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충장공
공의 휘는 운이요 자는 창진 시호는 충장이다. 참봉 응정의 아들로 1543년(中宗38年)에 해남군 옥천면 건교촌(당시는 영암군)에서 태어 났으며 성품이 곧고 강직하고 용역이 비범하여 활쏘기와 말타기에 진역하였으며 7세때 차고 다니던 패도에 정충보국의 네자를 새기며 충정을 스스로 다짐을 하였다. 1570년에 28세로 무과에 급제하여 남대문 수문장, 함경도 길주, 명천, 유원진, 훈간원 봉사, 금갑도 권관, 거산찰방, 웅천현감, 제주판관등을 거쳤으나 가는 곳 마다 상관들의 불의와 부딪쳐 사임하였으며 그뒤 이보진장과 사복판관 재직시 백성들로부터 정야(정아버지)라고 불리우다 1591년에 왜구의 침략이 잦은 녹도 만호로 부임하여 즉시 성곽을 축수하고 병사를 조련함은 물논 전선도 3척이나 건조하는 등 침식을 잃고 왜적의 방비에 몰두하였다. 임진난이 발발하여 경상도 우수사 원균이 패하여 이순신에게 구원을 요청하자 이순신 이하 제장들이 갑론을박하자 공은 칼을 고쳐 잡고 구국하는데 경상도와 전라도가 경계가 어디 있느냐 적은 밖에 있을 때 방비를 해야 한다고 눈을 부라리자 이순신이 록도만호가 아니면 내가 일을 그르칠뻔 하였다고 즉시 출전하였으나 많은 왜선을 보자 서로 나가기를 꺼려하며 심지어 영남 병사는 배를 고의로 침몰시키는등 동요를 하자 장군이 선봉에서 적을 물리쳐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당포, 사량, 옥포, 사천과 한산대첩에서 대승을 하자 정3품으로 3계급 초수(특진)하여 절충장군에 임명되었다. 1592년 9월 초 부산포 해전시 몰운대 전투에서 죽음을 예감하고 내가 죽더라도 적이 알지 못하도록 하라는 이야기를 남기고 적을 무찌르다 적탄에 맞아 절명하니 이순신 이하 장졸들이 통곡을 하고 왜적들은 록도만호 정운이 죽었다고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또한 선조실녹에 의하면 장군이 순절한 후 아군의 승전소식이 없이 전선이 불진하자 선조가 요즈음 왜 승전 소식이 없느냐고 하자 아뢰기를 “록도만호 정운이 순절한 후 군사들이 전쟁에 임하기를 두려워 합니다” 라는 기록이 있다. 장군은 누차에 걸처 증직을 하여 병조판서에 이르고 충장의 시호가 내렸으며 부산 충렬사, 순천 충무사, 고흥 쌍충사, 광주 무광사, 해남 옥천 충절사, 여수 령당에 배향 되었으며 부산시에서는 장군이 순절하고 승전한 부산해전승전기념일 10月 5日을 부산시민의 날로 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