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내 삶의 끝을 본 적이 있어↓
내 가슴 속은 갑갑해졌어↓
내 삶을 막는 것은 나의 내일에 대한 두려움→
반복했던 기나긴 날 속에 버려진 내 자신을 본 후→
나는 없었어↓ 그리고 또 내일 조차 없었어↓
서태지와 아이들의 『Come back home』에서
아들아
지금 너는, 코로나 대학생이다.
대학 캠퍼스와 대학 친구, 그리고 스물의 낭만을 모두 코로나 바이러스에게 빼앗긴 불행한 세대다.
내 집에서 온라인으로 수업 받고 있는 너의 모습이 안쓰럽다.
너희 형은 군대라는 조직에 격리되어 있고, 너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만든 격리 속에 갇혀있다.
꽃 같은 푸른 청춘이 가을 속 낙엽처럼 노랗게 물들어간다.
아버지는 네 형에게는 come back home을 외치고 싶고, 너에게는 leave home을 외치고 싶다
아버지가 대학신입생이 된 건 스물 일곱의 늦은 나이였다.
아버지는 고등학교를 2학년 1학까지만 다니고 자퇴했다.
그리고 10년 정도를 허송세월을 보내다가 늦게 공부를 해서 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다.
남보다 뒤늦게 어렵게 간 대학이니, 그 생활이 얼마나 좋았겠니.
10년을 짓누르던 내일의 두려움이 사라진 유일한 시기였다.
특히 좋았던 것은 일년 중 절반이 방학이고, 학기 중에도 절반은 휴일이었다.
그 생활이 얼마나 좋은지, 직장을 들어가서 방학을 없어진 생활을 하면서 실감했다.
아들아
아버지는 92학번이었다.
네가 20학번이니, 지금부터 38년 전에 아버지는 신입생이었다.
나이 많은 신입생으로, 92학번 X-세대들과 아버지는 대학 생활을 같이 했다.
동기들은 아버지를 ‘86(나이는 27살)대우 92(학번은 20살)’라고, 엉클(Uncle)이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그때는 일곱 살 차이가 나는 동기들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난다고 생각했다.
전주에 그 동기들이 연락이 와서 10여년에 만에 동기들을 만났다.
마흔이 넘어가니, 일곱 살 차이는 아무것도 아니더라.
이제는 친구처럼 같이 늙어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들아
우리가 입학했던 그 해에 언론에서는 신인류가 탄생했다고 분석하는 기사가 많았다.
어디로 뛸지 모르는 이상한 인간이라고, X-세대라고 불렀다.
그때 X-세대의 상징처럼 갑자기 혜성처럼 나타난 그룹가수가 있었다.
바로 서태지와 아이들이다.
1992년 3월 14일,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 출현하면서,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92학번을 X-세대, 또는 서태지와 아이들 세대라고 불렀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갑자기 나타났다.
“난 알아요.
이 밤이 흐르고 흐르면.
누군가가 나를 떠나버려야 한다는
그 사실을 그 이유를
이제는 나도 알 수가 알 수가 있어요”
거리에서, 커피전문점에서, 락카페에서 어디를 가든지 이 노래가 나왔다.
난 알아요. 라는 노래는 쇼킹했고, 환상 속에 그대, 라는 노래는 환상적이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이렇게 우리가 입학한 1992년에 혜성처럼 등장했고, 그리고 우리가 졸업하는 1996년에 해체되었다.
우리는 대학 4년을 서태지와 아이들과 함께 보냈다.
아버지의 대학시절은 서태지와 아이들의 음악이 문화 아이콘이었으며, 젊은 그 자체였다. .
서태지와 아이들은 보컬, 작사 작곡의 서태지라는 리더와 코러스 및 백 보컬과 안무를 맡은 이주노, 양현석라는 멤버로 세 명으로 구성된 그룹이었다.
너는 모르겠지만, 대한민국 대중음악을 서태지와 아이돌 이전과 이후로 나눌 정도로 대중음악의 판도를 바꾼 그룹이다.
