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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산부원군(光山府院君) 휘(諱) 국광(國光) 악시(惡諡) 논의(論議) 시말(始末)
성종(成宗) 11년에 서거(逝去)하신 좌의정(左議政) 광산부원군(光山府院君) 휘(諱) 국광(國光)께 대한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실린 졸기(卒記)의 내용을 간추리면 대략 다음과 같다.
(1) 광산부원군(光山府院君) 졸기(卒記)
성종 11년 11월 11일 광산부원군(光山府院君) 김국광(金國光)이 졸(卒)하였는데, 철조(轍朝), 조제(弔祭), 예장(禮葬)을 예(例)대로 하였다. 김국광은 자(字)가 관경(觀卿)인데, 광주인(光州人)으로 증 영의정(贈領議政) 김철산(金鐵山)의 아들이다. 정통(正統) 신유(세종 23, 1441)년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뽑혀서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에 보임(補任)되었다가 천전(遷轉)되어 박사(博士)에 이르렀다. 을축년(세종 27, 1445)에 의영고부사(義盈庫副使)에 승직(陞職)되고, 황해도 도사(黃海道都事), 성균 주부(成均主簿),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봉상시 판관(奉常寺判官)을 역임(歷任)하였다. 경태(景泰) 을해년에 조모(祖母)의 상(喪)으로 복(服)을 입었는데, 세조(世祖)가 ‘김국광이 지금 어디에 있는가?’라고 물으니, 좌우에서 상(喪)을 당했다고 대답하였다. 삼년상을 마치자,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에 제수되었다가, 이어서 부지승문원사(副知承文院事)에 승직되었으며,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을 역임하고, 성균 사예(成均司藝), 종친부 전첨(宗親府典籤)으로 천전(遷轉)되었었다. 경진년(세조 6, 1460)에 특별히 중훈대부(中訓大夫) 사섬시윤(司贍寺尹)을 더하였는데, 얼마 있지 아니하여 승정원(承政院)의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었다가, 좌부승지(左副承旨)로 천전되었으며, 신사년(세조 7, 1461)에는 가선대부(嘉善大夫) 병조참판(兵曹參判)으로 승계되었다. 세조가 항상 그의 암련(諳鍊-모든 일에 정통함)을 칭찬하여 ‘사지제일(事知第一)’이라는 네 글자를 손수 써서 내려 주었다. 그 때 승지(承旨)들이 일로 인하여 견책(譴責)을 받으니, 김국광에게 명하여 승정원(承政院)의 출납(出納)을 관장하게 하였다. 갑신년(세조 10, 1464)에 자헌 대부(資憲大夫) 호조판서(戶曹判書)로 초배(超拜)되고 성화(成化) 을유년(세조 11, 1465)에 정헌대부(正憲大夫)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승계되었으며, 병술년(세조 12, 1466)에는 숭정대부(崇政大夫) 병조판서(兵曹判書)로 승계되었다. 정해년(세조 13, 1467)에 의정부 우참찬(議政府右參贊) 겸 병조판서(兵曹判書)로 천전되었다가, 이어서 우찬성(右贊成)에 승직되었는데, 그 때 역적(逆賊) 이시애(李施愛)의 주벌(誅伐)로 정충출기적개공신(精忠出氣敵愾功臣)의 호(號)를 내리고, 숭록대부(崇祿大夫) 좌찬성(左贊成)으로 승계시켰으며, 광산군(光山君)으로 봉하였다. 한 때 김국광을 비방(誹謗)하는 익명서(匿名書)가 붙은 적이 있었는데, 간관(諫官)이 이것에 의거하여 죄를 청하니, 세조가 크게 노(怒)하여 간관을 저촉시켜 대죄(待罪)하게 하였으며, 김국광이 일찍이 의정(議政)을 역임한 적이 있다 하여 원상(院相)을 삼으니, 김국광이 찬성(贊成)으로서 또한 참여하였다. 기축년(예종 1, 1469)에는 대광보국숭록 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우의정(議政府右議政)으로 승계되었는데, 주상(主上)이 즉위하여 좌의정(左議政)으로 진배(進拜)하였다. 신묘년9성종 2, 1471)에는 순성명량경제홍화 좌리공신(純誠明亮經濟弘化佐理功臣)의 호를 내리고, 광산부원군(光山府院君)으로 봉하였다. 계사년(성종 4, 1473)에 어미의 상을 당했는데, 을미년(성종 6, 1475)에 삼년상을 마치니, 광산부원군(光山府院君)을 제수하고, 정유년에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를 제수하였으며, 무술년(성종 9, 1478)에 도로 부원군으로 봉하였다. 이 때에 이르러 졸(卒)하니, 나이 66세였다. 시호(諡號)가 정정(丁靖)인데, 뜻을 펴되 성취하지 못하는 것이 정(丁)이요, 공손하여 말을 적게 하는 것이 정(靖)이다.
휘 국광(國光) 선조는 국사(國事)의 훌륭한 경영(經營)과 처리(處理)에 대하여 세조(世祖), 예종(睿宗), 성종(成宗) 3대 임금에게 크게 인정받아 두 번씩이나 공신(功臣)에 책록되었다. 세상에 전해 오는 말로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경우 실록(實錄)에 그 이름이 3000번 이상 나타나며, 한명회(韓明澮)는 2000회 이상 나타나는 걸로 알려져 있는데, 광산부원군의 경우도 700회 이상이나 그 이름이 오른 것을 보이며, 그 점은 세상에 이름난 어느 정승(政丞)에 비교해 보아도 우뚝한데, 이외로 실록(實錄) 졸기의 끝부분에 보이는 악시(惡諡) 격의 시호(諡號)를 보는 바에서 짐작할 수 있는 바와 같이 졸기에 이어지는 사관(史官)의 비평은 상당히 비판적이었다. 사신(史臣)의 논평 부분을 간추려 보이면 다음과 같다.
(2) 광산부원군에 관한 사신(史臣)의 논평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김국광(金國光)은 이간(吏幹)이 있어서 일을 처리하는 데 치밀하고도 명료하였다. 세조조(世祖朝)에 함안(咸安) 사람 최옥산(崔玉山)이 그 아비를 죽였다 하여 옥사(獄事)가 거의 이루어지자, 세조가 놀라서 말하기를, ‘어떻게 이같은 일이 있는가?’ 하고, 김국광을 보내어 다시 국문하게 하였는데, 김국광이 그 옥사를 모두 뒤집으니, 최옥산은 마침내 죄를 면하게 되고, 추문(推問)하던 관리들이 모두 중죄(重罪)로 연좌(緣坐)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자못 임금에게 사랑받게 되었었다. 상정국관(詳定局官)이 되어서는 주대(奏對)하는 것이 임금의 뜻에 맞으니, 세조가 사리(事理)를 아는 것이 제일이라고 지목하였다. 몇 년이 되지 아니하여 판서(判書)에 발탁되고, 의정부(議政府)에 들어가니, 총애(寵愛)를 받아 임명된 것이 견줄 데가 없었다. 오랫동안 무선(武選)을 관장하니, 문정(門庭)이 저자[市]와 같았고, 집안이 크게 부유하게 되었으며, 아우 김정광(金庭光)과 사위 이한(李垾)이 모두 장죄(贓罪)로 패몰(敗沒)하였다. 재상(宰相)이 되어 대간(臺諫)에게 두 번이나 논박(論駁)을 받았는데, 주상 또한 그 간악(奸惡)함을 알았다. 무릇 대신(大臣)으로서 졸하면 으레 특별한 부의(賻儀)가 있으므로, 승정원(承政院)에서 구례(舊例)를 써서 바치니, 명하여 정지시켰으며, 봉상시(奉常寺)에서 시호(諡號)를 정(丁)으로 의정(議定)하자, 아들 김극유(金克忸)가 여러 번 글을 고칠 것을 논하였으나, 끝내 윤허(允許)하지 아니하였다.” 하였다.】
참고로 우리 광김 대동보 등에서 광산부원군 장자(長子)이신 광원군(光原君휘) 휘자 ‘克忸’을 ‘극뉵’으로 읽는다. 그 형제분의 휘자가 모두 ‘심리 표현’ 연관의 글자들이므로 ‘忸’를 ‘뉴’로 읽으면 ‘익숙함(習)’의 뜻이고. ‘뉵’으로 읽어야 ‘부끄러워함(慙)’의 뜻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글은 ‘실록’에서 전하는 바를 간추려 소개하는 데 뜻을 두고 있음으로 그대로 따르기로 한다.
