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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시: 2025년 12월 6일 (토)
2. 날씨: 맑음
3. 경로: 봉산사 - 비봉산 - 봉황숲생태공원 - 대봉정 - 말티고개 - 선학산전망대 - 남산루 - 진주상대동고분군 - 진주시청 - 진양교 - 경남문화예술회관 - 진주교 - 남가람공원 - 천수교 - 진주성/촉석루/의암 - 진주대첩 역사공원 - 진주중앙시장 - 진주교회 - 진주고 - 진주여고 - 봉산사
4. 거리: 약 16.9km
5. 소요시간: 약 4시간 40분
6. 여행정보 및 걷기 포인트: 진주에나길, 비봉산, 선학산전망대, 촉석루, 진주교회
7. 지역: 경남 진주시
8. 트랙:
9. 코스 지도
[진주에나길] '참','진짜'라는 의미의 진주 사투리인 '에나'를 접목한 진주 에나길은, 역사문화생태 탐방로이다. 진주의 역사와 문화, 비봉산과 선학산을 아우르는 환경자원, 진주성과 남강 주변의 수변 자원을 연계하여 이색적이고 차별화된 쾌적한 도보여행을 즐길 수 있다. 또한, 망진산 봉수대와 가좌산은 접근성이 쉽고 비교적 평탄해 "도심 속 둘레길"로서 편백나무와 대나무 숲길을 산책하듯 거닐 수 있는 구간이기도하다.
1코스는 진주성 서장대에서 출발하여 비봉산, 선학산을 돌아 남가람문화거리를 돌아보는 15km의 구간으로 진주의 진산인 비봉산과 선학산에서 진주 도심의 한가운데로 흐르는 남강의 풍광과 도시 전체를 한눈에 감상할 수 있으며, 역사와 문화의 거리를 거닐면서 예술을 즐기고 휴식할 수 있다. (진주시청)
[서봉지, 가마못] 가마처럼 생겼다 하여 가마못이라 하였다 하는데, 원래의 이름은 서봉지로서 봉이 이 못에서 쉬었다는 전설이 있다.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는 진주에 강(姜)·하(河)·정(鄭)씨들의 집안에 인물이 많이 나는 것은 비봉산이 정기를 타고 났기 때문이라고 여기고 무학대사로 하여금 비봉산의 맥을 끊게 한 후 서봉지를 가마못이라 바꾸었다. 가마솥처럼 펄펄 끓어 봉이 얼씬도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는데, 이러한 비봉산의 영험은 최근까지 이어져 상봉동 주민들에게 액운이 끊이지 않아 몇 해 전부터 동제를 지내고 있다. 1980년대 초부터 주택단지와 학교가 세워졌으며 현재 상봉제2아파트와 진주봉원중학교가 위치한 곳이다. (향토문화제전)
[비봉산] 경남 진주시의 봉안동과 초장동의 경계에 위치한 산으로 집현산 줄기가 남향으로 달려오다가 남강 북단에서 형성한 산이다. 비봉산은 집현산·자굴산·황매산을 이어서 남덕유산에 이어진다. 그래서 여지도서(진주)에서는 "비봉산은 안음 덕유산으로부터 뻗어 와서 진산이 되었다."라고 수록하였던 것이다. 북쪽으로는 완만한 능선을 이루지만 남쪽은 가파르다. 비봉산은 진주 분지를 감싸 안듯이 양쪽 능선이 감아 돌아 남강에 이른다. 비봉산은 봉황이 양날개를 활짝 펴고 날아오를 듯한 풍수 형국을 하고 있어 비보를 하였던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진주의 진산(鎭山) 비봉산은 진주 8경 중의 하나로 복사꽃이 만발한 봄의 경치가 가장 아름다운 곳이며 진주 시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어 시민들에게는 고향처럼 느껴지는 산임. 원래 이름은 대봉산이며, 고려 시대 때 대성한 진양 강씨들과 연관된 이야기와 비봉산 가마못에 대한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다.
