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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광원을 회고하며
김금남 원장님
어려서부터 제1의 꿈은 초등학교에서 배운 백의의 천사 나이팅게일의 삶을 본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제2의 꿈은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온 수행자의 삶이었습니다. 인생의 허무를 깨닫고 심산 속에 들어가서 수도하다가 하늘의 음성을 들었던 수행자의 길을 사모했습니다.
그러나 그 시대 상황은 부모님께서 간호원이라는 직업을 용납하시기 힘들었습니다. 간호학을 지망하여 원서를 냈던 저의 꿈이 산산조각이 나서 절망에 빠졌습니다. 간호학의 꿈을 접고 초등학교 졸업식을 마친 후 교문을 나서는데 담임선생님께서 손을 잡으며 말씀하셨습니다.
앞으로의 시대는 무식한 사람이 살기 힘든 세상이 된다. 그러니 좌절하지 말고 진학을 포기하지 말라. 금년에 직장을 알선해 줄 터이니 집에서 기다려라.
좌절하고 있던 저는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힘을 얻어 교문을 나섰습니다.
그러나 그 시대는 여자가 직장생활을 한다는 것이 흠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여직원은 거의 일본여성뿐이었습니다. 저는 15세로 3월에 졸업했는데 담임선생님의 소개로 5월에 우체국에 취직이 되었습니다.
그후 2, 3년 우체국 일을 하였는데 그 때가 일제 말엽으로 대동아 전쟁이 한창이어서 남자들은 다 전선에 나가고 후방은 여자들이 지켜야 될 형편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우체국 일을 모두 다 배워야 된다는 국장님의 지시를 받고 부서마다 일을 배워야 했기에 너무 바빠서 진학의 꿈을 접었습니다.
또 그 당시는 잘 믿는 교인들이 감옥으로 감금되어갈 때였습니다. 남원교회도 교회문을 닫았습니다. 그런데 새벽마다 어머니는 그때 그 어려운 상황을 뚫고 새벽 세시만 되면 찬송가와 성경을 들고 비밀리에 새벽기도를 나가셨습니다. 저는 그때 어린 동생을 돌보고 있었는데 꿈에 보니 남원 교인들이 소복을 차리고 어느 산 오솔길을 열을 지어서 올라가는 것이었습니다. 저도 남원교인이니까 따라 올라갔습니다. 올라가다 보니 오른 쪽에 십자가 철문이 있었습니다. 저는 멈춰 섰습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려면 십자가 문을 통과해야 된다는 말씀이 생각나서 그 문을 바라보며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 문이 너무나 엄청나서 제 힘으로는 열 자신이 없었습니다. 한 참 기도를 하다가 그래도 이 길을 가야한다 하고 문을 열려고 하니까 문이 힘들지 않게 열렸습니다. 그런데 보니까 양쪽에 어린 두 천사가 문을 열어 주었습니다. 들어가 보니 그 안에서 예수님이 나오셨습니다. 그런데 언제 오셨는지 어머니께서 예수님 곁에 평안하게 쉬고 계셨습니다.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예수님, 저도 어머니 계신 저곳으로 가고 싶어요. 그러자 예수님께서 아직 시간이 못 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도 저는 그곳으로만 가고 싶어서 예수님께 사정을 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두툼한 책을 한 권 주시면서 너는 가서 이 책을 다 읽고 그 말씀에 발을 맞추고 와야 된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손으로는 책을 잡고 한 손으로는 예수님의 허리를 부여잡고 나오기 싫어서 엉엉 울었습니다. 지금 당장 저곳에 가고 싶은데 이 두꺼운 책을 언제 다 읽고 한 말씀 한 말씀에 다 발을 맞추고 와야 하는가 생각할 때 너무 마음이 아파서 엉엉 울었습니다. 저는 그 울음소리에 깨고 보니 어린 동생을 업고 잠깐 잠이 들었는데 꿈이었습니다.
꿈을 깨고 나니 너무 너무나 가슴이 아파 나는 못 믿을 사람인가 하고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예배를 보고 오신 어머니께 “어머니, 요새 새벽마다 어디로 예배를 보러 가십니까?” 하고 여쭤보았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내일 새벽부터는 어떤 일이 있어도 어머니 예배 가실 때 꼭 같이 동행하겠습니다.” 하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어머니는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제가 꿈 이야기를 해 드렸더니 어머니는 “이것은 비밀이다.” 하시면서 지금 새벽마다 예배드리러 가는 곳은 몇몇 소수가 비밀리에 오집사님 댁에 모여서 예배하는 모임인데, 요새 광주에서 이씨라는 선지자가 오셔서 소수가 모여 성경공부를 하고 있단다. 그분은 아무리 멀리 있어도 영안이 밝으셔서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선지자란다. 그러니 네가 가는 것도 먼저 그분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하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 다음 날 어머니는 이선생님과 의논 중에 이선생님 말씀이 그냥 집에서 어머니에게 신앙을 배우라고 하셨단다 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저는 생각하기를 꿈에도 예수님이 안 받아주시더니 이선생님도 안 받아주시는가, 나는 못 믿을 사람인가 하고 낙심했습니다.
