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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전서 3장 8-13절. 집사의 자격. 요약설교
집사의 자격을 6가지로 규정하는데 긍정이 절반이고 부정이 절반입니다.
8절. 이와 같이 집사들도 정중하고 일구이언을 하지 아니하고 술에 인박히지 아니하고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고
1. ‘집사’란 단어(διάκονος)는 원래 ‘섬기는 사람’(waiter, servant, minister)이란 뜻입니다.
‘정중한’이란 단어(σεμνός)는 ‘존경스러운, 신중한, 정중한’(venerable, honorable, grave, serious, dignified)이란 뜻입니다.
2. 여기 ‘집사’는 오늘날 안수집사를 가리키는데, 집사의 자격 8가지 중 7가지가 감독의 자격 15가지 절반과 대부분 일치합니다.
이것은 안수집사가 장차 장로 감독의 직분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장로의 자격이 집사의 자격보다 배나 더 많은 것은 그 만큼 장로는 안수집사보다 더 충성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서 혹시 안수집사가 새벽예배에 안 나오더라도 장로는 새벽예배에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교회(고*교회)는 장로가 새벽예배에 하나도 안 나오는 교회도 있습니다.
그것은 그 교회가 싸우면서 갈라져서 생긴 교회인데, 자격이 없는 사람을 장로로 세웠기 때문이었습니다.
3. ‘정중하고’란 말은 2절에 감독의 자격에서는 ‘단정하다’란 말로 쓰였는데, 단정하고 존경스럽고 예의 바르다는 뜻입니다.
감독이나 집사가 단정하고 정중하고 예의 발라야 하는 이유는 교회의 직분은 권력을 행사하는 직분이 아니고, 섬기고 봉사하는 직분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집사는 친절하면서도 예의 발라야 합니다.
혹시 불신자 친구가 처음 교회에 나오더라도 친절하면서도 예의 바라야지, 불신자 때처럼 경거망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집사가 되었다고, 교만하여 옛 친구를 냉대하고 무시함으로, ‘그 친구가 교회 집사가 되더니 사람이 싹 변해서 사람 무시한다’고 서운하게 생각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 집사는 친절하면서도 예의 바르고 정중해야 주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옛날 어른들이 ‘친할수록 더욱 예의를 지켜야 한다’(友也者 友其德也 不可以有挾也)고 했습니다.
부부간에도 예의를 지키라고 부부유별(夫婦有別)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유교의 삼강오륜은 구원의 은혜에 감사해서 우러나는 자발적인 도덕이 아니고, 바리새적인 외식적 규범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성경에도 고린도전서 13장 5절에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아니 한다”고 했습니다.
집사의 직분은 근본적으로 섬기고 봉사하는 직분입니다.
그러나 섬기고 봉사하는 데도 존경스럽고 정중하고 예의 발라야 합니다.
세상에서 낮은 자세로 섬기는 사람들은 자칫 함부로 농담하는 경향이 있으나, 교회 집사는 섬기는 일을 하면서도 그리스도인답게 존경스럽고 우아해야 합니다.
즉 당시에 세상 종은 천박스럽고 상스러운 말도 함부로 하고, 저질스러운 범죄를 서슴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종인 집사들은 품위가 있고, 존경스럽고, 도덕적이고 정결해야 합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4장 8절에는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받을 만한” 성도가 되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불신자들처럼 천박스럽지 않고, 늘 경건하고 정중하고 덕스러운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4. ‘일구이언 하지 말라’는 것은 섬기는 직분인 집사들이 이 사람에게는 이 말하고, 저 사람에게는 저 말하는 이중인격자가 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대개 노예처럼 약자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야 하니까, 일구이언을 잘했습니다.
그러나 집사는 장차 감독이 되어야 하니까, 일구이언하지 않고 신실한 인격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옛날 저의 아버지는 한번 말씀하시면, 반드시 그 말씀을 지키시는 분이었습니다.
글로 계약서를 쓰지 않아도 누구나 다 믿었습니다.
저도 자녀들에게 할 수 있으면 말의 신용을 지키려고 합니다.
대개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은 강자 앞에서는 이 말하고, 약자 앞에서는 다른 소리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께서는 “예면 예, 아니면 아니라”고 하면서 정직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37).
시편 15편 1-5절에는 “여호와의 장막에 머무를 자는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그의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아니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집사는 교회 재정을 담당하기 때문에, 신실성이 없는 사람은 집사직을 맡길 수 없습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도 일곱 집사를 세워서 교회 재정을 맡겼기 때문에, 집사는 일구이언하는 부정직한 사람을 세워서는 안 되었습니다.
사람은 유능하지만, 정직하지 않는 사람은 더욱 신용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콩으로 매주를 쑨다고 해도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부정 평가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린도전서 4장 2절에는 “맡긴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충성된 사람을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칭찬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5:21).
