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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자랑(약 1:9-11)
* 사람이 살아가면서 제일 하고 싶은 것 중 하나가 뭘까? 자기 자랑이다. 특히 현대사회는 ‘자기 PR’ 시대로 불릴 정도로 자기 홍보가 대세인 세상이다. 사실 적절한 자기 홍보는 서로를 알기 위해 필요한 노력과 수고를 줄여준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면이 있다. 그런데 PR이 사실에 기반 하지 않고 지나친 과장에 거짓까지 보태진다면 곤란하다. 올바른 정보 제공이라는 순기능보다 거짓을 유포하는 역기능이 더 강하기 때문이다. (지나치면 일종의 사기)
* 산업사회에서는 수많은 물건들이 유통되기 때문에 소비자 입장에서도 누가 어떤 좋은 물건을 어디에서 판매하는지를 아는 일이 중요하다. 생산/판매자 입장에서는 같은 물건이라도 어떻게 포장해서 알리느냐에 따라, 판매가 두 배 세 배로 확연하게 달라진다고 하니 그 중요성을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정도다. 그런데 간혹 과장 광고로 소비자의 질타를 받는 경우도 심심찮게 일어나곤 한다. (소비자와 생산자, 판매자가 모두 윈윈하는 광고가 필요)
* 그런데 사람이 가장 하기 싫은 것 중 하나가 뭘까? 남이 하는 자랑을 듣는 것이다. '자기 PR’ 시대라 자신의 홍보를 위해 자기 자랑하는 정도가 지나쳐 자식 자랑, 부모 자랑 등이 이어지면 귀를 막고 싶을 지경인 경우가 많다. 우리 또래도 그런데 손주까지 있는 분들은 더 심하다고 한다. 그래서 양로원이나 노인들 모임에서는 자식 자랑, 손주 자랑하면 벌금을 물리는 규칙을 만들기도 한다고 한다.
*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해왔다. 팔불출의 유래는 다 아실 것이다. 열 달을 다 채우지 못하고 여덟 달만에 태어난 아이를 일컫는 팔삭동(八朔童)이라고 하듯이 덜 떨어진 사람이라는 비아냥을 담아 사용하는 말이 팔불출이다. 1. 자기 잘났다고 뽐내는 사람(잘난 척) 2. 마누라 자랑 3. 자식 자랑 4. 선조와 아비 자랑 5. 저보다 잘난 형제 자랑 6. 어느 학교 누구 선후배라는 자랑 7. 제가 태어난 고장 자랑
* 왜 팔불출인데 일곱 가지 밖에 없는가 하면 본래 덜 떨어진 것을 비꼬려고 만든 단어라서 그에 해당하는 행동도 여덟에서 하나 모자란 일곱 가지만 정해졌다고 한다. 사실 따지고 보면 아마 저도 마찬가지겠지만 여러분도 몇 가지는 해당될 것이다. 저는 자식 자랑이 해당된다. 페북에 윤아 그림을 자주 올리다 요즘은 윤아가 협조를 안 해 가끔 올리는데 그럴 때마다 “아빠를 팔불출로 만드는 둘째의 그림”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곤 한다.
* 심하지 않고 사실에 기반하기만 한다면 자기 자랑이나 부인, 자식 자랑 정도는 애교로 봐줄 수 있는 부분이 있다. 그런데 조상이나 부모, 형제, 출신학교 선후배 자랑을 하면서 마치 자기도 그렇게 잘난 것처럼 우쭐대는 사람을 대할 때는 마음이 편하지 않다. 자기 고향 자랑하는 것은 애향심에서 비롯된 것이니 긍정적인 면이 많지만 고향 출신 유명 인사를 거론하며 그런 인물만큼 자기도 잘난 것처럼 우쭐대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 자랑에 대한 유머 중에 이런 것이 있다. 이탈리아인과 유태인이 서로 조상 자랑을 하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인과 유태인이 조상 자랑을 했다. 먼저 이탈리아인이 말했다. “로마 유적지에서 구리와 철판이 나왔소. 그 때부터 전화기를 썼다는 증거 아니겠소.” 그러자 유태인이 질세라 말했다. “예루살렘에서는 아무 것도 안 나왔소.” “그게 무슨 자랑이오?” “우리 조상들은 그 때부터 무선 전화기를 썼다는 거 아닙니까.”
