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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한시감상
「하일전원잡흥 효범양이가체」 이십사수 정약용
[ 夏日田園雜興 效范楊二家體 二十四首 丁若鏞 ]
其七(기칠)
黃犢新生母愛殊(황독신생모애수) 누런 송아지 막 나오니 어미 사랑 남다른데
橫跳豎躍入山廚(횡도수약입산주) 가로 뛰고 세로 뛰며 산속의 인가로 들어가네
不知似許便娟質(부지사허편연질) 모르겠다, 이렇게도 고운 본바탕이
何故他年作笨夫(하고타년작분부) 어찌하여 후일엔 거친 것이 되는지
〈감상〉
이 시는 여름날 전원의 잡다한 흥취를 가지고 송나라 범성대(范成大)와 양만리(楊萬里)의 체를 본받아 지은 것으로, 시골 농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상적인 풍경의 한 단면을 잘 묘사하고 있다.
누런 송아지가 어미 배 속에서 막 태어나니, 어미 소는 핥아주며 남다른 사랑을 베푼다. 얼마 지나자, 그 송아지는 귀엽게도 천방지축(天方地軸)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다 산속에 있는 농가의 부엌으로 뛰어 들어간다. 그런데 저렇게도 귀엽던 송아지가 어찌하여 훗날 무지 큰 소가 되는지 모르겠다.
〈주석〉
〖犢〗 송아지 독, 〖跳〗 뛰다 도, 〖豎〗 세로 수, 〖廚〗 부엌 주, 〖似許(사허)〗 =여차(如此), 〖笨〗 거칠다 분
각주
1 정약용(丁若鏞, 1762, 영조 38~1836, 헌종 2): 호는 다산(茶山)·사암(俟菴)·여유당(與猶堂). 근기(近畿) 남인(南人) 가문 출신으로, 청년기에 접했던 서학(西學)으로 인해 장기간 유배생활을 하였다. 그는 이 유배 기간 동안 자신의 학문을 더욱 연마해 육경사서(六經四書)에 대한 연구를 비롯해 일표이서(一表二書, 『경세유표(經世遺表)』·『목민심서(牧民心書)』·『흠흠신서(欽欽新書)』) 등 모두 500여 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고, 이 저술을 통해서 조선 후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이익(李瀷)의 학통을 이어받아 발전시켰으며, 각종 사회 개혁사상을 제시하여 ‘묵은 나라를 새롭게 하고자’ 노력하였다.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역사 현상의 전반에 걸쳐 전개된 그의 사상은 조선왕조의 기존 질서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혁명론’이었다기보다는 파탄에 이른 당시의 사회를 개량하여 조선왕조의 질서를 새롭게 강화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조선에 왕조적 질서를 확립하고 유교적 사회에서 중시해 오던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이념을 구현함으로써 ‘국태민안(國泰民安)’이라는 이상적 상황을 도출해 내고자 하였다.
「용만객영」 신흠
[ 龍灣客詠 申欽 ]
九日遼河蘆葉齊(구일료하로엽제) 구월 구일 요하에 갈댓잎 가지런한데
歸期又滯浿關西(귀기우체패관서) 돌아갈 기약 또다시 패관 서쪽에 묶였네
寒沙淅淅邊聲合(한사석석변성합) 찬 모래 서걱거려 변방 소리에 합해지고
短日荒荒鴈翅低(단일황황안시저) 짧은 해 어둑한데 기러기 날개 나직하네
故國親朋書欲絶(고국친붕서욕절) 고국의 친척과 벗들 서신이 끊길 듯하고
異鄕魂夢路還迷(이향혼몽로환미) 타향의 꿈속에는 고향길이 아련하네
愁來更上譙樓望(수래갱상초루망) 시름겨워 다시금 초루 올라 바라보니
大漠浮雲易慘悽(대막부운역참처) 큰 사막의 뜬구름에 쉽게도 서글퍼지네
〈감상〉
이 시는 1594년 가을에 주청사(奏請使) 윤근수(尹根壽)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사신을 가면서 압록강을 건너 요동에 들어서서 느낀 회포를 노래한 것이다.
