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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소설가협회에서 발간한 "소설로 읽는 진주" <진주, 너여서 아름답다>에 수록된 소설가 문갑연 회원의 단편소설 "신토불이"를 올립니다.
단편소설 신토불이 문갑연
신토불이
마을 회관 앞에 관광버스가 도착했을 때는 출발시간 1시간 전이었다. 벌써 서른 명 가까운 노인 회원들이 회관 주변을 서성이거나 방에다가 에어컨을 켜놓고 TV를 보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운전기사에게 한 노인이 다가가 아직 회장과 총무도 나오지 않았다며 매우 불만스런 어조로 말했다. 기사 아저씨는 일부러 버스가 일찍 왔기 때문에 출발시간까지만 나오시면 된다고 안심을 시켰다. 그러자 한 노인은 사람이 버스를 기다려야지 버스가 사람을 기다리게 하면 되느냐며 발칵 했다. 회장과 총무는 불평하는 소리를 듣고 서둘러 나온 사람처럼 금방 짐을 들고 나타났다. 역시 짐을 든 이장과 여러 명의 장년들이 줄을 이었다. 한참 후 마을 부녀회 회장과 총무가 냉장고에 두었던 생수를 두고 갔다며 잰걸음으로 들고 왔다. 이것을 본 회장이 여자들한테로 가면서 부녀회서 밤새껏 준비하느라 밤잠도 못 잤다고 하자 모두 격려의 박수를 보냈다. 노인 회원들과 이장을 포함한 장년회 임원과 회원들을 태운 관광버스가 시간이 되자 목적지를 향해 출발했다. 진현규는 남이 운전하는 차에서는 멀미를 하기 때문에 앞좌석에 앉았다. 모두 자리를 잡자 장년회 회장이 통로로 나와 마이크를 잡았다. 그는 관광은 물론이고 진주 경상대학교 농대와 우리 천지 마을이 자매결연을 맺는 매우 뜻 깊은 날에, 마을 어르신들을 섬길 수 있게 되어 매우 영광스럽게 생각한다고 했다. 그리고는 이 일을 성사 시킬 수 있었던 것은 현규 선배와 희용 선배의 두터운 우정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강조하면서, 손바닥을 위로 펴서 현규를 가리켰다. 전원은 동의한다는 뜻으로 박수를 쳤다. 현규는 뒤를 향해 상체를 일으켜 목례를 했다. 드디어 노인회장에게 마이크가 옮겨졌다. 노인회장의 인사말이 끝나자 장년회장은 오늘 하루 어르신들의 행복을 책임지실 장년회 총무라며 마이크를 넘겼다. 총무가 인사말을 하고 이어서 말을 시작하려는데, 그 옆에 앉았던 노인 회원이 일어나 장년회 총무의 손에서 마이크를 빼앗으며 오랜만에 얻은 시간을 허비할 수 없다면서 기사에게 노래를 틀어 달라고 요청했다. 즉시 회원들은 기다렸다는 듯 통로로 나와 노래가 나오기도 전에 덩실덩실 춤을 추기 시작했다. 어느덧 버스가 고속도로 요금소로 진입하기 위해 우회전을 하고 있었다. 이때 버스 중간쯤에서 여든을 바라보는 재산이 많아 천석꾼으로 불리는 회원이 앞으로 나오더니 기사에게 차를 세우라고 명령했다. 기사는 미리 알고 있었던지 곧 바로 도로 옆으로 차를 세웠다. 장년회 총무와 회원은 차가 서행을 시작할 때 아침 식사로 준비한 김밥과 생수 그리고 간식이 든 비닐봉지를 하나씩 빠른 동작으로 나눠주기 시작했다. 거기에 빠질 수 없는 건 역시 술이었다. 이미 얼음을 채워서 소주와 맥주를 넣은 아이스박스를 두 개씩이나 올려놓았기 때문에 필요하면 언제든지 대령시 키겠노라고 장년회 총무가 큰소리 쳤다. 그러더니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어 술만은 되도록 진주시에 도착하여 행사를 마친 후에 드시면 감사하겠다며 양해를 구한다는 표시로 머리가 바닥에 닿을 정도로 숙였다. 그러자 너무나 당연한 것을 가지고 자기들을 오줌똥도 가리지 못하는 속물로 취급한다며 여기저기서 볼멘소리를 냈다. 그때 마침 불혹의 나이로 보이는 여자 한 명이 승차를 했다. 한참 시끄럽던 버스 안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버스가 서서히 움직였다. 만석꾼은 돈의 위세를 뽐내듯 젊은 여자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그가 자기자리로 가자 그 옆자리에 앉은 노인은 군소리 없이 자리를 내주는 것이었다. 만석꾼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만발했고 다른 회원들은 부러운 듯 아니면 못마땅한 눈초리로 바라봤다. 만석꾼은 자기 자리에 도착하자 여자를 창 쪽으로 앉히고는 선 자세로 일행을 휘둘러보면서, 자기들은 있어도 없다고 생각해 달라며 당부하는 것이었다. 여자에게 자리를 양보한 만석꾼 옆의 노인은 기사의 말대로 앞으로 가 승강구 옆에 접어두었던 보조석에 앉았다. 기사는 미안한지 ‘특별석이니 그렇게 아십시요.’ 했다. 버스는 요금소를 지나 고속도로를 질주하고 있었다. 여자의 등장으로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를 바꾸어 보려는 지 장년회 총무가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부른다. 기사 역시 한몫 거들 듯 노래를 틀었다. 