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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백산(小白山) 유람기
내가 젊어서부터 영주[榮川]와 풍기(豊基) 사이를 왕래하였으니 소백산은 머리만 들면 바라보이고 발만 떼면 갈 수 있었는데도 조급하게 허둥대느라 오직 꿈에서나 그리고 마음으로만 달려간 것이 이제 40년이 되었다. 지난해 겨울에 인부(印符)를 차고 풍기에 부임하여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의 주인이 되니, 속으로 기쁘고 다행스러워하며 오랜 소원을 풀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지난 겨울과 봄 이래로 일이 있어서 백운동에 갔다가 그때마다 산문(山門)도 엿보지 못하고 돌아온 것이 세 차례나 되었다. 4월 신유일에 며칠째 내리던 비가 막 개니 산빛이 목욕한 것 같았다. 이에 백운동서원에 가서 유생들을 만나 보고 그대로 유숙하였다. 이튿날 드디어 산에 들어갔는데, 진사 민서경(閔筮卿)과 그의 아들 응기(應祺)가 따라나섰다. 죽계(竹溪)를 따라 10여 리를 올라가니, 골짜기는 그윽하고 깊으며 숲 속은 아늑하고 아름다웠다. 때로 물이 돌 위로 흐르며 부딪히는 소리가 골짜기 사이로 울려 퍼졌다. 걸어서 안간교(安干橋)를 건너 초암(草庵)에 이르니, 초암은 원적봉(圓寂峰)의 동쪽 월명봉(月明峰)의 서쪽에 있는데, 양쪽 봉우리에서 뻗은 산줄기가 암자 앞을 감싸며 산문이 되었다. 암자 서쪽에는 바위가 높다랗게 우뚝 서 있는데 그 아래로 맑고 급한 물결이 빙 돌아서 웅덩이가 되고 바위 위는 평평하여 사람이 앉을 만하였다. 남쪽으로 산문을 바라보고 아래로 잔잔하게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니 참으로 절경이었다. 주경유(周景遊)가 이곳을 백운대(白雲臺)라고 이름 지었는데, 내 생각에는 이미 백운동과 백운암(白雲庵)이 있어 이 이름이 혼동되니 백(白)을 청(靑)이라 고치는 것이 낫겠다고 여겨졌다.
산인(山人) 종수(宗粹)가 내가 왔다는 말을 듣고 묘봉암(妙峰庵)에서 이곳으로 찾아왔기에, 인하여 서경과 함께 백운대 위에서 술 두어 순배를 돌렸다. 서경은 학질을 앓아 돌아가려 하였는데, 나는 비록 허약하고 병들기는 하였지만 기어이 올라가 보고 싶었다. 여러 승려들이 서로 의논하여 말하기를, “견여(肩輿)가 아니면 안 되니, 전에 주 태수(周太守)께서 이미 타고 가신 고사(故事)가 있습니다.” 하였다. 내가 웃고 승낙하였더니, 잠시 후에 견여가 마련되었다고 알려왔는데, 모양이 간단하고 쓰기에 편하였다. 드디어 서경과 작별하고 말을 타고 갔다. 응기와 종수 등 여러 승려들이 혹은 앞에서 인도하고 혹은 뒤를 따랐다. 태봉(胎峯) 서쪽에 이르러 시내 하나를 건너 비로소 말에서 내려 걷다가 다리가 부들부들 떨리면 견여를 탔으니, 번갈아 가며 그 힘을 쉬게 하려는 것이었다. 여기서부터 산을 나올 때까지 대체로 이 방책을 썼는데, 실로 산을 유람하는 묘한 방법이요 명승지를 구경하는 좋은 기구였다. 시 한 편을 지어 본 바를 기록하였다. 이날은 철암(哲庵)과 명경암(明鏡庵)을 거쳐 석륜사(石崙寺)에서 잤는데, 철암이 가장 소쇄(蕭灑)하였다.