그러나 선지자의 말씀을 거역할 수는 없어서 그 말씀에 순종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날부터 어머니의 깊은 신앙을 닮을 수는 없지만 보이는 것은 어머니께서 하신대로 흉내를 냈습니다. 어머니가 금식하면 나도 금식하고, 어머니가 기도하면 나도 기도하고, 어머니가 성경보시면 나도 성경보고, 보이는 일은 모두 어머니의 그림자처럼 따라했습니다. 그러던 중 천년만년 당당할 것 같던 일본천왕이 1945년 8월 15일 손을 들고 항복을 하였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제 나이 18살이었습니다. 그 당시로는 한창 혼기였습니다. 스무 살만 되어도 그때는 혼기가 넘었다고 노처녀라 했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결혼을 놓고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결혼을 할 것인지, 아니할 것인지, 이 문제의 해답을 얻기 위하여 교회에 새벽마다 나가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성경말씀도 열심히 읽었습니다. 기도 중에 ‘주님, 저는 주님의 뜻대로만 살고 싶습니다. 주님께서 제게 요구하는 길이 무엇인지 그 길을 가리켜 주십시오. 순종하겠습니다.’ 하고 매일 열심히 애절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금남아! 금남아!’ 하고 부르시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 새벽에 누가 나를 부르지? 하고 깜작 놀라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사무엘 선지자가 어렸을 적에 하나님께서 부르셨다는 말씀이 생각이 나면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답을 주시려고 부르시는가 보다’ 생각했습니다.
그 후 몇 달이 지났는지 기도하던 중에 ‘너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하나님의 거룩한 산 제물이 되라’ 하는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말씀의 해석을 주시라고 기도했습니다.
세상에서 살되 세상 법에 따라 살지 말고, 즉 식색으로 살지 말고 예수님만 사랑하고 사는 것이 하나님의 거룩한 산 제물이 되는 것이라는 해석을 주셨습니다. 저는 ‘말씀에 순종하겠습니다.’ 하고 약속을 하였습니다.
그때는 독신으로 산다는 것을 듣지도 못했고 보지도 못했습니다. 어려서부터 개신교회를 다녔습니다. 어른들의 말씀은 혼기의 때를 놓치면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직장에서도 결혼해야 된다는 말들만 들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결혼을 안 하겠다고 하니까 주위에서나 직장에서 핍박이 심했습니다. 저는 현재의 자리를 떠나 제2의 꿈이었던 수행자의 길을 택하였습니다. 그 후 어머니와 같이 30리 길이나 되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서 100일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백일기도를 마치기 3,4일 전에 하나님께서 이선생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처음 뵈었을 때 너무 기뻤습니다. 어머니를 통해서 이선생님에 대한 말씀은 들었지만 실지로 뵈니까 마치 엘리사벳과 마리아가 상봉하였을 때 복중의 아이가 뛰놀았다는 그런 경험을 하였습니다. 약 15일쯤 지난 후에 이선생님께서 이 장소를 떠나고 싶지 않느냐고 물으시는데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배와 그물을 버리고 나를 따르면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리라’ 하신 말씀을 떠올리며 순종하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며칠 후 눈이 오는 날, 선생님께서는 어디로인지 모르지만 길을 떠나셨습니다. 저는 이공 이세종선생님의 제자 수레기 어머니와 함께 선생님을 따라서 길을 떠났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맨발이었습니다. 눈이 내리는데 저도 신발을 벗어들고 맨발로 걸었습니다. 선생님을 따라 걷는 길은 영혼이 가볍고 행복하였습니다. 눈보라치는 바람은 우리들의 등을 더 빨리 가도록 밀어주었습니다. 천성을 향하여 가는 발걸음을 더 빨리 걷도록 바람이 밀어주었습니다.
‘아,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복지를 향하여 가는 길이 이렇듯 기뻤을까? 새장에 갇힌 새가 놓임을 받았을 때 이처럼 기쁠까?’
육의 고통은 아랑곳없이 영혼은 공중을 날아가듯 한없이 기뻤습니다. 탁발을 하면서 전도를 하면서 며칠을 걸어서 갔습니다. 남원의 갈보리 산에서 출발하여 화순군 도암면 도구박골 깊은 산중까지 약 250리 길을 걸어갔습니다. 도구박골 깊은 산중, 이곳은 나의 종착지였습니다. 기도하면서 나와의 싸움에서 승리해야 했습니다. 나의 수행의 길이 시작된 것입니다. 혼자이기에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나는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무엇인가? 인간이 무엇인가?
