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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1075. [역경의 열매] 김인강 (1-24) 인생 고비마다 ‘기적의 목발’로 부축해 준 당신
시간은 정말 화살처럼 빠르다. 복사꽃이 피는가 싶더니 어느덧 신록의 계절이다. 서울 청량리동에 자리 잡은 한국과학기술원(KAIST) 고등과학원(KIAS) 수학부 2층 내 연구실 창밖 6월의 풍경은 하루가 다르게 싱그럽다. 정들었던 서울대를 떠나 이 조용하고 아담한 연구실의 책상을 지킨 지도 1년6개월이 됐다.
이맘때쯤 서울대 캠퍼스는 활력이 넘친다. 하지만 나는 꽃이 언제 피고 어떻게 지는지 모를 정도로 바쁘게 지냈다. 수시로 찾아오는 학생, 박사과정생들과 토론하느라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2007년 젊은 과학자상을 받고부터 좀 더 연구에 정진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마침내 고등과학원 교수로 오게 됐다. 나의 연구실은 고즈넉한 여유로움도 있지만 어떨 땐 적막한 산속 같을 때도 있다.
돌이켜보면 45년 세월이 참으로 짧은 시간이었다. 그러나 꽤나 많은 일이 일어났다. 두 살 때 소아마비로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어린시절과 대전 재활원에서 보냈던 10대 초반의 막막했던 시간들, 고난스럽고 혼돈스러웠던 청소년기는 아직도 내 머릿속에 차마 잊을 수 없는 순간으로 각인돼 있다. 나는 신병훈련소로 유명한 충남 논산시 연무대 인근 과수원집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두 살 때 열병을 앓고 걸을 수 없게 됐다. 또래 친구들이 모두 초등학교에 들어갔지만 난 형과 누나들의 어깨 너머로 한글을 깨쳤다.
여름이면 마당에 멍석을 깔고 누워 달과 별과 은하수를 바라보며 잠이 들곤 했다. 나는 평생 동안 잊을 수 없는 세 번의 달을 기억한다. 처음의 달은 아주 어렸을 때, 아버지의 술주정을 피해 어머니 등에 업혀 과수원 한구석에서 바라보던 초겨울의 달. 두 번째의 달은 나름대로 인생의 계획을 안고 먼 유학길에 올라 외롭고 힘들면 찬송가를 부르며 바라보던 미국 샌프란시스코만 위에 떠 있던 큰 달이다. 세 번째는 삶에 지치고 피곤해 떠났던 인도의 라지스탄 사막에서 바라보던 모래사구 위에 떠 있던 달이다.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만 해도 깨닫지 못했지만 하나님은 한순간이라도 나를 버리신 적이 없었다. 장애인 입학을 허락할 수 없다는 중학교 교장 선생님의 마음을 움직여 입학을 허락하셨다. 1981년 연합고사 만점이라는 선물도 주셨다. 서울대 수학과 합격의 영광도 받았다. 신림9동 지하 월세방 신세였지만 미국 버클리대학으로 유학도 보내주셨다. 광야와 같은 세월을 지나 고등과학원의 교수로 서기까지 내 인생의 모퉁이마다 그분은 ‘기적의 목발’로 부축해 주셨다.
나는 목발을 짚고 양쪽 폐가 터지는 고통과 절망 속에서 하늘로부터 오는 빛을 의지하며 고난의 바다를 건넜다. 별로 자랑할 것이 없지만 국민일보 역경의 열매를 통해 창조의 신비함과 아름다움이 담긴 삶과 신앙의 향기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정리=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
* [역경의 열매] 김인강 (1) 인생 고비마다 '기적의 목발'로 부축해 준 당신
* [역경의 열매] 김인강 (2) 유명 의사도 “가망 없어요”… 집안은 마치 전쟁난 듯
* [역경의 열매] 김인강 (3) 어머니 눈물과 호소에도 초등학교 입학 거부당해
* [역경의 열매] 김인강 (4) 무능한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준 상처는 ‘인생의 보약’
* [역경의 열매] 김인강 (5) 어머니 땀냄새 생각하며 힘들었던 재활원 생활 견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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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1966년생, 대전중, 충남고, 서울대 수학과 졸업, 미국 버클리대 박사, KAIST·서울대 교수 역임, 한국과학기술원 부설 고등과학원 수학부 교수. 서울 행운동 예수마을교회 집사.
***[역경의 열매] 김인강 (2) 유명 의사도 “가망 없어요”… 집안은 마치 전쟁난 듯
“과수원집 막둥이가 걸을 수 없게 됐다는구먼, 인강이 어머니 아버지 불쌍혀서 워쩐디야.”
두 살 때 소아마비에 걸리자 동네 사람들은 우리 집을 무척 걱정해줬다. 위로의 말도 때론 욕이 된다는 것을 모르는 이도 있었다. 아버지는 평소에는 “그까짓 거 괜찮아유, 나아지겠지유. 멀쩡한 아들이 둘이나 있는데 뭘유”하며 넘어가다가도 고주망태가 된 날은 달랐다. 집안이 한바탕 난리가 났다. 밥상이 뒤집어지고 세간이 풍비박산이 났다.
“자식이 저렇게 되도록 도대체 뭘 한겨. 여편네가 무식헌게 아이가 절름발이 된겨.”
나를 제외한 누나와 형들은 잘도 피했다. 하지만 다 큰 아들을 업고 도망가야 하는 어머니와 나는 달랐다. 아버지의 신세타령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동구 밖에서 이슬을 맞았다.
한글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아버지는 어머니만 못 살게 굴었다. 한 판 전쟁을 치른 듯한 그 긴 밤이 깊어가면서 어머니는 나를 무릎에 앉히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인강아, 걱정 말그라. 내 몸이 바스라져도 니를 고쳐줄텨. 내가 니 때문이라도 살겨.”
병원도 학교도, 전기도 없었던 외딴집에서 유년 시절을 혼자 지내야 했다. 고독이 무엇인지, 외로움을 어떻게 견디는지 나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홀로 배웠다. 병아리와 강아지가 가장 친한 친구였다. 놀다 자고 다시 깨면 또 그들과 놀았다.
따스한 봄볕, 황량한 앞뜰에서 희망처럼 꿈틀거리며 마른 대지 위에서 하늘로 올라가던 아지랑이, 과수원을 물들이던 연분홍 복숭아꽃, 원추리, 붓꽃들, 우물가의 포도나무와 보리밭 위로 날아오르던 종달새의 노래, 아카시아 꽃향기, 신작로에 피던 코스모스의 한들거림, 나는 이 소중한 죽마고우들을 영원히 잊을 수 없다. 어머니는 내가 아프고 나서 사방팔방으로 용하다는 의사들을 찾아다녔다. 한번은 순천에 살고 있는 고모의 소개로 순천에 있는 한 병원을 찾았다. 병원장은 환자를 잘 돌보는 소문난 의사였다. “(너)노무 늦었어요. 가망이 없어요. 집에 가서 기도 많이 하세요.”
어머니는 나를 업고 나오며 무척이나 서럽게 우셨다. “미국 의사도 별수 없나벼. 돌팔이 의사가 무슨 예수 믿고 기도나 하라는 겨.” 어머니 등 뒤에 나도 따라 울었다.
돌아오는 길, 기차 창문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먼 산 너머로 지던 황혼의 해거름을 넋 나간 아이처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 내 인생은 항상 저렇게 서글프게 지는 석양처럼 가슴앓이하며 살아야 될지도 모르겠구나.” 지금도 나는 지는 해를 보면 괜히 숙연해지고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 내 가슴을 적신다.
어느 해에는 사촌 누나의 소개로 시외버스를 타고 서울에 있는 큰 병원에 간 적이 있다. 차만 타면 멀미를 하는 모자는 아무리 눈을 감고 껌을 씹고, 박카스를 먹어도 결국 버스가 정차할 때면 토해냈다.
사촌 누나가 일하던 그 집에 며칠 동안 머물다가 유명하다는 의사 선생님을 뵈러 갔다. 그분도 마찬가지였다. “재활치료밖에는 방법이 없어요.” 재활치료가 뭔지도 모르는 어머니는 나를 업고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아버지는 마당 한 편에 철봉대 같은 것을 만들어 주셨다.
입학할 때가 돼서 어머니는 나를 업고 1시간을 걸어서 초등학교에 갔다. 아홉 살 누나와 함께였다. 누나는 내가 혹시나 다리가 좀 좋아져 학교에 갈 수 있을지도 몰라 입학을 미루고 있었다.
어머니와 나는 교장 선생님이 들어오시기를 눈이 빠지도록 기다렸다.
***[역경의 열매] 김인강 (3) 어머니 눈물과 호소에도 초등학교 입학 거부당해
교장 선생님은 초등학교 입학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냥 업고 가세요. 어머니, 이렇게 심한 장애아를 받을 수가 없어요.” 어머니는 허리를 연신 굽혔다. 그러나 한 번 돌아앉은 교장 선생님은 끝내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 “엄마, 빨리 집에 가고 싶어유.” 입학을 거절당하고 집까지 돌아오는 길은 몹시 추웠다. 어머니는 “아가야, 춥지” 하며 나의 언 발을 호주머니에 넣어주셨다. 아무 말도 없이 한참을 걷다가 어머니는 “시방도 겨울인디 왜 이리 더운겨?” 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나는 고개를 돌려 멀어져가는 학교를 바라보며 어금니를 악물었다.
당시 우리 집을 찾아오는 사람이라곤 강경 갈치장수 아주머니와 우체부 아저씨가 전부였다. 그들이 오는 날이면 어머니는 나를 보며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셨다. “이 놈이 앞으로 밥이나 먹고 살아야 할틴디 걱정시라 죽것시유.”
어머니의 한숨은 내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다. 밤마다 악몽과 공포에 시달렸다. 나선형의 깊고 어두운 구멍으로 곤두박질하는 꿈을 꾸었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면 찢어진 창호지 틈으로 스며들던 하얀 달빛이 나를 위로했다.
낮이나 밤이나 나는 늘 외톨이었다. 부모님은 밭에 가시고 누나와 형들은 모두 학교에 가고 없었다. 혼자 놀다 잠들고 또 깨어났을 때 그 적막함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길고 긴 터널을 통과한 듯한 몽롱한 침묵, 나는 아직도 그 침묵의 무게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과수원 복숭아나무 밑에 앉아서 저 산 너머, 저 하늘 아래에는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을까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도 했다. 누나와 형들이 학교 숙제하는 것을 보며 어깨너머로 한글을 배웠다.
그땐 무슨 의미인지도 몰랐지만 ‘어린왕자’라는 책을 읽은 기억이 난다. 구압산에 사는 사촌형의 집에서 누군가 빌려온 그 책을 읽으며 세상에 홀로 존재했던 어린 아이는 여러 별들을 여행했던 어린왕자처럼, 이곳도 가보고 싶고 저곳도 가보고 싶었다.
그러나 나에게 주어진 세상은 너무나 달랐다. 외딴 집과 복숭아 과수원이 전부였다. 봄이면 분홍색 꽃이 만발하고, 여름이면 시큼한 복숭아, 가을이면 신도벼가 고개를 숙이고, 겨울엔 온통 하얀 눈으로 이불을 덮던 그곳. 우리 집은 이른 봄부터 바빴다. 복숭아나무 잔가지를 치고 딸기를 심었다. 여름이면 밤늦게까지 복숭아를 따서 크기대로 골라 상자에 담았다. 서울에서 온 큰 트럭에 모두 실어 줘야 하루의 일과가 끝난다.
나는 희미한 호롱불에 의지해 바쁘게 움직이는 식구들을 반쯤 졸린 눈으로 바라보곤 했다. 마당 한구석에 피워놓은 모깃불의 매운 연기를 맡았다. 하늘에 지천으로 깜박거리는 별들의 자장가를 들으며 혼자 잠이 들곤 했다. 우리 집은 복숭아 수확이 끝나면 담배를 따서 비닐하우스에 말려 꼭지를 짓고, 밭에는 깨와 콩, 감자, 고구마를 심고 벼농사를 지었다. 가을이면 벼를 수확하는 탈곡기 소리가 요란했다. 1년을 통틀어 단 하루도 손을 뗄 수 없는 고된 노동이었다.
