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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회의료사역 |
3. 1887년
이 한 해 동안 배재학교는 학생수가 63명으로 불어났고, 평균출석인원 40명이 되었다. 이 해에는 벽돌건물인 새 학교의 헌당식이 있었다. 이 헌당식에 와렌(Warren) 감독이 와서 “이 건물은 한국에 주는 미국인들의 선물입니다”라고 말했다. 이 한 해 동안 우리 사업을 보고 간 많은 관리들을 통해 특별히 여학교를 비롯해서 남학교와 병원에 대한 소식이 왕의 귀에 들어가자 왕은 각분야에 자기가 손수 짓고 쓴 이름을 보내 주었다. 그 것은 지금까지도 그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1887년 7월 1일까지 시약소에는 2,000명이 넘는 환자들이 다녀갔고, 마지막 4개월동안은 줄곧 매월 평균 4명의 환자가 있었다. 그 해의 보고문에는 내가 즐겁게 반복하여 회상하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 우리 병원에 베풀어 주신 각별한 친절과 도움으로 인해 장로교 선교위원회 헤론 박사님께 큰 덕을 입었다."
10월 9일에 아펜젤러 형제는 도시 남부에 있는 “베델”이라는 예배당에서 처음으로 공식적인 한국인 예배를 매우 조용하게 주관했다. 이곳에서 그는 개신교 선교사로서는 처음으로 여성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그리고 일주일 후 거기서 2명의 한국 크리스챤들의 도움을 받아 성만찬을 베풀었다. 4월과 5월에 아펜젤러 목사는 첫 내륙여행으로 장기간의 평양여행을 했다.
여기서 노령의 선교사들이 반박할만한 한 가지 제안을 해야겠다. 그리고 나는 이것을 새로 오는 사람들에게 말하겠다. 한국에서 개척이란 말을 더 이상 쓰지말라. 개척이라는 말은 언어를 모르고 통역자도 구할 수 없고 모든 지방의 주요도로를 남북으로 여행해 본 사람도 없을 당시ㅔ 쓰는 말이다. 처음 5년 동안 우리 선교사들은-장로교 형제들은 말할 것도 없고- 서울에서 평양과 의주까지 거듭 여행했고, 서울과 평양에서 원산까지, 서울에서 부산까지 국토를 횡단했다. 평안도와 함경도, 내륙지방도 여행했다. 모든 도와 도청 소재지를 찾아 다. 어떤 선교사는 360명의 치안관 중 70명을 만나보았다. 또 다른 선교사는 여덟개의 도 중 여섯 도를 여행하여 한 해에 1,830마일을 다녔다. 남부지방에 대해서는 다른데 만큼 관심을 가지지 않았지만 한 명 이상의 선교사가 부산까지 여행했다.
우리 모두는 순교에 이르기까지 버틴 영웅주의와 인내에 대해 머리 숙여 답례해야 한다. 그것으로 ls하여 우리는 첫 사전-불어사전-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존 로스 목사를 잊어서는 안 된다. 그는 그의 입문서를 통해 우리에게 한국어 자모(子母)를 가르쳐 주었으며 만주(Manchuria)에서의 성서사업의 결과로 우리에게 조력자를 보내 주었고, 존 매킨타이어 목사와 함께 성서번역을 개척하여 한국어 성서의 기초 작업을 전수해 주었다. 거기에 대해 나는 이 자리에서 변치 않는 감사를 표한다.
이 해는 큰 성장의 해였고, 고무적인 해였다. 크리스마스에 올링거(F. Ohlinger) 목사가 도착하여 학교사업에 종사함으로써 이 해는 마감되었다. 우리 교회에 등록된 성도는 이때에 4명의 학습인이 있었다.
