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李爾瞻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 광주(廣州, 지금의 경기도 광주시) |
---|---|
자 | 득여(得與) |
호 | 관송(觀松), 쌍리(雙里) |
광해군 즉위 후 정권의 1인자로 영향력을 끼친 조선 중기의 문신. 선조 15년에 소과에 급제, 1594년에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함으로써 전적 벼슬을 제수 받고 사가독서의 혜택을 받았다. 대북파를 이끌던 정인홍과 함께 적극적으로 광해군을 지지하여 광해군 즉위 후 정권의 1인자로 국사를 좌지우지했다. 대사간, 병조 참지, 성균관 대사성 등의 요직을 거쳤고 광창군에 피봉되는 영광을 누렸다. 대북파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계축옥사를 일으켜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을 죽이고 영창대군을 강화도에 연금한 다음 살해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권좌에서 끌려 내려진 후, 체포되어 죽임을 당했다.
임진왜란의 발발과 함께 왜군이 파죽지세로 북상하자 봉선사의 주지 삼행은 봉안하고 있던 세조의 영정을 봉선전에 묻어두었다. 얼마 후 절에 침입한 왜군이 그것을 발견하고 찢어버리려 하자 삼행이 애걸하여 되찾은 다음 은밀한 곳에 감추었다. 그 후 서울에 주둔하던 왜군이 날마다 광릉 근처에 출몰하여 민가를 약탈하고 숲에 불을 지르는 등 갖은 만행을 저질렀다. 바야흐로 세조의 영정이 훼손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당시 광릉 인근에서 의병을 모아 왜군과 맞서 싸우던 광릉 참봉 이이첨이 소식을 듣고 군막을 떠나 낮에는 숨고 밤에는 걸어서 봉선사에 도착했다. 그날도 서울에 있던 왜군이 나타나 광릉과 주변 숲에 불을 지르자 겁을 먹은 봉선사의 승려들이 모두 도망쳤다. 왜군의 기세가 만만찮았으므로 이이첨은 어두워지기를 기다렸다가 절에 잠입하여 애타게 자신을 기다리던 삼행으로부터 영정을 받아들고 곧바로 적진을 가로질러 돌아왔다.
1593년 3월, 이이첨이 세조의 영정을 들고 행재소를 찾아오자 선조는 만조백관을 거느리고 마중나왔다. 당시 조선의 역대 국왕의 영정이 대부분 소실되었지만 집경전 참봉 홍여율이 태조의 영정을 보전했고, 광릉 참봉 이이첨이 세조의 영정을 지켜냈던 것이다. 그때까지 이극돈의 후예라 하여 사대부들에게 외면당하던 이이첨은 선조의 신임을 받아 출세가도를 달리기 시작했고, 광해군 대에 이르러 국사를 좌지우지하는 인물이 된다.
이이첨은 무오사화를 주도한 것으로 알려진 이극돈의 5대손이다. 이극돈은 일찍이 세조의 변덕으로 나흘 동안 우의정을 지냈다는 이인손의 아들이다. 본관이 광주인 이극돈의 가문은 위로 3대, 아래로 5대까지 문과 급제자를 낸 조선의 명가였다. 그의 형제 네 명이 모두 정승과 판서를 지냈고, 조카와 사촌형제들도 참판과 참의를 지냈을 정도였다.
이극돈은 1498년(연산군 1년) 《성종실록》 편찬을 위한 실록청이 개설되었을 때 당상관으로 임명되었는데, 김일손이 수집한 사초 속에 있는 김종직의 〈조의제문〉 내용을 유자광에게 흘렸다. 그러자 유자광은 연산군에게 김종직이 대역죄를 저질렀다고 보고했다.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을 일을 항우에게 죽음을 당한 초나라의 의제에 비견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연산군은 이미 사망한 김종직을 부관참시하고 그의 제자인 김일손, 권오복, 권경유 등 수많은 사림 인사들을 죽이거나 귀양 보냈다.
