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추상-몬드리안
Piet Mondrian, Apple Tree in Blossom, 1912, Gemeentemuseum, The Hague.
##몬드리안 「 빅토리 부기우기 」 1943-44 코네티커트 개인소장
##몬드리안 「 붉은 나무」 1909, 파리 게멘테 미술관
몬드리안은 마치 칸딘스키와 대립되는 개념처럼 기술된다. 칸딘스키의 뜨거운 추상에 대하여 차가운 추상이라고 불린다는 것이다. 또 접미어처럼 기술되기도 한다. 칸딘스키가 정신을 철학적으로 합리화했을 때 몬드리안은 그 철학이 어떻게 생긴 것인가를 보여주었다고 평가되기 때문이다.
몬드리안은 23년간이나 파리에 살았다. 재능도 없다. 피카소나 브라크를 흉내낸 그림을 그리면서 변변히 개인전 하나 가지지 못했던 화가이다. 사교성도 없다. 카페에서 모임이 있을 때면 꾸어다 놓은 보리자루였다. 주변머리도 없다. 전망 좋은 세느 강변에 아틀리에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언제나 커튼이 무겁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 안에서 뭘 했을까. 수평과 수직의 선만 그렸다. 그런 몬드리안이 20세기를 움직이는 화가의 반열에 든다. 이유가 뭘까.
그 첫 번째는 칸딘스키와 대립적이면서도 상보적인 위치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신조형주의 잡지인 데 스틸을 통해 몬드리안은 소신을 밝혔다. 그것은 칸딘스키와 단적으로 대립되었다. 저널과 비평은 그 차이를 대서특필했다. 대중들은 이해하기 쉬운 싸움이니까 쉽게 기억해주었다.
그 두 번째는 후계세력이 강력했다는 것이다. 몬드리안의 신조형주의 철학은 미니멀로 연결된다. 미니멀은 극도로 단순화된 기하적 형태로 환원하는 미술의 흐름이다. 또 하드 엣쥐가 있다. 가장자리가 딱딱한 선으로 그려지는 그림이라는 뜻이다. 색면을 기하적으로 단순화하는 미술사조이다. 이들이 선조인 몬드리안을 빛내준다. 잘난 자손이 선조의 무덤에 문인석이라도 그럴 사하게 세우는 법이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칸딘스키와 마찬가지로 서구미술의 큰 흐름에 대위법적으로 자신의 미술을 끼워 넣은 것이다. 마치 새끼를 꼴 때 짚을 넣듯 자신의 신조형주의 이론을 대입한 것이다. 그 새끼의 이름은 대상성이고 그것을 꼬는 방식이 변화와 발전이었다.
대상성이란 구체적인 형상을 가진 대상을 가진 대상을 알아볼 수 있는 요소로 환원하여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런데 몬드리안의 그림이 구체적인 형상을 가졌다는 말인가? 그리고 알아 볼 수 있도록 그렸다구? 그럴 리가 있나 하고 생각할 줄 알았다.
몬드리안은 1908년에 <붉은 나무>로 성공의 가능성을 타진한다. 아수파적인 색채에 영향을 받은 작품이다. 큐비즘의 형체분할에도 영향을 받았다. 이어 줄곧 대상의 분해와 재해석에 매달린다.
밀물은 수직선으로 표현했다. 썰물은 수직선이다. 자연에서 연상되는 색채를 도식화했다. 노랑은 태양광선의 찬란한 움직임이다. 파란색은 공간의 무한확장이다. 빨강은 노랑과 파랑을 통합하는 중간색이다. 그것을 그래픽 디자인처럼 그렸다.
그가 주장한 신조형주의는 단순화에 역점을 두었다. 다양한 현상을 기호화함으로써 순수한 리얼리티를 발견하고자 했다. 그렇다고 그 작업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물감과 대상 뿐 아니라 자신과의 악전고투로 얻어지는 결과였다.
