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8회 19일 밤 / 대검난무..공포의 암흑천지
19일 광주도 서서히 어두워지고 있었다. 하늘에 검은 먹구름이 끼더니 저녁무렵에는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도로마다 얼룩진 핏자욱이 빗물로 더욱 선연히 드러났다. 가랑비를 맞으며 시민들은 모두 광주의 눈물이라고 했다. 하늘을 쳐다보며 울분에 찬 눈물을 흘리는 시민들도 많았다.
이틀동안 광주에 찌들었던 최루탄 가스가 씻겨졌다. 도로 곳곳마다 얼룩 졌던 핏물은 지워져가고 있었으나 부서진 공중전화 부스며 깨진 유리병 조 각,타버린 차량의 시커먼 골재,부서진 보도블럭등은 아직도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점차 빗줄기가 굵어지자 집으로 돌아가는 시민들은 한결같이 빗 물에 씻겨진 핏자국처럼 이제 제발 더이상 살륙이 없기를 간절히 바랬다.
오후 6시 광주공원에는 수천명의 시민들이 모여 전두환 타도등 구호를 외 치며 시위를 벌였다. 30분후쯤 광주공원 광장에서 공수부대원들이 대학생 8 명을 팬티만 입힌 채 속칭 원산폭격이란 기합을 주고있었다.(시청 상황일 지)
광주공원에 수천명이 집결해 있던 시각은 오후 5시께부터. 광주천을 사 이로 시내 중심가와 마주하고 있는 공원광장은 지역적 특수성때문에 시위 대의 퇴각로 역할을 해냈다.
또 이곳에서 거점사수 임무를 맡은 계엄군중 1명이 시위대에 쫓겨 적십자병원쪽으로 달아나다 수명의 학생으로부터 구 타를 당하고 총기를 피탈당하는 불의의 일격을 당했다. (계엄사 상황일지)
공업사를 운영하던 裵성진씨(당시 30세)도 당시 서동에서 건물공사를 하 던중 시위군중들에 역습을 당해 공수부대원들이 쫓기는 광경을 목격했다. 서동에서 한참 일을 하고 있는데 공원다리를 보니 많은 시민들이 있었다.
시민들은 군인들에게 돌멩이를 던지고 있는 가운데 공수들 2명이 시위하는 사람들을 쫓아왔다. 순식간에 공수부대원 2명은 시위군중에 둘러싸이게 되 었다.
그중의 한 명은 운좋게 포위망을 빠져나갔으나 다른 한 명은 다급했 던지 광주천 풀밭으로 뛰어내렸다. 부근의 시위군중들은 그에게 일제히 돈 을 던져 거의 초주검상태로 만들었다. 그러자 지켜보고 있던 시위군중들이 함성을 올렸다.
밤 8시가 가까워온 시각이었다. 광주고속버스 터미널 부근 청과물시장앞에 서는 인근 자동차정비공등 시위대 1천여명이 몰려 대형 아치를 불태우며 공중전호 부스와 대형 화분을 부숴 바리케이드를 쳤다. 이때 시위대는 경 남 번호판을 단 8t짜리 화물트럭 한 대를 불질러 버렸다.
트럭에는 각종 플라스틱 제품들이 가득 실려 있었는데,군중들은 경상도 출신 공수대원들이 광주시민을 학살하러 왔다는 소문이 치를 떨고 있던 터 였다. 군중들은 운전수도 경상도 사람이니까 죽여버리자고 흥분했지만 누군 가가 만류했다.
그 운전수가 무슨 죄가 있겠느냐.XXX이 죽일 놈이고 공 수부대가 천인공노할 놈들이지라는 설득에 모두들 물러났다. 그들은 타오 르기 시작한 트럭을 몰고 공용터미널앞을 지키는 공수부대쪽으로 몰려갔 다. 시위대는 새정부를 선전하는 구호가 적힌 대형아치를 불질렀다(黃晳映 기록.전남사회운동협의회編.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중에서 발췌)
밤8시 30분께 공수부대의 진압에 밀려 달아나던 시위대 5백여명은 북구 청에 투석했다. 또 이들은 계엄군에 의해 저지되자, 다시 누문동파출소,역 전파출소,임동파출소,양동파출소등 4개 파출소을 공격해 파괴시켰다. 이중 임동파출소는 전소됐다.