아버지가 술에 취해 코를 골며 곯아떨어진 늦은 시간에도 어머니는 밀린 빨래와 설거지, 집안일 등으로 밤이 이슥해서야 눈을 붙이셨다. 교회에 나가지 않았지만, 어머니는 교회 새벽종소리가 울릴 때 가끔씩 잠꼬대 같은 기도를 했다. “불쌍한 우리 인강이 언젠간 걸을 수 있것지유?”
***[역경의 열매] 김인강 (4) 무능한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준 상처는 ‘인생의 보약’
농사짓는 일이 고달팠지만 아버지가 가끔 주는 상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1928년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아버지는 학교 문턱을 넘은 적이 없다. 33년생인 어머니도 마찬가지다.
아버지 형제는 9남매였지만 제대로 얼굴은 뵌 분은 몇 안됐다. 일제 징용에 끌려가거나 베트남전에 참전했다가 돌아와 평생 떠돌이로 살고 계시는 분 등 대부분 기구한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 일제 식민통치와 6·25전쟁 통에 간신히 살아남은 아버지가 맘대로 할 수 있었던 것이 술이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는 세계적인 격동기였다. 미국과 소련은 냉전으로 대립관계에 있었다. 그 이념 대결은 한반도의 허리를 잘라 놓았다. 더군다나 전쟁에서 가까스로 벗어난 지 10수년밖에 안된 남한은 반공과 민주주의, 경제발전이라는 세 가지 과제를 안고 있었다.
분단의 질곡과 정신적 아노미 상태의 지식인들은 허무주의와 실존주의 영향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세’라는 구호 아래 농촌의 젊은이들은 도시로 떠났다. 이웃나라 중국은 문화혁명으로 온 대륙이 숙청과 파괴의 현장으로 변했다. 일본은 이런 와중에도 재빠르게 독일을 따돌리고 세계 2위의 경제 강국으로 부상했다. 바다 건너 미국에서는 흑인운동과 마틴 루터 킹 목사와 케네디 형제의 죽음, 베트남 전쟁과 반전운동, 마리화나와 히피 문화 등으로 혼란스러웠다.
내가 태어난 66년에는 사이먼 앤드 가펑클이 ‘사운드 오브 사일런스’를 불러 유명해졌다. 이들은 또 이듬해에 더스틴 호프먼이 주연한 영화 ‘졸업’의 주제가를 불러 세계적인 스타가 됐다. 69년에는 인간이 사상 처음으로 달에 착륙해 우주 천문 과학 분야에 무한한 가능성을 열었다. 우리집은 이러한 거대한 역사적인 변화와는 무관했다. 아버지는 지식과 경제력, 권력도 없는 지극히 평범한 농부였다. 무지한 농부의 몸으로 잔혹한 역사적 소용돌이를 견뎠다. 결국 술로 자신의 영혼을 위로하며 가족을 건사하기에 바빴다.
아버지의 무능함은 어머니와 6남매에게 고스란히 전달됐다. 큰누나(옥정)는 어릴 적부터 어머니를 도와 집안일을 해야 했다. 맏이로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막둥이를 업어 키웠다.
둘째누나(국분)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대전에 있는 회사에 취직했다. 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동생들을 위해 기꺼이 희생했다. 큰형(성태)과 작은형(일강)도 자신의 미래를 맘대로 설계할 수 없었다. 막내누나(현정)는 어머니(국예환)가 허리 디스크로 투병하고부터 어머니 대신 집안일과 아버지 수발을 도왔다.
하지만 아버지가 준 상처는 훗날 보약이 됐다. 우리 형제들은 가난과 불행을 이어받지 않으려고 무진장 애를 썼다. 특히 둘째누나는 우리 가족 중에서 가장 먼저 하나님을 만나 인생이 확 바뀌었다. 결혼 후까지 이어진 가난의 굴레를 모두 떨치고 지금은 대전시 가장동 대전중앙감리교회(안승철 목사)의 심방 전도사가 됐다.
둘째누나는 나에게 수호천사였다. 76년 어느 날 대전에서 회사를 다니던 누나가 목발을 사가지고 왔다. “철봉에 아무리 매달려도 걸을 수 없다. 이제부터 이 목발을 짚고 걸어라. 엄마도 허리가 아파서 더 이상 너를 업을 수 없잖아. 목발을 짚고 나와 함께 대전으로 가자.” 한동안 나는 목발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누나가 야속하고 미웠다. 목발을 잡는 순간 걸을 수 있다는 희망이 사라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역경의 열매] 김인강 (5) 어머니 땀냄새 생각하며 힘들었던 재활원 생활 견뎌
집을 떠나는 것은 죽기보다 싫었다. 외딴곳이지만 아늑한 집을 떠나려니 눈이 붉어졌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족 곁을 떠나는 순간이었다. 어머니 품을 벗어난다고 생각하니 감당하기 힘든 불안감이 엄습했다. 꼴도 보기 싫은 목발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국분이 누나를 따라 대전에 있는 재활원이라는 곳으로 갔다. 1976년이었다. 재활원은 군번 없는 군대였다. 공짜로 밥을 주는 법이 없었다. 식사 당번, 화장실 청소 등 각자 맡은 임무가 있었다. 우리는 형들의 감독 아래 매일 시계추처럼 움직였다.
첫날부터 일이 터졌다. 나보다 조금 먼저 온 아이가 시비를 걸었다. 순간 “참고 또 참아야 뒤여. 아무도 니를 봐주지 않을 겨, 그렁게 단디 하그라. 알것지?” 집을 나설 때 아버지가 던진 한마디가 생각났다. 하지만 무작정 당할 수만은 없었다. 코피가 터질 때까지 싸웠다. 서열을 정하는 통과의례였다. 한참 동안 싸움을 하고 나니 서러움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걸을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 이곳에서 도망가고 싶었다.
재활원에서 먹은 첫날 밥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밥이 아니라 톱밥을 먹는 느낌이었다. 김치는 차라리 소금덩어리였다. 그러나 100여명의 아이들은 이 밥을 게 눈 감추듯 식판을 비웠다.
멍하니 있다 보니 어느새 ‘식사 끝’이라는 구령이 들렸다. 나는 숟가락을 들다 말고 밖으로 빠져나와 화장실에서 소리 없이 울었다. 그날 이후 난 밤마다 편지를 썼다. “엄마, 보고 싶어요. 제발 나를 집으로 데려가 주세요.” 그러나 한번도 부치지는 못했다. 내가 참고 걸어가야 할 가시밭길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술 한 개라도 잘 배워야 목구멍에 풀칠이라도 허지” 하는 아버지 말씀이 생각나서였다.
그곳에는 휠체어를 타고 바이올린 등을 연주하는 음악동아리가 있었다. 베데스다라고 불렀다. 첼로 하나와 바이올린 2∼3개로 이루어진 앙상블이었다. 나는 바이올린을 켜고 싶었지만 악기를 살 수 없었다. 정말 음악을 하고 싶었지만 듣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음악은 나의 위로였다. 나의 형편과 세상 근심을 잊게 만들고 상상 속의 자유를 주었다.
큰 꿈이 없었다. 초등학교 과정을 마치면 집단 작업실에서 하루 종일 일했다. 인쇄기술이나 목각인형·장식품을 만드는 기술을 배우며 시간을 보냈다. 저녁에는 외출이 통제되었는데 원감의 눈을 피해 형들은 허락을 받지 않고 외출하다 적발되면 죽도록 맞았다.
나는 그래도 나은 편이었다. 사랑하는 부모님과 누님과 형들이 있다는 것이 큰 위안이었다. 부모도 없는 중증 장애아들이 수두룩했다. 어린 나이에 각양각색의 장애 때문에 부모에게서 버림받아 고아가 된 아이들, 시름시름 앓다 죽어가는 친구들. 가끔씩 영구차에 실려 가는 친구들의 시체를 보는 날은 밤새 악몽에 시달리기도 했다.
지금도 그때의 감정을 한마디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언젠가 알베르 카뮈가 쓴 책에서 읽었던 그의 절망과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하늘을 부정하지도, 하나님을 부정하지도 않는다. 다만 인간들의 고통에 대답하지 않고 침묵하는 하늘을 원망할 뿐이다.”
그러나 난 원망을 넘어 희망을 그렸다. 주일마다 설교 말씀을 전하러 오시는 목사님도 큰 용기를 주셨다. 눈을 감고 과수원 외딴집의 따스한 호롱불과 어머니의 땀냄새를 생각하면 힘이 생겼다. 나의 수호천사 국분이 누나가 오는 주일을 손꼽아 기다렸다.
***[역경의 열매] 김인강 (6) 재활원 ‘최 선생님’ 헌신적 도움으로 일반 중학교 입학
재활원은 생사고락의 축소판이었다. 소심하고 가녀린 외모 때문에 아이들은 나를 여자라고 놀려댔다. 때때로 교회나 구호단체에서 빵과 우유를 우리들에게 나눠 주곤 했다. 그들은 크리스마스 때를 전후해 노래나 연극공연을 보여주었는데 1시간 정도의 일회성 공연이 끝나면 우린 더욱더 버려진 느낌을 감출 수 없었다. 대부분 10원짜리 과자 ‘라면땅’ 한 봉지에 희망을 걸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나에게 꿈을 심어준 선생님이 계셨다. 최화복 선생님이다. 그분은 일반 국민(초등)학교에 재직하고 계셨는데 장애 학생들을 교육하기 위해 스스로 재활원으로 오셨다. 선생님은 나에게 서예와 음악을 가르쳐 주셨다. 2년 동안 붓글씨를 열심히 배운 결과 전국대회에 나가 국무총리 상을 받을 수 있었다. 또 선생님은 공부할 때 중요한 단어를 사인펜으로 지우게 했다. 나는 교과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통째로 외웠다. 또 선생님이 지휘하는 합주부에서 하모니카를 불었다. 우린 삼육재활원에서 열리는 합주 대회에서 1등을 했다.
최 선생님은 내가 공부에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아보신 선생님이었다. 그분은 내 인생을 통틀어 교육자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진심으로 보여주신 분이다. 진심으로 한 학생을 위해, 자신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주시는 그런 분이었다.
중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되자 최 선생님은 이제부터 공부를 제대로 해야 한다며 일반 중학교에 진학할 것을 권했다. 하지만 그것은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중학교 교장 선생님도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과 똑같았다. 장애아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재활원 출신을 입학시킬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최 선생님은 포기하지 않으셨다. 오랫동안 교장 선생님을 설득하셨다고 했다.
“이 아이가 언젠가는 이 학교의 명예를 빛낼 것입니다. 재능이 보통 뛰어난 아이가 아닙니다. 큰 인물이 될 터이니 학교 문턱만 넘게 해주세요.”
다행히 그 교장 선생님은 나의 입학을 허락했다. 최 선생님의 설득 덕분이었다. 지금 최 선생님은 재활원을 나오셔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수지침을 놓아주고 계신다.
어렵게 중학교에 입학했지만 정신적인 방황은 계속됐다. 담임선생님이 걱정이 돼 상담 선생님을 소개해 주셨지만 나는 그 선생님이 두 손을 들 정도로 복잡한 아이였다.
교회에 나가면 괜찮을 것 같아서 언덕 위에 있던 방주교회에 나갔다. 그 교회 전도사님한테 나는 신앙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인간이 왜, 어디서 태어나, 어디로 가는가에 대해 꼬치꼬치 물었다.