아래의 글들은 장자 광원군께서 억울한 악시(악시)를 고치기 위하여 노력하는 사이에 십여 차례 임금에게 상소(上疏)한 글 가운데, 실록에 실린 것만 추려 정리한 것이다.
(3) 성종 12년 7월 28일 상소
성종 12년 7월 28일 김극유(金克忸)가 상소하기를,
“신(臣)이 삼가 자석(字釋)을 살피건대, 의(義)라는 것은 마음이 바른 것이요 일이 마땅한 것이니, 신의 아비가 의를 베풀되 잘하지 못하였다면 도척(盜拓)만도 못할 것인데, 열성(列聖)께서 신의 아비를 대우하신 것은 무슨 일이며 신의 아비가 열성께 대우받은 까닭은 또 무슨 일 때문인지를 어리석은 신은 모르겠습니다. 신의 아비가 살아서는 봉직(奉職)에 오직 부지런하였는데, 죽어서는 뜻밖에 악시(惡諡)를 받았으니, 신은 몹시 민망하여 못 견디겠습니다. 사전(史傳)의 시호(諡號)를 고친 전례를 살피건대, 임금이 명하여 바루기도 하고 조정(朝廷)의 의논이 반박하여 고치기도 하고 자손이 소청하여 들어주기도 하였는데, 유(幽)나 여(厲)는 실제의 일이므로 효자(孝子), 자손(慈孫)일지라도 진실로 고칠 수 없겠으나, 신의 아비로 말하면 의를 베풀되 잘하지 못한 사실이 없으니, 고쳐서 바룬들 무슨 안 될 것이 있겠습니까? 신이 듣건대, 세 가지 시호 안에서 조금 나은 글자를 가려서 고치자는 대신(大臣)의 의논이 있었다 하며, 예전에 이숭지(李崇之)가 죽었을 때에 봉상시(奉常寺)에서 좋은 시호와 나쁜 시호를 반씩 섞어서 올리니 세조(世祖)께서 그 가운데의 나쁜 글자를 따 내어 거기에다가 글자를 가려서 고치셨는데, 이것은 조종(祖宗)의 고사(故事)입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 굽어살피소서.”
하니, 승정원(承政院)에 보이라고 명하였다. 도승지(都承旨) 김승경(金升卿), 좌승지(左承旨) 이길보(李吉甫), 우승지(右承旨) 노공필(盧公弼), 우부승지(右副承旨) 성준(成俊), 동부승지(同副承旨) 김세적(金世勣)이 말하기를,
“처음에 의망(擬望)한 세 가지 시호 안에서 한 시호를 가려서 고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하고,
좌부승지(左副承旨) 이세좌(李世佐)가 말하기를,
“고쳐서는 안 됩니다.”
하니, 시호를 의논한 관원을 불러서 물으라고 명하였다. 봉상시정(奉常寺正) 최호원(崔灝元)이 말하기를,
“김국광(金國光)이 복상(復相)할 때에 대간(臺諫)이 논박하였으니, 임금의 보좌를 끝까지 잘한 예(例)가 아니므로 정(丁)이라 한 것입니다.”
하고, 부정(副正) 최제남(崔悌男)이 말하기를,
“대신으로서 시종(始終)을 잘하지 못하여 대간이 여러 번 탄핵하였고, 복상하여서도 대간이 청하여 개정하였으므로 정이라 한 것입니다.”
하고, 첨정(僉正) 박형문(朴衡文)이 말하기를,
“그 사위 이한(李垾)이 직산현감(稷山縣監)이었을 때에 장죄(贓罪)를 범하였는데, 대간이 상서(上書)하기를, ‘장리(贓吏)가 김씨의 집에서 많이 나옵니다.’ 하였으니, 반드시 지칭하는 것이 있었으리라고 생각하므로 정이라 한 것입니다.”
하고, 판관(判官) 백수희(白受禧), 직장(直長) 권인손(權仁孫), 부봉사(副奉事) 김수현(金秀賢)이 말하기를,
“복상(復相)하였을 때에 대간이 청하여 개정하였으므로 정이라 한 것입니다.”
하니, 전교(傳敎)하기를,
“재상(宰相)에게 과실이 있더라도 사람들이 그 위세(威勢)를 두려워하여 말하지 못하니, 그 몸이 죽어 시호를 의논하게 된 뒤에야 그 사람됨을 안다. 유(幽)니 여(厲)니 이름지으면 효자(孝子), 자손(子孫)일지라도 백세(百世)토록 고치지 못하는 것인데, 더구나 죽은 뒤에 아무 공(公)이라 칭하여 그 무덤에 제사한 것을 어떻게 고칠 수 있겠는가? 그 청을 들어주면 뒤에도 이것을 본떠서 고치려는 자가 있을 것인데, 어떻게 낱낱이 들어주겠는가? 임금에게는 사(私)가 없어야 하니, 그 아들은 괴롭더라도 나는 고칠 수 없다.” 하였다.