아들아
오늘은 서태지와 아이돌의 멤버 세 사람의 그 이후 삶을 얘기하려고 한다.
서태지와 아이들 그룹을 해체한 이후 세 사람의 삶의 모습을 통해 ‘예술과 사업’의 관계를 설명하려고 한다.
오늘의 주제는 바로 대중음악과 사업가이다.
대중음악 속 사업가는 어떻게 인물이 되었는가를 말하려는 것이다.
즉 예술과 밥벌이라는 기준으로 ‘소득의 형태’을 구분하고, 설명해주려고 한다.
아버지는 예술로 밥벌이하는 사람을 세 단계로 분류한다.
첫째는 예술노동자이다.
둘째는 예술자본가이다.
셋째는 예술사업가이다.
첫째 단계인 예술노동자를 설명한다.
말그대로 예술이라는 노동을 통해서 밥을 벌어먹는 사람들이다.
기술이라는 말이 있다.
흔히 기술은 사람이 사회적 활동에 사용하는 기능, 경험, 지식을 습득되어 만들어내는 신묘한 솜씨나 재주를 말한다.
그리고 예술이라는 말이 있다.
예술은 신묘한 솜씨나 재주가 담긴 기술에 영혼의 아름다움을 부여된 수준, 경지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기술과 예술은 노동 소득의 도구이다.
예술로 하든, 예술로 하든 그것을 통해서 밥벌이를 하는 것은 者의 노동영역으로, 노동자 또는 기술자라고 말 한다.
그들은 예술 노동을 하지 않으면 밥을 먹지 못한다.
음악 공연을 하고,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써서 돈을 벌어야 한다.
그들은 몸이 아프거나. 지금 지닌 기술이 가치가 떨어지면, 일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지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고갱, 고흐, 이중섭 등 예술노동자는 당대에 삶이 비참했다.
둘째 단계인 예술자본가이다.
기술이나 예술을 라이선스로 만들었든지, 아니면 특허권으로 만들어서, 그것을 통해서 노동하지 않고도 돈을 벌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낸 예술가를 예술자본가라고 말한다.
주로 저작권료나, 인세, 판권으로 지속적으로 돈을 벌 수 있는 구조가 갖춘 예술가이다.
이들은 큰 돈을 벌지 못하지만, 궁핍하게 살지는 않는다.
대표적으로 가수로는 요즘 화재가 되고 있는 ‘나훈아’이고, 소설가는 이문열작가가 여기에 해당된다.
셋째 단계인 예술사업가이다.
예술사업가는 예술을 사업으로 볼 줄 아는 안목이 있는 사람이다.
사업가의 능력은 예술적 능력과는 다르다.
사업가는 다섯 가지 능력이 있어야 한다.
사업 아이템을 볼 수 있는 눈, 사업을 실행하는 발, 사업자원을 모으는 손, 그리고 눈과 발과 손을 시스템으로 체계하는 머리, 위험의 냄새를 감지하는 코를 가진 사람이다.
첫째, 매의 눈으로 사업 기회를 포착한다.
둘째, 아기의 손으로 매만진다.
셋째, 마당발로 사업자원을 모은다.
넷째, 뱀의 머리로 시스템을 만든다.
다섯째, 개의 코로 위험을 인지한다.
사업가는 매의 눈, 아기의 손, 마당발, 뱀의 머리, 개의 코를 가진 사람이다.
예술로 사업하는 예술사업가도 사업가의 기질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아들아
지금부터는 예술노동자, 예술자본가, 예술사업가를 쉽게 이해하도록, ‘서태지와 아이들’의 멤버 세 사람의 해체 이후의 삶에 비유해서 설명해주겠다.
첫째, 예술노동자는 ‘이주노’다.
그는 한마디로 춤 꾼이다.
춤의 기술은 그 당시 대한민국의 최고였고, 그 스스로도 자부하고 있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춤 꾼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춤이라는 육체적 행위는 나이 먹고는 할 수 없는 육체 노동의 영역이다.
그는 경제적으로 궁핍했고, 그 궁핍으로 마음은 더욱 황폐해졌다.