과거를 회상할 때 나는 죄인이었습니다. 부모님께서 선하게 살아야 된다고 말씀하셨지만 인간 형편에 따라 시기, 욕심, 질투, 마음의 혈기 등 배우지 않았지만 이것들로 가득했습니다. 이것은 종자가 부정한 탓인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선하고 싶지만 악이 먼저였습니다. 나의 영혼은 캄캄한 어둠이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을 불순종함으로 에덴에서 쫓겨난 우리의 선조 아담과 하와의 후예였습니다. 이 종자는 음란의 씨요 짐승의 씨였습니다. 이 종자의 열매는 동생 아벨을 죽인 가인의 종자였습니다. 살인자였습니다. 육이 영을 죽였습니다. 결과는 죄요 사망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짐승이 되었습니다.
죄인으로서 슬피 울고 있는 저에게 구세주가 나타나셨습니다.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빌어 성령으로 잉태하여 오신 예수님, 거룩한 하나님의 혈통으로 오신 예수님, 이분을 믿고 모시면 삽니다.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신 예수님께서는 정과 욕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으심으로써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살아나셔서 부활 승천하셨습니다. 이 길만이 구원의 길이요 영생의 길입니다.
죄 많은 우리들도 날마다 시시때때로 정과 욕을 십자가에 못박음으로써 거룩하신 예수님의 인격으로 다시 태어나 참사랑의 삶을 살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질식하여 죽을 뻔 했던 내 영혼이 거룩한 숨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정욕은 우리 힘으로 죽일 수 없습니다. 정과 욕을 십자가에 못박고 돌아가신 예수님의 보혈만이 나에게 정욕을 이길 힘을 주십니다. 아담의 혈통에서 이어받은 음란과 정욕이 죽어야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가 됩니다. 이런 과정이 순결과 청빈과 순명의 길이었습니다. 이 길만이 우리 선조가 쫓겨났던 에덴의 회복이요 영생입니다.
1948년 여순사건으로 고아들이 늘어났습니다. 1950년 6.25 전쟁으로 과부와 고아들의 세계가 되었습니다. 이선생님께서는 예수님 믿는 자녀들은 고아와 과부를 내 몸처럼 돌보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자주 강론 하셨습니다. (약1:27) 1950년 선생님의 교훈을 따라 동광원이라는 고아원을 광주에 개설하고 정인세 원장님의 지도하에 우리 수도 공동체 식구들은 고아를 키우는 돌보미로서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때의 고아들은 어머니들의 자녀였고 우리들의 형제였습니다. 함께 시래기죽을 먹으면서 고아들에게 성경 말씀과 초등과정 및 중등과정을 원안에서 가르쳤습니다. 함께 웃고 함께 우는 예수님처럼 섬기는 삶은 고아들에게는 희망이 되었고 우리 자신들은 뿌듯했습니다.
그러나 고아원은 운영의 한계로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후 1951년 이선생님께서는 귀일운동을 시작하셨습니다. 전쟁 후 먹을 것과 거처가 없는 가난한 시대, 고아 걸인들에게 식사를 따뜻이 대접하고 하룻밤을 재워 보내는 운동이었습니다. 정인세 원장님과 함께 광주역, 광주천 다리 밑, 공원 등지에서 주리고 있는 고아 걸인 폐질환자들을 모시고 와서 저녁을 대접하고 하룻밤 재워 보내는 운동이었습니다. 폐질환자는 응급치료를 하기도 하였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님께서 측은히 여기시는 고아들과 환자들을 섬기게 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돌이켜 볼 때 6.25 전쟁 직후여서 먹을 것이 없는데 고아나 환자들이 몰려오면 곡식 한줌에 쑥을 뜯어다 넣고 죽을 쑤어 시래기죽을 나누어 먹던 그 시절이 따뜻하고 훈훈했습니다. 처음부터 우리 공동체는 너나가 없었습니다. 건강한 사람이나 환자나 고아나 수도자나 예수님 안에서 한 형제자매로 살았습니다. 식량이 없어서 우리가 쑥죽을 먹으면 선생님께서는 곡기를 안 드시고 나물로만 연명하셨습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환자나 고아를 예수님 모시는 마음으로 섬기지 않으면 보모 자격이 없다고 늘 교훈하셨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한 피 받아 한 몸을 이룬 형제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아 빈부를 가리지 않고 장애 비장애 고아 과부 폐질환자들까지 한 형제로 알고 섬기며 살았습니다. 이런 삶이 귀일원의 모체가 되었습니다.