(4) 성종 13년 3월 11일 상소
성종 13년 3월 11일 김극유(金克忸) 등이 상소(上疏)하기를,
“신 등은 아비의 시호(諡號)에 대한 원통함을 가지고 면류(冕旒)의 아래에서 여러 차례 모독하니, 죄가 만 번 죽어 마땅합니다. 그러나 아비와 아들 사이는 천성(天性)의 친(親)한 것입니다. 그러니 신 등이 만일 이 원통한 것을 신원(伸寃)하지 못하면 하루라도 살아가기 어렵겠으며, 다른 날에 무슨 면목(面目)으로 선인(先人)을 지하(地下)에서 따라가겠습니까? 정리상 매우 급한 일이기에 성상을 모독하는 큰 죄가 됨을 알지 못한 것이니 엎드려서 성상의 인자(仁慈)하신 은덕을 바랍니다. 신 등이 그윽이 생각하건대 이름과 사실은 서로 맞지 않을 수 없는 것으로, 조그마한 일에 있어서도 그러한데, 더구나 시호(諡號)는 사람의 도리에 큰 일이고 조정의 중요한 의전(儀典)이니, 어찌 이름이 그 사실에 어긋나게 하겠습니까? 태상(太常)에서 신의 아비의 시호를 의논하여 정(丁)자로 하였습니다. 그것은 김국광(金國光)이 두 번이나 상부(相府)에 들어가고 동생과 사위가 장물죄(贓物罪)를 범하였다 하여 대간에서 반박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대간의 반박이라는 것은 근거가 없는 비방입니다. 동생과 사위가 <장물죄를> 범한 것은 아비나 형에게 관련되지 않는 것이니, 신 등은 정(丁)의 시호가 신의 아비에게 맞는 것인지 맞지 않는 것인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리고 또 의논에는 순수하게 여기는 이도 있고 잡박(雜駁)하게 여기는 이도 있었는데, 순수하게 여기는 이들은 ‘고치는 것이 맞겠다.’ 하고, 잡박하게 여기는 이들은 말하기를, ‘유려(幽厲)라고 이름이 붙여지면 자손들이 그 시호를 고칠 수 없으며, 공론(公論)에서 나왔기 때문에 <시호를> 고치는 단서를 열 수 없다.’는 두어 마디의 말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그런데 유(幽)와 여(厲)의 시호는 그의 이름과 사실이 서로 맞기에 자손들이 과연 고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만일 맞지 않는 것이라면 어찌 공론에 구애된다 하여서 고치지 않아야 하겠습니까? 이것은 모두 이름과 사실이 맞는지 맞지 않는지는 헤아리지 아니하고 범연(泛然)히 ‘시호는 가볍게 고칠 수 없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공론이란 어찌 <시호는> 고치지 못한다는 데에만 있고 ‘다시 고쳐야 한다.’는 데에는 있지 않습니까? 만일 이름과 사실이 서로 맞는 시호라면 참으로 경솔하게 고쳐서 단서를 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맞지 아니하는 <시호라면> 자손들이 마땅히 호소하여 고쳐야 하며, 조정에서도 마땅히 의논하여 고쳐줌으로써 일세(一世)의 공론을 완전하게 하고 만세(萬世)의 공의(公議)를 보여줌이 공도(公道)의 다행함이 아니겠습니까?
신 등은 아비의 시호를 정(丁)이라 한 데 대하여 고쳐야 한다고 하는 자가 몇 사람이며 고칠 수 없다고 하는 자가 몇 사람인지 알지 못합니다만, 신 등이 그윽이 생각하기에는, 그 <시호를 고치는 것이> 옳다든지 옳지 못하다든지의 수의 다소(多少)에 따라 시론(時論)에 맞추어 주시면 공도(公道)에 참으로 다행이겠습니다. 신 등이 하늘에 부르짖고 호읍(呼泣)하면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지 못하기에, 드디어 예와 이제의 것을 참고하고 서사(書史)를 열람하여서 <시호를 고친 이가> 한(漢)나라에서는 몇 사람이고 진(晉)나라에서는 몇 사람이며 당(唐)나라에서는 몇 사람이고 송(宋)나라에서는 몇 사람이며, 우리 조정에서는 몇 사람이나 되는지를 삼가 조목을 들어 아뢰겠습니다. 한(漢)나라의 오한(吳漢)은 시호가 무(武)였었는데 특별히 충(忠)으로 고쳤고, 진(晉)나라의 하증(何曾)은 시호가 무추(繆醜)였었는데 특별히 효(孝)로 고쳤으며, 또 그의 아들 하소(何邵)가 스스로 표(表)를 올려 원(元)으로 고쳤고, 왕술(王述)의 시호는 목(穆)이었는데 특별히 간(簡)으로 고쳤고, 가충(賈充)의 시호는 황(荒)이었는데 특별히 무(武)로 고쳤고, 곽혁(郭奕)의 시호는 목(穆)이었는데 조명(詔命)을 내리기를, ‘시호는 그의 덕(德)과 행(行)을 정표(旌表)하는 것이다.’ 하여 특별히 간(簡)으로 고쳤고, 등수(鄧脩)의 시호는 성(聲)이었는데 그의 아들 등병(鄧幷)이 표(表)를 올렸기에 특별히 충(忠)으로 고쳤으며, 당(唐)나라의 봉윤(封倫)의 시호는 명(明)이었는데 뒤에 무(繆)로 고쳤고, 우문 사급(宇文士及)의 시호는 공(恭)이었는데 뒤에 종(縱)으로 고쳤고, 소우(蕭瑀)의 시호는 숙(肅)이었는데 특별히 정(貞)으로 고쳤으며, 진숙달(陳叔達)의 시호는 무(繆)였는데 뒤에 충(忠)으로 고쳤으며, 송경례(宋慶禮)의 시호는 전(專)이었는데 그의 형의 아들 송사옥(宋辭玉)이 호소하여 경(敬)으로 고쳤고, 두섬(杜暹)의 시호는 정숙(貞肅)이었는데 그의 아들 두열(杜列)이 호소하여 정효(貞孝)로 고쳤고, 이길보(李吉甫)의 시호는 공의(恭懿)였는데 충의(忠懿)로 고쳤으며, 신비(辛秘)의 시호는 숙(肅)이었는데 뒤에 의(懿)로 고쳤고, 왕지원(王知遠)의 시호는 승진(升眞)이었는데 뒤에 승현(升玄)으로 고쳤으며, 원재(元載)의 시호는 황(荒)이었는데 뒤에 성종(成縱)으로 고쳤고, 왕무준(王武俊)의 시호는 위열(威烈)이었는데 특별히 충렬(忠烈)로 고쳤고, 우적(于적)의 시호는 여(厲)였는데 그의 아들 우계우(于季友)가 호소하여 특별히 사(思)로 고쳤고, 배광정(裵光庭)의 시호는 극평(克平)이었는데 특별히 충헌(忠憲)으로 고쳤으며, 송(宋)나라의 하주(何鑄)의 시호는 통혜(通惠)였는데 그의 집에서 사퇴(辭退)하였기에 특별히 공민(恭敏)으로 고쳤고, 왕요신(王堯臣)의 시호는 문안(文安)이었는데 그의 아들 왕동로(王同老)가 아비의 공을 말하여서 특별히 문충(文忠)으로 고쳤으며, 장강(張綱)의 시호는 문정(文定)이었는데 그의 손자 장부(張釜)가 두 번 청하여서 특별히 장간(章簡)으로 고쳤고, 노종도(魯宗道)의 시호는 강간(剛簡)이었는데 특별히 숙간(肅簡)으로 고쳤으며, 사숭지(史嵩之)의 시호는 충간(忠簡)이었는데 뒤에 장숙(莊肅)으로 고쳤고, 사호(史浩)의 시호는 문혜(文惠)였는데 뒤에 충정(忠定)으로 고쳤고, 진강백(陳康伯)의 시호는 문공(文恭)이었는데 뒤에 문정(文正)으로 고쳤고, 진항(奏杭)의 시호는 문간(文簡)이었는데 특별히 문숙(文肅)으로 고쳤고, 전유연(錢惟演)의 시호는 문묵(文墨)이었는데 그의 집에서 호소하여 특별히 사(思)로 고쳤다가 또 그의 아들 전애(錢曖)가 호소하여 특별히 문희(文僖)로 고쳤고, 본조(本朝) 태조(太祖) 때 정희계(鄭熙啓)의 시호는 안황(安荒)이었는데 특별히 양경(良敬)으로 고쳤습니다. 이렇게 한(漢)나라, 당(唐)나라, 진(晉)나라, 송(宋)나라의 것을 고찰하여 보아도 이미 저와 같았고, 우리 조정의 것을 고찰하여 보아도 이와 같았습니다. 이는 모두 사람의 행적이 선(善)하였던가 악(惡)하였던가에 인하여 시호를 고쳐 주어서 그 사람의 이름과 사실이 맞게 하였던 것입니다. 다만 진집중(陳執中), 하송(夏송)의 시호만은 고쳤다가 반박이 있었던 것은 그의 전의 시호는 이름과 사실이 서로 맞았지만 뒤의 시호는 이름과 사실이 서로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름과 사실이 맞지 않으면 고쳐주고 서로 맞으면 고쳐 주지 아니하는데, 이것이 제왕(帝王)의 시호를 제정하는 통의(通義)입니다. 하물며 《사기(史記)》의 시법(諡法) 해석에, ‘시(諡)라는 것은 행실의 자취이고, 호(號)라는 것은 공(功)의 표창이다.’ 하였는데, 그 주(註)에, ‘옛날에 큰 공이 있으면 선(善)한 호를 주어서 칭한다.’ 하였습니다. 이제 신의 아비는 큰 허물과 이지러진 행실이 없었으며 견마지로(犬馬之勞)가 조금 있었는데도 오히려 평상(平常)의 호를 얻지 못하였습니다. 이 어찌 옛날 시호를 제정한 뜻이라 하겠습니까? 전하(殿下)께서 신의 아비의 시호가 신의 아비의 행적에 맞지 않음을 알지 못함이 아니지마는, 특별히 그러한 단서를 열게 되는 것을 염려하여 다시 고치기를 신중히 하는 것이니, 이는 전하께서 먼 <후세까지를> 염려하는 뜻이 지극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신 등이 그윽이 생각하기에는 천하의 일은 옳은 것과 그른 것들 뿐입니다. 그러니 이 일이 참으로 옳았던 것이라면 한 번이라도 고쳐서는 아니될 것이고, 일이 참으로 그릇된 것이라면 백 번 고친들 무엇이 해롭겠습니까? 주요한 것은 옳은 대로 귀착(歸着)시킬 뿐입니다.
