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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성소와 임마누엘 / 1) 성소를 통한 임마누엘
<서 론>
사도 요한은 우리가 아는 대로 복음서 저자들 중 제일 마지막 기록자요 사도 바울보다 훨씬 늦게 그의 서신들과 계시록을 기록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복음서와 계시록은 어쩌면 각 시대 뿐만 아니라 특별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마지막 시대를 위해 가장 중요하고도 핵심적인 내용을 담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무엇보다도 이 책들에는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자세히 알 수 있는 성소와 관련된 언급들이 많아서 “요한의 성소신학”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아담의 범죄로 에덴은 실낙원(失樂園)이 되었고, 사람은 그 결과로 하나님이 주시는 최고의 축복들을 다 잃어버렸다. 그 중에서도 영생을 잃어버린 것이 가장 큰 손실일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에서 추방된 다음, 하나님은 그들을 그대로 버려두지 않으셨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를 덮어보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무화과나무 잎으로 자신들의 부끄러움을 가리고자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대신에 가죽옷을 입혀 내보내셨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 아담이 추방된 후 아담과 그들의 자녀들은 에덴동산 문 어귀에서 제단을 쌓고 양으로 희생제물을 드렸다.
하나님께서 이제부터는 제단에서만 너희들을 만날 수 있음을 말씀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실현되기에는 기나긴 세월이 지나야 할 것이었지만 그들은 몰랐을 것이다. 제단에서 양으로 희생제물을 드리는 이 행위는 가장 초기의, 가장 원초적인 성소 형태이다. 이것을 통해 사람이 다시 에덴으로 회귀할 수 있을 것이었다.
이를테면, 복낙원(復樂園)으로 귀향하는 것이다. 성소는 하나님의 구속 사업의 과정을 한 눈으로 볼 수 있게 만든 것이다. 이를테면, 성소 제도는 인간의 구원이 어떻게 이뤄지는지를 보여주는 매우 단순하면서도 명료한 하나의 시청각(視聽覺) 교재이다. 인간의 구원의 과정과 방법을 이해시키기 위해 설계된 성소는 구약의 복음서이며 구속의 청사진이다.
구약은, 주로 지상 성소(地上聖所)를 중심으로 교훈이 이루어지고 있는 반면, 신약은 그 회수가 빈번하지는 않지만 대부분 하늘 성소[天上聖所]에 그 초점을 맞추고 있다. 따라서 구약의 성소 제도에 대한 이해 없이 하늘 성소를 이해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신구약의 성소 문제를 잘 응집시키고 있는 대표적인 책이 히브리서이다.
여기서는 히브리서가 다뤄질 주제가 아니기 때문에 그 구체적 내용은 언급하지 않지만 성소문제를 심도 있게 알고자 하는 사람은 꼭 이 책을 연구해보기 바란다. 그렇다면 요한의 복음서와 계시록이 성소 문제와 관련하여 왜 그토록 중요한가? 그 이유는 지상의 성소이든, 하늘의 성소이든 그것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이다.
이 점을 확연히 부각시키는 두 책이 요한복음서와 요한계시록이다. 성경의 예언에 비춰볼 때, 우리는 이 지구 역사의 끝에 살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런 면에서 성소, 특히 지상 성소를 토대로 한, 하늘 성소에 대한 이해는 우리의 구원 문제와 직결되어 있기 때문에 이 연구는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요한복음을 중심으로 우리의 성소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살펴볼 것이며, 또한 요한복음과 연계하여 요한계시록에 계시된 하늘 성소를 통하여 요한의 전반적인 성소신학을 조명해 보고자 한다.
1) 성소를 통한 임마누엘
하나님이 계시는 곳은 그곳이 어디든 성소, 곧 지성소이다. 이 땅에서 성소의 시작은 에덴동산이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은 아담(아담의 뜻은 사람이다)과 함께 하셨다. 이사야 7장 14절에서 처음으로 소개된 임마누엘, 곧 하나님이 사람과 함께 하신 곳은 에덴동산이었다. 아담이 죄로 추방된 후 그 회복의 과정이 제단, 곧 성소였다.