▲ 스크랜튼 필사체 서신(1887) |
4. 1888년
이 해에 이르러 교회사업은 강력한 충고대로 “조심스럽게” 번창해 갔다. 뿐만 아니라 정부도 당시 권세를 쥐고 있던 수구당과 함께 점차 개방되는 것 같았다. 그러나 1888년은 위기의 해가 되고 말았다. 카토릭 교회가 황실을 내려다 보이는 위치에 있다는 이유와 그 밖의 작은 일들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포고령이 떨어졌다. 문제는 그 일로 우리도 황실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는 것이다. 북쪽지방을 여행하고 있던 아펜젤러와 언더우드도 정부의 요청으로 우리 공관으로 소환되었다. 그리고 우리 예배에서 부르던 한국노래가 당분간 금지되었고, 그것이 오늘날까지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러한 상황은 1888년의 “유아소동”에 이르러 절정에 달했다. 이 소동은 당시 사람들이 사진사를 의아하게 보고 외국의사의 진료에 대해 잘 알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를 크게 위협했다. 그들은 벽돌로 된 학교 건물을 아이들 수용소로 생각했던 것 같고 그 때문에 그 건물리 무너진 것이 그들에 의한 것임에 틀림없다. 이 해 여름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에상되는 폭동으로 인해 선교사들이 잠을 못 이루었다. 우리들은 하룻밤을 꼬박 새우고 돌아가며 폭동여부를 살폈다. 지루함이 끝난 것은 미국공사의 친절한 전화 때문이었다. 그는 필요한 경우 우리를 공사관으로 호출하는 신호로 쏘게 되어 있던 총을 소제하다 실수로 잘못 발사되었다고 우리에게 알려왔다. 우리는 그 소리를 듣지도 못했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학교건물이 이 해에 완성되었고 63명의 재적학생수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선교출판사가 가동되었다. 나중에 학교의 공업과목으로 출판활동을 향한 예비적인 발걸음을 내딛었다고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연회(年會)에서 두 명의 본토인을 전도사(Local preacher)로 임명했다. 존스(George H. Jones) 목사가 5월에 우리를 돕기 위해 왔고 아펜젤러 목사와 함께 교육 사역에 종사했다. 우리의 의료사역은 가을에 아오개(아현)에서 시작되었다. 그 해에 환자가 점점 늘어나 두 군데의 시약소에서 한 의사가 돌본 환자 총수가 4,930명에 달했다. 의료비는 얼마 되지는 않지만 모두 우리 병원들과 시약소들이 부담하였다. 이 무료진료는 정부병원과 영국선교부에서도 실행했다. 이 해의 총 입교인은 11명이고 학습인 27명으로 총계 38명이었다.
5. 1889년
이 해의 열 두 달 동안에는 모든 분야의 활동이 매우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82명의 학생이 학교에 등록했다. 이 해에 아펜젤러 형제는 내륙지방으로 장기여행을 했다. 우리의 선교출판 활동이 올링거 형제의 원조로 시작되었다. 그에게 영원히 감사드린다.
맥길 박사(Dr. W.B. McGill)가 들어와 아오개(아현)에서 의료사역에 착수했다. 하워드 양(Miss Melta Howard M.D.)의 도착과 동시에 여성병원이 분리되어 나갔기 때문에 이 해의 환자 총수는 줄어들어 3,939명이 진료를 받았다. 그러나 이 숫자를 보태면 4년 동안의 총 환자수가 12,200명에 달하가 된다.
6. 1890년
1890년은 5년 째 되는 해이다. 이 해에는 한국어 번역사역에 대한 우리의 진지한 노력이 공식적인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는 것이 주목할 만한 점이다. 이 해부터 장정, 강령, 총칙, 주기도문, 10계명 그리고 사도신경이 번역되었다.
성서번역 사역은 더욱 조직적으로 시작되어 우리 선교부의 스크랜튼 의사와 장로교 선교사인 언더우드 목사가 신약성서 전체번역을 위촉받았다. 열심히 일한 뒤에 그 둘은 모두 가족들의 병으로 미국으로 되돌아갔기 때문에 여성의 진료사역이 다시 선교본부병원(Parent Board Hospital) 소관이 되었다.
학교사역은 크게 번창하여 큰 주목을 끙엇다. 재적학생은 60명이었다. 이 해에 올링거 형제가 제물포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이 해를 마감할 때 입교인은 9명, 학습인 36명, 교인 총수 45명이었다.
7. 1891년
잘 아는 대로 이 해에는 불가피한 공백 기간이 처음으로 생겼다. 아이가 몹시 아파 스크랜튼 박사와 가족이 미국으로 되돌아 갔던 것이다. 이전 겨울과 이 해에는 복음화를 위한 특별하고 직접적인 노력을 병원과 시약소에서 기울였다. 책과 팜프렛이 시약소에서만 800명에게 팔리거나 배포되었다.
시약소의 환자들과 입원환자들에게 매일 매일의 조직적인 교육이 실시되엇다. 이 해에도 수많은 환자가 다녀가 총계 7,533명이 되었다. 우리 병실은 언제나 한국 특유의 열병환자들로 가득 차 있었다. 기독교교육은 넓게 씨를 뿌리는 것이다. 환자들은 여러 지역에서 몰려왔기 때문에 의료사역의 열매를 즉각적으로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우리는 자꾸 거기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것이 우리의 소명 밖의 일이라 할지라도 그 관심은 끝까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필자가 미국으로 돌아가기 직전에 병원에서 수년 동안 그를 도왔던 친구가 학교에 있는 친구의 도움을 받아 우리사역에 대한 보고서를 준비했다. 좀 길고 사견이 있긴 하지만-사견을 없애기란 어렵다- 폭 넓은 관심을 불러 일르킨 것이다. 여기에 언급된 책들은 우리 병실이 배재학교 학생들의 기숙사로 쓰일 때 거기에 놔두었던 것들이다. 그의 글은 다음과 같다.