때는 9월 9일 중양절(重陽節) 요하에 국화꽃은 보이지 않고 갈댓잎만 가지런한데, 돌아갈 날은 기약이 없어 또다시 패관 서쪽에 묶였다. 날씨가 차 모래바람은 서걱거리며 날아 변방 소리에 합해지고, 날이 짧아 해가 져서 벌써 어둑한데 기러기가 나직이 날고 있다. 이제 요동을 지나 중국으로 들어갈 터이니, 고국의 친척과 벗들과의 서신이 끊어질 것이고, 타향의 꿈속에는 고향길이 아련할 것이다. 시름에 겨워 다시금 망루(望樓)에 올라 저 멀리 바라보니, 끝없이 펼쳐진 큰 사막의 뜬구름에 마음이 너무도 쉽게 서글퍼진다(전란(戰亂)에 싸인 조선을 두고 중국으로 가고 있으니, 서글픈 마음이 드는 것이다).
이 시에 대해 홍만종(洪萬宗)은 『소화시평』에서, “현옹 신흠은 어려서부터 문장을 지어 곧 스스로 일가를 이루었다. 평하는 사람이 간혹 그를 낮게 평가하나, 또한 지나치다. 그의 「용만」 시에, ······농염하고 노성하여 가볍게 볼 수 없다(申玄翁欽(신현옹흠) 自少爲文章(자소위문장) 便自成家(편자성가) 評家或卑之(평가혹비지) 亦過矣(역과의) 其龍灣詩曰(기룡만시왈) ······濃厚老成(농후노성) 不可輕也(불가경야)).”라 평하고 있다.
〈주석〉
〖龍灣(용만)〗 의주(義州). 〖遼河(요하)〗 옛 이름은 구려하(句驪河)인데, 길림(吉林) 살합령(薩哈嶺)에서 발원하는 동요하(東遼河)와 내몽골(內蒙古) 백차산(白岔山)에서 발원하는 서요하가 요령(遼寧) 창도현(昌圖縣) 고산둔(靠山屯) 부근에서 합쳐진 다음에 요하라고 불린다. 그곳에서 서남쪽으로 꺾어져 반산만(盤山灣)을 통해 바다로 들어간다. 그러나 여기서는 요동, 곧 만주지방의 강이란 뜻으로 쓰인 듯함.
〖蘆〗 갈대 로, 〖浿關(패관)〗 패수(浿水)의 관문. 곧 청천강(淸川江) 일대를 가리킴.
〖淅淅(석석)〗 물체가 부딪쳐 움직이는 소리.
〖邊聲(변성)〗 오랑캐족이 부르는 노래를 뜻하기도 하는데, 여기서는 변방 진영 군사들의 소리를 말한 듯함.
〖荒荒(황황)〗 쓸쓸한 모습. 〖翅〗 날개 시, 〖譙樓(초루)〗 성문 위의 망루(望樓). 일반적으로 고루(鼓樓)라 부름. 〖大漠(대막)〗 몽골 고원(高原)의 큰 사막. 한해(瀚海)·대적(大磧)이라 부르기도 함.
〖慘〗 애처롭다 참, 〖悽〗 슬퍼하다 처
각주
1 신흠(申欽, 1566, 명종 21~1628, 인조 6): 이정구(李廷龜)·장유(張維)·이식(李植)과 함께 월상계택(月象谿澤)이라 통칭되는 조선 중기 한문사대가(漢文四大家)의 한 사람으로, 호는 상촌(象村). 7세 때 부모를 잃고 장서가(藏書家)로 유명했던 외할아버지 밑에서 자라면서 경서와 제자백가를 두루 공부했으며 음양학(陰陽學)·잡학(雜學)에도 조예가 깊었다. 개방적인 학문태도와 다원적 가치관을 지녀, 당시 지식인들이 주자학(朱子學)에 매달리고 있었던 것과는 달리 이단(異端)으로 공격받던 양명학(陽明學)의 실천적인 성격을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문학론에서도 시(詩)는 형이상자(形而上者)이고 문(文)은 형이하자(形而下者)라고 하여 시(詩)와 문(文)이 지닌 본질적 차이를 깨닫고 창작할 것을 주장했다. 특히 시(詩)에서는 객관 사물인 경(境)과 창작주체의 직관적 감성인 신(神)의 만남을 창작의 주요 동인으로 강조했다. 시인의 영감, 상상력의 발현에 주목하는 이러한 시론(詩論)은 당대 문학론이 대부분 내면적 교화론(敎化論)을 중시하던 것과는 구별된다. 선조(宣祖)에게 뛰어난 문장력을 인정받아 대명(對明) 외교문서의 작성, 시문(詩文)의 정리, 각종 의례문서의 제작에 참여했다.
