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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1년 (1세)
2월 26일, 함경북도 경원군 안농면 금희동에서 출생. 본명은 서기학(徐夔学)이고 초명은 서정학(徐正学), 호는 백포(白圃), 당호(堂号)는 삼혜당(三兮堂), 본관은 이천(利川)이다.
소년시절
어린 시절에 고향의 서당 김노규 스승의 문하에서 여러 해 한학(漢學)을 배우며 지식과 민족적 의식을 키우다가 경성함일사범학교 전신인 "유지의숙"에 입학했다. 유지의숙은 함경북도 근대화운동의 선구자 이운협 선생이 창설한 의숙으로 몇 해 후에 경성함일사범학교로 개칭되었다.
1902년 (22세)
1902년에 경성함일사범학교의 전신인 유지의숙을 졸업하고 이해 봄부터 1911년 봄까지 10년간 고향에서 계몽운동가 교육사업에 종사하다.
1910년 (30세)
1910년 8월 22일 일본은 이완용 따위들과 조선강점의 조약—"한일 합방" 조약을 맺고 8월 29일에 반포하니 허수아비 뿐이던 나라는 완전히 망하고 말았다. 분노한 서일은 고향에서의 근 10년 계몽교육을 접고 행동으로 반일독립운동에 나서기로 결의한다.
1911년 (31세)
1911년 봄에 서일은 반일독립을 결의하고 일가족들인 부친 서재운, 부인 채씨, 맏딸 서××(출가후 병고로 이름조차 알 수 없음, 당시 10세), 둘째딸 서죽청(6세), 아들 서윤제(4세) 등 다섯과 함께 두만강을 건너 두만강이북 왕청현 덕원리에 삶의 터전을 마련했다.
왕청현 덕원리는 천교령 부근에 발원지를 둔 가야하와 십리평, 소왕청쪽에서 흘러 나오는 대왕청하와 합수되는 부근 동북쪽 산기슭, 지금의 왕청역에서 북으로 약 7-8리 되는 곳에 자리잡은아담한 조선이주민 마을이다. 관련 자료연구에 따르면 덕원리는 19세기 말에 이르러 개척됨을 보인다.
1911년 이해 3월, 서일은 재기를 도모하는 반일의병들과 훗날의 대종교인들이며 동지들인 현천묵, 계화, 백순(白純) 등과 손잡고 항일독립단체인 중광단(重光團, 중광이란 대종교의 중광을 환호하고 단군을 숭상하며 민족의 혼이 의연히 살아 있다는 뜻)을 조직하고 그 본영을 덕원리에 두었다. 서일이 중광단 단장으로 추대되었다.
1909년 음력 정월 15일에 애국자이며 독립운동가인 나철 선생이 동지들과 더불어 서울에서 전래 단군신앙인 단군교를 부활시키고 이듬해 7월 30일에 교명을 대종교(大倧敎)로 바꾸었다. 그리곤 활동지역을 두만강 너머로 넓히고자 1911년 7월에 화룡현 청파호에 이르렀다. 왕청현 덕원리에서 이 소식에 접한 서일은 화룡현 청파호에 가서 나철 선생을 만나 가르침을 받았다. 서일은 스승의 당호 일지당(一之堂)에 따라 자기의 당호를 삼혜당(三兮堂)으로 하였다.
1912년(32세)
1912년 음력 8월, 서일은 수명의 동지와 협의하여 청파호에 동원당을 조직하였다. 나철 선생의 지도를 받은 것으로 보이며, 동원당은 독립운동을 완수하기 위한 체계적 활동을 결정하고 이를 지도하기 위한 비밀조직으로 추정된다. 이해 10월에 서일은 대종교에 정식 입교하며 대종교 포교활동을 맹렬히 벌였다.
1913년(33세)
대종교에 입교한 후 서일은 1913년 10월에 대종교의 영계 및 참교(参教)로 받고 시교사로 임명되었다. 그 후부터 서일은 방향을 돌려 교리를 찬술하는 저술사업에 정력을 쏟았다. 서일은 짧은 기간에 한국 근대 철학의 중요한 토대가 되는 『삼일신고도해강연』, 『회삼경』, 『구변도설』, 『진리도설』, 『오대종지강연』, 『삼문일답』 등을 저술하였다.