* 문제는 자랑 자체가 아니라 자랑의 내용과 형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올바른 내용을 적절한 방식의 자랑/홍보는 나라는 존재를 상대에게 신속하고 정확하게 알릴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처음 만나는 사람이 지나치게 자신에 대해 떠벌리는 것도 탐탁지 않지만 자신에 대해 아무 정보도 제공하지 않으려 하는 것도 답답하다. 그래서 현명한 사람은 과하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을 만큼 적당하게 자신에 대한 정보를 제공할 줄 안다.
* 성경은 신앙생활에 유익이 없는 것들은 자랑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잠 27:1-2에서는 “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아라. 하루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다”면서 “네가 너를 칭찬하지 말고, 남이 너를 칭찬하게 하여라. 칭찬은 남이 하여 주는 것이지, 자기의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권면한다. 가장 좋은 홍보는 자기 홍보가 아니라 제3자를 통해 전해지는 홍보이다. 요즘 많이 쓰이는 입소문이 그에 해당한다.
* 나중에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야고보는 4장 14-16에서 다음과 같이 권면한다.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안개에 지나지 않습니다. 도리어 여러분은 이렇게 말해야 할 것입니다. "주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 것이고, 또 이런 일이나 저런 일을 할 것이다. 그런데 여러분은 지금 우쭐대면서 자랑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자랑은 다 악한 것입니다.”
* 이처럼 성경의 많은 부분들이 세상의 유한한 것들을 자랑하지 말라고 말한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야고보는 “비천한 신도는 자기의 처지가 높아짐을 자랑스럽게 여기십시오. 부자는 자기의 처지가 낮아짐을 자랑스럽게 여기십시오”라고 권면한다. 개역성경을 보면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찌니”라고 번역되어 있다. 이 구절을 읽으면서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는가?
* 지난 주 본문에서는 “여러분 가운데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이라는 5절의 가정법 표현이 마음에 걸렸는데 오늘은 본문 전체가 쉽게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라 설교 준비하면서 애를 먹었다. 특히 가장 중요한 구절인 비천한 신도 또는 낮은 형제의 높음/높아짐, 그리고 부자 또는 부한 형제의 낮아짐에 대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이 됐기 때문이다. 일단 두 가지 관점에서 이 본문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 첫 번째는 경제적 관점이다. 사도행전에 제시된 초대 교회의 아름다운 공동생활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교회가 제도화되고 규모가 커지면서 퇴색해지고 빈부간의 격차가 드러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바울과 야고보는 교회 안에 존재하던 부자와 가난한 자의 화해를 강조한다. 그런데 바울은 양자가 서로를 사랑으로 배려하지만 위계질서 자체는 문제시하지 않는 방식의 화해(‘사랑의 가부장주의’)를 제시한다.
* 반면 야고보는 ‘수평적 연대’라는 방식을 제시한다. 형편이 다른 두 계층이 수평적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높은 쪽이 낮아지고 낮은 쪽이 높아지는 관계의 역전이 일어나야 한다. 부자들에게는 불편한 일이겠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환영할 만한 제안이다.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에서 평등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사용하는 방식도 이와 유사하다. 문제는 그 과정과 방식이 합의에 의한 것이냐 강제에 의한 것이냐일 것이다.
* 야고보의 ‘수평적 연대’는 강제적인 방식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에 기반하는 자발적인 방식에 의해 이뤄지는 평등이다. 그로 인해 비천한 신도의 처지가 높아진다면 자랑스러운 일이다. 부자 역시 강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예수의 가르침을 따라 자신의 부를 가난한 형제자매와 자발적으로 나눈다면 자기의 처지가 낮아지더라도, 다시 말해 재물이 어느 정도 축나더라도 그 역시 자랑스러울 수 있는 일이다.