▲ 한용경 스크랜튼과 배재학당 학생들 |
다음의 이야기는 한용경이 그에게 한 얘기이다.
나는 일찌기 외무부에서 영어를 공부했다. 미국에서 온 교사인 아펜젤러가 정동에서 살며 영어를 가르친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가 1년간 공부했다. 선생의 활동과 매너를 볼 때 그리고 그가 의로운 사람인 것과 그의 행위가 바르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마음 속으로 그가 무언가 위대한 교뢰를 배워 따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전에 나는 천주학에 대해 들었으나 그 활동을 보지 못한 상태에서 크게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내가 여러 가지 의구심에 사로잡혀 있을 때 동료 친구들이 “스크랜튼 선생이 우리에게 준 이 신약성서를 봐”라고 말했다. 그 것은 예수교 책이었다. 그들은 모두 “우리는 그것을 배우지 않겠다”고 하며 학교를 떠날 마음을 가졌다. 그러나 나로서는 선생에게서 나쁜 행동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생각을 달리했다. 나는 학생들에게 그 책을 달라고 했다. 그 의미는 잘 모르지만 나쁜 말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보고 좀 알고 싶었다. 나는 아펜젤러 선생과 그 문제에 대해 의논했고, 그는 내게 “신독통론”이라는 책 하나를 주었다. 여러 가지 내용이 있지만 거기에는 공자의 가르침이 들어 있었고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의 업적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이러한 일들과 스크랜튼 선생을 따라다니며 그의 활동을 본 일들로 인해서 나는 그 책들의 의미를 배우기로 결심했다. 그 의사 선생은 밤낮으로 불결한 종기와 위험한 질병을 가진 거지들을 불러 모았다. 마치 육신적인 친구인 것처럼 그들을 모아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생명을 불어 넣어 주었으며 그 밖의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 해에 그가 장님에게 눈 하나를 이식했다는 소식이 널리 알려졌다.
조선 사람들은 모두 “모든 외국인들이 그 의사 선생 같다면 우리는 그들이 말하는 것을 믿겠다”고 한다. 에수께서 능력을 베풀어 널리 병든 자를 고치시고 기적을 행하셨던 것이다! 점차적으로 사람들이 감명을 받아 감사를 표했다. 나도 그들처럼 전에는 굳은 믿음을 갖지 못했다.
그러나 이 일을 보고 내 마음이 내부로부터 움직였다. 나는 잠시라도 하나님의 선하심과 예수의 업적을 잊을까 두렵다. 그러나 내 육신이 약하고 특별히 내게는 성숙한 믿음이 없다. 또 이전의 더러운 습관이 되살아나 많은 죄를 지엇다. 세상에 있는 직업과 사업 중에는 의사가 가장 으뜸인 것 같다. 이것은 내 말이 아니고 세상사람 모두가 그렇게 말한다. 조선에 그 의사선생처럼 강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다면 우리 마음은 자연히 열릴 것이다.
이 해, 즉 1890-91년에 대부분의 외국 약품과 화학 합성물에 대한 한국어 단어집이 편찬되었다. 스크랜튼 의사가 미국으로 떠나게 되자 맥길 박사가 의료사역의 총책임을 맡았다. 그는 상동에서 10명에서 30명까지 참석하는 주일 모임이 시작되었음을 알려 왔다. 영국 선교부의 와일즈 박사께서는 모든 노고를 무릅쓰고 1년 내내 우리 정동병원에서 봉사해 주었다. 거기에 대해서는 전에 감사를 표한 적이 있다.
종로에서의 사역은 아펜젤러 형제에 의해 시작되었다. 굳셀 감독은 제물포에 교회를 창설하고 아펜젤러 형제에게 책임을 맡겼다. 이 해 늦게 홀 목사(W.J. Hall M.D.)가 의료사역을 도우러 왔다.
이 해에 재적 학생은 52명이다. 이 해에 신약성서가 정식으로 학교 커리큘럼에 들어갔고 이 무렵부터 학비가 없는 학생들에 대한 재정보조가 끊겼다. 존스 현제는 평안도 내륙지방으로 700마일 이상의 긴 여행을 하여 고무적인 결과를 얻었다. 이 해에 교인 수는 입교인 15명, 학습인 58명, 합계 73명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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