대봉산이 비봉산으로 된 전설이 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스승이었던 무학대사가 진주에 인재가 많이 나는 기운을 끊기위해 대봉산에 있는 바위를 깨뜨렸다. 바위에서 봉황이 날아가버려 그때부터 산의 이름이 비봉산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이상 진주시청)
[대봉정] 진주의 진산인 비봉산의 옛 이름은 대봉산이었다. 대봉정은 대봉산의 정기를 잇는다는 뜻으로 정면으로 진주성과 천수교, 망진산을 바라보며 동측으로 월아산, 서측으로 지리산을 바라볼 수 있는 명당이다. (진주시청)
[말치고개] 경남 진주시의 옥봉동에 위치한 고개로 비봉산과 선학산의 중간에 있는 고갯길이다. 조선 전기부터 진주와 삼가·의령을 잇는 대로(大路)였다. 1592년 제1차 진주성 전투 당시 왜군은 의령·대곡을 거쳐 마현을 넘어 진주성을 공격하였다. 마현은 지세가 말머리[馬頭]와 같이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또는 말띠 과부가 이 고개에서 죽어서 그 지명이 유래했다거나 진주시장에 와서 소나 말을 팔고 가는 고개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다고도 한다.
진양지에 의하면 한 지관(地官)이 마현 중턱을 파서 길을 내면 인재가 전보다 배나 더 나올 것이다고 하여 진주 사람들이 마현에 대로를 내었다. 조선 초기에 진주 고을은 인재가 성하여 영남 인재의 반이 진양에 있었으나 마현에 길을 낸 뒤로는 인재가 점점 그 전과 같지 않았다. 대개 마현은 진주의 진산인 비봉(飛鳳) 형국의 좌익(左翼)인데, 마현에 대로를 개설하면서 비봉 형국의 좌익을 밟아 파괴함으로써 인재가 나오지 않았던 것이라고 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봉황교]는 선학산과 비봉산을 잇는 보행 교량으로 봉황의 모습을 한 점이 특징이다.(진주시청)
[선학산전망대]는 진주시와 인근 지역의 아름다운 전경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는 명소이다. 선학산과 그 주변의 자연경관을 조망할 수 있으며, 특히 일출과 일몰 시각에 방문하면 장관을 이룬다. 정상 바로 아래에는 남강과 진주 시내가 한눈에 보여 전망이 좋고 시가지와 접근성이 좋아 이곳 주민들의 문화공간으로 자리 잡은 곳이다. 주변에는 산책로와 휴식 공간이 조성되어 있어 가족 단위 방문객들이나 가벼운 트레킹, 여가를 즐기기에도 적합하다. 자연과 도시가 어우러진 풍경을 만끽하며 힐링할 수 있는 장소로, 진주를 찾는 이들에게 추천할 만하다. (네이버 지식백과)
[선학산,135.5m] 경남 진주시의 하대동과 상대동에 걸쳐 있는 산으로 진산인 비봉산의 좌청룡에 해당하는 산이다. 서쪽으로는 남강에 면하여 절벽을 이루고 있으며, 남쪽으로 선학산 줄기가 세 갈래로 뻗어 내리면서 형성된 큰돗골[大猪洞]과 작은돗골[小猪洞]에 논이 형성되어 있었다. 동남쪽으로는 완만한 능선이기 때문에 대부분 밭으로 개간되어 있다.