김밥을 먹던 회원들은 하나둘 다시 통로로 나왔다. 만석꾼은 여자를 아예 무릎위에 앉히고 히히덕거리느라 같은 공간의 사람들마저 안중에도 없는 모양이었다. 돈이면 단가! 우리들을 뭘로 보고! 순간 의분에 찬 현규가 벌떡 일어났다. 그런데 이와 동시에 노래가 뚝 꺼졌다. 현규는 느닷없는 상황으로 어리둥절했다. 그런데 통로에 섰던 회원들이 부리나케 자기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서있는 현규를 향해 누가 소리쳤다. 앉아! 현규는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 앉았지만, 어리둥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알고 보니 기사는 한참 앞에 단속경찰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신호로 노래를 껐으며, 회원들은 기사의 이런 행동에서 즉각적으로 정황을 눈치 채고 자리로 돌아갔던 것이다. 현규는 일반 관광을 할 때는 놀 줄 몰라서도 동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사실을 몰랐다. 하지만 이번만은 현규가 앞장서야 할 일이라서 사양할 여가도 없었다. 거의 모두는 이미 젊을 때부터 노는데 이골이 나있어서 조용히 가지 못할 거라고는 생각했다.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아무리 노는 게 좋지만 생명이 위험에 처하는 일을 자처한다는 건 자살행위나 진배없다. 특히 관광버스의 경우 시끄럽고 산만하면 기사 본인의 생명은 고사하고 45명의 정원을 다 채운 버슨데 그들의 생명까지 자기 손에 달려있지 않은가. 그런데도 고객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어떤 위험도 무릅쓰고 관광객의 비위를 맞추다니, 운행 중에 버스 안에서 서있는 자체마저 법에 저촉되는 것이지만 이것도 다 승객의 안전을 위해서가 아닌가. 운전자도 주의가 산만하면 운전능력이 떨어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좌석에 앉아서도 안전벨트를 매지 않을 경우 착용했을 때에 비해 사고 위험이 높다는데, 몸까지 흔들면서 앞으로 뒤로 다닌다는 건 대형 참사를 불러올 위험성이 몇 배나 높을 것이다. 그래서 안전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서라도 교통위반 시에는 과태료까지 부과할 텐데, 안전벨트가 바로 우리들의 생명 띠라고 하지 않던가. 하지만 한 사람의 힘으로 우리의 관광문화를 바꿀 수 없을 터, 현규로서도 분위기에 따를 수 밖에 없다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현규가 어릴 때 마을에는 또래 남자만 해도 수십 명은 족히 되었다. 하지만 그 많은 또래들 중에 유난히 희용과 현규는 붙어 다녔다. 현규는 마산에서 살다가 시골로 이사를 왔다. 자녀들을 공부시키려면 고향에서는 불가능하다며 어머니가 우겨 시골을 떠났던 것이다. 그때만 해도 시내 근교에 노는 땅이 많았다. 어머니는 그 노는 남의 땅을 빌려서 여러 가지 채소를 열심히 심어 많은 돈을 벌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일을 너무 많이하여 골병으로 돌아가시자 아버지는 타향에서 버틸 여력이 없었던지 즉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현규도 시내서 학교를 다니다가 4학년 때 시골초등학교로 전학을 왔다. 그때 희용은 현규 보다 1년 낮은 학년이었지만 쉽게 친해졌다. 현규는 중학교를 자퇴하고 희용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진학을 못하자, 둘은 하릴없이 나날을 보내면서 고작 한다는 게 지게를 지고 여름에는 풀을 베어서 가축을 주거나 거름을 만들고, 겨울에는 뗄감을 하러 산으로 다녔다. 어느 해, 가을걷이가 거의 끝난 무렵이었다. 마을에 가설극장이 들어와 영화를 상영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장소는 이웃 마을 5일 장터였다. 그들이 도착했을 때는 영화 상영시간이 무려 1시간이나 남아있었다. 하지만 가설극장에 앉아 기다리기에는 좀 차가운 날씨라 현규와 희용은 운동 삼아 마을을 한 바퀴 돌기로 했다. 면 출장소를 지날 때였다. 뒤쪽에 교실처럼 생긴 작은 건물에서 불빛이 세어 나오고 있었다. 마침 그 날이 수요일이라 예배를 위해 모였던 것이다. 둘은 출입문을 조금 열어 현규는 쪼그리고 희용은 서서 안을 들여다 보고 있는데, 마침 뒤에서 누가 등을 툭 쳤다. 희용의 같은 학년이었던 고등학생인 이민재였다. 둘은 민재에게 끌려들어갔다. 약 삼십 명 되는 교인들 중에 여자 청년들이 제일 많았다. 예배를 마치자 그들은 다 현규와 희용에게 몰려와서는 꼭 잘 아는 사이처럼 친절하게 대했다. 그날 현규도 희용도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으로 무척 설렜다. 