이 참혹한 무오사화의 서슬에 실록청의 수장이었던 이극돈은 어세겸, 유순, 윤효손 등의 사관들과 함께 문제의 사초를 보고하지 않은 죄로 파면되었다. 따지고 보면 그 역시 피해자였지만 유자광에게 사화의 단초를 발설했다는 원죄 때문에 두고두고 사림의 원망을 떠안아야 했다.
이극돈은 당시 훈구파의 거물로서 전례에 밝고 문장이 뛰어났으며 관리의 행정을 꿰뚫고 있었으므로 부임한 곳마다 큰 업적을 남겼다고 한다. 그는 사화의 불꽃이 사그라진 뒤 복권되어 광원군에 봉해졌고, 병조판서에 제수되었지만 사직하고 얼마 후 세상을 떠났다.
그때부터 연산군은 광주 이씨 가문을 경계하더니 임사홍이 폐비 윤씨 사건을 거론함으로써 일어난 갑자사화 때 거의 멸문지경으로 몰아넣었다. 그의 조카 이세좌가 폐비에게 사약을 들고 간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 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을 몰아낸 반정공신들은 이극돈을 무오사화의 원흉으로 규정했다. 그들 대부분이 사림이었기 때문이다. 그 탓에 이이첨은 어린 시절부터 이극돈의 자손이라는 이유로 늘 옷깃을 여미고 다녀야 했다. 오랫동안 음지에서 학문에 몰두하며 기회를 엿보던 그는 남명 조식의 제자였던 정인홍의 문하에 들어갔고, 1582년(선조 15년) 소과에 급제하여 종9품의 광릉 참봉에 임명되었다.
임진왜란은 조선에는 불행이었지만 이이첨에게는 쇠락해가는 가문을 일으킬 수 있는 엄청난 기회로 다가왔다. 보잘것없는 광릉 참봉으로 웅크린 채 오랫동안 대과 응시의 기회를 노리고 있던 그는 전쟁이 일어나자마자 도망치지 않고 현지에서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맞서 싸웠다. 그 와중에 세조의 어진을 살려내는 공을 세워 현달의 기회를 잡았던 것이다.
전란이 소강상태에 빠져있던 1594년에 그는 선조의 배려로 별시 문과에 응시하여 을과로 급제함으로써 전적 벼슬을 제수 받고 사가독서(賜暇讀書)의 혜택까지 받았다. 가문의 흠결은 이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당시 그는 지극한 효행을 인정받아 고향에 정문(旌門)이 세워지기도 했다.
1597년(선조 30년) 6월 22일의 실록에는 그의 효행에 대한 경기 관찰사 홍이상의 보고 내용이 실려 있다. 전 평강 현감 이이첨이 임오년과 계미년 사이에 아버지와 계조모가 잇달아 세상을 뜨자 여막에 거처하면서 지나치게 슬퍼한 나머지 거의 정신을 잃을 정도였으며, 상제의 의례를 한결같이 《가례(家禮)》에 의거했으며 상복을 벗은 후에도 삭망(朔望)에 성묘를 했다는 것이다.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삼았던 조선 사회에서 부모에 대한 효행은 군왕에 대한 충성의 근본이 된다. 그가 이극돈이라는 멍에를 딛고 선조의 총애를 받은 이면에는 이런 개인적인 성향도 큰 영향을 발휘했다.
전쟁이 사실상 종식된 1598년(선조 30년)에 이이첨은 또 하나의 기회를 잡는다. 당시 정6품 병조 좌랑이었던 그가 세자시강원 사서로 임명된 것이다. 임진왜란 때의 맹활약으로 일찌감치 차기 왕권을 예약해 놓은 광해군과의 인연이 맺어진 것이다. 그때부터 이이첨은 광해군에게 충성하면서 내일의 태양을 지켜내기에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 그 와중에도 일관된 선조의 총애를 바탕으로 사간원 정언을 거쳐 1599년에는 이조 정랑에 이르렀고, 1608년에는 중시(重試)에 장원급제하기도 했다.
