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3년 9월에 조직된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의 무장부대. 당시 만주에서는 지청천이 이끄는 한국독립군과 양세봉(梁世奉)이 지휘하는 조선혁명군이 일본군의 대토벌에 밀려 모두 중국본토로 퇴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인들은 일본군의 대토벌에 저항, 자위부대를 조직했으며, 농민들의 봉기가 각지에서 일어났는데, 이러한 봉기가 발전하여 항일유격대가 조직되었다. 이들은 일본군에 맞서 싸우면서, 32년 하반기부터 33년 봄에 걸쳐 동만주 지역에 유격근거지를 건설했고, 이같은 항일투쟁의 발전에 조응하여 이 지역의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는 동북인민혁명군을 조직하게 된 것이다. 이는 만주지역에 흩어져 있는 여러 무장부대의 통일적군사력으로서, 특히 남만주 지역의 제1군, 동만주 지역의 제2군은 조선인이 주력이었다.이들은 조국해방을 위해 끊임없이 국내진공작전을 폈는데, 35년 2월 제1군 제1사장 이홍광(李紅光)이 주도한 평북 동흥(東興) 공격이 그 대표적 예다. 35년 7월 코민테른 7회대회에서 제국주의 파시즘에 대응, 반파쇼 인민전선과 식민지에서의 민족통일전선 방침이 제시됨에 따라 중국공산당도 국민당에 대해 내전 중지와 항일통일전선 결성을 호소하게 되고, 그와 함께 동북인민혁명군은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으로 확대개편되었다. 동북항일연군의 조선인 무장부대들은 활발한 유격활동을 전개하고, 조국광복회와 함께 국내진공작전을 벌이기도 했다. 37년의 보천보(普天堡)전투가 그 대표적 예다. 그러나 40년대에 들어서면서 관동군·만주군을 동원한 일제의 대토벌로 그 활동이 위축되어 시베리아 쪽으로 이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