서일은 왕청현 덕원리에 이주한 후 중광단을 조직하고, 나철을 만나면서 대종교 포교에 전력하는 한편, 여러 사람들과 힘을 합쳐 1913년 4월 1일에 덕원리에 명동학교를 정식으로 설립하였다. 시초의 학생 수는 32명이고 교원은 2명이며 학제는 5년이었다. 교장은 서일이고 서일도 직접 교수에 나섰다.
1914년 (34세)
1914년 5월 13일, 대종교총본사는 서울에서 대종교 동도본사 1사가 자리잡은 화룡현 청파호로 이전하였다. 나철 선생은 대종교총본사를 화룡현 청파호에 두고 총본사 산하에 동도본사(왕청현), 서도본사(상해), 북도본사(노령 소학령), 남도본사(조선 경성) 등 4개도본사를 설치하고 아울러 각 교구 책임자에, 서일(동도본사), 신규식·이동녕(서도본사), 이상설(북도본사), 강우(남도본사)등을 임명하였다.
1914년 11월, 용정 간도일본총영사관의 명령을 받은 두도(頭道)구 영사 분관에서는 화룡현 지사를 핍박하여 대종교를 즉각 해산하라고 경고했다. 후일 두도구 영사 분관의 일경들이 청파호에 들이닥쳐 대종교 중심인물들을 체포하자, 대종교총본사는 동도본사 제 2사가 자리 잡은 왕청현 십리평 쪽으로 옮겨 갔다.
1915년(35세)
대종교총본사의 화룡현 청파호 이전과 대종교의 비약적 발전은 일제의 경계심을 한층 고조시켰다. 일제는 1915년 10월 종교통제안을 공포하고 대종교를 불법단체로 규정하고 대대적인 박해를 시작했다. 나철 선생은 당국을 찾아 여러 차례 교섭을 벌렸으나 아무런 효과를 얻지 못하였다.
1916년(36세)
나철 선생은 대종교 정상 활동을 이어 갈 수 없었다. 그는 1916년 음력 8월 백연(白淵) 김두봉(金抖奉)을 비롯한 수행자 6명과 함께 단군신앙의 성지인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에 들어가 본격적인 수행을 시작하였다.
이해 음력 8월 15일 자시(子时)정각에 나철 선생은 수행자들과 함께 제천의식을 행하였다. 그리고 수행인원들에게 "앞으로 며칠 간 방문을 열지 말라"고 말하고는 3일 동안의 수도에 들어갔다. 그 뒤 인기척이 없어 제자들이 16일 새벽에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나철 선생은 순명삼조(殉命三條) 등 유서를 남기고 조식(调息)의 의 방법인 폐기법(闭气法)으로 운명하였다.
서일은 스승의 순국 정신을 마음에 아로 새기었다. 그만큼 나철 선생의 순국이 서일한테는 너무도 타격이 컸고 너무도 느끼는 바가 컸다. 스승의 죽음은, 서일이 무장항쟁의 의지를 굳게 다지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1917년 (37세)
1917년 경에 이르러 명동학교에 중학부를 설치하였다. 학교 학생들은 모두가 대종교 들이거나 그 자제들이었다. 그리고 이 학교를 졸업한 대부분의 학생들이 후일 북로군정서 사관연성소에 입소하여 본격적인 독립군 훈련을 받았다.
1918년(38세)
음력 1918년 11월, 민족자결이라는 가치가 국제정세 속에서 고무되자, 이에 힘을 얻은 대종교지도자들을 중심으로 한 39명의 명의로 대한독립선언서(일명 무오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다. 국내 기미독립선언서(3.1독립선언서)의 전주곡이라 할 수 있는 이 선언은, 무장혈전주의를 내세운 것으로, 후일 만주 무장항일운동의 중요한 지침이 되었다. 서일은 이 선언을 적극 지원하면서 많은 동지들을 참여시켰다.
