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3:1-6절) 언약의 사자 3-123 옛날에 우리나라 지방관(地方官)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일은 암행어사(暗行御史)가 갑자기 출두해서 자신들의 모든 비행(非行)을 심판하는 것이었습니다. 암행어사 일행은 그 일을 위해 초라한 행색(行色)으로 그 지방을 미리 찾아가 비행을 조사했습니다. 그러다가 증거를 잡으면, 출두해서 탐관오리(貪官汚吏)들을 심판했습니다. 그날은 악(惡)한 관리들에게는 심판의 날이었지만, 그 밑에서 고통을 받던 백성들에게는 해방의 날이었습니다. 아마 요즘 공무원들도 감사원의 감사를 받는 일이 가장 두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도 감사원의 조사관들이 들이닥치면, 꼼작 없이 조사를 받아야 하며, 비리나, 엄무 상 잘못이 있는 경우에는 가차 없이 심판을 받게 됩니다. 나라도 감사를 당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IMF에 구제금융(救濟金融)을 신청했을 때, 그 총재인 캉드쉬가 우리나라를 방문했습니다. 그의 방문은 우리나라 경제가 완전히 새로운 단계로 돌입할 것을 알리는 신호탄(信號彈)이었습니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우리나라 경제가 얼마나 큰 영향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대통령도 그 앞에서는 아무 소리도 하지 못했습니다. 금융기관들은 전문 감사기관의 감사를 받았고, 그 중 상당수가 문을 닫았습니다. 그리고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기업을 통폐합(統廢合)하거나, 다른 나라에 팔게 하는 강도 높은 구조조정이 이루어졌습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장차 온 세상에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사자(使者)가 성전에 홀연히 임해서 온 세상을 뒤엎는 심판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그 하나님의 사자(使者)가 마구잡이로 사람들을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 마치 금(金)을 연단하고, 은(銀)을 연단하듯이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금과 은은 광석(鑛石)안에 섞여 있기 때문에 얼핏 보면, 아무 가치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깨고, 부수어서 뜨거운 용광로에 녹이면, 순수한 금과 은이 정련(精鍊)되어 나옵니다. 아마 그 당시 사람들은 이 말을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어떻게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때와 오물(汚物)을 제거해서 순수한 사람으로 만들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의 법(法)으로는 겉으로 드러난 불법행위만 심판할 수 있을 뿐, 남들 몰래 지은 죄(罪)나 마음으로 지은 죄(罪)는 심판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자(使者)가 오시면, 사람의 마음속 깊은 곳을 살펴서 그 안에 있는 금과 은을 정련(精鍊)해 내실 것이며, 정련할 금과 은이 전혀 없는 사람들은 불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인류 역사에는 분수령이라고 할 만한 사건들이 여렷 있었습니다. 요즘은 특히 인터넷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정치적인 부분에서는 많은 정보와 주장들이 인터넷을 통해 전달되면서, 정치인의 생명까지 좌지우지하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터넷의 등장보다 훨씬 더 중요한 변화가 무엇일까? 인간의 마음속에 들어 있는 금과 은을 정련할 수 있는 시대, 즉 순수한 양심과 믿음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시대가 도래 한 것입니다. 이 시대를 여신 분이 곧 그리스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의 어떤 학문이나, 권력으로도 할 수 없는 일을 하십니다. 그것은 인간의 마음을 연단해서 금이나 은처럼 만드시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현명한 사람은 눈에 보이는 재물이나, 명예를 많이 쌓아 놓는 자들이 아니라, 마음의 연단을 받아서 보이지 않는 금과 은을 수북이 쌓아 놓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마음을 심판하십니다. 사람은 마음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겉으로 드러난 행동만 보고 판단하지만, 하나님은 마음속에 있는 모든 것을 다 보고 판단하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나중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서 심판받는 대신, 이 세상에서 미리 심판을 받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양심을 통해 책망하시는 것이 곧 그것입니다.