맑은 샘물이 암자 뒤의 바위 밑에서 솟아 동서로 갈라져 흘렀는데 맛이 매우 달고 시원하며, 시야가 꽤 높게 트였다. 석륜사 북쪽에는 바위가 매우 기이하여 마치 큰 새가 머리를 들고 푸드득 날아가려는 것 같았다. 그래서 옛 이름이 봉두암(鳳頭岩)이다. 그 서쪽에 우뚝 선 바위가 있어서 사닥다리를 놓아야 오를 수 있는데, 경유가 광풍대(光風臺)라고 부른 것이다. 절 안에는 돌을 조각하여 불상을 만들어 놓았는데, 승려들이 영험하다고 했지만 믿을 수 없었다. 이튿날인 계해일에 걸어서 중백운암(中白雲庵)에 올랐다. 이름은 잊었는데 어떤 승려가 이 암자를 짓고 그 안에서 좌선(坐禪)을 하여 선의 이치를 크게 깨달아 하루아침에 이곳을 떠나 오대산(五臺山)으로 들어가 지금은 승려가 없다 한다. 창 앞에는 묵은 우물이 완연하며, 뜰아래에는 푸른 풀이 쓸쓸할 뿐이었다. 중백운암을 지난 뒤로 길이 더욱 가파르게 깎아질러 공중에 매달린 것처럼 수직으로 올라가, 있는 힘을 다하여 더위잡고 기어오른 뒤에야 산꼭대기에 이르렀다. 그제서야 견여를 타고 산등성이를 따라 동쪽으로 몇 리 남짓 가니 석름봉(石廩峰)이 나왔다. 봉우리 꼭대기에 초막을 지어 놓았고 그 앞에 시렁을 매놓고 매를 잡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하는 일이 고되게 여겨졌다.
석름봉 동쪽 몇 리 되는 거리에 자개봉(紫蓋峰)이 있고, 또 그 동쪽 몇 리에 하늘에 닿을 듯이 솟아오른 봉우리가 있 는데, 이것이 국망봉(國望峰)이다. 만일 청명한 날씨를 만나면 용문산(龍門山)으로부터 서울까지 바라볼 수가 있는데, 이날은 산 안개와 바다의 운무(雲霧)가 자욱하게 끼어서 용문산도 바라볼 수 없었다. 오직 서남쪽 구름 사이로 월악산(月嶽山)이 희미하게 비칠 뿐이었다. 동쪽을 돌아보면 구름과 산이 천 겹 만 겹 첩첩으로 쌓여서 어렴풋이 상상만 되고 진면목은 자세히 보이지 않는 것이 태백산(太白山)ㆍ청량산(淸凉山)ㆍ문수산(文殊山)ㆍ봉황산(鳳凰山)이고, 남쪽으로 보였다 숨었다 하며 구름 속에 아스라한 것이 학가산(鶴駕山)ㆍ팔공산(八公山) 등 여러 산이며, 북쪽으로 형상을 감추고 자취를 숨기어 하늘 한쪽에 아득히 보이는 것이 오대산(五臺山)ㆍ치악산(雉岳山) 등 여러 산이었다. 바라보이는 물은 더욱 적어서 죽계(竹溪)의 하류인 구대천(龜臺川)과 한강의 상류인 도담(島潭)의 굽이 정도일 뿐이었다. 종수가 말하기를, “이 산에 올라 조망하기에는 가을날 서리 온 뒤가 좋고 혹은 오랜 비가 새롭게 갠 날이 좋은데, 주 태수도 비에 닷새 동안 막혀 있다가 개자마자 바로 올라갔기 때문에 멀리까지 볼 수 있었습니다.” 하였다. 나는 가만히 그 뜻을 이해하였으니, 처음엔 답답하게 막혔던 자가 필경 쾌함을 얻는 것인데, 내가 와서는 하루도 막힘이 없었으니 어떻게 만리의 쾌함을 얻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등산의 묘미는 꼭 멀리까지 보는 데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산 위에는 기온이 매우 고랭(高冷)하여 매서운 바람이 휘몰아쳐 그칠 사이가 없으므로, 나무가 자라면서 모두 동쪽으로 기울고 가지와 줄기가 굽어 있고 왜소하였다. 