「십월망우후」 최립
[ 十月望雨後 崔岦 ]
一年霖雨後西成(일년림우후서성) 일 년 장맛비 내린 뒤 가을이 왔다 하여
休說玄冥太不情(휴설현명태부정) 현명이 너무 무정하다 말하지 말라
正叶朝家荒政晩(정협조가황정만) 늑장만 부리는 조정의 구황(救荒) 정책과 똑같나니
飢時料理死時行(기시요리사시항) 굶주릴 때 처리할 일 죽을 때 시행하네
〈감상〉
이 시는 1587년 통진(通津)에 은거하던 때 시월 보름 뒤에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지은 것으로, 현실에 대한 비판 의식을 볼 수 있는 시이다.
초겨울인데 일 년 내내 장맛비가 내린 뒤에 가을이 와서, 곡식이 제대로 여물지를 못했다. 그렇다고 하늘을 너무 무정하다 말하지 말라. 그것보다는 늑장만 부리는 조정의 구황(救荒) 정책으로 말미암아 굶주릴 때 처리할 일을 죽을 때 시행하여 수많은 백성이 죽어가고 있는 것을 원망해야 한다.
홍만종(洪萬宗)은 『소화시평』에서, “최동고의 「십월우」 시에, ······라고 했는데, 조정에서 정치를 도모하는 사람이 스스로 경계로 삼아야 한다(崔東皐十月雨詩曰(최동고십월우시왈) 一年霖雨後西成(일년림우후서성) 休說玄冥太不情(휴설현명태부정) 正叶朝家荒政晩(정협조가황정만) 飢時料理死時行(기시료리사시행) 訏謨廊廟者(우모랑묘자) 可以自警(가이자경)).”라 평하고 있다.
〈주석〉
〖望〗 보름 망, 〖霖〗 장마 림, 〖玄冥(현명)〗 겨울 귀신의 이름이다. 『예기』 「월령(月令)」에 “겨울철의 상제(上帝)는 전욱(顓頊)이요, 그 귀신은 현명이다.”라는 기록이 보임. 〖叶〗 맞다 협, 〖荒政(황정)〗 흉년에 백성을 구제하는 정치. 〖料理(요리)〗 처리함.
각주
1 최립(崔岦, 1539, 중종 34~1612, 광해군 4): 호는 간역(簡易)·동고(東皐). 최립은 빈한한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한문사대가(漢文四大家)에 비견되는 당대 일류의 문장가로 인정을 받아 팔대문장가(八大文章家, 백광홍(白光弘), 송익필(宋翼弼), 이이(李珥), 이산해(李山海), 윤탁연(尹卓然), 최경창(崔慶昌), 이순인(李純仁))의 한 사람이 되었으며, 중국과의 외교문서를 많이 작성하였다. 중국에 갔을 때에 왕세정(王世貞)을 만나 문장을 논하였으며, 그곳의 학자들로부터 명문장가(名文章家)라는 격찬을 받았다. 그의 문(文)과 차천로(車天輅)의 시(詩)와 한호(韓濩)의 서(書)를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고 일컬었다. 그는 시보다 문으로 이름이 높았으나, 시에서도 소식(蘇軾)과 황산곡(黃山谷)을 배워 풍격이 호횡(豪橫)하고 기건(奇健)하며, 질치심후(質致深厚)하고 성향(聲響)이 굳세어 금석에서 나오는 소리 같다는 평을 들었다. 최립의 문장은 일시를 풍미하였으나, 의고문체(擬古文體)에 뛰어났기 때문에 문장이 평이한 산문을 멀리하고 선진문(先秦文)을 모방하여 억지로 꾸미려는 경향이 있었다. 글씨에도 뛰어나 송설체(宋雪體)에 일가를 이루었다. 문집으로는 『간이집(簡易集)』이 있다.