1919년 (39세)
1919년 3월 1일, 서울을 중심으로 하는 한반도에서 전민족적인 반일운동이 폭발하였다. 3월 13일, 용정에서도 "3.13" 반일운동이 폭발하고 독립 만세소리가 화룡현과 연길현, 왕청현, 훈춘현 각지에서 맹렬히 터져 올랐다. 불완전한 통계에 의하면 남만 등 지구를 제외한 연변지구에서 1919년 3월 13일부터 5월 1일까지 도합 30여 개 곳에서 반일집회와 시위가 53차 열리고 8만여 명의 조선인들이 동원되였다. 왕청현에서는 서일의 지도하에 덕원리 중학부의 중학생들을 중심으로 각지 사립학교 학생들과 많은 대종교인들이 만세운동에 떨쳐 나섰는데, 덕원리 중학부의 중학생들은 일제히 칼을 차고 보무당당히 나섰다.
이 무렵 나철 선생의 유언으로 제 2세 교주로 등극한 무원 김교헌이, 서일에게 대종교 교통을 넘기려고 하였다. 서일은 제 2세 교주의 간곡한 권유를 5년간 보류키로 하고 무장투쟁준비에 심신을 쏟아 부었다. 서일은 시위나 만세운동 등의 소극적 저항으로서는 조국광복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이해 1919년 4월에 서일은 중광단의 토대 위에서 대종교 교인들을 핵으로 하고 반일의병들과 공교회(孔教会) 회원들을 더 규합하여 대한정의단을 발족하고 단장으로 취임하였다. 서일은 정의단 내에 순수 우리 글 신문 일민보(一民报)와 신국보(新国报)를 발간하고 무장항쟁을 고취하면서 결사대원을 모집하였는데, 응모하여 등록한 결사대원이 1,037명에 이르렀다.
서일은 이해 8월에 대한정의단 산하에 순 무장조직인 대한군정회를 조직하고 신민회 출신들로서 남만주의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인 김좌진, 조성환, 이장녕, 양림, 박성태 등을 초빙하여 군정회를 맡아 보도록 하였다. 이를 전후하여 대한정의단은 덕원리와 그 일대를 떠나 본영을 왕청현 서대파구 십리평에 두고, 연변 각지에 5개 분단, 70여 지단을 설치하였으며, 단지결사대(断指決死隊) 1,000여명을 두었다.
1919년 4월에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후 서일은 이 임시정부의 지도를 받기로 하고 1919년 12월 국무원 제 205호 정신에 따라 중광단으로부터 발족된 대한정의단과 대한군정회를 통합하여 대한군정부(大韓軍政府)로 개편하였다. 대한군정부는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령에 의해 그 명칭을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로 즉각 개칭하고, 서간도의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 대비하여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라는 별칭으로도 불렸다. 서일은 북로군정서 총재로 추대되는 한편, 대한민국 임시정부로부터 임시정부 최고 군사책임자인 군무총장(軍務總長)이라는 대우를 받게 되었다.
북로군정서는 중앙조직 체계를 총재부와 사령부로 나누었다. 총재부가 주로 대한정의단의 중심인물들로 구성되었다면, 사령부는 주로 신흥무관학교 출신들로 구성되었다. 사령부는 총재부의 절대적 지도를 받았으며 총재부와 사령부의 거의 모든 인물들이 대종교 교도들이었다.
북로군정서는 왕청현 십리평 마을 뒤 잣덕의 펑퍼짐한 산기슭 밭 가운데 자리잡았다. 본부와 병영은 5~6헥타르에 달하는 산허리를 평지로 만들어 건설했는데, 나무를 찍어 만든 중국식 6칸집 5개와 5칸집 2개 등으로 이루어졌다. 본부와 조금 떨어진 남쪽의 광활한 평지에 사방 100미터 좌우의 연병장 두 개도 건설되었다.
1920년(40세)
북로군정서 산하 사관연성소는1920년 3월 1일에 정식으로 개학하였다. 사관연성소 예비훈련반은 북로군정서 본부와 약 300미터 떨어진 남쪽의 조금 경사진 잣덕 평지에 교사 6채를 만들어 자리 잡고, 사관연성소 본부는 동북쪽 계곡을 따라 약 15리 쯤 되는 곳에 자리 잡았다.
사관연성소 소장은 신흥무관학교 출신 김좌진이 맡았다. 그외 박녕희가 학도단장을, 이장녕, 이범석, 김규식, 양림, 김홍국, 최상운 등이 교관을 맡았다. 사관생은 300여명이었으며, 주로 대종교 산하의 청년들과 덕원리 명동중학교의 학생들로 이루어졌다. 나이는 보통 20~40살 사이였다.