그들은 그날부터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다. 민재의 말마따나 현규와 희용을 하나님이 교회로 인도했다던 말이 사실인지, 그들은 그날 밤을 새하얗게 지새면서 교회서 불렀던 찬송가를 찾느라 시간을 보냈지만 즐겁기 그지없었다. 민재가 준 낡은 찬송가 첫 페이지부터 시작하여 마지막 장까지 넘기기를 2번이나 해도 찾지 못하자, 3번째는 아예 한 글자도 빠트리지 않고 확인해 가다가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결국 그 찬송가를 찾았을 때는 천하를 다 얻은 거나 진배없었다. 곡을 확실히 모르면서도 부르고 또 불렀다. 그러다 보니 가사를 완전히 외워버렸다. 둘의 삶이 그 날 이후로 바뀌었다. 물론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는 교회에 출석하는 것 외는 달라진 게 없었다. 하지만 그들의 내면은 온통 의욕으로 넘쳤다. 허기진 배를 채우려는 본능 외 희망도 없던 그들에게 미래가 보이기 시작했다. 하나님이라는 거대한 존재가 나에게 든든한 백이라는 사실이 조금씩 믿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기도가 되었다. 드디어 현규는 가난한 농촌을 부유하게 하는데 젊음을 바치겠다고, 그리고 희용은 교수가 꿈이었다. 그것도 농대교수였다. 아무리 농사를 지어도 과학 영농이 아니면 지금의 가난한 농촌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게 희용의 판단이었다. 중학교도 겨우 졸업한 처지에, 농촌이 부강해지려면 과학 영농을 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배우고 연구해야 한다던 희용이가 지금은 그의 말대로 어엿한 농대교수에 박사는 물론 농대학장에 총장까지 되리라고 누가 감히 상상이나 했겠는가. 회원들은 자리에 앉더니 먹는데 열중했다. 그러다가 휴게소에 버스를 세우자 모두가 화장실에 가거나 커피를 사 마셨다. 현규는 노인회장과 총무 그리고 장년회장과 총무를 만나서 만석꾼의 행동은 우리 전체를 욕되게 하는 일이니 묵인할 수 없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처음에는 서로 다른 주장으로 옥신각신했지만 결국 여자를 하차시키기로 결정을 했다. 하지만 만석꾼에게 이 사실을 알리자 그는 정색을 하며 거부했다. 그는 사전에 기사에게 양해를 구했으며 또 다른 이유는 시간에 관계없이 하루 일당으로 거금을 지불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모두 한 목소리로 설득하자 결국 단체행동을 무시하고 개별적으로 행동한데 대해 사과했다. 여자는 휴게소에서 일당을 받고 돌아갔다. 기사가 다시 노래를 켰다. 벌써 노인들은 통로로 나와 어깨를 우쭐거리거나 두 팔을 나비날개처럼 벌려서는 무릎을 굽혔다 폈다를 거듭했다. 한 명은 언제 준비했는지 등과 옷 사이에다가 뭘 잔뜩 집어넣어 불룩하게 세운 채 곱사춤을 췄다. 장년회 총무는 소주 대신 음료수를 권했다. 그 뒤로 다른 회원은 안주라며 바나나와 방울토마토를 들고 따라다녔다. 회원들의 동작도 점점 더 활발해졌다. 현규도 권하는 음료수를 한 잔 마셨다. 하지만 분위기를 위해 같이 놀지 못하자 미안한 김에 흥이라도 북돋아주어야 될 같아서 큰 소리로 칭찬을 했다. 술을 마시지 않아도 흥이 나는 우리 마을 사람들의 실력은 수준급이라고. 그런데 편하게 앉아서만 가려던 현규의 기대가 금방 무너지고 말았다. 막 김밥 하나를 더 입으로 가져가고 있을 때 한 노인 회원이 다가와 무조건 현규의 팔을 잡아 통로로 끌어냈다. 단체 생활에서는 거기에 맞는 분위기를 살리지 않는 사람은 무조건 하차시킨다며 겁까지 줬다. 현규는 억지로 통로로 끌려나오다가 이렇게 놀고 나면 몸살 한다며 당면한 위기를 모면해 보려고 했지만 허사였다. 몰라서 하는 소리라며 핀잔부터 했다. 이렇게 한 번씩 몸을 풀어줘야 스트레스도 풀리고 농사일도 더 잘 할 수 있다면서, 우리 농군들이 씩씩하게 농사를 잘 지어야 높은 사람들도 먹여 살릴 게 아니냐며 더 열정적으로 춤을 춘다. 그러다가 갑자기 동작과 말을 끊고 현규 얼굴 가까이로 와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자네는 무슨 재미로 사는지 모르겠다며 두 손을 마주 잡더니 춤사위를 시작했다. 그러나 현규의 팔이 뻣뻣하자, 재미없는 사람이라며 곧바로 다른 어르신들과 어울렸다. 현규는 다행히 위기에서 벗어나자 숨을 내쉬면서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시켰다. “잘 노는 분들을 위해서는 구경하는 사람도 필요해요. 사실 돈 주고 하는 구경보다 훨씬 더 재미있는데요? 그리고 아무리 잘 놀아도 구경하는 사람이 없으면 가치가 없잖습니까. 원래 구경꾼이 있어야 흥도 더 나는 법이기도 하고, 사실이지 요즘은 돈 주는 구경이라도 별 게 있어야지. 우리 마을 분들 노는 것만큼 더 좋은 구경꺼리는 본 적이 없습니다.” 