그 양심의 심판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절망스러운지 마치 이 땅에서 지옥을 맛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일단 그렇게 연단을 받은 사람은 흠 없고, 깨끗한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습니다. Ⅰ.두 명의 사자 하나님은 두 명의 사자(使者)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3:1절)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 또 너희의 구하는 바 주가 갑자기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니 곧 너희의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하실 것이라” 사절단(使節團)에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즉 친선(親善)사절단처럼 비교적 상대하기 쉬운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왕(王)이나 대통령을 대신해서 파견되는 좀 더 비중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렇게 비중 있는 사절단은 국가 간의 심각하고, 예민한 문제를 다루기 위해 찾아오는 경우가 많은데, 그럴 때, 회담이 결렬되면, 전쟁이라는 최악의 결과가 초래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두 명의 사자(使者)를 보내시겠다고 하십니다. 첫 번째 사자는‘내 사자’로서 주의 길을 미리 예비하는 역할을 할 것이며, 두 번째 사자는‘너희가 구하는 바 주’이자‘언약의 사자’로 세상에 오실 것입니다.
이전에도 하나님은 세상에 사자(使者)들을 보내서 메시지를 전하게 하셨습니다. 즉 천사들을 직접 보내실 때도 있었지만, 인간 선지자들을 보내실 때가 더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 선지자들은 대개 예루살렘 성전에서 말씀을 전했기 때문에, 세상 나라들이 하나님의 뜻을 알려면, 성전에 사자를 파견해서 선포되는 말씀을 들어야 했습니다.
마치 담임선생님이 학급에 전달하는 중요한 사항을 반장(班長)의 입을 통해서 듣는 것과 같습니다. 그 말을 잘 듣지 않고, 장난만 치거나, 딴 짓을 하는 학생은 결국 자기만 손해를 입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한창 전성기를 구가(謳歌)할 때는 여러 나라 사신들이 아예 예루살렘에 상주하고 있었습니다. 워싱턴이나, 런던이나, 도쿄 같은 중요한 나라의 수도에 여러 나라 신문사의 특파원들이 상주하듯이 여러 나라 사신(使臣)들이 예루살렘에 상주하면서 선지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 일어날 일을 가장 먼저 들을 수 있는 곳은 교회입니다. 하나님은 교회의 예배를 통해서 세상에 대한 자신의 계획과 뜻을 선포하십니다. 거기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사람들은 우리 그리스도인만이 아닙니다. 정치인이나, 경제인들을 비롯한 세상 모든 사람들도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하나님이 말라기를 통해서 전하시는 소식이 무엇입니까? 장차 아주 중요한 날이 올 텐데, 그때 두 명의 사자(使者)를 동시에 보내신다는 것입니다. 그 중, 한 명은 말라기의 이름 뜻과 똑같은‘나의 사자’로서 뒤에 오실 또 다른 사자(使者)의 길을 예비할 인물이며, 진짜 주인공은 그 뒤에 오실‘언약의 사자’입니다. 우리가 아는 바처럼 첫 번째 사자는 세례 요한이고, 두 번째 사자는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세례 요한은 설교할 때마다 자신의 뒤에 오실 분의 능력이 더욱 크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그라고 사람들에게 세례를 줄 때도 막1:8절)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프시리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 먼저 보내심을 받는‘나의 사자’부터 살펴봅시다. 우리는 이 말에서 상당한 애정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 말에는‘내가 참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을 사자로 보낸다.’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이 아주 아끼시는 종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을‘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불렀습니다. 사40:3-4절)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이것은 원래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돌아올 일에 대해 예언한 말씀입니다.