신 등이 그윽이 예전과 지금의 시호를 관찰하건대, 선(善)한 이에게는 선한 것으로 악한 이에게는 악한 것으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신의 아비의 시호에만은 ‘의(義)를 펴되 이루지 못하는 것을 정(丁)이라 하고, 자기 몸을 삼가하고 말이 적되 맞게 하는 것을 정(靖)이라 한다.’ 하였습니다. 그 사람됨이 이미 의를 펴되 이루지 못하는 행적이 있다면, 어떻게 자기 몸을 삼가하고 말이 적되 맞게 하는 이치가 있다 하겠습니까? 이미 자기 몸을 삼가하고 말이 적되 맞게 하는 행적이 있다면, 반드시 의를 펴되 이루지 못하는 이치가 없을 것입니다. 정(丁)과 정(靖)의 뜻은 크게 서로 모순(矛盾)됩니다. 그런데도 한 사람의 행적에 같이 붙이는 것은 또한 도리에 어그러진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를 물건에 비유한다면 배와 수레를 같이 가게 한다든지 얼음과 숯불을 한 그릇에 두는 것과 같다 하겠습니다. 그래서 이 뒤에 시호를 의논하는 자가 취할 수 없는 것이니, 이는 후세(後世)에 전하여 보일 수 없는 법입니다. 그러한 것을 옳다고 이르겠습니까? 정(丁) 자가 아비의 행적에 이미 관련된 것이 없으며, 또 정(靖) 자와 정(丁) 자는 뜻도 서로 반대가 됩니다. 엎드려 성상의 인자하심을 바랍니다. 예나 지금이나 인신(人臣)으로서 추(醜)한 시호를 받은 자가 많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자손으로서 이를 원통하게 여기어 진정하여 호소한 자가 하소(何邵), 등병(鄧병), 송사옥(宋辭玉), 우계우(于季友), 왕동로(王同老), 장부(張釜), 전애(錢曖)에 그친 외에는 듣지를 못하였습니다. 이것이 그의 행적에 맞는 것이라면 비록 추(醜)와 황(荒) 자처럼 나쁜 글자라도 그의 자손들이 어찌 그 사이에서 옳고 그름을 따져 호소하지를 못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만일 그의 행적에 맞지 않는 것이라면 성제(聖帝)와 명왕(明王)이라도 마땅히 그 자손들의 호소를 들어서 이미 이루어진 명령을 고쳐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만세의 공론입니다. 어찌 신 등에게서 단서가 열리어 후일에 이러한 일들이 봉기(蜂起)한다 하겠습니까? 그러니 신의 아비의 일 같은 것은 천일(天日)이 내려다보고 성명(聖明)하신 임금이 위에 계시는데 그의 선(善)한 것을 빠뜨려서 악한 시호로써 더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신 등이 그윽이 들으니, ‘태종 때에 조준(趙浚)은 조정의 비방을 받아 극형(極刑)에 두자는 논박(論駁)까지 있었지마는 그의 시호는 문충(文忠)이라 하였으며, 세종 때에 안숭선(安崇善)은 중한 죄에 연좌되어 관직(官職)이 깎이고 유폄(流貶)까지 되었지만 그의 시호는 문숙(文肅)이라 하였고, 세조 때에 이징옥(李澄玉)이 대역(大逆)의 죄를 범하였지만 그의 형 이징석(李澄石)의 시호는 강무(剛武)라 하였다.’ 합니다. 더구나 신의 아비는 근거 없는 비방을 받은 것이 그 유(類)가 조준의 논박 받은 것과 같은 것이 아니고, 안숭선의 유폄(流貶)에 좌죄(坐罪)된 것과도 다릅니다. 그리고 자제(子弟)의 허물이 있는 것도 이징옥의 대역을 범한 것과는 다릅니다. 그런데도 시호를 얻는 것이 도리어 위의 세 사람의 예와 같지 않기에 신이 그윽이 마음 아파하는 것입니다. 한(漢)나라·진(晉)나라·당(唐)나라·송(宋)나라 밝은 임금과 어진 재상들이나 또는 우리 태조의 총명하신 성지(聖智)로써 어찌 시호를 고치는 단서를 열어서는 아니 됨을 몰랐겠습니까? 그런한데도 반드시 고쳐준 것은 참으로 고쳐주지 아니하여 그의 사실을 인몰(湮沒)시키는 것이 차라리 고쳐 주어서 옳게 하는 것만 같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시호가 맞지 않아 고쳐준 것은 당시에도 잘못하였다는 의논이 없었고, 후세에도 그르다는 의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의논하는 자들이 혹은 ‘고쳐 주어서는 아니된다.’ 하니, 이것은 신 등이 알 수 없는 이유입니다. 옛날에는 아비를 위하고 할아비를 위하고 남편을 위하고 숙부(叔父)를 위하여 진정하여 호소한 이로서 한 사람도 고쳐 줌을 받지 못한 자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신 등만은 충성과 효도가 부족하여서인지 아직 회천(回天)의 힘이 없어서 상소를 다섯 번 올렸어도 회보(回報)가 없고, 궁문 밖에서 아홉 번 울부짖어도 신원(伸寃)이 되지 못하니 간담(肝膽)이 찢어지는 듯하여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겠습니다. 그래서 중한 주형(誅刑)도 피하지 않고 수다스럽기를 그치지 않는 것은, 신의 아비가 신이 아니면 지하(地下)에서 원통함을 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신 등의 말과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흐르는 눈물을 감출 수 없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 한(漢)나라, 진(晉)나라, 당(唐)나라, 송(宋)나라의 옛 제도를 상고하시고 우리 나라 조정의 태조께서 이뤄놓은 헌장(憲章)을 준수하시어, 여러 의논들을 널리 모아 사실에 따라 개정하게 하여서 태사(太史)로 하여금 크게 기록하기를, ‘아무가 죽음에 시호를 아무[某]라 하였던 것을 그의 아들 아무 등이 호소하였기에 시호를 아무로 고친다.’ 하게 하여, 그 사실을 매몰(埋沒)되지 않게 하심이 참으로 훌륭하지 않겠습니까? 만일 신의 아비의 시호를 고침으로써 전하의 성명(聖明)에 흠이 생긴다든지 또는 전하의 치적(治績)에 누(累)가 있다면 그만이겠지만, 서사(書史)에 상고하여도 잘못됨이 없고 귀신에 물어보아도 의심됨이 없으며 백세(百世)의 뒤에 성인(聖人)을 기다리더라도 의혹됨이 없는 일인데, 아직 전하의 유음(兪音)을 받지 못하니, 신 등의 어리석고 미혹(迷惑)함으로써 다만 애통함만 더할 뿐이어서, 간(肝)을 갈라 종이를 만들고 피를 쏟아 글씨를 쓰면서 떨어지는 눈물과 박절(迫切)한 마음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는데, 어서(御書)로 이르기를,
“어찌 일시(一時)적인 사사로운 말[私言]로써 만세의 공의(公議)를 고치겠느냐? 인정으로는 비록 박절한 듯하지만 도리로 봐서는 따르기 어렵다.”