그때까지 몸살기가 좀 있다며 운전석 바로 뒷좌석 창 쪽으로 앉았던 마을 이장이 현규의 말을 듣다가 갑자기 손뼉을 치면서 한쪽 다리를 훌쩍 들면서 일어서더니 ‘얼씨구 잘도 논다!’ 했다. 이것을 보던 장년회장이 활짝 웃으면서 그 앞으로 달려가 넙죽 절을 하더니 두 손을 잡고 흔들어댔다. 그리고는 기사 아저씨에게 조용히 해달라고 부탁을 하는 것이었다. 노래가 멈추자 어르신들도 순식간에 동작을 중지했다. 이때 장년회장이 상체를 일으키더니 드디어 우리 마을을 대표하는 이장님 몸이 회복되었으니 늦었지만 인사말은 해야 하지 않겠냐며 통로로 끌고 갔다. 그러자 모든 회원들은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그 중 한 노인이 막간을 이용해서 남은 김밥을 상하기 전에 먹자고 하니까 모두 다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이장은 머쓱한 채 중심을 잡더니 회원들을 향해 허리까지 굽혀서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그 동안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하다는 말을 시작으로 오늘 우리 마을을 대표하는 어르신들과 함께 진주 경상대학교 농과대학의 초청으로 자매결연을 맺게 됨을 본 마을 이장으로서 진심으로 영광스럽게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특히 이 행사는 그 대학교 총장이신 본 마을 출신 하희용 선배님의 오랜 염원이었다는 점과, 특히 이 자리에 동행하신 분들은 우리 마을을 대표하는 사절단원이란 사실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될 것임을 강조했다. 그리고 이날의 영광은 어디까지나 우리 마을 출신으로 진주시에서도 존경받는 하희용 선배님과 본 마을에서 고향땅을 지키며 묵묵히 외길을 걸어오신 현규 선배님의 우정이 이뤄낸 성과라고 하자 전원이 “옳소!”를 외치며 기립박수까지 하는 이도 있었다. 현규는 과거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마찬가진 것은 친구지만 희용을 존경한다. 교회에 출석한 지 약 1년 후 희용은 고등학교에 들어갔다. 그리고는 줄기차게 장학생의 자리를 지키면서 어릴 때 가난했던 한 농민의 아들이 대 학자로서의 신화를 만들어냈다. 현규는 가끔씩은 요즘도 희용을 생각하면 자책할 때가 있다. 원하는 환경을 바랄 게 아니라 원하는 환경을 내가 만들어가야 한다는 걸 왜 그때 깨닫지 못했던가. 희용의 운명을 바꿔놓게 된 데는 교회 전도사의 역할이 전적으로 작용을 했었다. 어느 수요일 날 예배를 마치고 전도사가 현규와 희용을 따로 만나 학교에 다닐 것을 종용했다. 하지만 현규는 앞날을 예측이라도 하듯, 꿈을 이루는 데는 졸업장이 아니고 노력이기 때문에 독학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잘라 거절했고, 희용은 단번에 응했다. 전도사가 권하는 학교는 그가 교목과 성경교사를 겸하고 있는 기독교재단의 중·고등학교였다. 현규가 학교에 대한 불신을 갖게 된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중학생 때 자신감을 잃어버렸던 것이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다. 그것은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공부할 시간이 적어면 그만큼 성적은 비례한다는 사실을 이미 경험했기 때문이었다. 현규는 중학교에 다닐 때는 반장에다가 학교 급사로 일하면서 잡비를 벌었다. 물론 급사도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자리가 아니었다. 수석으로 입학은 했지만 형편이 어려운 현규에게 특별 보너스로 주는 아르바이트였다. 수석이라 입학금과 1년 동안의 학비 면제에 아르바이트까지, 덕분에 1년은 돈 걱정 안 하고 보냈다. 그런데 공부만 해도 벅찬 등교시간에 아르바이트까지 해야 하니 거기다가 수업시작 전과 후에는 물론이고 가끔씩은 수업시간에도 빠질 수밖에 없는 경우도 생긴다. 방과 후에도 교무실 청소에 선생님들의 심부름으로 공부할 시간을 써버리니 성적은 점점 내리막길로 내달릴 수밖에 없었다. 2학년에 올라와서 한 번도 학비를 내지 못한데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채독에 걸려 거의 죽을 지경까지 갔다. 아무리 가족이 많은들 어머니가 없는 현규로서는 제대로 간호를 받지 못하자 병마와 싸울 기력마저 잃었다. 결국 그해 여름을 다 보내고 9월 중준이 되어서야 학교에 다시 출석을 했다. 하지만 수업시간마다 꼭 다른 세상에 온 것처럼 선생님의 말이 너무 생소해서 앉아있기조차 어색하고 불편하기까지 했다. 거기다가 등교를 하는 날이면 언제나 서무실에 불려가 공납금 독촉을 받는다. 현규로서는 지옥이 따로 없었다. 차츰 학교에 대한 흥미를 잃어갔다. 결석하는 날이 잦아졌다. 