즉. 하나님께 범죄하여 포로로 잡혀간 유다 백성들을 하나님이 친히 바벨론까지 찾으러 가신다는 의미에서 이 예언을 한 것입니다. 옛날에 왕이 행차할 때는 수많은 군인들과 백성들이 함께 따라갔기 때문에 수개월 전부터 미리 길을 닦아 놓곤 했습니다. 중간에 골짜기가 있으면, 메워서 평평하게 만들었고, 높은 산이 있으면, 깎아서 평평하게 만들었습니다. 특히 예루살렘에서 바벨론까지는 산도 많고, 골짜기도 많았기 때문에 더 길을 닦아 놓을 필요가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을 곧 그 길을 닦는 사람에 비유한 것입니다. 요즘도 대통령이 어느 지역을 방문할 때는 경호실 요원들이나, 경찰이 출동해서 대통령이 지나갈 길을 미리 점검하고, 준비해 놓습니다. 그런데 옛날에는 정비된 길이 별로 없는 데다가 수행하는 인원은 훨씬 많았기 때문에 큰길을 미리 닦아 놓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짧게는 수개월, 길게는 수년 전부터 사자가 파견되어 왕이 지나갈 길을 확보해 놓곤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돌아올 때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미리 와서 길을 준비하고 다리를 만드는 일 같은 것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고레스가 바벨론을 무너뜨린 후,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라는 칙령(勅令)을 내리자, 유다 백성들이 알아서 길을 찾아 돌아왔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이사야의 예언은 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바벨론에서 돌아온 것은 진정한 귀환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상징적인 사건에 불과했습니다.
실제적인 귀환은 따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던 사람들이 전 세계에서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오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예언은 곧 그 일에 대한 것입니다. 바벨론에서 돌아온 것은 진정한 구원이 아니라, 구원의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돌아온 유다 백성들은 일종의 선발대(先發隊)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대대적인 구원은 세례 요한이 온 이후로부터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때는 누구든지 예수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구원을 받을 것이며, 기도하기만 하면, 무한정의 능력을 받을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하늘로 통하는 문이 열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무지(無知)해서 예수를 알아보지도 못하며, 그를 통해 이렇게 엄청난 축복(祝福)의 문이 열린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할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예수를 소개해 줄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세례 요한이 그 일을 했고,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는 사도 바울이 그 일을 했습니다.
악한 마귀가 저지른 짓 중에 가장 치명적인 것은 사람들의 마음을 죄로 태워서 황폐하게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 친히 와서 구원의 문을 여셨는데도 사람들은 그 사실을 인정하거나,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례 요한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평탄케 만들어서 그리스도께로 직행할 있도록 돕는‘도우미’들이 필요합니다. 어떤 사람은 산(山)처럼 마음이 높아져 있어서 예수님을 인정하지 못하며, 어떤 사람은 골짜기처럼 마음이 패여 있어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해서 받아들이지 못하고, 어떤 사람은 너무나 비참하고 힘든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안내자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너무 높아진 마음은 좀 깎아 내고, 너무 낮아진 마음은 좀 돋우어서 예수님의 말씀을 올바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도와줄 사람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세례 요한의 심정으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나아가야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오해도 많고, 죄책감도 심해서 정상적으로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나서서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쳐 주어야 하며, 아무리 큰 죄인도 예수의 이름만 믿으면,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가장 큰 오해가 무엇일까?‘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신다면, 오늘날까지 이렇게 살게 하셨을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한 번도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신 적이 없기 때문에 자신을 사랑하시지 않는다고 확신하기도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마치 자폐증(自閉症)에 걸린 어린아이와 같아서 아무리 이야기를 해 주어도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개인적으로 찾아가서 인내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해 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비로소 마음 문을 열고 복음(福音)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Ⅱ.언약의 사자가 오리라 말라기의 예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주 특별한 신분을 가지신 여호와의 사자가 이스라엘을 방문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가 얼마나 특별한 분이신지, 인간들은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도 믿지 못할 것입니다. 정당한 신분을 가진 이가 찾아왔는데도 사람들이 그 사실을 의심하고, 믿어 주지 않는 것보다 안타까운 일은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사령관이 자기 부대로 들어가려 하는데, 보초가 알아보지 못하고 막아서거나, 대통령이 초라한 차림새로 청와대로 들어가려 하는데, 경비를 서는 군인이나, 경찰이 알아보지 못하고 유치장에 가두어 버린다면,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그런데 이 언약의 사자(使者)가 바로 그런 일을 당했습니다. 자기 땅에 오셨는데도 자기 백성들이 그를 영접하지 않은 것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한 특별한 천사가 이스라엘 백성들과 늘 함께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성부(聖父)하나님이 아님에도 불구하고‘여호와’라고 불리는 경우도 있었고, 또‘천사’라고 불리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천사와는 분명히 다른 존재였기 때문에 모세 같은 사람은 정관사를 붙여서‘그 천사’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천사가 신적(神的)인 능력으로 늘 지켜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우상(偶像)을 섬김으로써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깨뜨렸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셨으며, 언약(言約)의 사자(使者)도 이스라엘을 떠나셨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은 곧 망(亡)해 버렸습니다. 이스라엘은 신적인 능력으로 지켜지는 나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호와의 사자가 도와주시지 않으면,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말라기 선지자가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 여호와의 사자가 다시 예루살렘에 오신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점은 그가 왜 다시 예루살렘에 오시느냐? 는 것입니다.