바울은 두기고를 ‘진실한 일군’이라고 칭찬했습니다(에베소서 6:21).
잠언 25장 19절에는 “진실하지 못한 사람을 의지하는 것은 위골된 발을 의지하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진실되고 충성된 증인이시라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3:14).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실되고 충성된 일꾼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이 잘했다 칭찬하시고, 더욱 높이 써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5. 술에 인박히지 아니하고
앞의 3절에서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하면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하지 않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 집사는 술에 인박이지 않아야 하고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않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같은 조건입니다.
술에 인 박인다는 것은 술에 중독되어서 술에 대한 통제 능력이 상실된 것을 가리키고, 술을 먹지 않으면 손발이 떨리고 정신을 차릴 수 없어서 술이 아니면 살 수 없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술뿐만 아니라 담배도 중독에 빠지면, 담배를 안 피우면 손발이 떨려서 정신을 차릴 수 없습니다.
이렇게 술과 담배는 중독성이 심합니다.
옛날에는 ‘양귀비’란 아편에 중독된 사람이 많았습니다.
요즘에는 우리나라 사람도 ‘마약’에 중독된 사람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물론 아편이나 마약도 의약품으로 유용하게 사용하면 진통제 역할을 해서 좋은 식품입니다.
그러나 마약과 아편에 중독되면 살림을 말아먹습니다.
‘노름’도 중독성이 있습니다.
일 년 농사를 다 하고 겨울에 노름방에 가서 살림을 다 날려버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노름하다가 마누라까지 팔아먹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초창기부터 술과 담배와 노름과 첩살이를 금하는 좋은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초대교회나 구라파 교회는 지금도 술 먹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감독의 직분자는 술을 즐겨서는 안 된다고 했고, 집사는 술에 인박이지 않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장로나 안수집사는 고사하고, 학습 교인만 되어도 술과 담배를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학습문답 49번).
성경 에베소서 5장 18절에는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잠언 23장 29-31절에는 술 취하면 다투고 살인하므로, 술을 보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노아같이 경건한 사람도 술 취해서 손자를 저주했습니다( 창세기 9:21-25).
고린도전서 6장 10절에는 “술 취한 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이어받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사무엘상 1장 14절에는 “네가 어느 때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술을 끊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교회 장로 두 사람(홍*목, 신*균)은 밤이면 가게에서 몰래 술을 즐기는 사람들도 있고, 어떤 장로(나*민)는 매일 밤마다 화투를 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는 새벽예배는 하나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술은 마귀가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이처럼 숨어서 술 먹고 숨어서 화투하는 장로들은 교회 일을 협조적으로 하지 않으려고 하고, 이상하게 시비를 하고 싸우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 집사님들은 술 취하지 않도록, 열심히 기도하고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6.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고
오늘날 장로들로 구성된 당회는 교회 정책을 결정하고, 선거와 교회 기관을 감독하지만, 집사들로 구성된 제직회는 교회 재정을 관리합니다.
즉 헌법 정치 21조 2항에는 “제직회는 교회에서 위임한 금전을 처리하고, 구제와 경비에 관한 사건과 금전 출납은 모두 제직회에서 처리한다”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집사가 교회 재정을 취급하기 때문에, 집사가 더러운 이를 탐하면, 교인들이 헌금한 돈을 마치 자기 돈인 양 사적인 목적으로 유용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어려운 이웃에게 나누어줄 구제비를 자기 마음대로 처분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돈이 힘’이라고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는 재정 지출을 많이 해주고, 마음에 안 든 사람에게는 까다롭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집사는 돈을 탐하지 말고, 교회 공동의회가 정해준 대로 예산에 따라서 공정하게 회계 관리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집사는 제직회 때 재정 사용처를 투명하고 분명하게 밝혀서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현대 교회는 바쁘기 때문에 제직회에 잘 참석을 안 합니다.
이것은 교회 재정을 재정부에 맡긴다는 장점이기도 하지만, 제직들이 교회 재정관리에 무관심하다는 뜻도 있습니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이유는 제직회에 참석하면 늘 싸우기만 하니까, 예배 때 받은 은혜를 잃지 않기 위해서 제직회에 참석하지 않고 집으로 도망가버립니다.
그러므로 제직들은 평상시에 기도를 많이 하고 은혜 생활을 잘해서, 제직회가 은혜롭고 싸움판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제직회를 활성화하려면, 제직회가 재정 지출만이 아니라, 제직회에서 어려운 성도들을 위해 기도해주고, 찬양대회나 소그룹 활동이나, 유익한 교육프로그램을 전개하면, 제직들이 자발적으로 많이 참여할 것입니다.
9절.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지니
1. ‘깨끗한 양심’은 그릇이고, ‘믿음의 비밀’은 내용물입니다.
‘깨끗한 양심’은 그리스도의 보혈로 깨끗하게 씻음 받은 양심을 가리킵니다.