하지만 전도사님은 나의 질문을 너무 쉽게 여겼다. 아직도 그런 것을 모르느냐며 외면했다. 내가 궁금해하는 것을 아무도 속 시원하게 대답해주지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끈이 이어질 뻔했지만 단 몇 주일로 끝나버렸다. 하지만 언젠가는 다시 예수를 믿겠다는 생각은 버리지 않았다. 다행히도 학업의 열정은 식지 않았다. 부모님과 형제들의 짐이 되지 않기 위해 죽기 살기로 공부에 매달렸다.
참고서도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시험만 보면 항상 1등을 했다. 1981년 고입 연합고사를 봤는데 아무도 상상하지 못하는 일이 벌어졌다. “인강아, 니가 연합고사에서 만점을 맞았다야, 이것이 시방 꿈인 겨? 생신겨?” 나를 제일 아껴주시던 담임선생님과 영어 선생님이 집으로 찾아오셨다. 두 선생님은 나를 번갈아 꼭 안아주셨다. 며칠 후 나는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TV 방송에 출연했다.
***[역경의 열매] 김인강 (7) 대학시절 알게된 누나 권유로 하나님을 다시 만나고…
1982년, 충남고에 1등으로 입학했다. 허리 한 번 제대로 못 피시던 어머니가 허리 디스크로 꼼짝을 못하시게 됐다. 더 이상 과수원 농사를 지을 수 없어서 부모님은 과수원을 헐값에 팔고 대전으로 오셨다. 6남매와 부모님은 조그마한 집 한 채에 사촌 누나와 함께 전세로 살았다. 참 오랜만에 식구들이 다 모여 살게 되었다. 하지만 안정적인 수입이 없었다.
특별한 기술이 없는 아버지는 공사장 잡부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그러나 대학생 3명에 고등학생까지 학생만 4명인 집안을 돌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큰형은 입주과외로 집을 나갔다. 우리는 따로 공부방이 없었다. 방 한 칸에서 한쪽에서는 TV를 보고, 다른 한쪽에서는 일을 했다. 나는 그 한구석에서 공부를 해야만 하는 힘겨운 나날이 지속되었다.
힘들었던 고등학교를 무사히 마치고 1985년, 서울대 수학과에 합격했다. 나는 과학에 관심이 많았지만 육체적인 활동이 적은 학문을 찾다보니 수학이 제격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반대였다. “안디야, 방 한 칸도 없는디 워떠케 서울로 유학을 간디야? 여그서 장학금 받고 기냥 댕기는 겨.” 하지만 어머니와 나는 그런 아버지와 가족을 남기고 서울로 향했다. 300만원을 주고 서울 신림동 고시촌 인근 지하 단칸 전세방을 얻었다. 다행이 학자금이 면제되었다. 약간의 장학금이 나와, 부족한 생활비는 과외를 하며 충당하는 대학생활이 시작되었다.
캠퍼스는 연일 민주화 시위로 바람 잘 날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의 말을 연상하며 스스로 용기를 냈다. “우리 인생이 아무리 고통스럽다 할지라도, 우리의 인생이 짧다는 것은 우리에게 희망이다.” 나는 늘 이 말을 위안 삼고 하루하루를 버텼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때까지도 나에게 손을 내밀지 않으셨다.
나뭇잎의 색깔이 바뀌기 시작하는 그해 가을 어느 날, 구세주 같은 여인이 나타났다. 여느 때처럼 강의를 마치고 힘겹게 집으로 돌아가는 길. 비가 쏟아졌다. 우산을 쓸 수 없는 나는 오는 비를 고스란히 맞으며 걸어갔다.
갑자기 연한 화장품 냄새가 나는 듯했다. 누군가 나에게 우산을 씌워주었다. 여자가 혼자 쓰는 우산이라 둘 다 비에 흠뻑 젖었다. 나는 (대학원생)그 누나에게 말했다. “저는 이미 젖었으니 혼자 쓰고 가시지요.” 나는 나 자신에게 희망이 없음을, 그러한 나 자신을 포기했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 누나는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학교 정문을 나설 때쯤, 그는 참았던 한마디를 던졌다. “혹시, 당신은 하나님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어요?” 나는 순간 용수철 같이 답했다. “수백번, 아니 수천번 더 생각했을 겁니다.” 그 말은 정말 거짓말이 아니었다. 나의 존재 의미에 대해 나의 존재 목적에 대해 얼마나 많이 물었던가. 그 누나는 나를 신림동 단칸방까지 바래다주었다. “기독대학인회(ESF)라는 선교 동아리가 있어요. 그룹 성경공부가 있으니 참석해 보세요.”
며칠 후 나는 ESF사람들과 인문대 빈 강의실에서 요한복음을 공부했다. 형들은 내가 늙어 보인다며 재수생인지 물었다. 아마도 내 가시밭길 인생이 나를 겉늙게 했었나 보다. 나는 요한복음을 통하여 빛으로 오신 예수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님, 세상의 로고스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기 시작했다.
***[역경의 열매] 김인강 (8) 강의실 가는 것도 힘든데 폐 질환까지, 왜 나에게만…
“하나님이 나를 지켜보고 미소지어주면 나는 평생 이렇게 살 수 있어요.”
내 책도 아닌데 그만 빨간 줄까지 긋고 말았다. 1985년 초겨울, 서울대 도서관에서 받은 감동과 은혜를 나는 영원히 잊을 수 없다. 주인공은 나이가 마흔이 넘도록 결혼도 하지 않고 가난한 광부들을 돌보는 간호사였다. 어느 비바람이 치는 밤에 갱이 무너졌다. 광부들이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자전거를 타고 달려가다 그만 전봇대에 부딪쳐 척추를 다치고 만다. 그러나 몇 년 후 그녀는 다시 휠체어를 타고 그곳에 나타나 변함없는 모습으로 광부들을 치료한다. 누군가 그녀에게 어디에서 이런 힘이 나오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담담히 ‘하나님의 미소’ 때문이라고 했다.
새로 태어나는 기분이었다. 이 세상에 아무도 나를 지켜봐주는 사람이 없어도, 이 세상에 내가 살아 있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할 때 나에게 조용히 미소지어주는 한 분이 계시다는 걸 처음으로 깨달았다.
그동안 수천 번 자문했던 ‘왜?’에 대한 의문의 거대한 빙산이 한순간에 스르르 무너졌다. 목발을 짚었지만 마음은 날아가고 있었다. 내가 외로우면 그분은 더 괴로워하셨다. 내가 슬픔에 빠지면 그분은 서럽게 우셨다. 낮은 자들의 고통을 그분은 온몸으로 견디시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이었다. 나보다 수천 배, 수억 배 아파하셨을 예수님을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지게 아팠다.
이런 체험 가운데 내 학교생활은 여전히 고달팠다. 신림동 지하방에서 학교까지 걷는 데 꼬박 1시간이 걸렸다. 강의실과 강의실 사이를 오가는 길은 구만리처럼 멀었다. 특히 인문대 수업이 4층에 있고, 연이어 자연대 건물 4층에 수업이 있으면 아예 강의를 포기했다. 그 많은 계단을 두 목발을 짚고 겨우 도착할 때면 강의는 이미 끝나갈 무렵이다. 집에 돌아오면 늘 녹초가 됐다. 이런 고단함 때문이었을까. 대학 3학년 초부터 왼쪽 폐가 이상하게 아프기 시작했다. 어느 날 갑자기 학교에서 숨을 쉴 수 없는 고통으로 쓰러져 서울대병원으로 후송됐다. 너무 심한 육신의 피로 때문이었는지 폐에 큰 구멍이 났다. 응급처치를 하여 갈비뼈와 폐 사이에 찬 공기를 제거하고 간신히 살아났다. 2주 동안 병원에 누워 있었다.
며칠 후 퇴원하고 다시 학교에 돌아왔다, 하지만 폐의 통증은 계속됐다. 다시 응급실로 실려 갔다. 병원 응급실은 아수라장 그 자체였다. 어느 아저씨가 암에 걸린 부인을 둘러업고 응급실에 들어왔다. 그 부인은 고통으로 뒹굴고 있었다. 하지만 접수창구에서 그들을 받아주지 않았다. 아저씨는 의사들에게 사정사정하다 결국 그들을 저주하기 시작했다.
나는 주치의에게 화가 나서 물었다. “왜 저 사람을 치료하지 않습니까?” 그러자 의사는 “병원이 만성적자에 시달리고 있어 의료보호 대상자를 자꾸 받으면 병원이 헤어날 길이 없고, 아주머니의 상태가 별로 가망도 없어 보였기 때문”이라 했다.
나는 더 이상 그곳에 머물고 싶지 않아 병원을 나와 버렸다. 무작정 나온 나를 본 어머니는 “네가 죽는 꼴을 두고 볼 수 없다”면서 세브란스병원에 입원시켰다. 갈비뼈 사이를 벌려 폐를 수술했기 때문에 나는 제대로 숨을 쉴 수 없었다. 진통제를 맞아도 몇 시간뿐, 밤에는 이를 악물고 기도했다. “하나님, 이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세요. 너무 아파요. 차라리 숨을 쉬지 않는 게 낫겠어요.”
***[역경의 열매] 김인강 (9) 왼쪽 폐 나으니 오른쪽이… 수술 거부한 채 기도원으로
“모든 일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8)
수술이 잘됐지만 서울 신림동 반 지하 방에서 몇 개월 동안 외출을 하지 못했다. 가을 문턱에 닿자 구멍이 났던 폐가 정상으로 돌아왔다. 오랜만에 바깥세상을 구경하니 날아갈 것만 같았다. 그때 바라보던 관악캠퍼스 위의 파란 가을 하늘과,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던 찬란한 맑은 햇빛과 공기, 바람을 나는 아직도 느낄 수 있다.
햇살이 그렇게 아름다운 줄을, 나는 미처 몰랐었다. 이 세상에서 감사할 것 중에, 고통 없이 숨쉴 수 있고 마음껏 태양빛을 즐길 수 있는 것이 얼마나 감사할 일인지도 깨달았다.
숨쉬는 일부터 하나님은 나에게 감사하는 법을 배우게 하셨다. 한쪽 폐를 송곳으로 찔러 가슴으로 체득하게 하신 것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나를 더 정화하시기를 원하셨다. 맑은 관악산 자락을 바라보는 일도 몇 주 되지 않아 그만 둘 수밖에 없었다. 이번엔 오른쪽 폐에 똑같은 증상의 통증이 나타났다.
다시 병원에 가서 방사선(X-ray) 촬영을 했다. 의사는 같은 병이니 또 수술하자고 했다. 나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나는 의사에게 하나님께 물어 보아야 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당장 수술하지 않으면 폐가 갑자기 파열돼 심장마비로 죽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으니, 하나님께 나를 향한 뜻이 무엇인지부터 알아야 하겠다고 병원을 나왔다. 사실이었다. 나는 죽음보다도 왜, 언제까지 이 고통을 참아야 하는지 하나님께 묻고 싶었다. 며칠 밤을 누워서 생각했다. 차라리 일찍 하나님께 가는 것이 좋을 듯싶었다. 어떻게 하면 남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조용히 생을 등질까도 생각해보았다. 나는 처음으로 기도원에 가보기로 결심했다.