하지만 학교고 가정이고 누구 하나 현규에게 관심 가지는 사람이 없었다. 학교를 그만 두는 건 자연스런 현상이었다. 그런데 현규보다 한 학년 낮은 희용이 중학교를 졸업하고 진학을 못하면서 둘은 친구가 되었다. 현규와 희용의 집이 다 가난했지만 다른 게 하나 있었다. 현규는 어머니가 없었고 희용은 어머니가 있었다. 현규는 외톨이라는 열등감과 동시에 언제나 가슴 한 구석이 채워지지 않은 채 비어있는 반면, 희용은 비록 가난해도 자신감은 물론이고 가슴이 꽉 차 있었다. 이장이 갑자기 마이크를 현규 입으로 갖다대면서 “저가 오늘의 이 감격을 어떤 말로 미화시킨들 본인보다 나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선배님께서 직접 한 말씀 해주셔야겠습니다.” 라는 것이었다. 현규는 갑작스런 주문에 당황했지만, 희용의 훌륭함을 더 확실히 말할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 마이크를 거절하지 않았다. 낮이면 들과 산으로, 식전에는 개똥을 주어 거름에 넣는다. 밤이면 희용의 집에서 함께 자면서 앞이 보이지 않는 암담한 현실을 한탄하다가도 체념하기를 수없이, 그러다가 하나님을 알고부터 조금씩 누구를 탓하고 원망할 게 아니라 내 삶은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서, 꿈도 야무지게 둘은 약속을 한다. 그때 철없이 한 약속이 결국……. 현규는 고향에서 농사에 종사하고 희용은 친구가 농사를 과학적으로 지을 수 있도록 배우고 연구하여 기술을 보급하겠다고. “여러분들이 저와 희용 친구를 이렇게까지 인정해 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그런데 분명한 사실은 저를 희용 친구와 비교한다는 자체가 모순입니다. 희용 친구야 말로 우리 마을의 자랑이자 우리나라 농업계에 없어서는 아니 될 국보급이란 건 다 잘 아는 사실 아닙니까. 희용 친구가 덴마크 유학을 다녀오긴 해도 서울에서도 멀리 떨어진 진주 경상대학 출신이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서울에서 최고 명문대학교 농대에서 희용 친구를 모시고 가겠다며 여러 번 시도했으나 그럴 때마다 번번이 거절했다니 말입니다. 그는 명예도 부도 버리고 오로지 저와 한 약속을 잊지 않고, 우리 고향의 농촌을 살려야 한다는 일념으로 지금까지 연구하고 노력해 왔습니다. 그가 추구해 온 것은 연구실 학문이 아니라 현장 학문, 즉 흙 학문이라면 더 맞는 말이 될 것 같습니다. 우리 경남의 기후 풍토에 맞는 농업 육성을 위해서라면, 품종개량을 해서라도 생존이 가능하도록 해왔습니다. 희용 친구는 전공에 대한 애정과 노력이 남다르기도 하지만 정작 더 높게 평가받아야 하는 것은 바로 인간성입니다.” 현규의 목소리는 연설을 하듯 매우 우렁찼다. 현규가 결핵으로 의병제대를 했을 때만 해도 누구도 현규 옆에 오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희용은 달랐다. 현규가 군에 있을 때 희용이 국립 진주 경상대학교 신입생 입학시험에서 수석을 했노라며 편지가 왔었다. 학생들은 실력에 따라 학교와 인기 과를 지망하기 때문에, 당연히 인기 과에서 수석을 하기 마련인데, 하지만 희용은 원하는 과를 지망했다. 사실 농대에서 수석이 나왔다는 건 역사상 없는 일이라 더 값진 것이었다. 숙식은 입주 가정교사로 해결이 되었다는 것도 썼다. 하지만 성적을 유지하자니 늘 시간에 쫓긴다던 희용, 어쩌면 현규를 보기 위해 일부러 이것저것 구실을 만들어 고향에 오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부모님께 인사만 하고나면 현규한테 시간을 다 쏟아놓고 간다. 특히 가족들도 전염될까봐서 겨우 식사를 차려다 주는 것, 하긴 식사래야 겨우 꽁보리밥에 김치라도 있으면 진수성찬이고 고정 찬으로는 보리쌀 뜨물을 부어 끓인 된장, 아니면 우거지나 시래기죽을 들여놓고 가는 일 외는 현규 방에 오는 가족도 없었다. 심지어 어머니 대신이라는 누나들까지 그랬다. 그런데 희용은 결핵은 잘 먹어야 한다면서 안그래도 없는 돈에 뭐라도 사들고 온다. 거기다가 희용 어머니는 모처럼 온 아들을 위해 집에 키우는 닭을 잡아 삶아주면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현규에게 가져온다. 한 번은 희용이 왔을 때 현규가 각혈을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친구 곁을 떠나지 않고 현규의 손을 잡고 밤새껏 눈물로 기도하고 찬송을 불렀다. 만약 그때 희용의 우정 깊은 행위가 없었다면 현규는 이미 이세상 사람이 아닐지 모른다. 이튿날 희용을 보내고 현규는 생각에 잠겼다가 결심을 하고 집을 나섰다. 병도 병이지만 집안에 더러운 병을 가진 식구가 있는데 더 이상 살수 없다며 새엄마는 벌써 여러 번 보따리를 싸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그날 아침에도 어제 장날에 사와서 먹고 남겨놓은 간고등어를 현규 주라는 아버지에게, 입맛이 없어서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하는 아내인 자기는 뒷전인 남편 믿고 살 수 없다며, 아예 보따리를 싸자 당황한 아버지가 주저앉히느라 한바탕 전쟁을 치렀다. 