4월 그믐께라야 잎이 피기 시작하고 1년 동안 자라는 것이 몇 푼이나 몇 치에 불과하며, 앙상하게 시달려 모두 애써 싸운 모양을 하고 있으니, 깊은 숲과 큰 골짝에서 자라는 것과는 매우 달랐다. 거처에 따라 기운이 변하고 기르는 것에 따라 체질이 바뀌는 것이, 식물이나 사람이 무엇이 다르겠는가. 석름ㆍ자개ㆍ국망 세 봉우리가 서로 떨어져 있는 8, 9리 사이에 철쭉이 우거져 한참 난만하게 피어 너울거려서 마치 비단 병풍 속을 거니는 것 같기도 하고 축융(祝融)의 잔치에 취한 것 같기도 하여 매우 즐거웠다. 봉우리 위에서 술을 석 잔 마시고 시 일곱 장(章)을 지으니, 해가 벌써 기울었다. 옷을 털고 일어나 다시 철쭉꽃 숲을 지나 내려와서 중백운암에 이르렀다. 내가 종수에게 말하기를, “처음에 제월대(霽月臺)에 오르지 않은 것은 다릿심이 먼저 빠질까 염려해서였는데, 지금 산에 올라 구경하고도 다행히 남은 힘이 있으니 어찌 가보지 않겠는가.” 하고, 마침내 종수를 시켜 앞에서 인도하게 하고, 벼랑을 따라 발을 옆으로 디디면서 올라갔다. 이른바 상백운암(上白雲庵)이란 것은 불에 탄 지가 오래되어 풀이 우거지고 이끼가 끼었으며, 제월대가 바로 그 앞에 있는데, 지세가 외지고 까마득하여 정신이 아찔하고 떨려 오래 머무를 수가 없었다.
드디어 내려와서 이날 저녁에 다시 석륜사에서 묵었다. 갑자일에 나는 용기를 내여 상가타암(上伽陁庵)을 찾아 올라가 지팡이를 짚고 돌길을 더위잡아 환희봉(懽喜峰)에 올랐다. 환희봉 서쪽의 여러 봉우리들은 숲과 골짝이 더욱 아름다우니 모두 어제는 보지 못한 것이었다. 수십 보를 지나서 석성(石城)의 옛터를 찾았는데, 성안에는 주춧돌과 폐기된 우물이 아직 그대로 남아 있었다. 조금 서쪽으로 석봉(石峯)이 가파르게 치솟았는데, 그 위에는 수십 명이 앉을 수 있는 데도 소나무ㆍ삼나무ㆍ철쭉이 우거져 뒤덮고 있어 유람객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었다. 산중 사람들은 단지 모양이 유사하다는 이유로 산대바위[山臺巖]라고 불렀다. 내가 사람들을 시켜 가린 것을 찍어 내도록 하고 바라보니, 멀고 가까운 데가 안 보이는 것이 없어서 산의 아름다운 경치가 모두 여기에 있었다. 그런데도 주경유를 만나지 못하여 전날의 속된 이름을 그대로 지니고 있으므로 고치지 않을 수 없어 자하대(紫霞臺)로 바꾸었다. 그러고는 그 성을 적성(赤城)이라 불렀으니, “적성에 노을이 일어나 이름을 붙였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 자하대 북쪽에 두 봉우리가 동ㆍ서로 마주 보고 있는데 색은 하얗고 달리 이름이 없어, 내가 감히 동쪽 것은 백학봉(白鶴峰)이라 이름하고 서쪽 것은 백련봉(白蓮峰)이라 이름하여, 이른바 백설봉(白雪峰)과 함께 모두 백(白)으로 일컬었다. 이렇게 백(白) 자가 많이 들어가는 것을 꺼리지 않은 이유는 그 실상을 들어서 소백(小白)이란 이름에 부응하기 위해서였다.