이선생님께서 세상을 떠나시자 정인세 원장님의 보살핌으로 비천한자를 섬기는 삶을 계속 살 수 있었습니다.
우리 동광원은 1965년 2월 24일 시대에 맞춰 사회복지법인 귀일원을 정식으로 설립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우리 동광원의 모든 재산은 귀일원 복지설립 재산으로 묶이게 되었습니다.
우리 수도공동체 식구들은 귀일원을 내 집으로 알고 노후를 걱정하지 않고 섬기는 삶을 열심히 살았습니다.
지체 장애우들과 정신지체 장애우들을 섬기면서 여생을 보냈습니다. 예수님처럼 섬기며 사는 삶에 젊음을 바쳤습니다. 귀일원이 지금에 이르기까지 먼저 가신 정인세 원장님 및 어머니들 그리고 언님들의 피와 땀과 젊음과 기도가 배어 있습니다.
환우들과 고아들과 울고 웃다 보니 어느새 젊은 날이 다 가고 검은 머리는 파뿌리가 되었습니다. 어느 덧 노인이 되어 우리는 우리의 거처와 노후 관리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암담하던 1980년도에 정인세 원장님의 노력과 수고로 현 위치인 남원 동광원에 자리를 잡고 수도공동체로서의 여생을 보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땅에 와서 제일 기뻤던 것은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은 일과 순종하게 해 주신 것, 그리고 또한 참된 영적 지도자이신 이현필 스승님, 오북환 장로님, 정인세 선생님을 만나 믿음의 삶을 살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 감사합니다. 또한 한길 가는 여러 어머님, 형제들, 한 배를 탄 식구들 주심을 감사합니다.
시대를 잘 만나 이제는 주님 모시고 아무 걱정 없이 살고 있지만 한 때 쑥과 나물이 주식일 때가 있었습니다.
배가 고파서 잠이 오지 않는 밤이 많았습니다. 밥알 몇 알이 물그릇에 뜨면 그 밥알을 먹으려고 물 한 그릇을 다 마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우리를 불쌍히 보셔서 지금은 이렇게 풍요롭게 살고 있습니다. 의식주가 풍성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런 풍요로운 세상을 살 것이라곤 상상도 못했습니다. 모두 주님의 은혜입니다.
정원에 아름답게 여러 꽃들이 피어 있습니다. 꽃마다 아름다운 향기가 풍깁니다. 꽃의 향기가 진동합니다. 더욱 아름다운 향기는 사람들의 향기입니다. 거룩 청빈 순명입니다. 예수님같이 십자가에 정과 욕이 죽는 과정이 순결과 청빈과 순명의 길입니다. 이렇게 원함도 성령의 뜻이나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로 실천이 됩니다. 이 길만이 타락한 에덴동산의 회복이요 생명의 길이요 영생이요 하나님의 뜻입니다. (사11:6)
1. 감사는 주 예수님을 믿어 구원 받은 일입니다.
2. 영적 참 지도자 주심을 감사, 감사합니다.
3 예수님 믿고 한 길을 가는 형제들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4. 주님께서 사랑하신 지극히 작은 자, 환우들, 고아와 과부들을 섬기게 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믿음의 형제들이 서로 낮은 자리에서 약자를 섬기며 각자 주님께서 주신 달란트에 최선을 다하여 믿음과 사랑의 모습으로 약자를 섬기는 모습이 향기롭습니다. 섬김 받는 자는 너무 송구하고 부끄럽고 고맙고 감사할 뿐입니다. 만복을 받은 저는 아무 공로 없는데 무엇으로 보답하오리이까?
정인세 원장님
큰 행사가 있을 때마다 사무치게 정인세 원장님이 그리워집니다. 군대로 말해서는 이현필선생님이 사령관이시면 정원장님은 총대를 메고 제일 먼저 싸움터로 나가서 싸우시는 분입니다. 세상으로 보아 인물이나 학벌이나 지위, 그 무엇으로나 뒤지지 않으실 분이 믿음으로 자아를 부정하고 절대 순명하셨던 그 겸손한 모습에 감격했던 적이 많았습니다. 언제나 본받고 싶었던 것은 특히 겸손한 모습이셨습니다.
대범하신 어른이시면서 또한 자상하셔서 된장 고추장 장독까지 다 열어보시고 신경을 써 주셨습니다. 젊은이들이 마음에 시험이 들어 방황할 때는 대신 금식투쟁을 하셨습니다. 생명을 내걸고 금식하셨습니다. 영혼이 깨달을 때까지 투쟁하셨습니다. 믿음 없는 저희들은 그 사랑에 감격하여 예수님 사랑을 깨닫고 오늘의 행복을 누립니다.