히브리서 10:22.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믿음의 비밀’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받은 믿음을 가리키고, ‘비밀’이란 믿지 않는 사람은 그 구원의 도리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선한 양심’은 성령의 감동으로 예수님 믿고 회개하여 새롭게 된 양심을 가리키고, 이 선한 양심을 바탕으로 해서 다시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받아서 ‘믿음’이 성장해갑니다.
2. 이 ‘양심’과 ‘믿음’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디모데 목사에게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고 권면했습니다( 디모데전서 1:19).
베드로전서 3장 21절에서 사도 베드로는 믿음 생활이란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해서 찾아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양심을 버린 자는 믿음에 관해서 파선한 자라”고 했습니다( 디모데전서 1:19).
이처럼 ‘믿음’이란 ‘착한 양심’이라는 그릇에 담아진 것이기 때문에, 영지주의 같은 이단자들은 양심이 마귀에게 화인 맞아서 거짓을 말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디모데전서 4:2).
이런 ‘착한 양심’은 성도들이 하나님이 보고 계신다는 신전의식(神前意識)을 가지고 모든 일을 하게 만듭니다.
시편 139편 1-4절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행실을 다 보고 계시며, 마음의 생각도 통촉하고 계신다고 했습니다.
이 ‘착한 양심’은 기도하고 성령님 모시고 살아갈 때, 항상 가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조금이라도 거짓되고 악한 마음을 가지면, 금방 성령님의 감동하심이 떠나가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성령님의 감동과 인도가 아니면,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한 바울 사도는 “내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23:1).
어떤 집사님은 시장에서 장사하는데 “밑지고 판다, 본전도 안 된다”고 거짓말하는 것을 늘 회개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장사하는 분들이 도무지 거짓말을 하지 않고 장사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이것은 남에게 피해를 주려고 한 말이 아니고, 자신이 먹고 살기 위해서 한 말이기 때문에 큰 죄책감을 가지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단지 다른 데 보다 더 폭리를 남겨서는 안 되고, 같은 말이라도 “비싸게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저도 품삯은 벌어야지요”라고 하면서 지혜롭게 말하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 교회에는 장사하시는 분들이 많이 계신데요, 이렇게 거짓말 하지않고 진실하게 장사하려고 하면, 손님들이 다 느끼고 더 많이 찾아올 것입니다.
3.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란 불신자들이 알지 못하는 구원의 체험과 감사를 가진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구원의 체험과 감격’이 있어야 집사로서 주님께 충성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는 법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도 디모데전서를 시작하면서 ‘자신은 죄인 괴수지만, 예수님이 용서해주시고, 구원해주신 지극한 은혜’에 대한 간증을 했습니다. (1:12-17)
이런 비밀스러운 구원의 체험과 감격이 있어야, 자발적으로 교회에서 집사로 주님께 충성할 수 있습니다.
마치 자녀들이 부모에게 효도할 수 있는 것은 ‘부모님의 희생적인 사랑’과 ‘은혜에 대한 감사’에서 비롯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체험과 감사가 없으면, 교회에서 헌금이나 봉사를 해놓고, 반드시 그에 대한 댓가를 요구해서, 존경받기를 원하고 높은 지위를 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명령을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나는 무익한 종입니다”라고 말하라고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7:10)
그런데 실제로는 집사님들 중에 어떤 봉사나 헌금을 해놓고, 알아주지 않으면 얼마나 화를 내면서 대항합니까?
물론 열심히 수고하고 봉사하신 분들에 대해서는 목사나 장로가 감사하는 마음으로 광고하고 칭찬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혹시 실수로 광고가 빠지더라도 당장 시험에 들어서 항의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많은 헌금을 하거나 큰 물건을 봉헌해놓고도 도무지 광고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광주에서 남편이 교육감을 오래 한 박영신 권사님은 적십자 총재도하셨는데, 교회에 오시면 화장실 청소를 도맡아 하시고, 어려운 이웃을 몰래 많이 도우셨습니다.
저도 그 권사님에게 도움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크게 도와주시고서는 부족하다고 얼마나 겸손해하시는지 모릅니다.
이처럼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암암리에 도우셔도 하나님은 아시고 사람들도 다 압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에서도 그런 분이 몇 분 계시더라고요.
제가 다른 지방에 가면 그런 분을 자랑할 것입니다.
아무튼 집사님들은 ‘이 벌레만도 못한 나를 구원해주시니 이 몸 바칩니다’라고 하는 믿음의 비밀을 가진 분들이어야 합니다. 할렐루야
다윗은 이런 감사를 가지고 “나는 무엇이고 내 집은 무엇이관대 나를 이에 이르게 하셨나이까” 라는 감사를 잃지 않았습니다. (사무엘하 7:18)
역대상 29장 14절에서는 “나와 나의 백성이 무엇이관대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입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지고,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직분 잘 감당하시고, 하나님께서 가정과 자녀들에게 큰 복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10절. 이에 이 사람들을 먼저 시험하여 보고 그 후에 책망할 것이 없으면 집사의 직분을 맡게 할 것이요.