사랑의 하나님은 사람을 잊지 않으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시 사람과 함께 하시려고 에덴에서 나오셨다. 하나님이 사람과 함께 하시기 위한 그 공간이 바로 성소이다. 원시 형태의 성소는 희생제물을 드리는 제단이었다. 아담 이후로 수많은 성경의 인물들은 가는 곳마다 제단을 쌓았다. 노아가 그랬고(창8:20)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도 그랬다(창12:7; 13:18; 33:20).
그러다가 이스라엘의 광야 시대에는 이동 성소(성막)의 형태였고, 그 이후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후로는 고정 성소인 성전이었다. 시내 산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성소를 지으라고 지시하셨다. “내가 그들 중에 거할(히, 샤칸) 성소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짓되”(출 25:8)“그들 중에 거한다”라는 말은 곧 ‘임마누엘’을 뜻한다.
구약의 전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은 성소를 통하여 이스라엘과 함께 하셨다. 곧 그들의 임마누엘이 되셨다. 흥미롭게도, 여기서 “거하다”라는 히브리어(샤칸)와 동일한 어간이 요한복음 서두에 등장한다. 요한이 서두에서 언급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인가? 그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하신 ‘로고스’(말씀)이시다.
창세기 1장 1절의 태초와 이곳의 태초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창세기의 태초는 창조 시점의 태초이고, 요한복음의 태초는 말씀이 존재하신 때의 태초이다. 따라서 요한의 태초는 창세기의 태초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인 영원 전의 태초이다. 선지자 미가가 이것을 뒷받침 하고 있다.“ 그의 근본은 상고(上古)에 태초(太初)니라”(미 5:2).
여기서 잠깐 로고스(Logos)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태초에 계신 말씀’, 곧 ‘로고스’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일단은 여기서 말하는 로고스는 신격적 존재이다. 그 이유는 그가 창조에 관여하였기 때문이다(요1:3). 고대 헬라의 철학자들은 이 로고스에 대해 다양한 견해를 드러내었다.
그중 알렉산드리아의 필로(Philo of Alexandria, c.20 BC ~ c.50 AD)는 로고스를 중간 단계의 신적 존재라 하였다. 그는 로고스를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가교 역할을 하는 중재자의 의미로 보았다. 특히 로고스는 하나님과 물질세계 사이를 이어주는 최고의 중재자라고 정의하였다. 마침내 필로는 로고스를 “하나님의 장자”라 불렀다.
한편, 히브리어 성경의 아람어 역인 탈굼(Targums)에서는 “말씀”을 메므라(memra)로 번역하였는데, 이것은 구약의 “여호와”와 동일한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로고스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하는 신적 존재이다. 요한복음 제1장은 그 장엄함과 깊이와 넓이와 크기에 있어서 모든 성경의 장(章)들을 압도할 만하다.
왜냐하면 그 시작이 마치 창세기와 같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성부(聖父)와 성자(聖子)가 등장하시고 또 그들의 창조사역(創造使役)이 소개되고 있다. 어쩌면 요한복음 서두는 창조와 관련하여 압축된 신약의 창세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Logos)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하는 신적 존재이다. 요한복음 서두는 예수님의 신성, 곧 그가 하나님이심에 대해 장엄한 묘사를 하고 있다.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이 그 사실을 대변하고 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20:31). 여기서 “예수”라는 이름이 예수님의 인성(人性)적 측면을 대표하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아들”과 “그리스도(메시아)”는 그의 신성(神性)적 측면을 대표할 것이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속에는 그의 신성과 인성, 곧 그의 신-인성(神人性)이 함께 어우러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요한은 그의 글 첫머리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이심과 창조주 되심을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과 창조주 사이에는 무슨 관계가 있는가? 성경은 창조주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임을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다.