한편 서일은 병력 확대, 무기 장만, 정예군사 양성이란 세 가지 과업을 목표로 삼았다. 우선 군정서 산하에 모금대 8개대를 두고 전력을 다하여, 1920년 초에 이르러 20여만 원의 군자금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서일은 재무를 맡은 계화와 함께 전문 병력 확대와 무기구입에 전력을 기울였다. 1920년 6월, 총재 서일은 직접 계화와 함께 무장경비대를 이끌고 무기운반대 200여명을 무장보호하면서, 러시아 연해주에서 많은 무기를 많이 운반하여 왔다.
1920년7월과 9월 사이에도 수차 러시아 연해주를 드나들며 무기를 많이 사들여 사관생들 전부가 무장을 지니게 되었다. 북로군정서는 처음 병력 500여명에, 보총 500자루, 권총 40자루, 기관총 3정으로 나타났으나, 일제 측의 자료에 의하면 1920년 8월 현재로, 북로군정서의 병력은 독립군 약 1,600여명, 군총 1,300자루, 기관총 7정이라고 밝혔다.
1920년 8월 일본군은 정식으로 ‘간도지방불령선인초토계획’을 확정하고 9월에는 출병대기중인 각 부대에 전투태세에 들어갈 것을 명령하였다. 중국 지방당국은 일본의 압력에 연길 주둔 중국 육군의 맹부덕(孟富德)을 본지 토벌장관으로 내세웠다. 육군 제1 보병단장(步兵團長) 맹부덕은 토벌을 앞두고1920년 9월 5일에 산하의 중국군 160여명을 십리평 잣덕에 보내 북로군정서 부총재 현천묵, 사령관 김좌진 등을 만나 독립군부대들이 일본군 세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빨리 퇴각할 것을 간청하였다.
1920년 9월 7일 마지막으로 러시아 연해주 무기구입에서 돌아 온 서일은 바로 부총재 현천묵과 수하 사령관 김좌진 등의 보고를 받고 전략적 변화를 도모하였다. 그리고 9월 9일 오전 10시에 십리평 잣덕의 본부에서 산하 사관연성소 제1회 사관생졸업식을 앞당겨 거행하고 298명을 졸업시켰다.
서일은 북로군정서 지도부와 함께 전문회의를 가지고 북로군정서 부대를 동부와 서부 2개 전선으로 나누기로 결정하였다. 서부전선에 소속된 1,000여명 주력부대는 선발대와 본대로 나누어 총과 탄약 등 군수품을 4대의 소수레에 싣고 9월 17일부터 십리평 잣덕 본부를 떠나 화룡현 삼도구 백두산 삼림으로 이동하기로 하고, 서일은 동부전선에 속하여 직접 북로군정서 기관과 가속 그리고 후방부대를 이끌고 동으로 움직이며 기회를 보아 새 근거지 창설에 전력하기로 하였다.
1920년 9월 17일과 18일에 김좌진은 서일의 명령을 받고 북로군정서 부대를 이끌고 서부전선 서쪽으로 진군하여 10월 12일과 13일에 화룡현 삼도구 일대로 이동하였다.
10월 21일 아침 8시경에 북로군정서 주력부대는 청산리 백운평 직소에서 나남주둔 제19사단 73연대 야스가와(安川)소좌가 인솔한 야마다(山田)연대의 전위부대를 매복 습격하였다. 적들은 별반 반격도 못하고 약 200명이 전사했했다. 야마다연대의 주력부대도 기관총, 산포 등 중무기를 앞세우고 발악적으로 달려들다가 역시 200~300명의 전사자를 내고 패하고 말았다.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은 청산리전역 첫 전투에서 혁혁한 승리를 얻었다. 이것을 백운평 전투라고 한다.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의 6일 간에 김좌진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 부대와 홍범도가 이끄는 연합부대는 선후로 백운평 부근 전투, 천수동 전투, 왈리구(曰日沟)전투, 어랑촌 전투, 고동하 전투 등 대소 10여차의 전투를 치러 일제침략군 1,000여명 섬멸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것이 서부전선의 전투였다. 동부전선은 일본군이 획분한 토벌지대로서 훈춘 동북부와 왕청‧동녕의 서쪽지역을 가리킨다. 일본군은 이 지구에 나남주둔 제19사단 제 38여단의 주력과 시베리아 파견군 제11, 13, 14사단의 부분 병력 도합 1만여 명을 풀었다. 우리 반일무장부대의 병력은 서일이 이끄는 북로군정서 유수(留守)부대와 최진동이 이끄는 군무도독부 부대, 신민단, 의군부 등 800여명이었다. 이들 동부전선의 독립군들은 서일 등의 지휘 하에서 10월 23일의 왕청현 십리평 전투를 서막으로 왕청현 나자구, 노무주하(老母猪河), 장가점, 하마탕, 훈춘현의 삼도구, 우두산(牛头山), 소수분하(小水芬河), 팔가자 등 수차의 전투를 치르며 많은 적들을 소탕하였다.