현규는 아침밥을 먹는 둥 마는 둥 집을 나섰다. 안 그래도 죽음이 문턱에 이미 당도했다고 느끼고 있던 터다. 희용과 잘 가던 산으로 발길을 옮겼다. 꼭 목적지까지 가겠다고 안간힘을 쓰면서 산나물이며 솔잎을 뜯어서 씹었다. 숨이 차면 나무 그늘에 앉아 용기가 나기를 기다리기도 하고 계곡을 타고 올라가면서 물에 발을 담그기도 했다. 피를 토할 때는 흐르는 물로 씻었다. 아침 식사 후에 출발하여 목적지에 당도했을 때는 해가 하늘 한가운데 있었다. 계곡의 물이 방처럼 넓은 바위를 포위하듯 양쪽으로 헤어져 바위 아래서 다시 정답게 만났다. 희용과 둘이서 그 바위에 누워 푸념이 지겨워지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정답게 노래를 부르던 곳, 그러다가 나중에는 거기서 미래를 설계했고, 그래서 꿈을 이루면 다시 만나기로 약속했었는데……. 현규는 젊은 자신의 몰골이 꿈도 펼쳐 보기도 전에 희용과는 아예 비교할 존재가치마저 상실해 버렸다는 게 너무 억울했다. 하지만 이런 오기도 잠시잠깐 현규는 몸을 바위 위에 맥없이 눕혔다. 희용과도 지금은 비록 헤어져 있지만 함께 있을 날이 있을까. 현규는 희용의 모습을 그렸다. 하지만 부질없는 소망이라며 도리질을 했다. 희용이 올 다음 방학 때까지 살아있을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머리 위로 소나무가 천정처럼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눈을 감자 현실이 아득하게 멀어지면서 죽음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느낌에 사로잡혔다. 현규는 희용의 우정을 저버릴 수 없다며 죽음을 거부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할수록 당면한 현실은 역시 죽음을 받아들여야 한다며 체념한다. 그래서 잠시잠깐이면 사라져버리는 하루살이에 불과하기에 곧 잊어지고 말 인생의 무상함에 연연하지 않기로 결심하는 순간, 불현듯 죄에 대한 두려움이 현규의 가슴을 옥죄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현규는 몸서리를 치며 눈을 떴다. 어디서 그런 힘이 솟았는지 축 처진 몸을 돌려 무릎을 꿇었다. 마침 하나님의 은혜를 엄청 받았다던 어느 여신도의 말이 뇌리를 스쳤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널 버렸어!’ 뼈만 앙상하게 남은 현규를 보고는 기도해준다는 계획을 포기하고 돌아갔던 스스로 어머니가 되어 주겠다던 그녀, 그 후로 현규는 이 기억만 나면 언제나 그래왔듯이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전율했다. 그런데 갑자기 현규의 입에서 두려움과 서러움에 섞여 항변이 터져 나왔다. 왜? 절 버리십니까! 그래도 전……, 현규는 그때부터 울부짖으며 떼를 썼다. 받아들일 수 없다고! 왜 하필이면 접니까! 길이요 진리 요 생명이라 당신으로 통해서 아버지께로 간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왜?! 현규는 있는 대로 소리를 지르면서 이마를 바위에 찧고 두 손으로는 바위를 얼마나 방망이질을 했으면 손이 피투성이로 변했다. 이마에서도 피가 흘러내렸다. 현규는 피를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사흘이 멀다 하고 피를 토하는 데 아직 피가 남아있다는 게 신기했다. 어느덧 울부짖던 현규에게 비몽사몽간에 나타난 환상은 그야말로 이 세상에서는 보고 느끼지 못했던 아름다운 전우애였다. 기합을 직업으로 여기던 중대장의 포근한 사랑이 온 몸으로 느껴지는가 하면, 또 여러 전우들의 모습이 무척이나 평화롭고 친밀감 넘치는 게, 세상의 어떠한 아름다운 말을 다 동원한다 해도 그 사랑스러움과 정겨움을 정확하게 전부 다 표현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러자 그렇게도 엄하고 보기만 해도 무섭고 겁에 질려있어야 했던 사람들이 왜 그다지도 다정다감하고 평화롭던지, 이 광경을 보고 현실로 돌아온 현규는 그야말로 세상 사람들이 다 하나님이 버렸다 해도 아니라고 당당하게 말할 자신이 섰던 것이다. 거기다가 환청까지, 누가 널 버려? 네가 날 떠나지 않는 한 난 절대로 널 버리지 않는단다. 바로 그 순간 고통의 상징으로 통용되는 십자가야 말로 현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었다는 사실이 비로소 믿어졌다. 현규는 벌떡 일어나 손뼉을 치면서 껑충껑충 뛰었다. 그 여신도뿐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자기를 하나님이 버렸다고 해도 절대로 그렇지 않다는 걸 자신 있게 말할 것 같았던 것이다. 