하고, 승정원에 머물러 두게 하였다.
(5) 성종 18년 7월 18일 상소
성종 18년 7월 18일초토(草土)의 신하 김극유(金克忸) 등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신 등이 태상(太常)에서 신의 아비의 시호(諡號)를 의논한 것이 공정치 못하다는 일을 가지고 여러 번 상소하여 여섯 번째에 이르렀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였으니, 슬픔을 머금고 원통한 마음을 지닌 채, 아침저녁으로 운 것이 하루나 한 달이 아닙니다. 신의 아비의 행실이 만약 시호에 적합하다면 신 등이 무슨 면목으로 다시 성청(聖聽)을 더럽히겠습니까? 신 등은 그윽이 듣건대, 시호란 것은 실덕(實德)을 기록하여 <후세에> 권하고 경계하는 것을 드리우는 것입니다. 만약 선행(善行)의 실상이 있는 데도 더러운 시호를 얻거나, 악행(惡行)의 실상이 있는데도 아름다운 시호를 얻는다면, 이는 옳고 그름을 그릇되게 하여 다음 세대를 속이는 것이니 장차 무엇으로 믿음을 취하여 권하고 경계함을 드리우겠습니까? 지금 대간(臺諫)이 동생과 사위의 범죄가 있음을 논박(論駁)함이 있어 신의 아비가 결점이 있다고 지적하여 ‘정(丁)’으로 시호를 한 것입니다. 이른바 대간의 논박이란 것은 다만 익명서(匿名書)에 의한 것인데, 익명서는 신의 아비가 세조조(世祖朝) 때에 오랫동안 병권(兵權)을 맡아서, 임금의 총애가 날로 융성(隆盛)하여, 이를 꺼리는 자가 음중(陰中)의 술책으로 뜬말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세조께서 요·순(堯舜)과 같은 밝으심으로 신의 아비가 그러한 사실이 없는 것을 밝게 아시고 전교하시기를, ‘김국광(金國光)은 결단코 이런 일이 없다.’고 하시며, 도리어 그 때에 간원(諫員)이 탄핵하는 것을 허물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조(當朝)에 이르러서는, 신의 아비가 두 번째로 상부(相府)에 들어가니 간관(諫官)이 이것을 지적하여 논박하므로 전하께서도 전일의 일을 상고하여 사실이 없음을 분변하였으나, 신의 아비가 진정(陳情)하여 굳이 사양한 뒤에 정승만을 면하기를 허락하셨습니다. 하물며 익명서는 본래 허위(虛僞)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율문(律文)에서 금하는 것이니, 진실로 신의 아비에게는 손익(損益)이 없습니다. 더구나, 세조께서 앞서 분변하시고 전하께서 뒤에 분변하시어, 만에 하나라도 의심할 만한 것이 없는 것이겠습니까? 그리고 동생과 사위가 범한 것은 모두 동생과 사위 자신의 실수입니다. 동생과 사위의 몸은 신의 아비의 몸이 아니므로, 동생과 사위의 실수는 신의 아비의 실수가 아닙니다. 신 등은 모르긴 하나, 아비의 시호인 ‘정(丁)’ 자가 실덕(實德)에 합하겠습니까?
대저 사람의 선악(善惡)은 속에 쌓이면 반드시 밖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신의 아비가 진실로 의(義)를 행하는 데 능하지 못한 실상이 있었다면, 자연히 밖에 드러났을 것입니다. 신의 아비는 조금도 자신의 잘못이 없는데 악한 이름이 만세에 전하게 되었으니, 신 등은 마음이 아픕니다. 삼가 시법(諡法)을 살펴보니, 의(義)를 행하는 데 능하지 못함을 정(丁)이라 한다.’ 하고, 주(註)에 이르기를, ‘능히 의(義)를 이루지 못한 것이다.’ 하였으며, ‘몸을 공손히 하고 말을 적게 함을 정(靖)이라 한다.’ 하고, 주에 이르기를, ‘몸을 공손히 하고 말이 적으니, 말이 적은 것이 적중(適中)하다.’고 하였으니, ‘정(丁)’과 ‘정(靖)’ 두 글자의 뜻은 선(善)과 악(惡)이 상반(相反)된 것인데, 신의 아비의 한 몸의 시호를 <이 두 가지로> 합하여 지었으니, 이는 선과 악이 서로 섞였으며, 시호를 명하는 예(例)에도 어긋남이 있습니다. 신 등은 그윽이 생각건대, 신의 아비가 평생(平生)에 자신의 허물이 없는데, 시호가 맞지 아니함이 이미 이와 같고, 예(例)를 어김이 또한 이와 같으니, 태상(太常)에서 신의 아비에게만 시법(諡法) 쓰는 것을 이와 같이 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신 등은 마음이 아픕니다. 신 등이 아비의 묘갈(墓碣)에 시호의 글자를 넣으려고 하였으나 붓을 들고 서로 말하기를, ‘아버지의 시호인 「정(丁)」자는 이미 <행실과> 서로 맞지 아니한데, 맞지 아니하는 시호를 만세에 전하여 보일 수 없으니, 어찌 성명(聖明)한 임금 밑에서 억울함을 펴지 못할 이치가 있겠느냐?’고 하면서 돌을 어루만지며 장차 쓰려고 하다가 다시 그만둔 것은, 특별히 전하의 밝으심으로 신 등의 마음을 어여삐 살피실 것을 믿은 것이었습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신 등의 억울함을 품은 심정을 애처롭게 여기시고, 신의 아비의 온전함을 무너뜨린 것을 가엾게 여기시어, 특별히 시호를 고치기를 명하시면, 신의 아비의 원통함을 구천(九泉) 밑에서 펼 수 있을 것이며, 신 등의 심정도 백일하(白日下)에 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6) 성종 13년 7월 18일 상소에 대한 조신(朝臣)들의 논의
김극유(金克忸)의 상소를 의논하게 하니, 정창손과 윤사흔, 윤호가 의논하기를,
“김국광(金國光)의 시호(諡號)를 고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하고, 한명회와 심회, 윤필상, 홍응, 노사신, 이극배는 의논하기를,
“김국광은 구신(舊臣)으로서 자기에게 <명백하게> 드러난 허물이 없는데, 만약 사위인 이한(李垾)과 동생 김정광(金廷光) 때문에 나쁜 시호를 받는다면, 이는 진실로 애매합니다. 그러나 다른 시호를 다시 의논할 수는 없습니다. 당초의 망시 계본(望諡啓本) 안의 글자는 모두 다 김국광의 평생 동안의 행실이니, 그 가운데에서 다른 글자를 취(取)하여 ‘정(丁)’ 자를 고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한명회 등의 의논에 따랐다.