「용호」 김득신
[ 龍湖 金得臣 ]
古木寒雲裏(목한운리) 고목은 찬 구름 속에 있고
秋山白雨邊(추산백우변) 가을 산에 소나기 희뿌였네
暮江風浪起(모강풍랑기) 저물어 가는 강에 풍랑이 일어
漁子急回船(어자급회선) 어부가 급히 배를 돌리네
〈감상〉
이 시는 용산에 있는 정자에서 바라본 한강의 모습을 그림처럼 잘 묘사한 시이다.
서늘한 구름이 떠 있는 하늘 아래 오래된 고목이 서 있다. 가을이라 단풍으로 물든 산에는 희뿌연 소나기가 지나가고 있다. 비가 내리는 중이라 저물어 가는 강물에도 풍랑이 이니, 사공은 급히 배를 돌려 집으로 돌아간다.
소식(蘇軾)이 왕유(王維)의 시(詩)를 보고 칭찬했다는 ‘시중유화(詩中有畵)’라는 말이 어울리는 시이다. 이 시에 대해 홍만종(洪萬宗)은 『소화시평(小華詩評)』에서, “백곡 김득신은 타고난 재주가 매우 노둔하였는데, 많은 독서로써 밑바탕을 튼튼히 하여 노둔함을 벗어나 재주 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의 「용산」시 ······일시에 회자되었다. 그런데 「목천도중」에는 미치지 못한다.
‘짧은 다리 너머 넓은 평원에 석양이 지니, 앞산에 새가 자려 드는 바로 그때로구나. 내 건너 어떤 사람인지 젓대를 부는데, 옛 성 저편의 매화는 다 져버렸네.’라는 이 시는 당시에 매우 핍진하다(金栢谷得臣(김백곡득신) 才稟甚魯(재품심로)多讀築址(다독축지) 由鈍而銳(유둔이예) 其龍山詩曰(기룡산시왈) ······一時膾炙(일시회자) 然不若木川道中詩(연불약목천도중시) 斷橋平楚夕陽低(단교평초석양저) 政是前山宿鳥棲(정시전산숙조서) 隔水何人三弄笛(격수하인삼롱적) 梅花落盡故城西之句(화락진고성서지구) 極逼唐家(극핍당가)).”라 하여, 당시에 이 시가 널리 회자되었음을 말하고 있으며, 시골의 글방에서는 당음(唐音) 속에 써 넣고서 아이들에게 가르쳤다고 한다.
그리고 안정복(安鼎福) 역시 『순암집(順菴集)』 「상헌수필하(橡軒隨筆下)」에서 이 시에 대해, “또 백곡 김득신이 있으니 자가 자공(子公)인데, 성품이 어리석고 멍청하였으나 글 읽기만은 좋아하여 밤낮으로 책을 부지런히 읽었다. 무릇 고문은 만 번이 되지 않으면 중지하지 않았는데, 「백이전(伯夷傳)」을 특히 좋아하여 무려 1억 1만 8천 번을 읽었기 때문에 그의 소재(小齋)를 ‘억만재(億萬齋)’라 이름하였으며, 문장으로 이름을 드날렸다.
효종(孝宗)이 일찍이, ······라고 한 그의 시 「용호음(龍湖吟)」 한 절구를 보고 이르기를, ‘당인(唐人)에게 부끄럽지 않다.’ 하였다(又有金柏谷得臣(우유김백곡득신) 字子公(자자공) 性糊塗魯質(성호도로질) 惟好讀書(유호독서) 晝夜勤讀(주야근독) 凡於古文(범어고문) 不至萬遍(부지만편) 不止(부지) 尤好伯夷傳(우호백이전) 讀至一億一萬八千遍(독지일억일만팔천편) 故名其小齋曰億萬(고명기소재왈억만) 以文章鳴(이문장명) 孝廟嘗見其龍湖吟一絶(一絶효묘상견기룡호음일절) 古木寒烟裏(고목한연리) 秋山白雨邊(추산백우변) 暮江風浪起(모강풍랑기) 漁子急回船之詩曰(어자급회선지시왈) 無愧唐人(무괴당인)).”라 말하고 있다.
〈주석〉
〖龍湖(용호)〗 『소화시평』에는 「용산(龍山)」으로 되어 있음.