결국 현규는 기쁨의 환호를 목이 터져라 질러댔다. 저도 사랑합니다! 그날 이후로 현규는 병에 얽매이지 않았고, 각혈을 하면서도 죄를 용서받았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해서 기도와 찬양이 입에서 끊어지지 않았다. 드디어 희용과 승부를 걸어도 되겠다는 생각마저 들면서 현규의 건강은 나날이 좋아지고 있었던 것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런 자리까지 올라갔는데 아쉬울 게 뭐가 있다고……, 우리 같은 촌놈들 잊지 못하는 걸로만 봐도 사람 됨됨이는 충분히 알 것 같네.” 노인회장이 매우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지금은 진주 경상대학교가 국립 종합대학교지만, 1948년 8월 설립인가는 도립 초급 진주농과대학이었답니다. 그러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진주농대로만 불렀거든요. 그러니 아무리 지금은 거대 국립 종합대학교로 발전했다고는 하나, 학교의 원 뿌리는 역시 농과대학 아닙니까. 설립 당시는 농학과 1학급 38명 학생으로 개교를 했고, 1972년 교명을 경상대학으로 변경했답니다. 석사과정은 3년 뒤인 1975년이며 1978년 드디어 학부의 마지막 관문인 대학원에 박사과정까지 생기면서 1979년 9월 비로소 종합대학교로 개편이 되었다는 겁니다. 친구가 농업생명과학대학장을 거쳐 지금은 농대와 같은 단과대학이 열두 개나 되며, 거기다가 수의학과도 인기가 있지만 도내서는 유일하게 의과대학에 의학 전문 대학원까지 포함한, 학사는 물론이고 석사와 박사 재학생과 교수들까지 합하면 무려 3만 명에 육박하는 가족을 가진 종합대학교의 총장이라면 얼마나 대단한지를 어느 정도 짐작이 가실 겁니다. 사실 이 정도의 인물이 되려면 실력만으로는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제가 기적적으로 결핵 3기에서 회복된 것은 전적으로 희용 친구 덕분입니다. 어머니가 세상에 없는 저에게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걸 몸소 실천한 사람이 바로 그 친굽니다. 결핵은 전염성이 강한 질병인데도 친구는 한 번이라도 저를 경계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니까요. 그 정도 인격이니까 오늘의 희용도 가능했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현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노인 회원 한 명이 통로로 나오더니, 우리 마을 출신 중에 이렇게 훌륭한 사람이 있다는데 어떻게 춤을 추지 않을 수 있겠느냐며 덩실덩실 춤을 추며 통로를 왔다갔다 하자, 회원들 몇 명이 더 뒤를 이었다. 눈치 빠른 기사 아저씨는 벌써 노래를 틀었다. 학교 정문 앞까지 두 줄로 학생들이 나눠 서서 천지마을 노인 회원들이 탄 버스를 환영했다. <농대와 천지마을의 자매결연을 축하합니다>라고 쓴 대형 현수막은 학교 정문 위에 걸렸다. 학생들은 한결같이 손을 흔들면서 활짝 웃고 있다. 총장을 봐서라도 정성껏 환영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규는 가슴이 벅찼다. 다른 회원들도 같은 심정임을 금방 알았다. 자유분방하던 조금 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분에 넘치는 환대에 민망한 나머지 몸 둘 바를 몰라 할 때 하는 버릇처럼 약간은 긴장한 채 창문 밖으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차는 농대 입구까지 들어갔다. 행사장에는 농업생명과학대학의 1개 학부와 10개 학과에서 참석한 교수 및 학생 대표들이 강당 입구에 두 줄로 나눠 서 있다가 일행이 도착하자 환영한다는 뜻으로 박수를 쳤다. 이때 하희용 총장이 앞서 도착한 이장부터 악수를 하고는 걸어 나오면서 반갑다는 인사말과 동시에 허리까지 약간 굽혀 손을 내밀었다. 진짜 우리 마을 출신 희용이 맞나? 이런 눈초리로 모두가 다 굳은 표정을 풀지 않은 채 내미는 손을 잡았다. 마지막으로 들어오는 현규에게 다가온 희용이 포옹을 하자 박수가 터져나왔다. 모두가 이미 준비된 좌석에 앉고 희용은 선 채로 ‘처음에는 당연히 현장에 가서 행사를 진행하려고 했어요. 하지만 앞으로 그런 기회는 얼마든지 있을 것이기 때문에, 오늘은 특별히 저의 제 2의 고향이기도 하고 또 유명 관광지가 있는 이곳으로 꼭 한 번 고향 분들을 모시고 싶었습니다.’ 라며 희용이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노인 회원들을 향해 변명하듯 설명했다. 자매결연의 행사가 끝나고 점심은 뷔페식으로 숲이 우거진 농대 야외 캠퍼스에서 진행되었다. 식사 후에는 대학 캠퍼스를 둘러본 후 시내관광에 나섰다. 희용이 가이드로 자원했다. 