이어 밤9시께 7공수여단 33대대가 광주역에 다시 출동했다. 밤 10시 가까 이 시위대 60여명이 역전파출소를 재점거했고,KBS광주방송국에 시위대 1백여명이 침입하여 기물을 파괴했다.
밤 10시 25분께 시위진압 병력은 역전파출소 점거 시위대를 해산시킨뒤 북구청 주변의 빌딩,여관,다방,주택가에 대한 수색을 실시해 파출소 방화 관련자 13명을 검거했다. 이후 7공수 33대대는 밤10시 50분께 주둔지인 전 남대로 복귀했다.
그러나 공수부대원들의 가택수색은 잠자고있던 무고한 시민들을 대검으로 찌르고 군화발로 차는등 무자비한 진압을 재현한 것이었다.
당시 신안동 광주고속터미널 인근 세차장에서 일하던 李禱炯씨(당시 23 세)도 엉뚱하게 잠을 자던중 변을 당했다. 1996년 1월 검찰의 광주현장조사 때 참고인조사를 받은 李씨는 검찰에서 당시를 증언했다.
19일 밤 10시께 내가 근무하고 있는 세차장에서 동료 3~4명과 잠을 자던중 계엄군들이 세 차장에 난입,오른쪽 허벅지를 대검으로 찌르고 곤봉으로 수차례 구타한뒤 서부경찰서로 끌고 갔다.
세차장 방에 작은 유리창이 하나있는데 깨진 유리 차응로 풀래쉬를 비춰보던 계엄군이 안에 사람이 있다면서 무작정 들어 와 대검으로 찌르고 구타했다. 李씨는 이후 폭도라는 진술서를 쓰도록 강요받다가 20일 상무대로 끌려간뒤 21일 풀려났다.
밤 11시께 누문동파출소에는 서부경찰서 소속 경찰이 출동해 시위대를 진 압했고, 양동파출소에는 경찰기동대와 31사단 96연대 1대대 병력이 출동해 시위대를 진압하고 파출소를 탈환했다.
이날의 시위진압과정에서 공식적 사망자는 金안부씨(당시 36세.光州시 西 구 月山동)였다. 金씨는 광주공원옆 광주시 서구 서2동 전남양조장 공터에 서 처참히 일그러진 시체로 발견됐다. 막노동꾼인 金씨의 사망발견당시 모 습은 안면이 일그러지고 전신이 온통 타박상을 입은 채였다.
군 발표에 따르면 이날까지 공식사망자는 18일 금남로 지하상가공사현장 에서 숨진 金경철씨(당시 28세)와 金씨등 2명.농아인 金경철씨는 공용터미 널에서 처남을 전송하고 돌아오다 아무 죄없이 무자비한 구타를 당한뒤 국군통합병원으로 후송됐다 19일 오후 3시께 결국 숨졌다. 말못하는 자신 의 입장을 온몸으로 설명하려다 오히려 더욱 두들겨 맞고 실신한 金씨였다.
한편 19일 군경 24명과 학생,시민 수십명이 부상을 입었는데 부상자중 崔 승기(당시 20세.학생),金인윤(당시 21세),李인선(당시 27세),崔미자씨(여.당시 19세)등 5명은 자상을 입었다.
이같은 사실은 1995년 7월 18일 검찰의 5.18사건관련 수사결과에 명시된 것으로 그동안 신군부의 거듭된 부인에 도 불구하고 진압에 나선 공수부대원들은 이미 시위진압초기단계부터 대검 을 사용했음을 명백히 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