어머니와 함께 버스를 타고 한적한 산 속에 있던 기도원에 갔다. 그곳에는 갖가지 병과 삶의 문제를 가진 채 찌들고 짓이겨진 사람들이 마지막 끄나풀을 잡으러 모여 있었다. 그들의 육신과 삶의 고통은 그들에게서 희망도 절망도 지워버려 아무것도 찾을 수 없는 백지 상태로 만들고 있었다. 어느 날 저녁 한쪽 구석에서 기도하고 있을 때 누군가 부르는 찬송가 소리가 내 가슴을 내리 찍었다.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라는 곡이었다. 그 순간 나는 하나님께 자복했다. 내가 얼마나 교만한 자였는가를. 작고 작은 피조물이 나의 육신의 질곡의 고통 때문에 창조주에게 목을 세우고 변론하였던 무례함을 회개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세상적인 얇은 지식으로 나의 존재 이유와 목적에 대해 하나님을 공격하였던 죄를 털어 놓았다. “주께서 무소불능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여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 42:2∼5)
토기장이가 만든 토기가 토기장이를 책망했던 교만함을 뼈저리게 느꼈다. 다음날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부터 하나님께 기도했다. 주의 뜻대로 날 받으시라고. 하루에 6시간을 기도하며 하나님의 빚으심대로 나를 내어 드렸다. 욥이 드렸던 기도를 똑같이 드렸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로다.”(욥 23:10)
***[역경의 열매] 김인강 (10) 모자의 간절한 기도에 오른쪽 폐 수술없이 완치 응답
기적은 보이지 않지만 언제나 흔적을 남긴다. 하나님은 우리 모자의 기도를 들어주셨다. 담당 의사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구멍난 오른쪽 폐는 칼을 대지 않고도 말끔히 치료해 주셨다.
노모의 간절한 기도 덕분이었다. 어머니는 예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허리 디스크로 고생하시면서도 아들 뒷바라지를 위해 허드렛일을 마다 않으셨다. 아들보다 늦게 예수를 영접했지만 믿음의 깊이는 측량할 수 없었다.
학교를 휴학하고 1년 동안 투병생활을 통해 하나님은 육이 죽고 영이 사는 법을 가르치셨다. 기도하는 법, 성경 읽는 법, 아픔 가운데 하나님을 찬양하는 법을 배웠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가운데 바라고(hope against all hope) 하나님을 의지했다’는 것이 무엇 이었는지 조금은 알게 됐다. 소망이란 장밋빛 꿈이 아니라 절망의 순간에도 놓지 않는 강한 믿음이란 것을 깨달았다. 바울이 가난과 궁핍과, 죽음의 위험 속에서도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라고 고백했던 심정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바울의 고백은 어떤 상황에서도 나의 모든 것을 걸고 지키는 믿음의 존재론적 선언이 되게 하셨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뒤로하고 오직 하나님 앞에서(Coram Deo), 그분 앞에 발가벗겨 서 있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나는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종종 ‘왜 나만 이런 시험을 당하는지?’ 이해하고 설명할 수 없을 때가 많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고통이 어디에서 오는지 말씀해 주시지 않고 우리와 같이 고통에 참여하신다. 이 세상을 아무 흠 없는 낙원으로 만드시기 위해 그의 전능의 막대기를 휘두르시기보다 당신 스스로 연약해지시고 겸손해지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고통을 말씀만으로 위로하신 게 아니라 온몸으로 막아주셨다. 거룩한 참예는 불멸이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지금도 나는 끊임없는 육신의 나약함에 노출되어 있다. 남들이 다섯 계단을 오르내릴 때 나는 한 계단에 겨우 닿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약하고 느리지만 막강해지는 법을 가르쳐 주셨다. 그리고 이 세상이 잠깐 있다 사라지는 안개와 같은 것임을 항상 깨닫게 하신다. 또한 이 땅의 것에 집착하지 않고 위를 보고 사는 법을 일러 주셨다.
혹독하게 아프고 나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의미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과 판단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명예와 자유로부터도 그렇다. 하나님의 십자가의 도 외에는 모두 아침에 피었다 저녁에 지는 나팔꽃 같은 인생이라는 것을 알게 하셨다.
산다는 것은 끊임없는 희망의 목마름 속에서도 절대로 물러서지 않는 것이다. 인생은 우리 영혼 속에 뿌리박힌 하나님의 본질을 찾아 전진하는 여정이다. 무지하게 고독하고 외로웠지만 그 때마다 보이지 않는 형제들이 내미는 사랑의 버팀목이 용기를 줬다. 그래서 난 눈물의 바다 속에서도 환하게 웃으며 그리운 서울대 캠퍼스로 돌아올 수 있었다.
***[역경의 열매] 김인강 (11) 캠퍼스 복귀후 공부·신앙성숙 몰두하려했으나…
3학년 한 해를 병상에서 보낸 나는 성숙한 신앙인이 돼 캠퍼스로 돌아왔다. 4학년 때부터 기독대학인회(ESF) 요회 목자로 일했다. 내가 서울대를 떠날 때까지 ESF 후배 학생들과 일주일에 한 번씩 연구실에 모여 요회를 했다. 비록 수는 적었지만 그래도 학생복음운동의 한 모퉁이를 담당한 시간이었다. 이를 위해 지금도 고분 분투하는 간사를 비롯해 수고하는 여러 손길에 하나님의 손이 함께하길 기도한다.
나의 대학생활은 낭만과 화려한 젊음을 발산하는 청춘의 황금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미팅과 여행, 담배를 피우고 술 마시는 것은 사치였다. 여행은 꿈도 못 꿨다. 나는 주로 공부와 신앙생활 2가지 일에만 전념했다. 다행이 하나님이 나에게 학업에 몰입하는 지혜를 주셨다. 그래서 처음부터 졸업까지 단 한 번도 과 수석을 놓치지 않았다.
수학은 화학이나 물리 생물과는 달리 기본적인 공리(axiom)위에 자신의 논리를 쌓아가는 추상적인 예술이다. 실험의 데이터나 자연의 현상과는 별도로 자신만의 논리체계를 구상할 수 있는 관념의 세계인 것이다. 아마도 하나님이 주신 인간 이성의 꽃이라 할 수 있겠다.
1학년 때는 물리, 화학, 통계학과와 같이 수업을 많이 들었다. 하나님은 때때로 나에게 순발력과 새로운 시각으로 문제에 접근하는 창조력을 주셨다. 가끔 평균이 20∼30점대에 머물 때 혼자 만점을 받기도 했다. 내가 열심히 공부해 만든 매뉴얼은 친구들이 숙제하고 시험 볼 때 사용하는 자료로 이용됐다. 나는 그런 식으로 친구들이 공부하는 것을 도왔다. 전공과목 중 나는 특히 위상과 기하에 매력을 느꼈다. 많은 계산이나 기계에 의존하기보다 번득이는 아이디어를 많이 요구하는 듯한 이 학문에 묘한 매력을 느껴 나는 이 분야를 전공하기로 결심했다.
1980년대 중후반은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한 수난의 시대였다. 계속되는 데모와 전경과의 대치는 학교에서 벌어지는 연일 행사였고 자신을 불살라 독재에 항거하는 학우들의 죽음은 열사 전태일의 정신을 계승한 젊음의, 민주주의와 노동자의 권익을 위한, 거룩한 희생이었다. 수업거부와 교수들과의 충돌은 정상적인 교육과 전공분야 공부에 큰 차질을 빚었다. 우리는 정규수업을 제대로 받지 못하며, 학점의 불이익을 감수하고 때로는 시험까지 거부하며 대학생활의 많은 시간을 지냈다.
매년 그랬다. 캠퍼스에 꽃은 활짝 피어도 진정한 봄은 오지 않았다. 신록과 조락의 계절에도 마찬가지였다. 언제나 한겨울이었다. 최루탄에 눈물과 콧물이 마르지 않았고 쫓고 쫓기는 전경과의 싸움판이었다. 아크로폴리스광장은 하루라도 집회가 없는 날이 없었다. 말 그대로 투쟁의 장소였다. 도서관에서 가끔 공부할 때면 공부보다는 아크로폴리스에서 열리는 집회에서의 어느 학우 또는 노동운동가의 연설을 들으며 지냈다.
삶의 큰 목표와 진리 탐구에 몸 바쳐야할 대학 시절에, 우리는 무력으로 진압하는 공권력과 독재정치 앞에 비참한 정치와 노동현실에 항거하며 살았다. 틈틈이 전공서적과 홀로 씨름하면서 이를 악물었다. 물리적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나는 피비린내 나는 정치 투쟁이 없는, 살벌한 이념 투쟁이 아닌, 예술과 신앙과 순수 학문에 자신의 젊음을 바칠 수 있는 더 좋은 시대가 오기를 기도했다.
***[역경의 열매] 김인강 (12) 내 인생 등불이 돼 준 ESF… 그 멤버들 평생 못 잊을 것
기독대학인회(ESF)는 내 인생의 방향과 목표를 설정해줬다. 이 사회에 대해, 역사에 대해, 바른 신앙에 대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울려 사는 삶이 무엇인지 일깨워 준 선교단체다. 나는 그곳에서 평생 잊을 수 없는 수많은 형제자매들을 만났다. 그중에서 더벅머리 김회권(숭실대 기독학과 교수) 목자님은 내 인생의 구세주였다. 나는 그로부터 기독교인으로서, 지식인으로서 고민하고, 현재 내가 살고 있는 사회와 시대의 자리에서 복음적 해결책을 찾아가는 법을 배웠다. 그는 나에게 전인격적인, 초 인류적인 기독교인이 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 누구에게서도 찾을 수 없었던 영성과 열정은 많은 젊은이들에게 큰 본이 되었다.
그는 탁월한 성경해석과 해박한 지식, 개인의 삶에서부터 시대와 역사까지 분별하는 폭넓은 시각으로 복음주의의 한계를 넘어 사회의 치유에까지 뻗치는 복음의 영향력을 발휘해 그 당시를 살던 젊은이들의 가슴과 영혼을 달구었다. 66㎡(20평) 남짓한 작은 회관에서 우리는 복음을 들고 개인과 시대의 문제를 고민한 끝에 치유와 회복을 경험하고 그리스도의 용사들로 거듭났다. 회관에는 항상 자신의 문제든지, 구조의 문제든지, 모든 진리에 목말라 하는 젊은이들로 가득 차 넘쳤다.
같은 시기에 회관에 있었던 형제 자매들 중 강학 해문 선 정국 정희 남권 윤희 원규 동규 은영 등이 생각난다. 또한 호태 달식 만수형 등은 우리의 좋은 본이 되었다. 강학, 정국형제와 정희자매는 학생복음사역의 역사를 계승하려 간사로 섬겼다.
윤희 누나는 특히 남을 돕는 일에 은사가 있어 후에 독일에서 특수교육을 전공하고 지금도 장애우와 노인들을 돕는 데 혼신의 힘을 쏟고 있다. 강학, 정국, 정희 형제자매는 훗날의 복음 사역을 위해 지금은 다 유학 중이다.
이제는 모두 40대로 엄마 아빠가 되었지만, 이들을 생각만 해도 가슴이 훈훈해지고 그 최루탄 냄새 자욱한 신림동의 좁은 건물에서 성경공부하며 진리에 목말라 했던 그 시절을 나는 평생 잊지 못하리라. 그때 내가 특히 많이 도와주었던 칠성이와 현영이는 지금은 예수님을 영접했는지 궁금하다. 칠성이는 대전의 연구소에 근무하고 현영이는 결혼해 서울근교에 산다는 말만 들었다. 칠성이는 농대에 입학했던 시골아이였다. 순박해 보이는 그를 나는 형처럼 돌봐 주었다. 밥도 사주고 고민도 들어주고 성경도 읽으며 그가 견실한 대학생으로, 신앙인으로 자라기를 바랐다.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과외를 하느라 항상 시간에 쫓기었다. 그는 화학을 좋아해서 후에 다른 학교에 편입시험을 봐 학교를 옮겼다. 그를 다시 만난 건 박사과정을 하러 다시 서울대로 돌아왔을 때였다. 이제는 교수와 학생의 신분으로 만났지만, 우리는 우리 인생에 대해, 미래에 대해 긴 시간 이야기하였다. 첫아이를 잃었던 슬픈 이야기부터, 이제는 건강한 아이와 아내와 함께 성실히 살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며 나는 이제는 신앙에 대해 좀 더 깊이 생각해 보았으면 하였다. 항상 외로워했고 눈물이 많았던 현영이는 너무나 연약해보여 안쓰러웠지만 약대를 졸업하고 취직을 해 많은 이들의 걱정을 덜어줬다.
