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리 빨리
언제부턴가 우리는 단거리 육상선수처럼 빠르게 훈련되고 있다. 슬로푸드 보다 패스트푸드가 음식문화를 주도하고 있다. 인터넷속도가 세계열강을 제쳤다. 스포츠, 중공업, 우주 항공 산업, 무기생산 뿐 아니다. I·T 강국으로 나아가는 속도도 눈부시다. 미공개 분야에서도 선진외국을 앞지르는 사례는 허다하다. 개도국이라 하대하던 이웃 나라들이 퍼붓는 질투가 가관이다.
40여 년 전 일주일 정도 호놀룰루에 묵은 적이 있었다. 한갓진 이면도로에 인부들이 공사 중이었다. 이면도로에서 길을 가로질러 수도 파이프를 매설하는 작업으로 보였다. 곡괭이로 아스팔트를 뒤집고 삽으로 흙을 퍼내는 일을 하고 있었다. 두 사람씩 조를 짜 넷이서 진행하는데 진도는 제자리걸음이었다. 호텔에 묵는 나흘간 구덩이를 파는 작업이 겨우 반쯤 진행되었다. 전 공정이 다 되려면 앞으로도 일주일은 더 걸릴 것 같았다. 우연히 목격한 내 눈에는 일당을 늘리기 위해 일을 미적거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청부공사가 아닌 일당 인부를 고용한 작업이라고 여겼다.
우리나라 같으면 이틀로 충분할 작업을 나흘간 절반도 진행을 못했다. 상하常夏라는 환경에 행동이 굼뜬 습성도 있었겠지만 해도 너무 한다 싶었다. 물론 작업에는 시방示方이 있어서 신속보다 정확을 기해야 한다. 그러나 일하는 시간보다 쉬는 시간이 많아서야 일이라 하기 어렵다. 방콕에서였다. 한국인 관광객을 부르는 상인들이 ‘빨리빨리’를 외쳤다. 냉소를 금할 수 없었다. 곰방대 물고 뒷짐 지고 매사에 느긋한 민족으로 알려져 있었던 우리였을 뿐만아니라 예의지국이었다. 그러던 것이 어느새 ‘빨리빨리’ 민족으로 대변되어 사람대접이 소홀하다 싶었다.
쾌속快速, 민첩敏捷, 화급火急도 빨리라는 뜻을 내포한다. 뜻은 비슷해도 소리로서는 빨리 보다 빠르지 않다. 엘리베이터가 선다. 당연히 내리는 것이 먼저고 다 내린 다음 타는 것이 순서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해낸다. 서로 옷깃도 스치고 어깨가 부딪기도 한다. 개의치 않는다. 그리고 재빠르게 닫힘단추를 누른다. 어떤 미국인 기자는 한국인의 승강기 이용습관을 기이하다고 보도했다. 당연히 ‘서두르는’국민으로 소개했다. 그 기자는 quick이라는 단어를 썼지만 문장의 흐름은 hurry로 설명했다. 소매 깃이 닿는 것은 touch가 아니라 relationship임을 간과하였다. 상대방 어깨에 걸쳐진 머리카락을 스스럼없이 떼어주는 장면은 어떻게 여길지 궁금했다.
‘빨리’는 둘이 붙어 ‘빨리빨리’가 되어야 진가가 드러난다. ‘빨리’는 어쩐지 ‘빨리빨리’ 보다 굼뜨다. ‘빨리빨리’ 문화에 젖어 살다 보면 느린 동작이 고의성 태만으로 보인다. 우리는 그냥 하는 동작도 외국인 눈에는 빨라 보이는 모양이다. 대한늬우스 시절. 조기완공이라는 단어가 들불처럼 번진 적이 있다. ‘빨리빨리’ 정신이 문화처럼 자리매김하게 된 동기라 기억한다. 공기단축은 문자체고 ‘빨리빨리’는 구어체다. 전광석화를 우리말로 압축하면 퍼뜩 이다. 번갯불에 콩 볶기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마파람에 게눈 감추는 속도는 ‘빨리빨리’에 비해 나무늘보가 뜀뛰기를 하는 것과 같다.
문명학자들이 한강의 기적을 ‘빨리빨리’에서 찾고자 시도한다. 자칫 부실과 동의어로 통할 법하다.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공사를 우리나라 컨소시엄들이 수주하는 쾌보가 심심찮게 들린다. 그리고 결과는 조기완공이다. 이쯤 되면 ‘빨리빨리’ 자체가 기술이다. 공기工期는 시공자가 정하지 않고 발주자가 정하지만 한민족이 손을 대면 공기를 단축한다. 정확을 바탕으로 하지 않으면 신속은 가치가 없다. 그래서 신속과 정확은 항상 붙어 다닌다. ‘빨리빨리’ 정신 뒤에는 투철한 사명감이 도사리고 있다. 일에 종지부를 찍는 정신 위에 완성이라는 성취가 마중물 작용을 한다. 그리고 ‘빨리빨리’는 휴식시간을 연장시키는 효과가 있다.
시간이 황금이라는 속담이 맞다면 ‘빨리빨리’는 황금알을 낳는 지혜다. 한국여권은 가치가 세계2~3위로 치솟아 소매치기가 한국여권을 훔치는 것도 세계1위로 랭크되었다. 조선 수주도 세계1위다. K-Pop과 드라마도 큰 몫을 하고 있다. 그 여파로 영화며 드라마, 음악, 미술 분야에까지 한국의 위상은 날로 높아가고 있다. 즈음에 나는 조선팝이 세계를 휩쓸날을 고대한다. 물론 최저도 있다. 출산율이 최저다. 산아제한에서 출산장려까지 정책변화가 놀랍도록 빨리 진행된 나라다. 문맹률 최저까지 진행속도 또한 기록적이다. 오랜 피식민 국가가 민족상잔 이라는 전화戰禍를 겹쳐 겪었다. 지금도 국토는 반 동강이임에도 한 세기도 되기 전 경제대국과 어깨를 겯는 기적을 이룬 민족이다.
30대 중반에 캐나다로 이민 갔던 친구가 한국에 볼일이 있다며 왔다. 여권 연장 날짜를 잊고 있다가 마감도 한참 늦은 시간에 구청에 도착했다. 스탠드에 몇몇 사람이 둘러서 있는 틈새로 여권을 들이밀었다. 직원은 낚아채듯 여권을 앗아갔고 잠시 뒤 연장된 여권을 받았다. 한국이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는 지금 역이민을 계획 중이다. 한국인들 몸에 밴 ‘빨리빨리’는 단순한 속도전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관공서 문 여는 시간은 정시를 지키지만 퇴근 시간이 되었다고 기다리는 민원인을 돌려보내지는 않는다. 영영 다시 할 수 없는 일을 오늘 늦게나마 해결해준다. 공무원 근무규정에 적시되지 않은 적극성의 극치다.
바꿔야 할 ‘빨리빨리’ 문화가 있다. 운전습관과 식사속도다. 운전은 기술이 아니라 교양이다. 차에서 내리는 순간 보행자가 된다. 살기 위해 먹는 것은 석기시대 수준이다. 음식을 감사하는 자세로 음미하는 문화로 자리매김하면 좋겠다. 우리는 슬로푸드도 패스트푸드도 마음껏 선택할 자유를 누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