1. ‘시험하다’(δοκιμάζω)는 단어는 금속을 제련하여 순수성을 알아보듯이, 그 사람이 진짜 집사직에 합당한지 알아보는 것을 가리킵니다.
‘책망할 것이 없다’는 단어(ἀνέγκλητος: blameless)는 법적 용어로서 처벌할 내용이 없다는 뜻입니다(making legal charges against someone in a court of law).
이처럼 집사가 교회에서 법적으로 처벌할 만한 문제가 없는 사람이어야 함을 가리킵니다.
2. 교회에서 집사를 시험해보라는 것은 8-9절에서 말씀한 집사의 자격 조건(정중하고 일구이언을 하지 아니하고 술에 인박히지 아니하고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고,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에 합당한 사람인가 테스트해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이스라엘 백성을 시험해보셨습니다.
신명기 8장 16절에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면서 살 것인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육신의 욕망을 따라 원망하면서 살 것인가를 시험하셨습니다.
요즘에도 교회에서 안수집사를 세울 때는 자격이 있는지 여러 가지 조건을 시험합니다.
주일성수를 하는지, 십일조를 하는지, 제사를 지내지 않는 등의 자격 조건을 테스트합니다.
어떤 사람은 주일에 친척 결혼식이 있다고, 주일학교 교사직을 버리고 결혼식에 가버리면, 그 주일학교 학생들이 선생님이 없이 방황합니다.
어떤 사람은 월급의 십일조는 하는데, 부동산이 팔려서 얻은 소득의 십일조는 무서워서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종가집 제사에 참석 안 하면, 친척들과 원수가 될까봐 제사에 참석하고 귀신에게 절합니다.
어떤 사람은 부흥사경회에 순서를 맡았는데, 남편이 회사에 부부동반으로 참석해야 한다면서 순서를 빼먹어버립니다.
어떤 사람은 구역장인데 춘계 대심방 때 심방대원 일을 못합니다.
이런 것들이 다 집사 자격을 시험하는 조건들이 될 수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불같은 시험으로 연단 받아도 금같이 빛나면, 주님이 재림하실 때 칭찬과 존귀를 얻는다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 1:7.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3. ‘책망할 것이 없으면’이란 시험에서 합격한 사람으로서 집사의 직분을 맡게 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즉 8-9절의 여섯 가지와 12절의 두 가지(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하고, 자녀와 자기 집을 잘 다스려야 할 것)에서 열거한 집사의 자격 요건에 합격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도 요한계시록 2-3장에서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대해서 칭찬과 책망을 하셨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봉사는 잘했다고 칭찬을 받았으나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책망을 받았습니다.
서머니 교회는 칭찬만 받고 책망을 받지 않았습니다.
버가모 교회는 핍박 속에서도 믿음을 지켰다고 칭찬을 받았으나, 우상의 제물을 먹고 음행한다고 책망을 받았습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충성 봉사한 것을 칭찬받았으나, 거짓 선지자를 용납한다고 책망을 받았습니다.
사데 교회는 칭찬을 하나도 못 받고, 살았다 하나 죽은 자라고 책망을 받았습니다.
빌라델피아 교회는 적은 힘을 가지고도 하나님의 말씀을 지켰다고 칭찬을 받았고, 계속 굳센 믿음을 가지라고 권면을 받았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차갑지도 않고 덥지도 않다고 책망받고, 회개하여 열심을 내라는 말씀을 받았습니다.
소아시아 일곱교회처럼 성도들도 칭찬받을 점과 책망받을 점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집사가 되려면, 집사의 여덟 가지 자격 조건에 책망받을 일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번에 우리 교회도 안수집사와 권사님 선거를 하게 되었습니다.
아무쪼록 책망받을 것이 없고, 칭찬받아서 모두 당선되시기를 바랍니다.!
11절. 여자들도 이와 같이 정숙하고 모함하지 아니하며 절제하며 모든 일에 충성된 자라야 할지니라.
1. ‘여자들’(γυναῖκας)은 원래 ‘아내들’이란 뜻도 있어서, 남자 집사의 아내나 일반 여자 집사들을 가리킵니다.
로마서 16장 1절의 뵈뵈는 겐그레야 교회의 여집사로서 교회를 대표해서 바울의 편지(로마서)를 가지고 로마교회에 간 사람이었고, 112년에 기록된 플리니의 글에도 여집사들에 대한 말이 있습니다(Pliny, Epistle, 10:96).
‘모함하지 아니하며’(μὴ διαβόλους:not slanderers)는 직역하면 ‘모함하는 자들이 아니며’란 뜻인데, ‘모함하는 자’(διάβολος)가 고유명사로 쓰이면 ‘모함하는 자, 사탄 마귀’(the Slanderer, the Devil)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여집사가 다른 사람을 중상모략하면 사탄 마귀가 된다는 뜻입니다.