그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심판하기 위해 오시는 것일까? 그가 오시는 데는 두 가지 목적이 다 있습니다. 새 언약을 통해 말씀으로 돌아오는 자들은 구원하며, 끝까지 거부하는 자들은 심판하기 위해 오시는 것입니다.
3:1절)...또 너희가 구하는 바 주가 갑자기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니 곧 너희가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할 것이라"
하나님은 이 언약의 사자로‘너희의 구하는 바’이며‘너희의 사모하는 바’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곧 이스라엘 자손들이 지금까지 고통 중에 기도하고 부르짖으며 간절히 원하던 모든 것들이 이분 속에 다 들어 있다는 뜻입니다. 이분만 오시면 그들이 간구하던 모든 일들이 응답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고통과 모든 문제의 해답이시며, 모든 기도의 응답이십니다. 그런데 왜 굳이 이분이‘언약의 사자’라고 부르는 것일까? 무엇보다 먼저 생각할 것은 이‘언약(言約)’이 과거 시내 산에서 맺은 언약과는 완전히 다른 언약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애서 나와 시내 산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은 그들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을 다 지켜 행하기로 약속(約束)함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고,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언약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놀라운 위엄과 권세는 있었지만, 사람의 마음을 완전히 치료할 능력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을 때, 시내 산 전체가 진동했고, 영광의 구름이 산 전체를 뒤덮었기 때문에 아무도 가까이 접근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화산폭발이나, 지진(地震)처럼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무시무시한 능력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축복(祝福)으로 나타났습니다. 즉 바위에서 물이 솟구치며, 하늘에서 신령한 양식이 내리고, 요단강이 갈라지며,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축복(祝福)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처럼 시내 산 언약에는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축복으로 바꾸는 힘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부패하고, 타락한 심령은 고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산에 올라간 모세가 내려오지 않자, 곧바로 금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했고, 광야에서도 기회가 생길 때마다 원망하고, 불평하며, 하나님을 대적했습니다.
이처럼 그들은 놀라운 축복(祝福)을 받았으면서도 온전히 감사드리지 못했습니다. 시내 산 언약에는 믿는 자들을 축복할 능력은 있었지만, 의도적으로 반역하는 자들의 마음을 고칠 능력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신실하셨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결국 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시내 산이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새 언약을 맺으시는 이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우리 죄를 단번에 대속하시고, 은혜로 우리를 인도해 주시는 이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우리의 행동을 일일이 보지 않으십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보시고 우리가 전부 순종한 것으로 간주해 주십니다. 그리고 그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살기만하면, 삶의 모든 부분을 책임져 주십니다. 이것은 마치 학생들이 극장에 단체로 입장하는 것과 같습니다. 극장은 학교 측과 일괄 계약을 맺기 때문에 학생 한 사람 한 사람씩 표를 일일이 확인하지 않습니다. 또 배에 탈 때, 식사비까지 전부 포함된 표를 사면, 밥을 먹을 때마다 일일이 돈을 내지 않아도 되는 것과도 같습니다. 모든 값을 한꺼번에 지불한 사람은 배 안에서 제공해 주는 모든 특전(特典)을 누리기만 하면 됩니다. 언약의 사자(使者)는 곧 그 일을 위해 예루살렘 성전에 임하실 것이며, 자신의 몸을 통해 영원히 변치 않을 새 언약을 세우실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을 때, 요2:19절)...