여기에서 또 깊은 숲을 뚫고 높은 산을 넘어 굽어보다가 구름과 물과 바위와 골짝이 더욱 절승한 곳을 찾아냈으니, 곧 상가타암(上伽陁庵)이었다. 그 동쪽은 동가타암(東伽陁庵)이 있는데, 종수가 말하기를, “희선 장로(希善長老)가 처음으로 여기에 살았고, 그 뒤에 보조 국사(普照國師)가 여기에서 좌선 수도(坐禪修道)하여 9년 동안을 밖에 나가지 않고, 스스로 호(號)를 목우자(牧牛子)라 하였습니다. 시집(詩集)이 있는데 제가 일찍이 가지고 있던 것을 다른 사람이 빌려 갔습니다.” 하며, 몇 구절을 외우는데 모두 정신이 번쩍 들게 하니, 사람으로 하여금 오곡(五穀)이 익지 못한 탄식을 자아내게 하였다. 그 서북쪽의 금강대(金剛臺)와 화엄대(華嚴臺)는 옛 이름을 그대로 두었는데, 고승(高僧)의 자취를 표시하기 위해서였다. 동쪽의 가장 기이하고 빼어난 석봉(石峯)을 연좌(宴坐)라 이름하였으니, 이 또한 고승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상가타에서 계곡을 따라 내려오니, 고목(古木)과 푸른 등나무가 얽혀 하늘의 해가 보이지 않았으며, 가끔 수석이 매우 아름다운 곳이 있었다. 중가타(中伽陁)의 어귀에 왔는데 중가타에는 승려가 없어 나는 들어가지 않았다. 몇 걸음을 옮기니 몇 층의 폭포가 쏟아져 내리고 그 옆에 암석들이 어지러이 늘어서 있었다.
옛날에는 고죽(苦竹)이 뭉쳐났으나 지금은 다 말라 죽었는데 아직도 뿌리와 줄기가 볼만한 것이 있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죽암폭포(竹巖瀑布)라고 이름 지었다. 산승(山僧)이 말하기를, “이 바위에만 대가 난 것이 아니라 숲 아래 땅이 보이지 않게 빽빽하게 나서 온 산이 모두 그러했는데, 지난 신축년에 갑자기 일제히 열매가 열리더니 그해에 다 말라 죽었습니다.” 하니, 이상한 일이다. 그 이치를 알 수가 없다. 길을 걸어 작은 시내를 건너니 금당암(金堂庵)과 하가타암에 이르렀다. 중가타암 위에서 동쪽으로 들어가면 보제암(普濟庵)이 있고, 하가타암 옆에는 진공암(眞空庵)이 있었는데, 모두 승려가 앓고 있다 하여 들어가지 않았다. 하가타를 따라 내려와 시내를 건너서 곧장 관음굴(觀音窟)로 올라가서 유숙하였다. 이튿날인 을축일에 산에서 내려오니, 산 밑에 반석이 평평하고 맑은 물이 그 위로 쏟아져 쟁쟁히 울리며 흘러가고 양편에는 목련화가 만개하였다. 나는 그 옆에 지팡이를 세워 놓고 물가에서 양치질도 하고 장난도 하여 마음이 매우 유쾌하였다. 승려 종수가 “시냇물은 옥대(玉帶) 찬 손님 비웃으리니, 홍진의 자취 씻으려 해도 씻지 못하네.[溪流應笑玉腰客 欲洗未洗紅塵蹤]”라는 시구를 읊고는, “이것이 어떤 사람의 시입니까?” 하였다. 마침내 서로 쳐다보고 한 번 웃고는 시를 짓고 떠났다.