‘절제하며’(νηφαλίους)란 말은 술 취하지 않고, 정신이 말짱해 있고, 절제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서(sober, not intoxicated with wine, temperate) 감독은 술을 즐기지 않는 것(3절)과 집사가 술에 인박이지 않는 것(8절)과 같은 종류입니다.
2. ‘여자들도 이와같이’란 말은 ‘남자 집사들과 같이 여자 집사들도’란 뜻으로서 남자 집사들이나 여자 집사들이 차별이 없음을 가리킵니다.
‘정숙하고’란 여자 집사의 자격만이 아니라, 감독의 자격에서도 말씀한 것이고(2절), 8절에서는 남자 집사가 정중해야 한다(σεμνός)고 했는데, 여자 집사에게도 똑같은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정숙한 여성’은 시끄럽고 방탕한 창녀와 대조되고 있습니다. (잠언 7:10-11)
사도 베드로는 여성들이 외모를 요란하게 단장하는 것보다 속사람을 온유하고 안정된 심령으로 단장하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 3:3-4).
이런 성경의 가르침은 요즘 포스트모던(postmodern) 시대 여성들의 가치 기준과 다릅니다.
현재 자유 여성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섹시하고(sexy) 매혹적인(charming) 모습을 아름답다고(lovely, beautiful) 칭찬합니다.
3. ‘모함하지 말며’란 말은 이전 성경에는 ‘참소하지 말며’라고 되어 있었는데 뒤에서 남을 흉보고 중상모략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페르시야 다리오 왕 때 불신 총리들이 다니엘을 죽이기 위해서 모함하고 왕에게 참소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니엘 6:6-8)
이처럼 말로 중상모략하는 혀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야고보서 3:8. 혀는 쉬지 않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초대 에베소 교회에도 뒤에서 참소하고 중상모략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대개 남자들은 말재주가 없기 때문에 참소를 잘 못 하지만, 여자들은 매우 말하는 힘이 좋기 때문에, 말로 모함하고 참소하고 중상모략하기가 쉽습니다.
그 중에서도 시간이 넉넉한 과부들이 외롭기 때문에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남을 험담하고 참소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디모데전서 5장 13절에 “그들은 게으름을 익혀 집집으로 돌아 다니고 게으를 뿐 아니라 쓸데없는 말을 하며 일을 만들며 마땅히 아니할 말을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출애굽기 23장 1절에는 “너는 거짓된 풍설을 퍼뜨리지 말며 악인과 연합하여 위증하는 증인이 되지 말라”고 했습니다.
또한 시편 15편 1-3절에는 “주의 장막에 머무르며 주의 성산에 거할 자는--그의 혀로 남을 허물하지 아니하고 그의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웃을 비방하지 아니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여집사님들은 말로 이웃을 모함하지 말고, 오히려 이웃을 칭찬하고, 위로하고, 기도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빌립보서 2:4, 4:8, 에베소서 4:31-32).
4. ‘절제하라’는 것은 인간이 육신의 소욕대로 살면 ‘방탕하고, 음란하고, 싸우고, 우상숭배 하기 때문에,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 살면 성령의 열매로 절제하게 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19-23)
그러나 절제하지 않고, 술 취하고 방탕하면, 결국 죄를 짓게 되고, 사망을 낳게 되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1:15).
인간이 스스로 자기 마음을 믿으면 안 되는 것이 만물보다 거짓된 것은 사람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17:9).
술 취하는 것을 절제하는 것만이 아니라, 시간 사용하는 면에서도 절제하지 못하고, 9시 뉴스 보고 영화까지 다 보고 나면 새벽예배에 나올 수 없습니다.
세상 계 모임 다 참석해서 밤에까지 술 먹다가는 신앙생활 하기 어렵기 때문에 세상 모임도 적당히 끊을 것은 끊어야 합니다.
주일날 친척 애경사 참석이나 제사 첨석도 끊을 것은 끊어야 합니다.
돈 쓰는 것도 좀 절제해야 합니다.
불신 친구 만나서 밥 얻어먹으면, 내가 다시 밥을 사서 갚아야 하기 때문에, 적절히 만나야 합니다.
그런데 대접만 받고 갚지 않으면, 교회 다니는 집사가 밥값 떼어먹었다고 욕합니다.
그러므로 한정된 생활비로 가정생활 교회 생활 사회생활을 하려면, 돈 쓰는 것도 절제해야 합니다.
또 절제는 자기 욕심을 자제할 뿐만 아니라, 자기 고집을 자제하는(control) 것이기도 합니다.