선조는 만년에 인목왕후 김씨로부터 딸 정명공주에 이어 적자인 영창대군을 얻었다. 그로 인해 후계에 대한 선조의 의중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영의정 유영경이 영창대군을 지지하면서 세자 광해군은 큰 위기에 봉착했다. 북인 일파는 당시 내부에서 일어난 후계자 문제 때문에 대북파와 소북파로 분열되기에 이른다.
이때 이이첨은 대북파를 이끌던 스승 정인홍과 함께 소북파의 영수 유영경을 탄핵하는 한편 적극적으로 광해군을 지지했다. 이에 분개한 선조가 원배령을 내렸지만 곧 승하했다. 당시 유영경은 후사를 광해군에게 맡긴다는 선조의 교서를 숨기고 인목대비에게 영창대군으로 보위를 이은 다음 수렴청정을 하라고 종용했다. 그러나 영창대군의 나이가 워낙 어린 데다 부왕의 유지를 존중한 인목대비의 명으로 광해군이 보위에 오를 수 있었다.
광해군은 1609년(광해군 1년) 2월 25일 내린 비망기(備忘記)에서 당파에 관계없이 인재를 천거하고 현자를 등용하여 나라의 어려움을 헤쳐 나가자고 강조했지만 현실은 딴판이었다. 당시 광해군은 남인 이원익을 정승으로 임명하여 초당파적인 정국을 운영하려 했지만 자신의 즉위에 공을 세운 대북파의 저지로 인해 곧 뜻을 접고 만다.
광해군 즉위와 동시에 복권된 이이첨은 광해군의 즉위를 방해한 유영경을 비롯한 소북파를 역도로 몰아 처형했다. 뒤이어 수시로 왕위에 집착을 보이던 임해군을 강화도에 위리안치한 다음 살해하기까지 했다. 광해군의 복심을 미리 읽고 행동하는 칼날이 된 것이다.
그때부터 이이첨은 정권의 1인자로서 국사를 좌지우지했다. 대사간, 병조 참지, 성균관 대사성 등의 요직을 두루 거쳤고 광창군에 피봉되는 영광을 누렸다. 그는 권력 있는 지위에 있지 않았지만 항상 조정의 논의를 주도했으므로 벼슬자리를 원하는 사람들이 저택 앞에 줄을 섰고, 조정에서도 아첨하는 무리들이 많았다.
1609년(광해군 1년) 7월 경상도 유생 이전 등이 ‘오현(五賢)의 문묘종사’를 제창했다. 문왕 공자를 모시는 성균관 문묘에 조선 유림의 대표적인 선비로 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 등 다섯 사람을 배향하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문묘종사 논의가 구체화되면서 조정에서 불화가 일어났다.
당시 북인들은 남인들의 정신적 지주인 이언적과 이황이 포함된 반면 자신들의 스승인 서경덕과 조식이 누락되었다며 반발했다. 1611년(광해군 3년) 정인홍이 상소를 올려 이언적과 이황의 그릇된 처신을 비판했다. 명종 즉위년에 벌어진 양재역 벽서 사건과 이듬해의 정미옥사로 사림이 떼죽음을 당할 때 두 사람이 조정에 있었다는 것이었다.
‘이언적과 이황이 지난 을사년(1545년)과 정미년(1547년) 사이에 벼슬이 극도로 높거나 청요직을 지냈는데, 그 뜻이 과연 벼슬할 만한 때라고 여겨서입니까?’
그러자 성균관 유생들은 유생명부인 《청금록(靑衿錄)》에서 정인홍의 이름을 삭제해 버렸다. 정인홍은 대북파의 영수로 임진왜란 때 화의를 주장했다는 이유로 유성룡을 탄핵했고, 후계파동이 일어났을 때 광해군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인물이다.