우리는 서로가 삶의 힘과 추진력을 얻도록 성경공부와 기도와 토론을 많이 했다. 혼자서 넘을 수 없었던 수많은 고비와 산을 우리는 함께 넘었다. 지금도 캠퍼스에는 스스로의 삶을 책임지지 못하고 외로워하며 절망하는 수많은 학생들이 있다. 나는 매일 밤 그들을 지켜달라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린다.
***[역경의 열매] 김인강 (13) 대학 차석졸업 후 기업재단 후원으로 미국 유학길에
만약 내가 대학 1학년 때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인생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주저앉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1990년 2월 자비로운 하나님은 서울대 전체 차석으로 졸업하게 하셨다. 참으로 어려운 5년의 대학생활이었지만 하나님은 나의 손을 놓지 않으셨다. 김회권 숭실대 교수 등 수많은 형제자매들이 나를 부축해 주었다. 나는 이 은혜를 갚기 위해서 반드시 서울대 교수가 돼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하나님의 은혜로 장학금을 받고 졸업 후 바로 미국 버클리대학으로 유학을 떠나게 됐다. 선경재단의 고등교육재단 해외 장학생으로 선발돼 경제적인 부담 없이 공부할 수 있었다. 국비 장학금도 받을 수 있었지만 후배를 위해 양보했다.
함께 버클리에 입학할 친구와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봤다. 큰 이민가방에 책과 옷 등을 구겨 넣고 우리는 앞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미래에 대한 설렘과 불안감을 동시에 안고 김포공항을 떠났다.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내렸을 때 강렬한 태양과 비릿한 바다 냄새가 우리를 맞았다. 2주 후에 있을 예비시험을 준비하는 동안 자동차 운전면허 시험도 합격했다. 200달러를 주고 허름한 자동차 셰비(Chevy)를 샀다. 우리는 낯선 미국 고속도로를 처음으로 달려 학교에 가보기로 했다. 무모한 질주였다.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는데 어디선가 헬리콥터 소리가 났다. 어디서 나는 소리인지 알지 못해 하늘 위를 자꾸 쳐다보았다. 그런데 옆을 지나가는 차들이 자꾸 손짓을 하고 무슨 말을 하며 지나갔다. 우리는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직감하고 길가로 차를 대었다. 밖으로 나왔을 때 헬리콥터 소리는 바로 우리 차에서 난 것이었음을 알게 됐다. 낡은 뒷바퀴가 터져 타이어가 산산조각이 나며 떨어져나간 것이다. 아찔한 순간, 구사일생이었다.
친구와 나는 트렁크를 열어 스페어타이어가 있는지 살펴보았다. 다행히 타이어가 있었지만 도구가 전혀 없었다. 마침 옆을 지나가던 교통경찰에게 도움을 청했다. 우리는 자초지종을 짧은 영어로 설명하고 도움을 요청했다. 경찰은 차를 견인하라고 했다. 비용을 물어 보았더니 보험처리를 안 하면 몇 백 달러가 든다고 했다. 배보다 배꼽이 큰 꼴이었다. 우리는 도구가 없어서 그러니 스페어타이어로 교체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경찰은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며 뒤돌아섰다. 길가에 서서 도움의 손길을 기다렸다. 마침 고속도로 보수공사를 하고 있는 인부들을 만났다. 그들에게 부탁해 겨우 스페어타이어로 교체하고 간신히 버클리대학에 도착했다.
처음 보는 버클리의 텔레그래프 애비뉴(Telegraph Avenue)의 풍경은 정말 인상적이었다. 길가의 노점상들과 거지들, 공연하는 사람들, 학생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어떻게 생활해야 할지 걱정이었지만 하나님은 정말 생각지도 않은 선물을 주셨다. 생활비를 벌어야 했는데 마침 조교(TA) 자리를 예비해 놓으셨다.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나는 테스트를 받기 위해 3명의 외국인 교수 앞에서 10분 동안 모의 강의를 했다. 칠판에 여러 가지 수식을 써가며 설명했다. 평소에 철저하게 준비한 덕분에 긴장하지 않고 차분하게 강의했다.
***[역경의 열매] 김인강 (14) 다양한 인종·문화와 접하며 ‘편견없이 사는 법’ 배워
미국 유학 첫해는 학부생 기숙사에서 살았다. 그들의 개방적인 성관념 때문에 무척 당혹스러웠다. 부모로부터 해방되어 고삐 풀린 망아지 같은 프레시맨들은 나에게 상당한 문화 충격을 주었다. 각층에는 욕실이 하나밖에 없어 아침에는 샤워하느라 전쟁을 치렀다. 2∼3년 차에는 학생들이 자체로 운영하는 코옵 하우스(co-op house)에 살았다. 우리는 싼 집세를 내는 대신 1주일에 5시간 정도를 일했다. 식사준비, 청소, 집안일 등이었다. 나는 나이 어린 학생들과 살며 그들의 고민과 인생문제를 상담해 주었다.
주말마다 댄스파티가 열리는 등 물론 좋은 환경은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그들과 어울려 사는 새로운 생활방식에 만족하였다. 하지만 이런 코옵 중에는 상습적으로 마약을 하는 아주 나쁜 곳도 꽤 있었다. 다행히 내가 살던 곳은 마약 문제가 없는 언덕 위에 있던 킹맨 홀이라 불리는 4층짜리 예쁜 집이었다.
다양한 인종과 국적, 다른 문화와 집안 배경을 가진 아이들과 같이 살며 그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했다. 그들의 문화를, 그들의 사고체계를 아무 편견 없이 받아들이는 법을 배웠다. 샤워 침대 화장실 등 모든 것을, 심지어는 방까지 여학생들과 같이 써야 하는 상황에서 나는 그들을 다른 성(sex)이 아닌 또 다른 인간으로 보는 법을 배웠다. 처음에는 여학생들과 같이 샤워하고 같은 방에서 사는 것이 낯설었지만 곧 하나님이 지으신 다른 한쪽의 인간에 대해 자연스럽게 느끼는 법을 배웠다.
혼돈스러운 정신상태에서 시끄러운 음악과 춤으로 자신을 내맡기는 그들의 파티 문화를 나는 지금도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그들은 철없는 듯해도 자신들의 인생 계획만큼은 철저했다. 경제력과 시간을 철저히 따졌다. 졸업하는 데까지 얼마 들고 얼마 걸리고를 정확히 계산해 돈을 빌려 공부를 하고 앞으로 어떤 직장에 들어가 얼마의 돈으로 얼마 동안 갚을 것인지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공부했다.
조교(TA)를 하며 대학원 과목을 따라가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숙제를 하기 위해 안 풀리는 문제들과 씨름하다 보면 며칠씩 흘러갔다. 강의와 내 수업, 기숙사에서 어린 학생들과의 생활은 몸과 마음을 지치게 했다. 많은 수업과 교회일 때문에 육신이 피곤한 경우가 많았다. 폐가 약했기 때문에 유학을 와서도 며칠 동안 누워 있기도 했다. 유학생활 2년차에는 박사논문을 쓰기 위한 자격시험(qualifying exam)이 있었다. 이때가 부활절 무렵이었는데, 자격시험을 2주 앞두고 또 폐가 아프고, 몸이 극히 약해져 있었다. 의사는 입원하라고 권유했으나 참고 기도하며 견뎠다. 연약한 몸은 나에게 가시와 같았다. 이로 인하여 내가 자고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나를 정결하게 하는 도구가 되게 했다.
오후 5시쯤이면 학교에서 나와 피곤한 심신을 이끌고 바닷가로 갔다. 1∼2㎞ 되는 바닷가 산책길을 걸으며 나는 주저앉지 않으려 노력했다. 산책로의 작은 벤치에 앉아 금문교로 넘어가는 해를 보며 시편을 수없이 외웠다. “내가 주의 열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나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시 139:7∼10)
***[역경의 열매] 김인강 (15) 내 인생을 결정지은 두 여자, 테레사 수녀와 나의 아내
유학생활 6년 동안 내 인생을 결정지은 2명의 여인을 만났다. 한 여인은 지금은 고인이 된 마더 테레사 수녀다. 1993년 박사자격시험을 마치고 인도에 있는 친구를 보러 갔다가 만났다. 그녀는 가난하고 병든 자를 위한 쉼터를 운영하고 있었다.
“여기까지 왜 왔나요? 나의 아들.”
“삶에 너무 지쳤어요. 힘들어요.”
그녀는 대답 대신 내 손을 잡고 빙그레 웃었다.
“이 지구의 한 모퉁이에서 이렇게 병든 자를 돌본다고 세상이 얼마나 바뀔 것 같습니까?”
“세상을 바꾸는 것은 나의 몫이 아닙니다. 나는 그저 작은 일에 충성할 뿐이지요.”
그녀는 나를 그들의 채플에 초대하고 기도해 줬다. 그녀는 내가 삶에 지치지 않도록, 내 인생의 작은 일에 충성을 하도록 평상심을 잃지 말 것을 당부했다. 헤어질 때 그녀는 나에게 조그마한 쪽지를 내밀었다. “침묵은 기도를 낳고, 기도는 믿음, 믿음은 사랑, 사랑은 봉사, 봉사는 평화를 낳는다-마더 테레사.”
또 한 여인은 평생의 반려자가 된 박희령씨다. 기독대학인회(ESF)에서 알게 된 윤희 누나가 소개시켜 줬다. 얼굴도 모른 채 거의 5년 동안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녀는 독일에서 유학을 하고 있었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식당과 인쇄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틈틈이 한인교회 유치부 교사와 찬양대 첼로 반주 봉사를 하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
서로 볼 수는 없었지만, 우리는 힘들 때나 기쁠 때나 편지에 생각과 기도를 담아 보냈다.
1995년 프랑스 파리에서 그녀를 처음 만났다. 학회가 종종 파리에서 열렸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만남이 이어졌다. 독일 쾰른에 있는 그녀를 방문하곤 했다. 파리 북역에서 자정에 기차를 타면 오전 7시쯤 쾰른에 도착했다. 기차 안에서 선잠을 잔 나에게 그녀는 역까지 마중 나와 손을 흔들어 주었다. 우리는 쾰른대의 연못가를 거닐며 놀러 나온 가족들 사이에서 서로를 의지하는 사람이 되어 갔다.
그녀는 자신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여자였다. 자신의 공부와 첼로 연습보다 자신을 필요로 하는 친구들을 위해 시간을 아끼지 않았다. 그녀 주변에는 항상 사람이 많았다. 내가 홀로서기에 익숙한 데 반해 그녀는 더불어 서기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우리가 때때로 이기적이 돼야 할 필요를 느낄 때도 그녀는 다른 사람의 입장을 택하였다. 나는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그녀가 정말 좋았다.
나는 버클리 마리나에서 샌프란시스코 사이로 넘어가는 해를 보며 베토벤의 ‘황제’를 들었다. 그녀는 나를 위해 피아노 부전공을 해 수많은 명곡을 녹음해 보내줬다. 차이코프스키의 ‘녹턴’과 막스 브루흐의 ‘콜니드라이(신의 날)’를 들으며 나는 서럽도록 아름다운 인생이 무엇인지를 느꼈다. 그녀는 내게 기다림과 그리움의 아름다움을 알게 했다. 또한 상대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줬다.
가끔씩 나는 기쁨의 눈물을 쏟았다. 한 차례 강물이 흐른 뒤 그녀에게 장문의 편지를 썼다. “재활원에서 생활하던 어린시절이 생각이 납니다. 지금도 슬픔과 어둠 속에서 지낼 아이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너무 아파요. 하지만 말구유 위에 태어나신 아기 예수를 생각하면 평안과 힘이 솟구칩니다. 주 안에서 당신의 영혼이 더욱 맑고 깊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역경의 열매] 김인강 (16) 유학 중 어머니 쓰러졌다는 소식에 심장이 멎는 듯…
“인강아, 엄니가 시방….” “어머니가 왜요? 무슨 말씀이세요?”