시내를 따라 몇 리를 가는데 모두 구름과 숲과 벼랑과 골짝이 절경이었다. 길이 갈리는 곳에 이르러 잠깐 쉰 뒤에, 응기와 종수와 여러 승려들은 초암동(草庵洞)으로 향하고, 나는 박달재[博逹峴]로 길을 잡아 갔다. 작은 박달재에 이르러 견여에서 내려 걸어가노라니 인마(人馬)가 그 밑에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말을 타고 시내를 건너 깊은 골짝을 빠져나와 큰 박달재를 넘으니, 곧 상원봉(上元峰) 한 줄기가 남쪽으로 뻗은 산등성이의 조금 야트막한 곳이었다. 거기서 상원사까지는 겨우 몇 리밖에 안 되지만 오를 힘이 없어서 그만두었다. 내려와 비로전(毗盧殿) 옛터 밑에 이르러 한낮에 시냇가 돌 위에서 쉬었다. 얼마 후 허공 간(許公簡)과 아들 준(寯)이 고을에서 찾아왔다. 맑은 샘과 무성한 나무가 사랑스러워 한동안 앉아서 얘기하고는 그 앉았던 돌을 비류암(飛流巖)이라고 이름 지었다. 이윽고 욱금동(郁錦洞)을 거쳐 나와서 고을에 이르렀다. 대저 소백산에는 수많은 바위와 수많은 골짝의 아름다운 경치가 있는데, 사찰이 있는 곳과 인적이 통하는 곳은 대개 세 골짜기가 있다. 초암과 석륜사는 산의 가운데 골짝에 있고, 성혈사(聖穴寺)와 두타사(頭陀寺) 등은 동쪽 골짝에 있고, 세 가타암은 서쪽 꼴짝에 있다. 산을 유람하는 자들이 초암과 석륜사를 거쳐 국망봉에 오르는 것은 길이 편해서인데, 얼마 지나 피곤하고 흥이 식으면 그만 돌아오고 만다. 비록 주경유처럼 기이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도 유람한 곳은 그중 한 골짝에 그치고 마니, 그가 지은 〈유산록(遊山錄)〉에 매우 자세하게 기술했지만 실상은 산승(山僧)에게 물어서 얻은 것이고 직접 눈으로 본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그가 명명한 광풍대ㆍ제월대ㆍ백설대ㆍ백운대가 모두 가운데 골짝에만 있고, 동쪽과 서쪽에는 미치지 못한 것이다. 쇠약하고 병든 내가 한 번 가서 온 산의 경치를 다 보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므로 결국 동쪽은 남겨 두어 다음날에 유람하기로 하고 오직 서쪽 골짝만 찾았다. 무릇 서쪽 골짝에서 얻은 백학봉ㆍ백련봉ㆍ자하대ㆍ연좌봉ㆍ죽암폭포 같은 절경을 마음대로 이름 지으며 사양하지 않은 것은 역시 주경유가 가운데 골짝에서 만난 절경에 했던 것과 같은 것이다. 내가 처음에 주경유의 〈유산록〉을 백운동서원의 유사(有司)인 김중문(金仲文)에게서 얻었는데, 석륜사에 와 보니 이 〈유산록〉을 현판에 써서 벽에 걸어 놓았다. 나는 그 시와 글의 웅장하고 빼어남을 좋아하여 가는 곳마다 펴서 읊으니, 마치 홍안 백발의 늙은이와 함께 서로 얘기하고 수창(酬唱)하는 것 같아서, 이 때문에 흥이 나서 취미를 얻은 것이 참으로 많았다. 산을 유람하는 사람은 참으로 기록이 없을 수 없고, 기록이 있는 것은 산을 유람하는 데 참으로 도움이 된다. 그러나 내가 느낀 것이 또 있으니, 문사로서 주경유(周景遊)보다 먼저 와서 유람한 자로 산인(山人)들이 일컫는 바로는 오직 호음(湖陰) 정 선생(鄭先生)과 태수 임제광(林霽光)뿐이다. 그런데 지금 그들이 기술한 것을 찾아보면 임 태수는 일언반구도 찾을 것이 없고, 호음의 시는 겨우 초암사에서 읊은 절구 한 수가 보일 뿐이다.