선학산은 명당으로 이름이 나서 진주 소씨 시조묘를 비롯하여 진양 하씨, 진양 정씨 문중의 뛰어난 인물의 묘가 소재한다. 선학산을 수록한 사료는 찾을 수 없다. 조선지형도에도 표기가 되어 있지 않다. 선학산 동북쪽에는 선학재가 있었다. 지금도 사람들의 왕래가 많다. 이 길은 상대동 사람들이 넘나들던 고갯길인데, 조선지형도(진주)에서 연로(聯路)를 의미하는 점선·실선으로 표기해 놓았다. (네이버 지식백과)
[디비리암] 경남 진주시의 상대동 모덕촌에서 옥봉동까지 남강 변의 벼랑이다. 남강이 선학산(仙鶴山)에 맞부딪혀서 형성된 벼랑은 병풍을 펼쳐놓은 듯이 깎아지른 절벽을 이루고, 지금의 합동버스터미널 주변의 하얀 모래사장과 어울려 절경을 이루었다. 평소 상대동·상평동 사람들이 벼랑 밑으로 난 길을 통해서 진주시내로 통행할 수 있었다. 디비리암 길은 조선지형도(진주)에 소로(小路)를 의미하는 점선으로 표기해 놓았다. 남강에 큰물이 지면 선학산 큰돗골(大猪洞)을 통해서 선학산 남서쪽 고개를 넘어 시내로 통행할 수 있었다. 선학재는 상대동 사람들이 넘나들던 고갯길인데, 조선지형도(진주)에서 연로(聯路)를 의미하는 점선·실선으로 표기해 놓았다. 디비리암 중간 벼랑에 수령 300년 가까이 되는 느티나무(시 보호수)가 있다.
디비리암에서 '디'는 '매우', 또는 '크다'는 의미의 경상도 지역말이고, '비리'는 '벼랑'을 의미하는 경상도 지역말이다. 따라서 디비리암은 '큰 벼랑'을 의미하는 지역말에서 유래했다. 디비리암은 '디비리'나 '디벼리'라고도 불린다. (네이버 지식백과)
[형평운동]은 1923년 4월 진주에서 조직된 형평사(衡平社)의 활동을 일컫는다. ‘저울[衡]처럼 평등한[平] 사회를 지향하는 단체[社]’란 뜻을 가진 형평사의 주목적은 가장 차별받던 천민 백정들의 신분해방이었다. 이때 백정들 가운데는 일반인을 능가하는 자산가가 많았고, 교육을 통해 지적 수준이 높아지면서 신분의 불평등을 타파하려는 시대적 각성이 높아지게 되었다. 특히 봉건적 성향이 농후한 영남지방에서 신분의 불평등을 타파하려는 형평운동이 일어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일차적인 목적이 ‘백정’이란 특정 집단에 대한 차별 철폐와 인권 존중, 평등 대우를 주창하는 것이었지만,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권리와 존엄성, 평등’이라는 보편적인 가치를 일깨우는 활동이었다는 점에서 형평운동은 우리 역사상 평등사회를 이룩하려는 대표적인 인권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형평운동은 1923년 4월 24일 경상남도 진주에서 거행된 형평사의 결성에서 시작되어 1935년 4월 24일 제13차 형평사 전국대회 때 단체의 이름을 대동사(大同社)로 바꿀 때까지 지속되었다. 형평사는 일제강점기 동안에 가장 오래 지속적으로 활동한 사회운동단체라는 점에서 그리고 진주는 형평운동의 발원지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네이버 지식백과)
남강(南江)가 바위 벼랑 위에 장엄하게 높이 솟은 [촉석루]는 영남(嶺南) 제일의 아름다운 누각임을 자랑한다. 고려 고종 28년(1241)에 창건하여 8차례의 중건과 보수를 거쳤던 이 누각은 진주성의 남장대(南將臺)로서 장원루(壯元樓)라고도 하였다. 전쟁이 일어나면 진주성을 지키는 지휘본부였고, 평화로운 시절에는 향시(鄕試:初試)를 치르는 고시장(考試場)으로 사용되었다. 6.25 때 불탄 것을 시민들의 힘을 모아 진주 고적 보존회를 만들어 1960년에 복원하였는데 건물은 팔작지붕에 다락루의 형태를 하고 있으며, 누각 밑의 돌기둥은 창원의 촉석산에서 채석하였고 목재는 강원도 오대산에서 가져왔으며 루에는 4개의 현판과 시인 묵객들의 시판이 걸려있다. 매년 가을 진주성에서는 ‘진주남강유등축제’가 개최되어 독특한 볼거리를 자랑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진주대첩 역사공원]은 임진왜란 진주대첩 기념과 호국충절의 고장인 진주의 얼을 기리고, 국난 극복의 역사 현장을 관광 자원화하기 위해 조성된 공간이다. 