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그것이 성전 된 주님의 육체를 가리키는 말씀이라고 덧붙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여러 차례 성전에 올라가셨지만, 그 결과는 좋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를 미워해서 죽이려 했고, 결국 유월절에 성 밖으로 끌고 나가서 십자가에 못 밖아 죽여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가 운명하실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성전 지성소를 가리고 있던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쭉 찢어져서 누구든지 지성소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가 십자가 위에서 세우신 새 언약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시내 산 언약과는 달리 사람의 마음을 치료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내 산 언약을 맺은 직후에도 금송아지를 섬기며, 음란한 짓을 했지만, 새 언약을 맺은 우리는 마음으로부터 죄를 싫어하게 될 뿐만 아니라, 누가 강요해서가 아니라, 정말 하나님이 좋아서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이것은 인류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 중에 가장 위대한 일입니다. 사람들은 인간을 치료하기 위해 많은 것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 수많은 교육기관들도 전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기 위해 만든 것들입니다. 그러나 어떤 것도 인간의 마음을 치료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의 마음을 치료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한 가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뿐입니다. Ⅲ.새 시대의 특징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실 때, 나타나는 중요한 특징이 무엇입니까? 2절)그가 임하시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가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
여기에서 그를 당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 힘이나, 고집을 당하지 못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가 인간들의 마음을 다 아시므로 아무도 그 앞에서 죄 없다고 거짓말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명백히 큰 죄를 지은 사람들이 경찰이나, 검사 앞에서 끝까지 죄가 없다고 우기는 것을 보면, 정말 강심장(强心臟)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처럼 평범한 사람들은 첫 질문만 받아도 지레 겁을 먹고, 자백(自白)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도 예수님을 알기 전까지는 양심이 강철처럼 단단해서 자기 죄를 깨닫지 못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무 죄 없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을 보면서 죽은 양심이 되살아났기 때문에 스스로 죄인인 줄 알게 된 것입니다. 예수를 피상적(皮相的)으로 알던 사람들은 그를 갈릴리의 목수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인격적으로 만난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들의 모든 것을 속속들이 다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도저히 알 수 없는 은밀한 것들까지 다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요1:47-48절 나다나엘은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 무언가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그가 대체 무엇 때문에 그 나무 아래 앉아 있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 또 수가 성 여인은 예수님을 지나가는 나그네 정도로 생각했지만,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다는 사실과 지금 남편도 진짜 남편이 아니라는 사실까지 다 아시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요4:19절)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우리는 결코 그의 눈을 속일 수가 없습니다. 그는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의 인생 전부를 살펴보고 계십니다. 원래 우리는 그 소멸하는 불에 타서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죽이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니라, 살리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불꽃같은 눈앞에서도 죽지 않을 수 있으며, 그의 발 앞에 엎드려 회개하기만 하면, 죄 사함을 얻고, 새 삶까지 선물로 받을 수 있습니다. 즉 여호와의 사자는 단지 죄인들을 멸망시키는 불로만 오시는 것이 아니라, 금(金)을 연단하는 불로 오실 것입니다.