사무엘상 15장 23절 말씀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자기 고집대로 하는 사람은 마치 사술 우상이나 무당이 점치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감독이나 집사나 교회 지도자가 되려면, 욕심만이 아니라 자기 고집을 꺾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곳이지, 인간의 고집을 관철시키는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55장 8절 말씀처럼 하나님의 생각은 인간의 생각과 다릅니다.
예컨대 일주일 내내 장사하는 것보다 주일에 쉬는 것이 인간의 계산으로는 손해인 것 같아도, 주일을 쉬는 것이 더 낫습니다.
십일조 하는 것이 안 하는 것보다 더 낫습니다.
많은 신들을 섬기는 것이 인간의 계산으로는 나을 것 같지만, 하나님만 섬기는 것이 진정한 복된 길입니다.
이번에 저희 교회에서 절제하는 집사님들이 임명되도록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5. 집사는 모든 일에 충성된 자라야 한다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4장 2절에도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했습니다.
교회에서는 여집사님들의 숫자가 가장 많은데, 만일 여집사님들이 충성하지 않고 맡은 일을 소홀히 한다면, 모든 기관의 일들이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참으로 충성하지 못한 사람에게 일을 맡기면, 잠언 25장 19절 말씀처럼 위골된 발을 의지하고 걷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충성스럽지 못한 일꾼은 잠언 10장 26절 말씀처럼 주인의 눈을 괴롭히는 연기와 같습니다.
‘모든 일에 충성스러워야 한다’는 것은 교회 예배에도 충성스러워야 하고, 구역예배에도 충성해야 하고, 여전도회에도 충성해야 하고, 교사 직분과 찬양대원으로도 충성해야 하고, 물질생활에도 신용이 있어야 하고, 사람 관계에서도 신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일에 충성된 사람’은 내가 좋아하는 것만 충성하지 말고, 맘에 안 드는 것에도 충성스러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 왕은 하나님께서 아말렉 적군을 다 죽이라고 하셨는데, 사울 왕은 자기 마음에 죽이고 싶지 않은 아각 왕과 좋은 양들과 짐승들은 죽이기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울 왕은 버림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사울 왕은 절반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지만, 아브라함은 놀랍게도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을 때, 자기 생각과 인간의 도리에 맞지 않았어도 백 프로 순종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시험해보시고 큰 복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집사를 임명할 때 시험해보고 임명하라고 하셨습니다( 디모데전서 3:10)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고 충성하면, 큰 복을 받습니다. (신명기 30:15-18).
12절. 집사들은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 자녀와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자일지니
1. ‘집사가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2절에서 감독이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야 한다는 것과 똑같은 자격 조건입니다.
이처럼 감독이나 집사가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감독이나 집사는 교회 안에서만이 아니라 사회에서도 부유하고 권력을 가진 사람이 대부분이라서, 그처럼 권력과 부를 가진 사람들은 당시에 여러 명의 아내를 거느리는 것이 일반적인 행태였기 때문입니다.
즉 여러 명의 아내를 거느리는 것은 당시에 사회적으로 존경받고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가정이었습니다.
심지어 가난한 사람들은 부잣집 첩으로 들어가서라도 생명을 유지하기를 원했습니다.
우리나라도 이조시대 까지만 해도 일부다처제가 용인되었고, 일부다처 가정은 부러움의 대상이었고,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의 첩으로라도 들어가서 생명 유지하는 것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 교회의 감독이나 집사는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자격 조건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오늘날은 일부일처가 일반적인 사회 현상이고 법적으로도 보호되고 있지만, 당시에 교회에서 일부일처제를 주장하는 것은 가히 획기적인 윤리였습니다.
2. 하나님께서는 남자가 아내 외에 다른 여자를 가정에 들여와서 아내를 눈물 나게 하면, 그 남자의 기도와 헌물을 하나님이 받지 않으신다고 했습니다.
말라기 3:13-15. 너희가 이런 일도 행하나니 곧 눈물과 울음과 탄식으로 여호와의 제단을 가리게 하는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다시는 너희의 봉헌물을 돌아보지도 아니하시며 그것을 너희 손에서 기꺼이 받지도 아니하시거늘, 너희는 이르기를 어찌 됨이니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와 네가 어려서 맞이한 아내 사이에 여호와께서 증인이 되시기 때문이라. 그는 네 짝이요 너와 서약한 아내로되 네가 그에게 거짓을 행하였도다. 그에게는 영이 충만하였으나 오직 하나를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만드셨느냐. 이는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심이라. 그러므로 네 심령을 삼가 지켜 어려서 맞이한 아내에게 거짓을 행하지 말지니라.
심지어 하나님께서는 이혼하는 것도 미워하신다고 했습니다.
말라기 3:16.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르노니 나는 이혼하는 것과 옷으로 학대를 가리는 자를 미워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러므로 너희 심령을 삼가 지켜 거짓을 행하지 말지니라.