얼마 전에 성추행혐의로 고소당하고, 더욱 나락으로 빠지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술노동자나 예술노동자나 경제의 주인은 될 수 없다.
특히 기술도, 예술도 못하는 일반 노동자의 삶은 더욱 버겁다.
점차 사회는 육체적 노동을 원하는 일이 없어진다.
노동자는 경제적 삶의 주인이 되기 힘든 직업이다.
불황, 위기 속 사회에서 제일 먼저 나락으로 떨어질 사람들이다.
예술노동자인 이주노의 삶도 그랬다.
그는 예술노동자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둘째, 예술자본가는 서태지다.
예술로 자본소득을 만든 예술자본가이다.
서태지는 예술자본가이지, 예술사업가는 아니다.
서태지는 예술을 편하게 예술을 해나갈 수 있는 자본소득을 얻고 있지만, 자산의 규모는 사업가 수준은 이르지 못한다.
보통 예술로 살아가겠다는 사람이 꿈꾸는 이상적인 삶의 모델이다.
예술노동자에서 예술자본가로 거듭나는 것이 가장 모범적인 코스이다.
셋째, 예술사업가는 양현석이다.
그는 예술노동자에서 예술자본가가 아닌 예술사업가로 거듭났다.
양현석은 서태지보다 작사도 못하고, 작곡도 못하고, 노래도 못하고, 이주노 보다 춤을 잘 춘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사업가들이 가지는 매의 눈, 아기의 손, 마당발, 뱀의 머리, 개의 코를 가진 사람이다.
예술로 사업하는 예술사업가의 기질이 있었다.
그는 예술을 사업으로 바라보고, 그 사업을 하기 위한 인적자원과 물적 자원을 모으는 재주가 있었고, 더욱 잘하는 사업과 자원을 시스템적을 만들어 YG엔터테인먼트라는 회사를 만들었다.
그래서 양현석은 예술노동자에서 예술사업가로 거듭났다.
서태지와 아이들 멥버 중 이주노가 아니고, 서태지도 아니고, 양현석이 예술사업가가 되었다.
다만, 양현석에게도 부족한 점은 있었다.
그는 매의 눈과 아기의 손과 마당발과 뱀의 머리로 사업을 이루었지만, 개의 코로 위험을 인지하는 능력은 부족했다.
대부분 예술사업가들이 개의 코를 가지지 못했다.
사업가에게 가장 중요한 건 위험관리이다.
그래서 사업가는 돈을 버는 거에 너무 치우쳐, 윤리적인 판단을 놓치게 된다.
SM의 이수만회장도 세금 포탈로 감옥에 갔었고, 양현석대표도 비즈니스 윤리를 지키지 못했다. .
사업가는 창업보다 사실은 수성이 더 어렵다.
태조 이성계보다 세종대왕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만큼 사업은 리스크 매니지먼트가 중요하다.
아들아
젊었을 때는 이주노처럼 예술노동자로 살아도 괜찮다.
다만, 몸은 예술로 뛰고 있어도, 머리는 늘 삶의 토대가 무엇인지 살펴야 한다.
그래서 머리에 담아둘 예술사업가의 다섯 가지 경제 감각을 적어둔다.
첫째, 매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거라.
둘째, 아기의 손으로 세상을 매만지거라.
셋째, 마당발로 세상 곳곳을 다녀보거라.
넷째, 뱀의 머리로 늘 세상을 시스템적인 사고로 체계화하거라.
다섯째, 개의 코로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위험을 대비하여라.
아들아
서태지의 아이들의 『Come back home』의 마지막 가사로 오늘 글을 마무리한다.
주위를 둘러봐 널 기다리고 있어.
그래 이제 그만 됐어 나는 하늘을 날고 싶었어.
우린 아직 젊기에 괜찮은 미래가 있기에
자 이제 그 차가운 눈물 닦고.
사랑한다. 아들아.
[출처] 아들아 경제 공부해야 한다 25 (예술사업가편) (부동산 스터디') | 작성자 정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