원래 금은 여러 가지 불순물들과 뒤섞여 있기 때문에 순수한 금을 얻으려면, 원석(原石)을 뜨거운 불에 넣어서 녹여야 합니다. 그것도 약간만 녹이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녹여서 모든 찌꺼기들을 분리해 내야 합니다. 그는 이처럼‘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로 오시며‘표백하는 자의 잿물’로 오실 것입니다. 옷에 심한 얼룩이 생각을 때, 물로만 빨아서는 지울 수 없습니다. 양잿물에 푹푹 삶아서 방망이질을 해야 합니다. 물론 빨랫감의 입장에서는 그 과정이 무척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과정만 거치고 나면, 눈부시게 깨끗해질 수 있습니다. 이것은 여호와의 사자가 그만큼 우리를 철저하게 회개시키신다는 뜻입니다. 구약 시대의 율법(律法)은 금(金)이 섞인 원석(原石)을 녹이는 것이 아니라, 깨뜨리는 것과 같아서 완전히 순수한 정금(正金)은 얻을 수가 없었고, 얼룩진 옷을 잿물로 빠는 것이 아니라, 찬물에 넣고 흔드는 것과 같아서 아무리 빨아도 완전히 깨끗하게 만들 수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율법(律法)으로는 사람들의 병든 양심을 고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죄가 무엇인지는 알려 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단 죄의 충동(衝動)이 일어나면,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는 어떻습니까? 성령으로 우리의 잠재의식 속에 들어 있는 죄 성까지 들추어내서 전부 회개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언약의 사자가 주시는 가장 중요한 축복(祝福)입니다. 대개 사람들은 죄의 충동을 행동으로 옮겼을 때만 죄의식을 느낍니다. 그것도 명백한 사회법을 어겼을 때, 즉 사람들에게 들통이 나서 비난받을 때만 죄의식을 느낍니다.
양심이 얼마나 무뎌졌는지, 아무리 큰 죄를 지어도 남들만 모르면, 슬쩍 넘어가려드는 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생각으로만 죄를 지었을 때도 양심의 큰 고통을 겪습니다. 왜냐면 성령이 그 안에서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아주 작은 죄의 유혹에 마음으로만 넘어간 일까지 전부 들추어내시기 때문에 철저하게 회개하지 않으려야 회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이 곧 금을 녹이는 역사이며, 잿물로 빠는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죄의 유혹인 줄 알면서도 거기에 넘어가면, 성령이 주시는 기쁨은 전부 사라지고, 지옥 같은 고통이 찾아옵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줄 알면서도 남을 미워하거나, 음란한 생각을 하면, 모든 기쁨을 거두어 가시며, 그 죄를 속속들이 토하기 전까지 결코 평안한 마음을 주시지 않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가 죄짓기 전에도 미리 어려움과 환난을 주셔서 교만이 고개를 쳐들지 못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들 만한 요소는 아예 허락지 않으시고, 필요할 경우에는 사회적인 불구자로까지 만들어서 어찌되었든‘교만하면 망한다. 음란하면 지옥으로 직행한다’는 것을 분명히 가르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새 언약의 백성들을 이 땅에서 미리 녹이고, 표백(漂白)해서 흠도 없고, 티도 없는 모습으로 심판대 앞에 서게 하십니다.
은혜를 받고 나면, 평소에는 전혀 죄라고 생각지 않았던 것들이 엄청나게 확대되어 눈앞에 나타나게 됩니다. 이를테면 농담(弄談)으로 지껄였던 말 속에도 얼마나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조롱하는 요소가 들어 있었는지 깨닫는 식입니다. 주님이 가까이 오시면, 죄에 대해 엄청나게 민감해 집니다. 하나님은 새 시대에 무엇보다 예배가 영광스러워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3절)그가 은을 연단하여 깨끗하게 하는 자 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하게 하되 금, 은 같이 그들을 연단하리니 그들이 공의로운 제물을 나 여호와께 바칠 것이라”
여기에서‘레위 자손’은 구약 시대의 제사장들이 아니라, 신약 시대의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신약 시대의 성도들은 모두 깨끗함을 받은 레위 자손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연단하되 순수한 금이나, 은같이 연단해서 의로운 제물을 드리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여호와의 사자가 십자가 위에서 바치신 몸을 의로운 제물로 받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의로운 제물을 바칠 수 있을까? 신약의 제사는 두 가지 측면에서 구약의 제사와 구별됩니다. 첫째는 짐승의 피 대신 상한 마음을 바치는 것이고, 둘째는 삶 속에서 죄를 물리치는 이것입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은 작은 욕심부터 버리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아주 사소한 것을 포기합니다. 즉 컴퓨터 게임을 포기하기도 하고, 텔레비전 드라마를 포기하기도 하며,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세상적인 사귐을 포기하기도 합니다. 