3. 남자가 아내를 두고 다른 여자에게 성적인 관심을 가지면, 곧바로 성령님의 감동과 인도하심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삼손은 기생 들릴라와 성적인 죄를 범했을 때, 영적인 눈도 어두워졌고, 마침내 육신의 눈도 장님이 되고 말았습니다.
솔로몬같이 신령하고 지혜가 뛰어난 사람도 이방 여자들과 죄를 짓자, 그 심령이 어두워져서 우상숭배까지 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6장 18절에는 “다른 죄는 다 몸 밖에 있지만, 음행은 자기 몸에 죄를 짓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감독뿐만 아니라 집사도 한 아내와 행복한 가정생활을 하고, 다른 여자를 두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4. ‘자녀와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자’란 조건은 감독자의 자격에도 해당되는 조건이었습니다( 디모데전서 3:4).
이처럼 교회의 지도자인 감독과 집사는 먼저 가정에서 모범적인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자기 가정에서도 지도자 역할을 잘하지 못하는 사람이 더 큰 가정인 교회에서 지도자의 역할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 가정에서 자녀들을 성공적으로 길러내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교인들을 성공적으로 길러낼 수 있느냐는 말씀입니다.
이런 원리는 일반사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군청에서 성공적인 군수의 역할을 하지 못한 사람이 도지사나 국회의원직이나 대통령직을 성공적으로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6장 2절에서는 “이처럼 작은 일 하나를 판단하지 못하면, 어찌 큰일을 판단할 수 있겠느냐”고 했습니다.
5. 그런데 ‘다스린다’는 단어(προΐστημι)는 ‘앞에’라는 접두어(πρό)와 ‘서 있다’라는 동사(ἵστημι)의 합성어로서, 훌륭한 인격을 갖추고 다른 사람들에게 모델이 되어 모범을 보여주는 것을 가리킵니다.
즉 가정에서 가장은 남편과 아버지로서 가족들에게 신앙적인 모범을 보여주어야 참된 지도자라는 것입니다.
또한 가정에서 주인 남자는 노예를 폭력으로만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감화력을 줄 수 있어야 하고, 군대에서도 장교가 구타하면서 무력으로만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인 감동과 모범을 보여주어서 부하들이 자기를 잘 따르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집사가 가정에서 아버지로서 육체적인 폭력이나 언어폭력을 행사하지 않고, 사랑과 섬김으로써 감동을 주어야 하고, 교회에서도 권위를 행사하거나 대접을 받으려 하지 않고, 사랑과 섬김으로 교인들에게 모범과 감화를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그럴듯하게 숨길 수 있지만, 가정에서는 본 모습이 다 드러나기 때문에, 그 집 자녀를 보면, 그 부모를 알 수 있습니다.
가정에서 열심히 기도하고, 진실하게 신앙생활 하는 집사의 자녀는 억지로 끌고 가지 않아도 교회에 나와서 기도하고 예배도 잘 드립니다.
그러나 억지로 끌려 나오고 예배 시간에도 집중을 하지 않는 자녀들은 그 부모가 가정에서 기도 생활을 않고 진실된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증거입니다.
어떤 가정은 신앙생활을 잘하고, 목회자를 최고로 존경하면서 대접을 잘하기 때문에, 그 집 자녀는 자기도 커서 목사 되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가정에서 부모가 목사 흉을 보고, 장로나 교인들 흉을 보는 가정의 자녀들은 목사나 장로나 교인들을 무시하기 때문에, 신앙생활을 하지 않으려고 하고 부모의 강요 때문에 억지로 교회에 다닙니다.
옛말에 ‘옆으로 걷는 게가 새끼에게 똑바로 걸으라고 한다’는 말이 있듯이, 부모가 옆걸음질하면서 자녀에게 똑바로 살라고 해도 되지 않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감독이나 집사는 먼저 가정에서부터 가족들에게 모범을 보여서 자녀들이나 가족들이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번 우리 교회 선거에서도 어느 집 자녀들이 신앙생활 잘하는가 유심히 지켜보시고, 그런 자녀를 둔 가정의 사람들을 중직자로 선출하시기 바랍니다.
13절. 집사의 직분을 잘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느니라.
1. 8-12절에서는 집사의 자격 요건으로 요구되는 것들을 나열했으나, 여기 13절에서는 자격 요건들을 갖춘 집사가 얻게 될 좋은 지위와 내적인 믿음의 담력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좋은 지위’란 교인들에게 얻게 될 좋은 평판이나 교회에서 얻게 될 더 좋은 직위를 가리킵니다.
‘집사의 직분을 잘하는 것’이란 원문상 잘 섬기는 것을 가리키는데 (καλῶς διακονήσαντες: well having served) 누구나 섬기는 일을 잘하면, 모든 사람들이 좋아하고 칭찬하게 됩니다.
세상 말로 ‘줘서 나쁘다는 사람 없다’고 합니다.