누님의 급한 전화에 순간적으로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한동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귀가 멍멍해지더니 온 몸에 힘이 쭉 빠졌다.
“막내야, 인강아, 괜찮은 겨? 정신 놓으면 안 되는 겨. 엄니가 쓰러지셨으면서도 니 건강만을 걱정하고 계신다, 시방도….” 간신히 정신이 들었다.
유학 중 어머니가 뇌졸중으로 쓰러지셨다. 처음에는 말도 못하시고 오른쪽 팔과 다리가 마비됐었다. 어머니는 60평생의 험한 세월을 작은 육신 하나로 버텼다. 아버지 술주정에 시달리며 자식들을 뒷바라지해야 했던 어머니는 하루하루를 한숨과 가슴 조임으로 사셨다. 나는 그런 어머니가 너무나 안쓰러웠다. 혹시 집이라도 나가시면 어쩌나 하고 매일 걱정했다. 어렸을 때 어느 날 어머니가 밭에도 집에도 보이지 않아 나는 엄마를 찾아 복숭아 과수원과 집안을 돌며 엉엉 울었던 기억이 난다. 한쪽 구석에서 무슨 정리를 하고 계시던 어머니는 그런 나를 발견하곤 나를 꼭 껴안으셨다. “내가 너를 두고 어디를 갈 수 있겠니? 걱정 말그래이.”
어머니는 구압산이란 충청도의 시골 마을에서 1남 2녀 중 장녀로 태어나셨다. 오빠는 6·25 때 전사하시고 여동생과 단둘이 남은 어머니는 20살의 어린 나이에 누구의 중매로 아버지를 만나 일찍 결혼하셨다. 결혼해 시댁에 살며 7남매가 득실거리는 가난한 아버지의 집에서 호된 시집살이를 하셨다.
어머니는 몸이 더 이상 말을 듣지 않을 때까지, 한 많은 한반도의 이름도 모르는 작은 시골마을에서 자식과 남편을 위해 소리 없이 눈물을 삼키며 몸이 부서져라 일을 했다. 결국 내가 중학교 때 어머니는 척추 디스크수술을 받으셨고, 그 후 부모님은 일구던 과수원을 헐값에 정리하고 대전으로 이사하셨다. 몸이 불편한 자식을 위해 밥을 지으시고 가방을 들어 주시며, 우산을 받쳐 주시며 내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어머니는 나와 함께 사셨다.
어머니는 나와 단둘이 살았던 대학교 1, 2학년 때를 가장 행복해하셨다. 그때 어머니는 나의 권유로 처음 교회에 나가셨다. 손자를 홀로 키우며 사셨던 어떤 할머니와 함께 새벽기도도 가시고, 예배에도 참석하셨다. 오래간만에 남편으로부터 해방돼 자식 뒷바라지하는 기쁨으로 사셨다.
뇌졸중 후유증으로 부자연스러워진 팔과 다리를 볼 때마다 내 가슴은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다. 그래도 머나먼 미국까지 오셔서 자식이 공부하는 것을 보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 드렸다. 오늘도 자비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어머니의 환경 속에 소망이 돼 주시고, 참 기쁨의 근원이 되시어서 누워 있는 이 자리가 천국이 되고 믿음의 자리가 되게 해 달라고 같이 기도한다.
절망의 상황에서도 자식을 걱정하시는 어머니를 뵐 때마다 내 가슴은 한없이 무너진다. 경기도 의왕시에 사시는 형님 곁에 계시는 어머니는 날이 갈수록 치매가 심해지신다. 그래도 찬송가 중 ‘나의 갈길 다 가도록 나와 동행하소서’라는 소절만은 기억하신다. 살다 보면 기도밖에 할 수 없는 순간이 온다는 말이 실감난다. 오늘도 외롭고 쓸쓸하게 홀로 지내실 어머니를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 “병상에 홀로 계신 나의 어머니에게 주님께서 친구 되어 주시고 기쁨 되어 주시고 모든 것 되어 주시며 그의 모든 눈물과 마음의 한을 주의 병에 담아주소서.”
***[역경의 열매] 김인강 (17) 성경 통독 병행하자 그토록 어렵던 수학도 차츰 이해
어머니는 하나님이 보내주신 날개 없는 천사였다, 내가 아파하면 통곡하셨고, 기뻐하면 춤을 추셨다. 어머니는 한평생 남편과 자식을 위해 온몸을 내놓으셨다. 당신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었다.
“어미 걱정일랑 말고 얼른 박사학위 따서 들어와야지.” 어머니는 뇌졸중으로 거동이 불편하셨지만 아들을 만나러 버클리까지 오셨다. 1주일이 1시간보다 짧게 지나갔다. 어머니를 배웅하던 날은 간밤에 잠을 못 이뤘기 때문인지 아침부터 바튼 기침이 나왔다. 비행기가 결항이라도 돼 어머니의 귀국이 좀 늦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어머니를 실은 비행기는 야속하게도 1분도 틀리지 않고 제 시간에 이륙했다.
버클리에서 학위 과정은 그렇게 순탄치만은 않았다. 1학년 때는 기본과목들을 수강했다. 그때 기하위상을 하는 우리들에게는 더스턴(W Thurston)과 그로모프(M Gromov)라는 두 교수가 유명했다. 이들이 써놓은 논문이나 책들은 난해하기로 소문이 났었다. 그들의 뛰어난 통찰력과 천재성은 논문의 한 줄, 한 줄에 담겨 있었다.
박사과정 학생들은 그들의 논문 중 한 줄을 몇 년을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곤 했다. 나는 주로 더스턴의 세미나에 참석했는데 처음 5분 정도는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이야기를 했지만 그 후는 이해하기 힘든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런 나를 보며 스스로에게 수학자로서의 자질이 있는 것일까 등에 대해 고민했다.
나는 그가 써놓은 강의록을 읽기로 결심했다. 3명이 매주 한 번 모여 처음부터 읽었다. 그의 책은 온간 상상력을 동원시켰다. 한 줄을 어렴풋이 이해하는데 어떤 때는 하루, 아니면 며칠씩 걸렸다. 나는 그 책을 읽으며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수학적 상상력을 동원했다. 어둠 속에서 스스로 길을 찾아나가는 방법을 체득하기 시작했다. 그 책을 다 읽는데 2년이 걸렸다.
“적당히 공부해 학위 받으려면 포기하세요. 취직하기 위해 박사학위 취득하려는 사람들 많아요. 나는 그런 사람을 도와주지 않아요. 그러니 일찌감치 생각을 바꾸는 게 좋을 겁니다. 어차피 졸업하기 어려우니까.”
나의 지도교수 카슨(A Casson)은 독특한 분이었다. 한국 대학의 문화로는 상상이 안 가는 사람이었다. 그는 학생들에게 철저히 혼자 공부할 것을 요구했다. 어떠한 아이디어도 줄 수 없다고 했다. 그는 나 홀로 수학자가 되는 법을 가르쳤다. 처음 박사과정에 들어온 학생에게는 무리한 요구였다. 그의 의도는 분명했다. 진정한 수학자는 태어나지 않고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수많은 실패를 통해 원리를 터득할 수 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설명했다. 2년간 나는 다시 긴 어둠의 동굴 속을 통과했다. 어떤 식으로 문제를 풀어야 하는지 아무도 설명해주지 않았다.
성경을 수없이 통독하며 영적인 훈련도 함께 쌓았다. 태산보다 높아 보이던 그 많은 문제들도 하나 둘 풀리기 시작했다. 물론 수많은 좌절과 시행착오를 넘어서면서부터다. 빛이 있는 방향이 어느 쪽인지를 감지하는데 5년이 걸렸다. 처음엔 한 문제를 푸는데 2∼3년이 걸렸다. 최근에 해결한 더스턴의 가설 중 하나는 3∼4년이 걸렸다.
그랬다. 다른 학문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수학은 참으로 많은 인내가 필요하다. 누구도 도와주지 않는 외로운 길이다. 하지만 나에겐 카슨보다 훨씬 더 위대한 능력 있는 분이 도와주셨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그 분은 영원한 나의 스승, 이 천지간 만물을 만드신 하나님이다.
***[역경의 열매] 김인강 (18) 완강할 것만 같았던 장인·장모는 선뜻 결혼 허락을…
미국과 독일, 프랑스, 인도 등을 오가며 공부한 6년 동안 수많은 크리스천 석학을 만났다. 그들로부터 학문을 연구하는 올바른 자세를 배웠다. 다른 학문도 마찬가지지만 수학은 성경으로 통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 속에는 하나님이 우주와 인간 이성에 숨겨놓으신 그의 보편적인 창조와 운행의 비밀이 들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유학생활 마지막해 대부분을 버클리, 프린스턴대 한국기독학생회(IVF) 회원들과 보냈다. 우리는 집을 돌아가며 소그룹으로 성경 공부를 하고 금요일에는 함께 채플을 드렸다. 우리집에서 모일 때는 재스민 차와 블랙베리 차밖에 없었지만 성경을 주제로 열심히 토론하고 찬양했다.
나의 신앙생활이 기쁨이 넘치는 순간이 되어서야 예수님의 멍에가 가볍게 느껴짐을 깨달았다. 무엇이든 기쁨 없이는 율법적이고 수동적이며 결국은 생명력을 잃은 박제된 신앙만 남게 된다는 것을 배웠다.
외환위기가 찾아온 1996년 가을에 귀국해 이듬해 KAIST에 가게 되었다. 올 봄 하늘나라로 가신 명효철 원장님을 잊을 수 없다. 명 원장님은 기초과학, 특히 고등과학원 설립에 다리를 놓으신 학자로 한국의 과학사에 영원히 기억될 위대한 분이다. 한때 KAIST란 제목의 드라마가 인기를 끌었었다. 마치 KAIST가 천재들의 학교로 인구에 회자됐었다. 어렸을 때부터 과학 위주로 특수학교에서 훈련을 받아 그랬는지 대부분 학생들이 총명했지만 고집이 세고 자존심도 강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 인간미가 철철 넘치는 학교는 아니었다.
나는 이런 분위기가 싫었다. 그래서 ‘수학과 음악의 밤’이라는 행사를 열어 학생들과 피아노, 바이올린, 플루트 연주회를 개최했다. 교수님들을 초청해 기타 독주도 하고 악기를 다루지 못하는 학생들은 노래를 불렀다. 이곳에도 기독단체 모임이 있었다. 가끔 그곳 예배에서 설교를 해야 했다. 듣는 입장에서 말씀을 전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긴 했지만 나를 추스르고 영적으로 깨어 있게 하는 기회가 되었다. 빈 마음으로 하나님 말씀을 전할 수 없었기에 집 근처 새누리교회에 출석했다. 안이숙 사모님과 김동명 목사님이 세우신 침례교회로, 자신들이 가진 생각을 구체적으로 살려내려고 노력하는 교회였다. 어떤 사람들은 교도소 선교도 하고, 집 없는 아이들을 2주에 한 번씩 자기 집에 데려와 하루씩 같이 지내며 그들을 위로하기도 했다. 새로 온 사람들에게는 신앙의 기초부터 차근차근 잘 가르쳐 주었다. 복음의 능력이 말에 있지 아니하고 행함을 동반해야 한다는 것을 실천하는 교회였다.
신앙생활이 어느 정도 안정이 되자 속도 모르고 주변에선 빨리 결혼하라고 성화였다. 위기는 기회라는 말을 믿고 일사천리로 밀어붙였다.