각주
1 김득신(金得臣, 1604, 선조 37~1684, 숙종 10):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자공(子公), 호는 백곡(栢谷)·구석산인(龜石山人). 1662년(현종 3)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가선대부에 올랐으며 안풍군에 봉해졌다. 정두경(鄭斗卿)·홍만종(洪萬宗) 등과 친하게 지내면서 시와 술로 풍류를 즐겼다. 평생을 가난한 시인으로 살았으며, 바보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등장할 정도로 노둔한 사람의 대명사였다. 예로부터 학문을 많이 쌓은 사람은 책읽기를 많이 하여 그러한 경지에 이르렀다고 생각하고 책읽기에 힘썼는데, 특히 「백이전(伯夷傳)」을 가장 좋아하여 1억 1만 3,000번이나 읽어 자신의 서재를 ‘억만재(億萬齋)’라 이름 짓기도 했다. 또한 당시 사람들이 과거에만 열중하다 보니 시의 개성이나 예술성을 무시한 채 시가 오직 입신양명(立身揚名)의 수단으로 쓰이고 있음을 비판했다. 특히 오언·칠언절구를 잘 지었으며 시어(詩語)와 시구(詩句)를 다듬는 것을 중요시했다. 문집인 『백곡집(栢谷集)』에 시 416수가 전하며, 홍만종(洪萬宗)의 『시화총림』에 실려 있는 그의 시화집인 『종남총지』는 비교적 내용이 전문적이고 주관이 뚜렷하게 나타나 있어 시학연구(詩學硏究)의 좋은 자료가 된다. 영감(靈感)과 직관(直觀)을 통해 자연의 생명을 조화롭게 읊은 시가 으뜸이라고 했다.
「채련곡 차대동누선운」 이달
[ 采蓮曲 次大同樓船韻 李達 ]
蓮葉參差蓮子多(연엽참치련자다) 연잎은 들쭉날쭉 연밥도 많은데
蓮花相間女郞歌(연화상간녀랑가) 연꽃을 사이에 두고 아가씨들 노래하네
來時約伴橫塘口(내시약반횡당구) 돌아갈 때 짝과 횡당 입구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辛苦移舟逆上波(신고이주역상파) 힘써 배를 저어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네
〈감상〉
이 시는 대동강 누선의 시(詩)인 정지상(鄭知常)의 시에 차운한 연밥을 따는 사랑 노래이다.
크고 작은 연잎이 늘어선 가운데 연밥이 많이도 달려 있다. 그 연꽃들 사이로 연밥을 따는 아가씨들이 연밥을 따면서 사랑노래를 부르고 있다(채련곡(採蓮曲)의 연(蓮)은 연(戀)과 동음(同音)으로 사랑 노래임). 연밥을 따고 집으로 돌아갈 땐 횡당 입구에서 임과 만나기로 하였기에 힘써 배를 저어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 이 시에 대해 『임하필기』에서는 “악부의 최고 명작으로 일컬어진다(칭위악부제일(稱爲樂府第一)).”라고 언급하고 있다.
이달(李達)은 김만중(金萬重)의 『서포만필(西浦漫筆)』에서 “본조의 시체는 네다섯 번 변했을 뿐만 아니다. 국초에는 고려의 남은 기풍을 이어 오로지 소동파(蘇東坡)를 배워 성종, 중종 조에 이르렀으니, 오직 이행(李荇)이 대성하였다. 중간에 황산곡(黃山谷)의 시를 참작하여 시를 지었으니, 박은(朴誾)의 재능은 실로 삼백 년 시사(詩史)에서 최고이다. 또 변하여 황산곡과 진사도(陳師道)를 오로지 배웠는데, 정사룡(鄭士龍)·노수신(盧守愼)·황정욱(黃廷彧)이 솥발처럼 우뚝 일어났다. 또 변하여 당풍(唐風)의 바름으로 돌아갔으니, 최경창(崔慶昌)·백광훈(白光勳)·이달(李達)이 순정한 이들이다.