또 그 밖의 것을 찾아보면 석륜사의 승려가 황금계(黃錦溪)의 시를 가지고 있고, 명경암 벽에 황우수(黃愚叟)의 시가 있을 뿐이며, 더 이상은 보이는 것이 없다. 아, 영남은 곧 사대부에게 기북(冀北)같은 지역이다. 영주와 풍기 사이에 큰학자와 선비들이 잇달아 나와서 찬란하였으니, 이 산에 와서 유람한 사람이 고금을 통하여 얼마나 많았겠으며, 기술하여 전할 만한 것이 어찌 여기에 그치겠는가. 내가 생각건대, 죽계(竹溪)의 여러 안씨(安氏)들은 이 산 밑에서 정기(精氣)를 타고 나서 이름이 중원(中原)에까지 떨쳤으니, 틀림없이 이 산에서 노닐고 이 산에서 즐기고 이 산에서 읊고 노래한 자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산에는 벼랑에 새긴 것도 없고 선비들이 입으로 외는 것도 없어서, 자취가 없어 찾을 수가 없다. 대개 우리나라 풍속이 산림의 고아함을 좋아하지 않고, 일을 좋아하여 전술(傳述)하는 사람이 없다. 그러므로 명성을 드높이 세운 여러 안씨들과 큰 산으로 유명한 이 지역의 이 산처럼 빼어난 곳에 대해서도 마침내 전할 만한 문헌이 이와 같이 없으니, 다른 것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하물며 산 언덕이 적막하고 고요하여 천년 동안 참다운 은자(隱者)가 없으니, 참다운 은자가 없으면 참다운 감상(鑑賞)이 없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공문서 속에서 몸을 빼어 임시로 산어귀를 거니는 우리 같은 무리야 어찌 이 산에 가치를 실어주겠는가. 우선 본 것을 차례로 펴서 지은 것을 기록하노니, 뒤에 보는 자가 이 글에 대한 느낌이 또한 나의 주경유에 대한 느낌과 같을 것인가. 가정(嘉靖) 기유년(1549, 명종4) 5월 어느 날 서간병수(栖澗病叟)는 기산(基山)의 군재(郡齋)에서 쓰노라.
遊小白山錄
余自少往來榮豐間。其於小白。擧頭可望。投足可至。而倀倀然惟夢想神馳者。四十年于玆矣。去年冬。握符來豐。爲白雲洞主。私竊喜幸。以謂宿願可償。而冬春以來。嘗以事至白雲洞。輒不得窺山門而返者三矣。四月辛酉。宿雨新霽。山光如沐。乃往見諸生於白雲書院。仍留宿。翌日。遂入山。閔上舍筮卿與其子應祺。實從之行。緣竹溪而上十餘里。洞府幽邃。林壑窈窕。時聞水石淙激。響振崖谷之間。行渡安干橋。至草庵。庵在圓寂峯之東。月明峯之西。支峯之自兩峯來者。相抱于庵前爲山門。庵西有石高峙。其下淸流激湍。迤爲渟泓。上平可坐。南望山門。俯聽潺湲。眞絶致也。周景遊名之曰白雲臺。余謂旣有白雲洞,白雲庵。玆名不其混乎。不若改白爲靑之爲善也。山人宗粹聞余來。自妙峯庵來見于此。因與筮卿酌數巡臺上。筮卿患瘧將還。余雖抱羸疾。必欲登覽。諸僧相與謀曰。非肩輿不可。昔者。周太守已有故事。余笑而肯之。須臾告輿辦。制簡而用便。遂與筮卿別。乘馬而行。應祺及宗粹諸僧。或導或隨。至胎峯之西。越一澗。始舍馬步行。脚殆則乘肩輿。所以更休其力。自是至
