로
나의 자식과 나의 아내와
그 주위에 놓인 잡스러운 물건들을 본다
그리고
나는 이미 정하여진 물체만을 보기로 결심하고 있는데
만약에 또 어느 나의 친구가 와서 나의 꿈을 깨워주고
나의 그릇됨을 꾸짖어주어도 좋다
함부로 흘리는 피가 싫어서
이다지 낡아빠진 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리라
먼지 낀 잡초 우에
잠자는 구름이여
고생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세상에서는
철늦은 거미같이 존재없이 살기도 어려운 일
방 두간과 마루 한간과 말쑥한 부엌과 애처로운 처(妻)를 거느리고
외양만이라도 남과 같이 살아간다는 것이 이다지도 쑥스러울 수가 있을까
시를 배반하고 사는 마음이여
자기의 나체를 더듬어보고 살펴볼 수 없는 시인처럼 비참한 사람이 또 어디 있을까
거리에 나와서 집을 보고
집에 앉아서 거리를 그리던 어리석음도 이제는 모두 사라졌나보다
날아간 제비와 같이
날아간 제비와 같이 자죽도 꿈도 없이
어디로인지 알 수 없으나
어디로이든 가야 할 반역의 정신
나는 지금 산정에 있다 ――
시를 반역한 죄로
이 메마른 산정에서 오랫동안
꿈도 없이 바라보아야 할 구름
그리고 그 구름의 파수병인 나
<1956>
2) 애송시 - 곽재구의 사평역에서
사평역에서
/ 곽 재 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 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히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이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 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 가는 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