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 봄내길, 비오는 북한강변을 걷다
1. 일자: 2021. 3. 20 (토)
2. 행로와 시간
[춘천문학공원(08:52) → (눈늪나루/데크) → 오미나루(09:42)→ 신매대교(09:55) → (인형극장) → 육림랜드(10:12) → (고구마섬 야구장/호반산책로) → 소양2교(10:50) → (식사) → 스카이워크(11:35)→ 공지천 이디오피다(12:24) → 조각공원(12:35) / 12.27km]
< 춘천 봄내길 트레킹을 준비하며 >
춘천이라는 도시에 대하여 내가 기억하고 느끼는 바는 이렇다.
춘천은 호수를 품어 낭만이 있는 젊음의 도시이다. 소양호와 공지천과 카페 이디오피아와 명동의 닭갈비로 기억된다. 전철 개통으로 큰 맘 먹고 가던 곳에서 마음이 동하면 언제든 갈 수 있는 곳으로 바뀌었고, 접근성이 좋아지자 이상하게도 관심은 더 멀어진 도시다. 도시가 호수를 끼고 있다는 건 운치있지만 우울감도 함께 찾아 든다. 안개의 존재 때문이다. 김승옥의 ‘무진기행’은 안개에 휩싸인 채 도사리고 있는 음험한 공간을 묘사하고, 한수산의 ‘안개 사정거리’는 안개를 산업사회로 치닫기 시작한 고향 풍경 속에서 추억마저 변화시키는 존재로 묘사한다. 부정적 느낌이 강하다. 지나간 초라한 젊음을 바라보는 아픈 마음인지도 모르겠다.
옛 기록을 살핀다. 산 속에 평야가 널따랗게 펼쳐지고, 두 강이 가운데로 흘러간다. 토질이 단단하고 기후가 고요하며 산과 강이 맑게 흐르며, 땅이 기름져서 대를 사는 사대부가 많다. 강가의 살만한 곳으로 대동강가의 평양 다음으로 춘천을 친다. 택리지에 묘사된 춘천의 이미지는 긍정적이다. 선인은 춘천의 진정한 면모를 아시고 계시니 다행이다.
아산 카페에 올라온 정보에는 가야 할 길을 시원한 강바람을 맞고 물소리를 들으며 걷게 되며, 의암호는 춘천 시가지 주변 자연과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어 뛰어난 경관을 자랑한다고 소개한다. 또 걷다가 지치면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카페에서 커피 한 잔 하는 재미도 있다고 한다. 끌리는 말이다.
의암호 따라12,5km, 4시간의 한가한 여정이 기대된다.
< 희망사항 >
토요일 오전에 비가 예보된다. 평소와 다르게 걱정보다는 기대가 더 크다. 언제 비 오는 춘천 거리를 걸어 보겠는가 하는 여유로운 기분이 든다. 호숫가를 걸으며 봄이 비에 촉촉히 젖는 모습을 보고 싶다.
< 춘천 가는 길에 >
춘천 IC를 빠져 나온 버스는 이내 의암댐과 삼악산 밑을 지나 눈에 익은 붕어섬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멈춰 선다. 비가 부슬부슬 내린다. 분위기가 을씨년스럽다. 시간은 9시가 채 되지 않았다.
< 춘천문학공원 ~ 소양2교 >
문학공원에서 길을 시작한다. 무리 지어 걷다가 곧 저마다의 속도로 흩어진다. 옛 나루터를 지나며 데크 길이 이어지고 먼 풍경들이 눈에 들어온다. 시가지 뒤로 솟은 산은 대룡산 일 게다. 몇 해 전 한겨울 산 위에서 내려다 보던 붕어섬과 도시 설경이 멋졌던 곳인데, 반대로 강에서 산을 바라본다. 하늘은 흐리지만 멀리까지 조망되는 특이한 날씨다. 내리는 비가 미세먼지를 쓸어 내렸기 때문인가 보다.
강 폭이 예상외로 넓다. 강에서의 낭만적인 풍경은 반대편이 육안으로 보여야 제대로인데, 너무 넓어 이스라함과 쓸쓸함이 느껴진다. 대개의 큰 도시가 그렇듯 춘천도 산에 들러 쌓인 분지다. 먼 산이 강 뒤로 끝 없이 흐른다.
사진 찍느라 분주한 일행들을 지나쳐 앞서 나아간다. 데크 주변 책바위가 눈길을 끌더니 이르게 꽃망울을 터트린 진달래도 보이고 생강나무의 노란 꽃망울도 목격된다. 하지만 아직 봄을 알리는 화신에는 초라하다.
갯가에 옅은 물안개가 피어 오른다. 주위에 고요함이 깃든다. 강에 떨어지는 빗방울이 작은 파문을 일으킨다. 빗방울이 굵어진다. 우산을 켠다. 춘분에 내리는 이 비는 분명 생명을 깨워줄 게다. 카페 거리를 지난다. 시간이 일러 문을 열지 않았다. 길가 벚나무 가지가 움 튼다. 꽃 피는 계절에는 꽤나 낭만적인 길이 될 텐데 아쉽다.