出山。率用是策。實遊山之妙法。濟勝之良具也。作詩一篇記所見。是日。歷哲庵,明鏡。宿于石崙寺。哲庵最爲瀟灑。淸泉出庵後巖底。分派庵東西。味極甘洌。眼界殊高曠。石崙寺北。巖石甚奇。如巨鳥昂頭欲擧然。故舊名鳳頭巖。其西有石特立。梯而後可昇。景遊呼爲光風臺者也。寺中刻石爲佛像。僧言其靈異。不足信也。越明日癸亥。步上中白雲庵。有僧忘其名。構此庵。坐禪其中。頗通禪理。一朝去入五臺山。今無僧。牕前古井宛然。庭下碧草蕭然而已。自庵以後。路益峻截。直上若懸。極力躋攀而後至山頂。乃乘肩輿。循山脊而東數里許。得石廩峯。峯頭結草爲幕。其前有結棚。捕鷹者所爲。可念其苦也。峯之東數里。有紫蓋峯。又其東數里。有峯崛起而干霄者。卽國望峯也。如遇天晴日曒。則可望龍門山。以及國都。而是日也山嵐海靄。鴻洞迷茫。雖龍門亦不得望焉。惟西南雲際。月嶽隱映而已。顧瞻其東則浮雲積翠。萬疊千重。可以髣像而不詳其眞面目者。太白也。淸涼也。文殊也。鳳凰也。其南則乍隱乍見。縹緲於雲天者。鶴駕,公山等諸山也。其北則韜形匿跡。杳然於一方者。五臺,雉岳等諸岳也。水之可望者尤鮮。竹溪之下流。爲龜臺之川。漢江之上游。爲島潭之曲。如是而止耳。宗粹曰。登望須秋天霜後。或積雨新晴之日。乃佳。周太守阻雨五日。得晴而卽登。故能遠眺。余默領其意。以爲始阻鬱者終得快。余之來也。無一日之阻。烏能得萬里之快哉。雖然。登山妙處。不必在目力所窮之外矣。山上氣甚高寒。烈風衝振不止。木之生也盡東偃。枝幹多樛屈矮禿。四月之晦。林葉始榮。一年所長。不過分寸。昂莊耐苦。皆作力戰之勢。其與生于深林巨壑者大不侔。居移氣。養移體。物之與人。寧有異哉。三峯相距八九里之間。躑躅成林。方盛開。爛熳綽約。如行錦障之中。如醉祝融之宴。可樂也。峯上。引三杯。題詩七章。日已向昃矣。拂衣而起。復由躑躅林中。下至中白雲庵。余謂宗粹曰。始不上霽月臺者。畏脚力之先竭耳。今旣登覽。而猶幸有餘力。曷不往見乎。乃令宗粹先導。緣崖側足而上。則所謂上白雲庵者。久爲灰燼。草沒苔封。而霽月臺當其前矣。地勢孤絶。神𢥠魂惕。不能久留也。遂下。是夕。再宿于石崙寺。甲子。余作意尋上伽陁。策杖攀磴。登懽喜峯。峯之西諸峯。林壑尤美。皆昨所未覩也。經數十百步。得石城故址。城中有遺礎廢井。依然尙在。稍西。有石峯峭聳。其上可坐數十人。松杉躑躅。羅生掩翳。遊人未嘗至也。山中人。特以其形似。呼爲山臺巖。余令人剔翳而望之。遠無遁近無遺。山之形勝。盡在於是。而不遇周景遊。名仍往陋。不可以不改。乃改爲紫霞臺。仍呼其城爲赤城。取赤城霞起而建標者義也。臺之北兩峯。東西對峙。其色皓白而無稱謂。余敢名其東曰白鶴。其西曰白蓮。與所謂白雪峯俱稱白。不厭其白之多者。所以揭其實。以副小白之名耳。自是。又穿深越峻。下瞰而得雲泉巖壑之尤勝者。卽上伽陁也。其東偏有東伽陁。宗粹云。希善長老初住此。後普照國師於此坐禪修道。九年不出。自號牧牛子。有詩集。粹曾得之。爲人借去。誦其數句。皆警策。令人有五穀不熟之歎也。其西北。金剛,華嚴二臺仍舊名者。所以識高僧之迹也。其東石峯最奇秀。名之曰宴坐。亦以高僧故也。從上伽陁
