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반 사탕수수/221129/박찬석
2010년 FIFA 월드컵은 남아공에서 주관했다. 아프리카 대륙에서 처음이다. 인종차별 정책은 없어졌지만, 가진 자는 여전히 백인이고 다수의 흑인은 가난하다. 극심한 빈부의 격차는 세계 최고 수준의 범죄를 불렀다. 세계 언론은 범죄 때문에 경기를 제대로 치룰수 있을지 걱정을 했다. 경기는 무사히 치렀다. 1등은 스페인, 2등 네덜란드, 3등 독일, 4등은 우루과이였다. 한국은 16강에 들어갔지만, 우루과이한테 2대1로 패하여 8강 진출은 못했다. 2022년 FIFA 월드컵은 카타르에서 열리고 있다. 일차 전 우루과이 전에서 무승부였다. 2차 가나전은 3대2로 패했다. 목표는 여전히 16강 진출이다. FIFA 월드컵은 올림픽보다 더 인기 있는 경기가 되었다.
남아공 인구는 북서부에 많다. 제일 밀집지역은 요하네스버그가 있는 후어퉁(Guatong)주 이다. 다음은 더반(Durban, 인구 330만)있는 나탈(Natal) 주이다. 더반은 요하네스부르크, 케이프타운, 다음으로 큰 도시이다. 남아공의 부산이다. 수에즈운하가 개통되기 전에는 유럽에서 아시아로 가는 모든 대양 선은 남아공 더반 항을 거쳐야 했다. 수에즈 운하의 개통으로 더반의 중요성은 떨어졌다. 지금도 수에즈맥스(Suezmax)를 초과 하는 초대형 유조선이나, 초중량 화물선, 세계 일주를 하는 크루즈는 남아공 더반에 정박한다. 남반구에서 4번째로 큰 컨테이너 항구이다. 4백50만 TEU 컨테이너를 처리한다. 부산은 같은 해 2천1백만 TEU를 처리했다.
나탈 주는 줄루(Zulu) 족이 사는 곳이다. 동쪽으로 모잠비크와 에스와티니(Eswatini) 서쪽에 레소토(Lesotho)와 접하고 있다. 남아공 지형은 특이하다 국토의 대부분은 1000m –1500m 고원에 놓여있다. 대서양과 인도양 해안에는 좁은 해안평야가 있다. 내륙에서 바다 쪽은 절벽이다. 내륙 고원지대는 사바나 기후지역이다. 이웃 레소토와 국경은 드라켄스베르그(3,482m)산이다. 고원지대에서 사탕수수를 재배했다. 열대지방이 아니면서도 상업적으로 사탕수수를 재배하는 유일한 곳이다. 얼지 않는 겨울 때문이다. 사탕수수는 열대작물이다. 나탈에서 재배한 사탕수수를 더반까지 운반, 설탕으로 정제하여 수출했다. 현재 설탕산업은 브라질과 인도에 밀려 사양 산업이 되었다.
식민지 초기경제는 광산업이었다. 금, 은, 동, 백금, 다이아몬드를 채굴했다. 다음은 플랜테이션 농업이다. 18세기 설탕은 유럽인에게 가장 인기 있는 식품이었다. 귀족은 설탕을 먹고, 평민은 꿀을 먹었다. 열대지방에서 생산된 설탕을 온대지방에서 소비했다. 식민지 농업이다. 백인 지주는 원주민 노동자를 고용했다.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은 많은 노동자가 필요했다. 노예무역이 시작되었다. 2천만 명이 넘은 아프리카인을 잡아갔다. 대서양을 건너는 동안 학대로 10%해당하는 200만 명이상 죽었다. 사탕수수 농업은 금 노다지 보다 더 이익이 낫다. 영국은 설탕을 유럽에 팔아 엄청난 부를 축척했다. 영국 자본주의 발달과 산업혁명의 계기가 되었다.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은 쿠바를 위시하여 서인도 제도에서 성행했다. 전 세계 아열대 지방으로 재배가 확산되었다. 하와이도 사탕수수 플랜테이션 농장이 있었다. 흑인노예가 금지되자, 아시아에서 노동자를 데려갔다. 조선인 노동자도 사탕수수 재배를 위하여 하와이로 갔다. 경남 의령과 황해도 해주에서 모집했다. 1905년이다. 하와이 주에 조선인 후손이 3만 명이나 사는 이유이다. 1970년대 만 하더라도 하와이에 사탕수수 농장이 남아 있었다. 2016년에 인건비가 싼 동남아시아에 밀려 끝이 났다.
세계사 핵심은 농업이다. 농업의 발달, 인구의 증가, 전쟁으로 갔다. 1차 농업혁명은 기원전 1만 년 전 인류가 수렵채취를 그만 두고 정착 농업을 시작한 때이다. 인구가 증가하고 국가가 나타났다. 2차 농업혁명은 17세기에서 19세기 사이다. 지리상의 발견으로 신구 대륙 간 농축산물의 이동이다. 신대륙에서 사탕수수, 옥수수, 콩, 감자가 구대륙으로 들어왔고, 구대륙에서 말 소 돼지가 신대륙으로 건너갔다. 새로운 농산물의 전파는 농업생산 증가와 인구증가를 가져왔다. 자원 확보를 위한 식민지 쟁탈전이 전개되었다. 3차 농업혁명은 1930-1960년대 농업에 과학기술 적용이다. 화학비료, 농약, 기계화, 관개가 시행되었다. 농업 생산은 급증하고 인구가 폭발하였다. 자원 확보를 위하여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대영제국 시절 귀부인은 홍차에 설탕을 첨가해 마시는 것은 신분의 상징이었다. 홍차는 중국에서 설탕은 인도에서 수입했다. 100년 전만 하더라도 대부분 국가들은 농산물만은 자급자족하고 살았다. 지금은 어느 나라도 모든 농산물을 자급하고 살아가지는 않는다. 사탕수수 한포기 없는 나라지만, 설탕이 없이는 한 끼도 살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