* 다음은 신앙적 관점이다. 이는 야고보가 언급하는 ‘비천한 신도/낮은 형제’가 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관점이다. 즉 비천한/낮은이라는 표현은 예수의 말씀처럼 낮아지고 섬기는 사람, 즉 경제적, 사회적 형편에 관계없이 낮은 자리에서 섬기는 사람을 의미하는 말일 수 있다. 이는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질 것이요,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눅 14:11)이라는 예수의 선언에 상응한다.
* 이 말을 부자/부한 형제에 적용하면 자신이 부자라고 여기는 사람은 낮아지게 될 것이고 그 역시 자랑스럽게 여기라는 말이다. 이런 관점으로 해석할 때 주의할 점은 하나님께서 아무 이유 없이 비천한 신도/낮은 형제라는 이유만으로 높이시거나, 아무 이유 없이 부자/부한 형제라는 이유만으로 낮추시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높이거나 낮추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스스로를 그렇게 여긴다는 말이다.
* 결국 스스로 비천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고 스스로 부유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낮아질 것인데, 여기서 그보다 중요한 사실은 그 모든 것이 세상의 법칙과는 다른 하나님 나라의 법칙이다. 서로 입장이 다른 양자가 자랑스럽게 여기라는 이유 역시 그들이 형편에 상관 없이, 그리고 높고 낮다는 기존의 자기 인식과 상관 없이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아간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 사실 자체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 야고보는 이어 “부자는 풀의 꽃과 같이 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해가 떠서 뜨거운 열을 뿜으면,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져서, 그 아름다운 모습이 사라집니다. 이와 같이, 부자도 자기 일에만 파묻혀 있는 동안에 시들어 버립니다”라고 이야기한다. ‘비천한 신도/낮은 형제’에 대해서는 별 언급이 없는 반면 ‘부자/부한 형제’에 대해 이런 구절이 추가된 이유는 아무래도 전자보다 후자를 비판하거나 경계하는 입장이 강했기 때문일 것이다.
* 이는 야고보 당시의 교회가 오순절 성령 체험 이후 시작된 교회의 공동생활과 멀어지는 현실을 반영한다. 바울이 선교 활동을 열심히 할 때만 해도 교회 안의 빈부격차가 그리 크지 않았고 부자들도 그리 많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야고보서에서에는 다른 어떤 서신들보다 부자들에 대한 비판이 많은 걸로 봐서 바울의 활동 시기와 달리 교회 안에 부자들이 상당수 존재했고 그로 인해 부자들의 오만과 부자에 대한 아첨 등이 문제가 됐던 것 같다.
* 야고보서가 기록될 당시에는 4인 가족이 빠득하게 살기 위해 경작해야 하는 소작지가 대략 3천 평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데 5장 4절에 “여러분이 여러분의 밭에서 곡식을 벤 일꾼들에게 주지 않고 가로챈 품삯이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꾼들의 아우성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어갔습니다”라는 책망까지 기록된 것을 보면 교회 안에 토지를 소유하고 소작을 줄 만큼 최소한 수만 평 이상의 땅을 가진 부자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그런 상황에서 야고보는 비천한 신도/낮은 형제의 높음(높아짐)과 부자/부한 형제의 낮아짐을 설파했던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가난보다는 부유함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여기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인데, 그런 부자들이 다수 존재하는 교회에 이런 메시지를 전당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는 마치 강남대형교회에서 부자들의 회개를 외치는 일과도 같은 것이다. 내가 야고보서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이런 거침없는 태도 때문이다.
* 물론 부 자체가 문제는 아닐 수 있다. 정당하고 깨끗한 방법으로 쌓은 부는 얼마든지 하나님의 축복이라 여길 수 있고 자랑할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나 야고보가 비판하는 부자는 일꾼들의 품삯까지 가로채는 비열한 인간들이다. 야고보는 그런 비열한 방법으로 부자가 된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대접받으려 큰소리치는 행태에 대해 거침없는 비판의 화살을 날리고 있는 것이다. 이런 비판은 물질만능주의에 빠져있는 한국 교회가 귀 기울여 들어야 한다.