물론 그런 것을 포기했다 해서 당장 순수한 금과 은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직도 순결해져야 할 부분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욕망의 일부를 포기하는 것은 참으로 위대한 일입니다. 사소한 것이라도 포기하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에게는 예배가 그럴게 감격스럽고, 기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들에게 기쁨의 화관(花冠)을 씌워 주십니다. 믿지 않는 불신자들은‘이것도 못하고 저것도 못하면 대체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사느냐? 라고 묻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모르는 사실이 무엇입니까? 세상의 좋은 것들을 전부 다 합쳐도 예배의 기쁨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과 만나는 기쁨을 능가할 기쁨은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4-5절)그 때에 유다와 예루살렘의 봉헌물이 옛날과 고대와 같이 나 여호와께 기쁨이 되려니와 내가 심판하러 너희에게 임할 것이라. 점치는 자에게와 간음하는 자에게와 거짓 맹세하는 자에게 품꾼의 삯에 대하여 억울하게 하며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며 나그네를 억울하게 하며 나를 경외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속히 증언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그리스도는 끝까지 복음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을 무섭게 심판하실 것입니다. 여기에서‘점치는 자’란 점을 치면서 우상(偶像)을 섬기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사람들이 왜 점을 칠까? 자기 욕심을 잘라 버리기가 싫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간음하고, 거짓 맹세를 하며, 다른 사람들을 억울하게 만듭니다. 그들은 믿음의 할례 받기를 거부하는 자들입니다.
그리스도의 불에 녹기를 거부하는 자들이며, 그리스도의 양잿물에 잠기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입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그런 자들의 삶에 간섭하지 않으십니다. 그 상태로 내버려두어서 실컷 죄짓다가 망하게 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욕심대로 사는데도 하나님이 가만히 내버려두시는 사람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녀는 절대로 그렇게 내버려두시지 않습니다. 방망이이로 빨래 패듯이 주야로 두들겨 패서 정결하게 만드십니다.
6절)나 여호와는 변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우리의 걱정이 무엇입니까?‘남들은 저렇게 세상의 좋은 것들을 다 누리면서 사는데 나는 이렇게 하나님이 주야로 태우고 녹이시니 언제나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나는 분명히 세상에서 소멸되어 버릴 거야 돈도 못 벌고 집도 못 사고 결혼도 못하고 구질구질하게 살다가 죽을 거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를 연단하기 시작하셨으면, 반드시 끝까지 책임지실 것입니다. 즉 한번 손을 대기 시작하셨다면, 반드시 놀라운 작품을 만들어 내실 것입니다.
지금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까? 놀라운 결과를 기대해도 좋습니다. 천사보다 더 아름다운 사람으로, 교만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거룩한 사람으로 만들어 놓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죄를 용납하시는 것처럼 보일 때가 가끔 있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결국 우리가 영원히 살 수 있는 길은 지금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세탁기에 들어가 두들겨 맞고, 정결하게 되는 이것입니다.
어려움이 없는 분들도 스스로 하나님 앞에 낮추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영원히 소멸되지 않고 사는 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讀者)여러분. 지금 우리는 너무나도 위대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눈을 들어 보좌 우편에 계신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세상에서 실망하고, 넘어졌더라도 눈을 들어 그분을 바라보십시오. 세상이 제시(提示)하는 행복의 조건들은 전부 불태워 버리십시오. 즉 돈이나, 학벌이나, 명예나, 권력 모두 노비문서를 태워 버리듯이 태워 버리고, 오직 그리스도가 주시는 성령의 한없는 능력을 사모하십시오. 하나님이 아무리 불로 태우시고, 잿물에 넣어 푹푹 삶으셔도 절대로 소멸되지 않습니다. 그 불길이 뜨거우면, 뜨거울수록, 그 잿물이 강력하면, 강력할수록 더욱 거룩하고, 온전한 모습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우리는 새로운 레위 자손들입니다. 하나님 앞에 정말 거룩한 백성이 되어 보십시다. 티끌만한 죄도 숨기지 않고, 나아감으로써 아무리 사소한 욕심이라도 정직하게 내려놓음으로써. 상한 마음 그대로 나아감으로써 정결함을 입고, 성령의 능력으로 변화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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