1920년 10월을 계기로 이 지역 독립군 단체들은 서부전선과 동부전선으로 나뉘어 청산리전투 등을 치르며, 이른바 대토벌에 나선 일본군을 대패시킨 후 여러 갈래로 무사히 밀산현으로 이동하였다. 서일의 북로군정서,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안무의 국민회군과 신민단, 도독부, 의군부, 혈성단, 야단, 대한정의군정사 등 9개 독립군 부대 3,500여명이 밀산현 당벽진에 모여 겨레 항일운동사상 전례가 없는 대단결을 이루었다. 독립군사상 처음으로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하고 서일을 대한독립군단의 총재로 받들었다. 서일이 명실공히 대한민국 독립군의 총수가 된 것이다.
1921년(41세)
대한독립군단은 1921년 1월에 국경을 넘어 노령 자유시로 이동했다. 당시 서일은 보다 큰 승전과 장래를 위해 일부 소부대를 거느리고 이 장정에 오르지 않고 당벽진에 남아 후방기지 건설을 도모하였다. 독립군부대의 둔병제(屯兵制)를 실시하려는 것이 후방기지 건설의 주요한 내용이었다.
1921년 6월 28일 노령 자유시로 간 대한독립군단은 뜻하지 않게 러시아군에 의해 무장해제를 당하고 서로의 무력충돌에서 많은 독립군 사람들이 쓰러지고 체포되었다. 러시아령 자유시사변으로 하여 서일을 총재로 하는 대한독립군단은 치명적 타격을 입고 풍비박산이 났다.
그러던 1921년 8월 26일, 마적들이 서일이 머무르는 마을을 야습하여 살인방화하고 약탈하며 무법천지로 돌아간다. 서일장군의 부하 열두 의사(义士)가 이에 대항하여 분전하다가 중과부적이 되어 마침내 장렬한 최후를 맞는다. 밀산에서 둔병제를 통한 독립군 후방기지를 건설하고저 서일과 함께 남았던 마지막 한 부분의 병력들이 모두 전사한 것이다.
서일의 절망감은 컸다. 러시아 자유시사변, 밀산 당벽진의 참화는 대한민국 독립군 총수로서의 서일의 마음을 더욱 무겁게 했다. 서일로서는 이 모든 것이 자기의 밀어 버릴 수 없는 책임으로 느껴진 것이다. 서일은 그해 1921년 8월 27일 오전, 밀산현 당벽진 마을 뒷산의 산림 속에서 곧게 앉은 모습으로 자결 순국했다. 서일은 그의 스승인 나철 선생이 순교 당시 남긴 다음의 유서 한 구절을 읊조리면서 순국했다.
굿것이 수파람하고 도깨비 뛰노니
하늘, 땅의 정기 빛이 어두우며
배암이 먹고 도야지 뛰어 가니
사람, 겨레의 피고기가 번지르하도다.
날이 저물고 길이 궁한데
인간이 어디메오.
정부에는 서일의 우국 항일의 뜻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3등급)을 추서하였다. 그러나 그의 부하였던 김좌진이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등급)을, 또한 부하의 부하였던 이범석이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을 서훈한 것에 비해 격에 맞지 않는 대우라 아니할 수 없다. 더욱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무총장이며, 대한민국 독립군의 총수에 대한 예우가 너무도 초라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