2. 사람들을 잘 섬기는 사람은 교회에서 높은 평판을 얻고, 좋은 지위를 얻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은 하나님께서도 존귀하게 여기십니다.
그래서 사무엘상 2장 30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잘 섬기고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히 여기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그 자손을 땅에서 강성하게 해주시고(시편 112:1-2), 물질에 복을 주시고, 자손이 잘되게 해주신다고 했습니다( 신명기 28:1-6).
사람들을 잘 섬기는 사람은 사람들에게 명예와 존경을 받는데, 예수님께 충성한 사람은 예수님이 큰 지위와 권세를 주신다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19:17).
부모님이 자식에게 돈 5만 원을 주었는데 그 자식이 나가서 오락이나 하면 부모는 돈을 더 주고 싶지 않겠지만, 그 자식이 책을 사서 공부를 하려고 하면 그 부모는 돈을 더 주고 싶어 할 것입니다.
이와같이 주님께서 주신 직분을 잘 감당하면, 주님이 더 직분을 잘 감당하도록 더 많은 물질과 더 좋은 직위를 주실 것입니다.
이처럼 직분 감당은 축복의 통로가 됩니다.
서울의 어떤 큰 교회는 집사 직분 맡아서 3년 내에 집을 사지 못하면 집사 직분 잘 감당하지 못한 것이란 말도 한답니다.
이 말에는 좀 어폐가 있지만, 그 교인들은 직분에 충성하면 복을 받는다는 것을 실제적으로 믿는다는 뜻입니다.
목회자들에게도 주신 주님의 귀한 약속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24:45-46.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3. 솔로몬은 왕의 직분을 맡았는데, 그 직분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지혜를 구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지혜를 주셔서 왕의 직분을 잘 감당하게 하실 뿐만 아니라, 물질의 복과 부귀와 장수의 복까지 주셨습니다. (열왕기상 3:9-10).
순천에 김응선 장로님은 너무도 가난해서 기도하러 강단에 갈 때 양복이 없어서 기도를 못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새벽기도에 열심하고 충성하여 그 자녀 8남매가 모두 다 잘 되었습니다.
1남 김홍규 이사장, 2남 김병규 회장, 3남 김성규 회장, 4남 김명규 국회의원, 5남 김승규 장관, 1녀 김은애 권사, 2녀 김은덕 권사, 3녀 김은자 권사.
광주 계림동에 천요숙 집사님은 큰 아들이 회장이고, 둘째 아들이 장관이고, 셋째 아들은 고등법원장입니다.
전북 김제에 남편이 엿장수를 하는 여집사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집사님은 매일 교회 종을 치는 일에 충성을 했는데, 네 아들들이 다 잘 되었습니다.
큰 아들은 사업게 성공했고, 둘째는 세무사이고, 셋째는 공군 장교이고, 넷째는 대기업 간부로 성공했습니다.
이런 사례들이 많이 있는데, 이것들은 주님이 주신 직분에 충성하면, 주님이 좋은 지위를 주신다는 것을 입중해주고 있습니다.
4. 집사의 직분을 잘하는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는다’는 것은 확신적인 믿음을 갖는다는 뜻입니다.
성경에는 믿음이 약한 사람도 나오고, 의심하는 자도 나오고, 큰 믿음을 가진 사람도 나옵니다.
예수님은 물속에 빠져가는 베드로에게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4:31).
가버나움의 백부장은 병든 하인을 예수님이 가서 고쳐주시겠다고 하자, ‘말씀으로만 하시면 내 하인이 낫겠나이다’라고 하여, 예수님이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했다고 칭찬하셨습니다. (마태복음 8:8)
마가복음 16장 14절에서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을 듣고도 믿지 않자,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너희가 왜 이렇게 믿음이 없느냐”고 책망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5장 28절에는 가나안 여인이 흉악하게 귀신 들린 딸을 예수님께서 고쳐주시기를 구했으나, 예수님이 자녀의 떡을 개들에게 주는 것이 마땅치 않다고 하셨을 때, 그 가나안 여인이 “주여 옳소이다 마는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를 먹나이다”고 말해서, 예수님이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라고 칭찬하시고 딸을 고쳐주셨습니다.
마가복음 9장 23-24절에는 간질하는 아들을 둔 아버지가 예수님께 와서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도와주소서”라고 하자, 예수님께서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9장 28절에는 소경들이 예수님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내가 이 일 할 줄을 믿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소경들이 “주여 믿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너희 믿음대로 되라”고 말씀하셨고, 소경들은 믿음으로 눈을 떴습니다.
야고보서 1:6-8.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그러므로 믿음에 담력을 얻는다는 것은 집사직에 충성한 사람이 확신적인 믿음을 가져서 큰 복 받을 믿음을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정과 교회에서 충성된 집사님들이 되어서, 좋은 지위와 믿음에 큰 담력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자손들이 잘되시는 명예스러운 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