매사에 그러하셨지만 남원의 이 장소는 그 어르신께서 피 흘리신 장소입니다. 자동차가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남원 시내에서, 또는 운교리에서 이곳까지 발이 닳도록 걸어 다니셨습니다. 광주에 계시면서 사흘이 멀다 하고 쫓아다니셨습니다.
1980년 이곳에 3만여 평의 땅을 마련하시면서 우여곡절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땅은 마련하였지만 집을 지을 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 번 순회하시면 여비로 주신 돈을 모아서 모아진 돈만큼 집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돈이 없으면 집을 짓다가 중단하셨습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절대 남에게 빚내어 쓰신 일이 없었습니다.
빈손이면 기도로 하나님의 뜻을 기다렸습니다. 그 모습이 농부 같았습니다. 촌부같은 모습이기에 면사무소나 경찰서에서 나와서 멸시하고 무시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때마다 묵묵히 감수하시면서 언제나 공손하셨습니다.
오늘의 이 자리에 수도자의 노후처로, 기도처로, 안식처로 마련해 주시기 위해서 그렇게도 애를 쓰시고 땀을 흘리시고 기도하셨습니다. 이현필선생님께서 세상을 떠나시자 우리들은 막막했습니다. 오직 정인세 원장님의 올곧은 믿음과 그 넉넉한 사랑으로 우리는 기독교 동광원 수도회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동광원 수도회로 자리잡게 된 것은 정인세 원장님의 땀과 피의 덕분입니다. 그분께서 아낌없이 부어주신 희생과 사랑의 피로 이 자리에 이렇게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너무 감사해서 정원장님께 감사를 드리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우리들은 이곳에 거저 살면서 더 기도하고 더 순종하며 동광원을 지성소로 가꿔나가야 하겠습니다.
이선생님 사별
“선지자는 예루살렘에서 죽는 것이오. 예루살렘이 아니면 죽지 않아요. 계명산은 예루살렘이요. 나는 계명산에 가야 죽지 광주에 있으면 죽지 않아요. 나는 계명산으로 가야 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다 살펴주실 것입니다.”
때를 알리시듯 선생님께서는 붙잡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가실 준비를 하고 계셨습니다. 앉아계시지 못한 몸으로 한 달 동안의 수양회를 이끄셨습니다. 예배실을 들고 나실 때에는 제자들의 부축을 받거나 업히셔서 움직이셨습니다. 말씀을 전하실 때는 정정하게 몇 시간이라도 앉아서 저희들에게 한 말씀이라도 더 주시려고 힘을 다하셨습니다. 숙소에 뉘시면 마치 산 송장같았습니다. 그러나 예배시간만 되면 벌떡 일어나셨고 말씀을 주실 때에는 기쁨으로 얼굴이 환한 빛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렇게 한 달 동안 수양회를 마치고 선생님의 몸은 극도로 쇠약하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마음이 급하다 하시면서 각 분원마다 다녀오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염려가 앞서 “약하신 몸으로 어떻게 가시겠다고 하십니까? 날이 좀 풀리고 건강이 회복된 후에 가셔야지요.” 하였습니다.
선생님이 이번에 가시면 육체로는 마지막이라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에 선생님을 차마 보내드리지 못했습니다. 믿음이 없는 저는 선생님께서 세상을 떠나시면 어떻게 하나 하는 염려로 가득하였습니다. 어떻게 살아가나 생각할 때 캄캄하였고 눈물만 흘렀습니다.
당시에 우리는 가정에서, 교회에서, 사회에서 인정을 받지 못했고 핍박만 받고 있는 상황으로 이 땅위에 발 붙일 곳이 없었습니다. 이런 처지에 선생님마저 세상을 떠나시면 어떻게 하나요? 이런 마음에서 선생님께 몸이라도 좀 회복 되면 가시라고 하면서 보내드리지 못하고 붙잡았습니다. “선생님, 이번에 가시면 마지막입니다.” 하고 울었습니다.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걱정이 되면 서울에 같이 가자.” 하고 말씀하시는 선생님께 “같이 가고 싶어서가 아니라 이 길이 마지막 길이라서 그렇습니다.”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금남양이 광주에 있으면 나도 안심하고 빨리 둘러보고 오겠다.”고 하시면서 10일을 약속하여 주셨습니다. 10일 안에 오겠으니 염려 말고 10일 안에 돌아오지 않으면 금남양이 서울로 올라오라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어린 저를 진정시켜주시는 말씀이었습니다.