그를 비호하던 광해군은 성균관에서 유생들을 모조리 내쫓았고, 이듬해는 김직재의 무옥(誣獄)을 통해 소북파 인사 100여 명을 처단해 버렸다. 이로써 대북파는 남인과 결별하고 소북파를 축출함으로써 정사를 주도하게 되었지만 영창대군이 살아있는 한 언제든지 광해군의 권좌가 흔들릴 수밖에 없음을 절감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613년(광해군 5년)에 정인홍과 이이첨이 이끄는 대북파는 본격적인 정권 굳히기에 나섰다. 칠서의 옥을 빌미로 계축옥사를 일으켜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을 죽이고 영창대군을 강화도에 연금한 다음 강화군수 정항을 시켜 살해하는 초강수를 두었던 것이다. 이로써 광해군의 권좌는 물론 대북파의 입지를 강화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세간의 악평은 피할 수 없었다.
그해 8월에 예조판서에 제수된 이이첨은 대제학을 겸하면서 과거를 주관하게 되자 많은 후진들을 조정에 받아들여 큰 세력을 형성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소설 《홍길동전》을 썼던 당대의 풍운아 허균도 이이첨의 휘하에 있었다. 당시 이이첨은 조정에서 내놓기 어려운 사안이 있으면 스스로 초안을 잡아 추종자들에게 나누어주어 올리게 한 다음 광해군에게 초야의 공론이라고 아뢰곤 했다.
1618년에는 판의금부사, 예조판서, 약방제조, 1619년 대제학을 거쳐 1620년 다시 예조판서가 되었다. 당시 백성들은 권력의 중추에 있던 세 사람 이이첨·유희분·박승종을 일컬어 ‘삼창(三昌)’이라 불렀다. 이는 세 명의 부원군호(府原君號)에 공통적으로 창(昌) 자가 들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권력 지형은 동등하지 않았다.
일례로 대북파 정권이 조정에서 인목대비에 대한 폐모론을 내세웠을 때 이항복과 이덕형 등 고굉중신들의 강력한 반대로 벽에 부딪치자 광해군은 이이첨에게 서찰을 보내 은밀히 물었다.
“폐모론이 발론되었다가 중지되었으니 어쩌면 천명이 이의에게 있어서 그렇게 된 것인가, 대비가 복이 있어서 그렇게 된 것인가?”
그러자 이이첨은 글월로 이렇게 대답했다.
“박승종은 유영경의 족당으로 무신년에 죄를 얻을 뻔하였는데 신과 사돈 간인지라 풀려나 온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다시 전하의 총애를 입게 되자 예전의 은혜를 배반하고 혐의를 낚아 오로지 신들의 일을 파괴하려 합니다. 무릇 큰 논의가 행해지지 않는 것은 모두 이 사람이 저지하는 것입니다.”
이에 광해군이 박승종을 불러 이이첨의 편지를 보여주자 그는 크게 두려워하며 자신의 입장을 변명했다고 한다. 임금은 당시 삼창(三昌)을 인척으로 여겨 모두 가까이했는데 그때부터 박승종 일파를 소외시켰다고 한다. 이이첨의 위세가 그 정도였다.
그 무렵 광해군은 상궁 김개시를 무척 총애했다. 개시(介屎), 우리말로 하면 ‘개똥이’이니 노비 출신임에 분명하다. 그녀는 예전에 동궁의 시녀였는데, 왕비를 모시다가 광해군의 눈에 띄어 승은을 입었으므로 상궁이 되었다.
이이첨은 광해군이 세자빈을 간택할 때 조국필과 함께 간언하여 박승종의 딸을 선발하게 했다. 그런데 세자빈의 아버지 박승종과 할아버지 박자흥이 왕의 신임을 받으면서 유희분과 결탁하여 이이첨을 견제했다. 이에 분개한 이이첨은 김개시의 아버지와 교분을 맺음으로써 김개시와 소통하는 관계가 되었다.
그 후 이이첨은 함부로 드러내기 곤란한 내용은 언문으로 써서 김상궁에게 보여준 다음 베갯머리에서 광해군을 설득하게 했다. 실록에 따르면 그는 오로지 대북파만이 광해군에게 충성을 다하는 정파라고 주장하곤 했다.