복제사진을 보면 몬드리안의 그림은 깨끗하고 말쑥해 보인다.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몬드리안의 원화를 보았다. 눈이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겹치고 겹친 물감과 붓 자국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균열로 얼룩진 화면이 보였다. 숱한 시행착오와 땀 냄새가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몬드리안은 기하적인 작업을 할 때도 자를 대고 선을 긋지 않았다. 마스킹 테입으로 바르고 칠한 후 테입을 떼어내는 융통성도 부리지 않았다. 일구월심 손으로 선을 긋고 또 그었다. 오직 붓만으로 그는 자신의 앞에 놓여진 무한한 가능성에 대결했다. 한마디로 미련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만약 컴퓨터에 몬드리안의 머리를 집어넣으면 “돌을 넣지 마시오”라는 메시지가 출력되었을테지. 그러나 작품을 넣으면 컴퓨터도 손을 든다. 메시지는 이러했다. “컴퓨터도 이토록 완벽한 조형을 만들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몬드리안이 대상성이라는 새끼를 꼬았다고 했다. 그렇다면 알아볼 수 있는 그림이라는 이야기가 아닌가. 그런가?
1940년 몬드리안은 뉴욕에 정착했다. 빅토리 부기우기란 작품은 흑인음악을 소재로 했다. 8박자를 한 소절로 하는 재즈 리듬이다. 흥겨운 리듬을 표현하기 위해 마름모 캔버스가 선택되었다. 그래서 더욱 철저한 기하적 도안같다. 그러나 이 작품은 구상회화이다. 뉴욕 시가지의 풍경화라는 것이다.
뉴욕에 가시면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전망대에 가보시라. 자살방지 철책을 보러 가라는 것이 아니라 몬드리안의 작품을 보라는 것이다. 해질 무렵 보석처럼 빛나는 뉴욕의 풍경이 바로 몬드리안의 작품이었던 것이다.
잘 구획된 도시처럼 뉴욕의 조명과 간판은 철저한 통제의 결과로 그토록 아름답다. 이제 알겠지? 브로드웨이 부기우기는 <붉은 나무>와 마찬가지로 풍경화였던 것이다. 재현적인 요소를 줄이면서 형체와 리듬에 의한 회화적 구성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기하적 추상은 러시아의 절대주의와 구성주의, 몬드리안의 신조형주의에 근거를 두고 발전해나간다. 구성주의는 말레비치가 1915년 시작했다. 그는 예술가가 순수한 예술적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예술에서 가치 있는 것이라 믿었다.
기초 기하학적 형체 중에서도 순수하다고 생각된 것은 사각형이었다. 1913년에서 19년까지 그는 흑백과 하얀 바탕위에 하얀 그림을 그렸다. 하얀 바탕위에 붓으로 만들어낸 자국이 전부였다. 질감으로만 배경과 구분된다.
구성주의는 입체주의의 콜라주에서 성장한다. 타틀린은 캔버스와 유화물감 대신 다양한 재료를 사용했다. 목재, 석재, 함석, 유리 등이다. 회화적 연상을 제거한다는 이유에서이다. “물질의 문화”라는 강령은 그런 사상을 담고 있다.
제3인터내셔날 기념비는 노동자 계급의 주장을 관철한다는 레닌의 개량주의 사상을 담고 있다. 제3인터내셔날이란 1919년 창설된 코민테른이다. 각국 공산당을 지부로 하는 국제공산당조직이다. 프롤레타리아트혁명을 고취했다. 후진민족의 자결권과 식민지의해방을 주장했다.
추상 이야기 재미있지? 그렇다 하고 대답하기 바란다. 더럽게 재미 없네 라고 이야기하면 이야기가 진행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추상이란 추상이라는 이름의 통신이기 때문이다. 통신의 수단이 없으면 소통할 수가 없다. 소통이 안 되면 그야 암호통신 아닌가. 이제 칼자루는 당신의 손으로 넘어갔다.
도판: 週刊美術館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