선생님께서 떠나시는 모습을 보면서 제 맘 속에서는 ‘선생님 마지막 길입니다.’ 하면서 기도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는 너무 어립니다. 선생님을 더 살려주십시오.’ 하면서 10일 금식기도에 들어갔습니다. 금식한지 6, 7일이 되면서 너무 기진맥진 하는데 갑자기 이선생님께서 머리 위로 휙 날아가시며 ‘금남양, 나 갑니다.’ 하시며 떠나셨습니다. 저는 순식간의 일이라 깜작 놀랐습니다. 곧 ‘선생님, 안녕히 가셔요. 선생님 사명 다 마치셨습니다. 이제는 저희들 일만 남았습니다. 선생님을 붙잡는 것은 쓴 잔을 더 드리려는 욕심입니다. 용서하여 주십시오.’ 하면서 그렇게도 붙잡던 내 마음이 변화가 되어 기쁨으로 평안히 선생님을 전송하였습니다.
7일 후에 선생님께서 소천하셨다는 소식을 전화로 들었습니다. 식구들을 안심시키며 다음 날 상경을 하였습니다. 그 다음 날 보니 유영모할아버지께서 계명산으로 올라오고 계셨습니다. 할아버지를 뵙고 인사를 하였더니 어찌나 반갑게 맞아주시는지요. “언제 왔어요? 이선생 계명산에 오셨다는 소식 듣고 오는 길입니다.” 하시자 “저는 선생님 소천하셨다는 소식듣고 왔어요.” 했습니다. 그러자 유영모선생님께서 무릎을 탁 치시면서 “아이고, 잘 가셨어. 시원스럽게 잘 가셨어.” 하시는데 그 모습이 어떻게 제 심정하고 같은지요. 그래서 저도 “그렇습니다. 그렇습니다.” 했습니다.
죄 많고 한 많은 나그네의 인생길을 마치고 영원히 사모하고 사모하는 본향으로 돌아가셨는데 그간에 믿음이 없어서 욕심으로 붙잡았던 내 마음이 한없이 부끄럽고, 이런 나를 불쌍히 보시고 새 마음을 주셔서 기쁨과 평안한 마음으로 찬송하며 장례식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이런 마음과 믿음을 주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아멘.
박남금 어머니
제일 고령이신 박남금 할머니를 소개합니다. 인생의 허무를 깨닫고 동광원에 오신 후 광주 귀일원에서 남자반 환자들을 간호하고 돌보셨습니다. 믿음과 사랑이 많으신 할머니는 환자 중에서도 제일 어려운 환자들을 친 자식처럼, 친 손자처럼,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수년 동안 섬기다가 연로하신 건강으로 감당이 안 되어 남원의 동광원 노인반으로 오셨습니다.
할머니께서는 103세 되시던 2008년 10월 11일(음력 9월 13일) 생신날에 많은 후손들이 모여 생일잔치를 했습니다. 자손들이 거의 백여 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이날따라 할머니는 혈육을 기다리시며 모두 만나서 조반을 하신다 하셨습니다.
서울에서 손자들이 찾아와 들어오자마자 찬송가 뒤편에 있는 교독문을 읽어보라 하시며 전도를 하셨습니다. “깨끗이 살아야 해. 이렇게 꿀 송이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안 보면 안 된다.” 하시면서 열심히 전도를 하십니다.
평소에 말씀하시길 “온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한 지체야. 나는 미운 사람이 없어. 다 사랑하고 다 불쌍해. 동정을 지킨 당신들은 큰 은총이야. 당신들은 참 행복해. 이 세상에서 제일 불행은 애욕이야. 애욕을 끊지 못한 사람들이 제일 불행해. 애욕은 죄야. 애욕만 없으면 천국이지.” 하셨습니다.
평소에는 오시는 손님마다 그리도 반가워서 두 손을 덥석 잡으시며 “온 인류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야” 하시며 반겨주셨습니다. 다음에 그 손님이 다시 오시면 저는 기억을 못하지만 할머니는 아무개 목사님 아니시냐 성함까지 기억을 하십니다.
평소 일식을 잘 하시고 금식도 잘 하셨습니다. “어머니 또 금식하셔요?” 하면 “시국이 이렇게 시끄러우니 밥이 잘 안 들어가, 맘이 아파서.”하십니다.
언제나 섬기는 자리, 낮은 자리에서 하실만한 일을 소리 없이 찾아 하시며 남이야 하든 말든 손을 놓지 않고 일을 하셨습니다.
젊은이들이 일로 바쁘니까 어머니께서 노인들 등을 밀어드립니다. 103세 된 어머니께서 믿음으로 몸소 모범된 삶을 사시니 주위가 다 평화스럽습니다.
103세 된 어머니가 그리도 건강하셔서 좋은 음식은 양보하시고 할머니들 상에 못다 드시고 남은 음식을 거두어 한가한 시간에 잡수시면서 “하나님께서 입맛을 주셔서 소화도 잘 돼. 이 나이가 되도록 아픈 데가 없이 건강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 감사야” 하시며 좋은 음식은 아껴 두셨다가 오신 손님 드리며 앉아도 감사, 서도 감사, 언제나 감사하는 감사 할머니였습니다.