“사대부로서 서인이니 남인이니 소북이니 하는 자들은 모두 역적 이의(李㼁. 영창대군)에게 마음을 두어 나라를 위태롭게 하려는 자들이므로 장차 화를 예측할 수 없습니다. 신들처럼 대북이라고 하는 자들만이 오로지 주상을 위하여 충성을 바치길 원하므로 주상께서 오직 의지하고 기대야 할 대상입니다.”
이처럼 이이첨과 김개시가 한통속이 되어 권력을 농단하자 사람들은 두 사람이 성별은 다르지만 비슷한 성향을 가졌다고 수군거렸다. 그 첫째는 그들이 항상 의분에 복받쳐 역적을 토벌하겠다고 부르짖는 것이다. 둘째는 김개시는 왕의 총애를 받으면서도 품계를 올려달라고 하지 않고 대궐 안팎을 드나들며 겸손한 자세를 취했는데, 이이첨 역시 조정의 논의를 주도하면서 정승의 자리를 욕심내지 않고 청렴하게 살았다는 것이다. 셋째는 김개시가 중전을 섬기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헐뜯었는데, 이이첨 역시 남을 저주하고 패역한 짓을 스스로 꾸몄으면서도 막상 일은 남에게 맡겼다는 것이다.
광해군의 치세에 정권을 장악했던 대북파는 임진왜란의 후유증을 치유하기 위해 다양한 정책을 시도했다. 1608년부터 선혜청을 두어 경기도에 대동법을 실시했으며, 양전 사업을 통해 농지를 확충했고, 전란 중에 불타버린 경복궁과 창덕궁, 인경궁을 중건했다. 북방에서 강성해진 여진족이 1616년 후금을 건국하자 대포를 주조하고 수비를 강화하는 등 안보에도 만전을 기했다.
이이첨은 광해군이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양면외교를 펼칠 때 명나라와의 의리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보수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일면이다. 하지만 광해군은 당시 원군을 이끌던 강홍립에게 섣불리 후금군과 싸우지 말라고 지시했다. 당시 내치는 대북파 정권이 리드했지만 외교 부문에 있어서만큼은 광해군이 독자적인 판단을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실리를 중시하던 광해군은 전란 이래 중단되었던 일본과의 외교 관계를 재개하고 1609년 일본송사약조를 체결했다. 1617년에는 오윤겸을 회답사로 일본에 파견하기도 했다. 아울러 《신증동국여지승람》, 《용비어천가》, 《국조보감》 등을 편찬하고 적상산성에 사고를 설치했다. 당대의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 허균의 《홍길동전》, 허준의 《동의보감》 같은 명저가 나오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이첨과 정인홍으로 대표되는 대북파는 꾸준히 패착을 이어갔다.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시킴으로써 정적들에게 ‘폐모살제(廢母殺弟)’라는 쿠데타의 주요 명분을 제공했다. 또 이황과 이언적의 문묘 종사를 반대함으로써 조선의 언론을 리드하던 사림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1623년, 이귀, 김자점, 김류, 이괄 등의 서인이 주도한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은 권좌에서 끌려 내려졌다. 당시 이이첨은 반정 소식을 듣자마자 가솔을 이끌고 남쪽 성벽을 넘어 이천의 시골집으로 도망쳤다가 관병에게 붙잡혔다.
당시 넷째아들 이대엽의 아내가 거사를 일으킨 신경유의 누이였으므로 그는 며느리를 성내에 들여보내 구원을 청하게 했지만 수포로 돌아갔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체포된 이이첨의 최후의 모습이 마치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그려져 있다.
그해 3월 14일, 이이첨이 옥문을 나서다 반정을 주도했던 이귀를 쳐다보며 말했다.
“대감은 내 마음을 알 것이오. 전하께서 이제까지 보전하실 수 있었던 것은 어찌 나의 공이 아니겠는가?”