(7) 성종 13년 7월 20일 광산부원군 시호에 대한 조신(朝臣)들의 논의
성종 13년 7월 20일
김국광(金國光)의 시호(諡號)를 의논한 것을 정승들에게 보이며 말하기를,
“지금 만약 시호를 고치면 반드시 예(例)가 될 것이므로, 나는 고치지 않으려고 하는데, 어떻겠는가?”
하니, 정창손(鄭昌孫) 등이 아뢰기를,
“고치는 것은 과연 적당치 못합니다.”
하고, 홍응(洪應)은 아뢰기를,
“신 등이 고치자고 하는 것은, 다른 시호로 고치는 것이 아니라, 당초에 시호를 의논한 계본(啓本) 가운데의 글자는 모두 김국광의 평생 동안의 행적(行跡)이므로, 그 가운데의 글자를 따서 고치자고 한 것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만약에 그 가운데에서 ‘공(恭)’자와 ‘양(襄)’자를 취하여 시호로 하면, 어찌 이 시호보다 낫겠는가? 고칠 수 없다.”
하였다.
(8) 성종 13년 9월 26일 상소
성종13년 9월 26일
김극유(金克忸)가 상소(上疏)했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신(臣) 등은 아비가 살아서는 큰 허물이 없었는데도, 죽어서 잘못된 시호(諡號)가 있는 이유로써 저승과 이승의 사이에 아비와 자식의 원통함이 아득하게 끝이 없으니, 신 등은 스스로 보잘 것 없는 것을 알고 있지마는, 그러나 자식이면서도 아비의 원통함을 풀어주고 아비의 수치를 씻어 주지 않는다면, 이는 부자(父子)의 인륜(人倫)에 어긋남이 있으므로, 마침내 사람에게 끼어서 세상에 설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신의 아비는 비록 남보다 뛰어난 재주와 덕망은 없지마는, 충성스럽고 근실(勤實)한 것은 여유가 있었으므로 세조(世祖)께서 낭서(郞署)의 중에서 기용(起用)하여 5, 6번이나 천직(遷職)시켜 임금의 측근에 두게 되었습니다. 세조(世祖)께서는 신의 아비를 예절로써 대우하고, 신의 아비는 세조(世祖)를 충성으로써 섬겨서, 일이 크고 작은 것을 논할 것 없이 자문(咨問)하지 않은 것이 없고 참획(參턛)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신하의 영예(榮譽)로써는 이를 고금(古今)에 찾아보아도 신의 아비와 같은 사람은 있지 않았습니다. 전하(殿下)에 이르러서도 또한 후(厚)한 대우를 입게 되어, 무릇 큰 일이 있으면 반드시 의논하고 묻게 되었으니, 전하께서 신의 아비를 대우하는 것도 은혜가 또한 지극했습니다. 후한 대우가 이미 이와 같다면 반드시 현인(賢人)으로 여겨서 대우했을 것인데, 살아서는 현신(賢臣)이 되었으나 죽어서는 잘못된 시호(諡號)를 얻게 되어 능히 의리(義理)를 따르지 못한 신하가 되었으니, 다만 신 등의 한 집안의 원통한 것 뿐만 아니라, 대체(大體)에 이를 헤아려 보더라도 또한 편안하지 못한 일이므로, 신은 그윽이 엎드려 탄식합니다. 임금과 신하가 서로 만나는 것이 어느 시대인들 이 일이 없겠습니까마는, 그러나 비록 성주(聖主)와 현신(賢臣)의 사이에서도 여러 소인(小人)들의 유언 비어(流言飛語)에 그릇되지 않는 것이 드물어서 의심이 은총의 극도에서 생기고 죄가 애매(曖昧)한 데에 가(加)하게 되는 것이 서로 선회(旋回)하고 있으니, 신의 아비처럼 은총이 극도에 이른 사람으로 이미 비어(飛語)의 비방이 있게 되었습니다. 만약 세조(世祖)의 명성(明聖)이 전일에 이를 분변하고 전하(殿下)의 명성이 후일에 이를 분변하지 않았더라면, 그것을 능히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심한 것은, 그 여러 소인(小人)들의 비어(飛語)로 비방하는 해독이 그의 생전(生前)에 해치지 못하고서 이에 그 사후(死後)에 미치게 된 그것입니다. 옛날에 송(宋)나라 조정에서 왕요신(王堯臣)에게 문안(文安)이란 시호(諡號)를 내리자, 그의 아들 왕동로(王同老)가 아비의 공로를 논하므로, 문언박(文彦博)이 그 본말(本末)을 상세히 아뢰어 문충(文忠)으로 고치었으니, 그 시호(諡號)가 혹시 잘못되어 의논하는 것은 유독 지금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옛날에도 있었던 것이며, 그 시호(諡號)를 실상에 맞추어 고친 것은 유독 지금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옛날에도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의 시호를 정하는 사람은 어찌 신 아비의 행실의 실상(實狀)을 살피지 않고서 다만 백세(百世)에 능히 고칠 수 없다는 것으로써 단서(端緖)를 열 수가 없다고 생각하겠습니까? 대개 고금(古今)에 시호(諡號)를 정하고도 이를 고치는 사람은 이루 다 셀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가 말하는 백세(百世)에 능히 고칠 수가 없다는 것은, 유왕(幽王)과 여왕(厲王)의 실상이 있어서 유왕(幽王)과 여왕(厲王)의 시호(諡號)를 얻은 것이고, 진실로 신의 아비와 같은 이를 이름은 아닙니다. 사람이 과실이 없는데도 비루한 시호(諡號)로써 가(加)하고는, 이에 말하기를, ‘백세(百世)에 능히 고칠 수가 없으니, 단서(端緖)를 열 수가 없다.’고 한다면, 어찌 《중용(中庸)》의 지극한 의논이겠습니까? 신(臣)의 애훼(哀毁)는 비록 생명을 잃는 지경에 이르더라도 아까울 것이 없지마는, 숨이 차서 헐떡거리기가 실과 같아서 오늘날까지 죽지 않았으나 내일은 반드시 죽을 것이니, 노모(老母)의 상심(傷心)은 장차 어떻게 하겠습니까? 신은 진실로 어미의 애통(哀痛)이 반드시 운명(殞命)하는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을 두려워하고 있으며, 어미는 신의 멸성(滅性)이 아침이 아니면 곧 저녁에 있을 것을 염려하고 있으니, 어미와 자식, 형과 아우가 서로 의심하고 서로 두려워하여 한집안이 창황(蒼黃)하여 서로 구원할 줄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비록 슬픈 회포를 조금 늦추어서 어미의 마음을 위로하려고 하지마는, 애통(哀痛)이 속에서 나오게 되어 마음을 잡을 수가 없으므로, 대궐아래에 부복(俯伏)하여서 다시 원통하고 억울한 심정(心情)을 호소하게 됩니다. 