“여기까지 서느라 고생 많았네. 예수 잘 믿고, 사랑하는 우리 희령이와 행복하게 살게나.” 처음 상견례를 할 땐 참 난감했었다. 두 다리가 불편한 장애인에게 시집 가겠다는 딸이 곱게 보일 리 없었을 텐데 장인과 장모 되실 분들은 우리의 결혼을 쾌히 승낙해 주셨다. 난 수없이 많은 예상 답변을 준비했었다. 그러나 모두 빗나갔다. 첫 대면에 허락해 주시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많은 사람들이 집안과 학벌, 외모 등을 고려해 결혼을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모든 일은 정말로 마음먹기에 달렸다. 마침내 98년 2월 우리는 5년간 편지 사랑의 꽃을 피웠다. 2002년 첫아들 건우를 낳은 아내가 한없이 울기만 했다. 나는 순간적으로 가슴이 철렁했다.
***[역경의 열매] 김인강 (19) ‘질곡의 삶’ 아버지는 어머니께 미안하다는 말씀 남기고…
우리 부부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첫 아들 건우는 매우 건강했다. 유학을 마치고 KAIST에 정착하자 부모님도 대전으로 내려오셨다. 나는 가끔씩 점심시간에 유성의 재래시장에서 아버지와 만나 삼계탕이나 보리비빔밥을 먹었다.
얼마 동안은 묵묵히 먹기만 했다. 그 험난했던 세월을 지나는 동안 아버지의 얼굴은 주름으로 고랑을 이뤘으며 머리는 하얀 눈밭이 돼버렸다. 나는 예수님께 이 불쌍한 영혼을 구원해달라고 기도했다. “많이 드셔유. 아버지, 건우가 아버지를 많이 닮아서 참 좋아유. 손주 장가갈 때까지 건강하게 사세유.”
아버지는 창 밖을 보시면서 딴청을 피우셨다. “나는 니가 법대에 갔으면 했었다. 물론 들어갔더라도 판검사는 꿈도 꾸지 못했겠지만 말이다. 징용으로 일본에 건너간 너의 둘째 큰 아버지 때문이지.”
난 그제야 아버지가 순경이 다녀간 날이면 왜 술주정이 더욱 심해졌는가를 알게 됐다. 아버지는 가난한 집안에서 9형제 중 3남으로 태어났다. 그 중 몇은 일찍 돌아가시고 대부분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일제 징용과 한국전쟁, 월남파병 등 이 땅의 역사의 질곡을 차례대로 모두 짊어질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그 무거운 형제들의 짐을 아무에게도 말 못하고 홀로 지고 계셨다. 아버지는 1987년 어머니와 내가 살고 있는 신림동으로 올라오셨다. 관악산 앞에서 낮에는 부채와 뻥튀기를 팔았다. 밤에는 동네 골목에서 붕어빵을 만들었다. 내가 대학기독인회(ESF) 형제들과 모임을 마치고 집에 갈 때면 형제들을 불러 항상 뻥튀기 과자를 그들에게 주시곤 했다. 관악구청에서 노점상 단속을 할 때면 아버지는 물건과 리어카를 빼앗기고 돌아오시곤 했다.
예전 아버지의 모습이 아니었다. 가족의 생사가 걸린 리어카를 용케도 잘 찾아오셨다. 나는 그런 아버지가 얼마나 측은하고 안타까웠는지 모른다. 평생을 맨몸으로 자식들 뒷바라지하려 땅을 파고, 막노동을 하며 하루도 편히 쉬지 못하셨을 나의 아버지…. 대학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안 후부터 나는 부모님의 구원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했다.
아버지는 결국 세월을 이지기 못하고 2006년 10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셨다. 임종하시기까지 두 달간 대전의 누나와 나는 열성을 다해 아버지의 구원을 위해 눈물을 흘렸다. “니 엄마한테 정말로 미안하구먼.” 마침내 아버지도 영적인 눈을 뜨셨다. 이 세상에서 마지막 날 요양원에 있는 어머니에게 용서를 구한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을 영접하고 편안한 미소를 남기셨다. 20여 년간 아버지를 위해 기도했던 응답을 이렇게 극적으로 들어주셨다.
오랜만에 돌아온 관악캠퍼스는 평화로워보였다. 하지만 후배들은 여전히 좌충우돌했다. 그들은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는 미래와 이룬 것이 없는 현재 사이에서 헤매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어둠 속에서 방황하고 있던 대학 1학년 때 대학기독인회(ESF)를 통해 나에게 생명의 빛으로 다가오신 하나님은 80년대에나 2000년도에도 쉼 없이 역사하시고 계셨다.
나는 후배들에게 자신이 하는 학문이 전부가 아님을 깨닫기를 당부했다. 나는 그들의 방향성 없는 삶을 우주의 핵심인 창조주에게 돌릴 수 있도록 무던히 애썼다. 또한 상대적이며 가변적인 하루살이 학설이 아니라 동일한 은혜와 힘으로 지식인의 삶에 중심을 잡고 시공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진정한 지성인으로 거듭나기를 기원했다.
***[역경의 열매] 김인강 (20) 수많은 냉대·차별·가난·질병에도 신세 한탄·원망안해
나는 자라면서 수없이 많은 냉대와 차별, 가난과 질병에 시달렸다. 내 발로 걸을 수 없었기에 목발을 짚었다. 단순한 나무 막대가 아니라 기적의 다리였다.
약자였기에 작은 것에 만족했다. 신세를 한탄하거나 누구를 원망하지도 않았다. 또한 내가 가진 만큼 사람들을 섬기며, 하나님 앞에 똑바로 서는 연습을 했다.
우리 사회는 아직도 체면과 간판을 중요시 한다. 학위는 미래를 보장하고, 우리의 사회적 신분을 상승시키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나는 이러한 세속적인 시각으로부터 기독교인은 자유로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감당하기 힘든 고통을 주시지 않는다. 분에 넘치는 복이나, 능력에 넘치는 자리를 주시지도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해로울 뿐 아니라, 주위 사람에게도 덕이 되지 않는다. 종국에는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한다. 그분은 우리가 그 복을 감당할 인격과 환경을 갖췄을 때, 선물 보따리를 전하신다.
2006년 아버지는 돌아가셨지만 이듬해 우리 부부에게는 천금보다 귀한 희망의 씨앗인 딸 하린이가 태어났다. 연말에는 분에 넘치는 젊은 과학자상을 받았다, 하나님은 나에게 내가 하는 학문에서도 그를 의지하며 자고하지 않도록 이 상을 주신 것 같다.
나는 이 상을 계기로 내가 하는 학문에 더욱 충실히 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세계적인 학자들과 교류하다 보면 나의 학문기초가 얼마나 얇고 튼튼하지 못한가를 느낄 때가 많았다. 하나님은 이러한 나의 고민을 아시고 연구에만 몰두할 수 있는 고등과학원으로 인도하셨다.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나의 죽기 전에 주시옵소서. 곧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잠 30:7∼9)
고등과학원으로 옮기면서 자주 묵상하는 말씀이다. 주를 부인하지 않으며 믿음을 지켰던 솔로몬의 지혜에서 나는 항상 큰 가르침을 받는다. 그렇다. 크리스천 리더들은 매일매일의 삶을 경건하게, 주 앞에서 살며, 바울이 그랬듯이 로마의 셋방에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살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크리스천 지도자들은 먼저 실력을 쌓고, 아름다운 꿈을 가진 전도자가 돼야 한다.
학문을 할 때 우리를 쓰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해야 하며, 학문을 이기적인 목적이 아닌 선한 도구로 사용해야 한다. 직업은 평생을 살며 바꿀 수도 있고, 새롭게 찾을 수도 있지만, 나의 나됨은 쉽게 바꿀 수도 없고, 얻어지는 것도 아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그의 이름을 물었을 때 하나님은 그의 이름은 너무도 완벽하여 아무의 증거도 필요 없고, 영원하시며, 너무나 아름다우신 ‘존재’ 그 자체라고 하셨다.
우리는 누구인가? 항상 죄인으로 머물러 있는 그런 소극적인 크리스천이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우리의 소명은 ‘예수님 같이 되기’에서 찾아야 한다. 고난 속에 소망하고, 결핍 속에서도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셨던, 무한한 사랑을 그 가슴속에 간직하고 죽는 날까지 겸손했던 그분을 본받고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소명이 아닐까?
***[역경의 열매] 김인강 (21) 경쟁이라는 세속주의 휘말린 학교·학생들 안타까워
“물리학을 너무 사랑했는데 잘하지 못해 힘들다. 큰 논문을 발표해야 하는데 가족과 학생들에게 미안하다.”
그가 세상을 떠났다니…. 올해 초, 잘 알려진 과학자 한 분이 짧은 유언을 남기고 스스로 삶을 정리했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았다. 연구 실적 부담이 얼마나 컸으면 사랑하는 가족과 선후배들과 안녕을 고했을까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졌다. 그는 한국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물리학부문 상을 받은 유명한 교수였다. 우리나라 초전도체 연구를 세계 수준으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을 만큼 물리학계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올해로 교수가 된 지 13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이제야 교수사회의 명암을 조금이나마 알 것 같다. 대학은 교수들의 연구 실적을 끌어올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그에 따라 승진 및 정년보장 등에 많은 제약을 가하고 미달되는 교수들에게 불이익과 심지어 해고하는 일까지 발생하고 있다. 교수들은 교육과 연구, 행정 이 3가지 일로부터 심한 압박을 받고 있다.
대부분의 젊은 교수들은 승진하기 위해 밤늦게까지 공부하고 자신들의 창조성에 과부하를 걸고 있다. 모든 것이 경쟁 상태에 놓인 우리의 현실. 누군가 나보다 앞서면 나는 불이익을 당해야 한다는 경쟁 논리 속에서 우리는 모두 초조해하며 우리의 한계를 넘는 투쟁 속에 살고 있다.
모든 사람이 다 일류교육을 받을 필요는 없다. 이 사회 분위기는 비명문대 출신을 ‘루저’라 보는데 문제가 있다. 누구나 자신의 능력과 적성에 맡는 직업과 직장을 가지고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다. 그런데 학교 현실은 학교에서부터 앞서 가지 않으면 뒤처진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이 모든 것의 배후에는 육신의 안목을 도모하는 악마적인 세속주의가 있다. 그래서 많은 학생들이 서울대에 입학하지만 학업을 따라가지 못하거나 분명한 목적의식이 없이 4년의 대학생활을 방황하며 시간을 허비한다. 또한 학생들은 취직 준비와 대기업 입사시험 준비로 전공공부를 제대로 못하고 간신히 졸업한다.
상당수 교수들의 관심은 논문과 업적, 승진 및 연구비 수령 등에 맞춰져 있다. 그들의 대화 속에는 학문이라는 이름으로 세속적인 기준이 드러나기도 한다. 이러한 대학의 경향에 자성의 목소리도 많다. 하지만 비판의 목소리가 대학을 향했을 때 대학은 자신들의 논리를 이용해 이를 덮어버린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에게 이러한 사회의 풍토와 구조 속에 휘말리지 않고 그것들의 불합리한 제약과 제도적 한계를 초월하게 하셨다. 생존의 수렁에서 초연하게 하셔서 내가 누릴 수 있는 영역과 자유함을 확보하게 하셨다.
나는 10분 이상 길게 기도하지 않는다. 하지만 기도 없이 무의미하게 10분 이상도 보내지 않는다. 내 삶의 모든 부분에서, 내 인생의 어느 때에서도, 그분과 연합된 인생이 되기를 희망한다.
사람들은 남과 비교하기를 좋아한다. 믿음조차도 타인과 비교해 쌓아가려는 습성이 강하다. 일부는 남의 시선에 이끌려 자신을 단장하기도 한다. 우리는 이러한 구태에 빠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나태해지려는 신앙에 채찍을 가해야 한다.
그리하여 거룩함에 부르심 받은 자로, 선택된 백성과, 충성스런 제사장으로 거듭나야 한다. 나는 거룩한 나라의 백성으로, 구원받은 민족으로 언제 어디서든지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사람으로 살기를 원한다.