제일 먼저 간 곳이 진주하면 떠오르는 곳이 남강과 그 유명한 촉석루다. 거기서 가장 주의 깊게 본 것은 진주의 관기 논개의 행적으로, 임진왜란 때 진주성이 함락되어 왜장들이 촉석루에서 주연을 베풀 때에 만취된 왜장 케야무라를 열 손가락에 가락지를 낀 채 껴안고 남강에 투신하여 죽음을 맞은 바위 의암과 그녀의 영정이 있는 사당 의기사였다. 희용은 관광지뿐 아니고 시내 구석구석을 다니며 거기에 관한 의미를 상세하게 설명했다. 모두 희용의 박식함에 놀랐지만 더 놀라운 건 설명 들은 대로 진주시가 머리에 고스란히 입력이 되어버린 사실이었다. 역시 총장은 다르다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왔다. 희용의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어둠이 사방을 둘러싸고 있었다. 정원 잔디밭에 차려진 진기한 요리들의 식탁을 대하자 모두가 감탄사를 자아냈다. 맛난 요리들도 그렇지만 아담한 정원을 비춰주는 새하얀 조명 아래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학생들의 관현악 연주가 분위기를 한층 더 우아하고 고급스럽게 연출해 내고 있었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는 모두가 침묵했다. 이장이 입을 열었다. 왜 놀지 않느냐고, 그리고 준비한 술병은 하나도 비우지 못한 채라는 말도, 하지만 이구동성으로 희용의 환대에 감격하여 먹먹하다거나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는 이렇게 훌륭한 마을의 인재를 여태껏 몰라본 게 죄스러울 따름이라며 너도 나도 자책의 목소리를 높였다. 이장은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말을 다 동원하여 술병을 좀 비워주기를 간청했지만, 그토록 즐겨마시던 술을 단 한 방울도 마시는 이가 없었다. 그리고 잠들지 않으면서도 죽은 듯이 조용했다. 생각에 잠기느라. * * [작가 노트]
지워지지 않는 사람의 흔적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내가 태어나 자란 고향을 잊지 못하고 그리워한다. 거기에는 어릴 때 자라면서 키운 정들이 구석구석 서려있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하나님이 창조한 것 중에서 걸작을 들라면 서슴지 않고 정(애)이라고 말할 것이다. 정에는 가족애를 비롯해서 형제애, 우애, 동기애 등등, 세상 사람들 은 ‘정’이 있기 때문에 사회가 존재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작게는 가정이라는 사회, 크게는 전 인류가 공존하는 세계라는 사회다. * 사회의 구성원은 사람이다. 사람의 언행을 좌우하는 데는 정이 법보다 더 우월하다고 생각한다. 즉 법은 감정의 대립이라면 정은 감성의 호소라고 하면 어떨까. 이런 차원에서 정은 그야말로 사회를 유지하는 원동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사람의 꿈까지도……. 왜냐면 꿈은 절대적인 이유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대부분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며 생활과 직결되는 간격만큼 절실함의 강도도 비례된다. * 잉태한 아이는 때가 되면 출산하게 되듯, 포기하지 않는 꿈은 꼭 이뤄진다. 가능한 건 꿈이 필요 없다. 불가능하기 때문에 꿈을 꾼다. 하나님은 꿈과 같이 일하신다고 했다. * 나는 신토불이를 통해 지워지지 않는 사람의 흔적을 말하려 했다. 동시에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잊는 정의 두께가 주는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싶었다. 작품 속 배경은 남편의 고향이자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다. 남편의 친구는 작품 속의 대학은 아니지만, 같은 진주시에 있는 대학교에서 교육학박사로 대학원 원 장까지 지냈다. 꿈을 향한 끊임없는 노력의 결과리라. 나는 결혼 후 방학 때면 진주 경상대학교에서 통신대 농학과 출석강의를 받으면서 진주와 친밀해졌다. 거기서 교수로 재직하던 중학교 동기생도 만났다. 그는 다른 대학으로 옮겨 간 후 총장으로 퇴임했다. 이런 배경을 발판으로 신토불이가 태어났다. * 문갑연 한남신학교, 방송통신대학 농학과 수료 현대문학 문예대학 수업 1992년 <농민문학> 단편소설 신인상 2000년 <한국기독공보> 신춘문예 중편소설 입선 2001년 <믿음의 문학> 단편소설 신인상 소설집 『거울 없이 사는 사람들』, 『추도식의 가족들』 장편소설 『꿈이 묶여있는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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