전하(殿下)께서 신의 아비의 행실에 만약 의심할 만한 것이 있으면 조정(朝廷)에 질문(質問)하여, 조정에서 말하기를, ‘아무 일은 곧 김국광(金國光)의 술의불극(述義不克)입니다.’고 한다면 그만이겠지마는, 만약 색다른 말이 없다면 특별히 한 글자의 고침을 하사(下賜)하여 위로는 세조(世祖)께서 인물의 현우(賢愚)를 식별(識別)하는 명철(明哲)을 밝히시고, 아래로는 신의 아비의 유명(幽明)의 원통함을 위로해 주신다면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명하여 의정부(議政府), 육조(六曹), 대간(臺諫), 승정원(承政院), 홍문관(弘文館)에 보이니, 강희맹(姜希孟), 허종(許琮), 성임(成任), 이극중(李克增), 어세공(魚世恭), 안초(安迢), 이육(李陸)은 의논하기를,
“시호(諡號)는 예로부터 아름다운 것과 나쁜 것이 있으니, 진실로 그 행실에 맞기만 한다면 경솔히 고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큰 덕망이 있은 연후에야 아름다운 시호(諡號)를 가(加)하고 큰 죄악이 있은 연후에야 나쁜 시호(諡號)를 가(加)하는데, 김국광(金國光)은 비록 큰 덕망은 없지마는 또한 큰 과실도 없었으니, 큰 과실이 없는 사람에게 아름답지 못한 시호(諡號)를 가(加)하는 것은 대체(大體)에 어긋남이 있습니다. 신(臣)의 뜻으로써는 생각하기를 정(丁)이란 글자를 고쳐서 봉상시(奉常寺)에서 의논한 가운데의 다른 글자로써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이파(李坡), 김작(金碏), 권정(權정)은 의논하기를,
“김국광(金國光)이 정권(政權)을 잡아 자못 마음대로 처리하여 여러 사람의 비방을 초래(招來)한 것이 있었지마는, 그러나 그 비방이 어찌 참으로 김국광(金國光)이 범한 허물이겠습니까? 만약 선(善)과 악(惡)이 서로 평등(平等)한 사람은 반드시 선(善)을 따라서 이를 정하게 되는데, 지금 태상시(太常寺)에서 김국광의 시호(諡號)를 의논한 것은 실상에 지나친 듯하니, 이를 고치는 것이 적당할 것입니다. 다만 이미 태상시(太常寺)로 하여금 이를 의논하게 했는데 조금 후에 또 이를 고친다면 경솔한 듯하며, 또 공정(公正)함을 후세(後世)에 보일 수가 없을까 두려우니, 삼가 성상께서 재가(裁可)하시기 바랍니다.”
하고, 이계손(李繼孫), 이덕량(李德良), 손순효(孫舜孝), 신주(辛鑄), 이맹현(李孟賢), 유순(柳洵), 이칙(李則)은 의논하기를,
“시호(諡號)란 것은 행실의 자취이며, 시호를 주는 것은 또한 군주(君主)가 죽은 신하를 포창(褒彰)하고 구휼(救恤)하는 은전(恩典)이니, 만약 그의 행동한 바가 악(惡)만 있고 선(善)은 없다면 은혜로써 의리(義理)를 가릴 수가 없으므로 나쁜 시호(諡號)를 주는 것이 도리에 적당한 것이지마는, 그러나 선(善)과 악(惡)이 서로 반(半)씩 된다면 오히려 선(善)을 드러내고 악(惡)을 가리워서 시종(始終)의 은혜를 보전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김국광은 정승(政丞)의 자리에 오랫동안 있었으니, 그 훈로(勳勞)와 사업(事業)이 말할 만한 것이 있었으니, 그가 살아 있을 적에는 비록 비방을 초래한 허물이 있기는 했으나 또한 드러난 과실과 죄악도 없었으므로, 두 글자의 시호(諡號)가 반드시 결점(缺點)을 지적해서 정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유왕(幽王)·여왕(厲王)의 시호(諡號) 같은 것은 그 자신(自身)이 도리에 어긋났고 패국망가(敗國亡家)했으므로 실상에 맞은 명칭이므로 진실로 고칠 수가 없는 것이지마는, 명칭과 실상이 어긋나는 경우에는 옛날에도 시호(諡號)를 고친 사람이 있었으니, 어찌 한 곳에만 집착하여 논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고, 변종인(卞宗仁)과 성현(成俔)은 의논하기를,
“김국광(金國光)은 비록 큰 덕망은 없더라도 또한 나타난 죄악도 없으니, 정(丁)이란 글자를 고치는 것이 적당하겠습니다. 신 등이 삼가 상고하건대, 시호란 것은 사람의 행실과 사업으로써 선(善)과 악(惡)을 기록하여 권려(勸勵)와 경계를 전하는 것이니, 이를 칭찬하기를 너무 지니치게 해서도 안 되며, 이를 폄론(貶論)하기를 너무 낮추어서도 안 됩니다. 지금 재상(宰相)의 행장(行狀)은 반드시 그 친척(親戚)으로써 이를 찬술(撰述)하도록 하여 포양(褒揚)하고 찬미(贊美)하여 선(善)을 더하면서 악(惡)을 숨기고 있는데, 봉상시(奉常寺)에서는 이를 받아서 으레 떳떳한 일로 삼게 되니, 거개가 모두 그 사실에 부합(副合)하지 않는 것이 근일에 더욱 심하게 됩니다. 이것은 다름이 아니고 이를 알면서도 공정히 의논하지 않기도 하고, 혹은 알지 못하면서도 망령되이 의논했기 때문입니다. 대저 사관(史官)의 직책은 직필(直筆)을 맡아서 위로는 군주(君主)의 거동(擧動)을 기록하고, 아래로는 재상(宰相)의 언행(言行)을 쓰기도 하며, 또 그가 졸(卒)함에 있어서는 선(善)과 악(惡)을 갖추어 기록하여 후대(後代)에 시비(是非)를 전하게 되니, 봉상시(奉常寺)에서는 비록 문신(文臣)으로써 인원을 채웠지마는, 문견(聞見)이 넓음과 의논(議論)의 공정(公正)함은 반드시 사관(史官)이 그 사실을 알아낸 것보다는 못할 것입니다. 지난번에 춘추관(春秋館)에 명하여 봉상시(奉常寺)와 더불어 함께 의논하도록 했더니, 옛날에 태상시(太常寺)에서 시호(諡號)를 의논하는 글로써 이를 그치게 했던 것입니다. 신(臣) 등은 생각하기를, 중국 조정의 예(例)에 의거하여 지금부터 이후로는 시호(諡號)의 일은 오로지 홍문관(弘文館)과 춘추관(春秋館)에 맡겨서 공도(公道)에 따르게 하소서.”