***[역경의 열매] 김인강 (22) 힘들던 학창시절 ‘골목길…’ 詩 암송하며 마음 추슬러
“골목길이 끝나고/도로가 아직 시작되지 않은 그곳에/풀들이 자라는 곳이 있다/그곳에는 태양이 밝은 진홍색으로 빛나고/그곳에는 달새가 날개를 쉬면서/박하향 나는 바람에 머리를 식히고 있다/
우리 이곳을 떠나자/검은색 연기가 불어오는 곳/검은색 도로만이 이리저리 뻗어있는 곳/아스팔트 외엔 더 이상 아무것도 자랄 수 없는 웅덩이들을 지나/우리 아주 천천히 신중한 걸음걸이로/흰색 화살표를 따라가 보자/골목길이 끝나는 그곳으로/그래 우리 아주 천천히 신중한 걸음걸이로/흰색 화살표를 따라가는 거야/아이들을 위해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그 화살표를/그리고 아이들은 알고 있지/골목길이 끝나는 곳에 있는 그 장소를.”(골목길이 끝나는 곳 중에서)
학창시절에 읽은 셸 실버스타인의 시집 ‘골목길이 끝나는 곳’을 아직도 좋아한다. 그땐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 잘 몰랐지만 가슴을 뜨겁게 했던 작품이다.
골목길이 끝나는 곳은 늘 팽팽한 긴장감이 흐른다. 어린시절 놀았던 장소는 놀이터가 아니었다. 골목길에서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다니며 이야기꽃을 피우기도 하고, 장난을 치기도 했다. 그 골목길이 끝나는 곳은 막다른 골목이거나, 혹은 큰길이 시작되는 곳이었다. 언제나 멈춰 서서 전후좌우를 살펴야 했다. 왜 그는 우리를 골목길이 끝나는 곳으로 불렀을까? 그리고 골목길을 노래하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금 나는 서울 행운동에 있는 예수마을교회에 다닌다. 청년사역에 헌신하고 있는 이승장 목사님이 인도하는 이 교회의 청년부 집사로, 순장(셀장)으로 섬긴다.
서울대에서 고등과학원으로 자리를 옮기고 집도 청량리로 이사했지만 예배는 예수마을교회에서 드린다. 이 교회는 올해로 창립한 지 12년이 된 조그마한 교회다. 대학생과 신림동 고시촌 학생들이 많아 지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때문에 좀 더 열려 있고 누구나 와서 편히 예배드릴 수 있는 공동체로 거듭나기 위해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다. 예전처럼 기독대학인회(ESF) 활동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 좀 아쉽다. 하지만 고등과학원에서도 성경공부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내 연구실 앞에는 중키의 나무들이 많다. 엊그제 파란 새싹의 봄빛이 완연하더니 어느새 신록이 무르익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빨간 진달래와 하얀 목련, 노란 개나리로 캠퍼스는 온통 봄꽃의 축제였다. 그사이를 오가는 이름모를 학생들. 나는 자주 캠퍼스를 홀로 거닌다. 공부하다 지치면, 생각하다 지치면 무작정 걷는다.
인생의 골목길마다 오고가는 학생들이 좀 더 나은 인생과 진리의 길로 인도되기를 나는 속으로 기도한다. 나는 지금 학자로, 아버지로, 남편으로, 투병 중인 노모의 아들로, 6남매의 막내로 해야 할 일이 많다. 하지만 무엇보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감당해야 할 일이 많다. 바쁘다는 핑계로 내 속사람이 시들지 않도록, 매 순간이 내 인생의 전부인 양 살아가기가 쉽지 않다.
나는 지금도 어디에서 살든지, 그가 노래하듯 그곳이 순수가 거하는 곳, 참 쉼이 있는 곳, 모든 것이 항상 새롭고, 신기하고, 즐거운 곳이 되기를, 새 하늘과 새 땅이 되기를 기도한다.
나는 언제, 어디서나 청년들에게 다니엘처럼 심지가 곧은 그리스도인이 될 것을 주문한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하나 되는 공동체가 되도록 간구한다.
***[역경의 열매] 김인강 (23) 죽는 날까지 겸손하셨던 그 분 본받는 것, 그것이 소망
“이에 총리들과 방백들이 국사에 대하여 다니엘을 고발할 근거를 찾고자 하였으나 아무 근거, 아무 허물도 찾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가 충성되어 아무 그릇됨도 없고 아무 허물도 없음이었더라 그들이 이르되 이 다니엘은 그 하나님의 율법에서 근거를 찾지 못하면 그를 고발할 수 없으리라 하고”(단 6:4∼5).
내 일생의 가이드가 된 말씀이다. 경쟁 사회에 살다보면 우리는 참 단순해진다. 우리의 온 관심이 나의 공부, 직장, 성공 등 지극히 모든 사람이 추구하는 것을 동일하게 추구하며 살아간다. 우리는 기도를 이런 것을 추구하는 하나의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기도는 본질적으로 주님과 교제하며 그분의 이미지 안에 우리의 이미지가 동화되어가는 과정이어야 한다. 질병을 고치고, 많은 능력이 있는 분들 중에도, 주님의 이미지와는 너무나 다른 성품을 지닌 분들도 있다.
본문을 보면 다니엘은 아무 그릇함도 없고 허물도 없다. 그에게서 찾을 수 있는 유일한 고소거리는 하나님께 경건함 밖에는 없었다. 그는 목숨을 걸고 하루 3번 기도했다. 다니엘은 모든 면에서 틈을 찾을 수 없는 예수를 닮은 자였다. 총리 직에서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서도, 그는 오랫동안 쌓인 경건의 습관대로 기도하고 그의 일상을 매일 거룩함으로 승화시켜 내는 그런 사람이었다.
세상은 우리를 고소할 거리를 찾지만,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에 붙어 있음으로 빈틈을, 헛됨을, 게으름을 발견할 수 없다. 우리에게 찾을 수 있는 유일한 허물거리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뿐이다. 이는 얼마나 영광된 죄목인가.
그러나 다니엘은 세상과 타협하지 않았다. 그는 절대자 이외는 어느 상대자도 섬기지 않았다. 세상이 단 30일만 하나님과의 교제를 쉬라고 요구했을 때 그는 거절하였다.
만약 우리에게 단 3일만, 단 3시간만, 아니 단 3분만 하나님과의 연합을 끊으라하면 우리는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드디어 그에게는 자연의 힘으로는 감당하지 못할 세상의 심판이 찾아 왔다. 마침내 사자 굴에 던져졌다. 성경에 사자를 이긴 자는 삼손과 다윗 외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인간으로서의 힘이 도저히 세상을 이기지 못할 상황에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힘이 개입하셨다. 그는 얼마나 기도 했을까. 그런 긴박한 상황에 그는 어떤 기도를 올렸을까. 그는 젊었을 때부터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스스로 채식을 선택한 젊은이였다.
그러한 그의 경건의 능력은 그의 평생을 지켜 주었다. 그의 경건함은 세상을 이겼다. 하나님은 사자의 입을 막으셨다.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힘은 자연인이지만 인내를 가지고 그의 자연적인 삶을 충실히 살아내는 그런 자에게 임하여 그를 보호하신다.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기적이 우리의 삶에 임하려면, 일상의 지루함과 평범함을 매일의 경건과 인내로 승화시키는 긴 자기부인과 연습이 필요하다.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항상 죄인으로 머물러 있는 그런 소극적인 크리스천이어야 하는가. 거룩함에 부르심을 받은 우리는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기 위하여 우리를 늘 쳐서 복종시켜야 하는 그런 사람들이다. 우리의 소명은 예수님 같이 되기에서 찾아야 한다.
예수님은 가난하셨지만 가장 부요하셨다. 죽음을 직면하는 고통의 연속 속에서도 평안을 지니셨다. 고난 속에 소망하고, 결핍 속에서도 무한의 사랑을 그 가슴속에 간직하셨다. 죽기까지 겸손했던 그분을 본받는 것이 나의 소명이다.
***[역경의 열매] 김인강 (24·끝) 어떤 고통에서도 그 분을 믿는다면 결국 성공한 인생
내 인생이 어쩌면 단순한 회색빛 같을 지라도, 내가 선택한 길이요, 내가 좋아하는 좁은 길이기에, 내게는 화려한 색채를 띤 창조의 길이다. 그 길은 사랑의 길이요, 소망의 길이며, 가장 아름다운 길이다.
나는 매일 거의 똑같은 봉천동 길을 다녔다. 지금은 홍릉의 연구소 길을 매일 걷는다. 집과 학교까지의 거리는 5분 이내. 그러나 내가 거닐었던 파리의 골목길보다, 스위스의 어느 작은 마을 길보다, 부다페스트의 도시와 강이 내려다보이는 산길보다 나는 이 길을 더 사랑한다.
매일 같은 길을 오가지만 내일은 더 의미 있는 일로 채워지고, 다른 사람을 만나고 또 다른 대화를 할 것이다. 그러기에 나는 오늘도 세상에서 가장 작은 형제로, 그러나 가장 강한 성령의 의지로 이 자리에 서 있다.
미래에 어느 곳에 있을지 나는 알지 못한다. 이곳에 머물러 있을지, 다른 곳으로 갈지, 한국에 있을지 외국에 있을지. 다만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이 시대와 나에게 주어진 삶을 거룩하게 살아갈 것이다. 예수님이 그리하셨듯이 내가 처한 사회에서 사람들을 위로하며 복음의 능력을 그들의 삶 속에 전할 생각이다.
루이스(C S Lewis)가 그의 책에서 현재는 영원의 접점이라 했던 것처럼, 나도 영원의 접점인 현재에 항상 충실할 것이다. 나는 어떤 작곡가의 행동을 항상 기억하며 살려고 한다. 그는 곡을 쓸 때 마음에 안 들어도 결코 중간에 그 곡을 버리지 않았다고 한다. 일단 곡이 완성된 후에야 곡을 버릴지 발표할지 결정했다고 한다.
나도 나의 인생이 완성될 때까지는 나의 인생이 어떤 작품이 될지 모른다. 하지만 내가 충분히 땀을 흘렸으면 나는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비록 초라할지라도 하나님은 나의 겸손히 노력한 삶을 명품이라 칭찬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아브라함의 나그네 인생을 항상 생각한다. 그가 때로는 비겁하고 소망의 닻을 내리고 싶었을 때마다 하나님은 하늘의 별을 보여주셨다. 바닷가의 모래를 세게 하며 약속을 상기시켜 주고 사그라진 믿음의 불씨를 다시 활활 타오르게 하셨다. 그는 한때 생명을 부지하려 자신의 아내를 누이라 하였던 적도 있다. 그 연약하였던 아브람이 100살에 얻은 자기의 생명보다 귀한 이삭을 하나님의 전에 바쳤던 믿음의 조상으로 거듭났다.
그는 25년을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가나안에서 애급으로, 애급에서 가나안으로 장막을 수십 번 이동한 나그네였다. 그는 나그네였기에 땅에 집착하지 않고 자신의 기득권에 집착하지 않고 하나님이 가라 하면 장막을 거두어 떠났다.
약속한 땅을 향해 그는 영원하신 기업이 가나안땅도 아니요, 자신의 대를 이을 이삭도 아닌 여호와 그분 자체이심을 깨달아 갔을 것이다. 그랬기에 그는 이삭을 하나님께 올려드릴 수 있었을 것이다. 사실 하나님 아니었으면 얻지 못했을 아이였다.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주어졌기에 그는 이삭을 자신의 것이라 할 수 없음을 너무나 잘 알았다.
우리가 나그네 인생을 살며 궁극적으로 배워가는 것이 우리의 영원한 기업이 여호와라는 사실이다. 나는 지금 경기도 의왕 요양원에 계시는 어머니가 병상에서 마지막으로 부르는 찬송구절 ‘나의 영원하신 기업’을 내 영혼에 새기며 기도하고 있다.
연재를 끝까지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고통과 절망 속에 있더라도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시길 바란다. 처절한 인생의 바닥에 있더라도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팔을 놓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국 성공한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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