循澗而下。古木蒼藤。不見天日。往往得泉石甚佳。至中伽陁之口。中伽陁無僧。余不入。行數步。有瀑流數層。奔逬激射。其傍巖石錯列。舊有苦竹叢生。今皆枯死。尙有根莖可見。遂名爲竹巖瀑布。山僧云。非徒此巖竹生。林下撲地叢密。擧一山皆然。往在辛丑之歲。忽齊結實。其年盡枯死。異哉。此理亦不可曉也。行度小澗。乃至金堂。及下伽陁庵。其自中伽陁之上。東入有普濟等庵。下伽陁之傍。有眞空庵。皆以僧病不入。從下伽陁而下。渡澗直上觀音窟止宿。翌日乙丑。下山。山下盤石平鋪。淸泉注其上。鏘鳴汨㶁。兩邊木蓮盛開。余植杖其傍。臨流漱弄。意甚得。僧宗粹擧吟溪流應笑玉腰客。欲洗未洗紅塵蹤之句曰。是何人語也。遂相視一粲。題詩云云而去。傍澗行數里。皆雲林崖壑之勝。至一分蹊處少憩。應祺與宗粹等諸僧。向草庵洞。余取路博達峴而去。至小博達峴。舍肩輿步行。人馬來候于其下矣。乘馬渡澗。行深谷中。踰大博達峴。卽上元峯一支南走之腰脊小低處也。其距上元寺僅數里。力不能登陟而止。下至毗盧殿遺址之下。午憩于澗石上。有頃。許公簡及兒子寯。自郡尋至。愛其淸泉茂樹。坐語移日。名其坐石爲飛流巖。旣乃由郁錦洞而出。至于郡矣。夫以小白爲山。有千巖萬壑之勝。而寺刹所在。人迹所通者。大槩有三洞焉。草庵,石崙。在山之中洞。聖穴,頭陁等寺。在其東洞。三伽陁等庵。在其西洞。遊山者由草庵,石崙而登國望。取道之便。已而力倦興闌則遂返。雖以周景遊之好奇。所歷止其中一洞耳。其爲遊山錄。記述頗詳。其實皆問諸山僧而得之。非目擊也。故其所命名如光風,霽月,白雪,白雲。皆在中一洞。而東西則未之及也。余以衰病。一往而盡一山之勝。固亦難矣。遂置其東。以竢後日之遊。而惟尋西洞焉。凡西洞所得之勝。如白鶴,白蓮,紫霞,宴坐,竹巖之類。輒率意創名而不辭者。亦猶景遊之於中洞所遇之境然耳。余初得景遊遊山錄於白雲院有司金仲文處。及到石崙。則是錄也書于板掛壁矣。余賞其詩文之雄拔。到處披詠。若與紅顔白髮翁。對語相酬唱於其間。賴此發興而得趣者良多。信乎遊山者不可以無錄。而有錄之有益於遊山也。雖然。余之所感者又有焉。景遊之前文士來遊者。山人所稱道。獨湖陰鄭先生及林太守霽光而已。而今求其所紀述。林守則無片言隻字之可尋。而湖陰之詩。僅見於草庵中一絶耳。又求其他。則石崙寺僧。有黃錦溪之詩。明鏡庵壁。有黃愚叟之詩。此外無見焉。噫。嶺南乃士大夫冀北之鄕。榮豐之間。鴻儒碩士相踵而作。彬彬如也。則來遊者古今何限。紀述之可傳者。亦何止於是乎。吾意竹溪諸安。毓秀於玆山之下。名振中原。其必有遊於斯。樂於斯。詠歌於斯者。而山無崖刻。士無口誦。泯乎其不可尋矣。大抵吾東之俗。不喜山林之雅。無好事傳述之人。故其風聲樹立。卓卓如諸安。巨嶽名區。巍巍如此山者。而亦卒無文獻之傳乃如是。他尙何論哉。況山阿寂寥。千載無眞隱。無眞隱。則其無眞賞可知。而脫身簿領。假步山扃如吾輩者。又豈足爲玆山之輕重哉。姑且歷敍所見。錄其所述。後之覽者。其能有感於斯文。亦猶吾之於周景遊乎。嘉靖己酉五月日。栖澗病叟。書于基山之郡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