하고, 이철견(李鐵堅), 정흔(鄭흔), 윤간(尹侃), 안양생(安良生), 조위(曹偉), 이세필(李世弼), 김극검(金克儉), 이종윤(李從允), 박경(朴璟), 유윤겸(柳允謙), 이명숭(李命崇), 성건(成健), 김종직(金宗直), 정성근(鄭誠謹), 김흔(金訢), 이창신(李昌臣), 신종호(申從護), 김응기(金應箕), 안윤손(安潤孫), 이균(李均), 이거(李琚), 황계옥(黃啓沃), 성희증(成希曾)은 의논하기를,
“시호(諡號)란 것은 행실의 자취입니다. 행실은 자기에게서 나오게 되고 명성(名聲)은 남에게서 나오게 되니, 선왕(先王)이 선(善)을 권려(勸勵)하고 악(惡)을 저지(沮止)시켜서 사사로이 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만약 불선(不善)한 짓을 한 사람이 살아서 그 복록(福祿)을 누리었는데도 죽어서 또한 폄론(貶論)이 없게 된다면, 장차 무엇으로 선(善)을 권려(勸勵)하고 악(惡)을 저지(沮止)시키겠습니까? 지금 김국광(金國光)의 정(丁)이란 시호(諡號)는 반드시 그 실상과 틀리지는 않는데도 그 아들의 진소(陳訴)로써 갑자기 다시 고치라는 명령을 내리신다면 선왕(先王)의 선(善)을 권려(勸勵)하고 악(惡)을 저지(沮止)시키는 뜻이 아니니, 고치지 말도록 하는 것이 적당하겠습니다.”
하였다.
(9) 성종 13년 11월 1일 광산부원군 시호에 대한 조신(朝臣)들의 논의
성종 13년 11월 1일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임금이 좌우에게 이르기를,
“시호(諡號)를 의논하는 일은 공정하게 아니할 수 없다. 만약 행실이 착하지 못한데도 죽어서 아름다운 시호를 얻으면 악한 것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며, 행실이 착한데도 죽어서 나쁜 시호를 얻으면 착한 것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이름을 유려(幽厲)라고 하면 비록 효자(孝子)와 자손(慈孫)이라도 백세토록 고칠 수 없다.’고 하였는데, 김국광(金國光)이 생전에 행한 바를 내가 자세히 알지 못하나, 이미 시호를 정하였는데 어찌 고칠 수 있겠는가?”
하자, 지사(知事) 이파(李坡)가 말하기를,
“시호를 의논하는 것은 큰 일이니 봉상시(奉常寺) 관원을 고르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조행(操行)이 있는 이를 골라 겸관(兼官)으로 삼아서, 비록 항상 출근하지 않더라도 시호를 의논할 때에는 함께 의논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게 하라.”
하였다.
(10) 성종15년 9월 6일 광산부원군 및 공숙공(恭肅公) 김양경(金良璥) 시호에 관한 조신(朝臣)들의 논의
성종 15년9월 6일
봉상시(奉常寺)에서 김양경(金良璥)의 시호(諡號)를 공위(恭威), 편숙(偏肅), 제극(齊克)이라고 의망(擬望)하여 아뢰기를,
“웃사람을 공경스럽게 섬기며 공봉(供奉)하는 것이 공(恭)이요, 맹엄(猛嚴)하여 강단 있고 과단스러운 것이 위(威)입니다. 마음씨가 좁아 행정(行政)을 조급하게 하는 것이 편(偏)이요, 마음가짐이 결단스러운 것이 숙(肅)입니다. 마음 지키기를 능히 씩씩하게 하는 것이 제(齊)요, 백성을 애호하여 형벌을 살펴서 하는 것이 극(克)입니다.”
하였다. 승정원(承政院)에 전교하기를,
“이 시호는 그의 행장(行狀)과 서로 부합되는가?”
하였는데, 승지(承旨)들이 대답하기를,
“행장은 그의 선행(善行)만 든 것이고, 오직 봉상시에서 의논한 시호가 곧 공론(公論)으로 된 것인데, 김양경이 편심(偏心)한 병통이 있었으므로 이렇게 의논한 것입니다.”
하고, 우승지(右承旨) 성건(成健)이 아뢰기를,
“김양경이 비록 고집스러운 마음이 있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편숙(偏肅)’이라고 시호하는 것은 너무 지나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지난번에 김국광(金國光)의 시호를 그의 아들이 상언(上言)하여 고쳐 주기를 청했는데, 내 생각에 만일 그의 말을 듣고 고쳐 준다면 사람들이 모두 본받게 될까 싶었기 때문에 고치지 않았었다. 또 윤계겸(尹繼謙)은 어질었는데 시호가 그의 행실(行實)과 맞지 않으므로, 내가 고치려하면서도 실현하지 못했다. 대저 그의 사람됨이 정직(正直)하여 제배(儕輩)들의 청을 들어주지 않으면 편급(偏急)하다 하는데, 조정(朝廷)의 의논도 또한 모두 그렇게 된다. 옛적의 제왕(帝王)은 그 신하의 시호를 고친 이가 있었고, 나도 역시 고치고 싶은데 어떻겠는가?”
하였다. 여러 사람이 아뢰기를,
“봉상시는 시호를 의논하는 일을 관장하기 때문에 모두 문신(文臣)으로 차임(差任)하는데, 봉상시에서 이미 의논한 것이니 고치기는 진실로 어렵습니다. 일 집행을 흔들리지 않고 하는 것이 곧 정직(正直)인 것이니, ‘편(偏)’이라고 이름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편(偏)’이라고 이름한 것은 반드시 마땅히 해야 할 것이 아닌데도 하는 것을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 김양경(金良璥)이 편급(偏急)하다는 것은 조정(朝廷)에서 반드시 이론(異論)이 없을 것인데, 만일 고친다면 뒷폐단이 있을까 싶습니다. 만일 고치시려면, 의망(擬望)한 시호의 여섯 글자 속에서 명실(名實)이 서로 부합되는 것을 가리어 주시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였는데 ‘공숙(恭肅)’이라고 어서(御書)하고, 이어 전교하기를,
“유왕(幽王)과 여왕(厲王)의 시호를 고치지 못하는 것은 그 시호가 행적과 부합되기 때문이다. 후세(後世)에 그 사람의 실지 행적을 말한 것은 모두 시호에 근본한 것이니, 만일 시호가 행적과 부합되지 않으면 불가하다. 봉상시(奉常寺)는 비록 실지로 공론(公論)이 있는 데이기는 하나, 그러나 어찌 모두 성인(聖人) 같은 사람들이겠느냐? 그러므로 특별히 시호를 공숙(恭肅)이라고 내린 것이다.”
하니, 승지들이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下敎)가 윤당(允當)합니다.”
하였다.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시호란 것은 행해 온 자취인 것이므로 진실로 마땅히 공론으로 정해야 한다. 이번에 의논한 ‘공위(恭威)’ 이하 여섯 글자 중에 ‘편자(偏字)’는 진실로 김양경(金良璥)의 행적에 부합되는 것이지만, ‘마음가짐이 결단스러운 것이 숙(肅)이라’고 한 것은 또한 어찌 그의 행적에 부합되는 것이겠는가? 이에 앞서 신숙주(申叔舟)의 시호를 충(忠)이라 하며, ‘충(忠)이란 자신이 위태로우면서도 위를 받드는 것이다.’ 했는데, 신숙주가 평생에 무슨 그의 몸이 위태한 일이 있었는가? 그 뒤에 서거정(徐居正)의 시호를 충(忠)이라 하여, ‘충(忠)이란 절의(節義)를 다해 임금을 섬기는 것이다.’ 하고, 권찬(權攢)의 시호를 순(順)이라 하며, ‘순(順)이란 자애(慈愛)와 온화(溫和)로 두루 복종시키는 것이다.’ 했는데, ‘충(忠)’이나 ‘순(順)’은 서거정, 권찬의 시호를 의논하기에 합당한 바가 아니다. 봉상시 관원들의 의논한 시호가 적합하지 못한 것이 이와 같은 것이 많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