대저 소동파(蘇東坡)를 배워 잘못되면 왕왕 군더더기가 있는데다 진부하여 사람들을 만족시키지 못하고 강서시파(江西詩派)를 배운 데서 잘못되면 더욱 비틀고 천착하게 되어 염증을 낼만 하다(本朝詩體(본조시체) 不啻四五變(불시사오변) 國初承勝國之緖(국초승승국지서) 純學東坡(순학동파) 以迄於宣靖(이흘어선정) 惟容齋稱大成焉(유용재칭대성언) 中間參以豫章(중간삼이예장) 則翠軒之才(칙취헌지재) 實三百年之一人(실삼백년지일인) 又變而專攻黃陳(우변이전공황진) 則湖蘇芝(칙호소지) 鼎足雄峙(정족웅치) 又變而反正於唐(우변이반정어당) 則崔白李(칙최백이) 其粹然者也(기수연자야) 夫學眉山而失之(부학미산이실지) 往往冗陳(왕왕용진) 不滿人意(불만인의) 江西之弊(강서지폐) 尤拗拙可厭(우요졸가염)).”라고 언급한 것처럼, 당풍(唐風)의 영향을 받았다.
〈주석〉
〖參差(참치)〗 들쭉날쭉한 모양. 〖伴〗 짝 반
각주
1 이달(李達, 1539 ~ 1612): 본관 홍주(洪州). 자는 익지(益之)이고, 호는 손곡(蓀谷)이다. 원주 손곡(蓀谷)에 묻혀 살았기에 호를 손곡이라고 하였다. 이수함(李秀咸)의 서자이다. 최경창(崔慶昌), 백광훈(白光勳)과 함께 당시(唐詩)에 뛰어나 삼당시인(三唐詩人)으로 불렸다. 문장과 시에 능하였고, 서자 출신이어서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고 제자 교육에 일생을 바쳤다. 일찍부터 문장에 능하고 글씨에 조예(造詣)가 깊었다. 그러나 어머니가 천인(賤人) 신분(身分)이었기에 서얼(庶孼)로서의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그 능력 또한 쉽사리 세상에서 빛을 볼 수가 없었다. 김만중(金萬重)이 “손곡(蓀谷)의 작품 「별리예장(別李禮長)」은 조선을 통틀어서 오언절구(五言絶句)의 최고작”이라고 논평할 만큼 시재(詩才)와 문장력이 뛰어났기에 선조 때 사역원(司譯院)의 한리학관(漢吏學官)이 되기도 했으나, 자신의 뜻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곧 사직하고는 향리에 은거했다. 손곡(蓀谷)은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옥봉(玉峯) 백광훈(白光勳)과 함께 뜻을 모아 시사(詩社)를 조직한 후, 고죽(孤竹)과 옥봉(玉峯)의 스승인 사암(思庵) 박순(朴淳)을 만나 당대(唐代)의 여러 시집(詩集)들을 접하게 되면서 시(詩)의 정법(正法)이 당시(唐詩)에 있음을 깨닫고 당시인(唐詩人)의 시체(詩體)를 탐구하는 한편, 율시(律詩)와 절구(絶句)를 지어 내기 시작해 5년 동안 오로지 시법의 연구에만 몰두한 결과, 신라와 고려를 통틀어 당시(唐詩)에서 아무도 손곡(蓀谷)을 따를 수 없다는 평이 사람들 사이에 회자(膾炙)되면서 고죽(孤竹)과 옥봉(玉峯)을 제치고 삼당시인(三唐詩人)의 일인자로 꼽히게 되었다. 한편, 손곡(蓀谷)의 명성과 고결한 인품에 대한 소문을 듣고 당시의 명문 귀족이었던 초당(草堂) 허엽(許曄)이 자식들인 허초희(許楚姬)와 허균(許筠)을 보내 제자로 삼아 줄 것을 부탁하자, 손곡(蓀谷)은 그들 남매에게 평민시인으로서의 자신의 이상을 전수시켰는데, 훗날 허균이 서자(庶子)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홍길동전(洪吉童傳)』을 쓴 것이라든지, 적서(嫡庶) 타파(打破)를 주장한 것이라든지, 양반 사회에 대한 반항적인 자세와 함께 풍자적이면서도 서민 생활을 옹호했던 허난설헌(許蘭雪軒)의 시 정신은 손곡(蓀谷)의 정신적 영향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손곡(蓀谷)은 허균(許筠)이 반역죄로 참형당했던 그해에 역시 57세의 나이로 한 많은 생을 마쳤다.