* 최근 운전기사를 상대로 폭언을 퍼부어 논란을 빚은 종근당 이장한 회장에 대한 보도가 줄을 잇고 있다. 종근당 창업주인 이종근 회장의 어머니는 서대문 영천시장에 새벽마다 콩나물 통을 머리에 이고 나가 팔았는데 시장가는 길에 꼬박꼬박 교회에 들러 새벽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이종근 회장의 부인 역시 유일한 인생목표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면서 자식들을 믿음으로 성장시켜 하나님의 일꾼으로 길러내는 것이었다고 한다.
* 현재 서대문성결교회 장로이기도 한 이장한 회장은 할머니와 어머니의 독실한 신앙에도 불구하고 시장 양아치만도 못한 인성을 고스란히 드러내면서 창업 이래 최대 위기를 자초하고 말았다. 종근당이라는 건실한 기업이 어리석은 회장의 잘못으로 인해 불매운동의 대상이 된 것은 물론 기독교 장로라는 직함까지 거론되고 있으니 딱한 노릇이다. 왜 그런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자란 사람이 그 정도 인격 밖에 갖추지 못했을까 안타까울 뿐이다.
* 야고보서 전반에 걸쳐 부자에 대한 비판이 이어지므로 오늘은 이 정도만 언급하기로 하고 자랑이라는 주제에 대해 몇 가지 말씀을 드린 후 설교를 마무리하겠다. 농구감독 펫 라일리는 위대한 팀들이 순수한 상승과 ‘나’라는 질병의 단계를 반복한다고 지적한다. 순수한 상승(Innocent climb)의 시기는 사심 없이 순진무구하게 하나로 뭉쳐서 서로를 살피면서 공동의 목표를 향해서 협력하는 단계이다. 초대교회의 공동생활은 이런 단계에 해당한다.
* 그런데 어느 조직이나 공동체도 영원히 이런 단계에 머물지 못한다. ‘나’라는 질병(Disease of me)의 단계가 찾아오기 때문이다. ‘나’라는 질병은 조직이나 공동체가 성공을 거두면서 순수한 유대감이 풀리며 구성원 각자가 자신이 갖는 중요성, 자신의 기여도 등을 계산하면서 발생한다. 이 단계에서는 오늘 본문의 부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처럼 우쭐하면서 잔뜩 으스대는 사람과 불만과 좌절을 표출하는 사람이 생겨나게 된다.
* 야고보는 그런 상태에 처한 사람들에게 세상의 방식과 전혀 다른 처방을 제시한다. ‘비천한 신도/낮은 형제’는 불만과 좌절을 표출하기보다 비천하거나 낮은 자리에 있음으로 높아지는 하나님 나라의 법칙을 기억하며 자랑스러워하고, 부자/부한 형제는 우쭐하면서 잔뜩 으스대기보다 스스로 겸손해짐으로 낮음이 존중되는 하나님 나라의 법칙을 기억하며 자랑스러워하라는 것이 그의 처방이었다.
* 언제나 그렇듯 성경의 가르침은 우리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세상의 법칙과 다른 이런 가르침은 대부분 무시당하거나 외면당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교회가 세상의 희망이기보다 근심거리가 되고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려 하지 않는 시대일수록 이런 역설적인 가르침을 따르려는 사람들이 늘어나야 한다고 믿는다. 그렇지 않다면 이 시대에 교회가 존재할 가치나 희망이 사라지게 될 것이다.
* 대부분의 경우 자랑의 대상은 우리가 사랑하는 존재이다. 자신을 자랑하는 사람은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자식을 자랑하는 사람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다. 교회를 자랑하는 사람은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다. 예수를 자랑하는 사람은 예수를 사랑하는 것이다. 무엇을 자랑하는지가 우리의 정체성을 드러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언젠가 사라질 유한한 것을 자랑하기보다 영원무궁할 하나님의 진리, 정의와 사랑의 길을 자랑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