토요일이면 머리를 감으시고 목욕하시고 주일을 맞을 준비를 하십니다. 빨래도 손수 하십니다. 이렇게 사시던 할머니께서 103세 되던 생일날인 2008년 10월 11일(음 9.13.)에 자녀들과 손자들을 모아놓고 마지막 유언과 전도를 하시고는 이어 금식하시기 시작하였습니다.
자녀들 있는 자리에서 수의를 입혀달라고 하십니다. 저는 “어머니 수의는 어머니께서 숨지시면 입혀드리겠어요.” 하고는 자녀들에게 맡기고 나왔습니다.
다음 날 아침에 어머니를 뵈니까 수의를 손수 입고 계셨습니다. “어머니, 주님께서 오라 하셔서 수의를 입고 계셔요?” 하고 여쭈었더니 딱 떨어지게 대답은 안 하시지만 “예감이 갈 것 같아. 무엇이나 가리지 않고 그리도 맛이 있던 입맛이 없고 잘 먹던 밥이 먹기가 싫어. 꼭 갈 시간이 된 것 같아.” 하고 금식하셨습니다.
“꼭 금식을 하셔야 합니까?” 하고 물으니 “나는 부활의 주님을 만나야 해. 하늘나라는 먹는 나라가 아니여. 깨끗이 신랑이신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해야 해.” 하시며 마음이 대단히 바쁘십니다. “수의는 입었으니 벗은 옷은 관에 넣어 달라.” 하셨습니다. 뒤를 깨끗이 정리하시고 문병 오는 분들마다 예수 잘 믿으라 하시며 깨끗이 살다 오라고 열심히 전도하셨습니다.
약 5일 동안은 물도 일체 금식하셨습니다. 어머니 식사 종 쳤는데요. 하니까 가서 얼른 먹고 오라고 하십니다. 당신은 생명의 양식을 먹으니까 배부르다고 하십니다. “어머니, 그동안 물도 안 드시니까 어제 밤은 온 몸에 열이 올라 밤새 끙끙 앓으시며 온 방을 누워 밀고 다니며 힘들어 하셨습니다.” 하니까 “내가 그랬어?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하시며 그 힘없는 몸을 일으켜 물로 목을 축이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힘이 없는 몸으로 있는 힘을 다하여 목청을 높여서 ‘만세 반석 열리니 내가 들어갑니다’ 하고 찬송을 부르시는데 4절 까지 가사 한 구절도 틀림이 없이 부르셨습니다. 누워 찬송 부르시면서 손짓 발짓 온 몸으로 찬송에 맞춰 율동을 하십니다. 그 모습이 참 황홀했습니다. 어머니를 모시고 조석으로 예배를 드렸는데 박수를 치시며 그렇게 황홀해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그렇게도 가시고 싶은지 현관 문 옆 마루에서 벽에 기대시고 종일 앉아계셨습니다. 주님이 오시면 곧 맞이해야지 하시며 흔들림 없이 금식하시며 22일을 기다리셨습니다.
떠나시기 2, 3일 전에 “어머니 아직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하니까 손을 목에다 대시면서 조금 남았다고 하십니다. 오후에 가시는데 그날 새벽에 “이제는 말 다 했소. 더는 못합니다.” 하셨는데 그날 오후 예배 같이 드리고 예배 후 잔잔한 호수와 같이 고요하고 고요하게 그렇게도 기다렸던 아버지의 나라로 육신의 옷을 벗고 부활승천 올라가셨습니다. 할렐루야.
103세 어머니 그분의 삶의 향기
장미꽃에서는 장미의 향이
국화꽃에서는 국화의 향이
들꽃에서는 들꽃의 향이
향기롭습니다.
사람에게도 향이 있습니다.
103년을 사르신 박남금 어머니,
그 분의 향기는 독특합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손을 붙잡고
전도하십니다.
“사람은 순결하게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 믿는 사람은 깨끗하게 살아야 됩니다.
깨끗하게 사셔요. 예수님 잘 믿으셔요.”
불끈 잡은 손을 놓지 않으십니다.
좋은 음식 드시지 못합니다.
모으고 모아서 포장하고 포장하여서
식구들에게 돕는 분들에게 살며시 주십니다.
“감사, 감사 하나님 감사”하시면서...
어머니는 상처 난 것 상한 것들을 구하여서
간식 삼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튼튼한 위장과 몸을 주셔서
감사, 감사 감사뿐이야 아무렇지 않아”
옷 한 벌이십니다.
일상의 옷 한 벌,
예배시의 옷 한 벌,
사계절 한 벌입니다.