일행들이 많이 뒤쳐진다. 갈라서야 할 때다. 내 속도로 걸어야겠다. 신매대교를 지나며 홀로 길을 나선다. 긴 다리를 건너 지나 온 강을 바라보며 걷는다. 의문점 하나, 소양강과 북한강은 어디서 만나나? 둘, 지금 바라보고 있는 물은 강인가, 호수인가? 다리 위에서 바라보는 역시 넓다. 순간‘이곳은 어디이고, 나는 왜 여기에’자문해 본다. 낯선 도시에서 경험해 보지 못한 풍경을 보며 방향을 잃고 서 있다.
인형극장 앞을 지나 대로로 나왔다 이내 강변으로 다시 들어간다. 뚝방 위를 걷는다. 육림랜드라는 공원 옆을 지난다. 빛 바래고 녹슨 회전관람차 밑으로 동물원이 보인다. 비가 오니 그 모습이 더 쓸쓸해 보인다.
날은 더 흐려지고 풍경에는 큰 변화가 없다. 고구마섬 야구장 앞으로 큰 버드나무 한 그루가 연한 초록 잎을 자랑하며 시선을 끈다. 봄이 성큼 와 있는 느낌이다. 여기까지 걸어 오며 왜 이 길을 명품 트레킹로라 칭하는지 이유를 찾지 못했다. 도심에 들어선다. 작은 다리를 건너자 소양강 스카이워크가 보인다. 단조로운 강변 풍경에 활기가 돈다. 소양강 처녀상을 바라보며 긴 다리를 건넌다.
< 소양2교 ~ 공지천 조각공원 >
다리 위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꽤 근사하다. 거칠 것 없이 훤히 트인 시야는 먼 산의 굴곡을 따라 걷는다. 세상은 온통 연한 회색빛이다. 하늘과 강물이 하나인 냥 몽환적으로 보인다. 가야 할 길의 2/3는 온 것 같다. 일행들의 모습은 멀리서도 보이지 않는다. 소양강처녀상 뒤로 스카이워크가 보인다. 식사를 하고 스카이워크에서 쉬면서 일행들을 기다리면 되겠다 싶어 길가 음식점에 들른다. 춘천에 왔으니 이곳 음식을 먹어야지. 닭갈비가 구미를 당기지만 혼자 주문하기가 그래서 막국수 한 그릇을 주문해 맛나게 먹었다.
다시 길 위에 선다. 비가 와 더 그런지 몰라도 유원지 부근인데도 거리가 놀랍게 고요하다. 게다가 아쉽게도 스카이워크는 날씨가 좋지 않아 문을 닫았다. 이제 어찌해야 하나. 일행들은 어디쯤 있을까? 어쩌면 내가 식사하는 동안 앞서 갔는지도 모를 일이다. 우산을 다시 켜고 강가를 따라 걷는다. 다시 봐도 춘천의 북한강은 무지 넓다.
스카이워크라는 기대가 무너지자 기분이 영 아니다. 수변으로 내려서 걷는다. 낮은 곳에서 바라보는 강물은 도로에서 보는 것과 달랐다. 무엇보다 강물에 퍼지는 빗물을 보며 걷는 건 참으로 이채로웠다. 계절이 일러 꽃과 함께 강변을 걷는 낭만은 없지만 고요하고 편안한 기분이 좋았다.
선착장과 공원을 지나고 머지 않아 공지천이 나타난다. 옛 이디오피아 참전비와 주변은 많이 변해 있었다. 다만, 오리배와 카페가 있는 풍경은 그대로였다. 곁눈질로 바라보는 것으로 추억을 잠시 떠올리며 서둘러 길을 이어간다. 언덕 위로 MBC 방송국 건물이 보인다. 비 내리는 조각공원에서 걸음을 멈춘다.
모든 게 비와 함께 착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 에필로그 >
다행이다. 비가 더 많이 오지 않아서, 강가 바위 틈에 핀 진달래를 볼 수 있어서, 푸르게 돋아나는 봄의 새순을 보며 걸을 수 있어서, 그리고 홀로 걸어도 외롭지 않아서….
새롭다. 두물머리가 춘천에도 있어서, 북한강이 매우 큰 강임을 알게 되어서, 그리고 길을 걷고 나서 창 밖을 바라보며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길 수 있어서….
걷는 내내 내가 강가를 걷고 있는 것인지 호숫가를 걷고 있는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여러 개의 댐의 존재가 혼란을 야기했나 보다. 생각해 보면 댐은 강물의 흐름을 잠시 가두어 두는 것일 뿐 그 도도한 흐름을 막을 수 없는데도, 내 생각은 댐에 갇혀 있었다.
소양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지점은 소양2교였다. 소양강 처녀는 그 모습을 지켜 보고 있었다. 춘천은 두 강이 만나는 곳에 놓인 도시다. 두 큰 강이 만나는 곳을 막아버리니 강 폭이 그리 넓어졌나 보다. 강 건너 먼 풍경을 원 없이 봤다. 서울에서 보는 한강과는 그 느낌이 많이 달랐다. 막힘 없이 멀리를 볼 수 있어서 좋았다.
훗날 춘천을 기억하면 잿빛 하늘과 거대한 강물로 기억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