“너희는 이같이 그들에게 이르기를 천지를 짓지 아니한 신들은 땅 위에서 이 하늘 아래서 망하리라 하라”(렘10:11). “만방의 모든 신(神)은 헛것이요(신들은 우상이요, NIV),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음이로다(창조주)”(시96:5). 창조주와 구속주는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 창조주가 아니면 구속주가 될 수 없다.
피조물은 결코 구속주가 될 수 없다. “네 구속자요 모태에서 너를 조성한 나 여호와(창조주)가 말하노라.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라 나와 함께 한 자 없이 홀로 하늘을 폈으며 땅을 베풀었고”(사45:24). 이제 요한의 글들을 하나씩 살펴보자. 위의 성경적 증거들에 비추어, 왜 요한은 예수님의 신성을 그의 글 첫머리에서 들추어내고 있는가?
물론 요한이 그의 복음서를 기록할 당시, 예수님의 신인성(神人性)을 부인하는 이설(異說)들, 특히 영지주의 이단이 창궐하고 있었기에 주님의 신격과 인격을 옹호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기술함에 있어 이것의 절대적 필요를 요한은 계시를 통해 알았을 것이다.
요1:1-3절은 “태초에 말씀(헬, 로고스)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1-3).
여기서 “함께”라는 말은 하나님이 한 분이 아닌 두 분이신 것을 확실히 하고 있다. 곧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을 요한은 그의 글 서두에서 천명하고 있다.
우선 이 말씀을 분석하기 전에, 이 구절들(요1장)이 창세기 1장과 어떻게 평행을 이루고 있는지를 살펴보자. 여기에 두 태초가 나온다. 앞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① 창세기의 태초는 세상이 창조될 때의 시점인 태초이며, 요한복음의 태초는 창세기의 것보다 훨씬 앞선, 시간으로 가늠할 수 없는 영원 전의 태초이다. 말씀의 존재 시점을 “그의 근본은 상고(上古)에 태초(太初)니라”(미5:2)고 말하고 있다.
② “말씀”과 “이르시되”가 평행을 이루고 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창1:3). “하나님”과 “이르시되”는 창조의 선행조건(先行條件)이다. “이르시되”는 오늘날의 “말하다”와 같은 의미로서 명사인 “말씀”의 동사형(動詞形)이다. 곧 “말씀”과 “이르시되”가 평행을 이루고 있다. “만물이 그(말씀)로 말미암아(이르시되) 지은 바 되었으니.”
③ 생명과 빛으로서 평행을 이루고 있다. 예수님을 사람들의 생명과 빛으로 소개되고 있다(요1:4). 첫째 날 역시 “빛” (생명의 근원)이 있었다(창1:3). 첫째 날 “빛”은 예수님의 성육신을 뜻한다. 바로 이분이 창조사역을 시작하신다. 그러므로 창세기 1장은 대부분 믿는 이들의 생각과는 달리 복음의 덩어리이다!
아직 많은 믿는 이들에게 열리지 않은 보석이므로, 멀지 않는 후일에 이에 대한 해석이 따로 있을 것이다. 히브리서 서론(히1:1-3)도 이 사실을 똑같이 강조하고 있다. 히브리서 1장에서도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먼저 말하고, 그다음 그의 창조사역을 말씀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구속주가 되기 이전에 먼저 창조주이어야 한다는 사실은 매우 명료하다. 마치 고장 난 시계를 시계가 고칠 수 없고 오직 시계를 만든 사람만이 고칠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요한의 성소신학과 관련하여 이 서론부에서 다루어야 할 가장 중요한 한 구절이 있다.
바로 1장 14절이다. 이것은 요한의 성소신학을 논함에 있어 매우 중요한 구절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할렐루야! 아멘!
첫댓글 아멘감사충만르 ♡♡♡
말씀이 육신이 되심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