그러자 이귀가 냉소를 지으며 반문했다.
“네가 이전에 모든 일을 자신이 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시켰던 것은 바로 오늘 이 말을 하려고 했던 것이다. 진정 네 말과 같다면 유폐의 화액을 겪으신 것이 과연 누가 한 짓이겠는가?”
그 말에 이이첨은 입을 닫았다. 드디어 형을 받기 직전에 그는 큰 소리로 말했다.
“하늘이 나의 무죄를 내려다보고 계실 것이다. 살아서는 효자이고 죽어서는 충신이다.”
이때 뒤에 있던 이위경이 꾸짖으며 말했다.
“우리가 죽게 된 것은 모두가 네가 악한 짓을 했기 때문인데, 네가 어떻게 충신이 될 수 있으며 효자가 될 수 있겠는가?”
분명히 서인이었을 《광해군일기》의 사관으로서는 역당의 수괴인 이이첨을 끝까지 권력에 아부하면서 파렴치하게 목숨을 구걸하는 누추한 존재로 그려내고 싶었을 것이다. 어쨌든 64세의 이이첨의 목이 맨 처음 잘렸고, 아들 이원엽·이홍엽·이익엽 등이 뒤를 이었다. 넷째아들 이대엽은 옥중에서 죽었다. 그리하여 10대에 이르는 동안 빠짐없이 대과에 급제했던 조선의 명가 하나가 사라지고 말았다.
당시 반정 세력이 작성한 《계해정사록(癸亥靖社錄)》에는 정형(正刑·능지처참)에 처한 16명 외에 복주(伏誅·사형)당한 64명의 명단이 실려 있다. 조정의 한 정파가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정권을 탈취한 다음 정적들을 제거한 기록이다. 그와 동시에 세찬 기세로 출범했던 인조와 서인들의 나라 조선은 무수한 시행착오 속에 장차 병자호란이라는 불지옥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갔다.
이이첨은 그 후 서인 정권이 이어진 구한말까지 조선의 대표적인 간신이자 악인으로 치부되었고, 그의 저서와 문집은 유실되거나 소각되었다. 하지만 1908년(융희 2년) 스승 정인홍이 복권되고, 이후 폭군으로 매도되었던 광해군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면서 그에 대한 평가도 조심스럽게 거론되고 있다.
최근 학계 일각에서 당시 대북파의 여러 가지 무리수를 지적하면서도 임진왜란의 참화를 극복하기 위해 강력한 정치드라이브를 통해 광해군에게 힘을 실어주려 했다는 견해가 나오고 있다. 하지만 이이첨은 아직도 광해군을 다루는 각종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 폭압적인 신료의 전형으로 등장하고 있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1963년 충남 태안 출신. 시인, 작가. 대한민국항공회 자문위원, 복잡하고 난해한 고전과 역사기록을 알기 쉽게 해석함으로써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역사 교양서를 쓰고 있다. 아울러 조선시대 역..펼쳐보기
1963년 충남 태안 출신. 시인, 작가. 대한민국항공회 자문위원, 복잡하고 난해한 고전과 역사기록을 알기 쉽게 해석함으로써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역사 교양서를 쓰고 있다. 아울러 조선시대 역관이나 화원 등의 전문가 집단과, 백정이나 광대, 노비 등 핍박받던 천민들의 삶을 적극적으로 조명한다. 최근에는 우리나라의 민항공사를 정리한 항공역사서를 집필했다. 저서로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이도 세종대왕》, 《이경 고종황제》, 《효명세자》, 《한글만세, 주시경과 그의 제자들》, 《꼬레아러시》,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조선팔천》, 《조선역관열전》, 《조선노비열전》, 《조선정벌》, 《조선몽》 등이 있다. 1963년 충남 태안 출신. 시인, 작가. 대한민국항공회 자문위원, 복잡하고 난해한 고전과 역사기록을 알기 쉽게 해석함으로써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역사 교양서를 쓰고 있다. 아울러 조선시대 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