“주님께서 옷 두벌 있는 자는 나누어 주라 하셨지
내겐 이 옷이면 족해요. 감사뿐입니다. 감사, 감사”
양말 없습니다.
버선 한 벌입니다.
더러워지면 손수 빨아서 밤에 말려서
아침에 신으십니다.
내의 없습니다.
“죄인이 어떻게 따뜻한 내의를
입고 있을 수 없지”
주님께서 내의를 입으시지 않으셨기 때문에
감히 입지 못하시고 사거나 소유하지 않습니다.
신발도 한 벌입니다.
한 벌의 신발도 사치로 여기십니다.
맨발로 다닐 수 있으면
신발 없이 걸으시는 것을
더 기뻐하시고 감사하실 그 분,
“감사, 감사뿐이야” 하십니다.
솜이불, 없습니다.
여름 홑이불 하나입니다.
사계절 그 분의 보온 덮개로 넉넉합니다.
“더 이상은 사치고 죄야!”
동짓달 긴긴 밤에도 얇은 이불 하나면
천국으로 여기십니다.
요 없습니다.
맨 바닥에 허리를 대고 새우잠을 청합니다.
“주님은 마굿간에서 산에서 기거하셨는데
나는 너무나 부를 누리고 살아!
감사, 감사, 감사뿐이야!”
요를 깔고 편히 누워서 잠 자본적이 없습니다.
늘 새우잠을 자면서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십니다.
장롱을 열어 보니
텅 비었습니다.
옷 한 벌과 홑 이불 하나 베개 하나입니다.
비어 있는 장롱...
103년의 그 분의 삶을 말하여 줍니다.
가슴에 무엇인가가 덜컹 내려 않습니다.
그 분 앞에,
부요해서, 사치해서, 송구하여서, 부끄러워서
서 있을 수 없습니다.
마음으로부터 고개가 숙여집니다.
36년전 이현필 선생님의 신앙 정신을 만나시고부터
가난으로
순결로
순종으로
사랑으로의 삶을
고수하셨습니다.
모든 일에 감사의 고백만 하십니다.
수도 공동체에서
궂은 일을 찾아서 하시고
말없이 없는 듯 사신 어머니,
배푸는 삶이 그 분의 삶의 지표셨습니다.
103세에 손수 빨래를 하십니다.
“힘을 주셨으니 내가 해야지 움직일 수 없을 때
그때 해주게”
하시던 어머니께서
10월11일부터 죽음의 준비를 하셨습니다.
음식을 드시지 않으시고 냉수만 마십니다.
“103년 동안 너무 많이 먹었으니 무슨 미련이 있어
하나님 나라 갈 때에는 깨끗하게 가야지
하나님 나라는 먹는 것으로 가지 않아!
깨끗함으로 가는 곳이야”
스스로 죽음의 길을 선택하시고 여십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르신다 하십니다.
다른 식구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마음이시지요.
“만세 반석 열리니 내가 들어갑니다.”
찬송을 부르시면서
부활 승천하는 때를 기다리신다고 하십니다.
세마포 옷을 입고 주님을 맞이하신다고 하십니다.
속히 즉각 주님 품에
들어가기를 열망합니다.
식구들이 찬송을 부르면
손과 발로 춤을 춥니다.
기쁨과 감사가 충만하십니다.
그렇게 주림과 기도로 씨름하시던 22일은
그 분에게는 천년이었습니다.
힘들어 하시던 어머니께서
"이런 삶도 주님께 감사야,
사나 죽으나 주님의 뜻이지
살아도 감사, 죽어도 감사, 감사 밖에 없어"
입술의 열매는 여전히 감사입니다.
11월2일 19시에
그 분은 주의 나라로
부활 승천하시려
마지막 숨을
고요히, 고요히 쉬시다
아버지께로 돌아가셨습니다.
할렐루야!
그 분의 원대로 세마포 옷을 입혀
드리고 영혼을 위하여 기도를 드립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편히 잠자는 모습...
새 하늘 새 땅 새 예루살렘을
선물 받으시고 영광과 존귀의 관
생명의 의의 면류관을 쓰시고
안식을 누리시고 계시겠지요.
동광원의 어머니 그 분을 보내드리면서
또 가슴이, 삶이 덜컥 합니다.
그 분 어머니가 가신 자리 깨끗하여서
정리할 짐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 분의 앉았던 자리
그 분의 누었던 자리는
너무나 깨끗하여서
식구들의 수고가 없습니다.
우리들을
정신 차리게 합니다.
어머니~~
태초로 편히 가소서, 편히 쉬소서.
기쁨으로, 영광으로~~
아! 103세 어머니 그 분은
동광원의 꽃으로
동광원의 향기로 영원합니다.
...
그 분이 흙으로 돌아가는
오늘,
벌써 그 분이 그립습니다.
2008.11.4 -예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