단순한 여러 시대를 걸쳐 역사적 가치를 보존하고 있는 공간인 만큼 다채로운 문화를 품은 복합 유적지로 자리 잡고 있다. 공원 부지에서는 고려시대 토성과 조선시대 외성을 비롯해 기와, 토기, 도자기, 무기류 등 생활·군사 유물이 발굴되었으며, 현재는 역사 탐방로와 야외 전시 공간을 조성하여 그 가치를 전하고 있다. 또한 공원 내에 있는 ‘진주성 호국마루’에는 관광안내소, 진주성 매표소, 카페, 하모스토어(굿즈샵)가 마련되어 시민과 관광객에게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또한, 지하 1층은 주차장, 지상층은 공원지원시설과 역사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진주대첩] 1592년 4월, 왜군과의 전쟁이 시작된 후 1~2개월 동안 관군은 계속 지기만 했다. 하지만 가을로 접어들면서 조선군도 승전보를 보내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전투가 10월에 벌어진 진주성 싸움이다. 당시 진주 목사 김시민은 4,000명도 안 되는 병사를 거느리고 있었는데, 왜군은 무려 3만 명이었다. 10월 6일 전투가 시작되자 왜군은 3층 누각을 만들어 그 위에서 조총으로 사격을 가했다. 하지만 성안의 백성들은 적들을 향해 활을 쏘고, 성벽을 기어오르는 적에게는 돌을 던지거나 뜨거운 물을 끼얹어 물리쳤다. 치열했던 진주성 전투는 조선군의 승리로 끝났지만 아쉽게도 김시민은 왜군의 총에 맞아 숨을 거두었다. 그런데 1593년, 진주성에서의 패배를 앙갚음하려는 왜군이 다시 쳐들어와 두 번째 전투가 벌어졌다. 2차 전투에서는 관군과 의병의 결사적인 저항에도 불구하고 진주성은 함락당하고 말았다. 2차 진주성 전투 후 논개라는 여성은 적장을 끌어안고 장렬하게 죽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2025년 유등축제]
1909년 [진주교회]에서 시작된 형평운동은 백정이던 신도들에 대한 다른 신도들의 ‘동석예배 거부’가 발단이 됐다. 진주에 처음 세워진 교회는 1905년 호주의 의료 선교사였던 커렐 목사가 세운 옥봉리교회(현 봉래동 진주교회)인데, 이 교회에서는 원래 일반인과 백정들이 따로 예배를 보았다. 그러다가 1909년 부임한 라이얼 목사가 “하나님 앞에서는 누구나 차별 없이 평등하다”며 백정 신도들도 일반 신도들과 함께 예배 보기를 권했고, 이에 15명의 백정 신도가 일반 신도들의 예배에 참석했다. 하지만 당시 200여 명의 신도 중 라이얼 목사의 뜻에 따르던 30여 명 외 나머지 신도들은 백정들과 함께 예배드릴 수 없다며 교회를 떠났다. 이 ‘동석예배 거부 사건’은 백정들에게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대우받을 수 있다는 희망’과 함께, ‘당시의 차별적인 사회 분위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좌절을 동시에 안겨줬지만, 훗날 형평운동으로 발전하게 되는 사건이기도 했다. ‘동석예배 거부 사건’ 이후 스콜스와 켈리 두 선교사의 설득으로 일반 신도들과 백정 신도들이 화해하고, 그해 8월부터 함께 모여 예배를 보게 되었는데, 이는 신분 차별을 없애는 계기가 된 역사적인 일이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봉산사] 경남 진주시 상봉동에 있는 강이식(姜以式) 장군을 모시는 사당으로, 강이식 장군은 진주강씨의 시조로, 고구려 영양왕 9년(598) 임유관(臨楡關) 전투와 612년(영양왕 23) 살수대첩에서 수나라 대군 30여만 명을 섬멸시킨 명장이다. 950년 고려 광종은 고구려 병마도원수 강이식 장군의 구국충절을 기려 봉산사를 건립하고, 매년 한식날에 제사를 모시게 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1570년(선조 3)에 사당을 중건하고 재호를 봉강이라 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1716년(숙종 42)에 사당을 중건하였고, 1976년 다시 건립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